借刀殺人 | 25. 칼을 빌려 사람을 죽인다.
고상은 주자서의 몸속에서 터지려고 하는 영력의 근원을 찾아 그 내단(內丹)을 몸으로 감쌌다. 이 영력의 힘을 막아낼 만큼의 힘이 없다는 것을 고상은 잘 알고 있었지만 이대로 그냥 두면 주자서의 영혼이 모두 타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렇게 했다. 온몸이 탈 것 같은 열기를 감싸 안으며 고상은 생각했다. ‘내가 없으면 주요는 어떡하지? 유서. 주요를 부탁해.’ 고상은 태평호에서 가장 즐거웠던 시기를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다섯 갑자 동안 행복했으니 영혼이 타버린다고 해도 아쉽지 않았다. 남은 이들이 아주 잠깐만 슬퍼하고 가끔 그녀가 생각나면 홍주로 혼을 불러 주었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고상이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금빛 갑옷을 입고 하늘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그녀의 뒤를 따르는 것은 적송자와 뇌공으로, 그들의 힘에 눌린 응룡이 땅으로 추락하는 것을 보았다. 고상은 날아가는 것을 멈추고 뒤따라온 적송자와 뇌공에게 말했다.
“이 싸움을 멈추시오. 그대들도 이미 알고 있지 않소.”
뇌공이 뇌부를 휘두르며 말했다.
“말이 많군.”
고상이 뇌공을 향해 눈을 번쩍 뜨자 뇌공을 감싸고 있던 구름이 순식간에 증발했다. 뇌공이 고상을 보고 말했다.
“정말 골치 아프군.”
적송자가 구름을 불러 비를 내리려고 하자 고상은 다시 팔을 크게 휘둘러 적송자가 부르는 구름도 흩어버렸다. 적송자가 ‘쯧’ 하고 혀를 차며 말했다.
“너는 누구의 뜻으로 우리와 싸우는 것이냐?”
고상이 적송자와 뇌공을 보고 말했다.
“치우께서는 천존의 명(命)을 다하셨으니 삼원으로 돌아가는 것이 맞습니다.”
뇌공이 말했다.
“치우께서 원치 않으시네!”
고상이 손을 모아 두 사람에게 공수하고 말했다.
“그것은 치우께서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번쩍 떠서 적송자와 뇌공의 힘을 흩어냈다. 그들은 곧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더니 땅으로 추락했다.
고상은 고개를 돌려 하늘의 길에 들어가려는 치우를 막아내고 있는 서왕모와 동왕공을 보았다. 그들이 부리는 사방신과 사령이 다가와 막았지만 역부족이었다. 고상은 황룡에게 다가가 말했다.
“부친. 저에게 치우를 막아낼 힘이 있습니다.”
황룡이 다가온 고상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
“그래! 하지만 죽여서는 안된다. 그를 궁지로 몰아넣어라. 너의 일은 거기까지다.”
고상은 고개를 조아려 인사했다.
“예. 부친.”
고상은 하늘 높이 날아올라 불의 신인 치우에게 다가갔다.
“치우. 제발 싸움을 멈추세요. 그대의 명이 다한 것은 천존께서 결정하신 일입니다.”
치우가 고상을 보고 코웃음 치며 말했다.
“내가 최고 신이 된다면 모든 것은 내가 결정하는 일이 된다.”
고상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치우. 제발 싸움을 멈추세요. 삼원까지 일이 미치면 그다음은 아무도 치우를 도울 수 없습니다.”
치우가 크게 웃으며 말했다.
“여기 너희들이 감히 나를 막을 수 있겠느냐?”
치우의 몸이 하얗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물과 바람을 다스리는 사방신과 사령의 기운이 약해지더니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땅으로 추락했다. 동왕공이 땅으로 추락하자 서왕모가 고상에게 말했다.
“발! 어서 치우를 막아라. 너뿐이다.”
황룡의 모습으로 변한 황룡이 땅으로 추락하면서 발을 보았다. 발은 추락하는 동료 신선들을 보고 있다가 서왕모에게 말했다.
