暗渡陳倉 | 19. 은밀히 진창을 건넌다.
온객행은 금모원군에게 종화산으로 돌아가겠다는 소리는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남궁에서 산천대제를 기다리고 있는 주작(朱雀)과 백호(白虎)를 만나러 갔다. 남궁의 외실에 앉아 있던 주작과 백호가 금모원군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다.
“원군.”
금모원군은 두 사람의 인사를 받지 않고 제일 상석으로 가서 쓰러지듯 누우며 말했다.
“축융(祝融), 욕수(蓐收), 우리가 이렇게 자주 보는 사이였던가요?”
붉게 타는 듯한 깃털 장식을 한 주작이 소매를 들어 올려 고개를 조아리고 말했다.
“원군. 북해 용왕의 일로 바빠서 동왕공께 소홀했습니다.”
하얀 호랑이의 가죽을 피풍의처럼 두른 백호가 옆에 무릎 꿇고 말했다.
“청룡이 중원의 일로 너무 바빠서 동왕공께 소홀 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산천대제가 백호와 주작을 보고 혀를 차며 말했다.
“그대들이 모시는 상전은 서왕모인가?”
그리고 걸어서 금모원군이 앉은 상석 옆에 앉았다. 백호와 주작은 표정을 구기고 산천대제를 힐끔 보더니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한숨을 쉬었다.
봉황이 들어와 주작과 백호를 일으키며 말했다.
“축융대선, 욕수대선 예를 거두세요. 원군께서 그대들을 탓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말에 금모원군이 옆에 있는 산천대제를 쏘아보며 ‘흥’하고 코웃음 쳤다. 주작과 백호가 금모원군의 눈치를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응룡이 다가와 말했다.
“요즘 동쪽이 퍽 시끄럽습니다.”
응룡의 말에 백호가 응룡을 노려보며 말했다.
“구망대선(句芒大仙)께서는 중원을 준비하신다고 눈코 뜰 새 없이 바쁜데 어찌 경진선께서는 한가해 보이십니다?”
주작이 백호를 나무라며 말했다.
“원군과 대제 앞에서 이게 무슨 무례인가? 욕수!”
백호가 다시 시선을 상석을 돌리고 고개를 조아렸다. 응룡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분수에 맞지 않은 일을 하고 계시니 스스로 우환을 만들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까? 구망대선께서는….”
황룡이 하늘에서 쫓겨난 이후에 사방신과 오룡의 수장이었던 현천상제의 부재를 대신해서 사방신과 오룡에 모두 속한 청룡 구망대선이 그들을 지휘하는 일을 맡았다. 청룡은 현무가 된 현명대선과 사이가 좋지 못했다. 원래 사방신과 오룡의 수장은 항상 현무가 맡아 왔고, 원래대로라면 현명대선이 수장을 맡는 것이 맞았으나 사방신과 오룡 중에서도 가장 어리고 하늘의 일에 관하여 잘 모르는 현명대선을 수장으로 둘 수는 없는 지라 청룡이 현명대선이 자리를 잡을 때까지 임시로 맡았던 수장직이 굳어져 그렇게 되었다. 다른 사방신과 오룡은 각자 맡은 일이 바빠 수장 자리에 큰 관심이 없었고, 청룡 역시 사방신과 오룡의 일로 늘 바빴기 때문에 그저 이름뿐인 자리이기도 했다.
그 이름뿐인 자리를 현명대선은 가지고 싶어서 안달인 것이고, 그것을 얻어보고자 산천대제를 꼬드겨서 일을 키우는 것이다. 응룡은 너무 바쁜 청룡 대신해 팔자에도 없는 사방신 노릇까지 해야 하니 사방신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봉황이 응룡을 나무라려고 하는데 백호가 불쑥 끼어들어 말했다.
“흑망의 내자가 발의 후손이라는 것이 사실이오?”
봉황과 응룡 뒤에 얌전히 서 있던 온객행이 백호의 말에 표정을 구기며 생각했다. ‘태금께서 벌써 고(告)했군.’ 백호가 온객행에게 다가와 물었다.
“내자는 어디 있는가?”
