上屋抽梯 | 16. 지붕에 올려놓고 사다리를 치우다.
대려와 소려는 온객행을 흘겨보더니 옆에 서 있는 주자서를 위아래로 품평하듯 보았다. 청조가 말했다.
“물비린내가 진동을 하는군.”
청조는 온객행의 말을 듣지도 않고 요대의 대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대려와 소려가 온객행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더니 주자서에게 말했다.
“그대는 사람으로 요대를 방문하는 것이니 이 구슬을….”
소려가 주자서의 머리에 꽂혀 있는 비녀를 보고 말했다.
“교견자(咬鹃姊). 주요의 비녀가 있어요.”
대려가 고개를 돌려 주자서의 머리에 꽂혀 있는 비녀를 보고 ‘흠’ 하더니 손에 들고 있던 구슬을 다시 품속에 넣고 말했다.
“금모원군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중궁(中宮)으로 가지.”
그리고 몸을 돌려 회랑으로 향했다. 주자서는 태연이라고 하여 연못 안에 궁궐이 있는 것 인 줄 알았는데 서왕모의 요대는 구름 위에 있었다.
크고 작은 전각이 있고 그 앞에는 옥산에 들어와서 만났던 이처럼 등에 검은 날개가 달린 깃털 갑옷을 입은 군병 여럿이 대문을 지키고 있었다. 그들을 데리고 가는 대려와 소려의 지위가 높은 것인지 군병들이 고개를 조아려 인사했다. 온객행과 주자서가 지나칠 때마다 그들을 빤히 보았다. 주자서는 조금 겁이 나서 온객행의 소매를 잡았다. 온객행은 소매를 잡아 온 주자서의 손을 보고 배시시 웃더니 주자서의 손을 맞잡고 그를 자기 쪽으로 조금 끌어당겼다. 거의 반 시진 정도 회랑을 걸어 커다란 대문 두 개를 더 지나 중궁에 도착했다. 중궁이라고 불리는 정전(正殿)은 그 크기가 정말 궁궐 같았는데 그 주변에도 검은 깃털의 군병이 지키고 있었다. 대려가 정전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서 있는 푸른 갑옷을 입은 여인에게 말했다.
“주유(朱獳). 흑망이 원군을 뵙고자 청합니다.”
주유는 온객행을 흘끔 보더니 큰 목소리로 말했다.
“서호의 흑망! 태허구광구대금모원군 (太虛九光龜臺金母元君)의 근광(覲光)을 청합니다!”
곧 대전의 문이 열리고 안에서 연한 초록빛 옷을 입은 시동(侍童) 둘이 나와 온객행에게 말했다.
“흑망은 대전으로 들어오시게.”
온객행은 옆에 서 있는 주자서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괜찮아. 너의 일은 나의 일이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그리고 귓가에 입을 맞췄다. 주자서는 깜짝 놀라 펄쩍 뛰더니 온객행을 흘겨보며 말했다.
“이 상황에 희롱이시오!”
온객행이 낮게 웃으며 고개를 돌려 대전 안으로 발을 옮겼다. 주자서가 온객행에게 잡힌 손을 빼려고 했지만 온객행은 놓아주지 않았다. 정전 안으로 들어가니 옥으로 만든 커다란 기둥에 천장에는 온갖 보옥으로 그려진 여우와 삼족오가 보였다. 금으로 만든 촛대가 곳곳에 있어 내실을 밝혀 주었는데 내부에 있는데도 마치 밖에 있는 것처럼 밝았다. 은은하게 푸른 빛을 발하는 기둥이 마치 하늘에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았다. 주자서는 아름다운 대궐의 모습에 잠시 넋이 나가 눈이 휘둥그레져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초록빛 옷을 입은 시동 여럿이 여기저기서 각자가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었고 푸른색 갑옷을 입은 여인들이 열두 개의 옥으로 만든 기둥 앞에 서 있었다. 그 여인들을 지나 정전의 상석에는 오색으로 빛나는 옥을 호랑이와 용이 받들고 있는 모양으로 조각한 용호좌(龍虎座)에 아름다운 여인이 흐트러진 차림새로 누워 있었다. 그녀의 왼쪽에는 푸른색 옷을 입은 아름다운 여인과 오른쪽에는 칠흑의 깃털 갑옷을 입은 여인이 서 있다. 온객행은 상석으로 올라가는 계단 바로 앞에 있는 향로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주자서의 손을 놓고 소매를 들어 인사했다.
