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中生有 | 20. 무에서 유가 생겨난다.
산천대제는 주작과 백호를 힐끔 보더니 말했다.
“흑망은 천존께서 사하신 일은 결정했는가?”
온객행이 소매를 들어 고개를 조아리고 말했다.
“스승님께 고견(高見)을 듣고 결정할까 합니다.”
온객행이 계속해서 종화산에 가려는 것을 고집하자 짜증이 났는지 산천대제가 온객행의 뒤에 서 있는 주자서의 소매를 잡아 끌며 말했다.
“그럼 종화산에 다녀오시게. 그동안 그대의 내자는 내가 데리고 있지.”
주자서는 소매를 빼려고 힘을 줬지만 보이는 것과 달리 산천대제의 힘이 좋아 오히려 주자서가 휘청거렸다. 주작은 산천대제가 하는 것을 보고 있다가 말했다.
“대제. 아무리 그래도 남의 내자만 데리고 있는 것은 좀….”
산천대제가 표정을 구기고 주작을 보며 말했다.
“내가 황룡의 상전인데 무엇이 이상하다는 말이냐?”
백호가 주자서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며 말했다.
“정말 발의 영력이 느껴지는군.”
그리고 손을 들어 주자서를 잡으려고 하자 산천대제가 백호의 손을 후려치고 말했다.
“어디 감히!”
백호가 산천대제를 보고 못마땅한 표정을 하고는 고개를 조아렸다.
주자서가 소매를 들어 말하려고 하는데 하늘에서 돌풍이 몰아쳤다. 당황한 산천대제가 주자서의 소매를 놓자 주자서는 재빨리 온객행이 있는 쪽으로 몸을 틀었다. 돌풍 사이에서 응룡이 나타나 땅에 발을 디뎠다.
“원군께서 산천대제를 배웅하라 명하셨으니, 제가 대제를 동해까지 모시겠습니다.”
백호가 응룡을 보고 코웃음 치며 말했다.
“주작과 백호인 내가 있는데 그것은 무슨 뜻이오?”
주작이 백호를 말리며 말했다.
“경진선께서 그렇게 해주시겠습니까?”
응룡이 산천대제에게 포권하고 말했다.
“동쪽에 사는 신선 중에 동왕공께서 제일 한가하시니까요.”
백호가 으르렁 대며 말했다.
“그게 무슨 뜻인가! 무엄하다!”
주작은 고개를 흔들고 응룡과 백호를 번갈아 보더니 붉은 날개를 펼쳐 하늘로 날아오르며 말했다.
“원군께서 경진선께 부탁하셨으니 그럼 저는 경진선만 믿고 이만 남쪽으로 가보겠습니다.”
응룡이 하늘로 날아오른 주작에게 포권하고 말했다.
“축융대선, 안시선께서 요대의 일을 마치면 찾아뵙겠다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주작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백호를 보고 말했다.
“욕수. 그대가 기형(麒兄)과 린자(麟姊)에게 입은 은혜를 생각하게. 기린 덕택에 도예께서 조용한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말이야.”
백호가 주작을 보고 표정을 구기며 말했다.
“걱정 마시오! 내가 언제까지 애들일 것 같소?”
주작이 백호를 보고 혀를 차며 말했다.
“현명 하나로 충분하니 제발 사고 치지 말게. 산천대제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주작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산천대제의 대답도 듣지 않고 남쪽으로 날아가 버렸다. 산천대제가 날아가는 주작의 뒷모습을 못마땅하게 보며 다시 주자서를 찾았다.
주자서는 온객행의 소매를 붙들고 그의 뒤에 서 있었다. 무슨 얘기를 했는지 온객행의 얼굴에 미소가 걸려있다. 산천대제가 온객행에게 말했다.
“종화산에 굳이 내자까지 가야 하겠는가? 흑망이 올 때까지 내가 옥산에서 그대의 내자와 기다리고 있겠네. 이름이 뭐라고 했지?”
응룡이 온객행 앞을 가로 막고 말했다.