“자리를 피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서왕모는 고개를 끄덕이고 추락하는 신선들에게 향했다. 발은 치우를 보고 슬프게 웃었다. 발은 단 한 번도 모두 개방한 적 없는 태양의 힘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알고 있었다. 이 힘으로 치우뿐만 아니라 땅의 모든 것들이 고통받을 것이라는 것을. 하지만 발은 힘을 멈추지 않았다. 치우는 발의 영력에 그 혼이 모두 타버리고 말았다. 발은 개방된 태양의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땅으로 추락했다.
발이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황룡이 그녀를 보고 있었다. 발은 몸을 일으켜 공수하여 인사했다.
“부친.”
황룡은 손을 들어 발의 뺨을 내려쳤다. 황룡에게 맞은 뺨을 움켜쥐고 발이 황룡을 보았다. 황룡이 말했다.
“죽이지 말라 했거늘! 그를 궁지로 몰아넣는 것 까지가 너의 일이라 했거늘!”
발이 다시 손을 모으고 말했다.
“부친, 방법이 없었습니다. 제가 그리하지 않았다면 치우께서 삼원에….”
황룡이 다시 손을 들어 발의 뺨을 치고 말했다.
“닥쳐라! 내가 허락하지 않은 일을! 감히 일개 천녀가 천신을 죽인다는 말이냐?”
황룡이 발에게서 등을 돌리고 말했다.
“나는 너 같은 딸을 두지 않았다. 당장 내 눈앞에서 사라져라!”
발이 눈물을 보이며 말했다.
“부친. 잘못했습니다.”
황룡이 코웃음 치며 말했다.
“감히 천녀 따위가.”
황룡은 모습을 바꿔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것이 발이 기억하는 부친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이후로 발은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사람의 세상에 몸을 숨겼다. 그것도 쉽지 않았던 것이 태양의 힘이 너무 강해지는 바람에 그녀가 가는 곳은 어디든 가물었다. 마침내 사람들은 그녀를 가뭄 귀신이라 부르며 인정 없이 모질게 대했다. 천존이 발을 찾았을 때 그녀는 어두운 동굴 속에서 혼자 울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은 뺨에 닿기도 전에 모두 말라버렸다.
고상은 마음이 아파서 눈물이 났다. 발에게 다가가 위로해주고 싶었다. 언제인가 파사가 고상에게 해주었던 것처럼 주요가 매번 고상에게 하는 것처럼. 동굴 속에 울고 있는 발에게 다가간 고상이 말했다.
“울지 마요. 내가 같이 있어 줄게요. 나랑 같이 태평호로 갈래요?”
발이 고개를 들어 고상을 보고 말했다.
“태평호?”
고상이 고개를 끄덕이며 발에게 다가갔다. 발이 손을 앞으로 내밀어 고상을 막으며 말했다.
“오면 안돼. 나에게 오면 너도 타서 없어질 거야.”
고상이 발의 손을 잡고 그녀를 안으며 말했다.
“나는 햇빛 쬐는 것을 좋아해요. 복숭아는 조금 가물어야 더 달아지거든요.”
발이 고상을 마주 안으며 말했다.
“어떡해야 할지 모르겠어. 나는 너무 무서워.”
고상이 눈을 감고 발을 더 가깝게 끌어안으며 말했다.
“마음이 불안해서 그래요. 나도 마음이 불안하면 원래의 모습으로 변하는데 그럼 주요가 나를 이렇게 안아줬어요. 그럼 다시 마음이 편해져서….”
고상은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졸음에 의아하여 눈을 뜨고 발을 보았다. 발이 고상을 보고 웃으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고마워. 너는 자격이 있어. 나처럼 외롭지 않았으면 해.”
고상이 눈썹을 찌푸리자 발이 손을 들어 그녀의 찌푸린 눈썹을 쓸고 말했다.
“나는 너를 여름(夏)이라고 부를래.”
공중으로 떠오른 주자서의 몸을 잡으려는 산천대제를 현무가 막으며 말했다.
“대제 안 됩니다. 이미 봉인이 풀렸어요.”