온객행이 소매를 들어 백호에게 인사했다.
“흑망. 욕수대선을 뵙습니다.”
백호가 온객행의 소매를 잡아 일으키며 말했다.
“예를 거두게. 태금에게 들었어. 그 아이는 어디 있지?”
온객행이 난처해하며 대답을 망설이자 응룡이 다가와 온객행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말했다.
“발의 후손에게 왜 이렇게까지 관심을 두십니까? 산천대제께서 하신 것처럼 백호께서도 흑망의 내자를 범하시려고요?”
백호가 깜짝 놀라 산천대제를 보고 말했다.
“대제께서?”
산천대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응룡에게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내가 언제 발의 아이를 욕보였다는 말인가? 그저 그 아이가 양친의 허락도 없이 혼례를 올린 것이 잘못되었으니 바로잡으려고 그리 한 것이지!”
금모원군이 불편하다는 듯이 한숨을 쉬자 상석 옆에 있던 초록색 옷을 입은 시동이 다가와 금모원군의 시중을 들었다. 금모원군이 말했다.
“시끄럽다. 시끄러워. 이 이야기를 어찌 내 앞에서 하는가? 가서 촉룡께 하라니까?”
봉황이 산천대제에게 소매를 들어 공수하고 말했다.
“탁음대선께서 허락하신 혼인인데 감히 누가 시야비야(是也非也)할 수 있겠습니까?”
촉룡의 이름이 나오자 산천대제도 백호도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며 입을 꾹 다물었다. 온객행이 주변의 눈치를 보며 금모원군께 공수하고 말했다.
“원군께 더는 폐를 끼칠 수 없어 흑망은 스승님께 가려고 합니다.”
금모원군이 산천대제를 보고 눈썹을 들어 올리더니 물었다.
“동왕공. 어찌 하시겠소? 흑망과 종화산에 가시겠소?”
산천대제가 다시 금모원군 곁으로 가서 그녀의 소매를 잡고 말했다.
“부인, 정말 다른 뜻이 있어서 그 아이를 데려가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초조한 듯 온객행에게 손가락질하더니 말했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천도연인데 언제 갔다 언제 다시 오겠다는 말인가?”
금모원군이 소매를 털자 청구와 양조가 나타나 금모원군에게 다가갔다. 금모원군은 그들에게 뭐라고 말한 다음 자리에서 일어나 상석 아래로 내려갔다.
산천대제가 금모원군을 따르자 금모원군이 말했다.
“동왕공. 동왕공. 나는 자리싸움에는 관심이 없어요. 원군 자리가 탐이 나시는 거면 가서 천존께 달라고 하세요. 어찌나 일이 많은지 당장이라도 때려 치고 싶은데….”
산천대제의 대제라는 칭호는 순전히 금모원군 덕분이었다. 그가 금모원군의 부군이 아니었다면 그는 대선은커녕 승천하지 못했을 것이다. 금모원군의 말을 들은 응룡과 봉황이 금모원군께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원군. 통촉(洞燭)하소서.”
금모원군이 봉황과 응룡의 어깨를 손으로 짚어 그들을 일으키고 말했다.
“그래. 그래. 나 때문에 우리 아이들이 고생이지.”
금모원군이 어깨너머로 산천대제를 쏘아보며 말했다.
“그대들의 아이들이 그대를 위해 고생하는 것은 아십니까?”
그리고 주작과 백호를 마주하고 말했다.
“축융, 욕수, 어서 대제를 데리고 동해(東海)로 돌아가세요.”
주작과 백호가 금모원군에게 인사하고 산천대제를 부축했다.
산천대제가 표정을 구기며 주작과 백호를 보았다. 금모원군이 산천대제를 보고 말했다.
“우리는 천존께서 정한 대로 격년에 한 번만 만나는 것으로 되어 있으니 다음 격년에는 뵙지 않겠습니다. 천도연에는 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주작의 팔에 손을 올리고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축융. 사방신과 오룡은 천도연에서 해야 할 일이 있으니 말을 전해 참석하도록 하세요.”