“서호의 흑망 원군을 뵙습니다.”
주자서도 두리번거리는 것을 멈추고 온객행 옆에 서서 손을 모아 공손히 인사했다.
용호좌에 앉아 있는 금모원군이 고개를 돌려 온객행과 주자서를 보았다. 금모원군의 옷은 입은 듯 벗은 듯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었고 그녀의 머리에 화려한 장식이 칠흑 같은 머리카락과 함께 흐트러져 내리고 있었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앉으려고 하자 상석 아래에 있던 초록색 옷을 입은 시동이 그녀의 시중을 들었다. 금모원군이 작게 웃더니 시동에게 말했다.
“섬여(蟾蜍), 가서 공공을 모셔 오너라.”
섬여는 여인에게 조아리고 상석에서 폴짝 뛰어내려 작은 다리로 달려서 정전을 나갔다. 금모원군이 일어나서 앉자 그녀가 입고 있던 옷이 영비(靈飛)처럼 날려 그녀의 주변을 에워쌌다. 금모원군이 온객행에게 말했다.
“흑망. 천존께서 그대에게 하명하신 일은 어찌하고 여기 계십니까?”
온객행이 머리를 조아리고 말했다.
“미천한 저에게 어찌 중하(重荷)를 지우십니까.”
금모원군이 ‘하하하’ 하고 웃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상석의 계단을 내려오며 말했다.
“오늘 취수(翠水)를 건너 흑룡이 되시겠습니까?”
온객행이 자리에 무릎 꿇고 말했다.
“원군께 청이 있어서 왔습니다.”
금모원군이 계단을 내려와 온객행 옆에 눈치껏 무릎 꿇은 주자서를 보고 말했다.
“하늘이 너에게 죄를 지었구나.”
주자서는 촉룡과 같은 말을 하는 금모원군을 고개를 들어 보았다. 금모원군은 주자서의 뺨에 손을 올리고 눈을 감았다. 주자서는 뺨에 닿는 느낌이 없어서 어리둥절했다. 온객행이 머리를 바닥에 붙이며 말했다.
“저의 내자를 도와주실 수 있는 것은 원군뿐입니다.”
다시 떠진 금모원군의 눈은 새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금모원군이 주자서에게 손을 떼고 웃으며 말했다.
“촉룡께서는 뭐라고 하셨지?”
주자서가 금모원군의 빛나는 눈을 보고 홀린 듯 말했다.
“발의 힘에는 이미 주인이 있어 거둘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금모원군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흠’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그렇다면 나도 도와줄 수 없겠군.”
주자서는 넋을 놓고 금모원군을 보고 있다가 갑자기 앞으로 풀썩 고꾸라졌다.
금모원군이 다시 상석을 오르며 말했다.
“용케 발의 영력을 버티고 있군.”
온객행이 놀라서 쓰러진 주자서를 품에 안고 말했다.
“제발 원군. 저의 내자를 도와주세요.”
금모원군이 온객행의 말에 고개를 꺾어 ‘하하하’ 웃고 용호좌에 앉으며 말했다.
“내자?”
그리고 조금 더 웃었다. 곧 밖에서 주유가 다시 기별해왔다.
“공공께서 금모원군께 근광(覲光)을 청합니다.”
금모원군은 정전으로 들어오는 문을 보고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상석 아래에 있던 초록색 옷을 입은 시동이 정전의 장지문으로 달려가 문을 열고 공공을 맞이했다. 공공이 대전 안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흑망이 왔다고요?”