산천대제가 발을 동동 구르며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봉인이 풀리다니?”
지주가 소매를 들어 현무에게 말했다.
“대선, 발의 아이와 태평호 무지기의 화사를 함께 데려왔는데 화사가 보이지 않습니다.”
황룡이 자리에서 쓰러지며 말했다.
“발의 아이가 영력을 흡수하고 있어요. 모두 방에서 나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즉저가 황룡을 부축해 방을 나가며 말했다.
“화사 따위가 발의 영력을 버티겠습니까?”
현무가 고개를 끄덕이며 산천대제를 부축해 방을 나갔다. 방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발의 영력에 기운을 뺏겼는지 쓰러져 있었다. 지주가 현무를 따르며 말했다.
“화사가 다 타면 그때 팔주령에 봉인하시죠.”
현무가 고개를 끄덕이며 방의 장지문을 닫고 건물에 진을 쳤다. 현무가 건물에 진을 치자마자 건물에서 새하얀 빛이 쏟아져 나오더니 하늘로 작은 용이 승천하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현무가 승천하는 용을 보며 말했다.
“막아라! 저 용이 승천해서는 안된다!”
즉저와 지주가 하늘로 날아올랐지만 땅에 사는 그들이 용을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건물 주변으로 구름이 쏟아지더니 결국 작은 용은 하늘로 승천하고 말았다.
하늘에 닿은 고상은 몸에 느껴지는 태양의 힘이 얼떨떨하여 천궁의 입구에 멀뚱히 서 있었다. 곧 하얀 영비를 두른 현녀가 다가와 그녀를 데리고 천존께서 사신다는 자미궁(紫微宮)으로 갔다. 자미궁 안에는 진성현녀와 사자가 함께 서 있었다. 고상이 천존이 계신다는 상석 앞으로 가서 넙죽 엎드려 인사했다.
“태평호의 화사 고상. 천존을 뵙습니다.”
고상의 인사에 진성현녀가 다가와 그녀를 일으키며 말했다.
“화사였구나.”
고상이 고개를 들자 발이 그녀를 일으켜 주었다. 고상은 반가워서 그녀의 손을 잡고 물었다.
“발?”
진성현녀가 고상의 뺨을 쓸며 말했다.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네. 그 이름.”
진성사자가 다가와 조아리며 말했다.
“천존께서 명하십니다.”
고상은 다가온 진성사자의 모습이 온객행과 비슷하여 자기도 모르게 작게 그를 불렀다.
“파사?”
진성현녀가 고상을 놓아주고 상석을 보며 소매를 들어 공수하고 말했다.
“황룡 하(夏)를 오룡의 수장으로 봉하소서.”
고상은 눈치를 보다가 다시 상석 쪽으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고상이 고개를 들어 소매 너머로 힐끔 상석을 보았으나 상석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곧 주변에 있던 현녀와 사자가 모두 무릎을 꿇었다. 상석에서 작은 빛이 내려오더니 고상의 이마에 가서 박혔다. 고상은 점점 뜨거워지는 이마를 붙들고 정신을 놓아버렸다.
주요는 두손으로 든 술잔을 놓치고 말았다.
“아상!”
주요가 자리에서 일어나 동궁으로 향하려고 하자 금모원군이 그를 막으며 말했다.
“수원? 무슨 일인가?”
주요가 금모원군을 뿌리치고 말했다.
“아상의 진(陣)이 사라졌어요. 아상은 어디 있습니까?”
금모원군이 미간을 찌푸리며 남궁을 지키고 있는 호위 여우에게 말했다.
“동궁으로 가서 청구를 데려와라.”
그리고 주요의 소매를 잡으며 말했다.
“수원. 아직 우리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네.”
주요는 크게 동요하며 말했다.
“아상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아요. 우리 아상은 어디 있습니까?”
금모원군이 주요를 다시 자리에 앉히고 적송자와 뇌공에게 눈치를 주었다. 뇌공이 자리에서 일어나 공공에게 가며 말했다.
“공공은 어찌 아직도 일어나지 못해?”
