聲東擊西 | 22. 동에서 소리를 내고 서를 친다.
동궁의 주방은 갖춰져 있긴 했지만 먹을 만한 것이 있지는 않았다. 봉황이 주방 옆에 있는 곳간에 들어가더니 찬합을 들고나오며 말했다.
“옥산에서 보낸 복숭아와 나의 영지에서 보낸 양분(涼粉)이 있는데 드셔 보시겠어요?”
고상이 찬합을 받아 내려놓고 열어 보며 말했다.
“양분이 뭐에요? 처음 들어봐요.”
봉황이 주방을 여기저기 둘러보더니 흑당을 찾아 물에 녹이고 양분을 작게 잘라 넣고 말했다.
“선초(仙草)로 만든 하얀 묵인데 과일과 함께 달게 먹으면 아주 맛이 좋습니다.”
그리고 그릇을 고상에게 건넸다. 고상이 근처에서 숟가락을 찾아 그릇을 들어 봉황에게 인사하고 양분탕을 먹었다. 고상이 한입 먹어보더니 봉황을 보고 활짝 웃으며 말했다.
“달아요. 맛있어요.”
봉황이 고상에게 먹일 것을 더 찾으며 말했다.
“맛있다니 다행입니다.”
양조가 봉황에게 다가가 말했다.
“주방일을 할 나흘마(癩疙痲)를 데려올까요?”
봉황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섬여에게 부탁해야 하겠어요.”
양조가 봉황에게 포권하여 인사하고 주방을 나갔다.
고상이 다 먹은 양분탕을 내려놓고 봉황을 보고 말했다.
“봉황께서는 안 드십니까?”
봉황이 고상에게 다가가 말했다.
“제가 다스리는 지역은 단 음식을 즐기는데 저는 단 음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요.”
고상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우리 유서도 단 것을 안 좋아해요. 나는 맛있어서 좋은데.”
봉황이 고상 옆에 앉으며 말했다.
“저는 죽순을 좋아해요. 제가 사는 남쪽 단혈궁(丹穴宮)에는 대나무를 많이 심었답니다.”
고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대나무 통에 죽순을 넣고 밥을 지으면 정말 맛있어요. 저도 좋아해요. 백택의 재실 뒤쪽에 대나무 숲이 있거든요. 죽순을 캐지 않으면 너무 빽빽해져서 단양절 오기 전에 죽순을 캐요. 죽순 캐는 것은 힘들지만 그래도 죽순은 맛있어요.”
봉황이 고상을 보고 말했다.
“죽순을 직접 캐셨습니까?”
고상이 찬합에 들어 있는 복숭아를 이리저리 고르더니 말했다.
“천교랑 보살이랑 캤어요. 주요는 도와주지도 않으면서 이래라저래라 시키기만 하고. 그런데 정말 신기하게 주요가 파라고 하는 데는 죽순이 있어요.”
고상은 복숭아를 손을 닦더니 한입 베어 물었다. 봉황이 웃으며 말했다.
“죽순은 지나치면 금방 자라니까요.”
고상이 말했다.
“너무 자라서 질긴 것은 말려서 차로 마시는데 알싸해서 맛있어요.”
봉황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주요가 태평호에서 잘 지냈다니 다행입니다.”
고상이 자리에서 일어나 봉황의 눈치를 보며 찬합에 음식을 챙기고 말했다.
“여기… 이 양분탕 우리 유서 줘도 될까요?”
봉황이 고상의 소매를 잡고 그녀를 곳간으로 이끌며 말했다.
“이리 와서 보고 먹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드세요. 양조가 나흘마를 데리고 오면 뭐든 해달라고 하세요.”
고상이 소매를 들어 다소곳이 인사하고 말했다.
“봉황. 감은(感恩)하옵니다.”
봉황이 고상의 팔을 잡아 일으키며 말했다.
“화사. 제가 나중에 부탁할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어요. 그러니 무슨 일이 있으면 저에게 말씀하세요. 제가 돕겠습니다.”
고상이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봉황을 보고 말했다.
“어… 봉황께서 저에게요?”
봉황은 고상에게 미소 짓고 고개를 끄덕였다. 동궁의 외실로 누군가 들어오는 기척이 났다. 봉황이 몸을 돌려 외실로 향하며 말했다.
