蛇苺 第25

借刀殺人 | 25. 칼을 빌려 사람을 죽인다.

고상은 주자서의 몸속에서 터지려고 하는 영력의 근원을 찾아 그 내단(內丹)을 몸으로 감쌌다. 이 영력의 힘을 막아낼 만큼의 힘이 없다는 것을 고상은 잘 알고 있었지만 이대로 그냥 두면 주자서의 영혼이 모두 타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렇게 했다. 온몸이 탈 것 같은 열기를 감싸 안으며 고상은 생각했다. ‘내가 없으면 주요는 어떡하지? 유서. 주요를 부탁해.’ 고상은 태평호에서 가장 즐거웠던 시기를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다섯 갑자 동안 행복했으니 영혼이 타버린다고 해도 아쉽지 않았다. 남은 이들이 아주 잠깐만 슬퍼하고 가끔 그녀가 생각나면 홍주로 혼을 불러 주었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고상이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금빛 갑옷을 입고 하늘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그녀의 뒤를 따르는 것은 적송자와 뇌공으로, 그들의 힘에 눌린 응룡이 땅으로 추락하는 것을 보았다. 고상은 날아가는 것을 멈추고 뒤따라온 적송자와 뇌공에게 말했다.
“이 싸움을 멈추시오. 그대들도 이미 알고 있지 않소.”
뇌공이 뇌부를 휘두르며 말했다.
“말이 많군.”
고상이 뇌공을 향해 눈을 번쩍 뜨자 뇌공을 감싸고 있던 구름이 순식간에 증발했다. 뇌공이 고상을 보고 말했다.
“정말 골치 아프군.”
적송자가 구름을 불러 비를 내리려고 하자 고상은 다시 팔을 크게 휘둘러 적송자가 부르는 구름도 흩어버렸다. 적송자가 ‘쯧’ 하고 혀를 차며 말했다.
“너는 누구의 뜻으로 우리와 싸우는 것이냐?”
고상이 적송자와 뇌공을 보고 말했다.
“치우께서는 천존의 명(命)을 다하셨으니 삼원으로 돌아가는 것이 맞습니다.”
뇌공이 말했다.
“치우께서 원치 않으시네!”
고상이 손을 모아 두 사람에게 공수하고 말했다.
“그것은 치우께서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번쩍 떠서 적송자와 뇌공의 힘을 흩어냈다. 그들은 곧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더니 땅으로 추락했다.

고상은 고개를 돌려 하늘의 길에 들어가려는 치우를 막아내고 있는 서왕모와 동왕공을 보았다. 그들이 부리는 사방신과 사령이 다가와 막았지만 역부족이었다. 고상은 황룡에게 다가가 말했다.
“부친. 저에게 치우를 막아낼 힘이 있습니다.”
황룡이 다가온 고상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
“그래! 하지만 죽여서는 안된다. 그를 궁지로 몰아넣어라. 너의 일은 거기까지다.”
고상은 고개를 조아려 인사했다.
“예. 부친.”
고상은 하늘 높이 날아올라 불의 신인 치우에게 다가갔다.
“치우. 제발 싸움을 멈추세요. 그대의 명이 다한 것은 천존께서 결정하신 일입니다.”
치우가 고상을 보고 코웃음 치며 말했다.
“내가 최고 신이 된다면 모든 것은 내가 결정하는 일이 된다.”
고상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치우. 제발 싸움을 멈추세요. 삼원까지 일이 미치면 그다음은 아무도 치우를 도울 수 없습니다.”
치우가 크게 웃으며 말했다.
“여기 너희들이 감히 나를 막을 수 있겠느냐?”
치우의 몸이 하얗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물과 바람을 다스리는 사방신과 사령의 기운이 약해지더니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땅으로 추락했다. 동왕공이 땅으로 추락하자 서왕모가 고상에게 말했다.
“발! 어서 치우를 막아라. 너뿐이다.”
황룡의 모습으로 변한 황룡이 땅으로 추락하면서 발을 보았다. 발은 추락하는 동료 신선들을 보고 있다가 서왕모에게 말했다.
“자리를 피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서왕모는 고개를 끄덕이고 추락하는 신선들에게 향했다. 발은 치우를 보고 슬프게 웃었다. 발은 단 한 번도 모두 개방한 적 없는 태양의 힘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알고 있었다. 이 힘으로 치우뿐만 아니라 땅의 모든 것들이 고통받을 것이라는 것을. 하지만 발은 힘을 멈추지 않았다. 치우는 발의 영력에 그 혼이 모두 타버리고 말았다. 발은 개방된 태양의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땅으로 추락했다.