“산천대제. 하늘에 소문이 자자합니다. 산천대제께서 희롱한 사람과 요괴가 한둘입니까? 대제의 뒤치다꺼리를 원군께서만 하셨겠어요?”
백호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산천대제를 보았다. 산천대제는 여인이고 사내고 그저 마음에 들면 멋대로 취하고 버렸기 때문에 신선들 사이에서 평판이 좋지 못했다. 사방신이나 오룡보다도 낮은 영력에 자기 일은 보통 사방신이나 금모원군에게 미루고 미색이나 탐했기 때문이다. 주자서가 발의 후손인 것을 모른다면 겉으로 보기에는 또 산천대제가 온객행의 내자를 탐하는 모양새였기 때문에 백호도 응룡의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응룡이 산천대제에게 손바닥을 펼쳐 길을 안내하며 말했다.
“산천대제 이쯤하고 동해로 가시지요.”
산천대제가 백호를 보자 백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흑망이 북해 용왕이 되면 어차피 오룡의 신하가 될 테니 걱정 마십시오.”
산천대제가 ‘흥’하고 코웃음 치고 응룡이 안내하는 데로 발걸음을 돌렸다. 응룡이 고개를 돌려 온객행에게 말했다.
“흑망. 종화산으로 가서 괜히 촉룡을 귀찮게 하지 말고 요대로 돌아가게.”
온객행이 소매를 들어 응룡에게 공수하고 말했다.
“경진선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산천대제가 응룡과 함께 사라지자 백호가 온객행에게 말했다.
“그 치가 발의 후손이오?”
온객행이 백호에게 소매를 들어 인사하며 말했다.
“흑망 욕수대선을 뵙습니다.”
주자서도 소매를 들어 인사했다. 백호가 주자서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예를 거두게. 발의 능력이 느껴지는군.”
주자서가 고개를 들어 백호를 보았다. 백호는 주자서의 얼굴을 한참 보더니 말했다.
“여인 치고는 흠….”
주자서가 자세를 바로 하고 소매를 털자 백호보다 세 치는 키가 컸다. 백호가 주자서를 올려보며 말했다.
“크군.”
온객행이 주자서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말했다.
“욕수대선, 우리 유서는 사내에요.”
백호가 주자서에게 시선을 떼지 못하고 말했다.
“발의 후손인데…?”
그러더니 온객행을 보고 물었다.
“발의 영력은 어떠한가? 벌써 취했는가?”
온객행이 표정을 구기고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무엇을 취한다는 말입니까? 영력은 금모원군께서 봉인하셔서 쓸 수 없습니다.”
백호가 아깝다는 듯이 온객행에게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너무 오래 봉인되어 있었나 보군! 이렇게 영력이 느껴질 정도인데 어찌 취할 수 없다는 말인가?”
온객행이 주자서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고 말했다.
“그 영력 때문에 우리 유서가 아파요.”
주자서는 온객행의 말에 눈을 굴리다 고개를 흔들었다.
백호가 주자서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내가… 내가….”
온객행이 주자서를 좀 더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탁음대선께서 발의 힘은 이미 주인이 있다 하셨습니다.”
백호가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그게 나일지 누가 아는가?”
온객행이 코웃음 치고 말했다.
“욕수대선께서는 태초의 가뭄을 모르십니까?”
백호가 주자서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그것이야 태초의 일이니 지금과는 다르지 않은가?”
온객행이 백호의 앞을 막아섰다.
“욕수대선께서는 오늘 제가 등선하는 것을 꼭 보셔야 하겠습니까?”
백호가 옥산 주변에 흐르는 강을 힐끔 보고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흑망 그런 뜻이 아니네. 그냥… 어떠한가 궁금해서 그랬네. 오랜만이기도 하지 않은가? 오광군(敖廣君; 청룡)과 전당군(錢塘君; 적룡)일지도 모르겠군.”
백호가 한발짝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그렇게 날을 세울 것 없네. 정말 별다른 뜻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야.”
온객행이 주자서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자기 옆에 붙이며 말했다.