“동궁에 계시는 동안 태평호에 계신 것처럼 편히 지내셨으면 좋겠습니다.”
고상이 봉황을 따라 외실로 나가며 말했다.
“감은하옵니다.”
봉황이 외실로 들어온 읍강을 보고 인사했다.
“린자(麟姉)!”
읍강이 봉황과 고상을 발견하고 말했다.
“안시. 오랜만이군.”
이마에 하얀 뿔이 달린 읍강은 은은하게 빛나는 하얀 옷을 입은 아름다운 여인이었는데 고상을 보고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처음 보는 화사구나.”
고상은 얼른 소매를 들어 읍강에게 인사했다.
“고상. 기린을 뵙습니다.”
읍강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 네가 수원이 데려온 화사구나.”
봉황이 읍강을 보고 물었다.
“벌써 수원을 만나셨습니까?”
읍강이 정각의 자리를 권하며 말했다.
“그래. 원군께 청할 것이 있다 하여 나는 좀 쉬러 왔다.”
봉황이 읍강의 시중을 들며 말했다.
“도예께서는 안녕하십니까?”
읍강이 미간을 찡그리고 말했다.
“많이 좋아지셨어. 나와 희발을 기억하시니 얼마나 다행이야.”
봉황이 읍강 옆에 앉으며 말했다.
“요즘같이 하늘이 어수선할 때 또 말썽이 생길까 걱정입니다. 자리가 다 무엇이라고 그러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읍강이 봉황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우리야 이 자리에 오래 앉아 있었으니 미련이 없지만 다른 이는 또 모를 일이지.”
봉황이 고개를 흔들며 한숨을 쉬었다. 고상이 읍강과 봉황의 눈치를 보다 자리에서 슬그머니 일어나 소매를 들어 공수하고 말했다.
“기린, 봉황. 저는 배가 고파서 요기를 하러 가보겠습니다. 편히 말씀 나누십시오.”
읍강이 고상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그래. 물러가 보아라.”
고상은 고개를 조아려 인사하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고상이 곳간에 있는 식자재를 이리저리 둘러보는 동안 양조가 나흘마를 데리고 돌아왔다. 황토색 옷을 입은 어멈이 양조에게 말했다.
“식사를 준비할까요?”
양조가 고상을 보고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사람이 먹는 것으로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나흘마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대답했다.
“네. 어디서 드시겠습니까?”
양조가 정각에 앉아 있는 읍강을 발견하고 한참 생각하더니 답했다.
“객실에 부탁드립니다. 너무 많이 준비하지 말고 서넛이 먹을 정도로 부탁드립니다.”
나흘마가 고개를 조아렸다. 양조가 고상에게 다가가 물었다.
“린자께서 언제 오셨나?”
고상이 정각을 힐끔 보고 말했다.
“방금 오셨어요. 주인께서 원군을 뵈러 가셨습니까?”
양조가 고상을 내려보고 눈을 굴리더니 말했다.
“아마.”
고상이 찬합을 들고 온객행과 주자서가 머무는 객실로 향하며 물었다.
“양조께서도 같이 드실래요?”
양조가 고상을 보고 물었다.
“무엇을?”
고상이 양조의 소매를 잡고 객실로 이끌며 말했다.
“에이! 그냥 같이 드세요. 봉황께서 해 주신 양분탕 진짜 맛있었어요.”
온객행과 주자서가 머무는 객실은 기척 없이 아주 조용했다. 양조는 고상이 내려놓은 찬합을 탁상 위에 올려 두고 열어 보았다. 옥산에서 보낸 천도복숭아 사이에 양분과 흑당을 담은 그릇이 들어 있었다. 작게 웃은 양조는 자리에 앉아 고상을 보았다. 고상은 객실에 있는 평상과 침상을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옷이 걸려있는 병풍 뒤로 거침없이 걸어가 소리를 질렀다.
“파사! 유서! 일어나 밥 먹자!”
곧 온객행의 볼멘소리가 들리고 옷을 걸치는 소리가 들렸다. 한동안 옷을 입는다고 시끄럽더니 고상이 주자서를 데리고 나오며 말했다.