적송자가 금모원군을 보고 말했다.
“아무래도 어서 제자를 거두러 가야 하겠는데?”
금모원군이 적송자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패하는 지금쯤 현악(玄嶽; 무당산)에 있을 것입니다.”
적송자가 남궁을 나가며 말했다.
“현무와 함께 있겠군.”
그리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주요가 금모원군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원군. 저에게 중하를 지우지 마세요. 원군께서 하시려는 일이 무엇인지 알겠습니다. 제가 도울 수 있는 것은 모두 돕겠습니다. 하지만 그 자리는 제 몫이 아닙니다.”
금모원군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주요. 땅에서 후토가 어찌 영력을 보존하여 지탱하는지 아는가?”
주요가 표정을 구기며 말했다.
“설마….”
금모원군이 주요를 보며 말했다.
“그대의 상전 황룡은 하늘에서 쫓겨나며 죽었네.”
주요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설마… 설마….”
금모원군이 주요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수원. 황룡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을 막아주게.”
주요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주요는 금모원군을 보고 흐느끼더니 곧 양손을 들어 얼굴을 묻었다. 금모원군은 한숨을 쉬며 떨리는 주요의 등을 쓸었다.
뇌공은 공공과 온객행이 누워있는 평상으로 가서 그들을 보았다. 도철이 된 공공은 딱히 하늘에 미련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풍문으로는 그가 하늘로 올라가려고 한다 던 데 오늘 만난 공공은 오히려 서왕모를 돕고 있었다. 그는 도철이 되면서 촉룡과 척을 졌기 때문에 서쪽에는 잘 오지 않았는데 요대에서 공공을 만날 줄은 몰랐다. 뇌공이 다시 자리에 앉아 술잔을 들었다. 뇌공이 생각하기에 지금 이 사달은 어째 누군가가 일부러 만들고 있는 것 같았다. 오랫동안 공석으로 비워 두었다는 자리도 그렇고 갑자기 자리 따위를 탐내서 일을 벌이는 신선이라니 뇌공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겨우 한 갑자가 어찌 오랫동안이 될 수 있을까?
몇 백 몇 천 갑자를 사는 신선들에게 자리가 대체 무슨 소용일까? 그저 오늘 하루 즐겁고 술을 마실 수 있으면 족한 것을. 그러다 뇌공은 한숨을 쉬고 왜 요대에 오게 되었는지 생각했다. 뇌공은 외로웠다. 동왕공의 치기(稚氣)에 어울린 것은 정말 단순히 그가 외로웠기 때문이다. 아마 미쳐버렸다는 도예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들은 너무 오래 살았다. 영원한 안식을 허락받지 못한 그들이 정신을 놓고 미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이 천존께서 그들에게 내린 벌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뇌공은 문득 치우가 떠올랐다. 치우는 태양의 힘에 타오르면서 웃고 있었다. 어쩌면 그가 정말로 원했던 것은 천존의 자리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다시 정신이 든 주자서는 객실 바닥에 누워 있었다. 작게 신음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살펴보았다. 조금 어수선하게 어질러진 것을 제외하면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주자서는 얼굴과 몸 여기저기를 만져보았다. 뜨겁게 타는 것 같은 느낌이 있었는데 만져보니 멀쩡했다. 주자서는 얼른 침상으로 가서 뱀으로 변한 고상을 찾았다. 이불을 모두 들추어 보았지만 뱀이 보이지 않았다. 주자서는 작은 목소리로 고상을 불렀다. 그러다 장지문으로 가서 장지문을 열려고 했으나 별궁에서 그랬던 것처럼 문은 열리지 않았다. 보이는 창호 문 마다 모두 가서 열어 보았지만 역시나 열리지 않았다.