공공이 주자서를 안고 있는 온객행을 발견하고 말했다.
“흑망. 그 아이가?”
금모원군이 용호좌에 앉아 말했다.
“공공. 내가 이겼으니 현주(玄珠)를 어서 내놓게.”
공공이 흑망에게 다가가 말했다.
“설마 벌써 취하였느냐?”
온객행은 주자서를 추슬러 안고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공공.”
공공이 온객행 앞에 쪼그리고 앉아 주자서를 보고 말했다.
“예를 거둬라. 흑망. 벌써 취했느냐? 촉룡께서 허락하셨는가?”
온객행이 고개를 들어 공공을 보고 말했다.
“무슨…?”
온객행이 주자서를 품에 끌어안은 것을 보고 공공이 자리에서 일어나 금모원군에게 공수하여 인사하고 말했다.
“원군. 한시름 놓았습니다.”
그리고 품속에서 검은 구슬을 꺼내더니 같이 들어온 섬여에게 구슬을 건넸다. 섬여는 공공에게 받은 구슬을 들고 폴짝 뛰어 상석에 있는 금모원군에게 바쳤다. 금모원군은 구슬을 들어 손안에서 굴리더니 말했다.
“흠… 예상했던 것 보다 더 별거 아니군.”
공공이 눈을 굴리며 말했다.
“그럼 다시 돌려주시지요!”
금모원군이 공공을 보며 말했다.
“주었다 뺏는 법이 어디 있는가?”
그리고 온객행의 품에 있는 주자서에게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주요가 봉인을 깨는 바람에 시간이 얼마 없어.”
공공이 고개를 돌려 주자서를 보고 말했다.
“이 자가 발이 되는 겁니까?”
금모원군이 고개를 흔들고 말했다.
“아니 될 소리를. 사내가 어찌 태양신이 된다는 말인가? 그대는 태초의 가뭄을 잊었는가?”
공공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그러면…?”
금모원군이 휘우듬하게 몸을 기대며 말했다.
“촉룡께서 발의 힘은 이미 주인이 있다고 하니 기다리면 될 듯하네.”
공공이 금모원군을 보고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상류에게서 기별이 왔는데 아무래도 산천대제께서 아신 것 같습니다.”
금모원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천룡을 보내기를 잘 한 것 같아. 그 아이는 입이 가벼우니까. 주요가 붙잡는다고 애를 썼겠군.”
공공이 금모원군에게 말했다.
“천도연(天桃宴)에 부르시지요.”
금모원군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수원은 내가 보고싶다고 해도 나를 만나러 오지 않는걸.”
금모원군이 공공을 보고 말했다.
“그대가 화사를 부르면 또 모를 일이지만.”
공공이 소매를 들어 공수하고 말했다.
“당장 부르겠습니다. 당장 고상을 부르지요.”
금모원군이 ‘까르르’ 웃으며 말했다.
“그래. 주요는 다정하니까 화사를 이 교활한 노인네들 소굴에 혼자 보내지는 않겠지.”
그리고 옆에 있는 섬여에게 손짓하더니 시동의 귀에 뭔가를 속삭였다. 시동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상석을 내려와 온객행에게 말했다.
“흑망공자. 따라오시지요.”
그리고 정전을 나갔다. 온객행은 쓰러진 주자서를 들어 품에 안고 금모원군과 공공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섬여를 따라 나갔다. 섬여는 폴짝폴짝 뛰어서 남궁(南宮)으로 향했다. 남궁의 서쪽에는 요지(瑶池)라 불리는 아름다운 연못이 있고 동쪽에는 서왕모의 손님이 머무는 별궁이 있었다. 섬여는 그들을 별궁으로 안내하며 말했다.
“서왕모께서 미월(未月 음력 6월) 보름에 천도연을 베푸십니다. 그때까지 별궁에서 지내시면 됩니다.”
온객행이 물었다.
“저의 내자의 몸이 좋지 않은 것 같은데… 요대에 사람의 의술을 하는 자는 없습니까?”