“유서. 피곤해서 그래? 어디 아파?”
주자서가 고개를 작게 흔들고 손을 들어 눈을 비비고 말했다.
“제가 얼마나 잤습니까?”
뒤에 온객행이 둘을 뒤따라 나오며 말했다.
“아직 좀 더 자도 괜찮다니까. 우리는 손님이잖아.”
고상이 온객행을 쏘아보며 말했다.
“우리 유서 잘 먹인 거 맞아? 태평호에 있었을 때와 다른 것 같아!”
온객행이 대야에 물을 받으며 말했다.
“그래? 먹이는 건 조금 걸렀어도 재우는 것은 따뜻하게 잘 재웠는데.”
고상이 온객행이 가져온 대야에 수건을 적셔 주자서의 얼굴을 닦아주려고 하자 주자서가 손을 들어 거절하더니 세수를 하고 손을 닦았다. 고상은 주자서가 씻은 물을 다시 온객행에게 건네고 주자서를 탁상에 있는 자리에 앉혔다.
“유서. 이제 내가 있으니까 걱정 마. 우리 아기. 많이 먹어.”
주자서는 고상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아상. 저는 정말 괜찮아요. 아상께서는 드셨어요?”
고상이 찬합에서 그릇을 꺼내 양분을 자르며 말했다.
“아이참! 같이 먹으려고 가져왔지. 먹어보고 흑당을 넣으면 돼. 그게 싫으면 복숭아를 잘라서 넣어 줄게. 과일은 괜찮지?”
주자서가 그릇에 담긴 흑당을 보고 아연하여 말했다.
“흑당이요? 이 귀한 것을….”
고상이 주자서에게 양분이 담긴 그릇을 건네며 말했다.
“봉황께서 주셨어. 맛있어 얼른 먹어봐.”
온객행도 대야에 얼굴을 씻었는지 맑은 얼굴로 주자서 옆에 앉았다. 온객행이 주자서가 들고 있는 그릇을 보고 말했다.
“귀한 것이라도 유서는 단 것을 좋아하지 않으니까. 유서. 내가 죽을 끓일까?”
주자서는 대답 없이 숟가락을 들어 양분을 먹었다. 물컹한 식감이 신기하여 주자서가 연거푸 입에 넣자 고상이 깎은 복숭아를 그릇에 넣어 주었다.
“복숭아랑 먹어 봐. 원래 과일이랑 먹는 거래.”
고상은 그릇을 더 꺼내서 양조와 온객행 분의 그릇에도 복숭아와 양분을 잘라 넣었다. 양조가 손사래 치며 말했다.
“화사. 나는 괜찮으니 어서 드시게.”
고상이 그릇을 건네고 말했다.
“드셔보세요. 진짜 맛있어요.”
양조는 그릇을 들고 음식을 먹는 온객행과 주자서를 보다가 숟가락을 들어 양분을 먹어 보았다. 얼마 만에 먹는 음식인지 기억나지 않았지만 달고 맛있었다.
요기를 하고 찬합과 그릇을 치운 고상과 주자서는 꼭 붙어서 객실의 여기저기를 구경했다. 온객행은 그것이 마음에 안 들어 조금 토라진 상태였다. 별실에 걸린 사령의 편액을 구경하며 고상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주자서는 온객행이 알고 있는 주자서가 아니라 조금 낯설기까지 했다. 주자서가 고상에게 객실 곳곳에 놓인 사령의 문양을 보고 이야기를 해주면 고상이 그 말에 호응하는 식이다. 주자서가 말했다.
“봉황은 상서로운 신수로 산짐승을 드시지 않고 오동나무가 아니면 쉬지 않으시며 대나무 열매가 아니며 먹지 않고, 예천이 아니면 마시지 않는다 하였습니다.”(4)
고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 봉황께서 죽순을 좋아한다고 하셨어. 태평호에 돌아가면 가을이 오기 전에 죽순을 좀 더 캐자.”
주자서가 고상을 보고 물었다.
“봉황께서 죽순을 좋아하십니까?”
고상이 주자서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응. 단혈궁에 많이 심으셨데.”
주자서가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
“그 궁궐은 오동나무로 지었을까요?”
고상이 어깨너머로 밖으로 나가는 장지문을 보고 말했다.