주작과 백호가 고개를 끄덕이고 산천대제를 부축하며 남궁을 나갔다. 산천대제는 나가면서 서 있는 온객행을 노려보았는데 온객행은 소매를 들어 공수하며 고개를 조아렸다.
금모원군이 봉황과 응룡을 데리고 중궁으로 향하며 말했다.
“패하(覇下)는 아직 안 왔는가?”
봉황이 고개를 조아리고 말했다.
“백룡과 흑룡의 일 때문에 잠시 늦어지는 듯합니다.”
금모원군이 고개를 끄덕이며 온객행에게 고갯짓했다. 온객행은 봉황과 응룡의 뒤를 따랐다. 응룡이 말했다.
“희발(姬發)도 패하를 도우러 가셨으니 아마 늦어질 것 같습니다.”
금모원군이 고개를 돌려 응룡을 보고 말했다.
“그럼 읍강(邑姜)은?”
응룡이 봉황을 힐끔 보자 봉황이 대신 답했다.
“린자(麟姊)는 지금 오고 계시는 중입니다.”
금모원군이 잠깐 눈을 감고 숨을 고르더니 눈썹을 찌푸리고 말했다.
“그런데 발의 아이는 어디에 갔지?”
온객행이 고개를 들어 금모원군을 보고 물었다.
“원군. 무슨 말씀입니까? 유서는 지금 별궁에….”
금모원군이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요대에 없는데?”
온객행의 놀란 얼굴을 하더니 곧 금모원군과 사령(四靈)을 지나쳐 별궁으로 달려갔다.
금모원군이 온객행의 뒷모습을 보고 응룡에게 기대더니 말했다.
“경진. 네가 동왕공을 배웅해라. 혹시 또 발의 아이를 데려가려고 하거든… 흠… 혼내 줘라.”
응룡이 밝게 웃으며 두 손을 공손하게 모으고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원군! 원군께서 허락하신 겁니다. 봉황! 들었지?”
봉황이 ‘허허허’ 웃으며 응룡에게 손짓하자 응룡은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다시 남궁으로 향했다. 봉황이 금모원군께 다가가 물었다.
“원군. 천도연에 오성진군(五星眞君)께서 오십니까?”
금모원군이 웃으며 봉황의 얼굴을 톡톡 쳤다.
“우리 안시는 눈치가 너무 좋구나.”
금모원군은 다시 중궁으로 향하며 말했다.
“진군께서 미천한 원군의 연회에 오시겠는가? 걱정 말게. 천존께서 생각하신 것이 있으실 테니 우리는 그저 할 일을 하면 돼.”
그리고 봉황을 향해 빙긋 웃었다.
온객행은 정말 오랜만에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만큼 달렸다. 별궁에 도착하여 객실의 문을 열고 주자서를 찾았다.
“유서! 유서!”
방 안에는 가구가 몇 없어 황량했기 때문에 객실 안에 아무도 없다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었다. 온객행의 눈에 동문이 있는 쪽으로 열린 창호 문이 보였다. 온객행은 객실을 나와 창호 문이 보이는 곳에 있는 정원과 객실을 모두 뒤졌지만 주자서는 보이지 않았다. 온객행이 객실에서 멀지 않은 동문에 있는 군병에게 물었다.
“우리 유서를… 검은 옷을 입은 사내… 우리 유서를….”
허둥지둥 정신없이 말하는 온객행을 보고 깃털 갑옷을 입은 군관이 말했다.
“검은 옷을 입은 파사라면 보았지요. 어떻게 요대에 들어왔는지는 몰라도 제 발로 옥산으로 나갔으니 별일 없을 거요.”
온객행이 군관의 어깨를 잡고 흔들며 말했다.
“그는 파사가 아니란 말이오!”
온객행의 날카로운 영력에 군관이 주춤하며 무기에 손을 가져갔다.
온객행은 군관을 놓고 말했다.
“원군께 흑망이 종화산으로 갔다고 전해주시오.”
군관이 온객행을 막으며 말했다.
“그것은 원군께서 허락한 일이오?”
온객행이 한숨을 쉬고 옷매무새를 정갈히 하고 군관을 보고 말했다.