섬여가 코웃음 치며 말했다.
“요대에 사람이 없는데 어찌 사람의 의술을 아는 자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어깨너머로 주자서를 보더니 말했다.
“지백(岐伯)이라도 불러 드리지요.”
온객행이 고개를 조아리고 섬여에게 인사했다.
“부탁드립니다.”
섬여가 별궁에 도착해 동문 근처에 있는 허름한 객실로 온객행을 안내하며 말했다.
“이번에도 말썽을 부리면 다시는 요대에 못 들어올 줄 아시오.”
온객행이 실내로 들어가 주자서를 침상 위에 눕히고 말했다.
“내자만 나으면 오래 머무를 마음도 없습니다.”
섬여가 문간에 서서 온객행이 하는 것을 보더니 말했다.
“그자가 발의 후손이오?”
온객행이 주변을 돌아보더니 대야에 물을 채우고 품속에서 영견을 꺼내 적셔서 주자서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온객행이 하는 것을 보던 섬여가 ‘흥’하고 코웃음을 치고 객실을 나갔다. 온객행은 힐끔 어깨너머로 문간을 보고 다시 주자서의 손을 잡아 손도 닦아주었다.
주자서는 금모원군의 영력에 눌려서 정신을 잃은 것 같았다. 주자서에게 묻는 것보다 그의 영혼을 들여다보는 것이 더 빠르고 정확했을 테니 그렇게 하신 것이겠지만 발의 영력이 봉인되어 있는 주자서의 몸은 보통 사람과는 조금 달라서 그 상태가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알 수 없는 온객행은 애가 탔다. 금모원군과 공공의 대화를 미루어 봤을 때 주자서가 태평호로 흘러 들어온 것은 우연(偶然)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저를 두고 현주를 걸고 내기를 한 것 같은데 내용을 모르니 기분만 나쁘고 마는 것이다. 온객행은 침상에 누워있는 주자서의 얼굴을 쓸며 생각했다. ‘그래도 유서를 얻었으니 기분 좀 나쁜 것쯤이야 일도 아니지.’ 온객행은 침상에 올려진 주자서의 손을 잡았다.
“유서. 아프지 말게. 우리의 한 갑자는 너무나도 짧은데… 그대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리고 주자서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문간에서 누군가가 기별했다.
“흑망공자.”
온객행은 아쉬운 듯 주자서의 손을 놓아주고 장지문을 열었다.
하얀 머리가 성성한 노인이 손을 모으고 인사했다.
“흑망공자. 지백 인사 올립니다.”
지백은 황제가 하늘에서 쫓겨나 땅으로 내려갔을 때 사람에게 의술을 가르쳤는데, 그 중에 가장 뛰어났던 사람이다. 황룡은 지백을 금모원군께 바쳤다. 삶과 죽음의 신인 금모원군에게 딱히 필요한 사람도 아니었고, 하늘에서의 황제의 평판이 그다지 좋지 못해 겨우 요대에 눈치를 보며 붙어살고 있는 귀신이다. 온객행도 그와 처지가 다르지 않아 마음이 착잡했다. 온객행이 손을 모아 인사했다.
“지백. 어서 들어오게.”
지백이 침상 쪽을 보고 물었다.
“저 분이 아씨의 후손입니까?”
지백은 황제의 신하였기 때문에 황제의 딸인 발과도 아는 사이였다.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이고 침상 앞으로 다가가 의자를 놓고 말했다.
“원군께서 영혼을 보셔서 조금 놀란 것 같은데 또 모르는 일이니….”
지백이 고개를 끄덕이며 온객행이 놓은 의자에 가서 앉아 주자서의 맥을 짚었다. 온객행은 지백이 주자서의 몸을 만지는 것이 불쾌하다는 생각이 치밀었다. 온객행은 소매에서 다구를 꺼내 차를 내렸다. 온객행이 화로를 찾아 불을 붙이고 물 주전자에 물을 채워 물이 거의 끓었을 즈음 지백이 자리에서 일어나 온객행에게 말했다.