“우리 유서를 위해서라면 등선은 일도 아니지요.”
백호가 표정을 구기고 말했다.
“촉룡의 제자인데 아무렴.”
백호가 한숨을 쉬고 말했다.
“그럼 나도 이만 가보겠네. 천도연때 또 보겠군.”
온객행이 주자서를 놓아주고 공수하여 인사하고 말했다.
“현명대선께 소금 잘 먹었다고 전해주십시오.”
백호가 고개를 휙 돌려서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아니! 흑망에게도 줬으면서 왜 나한테는!”
온객행이 웃으며 말했다.
“저야 수원대선께서 선물 받으신 것을 좀 얻어먹은 수준이지요.”
백호가 온객행에게 물었다.
“수원대선께서는 강녕하신가?”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태평호에 갇혀 계시지요.”
백호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그렇지… 어차피 그럴 것이면 도철(饕餮)이라도 되면 얼마나 좋은가?”
온객행이 백호를 쏘아보며 말했다.
“그게 무슨 뜻이오?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백호가 손사래를 치고 말했다.
“내가 실수했군. 못 들은 것으로 하게.”
온객행이 헛웃음 치고 말했다.
“욕수대선께서는 입을 조심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태금의 말씀을 잘 들으세요.”
백호가 하늘을 향해 우렁차게 ‘어흥’하고 울부짖자 하늘에서 구름이 쏟아졌다. 백호가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나야 태금이 하라는 대로만 하지.”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소매를 들어 고개를 조아려 인사했다. 주자서도 온객행을 따라 인사했다. 백호가 구름을 타고 서쪽으로 향했다.
주자서는 허리를 세우고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더니 말했다.
“조아리는 것도 일입니다.”
온객행이 주자서의 손을 잡고 말했다.
“조아리기 싫은가? 나도 어서 등선할까?”
주자서가 온객행을 흘겨보며 말했다.
“지금도 과분한데 뭐가 되시려구요?”
온객행이 주자서에게 몸을 붙이며 말했다.
“산천대제도 대제를 하고 있으니 나라고 못 되라는 법 있나?”
주자서가 골똘히 생각하더니 물었다.
“금모원군께 장가드시게요?”
온객행이 주자서의 말에 고개를 꺾어 ‘하하하’하고 크게 웃었다. 주자서는 온객행이 웃는 것을 보고 있다가 헛웃음을 치고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요대로 돌아갑니까?”
주자서의 말에 온객행이 웃음을 멈추고 주자서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주자서가 온객행에게 대답을 종용하듯 잡힌 손을 흔들자 온객행이 웃으며 말했다.
“우리라는 말 좋다.”
주자서는 별 시답지 않은 소리를 한다고 생각하며 한숨을 쉬고 말했다.
“그래서 요대로 갑니까?”
온객행이 주자서의 팔에 매달리며 말했다.
“유서. 우리 어떡할까? 우리 어떡하지?”
주자서가 잡힌 손으로 온객행을 ‘툭툭’ 치며 말했다.
“금모원군의 요대는 함부로 갈 수 없다고 하니 원군께서 부르실 때까지 기다립니까?”
온객행이 주자서의 얼굴을 보다가 얼굴을 붙여오자 주자서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정말. 흑랑!”
온객행이 눈썹을 늘어뜨리고 입을 내밀며 말했다.
“유서. 나 아픈 것 같네.”
주자서가 온객행의 손을 뿌리치려고 하자 온객행이 다시 주자서의 소매를 잡아 그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에이 알겠어. 복숭아나무 몇 그루 뽑으면 될 일을.”
주자서가 온객행을 휙 돌아보며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요? 애먼 복숭아나무는 왜 뽑으시오?”
온객행이 근처에 있는 복숭아나무를 살펴보며 말했다.
“말썽을 부리면 원군께서 벌하셔야 하니 나를 찾지 않겠소.”
주자서가 혀를 차며 말했다.
“어찌 그리 괴팍하시오?”