발이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황룡이 그녀를 보고 있었다. 발은 몸을 일으켜 공수하여 인사했다.
“부친.”
황룡은 손을 들어 발의 뺨을 내려쳤다. 황룡에게 맞은 뺨을 움켜쥐고 발이 황룡을 보았다. 황룡이 말했다.
“죽이지 말라 했거늘! 그를 궁지로 몰아넣는 것 까지가 너의 일이라 했거늘!”
발이 다시 손을 모으고 말했다.
“부친, 방법이 없었습니다. 제가 그리하지 않았다면 치우께서 삼원에….”
황룡이 다시 손을 들어 발의 뺨을 치고 말했다.
“닥쳐라! 내가 허락하지 않은 일을! 감히 일개 천녀가 천신을 죽인다는 말이냐?”
황룡이 발에게서 등을 돌리고 말했다.
“나는 너 같은 딸을 두지 않았다. 당장 내 눈앞에서 사라져라!”
발이 눈물을 보이며 말했다.
“부친. 잘못했습니다.”
황룡이 코웃음 치며 말했다.
“감히 천녀 따위가.”
황룡은 모습을 바꿔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것이 발이 기억하는 부친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이후로 발은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사람의 세상에 몸을 숨겼다. 그것도 쉽지 않았던 것이 태양의 힘이 너무 강해지는 바람에 그녀가 가는 곳은 어디든 가물었다. 마침내 사람들은 그녀를 가뭄 귀신이라 부르며 인정 없이 모질게 대했다. 천존이 발을 찾았을 때 그녀는 어두운 동굴 속에서 혼자 울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은 뺨에 닿기도 전에 모두 말라버렸다.

고상은 마음이 아파서 눈물이 났다. 발에게 다가가 위로해주고 싶었다. 언제인가 파사가 고상에게 해주었던 것처럼 주요가 매번 고상에게 하는 것처럼. 동굴 속에 울고 있는 발에게 다가간 고상이 말했다.
“울지 마요. 내가 같이 있어 줄게요. 나랑 같이 태평호로 갈래요?”
발이 고개를 들어 고상을 보고 말했다.
“태평호?”
고상이 고개를 끄덕이며 발에게 다가갔다. 발이 손을 앞으로 내밀어 고상을 막으며 말했다.
“오면 안돼. 나에게 오면 너도 타서 없어질 거야.”
고상이 발의 손을 잡고 그녀를 안으며 말했다.
“나는 햇빛 쬐는 것을 좋아해요. 복숭아는 조금 가물어야 더 달아지거든요.”

발이 고상을 마주 안으며 말했다.
“어떡해야 할지 모르겠어. 나는 너무 무서워.”
고상이 눈을 감고 발을 더 가깝게 끌어안으며 말했다.
“마음이 불안해서 그래요. 나도 마음이 불안하면 원래의 모습으로 변하는데 그럼 주요가 나를 이렇게 안아줬어요. 그럼 다시 마음이 편해져서….”
고상은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졸음에 의아하여 눈을 뜨고 발을 보았다. 발이 고상을 보고 웃으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고마워. 너는 자격이 있어. 나처럼 외롭지 않았으면 해.”
고상이 눈썹을 찌푸리자 발이 손을 들어 그녀의 찌푸린 눈썹을 쓸고 말했다.
“나는 너를 여름(夏)이라고 부를래.”


공중으로 떠오른 주자서의 몸을 잡으려는 산천대제를 현무가 막으며 말했다.
“대제 안 됩니다. 이미 봉인이 풀렸어요.”
산천대제가 발을 동동 구르며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봉인이 풀리다니?”
지주가 소매를 들어 현무에게 말했다.
“대선, 발의 아이와 태평호 무지기의 화사를 함께 데려왔는데 화사가 보이지 않습니다.”
황룡이 자리에서 쓰러지며 말했다.
“발의 아이가 영력을 흡수하고 있어요. 모두 방에서 나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즉저가 황룡을 부축해 방을 나가며 말했다.
“화사 따위가 발의 영력을 버티겠습니까?”
현무가 고개를 끄덕이며 산천대제를 부축해 방을 나갔다. 방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발의 영력에 기운을 뺏겼는지 쓰러져 있었다. 지주가 현무를 따르며 말했다.
“화사가 다 타면 그때 팔주령에 봉인하시죠.”
현무가 고개를 끄덕이며 방의 장지문을 닫고 건물에 진을 쳤다. 현무가 건물에 진을 치자마자 건물에서 새하얀 빛이 쏟아져 나오더니 하늘로 작은 용이 승천하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현무가 승천하는 용을 보며 말했다.
“막아라! 저 용이 승천해서는 안된다!”
즉저와 지주가 하늘로 날아올랐지만 땅에 사는 그들이 용을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건물 주변으로 구름이 쏟아지더니 결국 작은 용은 하늘로 승천하고 말았다.