“기력이 과하여 실증(實症)이 드셨습니다. 아마 많이 힘드셨을 텐데….”
온객행이 주자서의 발치에 앉아 그의 몸에 이불을 덮으며 말했다.
“항상 괜찮다는 말 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 조금 더워하고 음식을 잘 먹지 못했습니다.”
지백이 주자서의 얼굴을 보더니 그의 눈과 입안을 보고 말했다.
“아마 소화가 잘 안되어서 뭐든 먹고 싶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묽은 죽이나 물, 차 정도 밖에 먹지 않았습니다.”
지백은 가지고 들어온 찬합에서 작은 영견과 지필묵을 꺼내 처방전을 썼다.
지백은 온객행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말이 좋아 손님이지 요대에 감금당한 처지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요대 근처에서 발견할 수 있는 약초들을 잘 조합하여 처방전을 적었다. 그리고 온객행에게 건네고 말했다.
“양기 발산을 돕는 약초들이니 달여서 먹여 보십시오. 몸에 봉인된 아씨의 영력이 사람의 장기(臟器)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온객행이 지백이 써준 처방전을 받아 들고 말했다.
“정말 고맙네. 내 처지가 이래서 사례할 것도 마땅하지 않군.”
지백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덕분에 아씨의 후손을 뵈었으니 자주 뵙게 해주십시오. 저에겐 그보다 더한 복이 없습니다.”
온객행이 지백에게 차를 권하자 지백이 차를 거절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온객행은 지백이 들고 들어온 의함(醫函)을 대신 들고 그가 나가는 길을 배웅하며 말했다.
“언제라도 들러 주게.”
온객행이 의함을 지백에게 건네고 소매에서 작은 찬합을 꺼내며 말했다.
“지백. 이것은 별것 아니지만 받아주게. 태평호에서 딴 연잎차네.”
지백이 작은 함을 두손으로 받고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흑망공자. 도울 일이 생기시면 꼭 알려주십시오. 저는 남쪽 수구문(水口門) 근처에 있는 작은 연못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동정호에서 온 잉어들을 돌보고 있지요.”
온객행이 주자서가 누워있는 침상 쪽을 보고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잉어인가?”
지백이 ‘허허허’ 웃으며 말했다.
“예. 요대에서 수구문에 있는 잉어 숫자를 알고 있는 것은 지백 혼자입니다.”
온객행이 지백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그래. 기운을 차리면 꼭 들르겠네.”
지백은 온객행의 손에 들려 있는 찬합을 들고 가는 길에 몇 번 뒤 돌아서 온객행에게 인사했다. 아마 지백은 누군가와 대화한 것이 참으로 오랜만일 것이다. 황룡이 저지른 짓은 황룡을 모시던 많은 이들을 곤란하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침상위에서 뒤척이는 주자서를 보고 온객행은 혹시 유서가 밥때를 놓쳐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인가 싶어 소매에서 재료를 꺼내 죽을 끓이기 시작했다. 주자서는 담백하게 간하지 않은 죽을 제일 잘 먹었다. 잘 먹는다는 것이 태평호에 처음 왔을 때처럼 기력을 차리기 위해 열심히 먹었던 것과 비교하면 보잘것없는 것이라 온객행은 걱정이 되었다. 그냥 다른 음식보다 조금 더 먹는 수준이다. 물고기를 잡아 주면 곧잘 먹었는데 요대를 떠나기 전에 지백에게 들러 잉어를 먹이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온객행은 소매에서 주자서가 산 묵은 찐쌀과 연실, 우두를 넣고 죽을 끓였다. 얼추 익어 딱 먹기 좋을 때 주자서가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온객행이 얼른 다가가 주자서를 일으키며 물었다.
“유서. 괜찮은가?”
주자서가 자리에서 일어나 앉자 온객행이 내려놓았던 조금 식은 차를 입가에 대주었다. 주자서는 찻잔을 받아 마시고 목을 가다듬고 물었다.