“촉룡의 제자 흑망이 스승님께 간다고 전해 주시오.”
그리고 동문의 보초를 서는 군관을 위아래로 보고 피식 웃더니 말했다.
“요대의 군령(軍令)은 몹시 누긋한가 보오?”
온객행의 말에 보초를 서고 있던 군관들이 온객행을 위협하며 말했다.
“흑망! 요대에서 무엄하다!”
온객행이 웃으며 말했다.
“요대에 볼일이 없으니 이만 가보겠소.”
군관들은 온객행이 나가는 것을 막으려고 하였으나 그의 영력에 기가 눌려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들은 유유히 걸어 동문을 나가는 온객행을 구경할 수밖에 없었다. 곧 별궁 근처를 순찰하던 군관이 동문의 소란을 발견하고 다가왔지만 온객행은 이미 동문을 빠져나간 뒤였다. 깃털 갑옷을 입은 군관이 날아올라 중궁으로 향했다.
성령은 소나에게 먹어도 좋다고 허락을 받은 복숭아를 주자서에게 건넸다. 주자서는 소매에서 작은 칼을 꺼내 복숭아를 깎아서 성령이를 먹였다. 주자서가 하는 것을 보고 있던 주변의 복숭아를 받은 아이들이 주자서에게 다가와 하나둘 복숭아를 내밀었다. 주자서는 웃으며 복숭아를 받아 그것을 까서 아이들의 입에 넣어 주었다. 어떤 아이는 등에 검은 날개가 있었고 어떤 아이는 고상처럼 눈이 온통 새빨갰다.
성령이 신이 나서 말했다.
“시랑께서 하신 말씀 기억나?”
아이들이 복숭아를 먹으며 성령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시랑께서 사람은 정말 맛있다고 했어. 그런데 사람을 먹으면 정신이 나가서 미칠 수도 있다고 하셨어.”
복숭아를 먹던 빨간 눈의 아이가 말했다.
“사람을 먹으면 영력이 많아진 데.”
주자서는 해맑은 얼굴로 사람을 먹는다는 말을 하는 애들에게 좀 질려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빨간 눈의 아이가 주자서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왜 너에게서 파사 냄새가 나?”
주자서가 소매를 들어 몸에 냄새를 맡고 물었다.
“그래?”
아이들이 주자서의 옷자락을 들고 하나둘 냄새를 맡으며 말했다.
“정말 파사 냄새가 나. 근데 화사 냄새도 나.”
성령이 주자서를 보고 물었다.
“너는 화사야?”
주자서는 조금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아마 절반 정도는….”
아이들이 웃으며 말했다.
“에이, 그게 뭐야.”
주자서가 복숭아를 20개쯤 깠을 때 소린이 다가와 말했다.
“주자서! 희상랑께서 찾으시네.”
주자서는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 반가워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들이 주자서의 소매를 잡고 말했다.
“아이, 복숭아는 그럼 누가 까줘.”
소린이 아이들을 주자서에게 떼어내며 말했다.
“원래는 껍질째 잘 먹으면서 갑자기 왜들 이래!”
주자서가 눈을 가늘게 뜨고 아이들을 보다가 ‘하하하’ 하고 웃었다. 그리고 소매를 들어 소린에게 인사하며 말했다.
“소린낭자. 손이 더러워서 그런데 손을 씻을 수 있을까요?”
주자서의 공손한 말에 소린이 조금 당황하며 말했다.
“어… 어… 저쪽에 우물이 있으니 그 쪽에 가서 닦으시오!”
주자서가 성큼성큼 걸어서 우물로 향하자 성령이 소린에게 다가와 말했다.
“소린자 나 저 사람 좋아. 우리랑 같이 살면 안돼?”
소린이 성령의 뺨을 쓰다듬고 말했다.
“안돼. 사람이 어떻게 옥산에서 살아.”
축(筑)이 다가와 말했다.
“언니. 저 사람한테서 화사 냄새가 나.”
성령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절반 정도는 화사래.”
소린이 눈썹을 찌푸리고 우물에서 손을 씻는 주자서를 보며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절반은 화사라니?”