그리고 온객행을 화사 마을이 있는 중턱으로 이끌었다.
“말로 부탁할 수 있는 일은 말로 하시오.”
온객행이 주자서가 이끄는 대로 걸으며 말했다.
“그럼 내가 입 맞추고 싶으면 입 맞추고 싶다고 부탁하면 될 일이오?”
주자서가 인상을 쓰고 짜증 내며 말했다.
“정말, 그것은 그대만 좋은 일 아니오.”
온객행이 발걸음을 멈추고 주자서를 돌려 세웠다. 주자서가 온객행을 힐끔 보고 다시 몸을 돌려 가려고 하자 온객행이 주자서에게 말했다.
“정말 나만 좋은 일이오?”
주자서가 온객행을 보고 한숨 쉬며 말했다.
“그럼 나도 좋을 일이오?”
온객행이 주자서의 허리를 안고 몸을 붙이며 말했다.
“그럼 유서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을 때까지 합시다.”
주자서는 고개를 돌려 다가오는 온객행을 피하며 말했다.
“나는 사내를 좋아하지 않소!”
온객행이 주자서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고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내가 여인이라고 생각하고 해보시오.”
주자서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어찌… 그건 그대에게 못 할 짓이지 않소.”
온객행은 터지는 웃음을 겨우 참아내고 주자서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유서. 나는 정말 그대가 좋아요.”
주자서가 팔을 들어 온객행의 등을 쓸며 말했다.
“저도 싫어하지는 않습니다.”
온객행이 주자서를 더 당겨 안고 말했다.
“좋아해 주세요.”
주자서가 말없이 온객행의 등을 쓸었다. 온객행이 주자서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고 말했다.
“그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해주겠소. 그러니 나를 좋아해 주시오.”
주자서가 온객행의 말에 작게 웃었다. 정말 절절한 사랑 고백이다. 주자서는 자기의 뭐가 좋아서 온객행이 저에게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만난 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서로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더 많은데. 참으로 용감하다. 게다가 주자서는 내심 자신의 원서(遠逝)가 멀지 않았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딱히 몸이 아프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종종 아득하게 멀어지는 정신은 이제 주자서가 의지로 붙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온객행에게 짧다는 한 갑자도 채우지 못할 것 같아 또 상처를 주지는 않을까 걱정이 됐다. 주자서에게 싫어하지 않는다는 말은 좋아한다는 말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온객행이 그것을 알리 없으니 서로 엇갈리고 마는 것이다.
하늘에서 앙소가 내려와 물었다.
“내가 방해한 것인가?”
주자서가 온객행을 놓고 소매를 들어 인사하며 말했다.
“현조 어르신. 혹시 요대에 갈 수 있는 방법을 아십니까?”
앙소가 온객행을 힐끔 보고 말했다.
“내가 청조께 가서 고하고 오겠네. 조금 기다려 주겠나?”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이고 머리를 조아려 인사했다. 온객행도 주자서를 따라 고개를 끄덕였다. 앙소가 주자서에게 말했다.
“어디 가지 말고 거기 있게. 금방 오겠네.”
주자서는 앙소가 날아가는 것을 보고 있다가 복숭아나무 아래에 가서 앉았다. 해가 져서 어스름한 숲은 조금 스산하여 주자서가 온객행의 소매를 잡고 그를 옆에 앉혔다. 온객행이 주자서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붙어 앉으며 말했다.
“유서 배고프지 않나? 목마르지 않아?”
그리고 소매에서 대나무 수통을 꺼내 주자서에게 건넸다.
주자서는 수통의 물을 조금 마시고 고개를 흔들었다.
“괜찮습니다.”
온객행이 입을 내밀고 말했다.
“괜찮다는 말을 금지해야 하겠어.”
주자서가 수통을 다시 건네며 말했다.
“정말 괜찮아서 괜찮다 하는 것인데 금지라니요.”
온객행이 수통을 다시 소매 안에 넣고 말했다.
“괜찮아도 안 괜찮다고 해줬으면 좋겠네. 나에게 앙탈하고 기댔으면 좋겠어.”