“내가 가서 물어보고 올까?”
주자서도 고개를 돌려 장지문을 보더니 고개를 흔들고 말했다.
“아니요.”
고상이 주자서에게 가까이 몸을 붙이고 말했다.
“나… 기린도 봤어.”
주자서가 고상에게 물었다.
“기린이요?”
고상이 고개를 끄덕이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응. 근데 머리에 하얀 뿔이 있었어. 엄청 멋있었어.”
주자서가 자기 이마를 만지더니 말했다.
“뿔이요? 그럼 그분은 린(麟)이겠군요.”
고상이 다른 편액(扁額)을 가리키며 무엇이 쓰여 있는지를 묻자 주자서가 고상에게 글자를 읽어주었다.
고상과 주자서가 객실을 둘러보는 것을 구경하던 양조가 온객행에게 물었다.
“오늘이라도 어서 취수를 건너게.”
온객행이 일어나 화로를 가져오며 말했다.
“왜요? 저는 파사인 편이 낫지 않습니까? 제가 뭘 할 줄 아시고….”
양조가 웃으며 말했다.
“그대가 말썽을 피우면 이제 누굴 잡으면 되는지 알았으니 어서 하라는 것 아닌가?”
하고 주자서 쪽으로 고갯짓했다. 온객행이 소매에서 다구를 꺼내고 말했다.
“봉인이 풀려 힘을 찾으려면 못해도 한 갑자는 있어야 할 텐데 뭘 그렇게 서두르십니까?”
양조가 온객행이 차를 준비하는 것을 보고 말했다.
“그대의 유서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그렇지.”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산천대제께서는 왜 발의 힘을 찾고 계신 겁니까?”
양조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내가 그런 것까지 어떻게 알겠나?”
온객행이 코웃음 치며 말했다.
“대제께서는 어째 영력이 조금도 늘지 않으십니까?”
양조가 표정을 구기며 말했다.
“원군께서 왜 그 치를 부군 삼으셨는지 나는 아직도 모르겠네.”
온객행이 다구에서 시선을 옮겨 양조를 보며 말했다.
“아마 천존께서 그렇게 하지 않으셨을까요? 제가 알기로 서왕모께서 원군이 되시기 전에 이미 동왕공과 혼인하신 것 같은데.”
양조가 눈을 가늘게 뜨고 온객행을 보며 말했다.
“그런 것은 또 어떻게 아는가?”
온객행이 낮게 웃으며 말했다.
“다들 종종 잊으시는 것 같은데 저는 탁음대선의 제자입니다.”
양조가 온객행을 보고 물었다.
“촉룡께서 그런 말도 해주시는가?”
온객행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모든 진실은 말과 말 사이에 숨어있으니까요.”
양조가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말하니 정말 탁음대선 제자 같군.”
온객행이 찻주전자에 끓인 물을 담고 찻잎을 넣었다.
차를 다 내린 온객행이 찻잔에 차를 따르며 말했다.
“아상, 유서. 차를 마십시다.”
주자서가 쪼그리고 앉아 있는 고상의 팔을 잡아 일으키고 탁상에 와서 앉으며 말했다.
“흑랑. 원군을 뵙지 않으십니까?”
주자서의 호칭에 고상이 고개를 꺾어 ‘하하하’ 웃으며 말했다.
“흑랑? 하하하.”
온객행이 고상을 흘겨보며 말했다.
“처모! 뭐가 그렇게 재미있으십니까?”
고상이 자신을 부르는 말에 더 크게 웃으며 말했다.
“처모? 아하하하.”
주자서가 고개를 흔들고 말했다.
“흑랑. 그래도 나갔다 왔으니 찾아뵙는 것이 맞지 않을까요? 제가 잘 몰라서….”
온객행이 주자서에게 찻잔을 건네며 말했다.
“그렇게 걱정할 필요 없소.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유서는 동궁에서 쉬고 계세요.”
온객행의 말에 양조가 코웃음 치며 말했다.
“원군을 뵙고 나면 희상랑에게도 가서 인사하게. 그대의 유서를 잘 돌봐 주지 않았나?”
온객행이 주자서의 빨간 장포 자락을 만지며 말했다.