축이 말했다.
“사람한테서 좋은 냄새나.”
그리고 성령을 보더니 뭐가 재미있는지 둘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히히히’ 웃었다.
주자서는 소린과 함께 다시 신당으로 들어갔다. 어느 정도 준비를 마쳤는지 커다란 함에 비단 천으로 감싼 복숭아와 찬합 여러 개가 근처에 있었다. 부몽이 같이 들어온 소린을 손짓으로 물리고 주자서의 소매를 잡아 신당 내부로 데려가며 말했다.
“일단 이 시커먼 옷부터 어떻게 해보자.”
내실 안에는 분홍색 옷을 입은 소녀들과 소나가 있었는데 소나가 주자서를 위아래로 보더니 말했다.
“말랐군.”
소녀들이 주자서를 세워놓고 이리저리 자를 대보더니 붉은색 옷감을 가지고 바느질을 하기 시작했다.
소나가 주자서를 의자에 앉히고 머리에 비녀를 보고 말했다.
“아! 수원대선!”
소나는 주자서의 머리의 비녀를 빼서 손에 만져보더니 주자서를 쏘아보고 말했다.
“감히 너 따위가.”
주자서는 여태 머리를 고정하던 옥비녀가 갑자기 황송(惶悚)했다. 주자서가 뭐라고 말할 새도 없이 부몽이 다가와 그의 머리를 소녀들의 머리처럼 빗겨주고 소나의 손에서 옥비녀를 빼앗아 주자서의 머리를 고정하며 말했다.
“소나. 수원대선께서 주시지 않았으면 이런 미천한 것이 어찌 그분의 물건을 가질 수 있겠어.”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조금 화난 기색의 소나를 보았다. 소나는 씩씩대더니 내실을 나가버렸다.
부몽이 주자서의 머리를 이리저리 돌려 보더니 말했다.
“그래도 아주 눈치가 없는 놈은 아닌가 보다.”
주자서가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제가 지은 죄가 많아 천벌을 받는 중이지요.”
부몽이 주자서의 말에 ‘하하하’ 하고 웃었다. 바느질을 하던 아이들이 붉은 색 장포를 부몽에게 건넸다. 부몽이 장포를 주자서에게 건네며 물었다.
“시중이 필요한가?”
주자서가 고개를 흔들고 말했다.
“괜찮습니다.”
그리고 내실을 둘러보더니 옷걸이와 병풍이 있는 곳으로 가서 요대를 풀고 검은 장포를 벗었다. 그가 하는 것을 보고 있던 소녀들이 ‘까르르’하고 웃었다. 부몽이 소녀들을 보고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저 아이의 키가 크니 높은 신발을 신어야겠다.”
부몽의 말에 소녀들이 분주하게 부몽을 데리고 내실을 나갔다. 주자서는 텅 비어 있는 내실을 여기저기 둘러보다가 이곳이 여인의 방인 것이 생각나서 ‘큼큼’하고 헛기침을 한 뒤에 탁자에 가서 앉았다. 소녀들과 비슷한 머리모양을 한 것이 어색해서 머리에 있는 비녀를 손으로 더듬었다. ‘그렇게 대단한 것인지 몰랐네….’
소나가 내실로 들어와 주자서에게 고갯짓했다. 주자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소나를 따라 다시 신당으로 갔다. 부몽은 높은 신발에 화려한 머리 장식을 하고 소나가 준비한 천도(天桃)가 든 함을 살펴보더니 소나를 보고 활짝 웃었다. 소나가 고개를 숙여 부몽에게 인사했다.
“희상랑.”
부몽이 주자서를 위아래로 보더니 말했다.
“그대는 요대에 도착할 때까지 고개를 들지 말게.”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부몽은 고분고분한 주자서의 행동에 조금 마음이 누그러진 상태였다. 부몽이 신당의 신위를 향해 절을 하고 양손을 들어 입김을 불더니 그 입김이 점점 안개가 되어 신당 안을 가득 채웠다. 주자서는 고상이 부유각을 안개로 채운 것이 생각나서 작게 웃었다. 곧 신당의 신위에서 구름이 내려오더니 요대로 향하는 구름길이 나타났다.