주자서는 다시 서안으로 가서 앉으며 생각했다. 이 곳의 서책들은 대부분이 별의 위치를 계산하는 내용이다. 혼천설(渾天說)을 따르는 것으로 보아 나라에서 운영하는 서원 같다. 다시 내부를 살펴보니 벽에 걸린 편액은 천문도(天文圖)이고 나무로 만든 혼천의(渾天儀)도 보였다. 고상과 헤어지기 전에 해화상의 물길이 하수의 물길인 것 같다 했으니 이곳은 형주 양양(襄陽) 근처일 것이다. 별을 관측하는 서원이라면 높은 산 위에 있을 테니 양양에 있는 가장 높은 산이라면 무당산일 가능성이 제일 컸다. 주자서는 품에서 염낭을 꺼내 부절을 찾았다. 그러다 편연주에서 부절을 온객행에게 줬다는 것이 기억났다. 다시 나라로 돌아왔지만 신분을 증명할 길이 없다. 오히려 그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괜히 도망병이라는 신분을 들키면 자신뿐만 아니라 모친과 당질도 위험했다.
주자서는 한참 생각하다가 고개를 들어 대들보를 보았다. 평상을 잘 밟고 올라가면 위로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주자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평상 위로 올라가 대들보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동량(棟梁) 사이로 몸을 비집고 들어가니 서까래가 보였다. 서까래로 손을 넣어 들어보니 기와가 들렸다. 주자서는 동량에 몸을 기대 서까래를 발로 찼다. 서까래 몇 개를 치우고 기와를 치우니 주자서가 나갈 수 있을 만큼의 틈이 생겼다. 주자서는 낑낑대며 밖으로 나왔다. 건물 주변이 안개로 가득했다. 주자서는 멀쩡한 서까래를 잘 배치하여 나온 구멍을 다시 기와로 잘 막고 건물 주변을 보았다. 건물 근처에서 보초를 서던 사람들이 모두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하늘을 보니 서원 위로 구름이 둥글게 모여들어 마치 방금 뭔가 하늘로 승천한 것처럼 보였다.
주자서는 지붕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르고 생각했다. 막상 정말로 도망치려고 하니 갈 데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친께 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온객행에게 가자니 방법이 없었다. 그러다 주자서는 혹시 뱀이 된 고상에게 그 지주라는 자가 몹쓸 짓을 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주자서는 머리에 있는 비녀를 찾았다. 비녀를 보고 한참 앉아있던 주자서는 비녀를 부러뜨리려고 했다. 주요가 준 비녀는 조금 짧아서 손으로 부러뜨리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었다. 주자서는 한참 씨름을 하다가 비녀를 지붕 위에 올려 놓고 발로 밟았다. 그제야 비녀가 부러지더니 조금씩 삭아 들기 시작했다. 전부 삭아 가루가 된 비녀는 돌풍을 일으키며 사라졌다. 주자서는 비녀가 사라진 곳을 보고 있다가 주변을 살펴보고 지붕 아래로 내려왔다. 주변에 쓰러져 있는 병졸과 옷을 바꿔 입고 머리를 정리해서 병졸처럼 상투를 틀었다. 옷을 갈아입혀 놓고 보니 붉은 장포는 정말 여인이 입는 옷 같았다.
손에 얼굴을 묻고 울고 있던 주요는 주자서에게 주었던 비녀가 깨진 것을 느꼈다. 고개를 들어 금모원군을 보고 말했다.
“유서는 어디 있습니까?”
금모원군이 곤란한 표정을 했다. 청구가 들어와 금모원군에게 인사했다.
“원군. 부르셨습니까?”
주요가 자리에서 일어나 청구에게 물었다.
“화사와 발의 아이는 어디 있소?”
청구가 금모원군의 눈치를 보고 고개를 더 깊숙이 조아렸다. 금모원군이 작게 혀를 차며 말했다.
“아무래도 현무가….”
주요가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금정(金頂)”
금모원군이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어찌 아는가?”
주요가 금모원군을 보고 말했다.
“유서가 그곳에 있습니다. 지금 당장 가 봐야겠어요.”
금모원군이 주요를 막으며 말했다.
“내가 방금 적송자를 보내지 않았나? 적송자께서 화사를 데려오실 거야.”
주요가 금모원군을 뿌리치고 말했다.
“아니요. 아상은 제가 데려오겠습니다.”
금모원군이 주요의 팔을 잡고 말했다.