“여기는…?”
온객행이 다 잠긴 주자서의 목소리에 낮게 웃으며 말했다.
“여긴 요대의 별궁이오.”
온객행이 주자서가 들고 있는 찻잔에 찻물을 더 담고 끓이던 죽을 ‘후후’ 불며 가져와 말했다.
“유서. 하루에 세 번 밥을 먹지 않아서 아픈 것이네. 그러니 끼니를 거르지 않는 것이 좋겠어.”
주자서는 들고 있던 찻잔을 마시고 온객행에게 건네고는 죽그릇을 받아서 들고 ‘후후’ 불더니 죽을 먹었다.
온객행이 주자서가 거의 비운 그릇에 죽을 더 덜어주려고 하자 주자서가 고개를 흔들고 말했다.
“충분합니다. 온공자께서는 안 드십니까?”
온객행이 주자서 옆에 앉아 주자서의 죽그릇을 들고 말했다.
“내가 같이 먹었으면 좋겠는가?”
주자서는 아직 정신이 없는지 눈을 깜빡이더니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온객행이 웃으며 말했다.
“알겠네. 앞으로는 같이 먹지.”
그리고 주자서를 일으켜 탁상에 데려와 앉히고 죽을 조금 더 덜어주며 말했다.
“나는 혼자 먹고 싶지 않으니 유서가 좀 도와주게.”
주자서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기 몫의 그릇을 들고 죽을 조금 더 먹었다. 온객행은 기분이 좋아져서 식지도 않은 죽을 먹으려다 입을 데었다.
“아!”
주자서가 놀라서 온객행을 보고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온객행이 입가에 손을 가져가 입을 가리고 고개를 흔들었다.
주자서가 자리에서 일어나 온객행에게 다가가 손을 치우고 입가를 보았다. 살짝 붉게 변한 입술은 사실 멀쩡해 보였다. 주자서가 붉게 변한 입술을 손가락 끝으로 쓸었다.
“데이기도 하는군요.”
온객행이 주자서를 한참 올려 보다가 입가를 매만지는 주자서의 손을 붙잡고 말했다.
“아파.”
주자서가 손을 떼고 말했다.
“데였으니 식혀주어야지요.”
그리고 온객행의 입가에 ‘호’ 하고 숨을 불었다. 온객행은 마음이 간질간질해져서 주자서가 하는 것을 보고 있다가 벌떡 일어나서 주자서의 뺨을 잡고 입을 맞추었다. 입술을 핥다가 ‘앗’ 하는 소리와 함께 주자서의 입 안으로 온객행의 혀가 들어왔다. 치열을 훑더니 입천장을 쓸고 혀를 빨았다. 온객행의 손을 떼려고 몸부림치던 주자서는 다리에 힘이 풀려 풀썩 주저앉았다. 온객행이 주자서를 따라서 바닥에 앉아 그의 몸에 팔을 두르고 그의 입술을 조금 더 핥았다. 주자서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오… 온공자….”
온객행이 주자서와 이마를 맞대고 말했다.
“이제 안 아픈 것 같아.”
주자서는 얼굴이 빨개져서 고개를 돌렸다.
온객행이 주자서의 목덜미에 희미하게 남은 잇자국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내가 아프면 이렇게 해주게. 그럼 하나도 안 아플 것 같아.”
그리고 주자서의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주자서가 온객행의 얼굴을 밀며 물었다.
“혼인까지 했는데 표식이 필요합니까?”
온객행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힐끔 본 온객행의 눈에 흰자위가 없다. 주자서는 한동안 온객행의 눈을 빤히 보다가 온객행의 눈 위로 손을 올렸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온기에 눈을 감았다가 그의 손이 떨어지는 것이 아쉬워서 작게 탄식하며 눈을 떴다. 다시 떠진 온객행의 눈은 사람의 것과 같아서 주자서가 배시시 웃었다. 주자서가 웃는 모습에 온객행의 눈이 다시 새카맣게 물들었다. 온객행이 다시 주자서의 입술을 찾았다.