“가서 현리가 해준 옷을 찾아와야 하니까.”
주자서가 자리에서 일어나 장포를 벗으려 하자 온객행이 주자서를 말리며 말했다.
“입고 계시오. 입고 계시오. 내가 사례할 테니 일단 입고 계시오.”
주자서는 다시 자리에 앉아 찻잔을 들었다.
이제 막 웃음이 멎은 고상이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진짜 오랜만에 웃었네.”
온객행이 고상을 쏘아보며 말했다.
“주요가 오면 나도 원군을 뵈러 가야겠어.”
고상이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뭘 기다렸다 가? 얼른 다녀와. 얼른 가서 주요도 데려와.”
온객행이 고상을 보고 물었다.
“주요가 뭐라고 말 없었어?”
고상이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말했다.
“그건… 그건 주요에게 듣는 것이 좋겠네.”
그리고 찻잔을 들어 입을 축였다. 온객행은 ‘흥’하고 코웃음 치고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양조가 따라 일어나며 말했다.
“지금 중궁에 계실 텐데 혼자 갈 수 있겠나?”
온객행이 앉아서 차를 마시는 주자서를 보고 있다가 다가가 끌어안고 말했다.
“길이야 잃겠습니까? 어차피 동궁에서 중궁까지 가는 회랑은 하나인데.”
주자서는 얌전히 안겨 있다가 말했다.
“말로 부탁할 수 있는 일은 말로 하시오.”
온객행이 주자서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유서랑 단 둘이 있고 싶네.”
주자서가 온객행을 밀어내고 말했다.
“흑랑.”
양조가 조금 질린 듯한 기색으로 말했다.
“아무래도 불안한데….”
고상이 일어나 내원으로 향하는 장지문을 열고 말했다.
“봉황이랑 기린이 계시는데 설마 무슨 일이 있겠어요?”
양조가 온객행에게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말썽부리면 이제 자네가 아니라 자네 내자를 괴롭히겠네.”
온객행이 주자서를 껴안고 양조를 쏘아보며 말했다.
“유서가 무슨 상관이라고 유서를 괴롭힌다는 말이오!”
주자서가 자리에서 일어나 온객행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그 괴롭힘이 흑랑만 하겠습니까?”
주자서의 말에 양조와 고상이 ‘하하하’ 하고 웃었다. 양조와 온객행을 배웅한다고 내실로 나가는 길에 주자서와 고상은 아직도 정각에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는 기린과 봉황을 만났다. 기린에게 공손히 인사하고 양조와 온객행이 동궁을 나갔다.
다시 객실로 돌아온 고상이 찻주전자의 차를 비우고 새로 물을 올리며 말했다.
“유서. 싸움에서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지?”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구를 정리했다. 고상이 소매에서 연잎차를 꺼내고 말했다.
“아마 기린이랑 봉황께서는 정말 많은 것을 알고 계실 거야. 우리의 원군이 되면 더욱 좋고.”
주자서가 또 고개를 끄덕이며 소반에 다구를 올려 놓았다. 물이 끓자 고상은 찻주전자에 찻잎을 넣고 소반 위에 올려 놓으며 말했다.
“요대는 우리 둘 다 잘 모르니까. 원군은 많을수록 좋지.”
주자서가 소반을 들고 일어나며 말했다.
“지피지기 백전불태 (知彼知己, 百戰不殆.)”
고상이 주자서를 보고 결연한 표정을 하고 말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로움이 없다.”
그리고 장지문을 열고 정각으로 향하며 말했다.
“근데 유서. 나는 사실 나에 대해 잘 모르겠어.”
주자서가 고상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아상. 그건 저도 마찬가지예요.”
고상은 주자서를 보고 웃었다.
읍강은 객실에서 나오는 고상과 주자서를 보고 봉황에게 물었다.
“저 아이가 발의 아이?”
봉황이 고개를 돌려 다가오는 둘을 보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 맞습니다.”
읍강이 ‘흠’하고 주자서를 보더니 말했다.
“복잡하군.”
봉황이 기린을 보고 힘겹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상이 소매를 들어 인사하며 말했다.
“기린, 봉황. 태평호에서 온 고상과 유서가 인사드립니다.”
봉황이 일어나 고상의 팔을 잡아 일으키며 말했다.