부몽이 구름 위로 올라서자 소나가 복숭아가 든 함을 들었다. 주자서도 소나 옆으로 가서 복숭아가 든 함을 들었다. 소나와 주자서가 구름길로 올라 가려고 하는데 주자서는 구름을 밟을 수가 없어서 주춤하는 바람에 소나가 얼른 영력으로 함을 잡았다. 소나가 주자서를 보고 혀를 차면서 말했다.
“정말이지 쓸모라고는….”
주자서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소나가 함을 앞으로 먼저 보내고 주자서에게 다가와 그의 팔을 붙잡았다. 주자서는 여인에게 매달리는 것이 조금 부끄러웠으나 다른 방법이 없어 소나의 소매를 붙잡았다. 소나는 눈을 감고 숨을 고르더니 주자서의 요대를 잡았다.
깜짝 놀란 주자서가 소나를 보았다. 소나의 눈은 고상이 그랬던 것처럼 새빨갛게 변해 있었다.
“너는 꼼짝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
소나의 말에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이고 소나의 소매를 놓았다. 세 사람이 구름길을 거의 다 지나 요대 입구가 보이는 즈음 삼족오가 날아와 부몽에게 말했다.
“희상랑! 흑망이! 흑망이!”
부몽이 고개를 돌려 구름길 끝을 보았다. 부몽이 작게 고개를 흔들고 소나에게 말했다.
“소나. 그 아이를 놔줘라.”
소나는 부몽의 말을 듣자마자 고민하는 기색 없이 주자서의 요대를 놓았다. 주자서는 소나의 소매를 다급하게 잡으려다 소나의 매서운 눈초리에 움찔하며 때를 놓쳤다. 그리고 바닥으로 밑으로 꺼지기 시작했다. 주자서는 자기도 모르게 그를 찾았다.
“흑랑!”
추락하는 주자서를 받은 것은 온객행이 아니라 현조 앙소였다. 앙소가 주자서의 손을 잡아 그를 구름 위에 있는 온객행에게 안겨주었다. 주자서는 온객행의 얼굴을 보고 조금 반가워서 웃었다. 온객행은 주자서를 품에 안더니 어깨에 고개를 묻고 말했다.
“유서. 유서….”
주자서가 온객행을 마주 안으며 말했다.
“요대가 그렇게 가기 힘든 곳인지 몰랐소.”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주자서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구름 위에서 뛰어내렸다. 주자서는 놀라서 온객행의 목에 팔을 감고 눈을 꼭 감았다. 옥산 아래로 내려온 온객행이 주자서를 땅에 내려놓고 이리저리 살펴보며 물었다.
“유서 어디 다친 곳은 없는가?”
주자서는 조금 놀라서 자리에 주저앉으며 말했다.
“흑랑. 어디서 뛰어내릴 거면 좀 말을 하고 하시오.”
온객행이 주자서의 타박에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말했다.
“유서….”
주자서가 한숨 쉬고 말했다.
“괜찮습니다. 별일 없었어요. 그냥 옥산의 화사들과 복숭아를 먹었습니다.”
온객행이 주자서를 와락 안고 말했다.
“말도 없이 어디를 간 거야?”
주자서가 온객행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아… 그러게 왜 가둬 두셨소?”
온객행이 주자서를 놓아주고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가둔 것이 아니네. 내가 그대를 왜 가두겠는가? 못 들어오게 막은 거지.”
주자서는 온객행을 보고 눈을 깜빡이더니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아… 그렇군.”
온객행이 주자서에게 물었다.
“그렇게 답답했는가? 도망가고 싶을 만큼?”
주자서가 온객행을 보고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도망쳐도 됩니까?”
온객행이 다시 주자서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안 돼. 안 되네. 절대 안 돼.”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초연(超然)하게 말했다.
“역시 그렇겠죠.”