“그럼 흑망을 등선시키게. 그럼 보내주지.”
주요가 금모원군을 보고 말했다.
“무슨 뜻입니까? 원군?”
금모원군이 주요를 보고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흑망이 흑룡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차고 넘치지 않는가?”
주요가 잠시 생각하더니 다시 물었다.
“천존께서 흑망에게 주시려는 자리가 북해 용왕자리가 아닙니까?”
금모원군이 주요의 어깨를 감싸 안고 말했다.
“그래. 이래야 수원이지.”
주요가 고개를 돌려 평상에 누워있는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등선한다고 해도 그 자리를 하려고 하지 않을 텐데요?”
금모원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 촉룡의 제자들은 하나같이 욕심이 없어서 말이야.”
주요가 다시 고개를 돌려 금모원군을 보았다. 금모원군이 주요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일단 구색을 갖추자는 것이지 혹시 모를 일 아닌가?”
주요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흑망을 등선시키는 것은 어려울 일이 아니지요. 내자에게 푹 빠져 있으니 내자를 쥐고 흔들면 됩니다. 그러니 제가 더욱 더 금정에 가야지요.”
금모원군은 눈을 굴리고 잠깐 생각하더니 대답하지 않았다.
주요가 금모원군의 품에서 나와 소매를 들어 공수하고 말했다.
“원군. 적송자께서는 유서를 모릅니다. 저를 보내주세요.”
금모원군이 평상에서 자는 온객행을 힐끔 보고 말했다.
“발의 영력으로 찾으실 수 있을 걸세. 걱정 말라니까?”
주요가 표정을 구기며 말했다.
“원군!”
금모원군이 고개를 끄덕이며 주요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
“알겠네! 알겠어. 가보게. 대신 후토를 죽여서는 안되네.”
주요가 고개를 들어 금모원군을 보았다. 금모원군이 주요에게 다가가 귓가에 속삭였다.
“그는 궁기(窮奇)가 되어 규산(刲山)에 봉인되어야 하니까.”
주요는 더 묻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아상과 유서가 걱정되어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현악으로 향했다. 놀다가 다쳐서 진이 지워진 것이라고 별일 아니라고 계속 되뇌었지만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불안을 어찌할 수 없어 주요의 영력이 한껏 날카로워졌다.
금모원군이 뇌공에게 다가가 말했다.
“이제 공공은 다시 동쪽으로 돌아가도 되겠어요.”
뇌공이 공공을 보고 말했다.
“이제 자는 척은 그만하게.”
공공이 표정을 구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원군. 저는 사흉이에요.”
뇌공이 코웃음 치며 말했다.
“그러게 응룡을 돕긴 왜 도왔나?”
공공이 자리에서 일어나 소매를 털고 말했다.
“청룡이 하도 닦달을 해대니 저라고 방법이 있습니까?”
금모원군이 공공에게 물었다.
“검영은 어떨 것 같나?”
공공이 코웃음 치며 말했다.
“원군께서 말씀하셨잖아요. 촉룡의 제자들은 욕심이 없다고.”
금모원군이 한숨을 쉬고 말했다.
“하긴 그랬으니 촉룡께서 제자로 받았겠지.”
공공이 금모원군을 쏘아보며 말했다.
“처음부터 후토가 어디 있는지 아셨죠?”
금모원군이 놀라는 척을 하고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나는 정말 몰랐네. 천존께서 하시는 일을 내가 어찌 알겠나?”
공공이 코웃음 치며 말했다.
“진군께 뭔가 들은 것이 있으시지요?”
금모원군이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돌려 뇌공을 보았다.
뇌공이 누워있는 온객행을 보고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이 치는…?”
금모원군이 뇌공의 소매를 잡고 말했다.
“뇌공.”
공공이 눈치를 보다가 금모원군에게 말했다.
“원군. 발의 아이는 어떻게 됐습니까?”
원군이 온객행을 보며 말했다.
“촉룡께서 이미 주인이 있다 하셨으니 그것은 걱정할 필요 없어.”
공공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아이참! 원군 이렇게 안일하셔서.”