“고상. 예를 거두세요.”
주자서가 다구가 담긴 소반을 놓고 읍강과 봉황에게 찻잔을 건네고 찻주전자를 들어 조심스럽게 차를 따랐다. 읍강이 고상과 주자서에게 자리를 권하며 말했다.
“이건 무슨 차지요?”
고상이 공손히 고개를 조아리고 답했다.
“태평호에서 딴 연잎입니다. 단양절이 지나고 따서 아주 향이 좋아요.”
읍강이 찻잔을 들어 향을 맡고 말했다.
“향이 아주 좋네요.”
읍강이 찻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연실을 맺으려면 여름이 오기 전에 잎을 따주어야 하니까요.”
고상이 웃으며 말했다.
“연실을 좋아하십니까?”
읍강이 고상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그럼요.”
고상은 신이 나서 읍강과 봉황에게 태평호의 이야기를 했다. 여름에는 무엇을 하는지 또 가을에는 무엇을 하는지. 고상의 이야기를 듣던 주자서는 모친과 당질을 데리고 태평호에 가서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흐뭇한 얼굴로 고상의 이야기를 듣던 봉황의 표정이 날카로워지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찌?”
읍강이 봉황의 소매를 잡고 말했다.
“안시. 진정하게. 이곳이 어디 인지 잊었는가?”
봉황이 읍강의 손을 잡고 말했다.
“린자. 적송자(赤松子)인 것 같아요. 적송자의 비가 내리면 날짐승은 하늘을 날 수 없습니다.”
봉황이 하늘로 날아오르며 말했다.
“린자. 발의 아이를 부탁드립니다.”
읍강이 정각에서 나와 하늘을 보며 말했다.
“적송자께서 혼자 오신 게 아니군.”
봉황은 주변을 살펴보다가 동문이 있는 쪽으로 날아갔다. 고상이 주자서에게 다가가 그의 팔을 잡고 말했다.
“무슨 일이지?”
읍강이 객실 쪽으로 손을 펴고 말했다.
“밖은 소란스러울 것 같으니 안으로 들어가지.”
주자서가 자리에서 일어나 소반을 챙겼다. 고상이 주자서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유서 괜찮으니 두고 어서 와. 들어가자.”
그리고 읍강의 뒤에 가깝게 붙어서 객실 안으로 들어갔다. 읍강은 고상과 주자서가 객실 안으로 들어오자 곧 고개를 숙이고 숨을 고르더니 뿔 끝에서부터 온 몸이 하얗게 빛나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주자서가 고상에게 몸을 붙이자 고상이 주자서의 몸에 팔을 두르며 말했다.
“괜찮아. 괜찮다. 나의 아가. 괜찮아.”
주자서는 자신의 몸에 둘러싸인 고상의 팔이 떨리는 것을 느끼고 고상의 손을 마주 잡았다. 순간 온 방 안이 하얗게 바래더니 사방이 조용해졌다. 주자서는 고상의 몸을 감싸듯 안고 눈을 감았다.
고상이 주자서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유서. 괜찮아. 내가 있잖아.”
주자서가 눈을 뜨고 고상을 보았다. 고상이 주자서를 올려보며 장지문이 있던 쪽으로 고갯짓을 했다. 주자서가 고상을 놓아주고 뒤를 보자 새하얀 기린이 장지문 앞에 앉아 있었다. 주자서가 놀라서 고상을 보고 말했다.
“아… 기린?”
읍강이 고상과 주자서를 보고 말했다.
“아무래도 산천대제가 일을 크게 벌이는 모양입니다.”
고상이 표정을 구기며 물었다.
“기린?”
읍강이 고상을 보고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갈아 치울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죠.”
고상이 읍강에게 다가가 말했다.
“기린… 주요는요? 파사는요?”
읍강이 다가온 고상의 몸을 코로 밀며 말했다.
“걱정 마세요. 수원은 봉황보다 나으니.”
고상이 바닥에 주저앉고 울먹이며 말했다.
“주요는… 주요는….”
주자서가 다가가 고상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말했다.
“아상. 괜찮을 거예요. 흑랑도 같이 있잖아요. 우리는 여기 얌전히 있는 것이 돕는 거예요.”