하늘에 닿은 고상은 몸에 느껴지는 태양의 힘이 얼떨떨하여 천궁의 입구에 멀뚱히 서 있었다. 곧 하얀 영비를 두른 현녀가 다가와 그녀를 데리고 천존께서 사신다는 자미궁(紫微宮)으로 갔다. 자미궁 안에는 진성현녀와 사자가 함께 서 있었다. 고상이 천존이 계신다는 상석 앞으로 가서 넙죽 엎드려 인사했다.
“태평호의 화사 고상. 천존을 뵙습니다.”
고상의 인사에 진성현녀가 다가와 그녀를 일으키며 말했다.
“화사였구나.”
고상이 고개를 들자 발이 그녀를 일으켜 주었다. 고상은 반가워서 그녀의 손을 잡고 물었다.
“발?”
진성현녀가 고상의 뺨을 쓸며 말했다.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네. 그 이름.”
진성사자가 다가와 조아리며 말했다.
“천존께서 명하십니다.”
고상은 다가온 진성사자의 모습이 온객행과 비슷하여 자기도 모르게 작게 그를 불렀다.
“파사?”
진성현녀가 고상을 놓아주고 상석을 보며 소매를 들어 공수하고 말했다.
“황룡 하(夏)를 오룡의 수장으로 봉하소서.”
고상은 눈치를 보다가 다시 상석 쪽으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고상이 고개를 들어 소매 너머로 힐끔 상석을 보았으나 상석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곧 주변에 있던 현녀와 사자가 모두 무릎을 꿇었다. 상석에서 작은 빛이 내려오더니 고상의 이마에 가서 박혔다. 고상은 점점 뜨거워지는 이마를 붙들고 정신을 놓아버렸다.


주요는 두손으로 든 술잔을 놓치고 말았다.
“아상!”
주요가 자리에서 일어나 동궁으로 향하려고 하자 금모원군이 그를 막으며 말했다.
“수원? 무슨 일인가?”
주요가 금모원군을 뿌리치고 말했다.
“아상의 진(陣)이 사라졌어요. 아상은 어디 있습니까?”
금모원군이 미간을 찌푸리며 남궁을 지키고 있는 호위 여우에게 말했다.
“동궁으로 가서 청구를 데려와라.”
그리고 주요의 소매를 잡으며 말했다.
“수원. 아직 우리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네.”
주요는 크게 동요하며 말했다.
“아상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아요. 우리 아상은 어디 있습니까?”
금모원군이 주요를 다시 자리에 앉히고 적송자와 뇌공에게 눈치를 주었다. 뇌공이 자리에서 일어나 공공에게 가며 말했다.
“공공은 어찌 아직도 일어나지 못해?”
적송자가 금모원군을 보고 말했다.
“아무래도 어서 제자를 거두러 가야 하겠는데?”
금모원군이 적송자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패하는 지금쯤 현악(玄嶽; 무당산)에 있을 것입니다.”
적송자가 남궁을 나가며 말했다.
“현무와 함께 있겠군.”
그리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주요가 금모원군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원군. 저에게 중하를 지우지 마세요. 원군께서 하시려는 일이 무엇인지 알겠습니다. 제가 도울 수 있는 것은 모두 돕겠습니다. 하지만 그 자리는 제 몫이 아닙니다.”
금모원군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주요. 땅에서 후토가 어찌 영력을 보존하여 지탱하는지 아는가?”
주요가 표정을 구기며 말했다.
“설마….”
금모원군이 주요를 보며 말했다.
“그대의 상전 황룡은 하늘에서 쫓겨나며 죽었네.”
주요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설마… 설마….”
금모원군이 주요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수원. 황룡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을 막아주게.”
주요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주요는 금모원군을 보고 흐느끼더니 곧 양손을 들어 얼굴을 묻었다. 금모원군은 한숨을 쉬며 떨리는 주요의 등을 쓸었다.