원군이 웃으며 공공을 보고 말했다.
“그러니 그대가 나를 돕는 것이 아닌가?”
공공이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태평호의 수선(水仙)으로 봉하시지요.”
금모원군이 눈썹을 찌푸리고 말했다.
“태평호?”
공공이 고개를 끄덕이며 소매를 들어 공수하고 말했다.
“흑망이 살던 서호에는 이미 다른 아이가 있으니 비어 있는 태평호에 봉하십시오.”
금모원군이 ‘흠’ 하더니 말했다.
“그 쪽은 사람이 별로 없어서 정말 한직이 될 텐데….”
공공이 몸을 세우고 금모원군을 보고 말했다.
“수선이 되고 난 다음에 그가 뭐가 될지는 천존께서 정하시겠지요.”
금모원군이 웃으며 말했다.
“그것도 그렇군.”
뇌공이 금모원군을 보고 말했다.
“그 사람과 닮았군.”
공공이 겸연쩍게 웃으며 말했다.
“본인이 모르는 것 같아서 그냥 두었는데 그렇게 되었습니다.”
뇌공이 다시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누군가 이 치를 위해 별이 되었나 보군.”
금모원군이 작게 한숨 쉬고 말했다.
“깨어나면 바로 봉하도록 하겠습니다.”
뇌공이 금모원군을 보고 물었다. 흑망은 사내가 아닌가? 어찌 자네가 봉작(封爵)을 내리는가? 동왕공은?”
금모원군이 코웃음 치며 말했다.
“동왕공이 일 하는 것을 보셨습니까?”
뇌공이 표정을 구기며 말했다.
“그래도 동왕공의 옥새(玉璽)가 필요하지 않은가?”
금모원군이 몸을 돌려 중궁으로 향하며 말했다.
“천존께서 내리신 옥새는 하나뿐입니다. 그리고 그 옥새는 한 번도 제 손을 떠난 적이 없지요.”
뇌공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동왕공을 죽이라니까.”
금모원군이 몸을 돌려 뇌공을 보고 소매를 들어 인사하며 말했다.
“죽을 만큼 잘못하지 않았어요. 단지 분수에 맞지 않는 자리에 앉아 있을 뿐. 뇌공께서는 어서 도예께 가보세요. 필요하신 것은 말씀만 하세요. 서왕모가 돕겠습니다.”
뇌공은 고개를 끄덕이고 남궁을 나가며 말했다.
“오늘 마신 술이 도화주(桃花酒)인가? 아주 맛이 좋더군.”
서왕모가 뇌공이 나가는 길에 인사하며 말했다.
“기린편에 도예께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온객행이 눈을 떴을 때 온객행은 혼자 남궁 외실 평상에 누워 있었다. 주안상은 모두 치워진 상태였고 녹색 옷을 입은 시동이 입구에 서 있었다. 온객행이 일어난 것을 보고 물이 담긴 대야를 가져와 건네며 말했다.
“흑망께서는 중궁으로 드시지요.”
온객행은 대야에 간단히 관수하고 옷매무새를 단정히 했다. 그러다 동궁에 주자서가 생각나 시동에게 물었다.
“죄송한데… 내자를 만나고 가도 되겠습니까?”
시동이 단호하게 고개를 젓고 말했다.
“원군의 허락 없이 동궁에 가실 수 없습니다.”
온객행은 고개를 끄덕이고 시동을 따라 중궁으로 향했다. 오래 잤는지 해가 높이 떠 있었다. 중궁에 도착하자 용호좌 위에 나른하게 앉아 있는 금모원군이 보였다. 온객행이 나아가 소매를 들어 공수하고 인사했다.
“흑망. 원군을 뵙습니다.”
금모원군이 고개를 돌려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취수와 약수는 건넜으니 봉호(封號)를 내리 노라.”
금모원군 옆에 있던 섬여가 두루마리를 들고 온객행에게 왔다. 온객행은 얼떨결에 두루마리를 받고 금모원군에게 머리를 조아려 인사했다.
“서호의 흑망. 원군의 명령을 받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