고상이 주자서를 끌어안고 훌쩍이며 말했다.
“주요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나는 어떡해.”
주자서가 고상을 달래며 말했다.
“저는 주인보다 저희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무서워요.”
고상이 주자서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말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열심히 수련할 걸. 앞으로는 진짜 열심히 할 거야.”
주자서가 부스스 웃었다. 읍강이 고상을 보고 말했다.
“너는 나이에 비해 수련의 경지가 높구나.”
고상이 고개를 돌려 읍강을 보자 읍강이 웃으며 말했다.
“네 아이를 지키거라. 너에게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
고상이 주자서를 더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
“우리 아이는 아무도 안 줄 거예요. 유서는 내가 지킬 거야.”
밖에서 천둥이 치더니 곧 벼락이 쏟아졌다. 커다란 소리에 놀란 주자서가 고상을 끌어당겼다. 자리에서 일어난 읍강이 작게 코웃음 치더니 장지문을 뚫고 밖으로 나갔다. 곧 밖에서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치는 소리와 벼락이 치는 소리가 들렸다. 고상이 주자서를 보고 말했다.
“영력이 조금만 더 있었으면 구경하러 갔을 텐데.”
주자서가 표정을 구기며 말했다.
“아상!”
고상이 주자서를 보고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아이참! 이런 구경을 또 어디서 해? 뇌공(雷公)이 오신 것 같은데. 난 본적 없단 말이야.”
주자서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이런 구경은 평생 안 하고 싶어요.”
고상이 주자서의 코를 손가락으로 ‘톡톡’ 치고 말했다.
“우리 유서는 겁쟁이야.”
주자서는 살면서 다른 사람에게 겁쟁이라는 소리를 들어 본적이 없어서 헛웃음이 절로 났다.
“아상. 저는 오래 살고 싶어요.”
고상이 자세를 바르게 하고 주자서의 양 어깨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그건 걱정 마. 반은 화사니까, 일반 사람보다는 오래 살 거야.”
주자서가 커다란 벼락 떨어지는 소리에 어깨를 움츠리며 말했다.
“아상. 정말 여기 있는 것이 안전한 걸까요?”
고상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주요가 그랬어. 동궁은 사령의 영력이 깃들어서 허락 없이 아무나 함부로 못 들어온다고.”
주자서도 고상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밖에서 커다란 벼락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고상과 주자서는 평상으로 가서 망가진 장지문을 보며 어깨를 붙이고 앉았다.
고상이 주자서의 손을 잡고 말했다.
“만약에 말이야. 만약에 무슨 일이 생기면 나를 버리고 도망가야 해.”
주자서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아상. 그럴 일은 없어요. 그럴 일이 생긴다고 해도 아상께서 도망치셔야죠.”
고상이 말했다.
“아이참! 유서. 너는 내가 시키는 대로 해. 내가 너를 지켜 줄 수 없는 상황이 오면 주요가 준 비녀를 부러뜨리고 도망가.”
주자서는 그제야 주요가 준 비녀가 생각나서 머리를 더듬었다. 고상이 주자서의 손을 멈추고 말했다.
“내가 너 하나 지키지 못할까? 내 아가.”
고상이 주자서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주자서가 고상의 등을 쓸며 말했다.
“제 몸에 있다는 이 영력을 쓸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고상이 고개를 들어 주자서를 보았다. 주자서는 고상의 표정이 슬퍼 보여서 조금 의아했다. 주자서가 고상에게 뭔가 물으려는 순간 둘이 앉아 있던 평상이 그림자 속으로 빠지기 시작했다. 고상이 주자서를 잡고 말했다.
“즉저. 이 나쁜 놈.”
그리고 두사람은 어둠 속으로 잠겨 들어갔다.
(4) 장자(莊子) 외편(外篇) 제17 추수(秋水)
“남쪽 지방에 새가 사는데, 그 이름을 봉황의 일종인 원추鵷鶵라 한다네. 자넨 알고 있는가? 그 원추라는 새는 남쪽 바다에서 출발해 북쪽 날아가는데, 오동나무가 아니면 머물지 않고,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도 않으며, 달디 단 샘물인 예천(醴泉)이 아니면 마시지 않는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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