주자서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앙탈이라니….”
온객행이 팔을 둘러 주자서를 안고 목덜미에 입술을 비비고 말했다.
“나에게만… 나에게만 그랬으면 좋겠어.”
주자서가 하늘을 보고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저까지 앙탈합니까? 흑랑께서 제 몫까지 하고 계시는데요.”
온객행이 주자서에게 얼굴을 떼고 ‘아!’하더니 말했다.
“그럼 내 앙탈만 받아주시오. 다른 사람 앙탈은 쳐다보지도 마시오.”
주자서가 웃으며 말했다.
“저에게 앙탈한들 제가 뭘 할 수 있겠습니까?”
온객행이 주자서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그냥 옆에 있어만 주면 됩니다. 다른 데 가지 말고 제 옆에 계세요.”
주자서의 턱을 잡아 자기 쪽으로 돌린 온객행이 주자서 입술에 입을 맞추고 말했다.
“받아주세요. 제 앙탈.”
주자서가 온객행의 얼굴을 한참 보더니 부스스 웃었다. 온객행이 다시 얼굴을 붙여 오자 주자서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밖에서 이러지 않기로 하셨잖아요.”
온객행이 주자서의 뺨에 입을 맞추고 말했다.
“여긴 아무도 없지 않소.”
주자서는 서늘한 온객행의 입술이 뺨과 목덜미를 희롱하는 것을 참아내고 있었다. 처음에는 조금 부끄러웠으나 음란한 일도 많이 하다 보면 익숙해지는 것인지 이제는 목덜미나 입술쯤, 닳는 것도 아닌데 맞붙이고 싶다고 하면 그냥 하게 두는 경우에 이르렀다. 남들 앞에서 그러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주자서는 하늘을 보며 ‘앙소가 언제쯤 오려나’ 같은 생각을 하며 온객행의 앙탈을 받아주었다.
명백히 희롱하는 꼴인 두 사람 앞으로 구름이 쏟아져 내리더니 청조가 나타났다. 주자서가 온객행을 밀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청조가 혀를 차며 말했다.
“정말이지. 요대에 볼일이 없어 간다고 한 이는 흑망 그대가 아닌가?”
온객행이 주자서 옆에 붙어 서며 볼멘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응룡께서 권하셨는데 거절합니까?”
청조가 온객행을 노려보며 손가락질했다. 청조의 뒤에 서 있던 청구와 양조가 앞으로 나와 온객행에게 말했다.
“원군께서 자네의 내자를 보살피라 명하셨으니 잘 부탁하네.”
주자서가 소매를 들어 인사했다.
“유서… 신수(神獸)를 뵙습니다.”
주자서의 호칭에 청조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신수… 사람들이 그렇게 부른다지?”
청구가 주자서를 보고 말했다.
“흑망. 왜 화사처럼 입혀 놓았는가? 너의 의취인가?”
온객행이 소매를 들어 청구와 양조에게 인사하고 말했다.
“그동안 평안하셨습니까?”
양조가 웃으며 말했다.
“덕분에.”
청구가 온객행에게 고갯짓하며 말했다.
“어서 오르시게. 요대로 가지. 수원대선이 왔어.”
온객행이 주자서의 허리를 안고 구름에 오르며 말했다.
“주요가?”
양조가 온객행을 쏘아보며 말했다.
“어디 감히 대선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느냐.”
온객행이 웃으며 말했다.
“다섯 갑자 동안 동고동락(同苦同樂)한 사이이니 이름 정도야….”
청조가 더는 못 봐주겠다는 듯 고개를 획 돌리고 먼저 앞서 걸었다. 양조가 다가와 주자서의 옷자락을 만지며 말했다.
“얘도 수원대선처럼 여인의 옷을 입는 것을 즐기는가?”
주자서가 표정을 구기며 말했다.
“아니오!”
온객행이 웃으며 말했다.
“우리 유서는 뭘 입어도 아름답지요.”
청구가 ‘허’하고 헛웃음 짓고 말했다.