온객행은 한참 동안 주자서를 놓아주지 않고 품에 안고 있었다. 주자서는 혹시 또 우나 싶어서 그의 기색을 살폈지만 온객행은 주자서의 어깨에 고개를 묻고 놀란 마음을 진정하고 있는 것 같았다. 죽지도 않았고 다시 만났는데 유난스럽다고 생각한 주자서는 안겨서 주변에 있는 복숭아나무를 구경했다. 저 멀리 복숭아를 따는 아이들이 둘을 보고 경계하는 것이 보이길래 소매를 들어 그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주자서가 손짓한 곳을 힐끔 돌아본 온객행이 일어나서 주자서를 일으키며 말했다.
“화사가 되기로 하셨소?”
주자서가 소매를 들어 이리저리 펄럭이더니 말했다.
“뭐 이미 반쯤은 화사가 아니오.”
온객행이 일어난 주자서의 허리를 끌어안고 주자서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주자서는 작게 한숨 쉬며 말했다.
“덕분에 물비린내가 난다 합니다.”
온객행이 표정을 구기고 주자서를 놓아주며 말했다.
“누가 그런 소리를 한다는 말이오?”
주자서가 손바닥을 펴더니 하나씩 꼽으며 말했다.
“현리낭자, 청조, 금모원군, 산천대제, 희상랑….”
온객행은 하나씩 접히는 손가락을 보고 ‘그렇게 많았나?’ 생각하며 주자서의 손을 잡고 말했다.
“아이, 유서 그런 것이 무슨 상관인가?”
주자서가 온객행의 손을 놓고 붉은 소매를 털며 말했다.
“헤엄도 못 치는데 물비린내가 난다고 하니 억울해서 그렇지요.”
온객행이 주자서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말했다.
“내가 가르쳐 주겠네.”
주자서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물은 싫습니다.”
온객행이 주자서에게 기대며 말했다.
“어쩌지? 내가 용왕이 되면 물속에서 살지도 모르는데.”
주자서가 온객행을 보고 물었다.
“용왕이 되시게요?”
온객행이 주자서 얼굴을 빤히 보다가 가깝게 붙여오자 주자서가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밖에서 이러는 것도 싫습니다.”
온객행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고 말했다.
“주변에 아무도 없으면 괜찮은 것 아닌가?”
주자서가 온객행의 품에서 나와 옥산을 둘러보며 말했다.
“싫으면 내치시오.”
온객행이 얼른 주자서에게 다가가 손을 잡으며 말했다.
“내가 언제 싫다 했는가? 그냥… 아쉬워서 그렇지….”
주자서는 주변을 둘러보고 물었다.
“요대로 돌아갑니까?”
온객행이 주자서에게 물었다.
“돌아가고 싶소?”
주자서가 잠시 고민하는 사이 하늘에서 구름이 쏟아지더니 산천대제와 주작, 백호가 나타났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손을 잡아 그의 곁으로 끌어당겼다. 산천대제가 온객행에게 다가가 말했다.
“촉룡께서 허락하셨다고는 하나 어찌 부모의 허락 없이 혼례를 올린다는 말인가?”
온객행이 소매를 들어 공수하고 인사하며 말했다.
“내자의 병이 나으면 찾아 뵐 것입니다.”
산천대제가 주자서를 보고 말했다.
“병? 아프다는 말이냐?”
산천대제가 가까이 다가오자 주자서가 공수하고 손을 모아 말했다.
“대제께서 어찌 소인을 찾으십니까?”
주자서의 말에 산천대제가 그의 팔을 잡고 말했다.
“그대가 발의 후손이니 내가 그대에게 전하고자 하는 것이 있어서 그러하네.”
주자서가 산천대제의 손을 소매를 털어 뿌리치고 말했다.
“소인은 이미 흑망의 내자가 되었으니 전하고자 하는 것이 있으시면 그에게 전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온객행의 뒤로 가서 섰다. 온객행이 다시 소매를 들어 공수하고 산천대제에게 말했다.
“저희 내외는 종화산 탁음대선께 금모원군의 초대를 전하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뒤에 서 있던 백호가 코웃음 치고 말했다.
“언제 촉룡께서 초대에 응하신 적이 있는가?”
온객행이 소매를 내리고 백호를 보며 말했다.
“이번엔 또 모르는 일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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