고개를 돌리려는 주자서의 턱을 잡고 온객행이 말했다.
“아직 더 아픈 것 같은데….”
그리고 주자서의 입술을 탐했다. 탐하면 탐할수록 부족해서 마치 바닷물을 마시는 것 같다. 방금 마셨는데도 갈증은 멈추지 않고 더 갈망하게 된다. 주자서의 몸에 힘이 쭉 빠져 축 늘어질 때까지 괴롭히던 온객행이 주자서를 일으키며 말했다.
“나는 아직 아픈 것 같은데….”
주자서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하아… 하아… 이건 희첩의 일이 아닙니까?”
온객행이 주자서를 자리에 앉히고 자기도 자리에 앉아 죽그릇을 들고 말했다.
“희첩의 일이 곧 부인의 일이지요.”
주자서가 찻주전자를 집어 차를 따르고 마시며 말했다.
“소첩은 소박맞고 싶습니다.”
온객행이 주자서에게 죽그릇을 밀어 식사를 종용(慫慂)하며 말했다.
“어찌 얻은 부인인데 박대한다는 말이오?”
주자서가 다시 숟가락을 들고 죽을 뜨며 말했다.
“부인한다고 한적 없는데….”
주자서의 불평하는 소리에 온객행이 눈썹을 늘어뜨리고 울상을 만들어 말했다.
“유서. 그대에게 내가 많이 부족한 것을 알고 있네.”
주자서가 부루퉁하게 온객행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온객행이 죽그릇을 내려놓고 물었다.
“어찌하면 그대 마음을 채울 수 있겠는가?”
온객행이 자리를 옮겨 주자서 옆에 어깨를 붙이고 앉아서 기대고 말했다.
“유서는 어떤 반려를 원하는가? 말해보게.”
주자서도 징병 당하기 전까지는 참한 여인과 가정을 이루는 꿈을 꾼 적이 있었다. 사는 곳이 멀지 않은 여인으로 홀어머니인 모친께서 서운하지 않으시게 처가의 식구들과 함께 의지하며 살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부인께서 아이를 원하면 사내아이는 징집의 대상이 되니 딸아이였으면 좋겠다는 그런 막연하고 어렴풋한 공상(空想). 주자서는 부스스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평범하고 무난한 생활과는 한참 거리가 먼 곳에 있었다. 지금 주자서는 금모원군의 궁궐인 요대에 있다.
주자서의 불안을 느낀 온객행이 죽그릇을 내려놓고 주자서의 몸에 팔을 둘러 안고 말했다.
“유서. 제가 맞추겠습니다. 제가 옆에 있겠습니다.”
주자서는 언젠가 그런 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하여 기시감이 들었다.
“온공자….”
하고 운을 띄우려는 주자서를 멈추고 온객행이 말했다.
“그렇게 부르는 것은 법도에 맞지 않으니…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요?”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하고 말했다.
“그래도 나를 부인이나 내자라고 부르는 것은 그만두시오.”
그리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온객행이 주자서의 목덜미에 고개를 기대고 말했다.
“그럼 부군(夫君)이라고 불러주세요.”
주자서가 얼굴을 구기고 고개를 흔들었다.
“싫소. 나는 그냥 유서라고 부르시오.”
온객행이 주자서를 불렀다.
“유서.”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흑랑(黑郞).”
흑망은 온객행이 별로 좋아하는 이름이 아니었는데 주자서가 그렇게 부른다고 하니 또 다르게 들렸다. 온객행의 세상이 그의 생각이 주자서로 인해 변하고 있다. 온객행이 배시시 웃으며 주자서의 목덜미에 뺨을 비볐다.
“유서.”
주자서가 웃으며 말했다.
“마음에 드시오? 흑랑?”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유서. 흑랑이 앞으로 잘하겠네.”
주자서가 온객행을 힐끔 보더니 말했다.
“잠깐 신세 좀 집시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말에 서운한 듯 아쉽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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