“유서. 흑망을 잘 부탁하네. 제발 말썽부리지 못하게 꽉 잡고 계시게.”
주자서가 청구를 보고 말했다.
“제가요?”
양조가 청구에게 말했다.
“흑망이 잡는다고 잡혀 주겠나?”
온객행이 주자서를 보고 말했다.
“유서가 잡으면 잡혀주겠네.”
온객행의 말에 청구와 양조가 고개를 꺾어 ‘하하하’하고 크게 웃었다.
요대에 도착해서 온객행은 주자서를 놓아주고 중궁으로 향했다. 일단 요대에 들어왔으니 금모원군께 인사를 드리는 것이 순서에 맞았기 때문이다. 온객행이 조금 지친 듯한 주자서의 허리를 안고 청구에게 물었다.
“청구. 중궁으로 갑니까?”
청구가 고개를 돌려 어깨너머로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아니네. 원군께서는 좀 바빠. 천도연의 일도 있고 그대 내자의 일도 있고.”
양조가 주자서 곁으로 와서 그의 소매를 잡고 물었다.
“유서 왜 그러는가?”
온객행이 양조의 손을 치우고 말했다.
“밥도 안 먹이고 이렇게 오래 걸었으니 힘들어서 그렇지요.”
양조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배가 고파서 그런가?”
주자서가 고개를 흔들고 온객행을 밀어내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괘념치 마소서.”
온객행이 입을 앞으로 내밀고 부루퉁하게 말했다.
“나는 유서가 그 말하는 것이 제일 싫어.”
앞서 걷던 청구가 ‘하’하고 헛웃음 치고 말했다.
“유난은.”
양조가 주자서를 빤히 보며 말했다.
“뭐 못 봐줄 정도는 아니야.”
온객행이 주자서를 다시 자기 품으로 끌어안고 말했다.
“그만 보시오! 닳겠소.”
주자서가 깊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언제쯤 도착합니까?”
청구가 손가락으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문을 지나면 금방이네.”
남궁에 도착해서 온객행과 주자서는 주요와 다시 만났다.
복숭아빛깔 옷을 입고 얌전히 주요 옆에 앉아 눈치를 보던 고상은 남궁으로 들어오는 온객행을 보고 달려가 와락 끌어안고 말했다.
“파사!”
온객행이 당황하여 고상을 마주 안으며 말했다.
“아상! 아상도 같이 왔구나.”
주자서가 소매를 들어 고상에게 인사했다.
“아상.”
고상은 온객행 옆에 붉은 옷을 입은 사람이 주자서라는 것을 알고 활짝 웃으며 주자서도 끌어안았다.
“우리 아기.”
주자서가 낮게 웃으며 말했다.
“아상. 저 아상의 누이를 만났어요.”
고상이 고개를 들어 주자서의 뺨에 손을 대고 말했다.
“우리 아가. 파사가 잘 챙겨줬어?”
주자서가 온객행을 힐끔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고상이 물었다.
“우리 언니? 소나를 만났어?”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이고 머뭇거리더니 말했다.
“아상께서 주신 비녀가 마음에 드신다고 하셔서 드렸어요.”
고상이 눈썹을 찌푸리더니 금방 다시 웃으며 머리에 있는 나비 장식 하나를 떼서 주자서의 머리에 달아주며 말했다.
“이렇게 다시 만났으니까 됐어. 우리 유서.”
고상이 주자서가 입고 있는 옷을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나보다 더 화사 같네.”
고상을 지켜보고 있던 주요가 청구와 양조에게 인사하려고 하자 청구가 주요의 소매를 잡고 말했다.
“어찌 대선께 인사를 받습니까? 예를 거두세요.”
주요가 웃으며 말했다.
“나는 대선이 아니네.”
양조가 주요의 팔을 잡고 말했다.
“저희에게는 대선이시니 예를 거두세요.”
주요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그래. 이렇게 자주 보니 좋구나.”
양조가 웃으며 물었다.
“천룡은 어떻게 잘 떼고 오셨어요?”
주요가 표정을 구기며 고개를 흔들고 말했다.
“아주 탐욕스러운 아이야. 사자형제보다 더 해.”
청구가 웃으며 말했다.
“가시기 전에 또 들러 주세요.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말씀하시구요. 다 드리겠습니다.”
양조가 청구를 거들며 말했다.
“필요하신 것이 있으면 빼앗아서라도 드릴 테니 꼭 말씀하세요.”
주요가 웃으며 말했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네. 정말….”
청구가 물었다.
“원군은 만나 뵈셨어요?”
주요가 고상에게 고갯짓하고 말했다.
“우리 아이를 공공께서 부르셔서 나는 같이 왔어.”
청구와 양조가 주자서를 꼭 안고 있는 고상을 보고 말했다.
“저 화사 말씀이십니까?”
주요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네. 예쁘지?”
양조가 웃으며 말했다.
“많이 컸네요.”
주요가 청구의 소매를 잡고 물었다.
“공공께서는 어디에 머무시는가?”
청구가 고개를 들어 남궁을 지키는 군관 몇에게 눈짓하더니 말했다.
“남궁 내실에 머무세요. 원군께서 수원대선께서 오시면 동궁으로 모시라고 하셨습니다.”
주요가 손사래 치고 말했다.
“내가 어찌 동궁에? 안될 말이네. 별궁에 머물러야지.”
양조가 주요에게 바짝 다가가 귓가에 속삭였다.
“송구스럽습니다만 발의 아이를 부탁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요가 미간을 찌푸리고 청구와 양조를 보았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려 주자서와 고상을 보았다. 비슷한 옷에 비슷한 머리 모양을 하고 있는 고상과 주자서는 얼핏 보면 정말 혈육 같아 보였다.
주요가 주자서에게 다가가 말했다.
“어찌 화사의 옷을 입었는가?”
주자서가 고상을 떼어놓고 소매를 들어 공수하여 인사하며 말했다.
“주인.”
온객행이 주자서의 등허리에 손을 얹고 말했다.
“주요. 나 유서에게 장가들었네. 그대가 중매한 것으로 했어.”
주요와 고상이 동시에 온객행을 보고 소리 질렀다.
“뭐?!”
“뭐라구!”
주요가 관자놀이를 짚으며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온객행. 뭐라고?”
온객행이 주자서의 손을 잡고 말했다.
“종화산에서 가약을 맺었소. 덕분에 참한 내자를 얻었으니 정말 천은(天恩)이 망극하오.”
주자서가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소첩은 정말 소박맞고 싶습니다.”
온객행이 주자서를 보고 울상을 만들어 말했다.
“어찌 얻은 내자인데… 게다가 어찌 중매한 사람 앞에서 그런 모진 말이시오.”
주요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내가 언제 중매를 했다는 말인가?”
온객행이 주자서의 머리에 꽂혀 있는 비녀를 매만지며 말했다.
“주요가 아니었으면 나 같은 파사가 어디서 이런 내자를 얻었겠소.”
고상이 온객행을 밀며 말했다.
“이게 무슨 소리야? 우리 아가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온객행은 고상에게 웃으며 말했다.
“아상, 이제 내 처모(妻母)가 되시니 제가 예의를 갖춰야 하겠네요.”
그리고 고상에게 소매를 들어 절했다. 고상이 온객행의 팔을 잡고 말했다.
“안돼! 내가 못 봤잖아. 우리 아이가 혼인했는데 내가 못 보는 게 어디 있어? 다시 해! 내가 보는 데서 다시 해!”
주자서가 다급하게 아상의 소매를 붙들고 말했다.
“아상. 그게 아니에요. 희첩이라 언제 내쳐질지 모릅니다.”
고상이 주자서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말했다.
“어디 감히 우리 아이를 내친다는 말이야? 희첩이라니? 우리 아이는 정실이 아니면 못 줘.”
주자서가 표정을 구기며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을 하며 고상의 팔을 잡고 말했다.
“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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