뇌공은 공공과 온객행이 누워있는 평상으로 가서 그들을 보았다. 도철이 된 공공은 딱히 하늘에 미련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풍문으로는 그가 하늘로 올라가려고 한다 던 데 오늘 만난 공공은 오히려 서왕모를 돕고 있었다. 그는 도철이 되면서 촉룡과 척을 졌기 때문에 서쪽에는 잘 오지 않았는데 요대에서 공공을 만날 줄은 몰랐다. 뇌공이 다시 자리에 앉아 술잔을 들었다. 뇌공이 생각하기에 지금 이 사달은 어째 누군가가 일부러 만들고 있는 것 같았다. 오랫동안 공석으로 비워 두었다는 자리도 그렇고 갑자기 자리 따위를 탐내서 일을 벌이는 신선이라니 뇌공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겨우 한 갑자가 어찌 오랫동안이 될 수 있을까?

몇 백 몇 천 갑자를 사는 신선들에게 자리가 대체 무슨 소용일까? 그저 오늘 하루 즐겁고 술을 마실 수 있으면 족한 것을. 그러다 뇌공은 한숨을 쉬고 왜 요대에 오게 되었는지 생각했다. 뇌공은 외로웠다. 동왕공의 치기(稚氣)에 어울린 것은 정말 단순히 그가 외로웠기 때문이다. 아마 미쳐버렸다는 도예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들은 너무 오래 살았다. 영원한 안식을 허락받지 못한 그들이 정신을 놓고 미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이 천존께서 그들에게 내린 벌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뇌공은 문득 치우가 떠올랐다. 치우는 태양의 힘에 타오르면서 웃고 있었다. 어쩌면 그가 정말로 원했던 것은 천존의 자리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다시 정신이 든 주자서는 객실 바닥에 누워 있었다. 작게 신음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살펴보았다. 조금 어수선하게 어질러진 것을 제외하면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주자서는 얼굴과 몸 여기저기를 만져보았다. 뜨겁게 타는 것 같은 느낌이 있었는데 만져보니 멀쩡했다. 주자서는 얼른 침상으로 가서 뱀으로 변한 고상을 찾았다. 이불을 모두 들추어 보았지만 뱀이 보이지 않았다. 주자서는 작은 목소리로 고상을 불렀다. 그러다 장지문으로 가서 장지문을 열려고 했으나 별궁에서 그랬던 것처럼 문은 열리지 않았다. 보이는 창호 문 마다 모두 가서 열어 보았지만 역시나 열리지 않았다.

주자서는 다시 서안으로 가서 앉으며 생각했다. 이 곳의 서책들은 대부분이 별의 위치를 계산하는 내용이다. 혼천설(渾天說)을 따르는 것으로 보아 나라에서 운영하는 서원 같다. 다시 내부를 살펴보니 벽에 걸린 편액은 천문도(天文圖)이고 나무로 만든 혼천의(渾天儀)도 보였다. 고상과 헤어지기 전에 해화상의 물길이 하수의 물길인 것 같다 했으니 이곳은 형주 양양(襄陽) 근처일 것이다. 별을 관측하는 서원이라면 높은 산 위에 있을 테니 양양에 있는 가장 높은 산이라면 무당산일 가능성이 제일 컸다. 주자서는 품에서 염낭을 꺼내 부절을 찾았다. 그러다 편연주에서 부절을 온객행에게 줬다는 것이 기억났다. 다시 나라로 돌아왔지만 신분을 증명할 길이 없다. 오히려 그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괜히 도망병이라는 신분을 들키면 자신뿐만 아니라 모친과 당질도 위험했다.

주자서는 한참 생각하다가 고개를 들어 대들보를 보았다. 평상을 잘 밟고 올라가면 위로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주자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평상 위로 올라가 대들보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동량(棟梁) 사이로 몸을 비집고 들어가니 서까래가 보였다. 서까래로 손을 넣어 들어보니 기와가 들렸다. 주자서는 동량에 몸을 기대 서까래를 발로 찼다. 서까래 몇 개를 치우고 기와를 치우니 주자서가 나갈 수 있을 만큼의 틈이 생겼다. 주자서는 낑낑대며 밖으로 나왔다. 건물 주변이 안개로 가득했다. 주자서는 멀쩡한 서까래를 잘 배치하여 나온 구멍을 다시 기와로 잘 막고 건물 주변을 보았다. 건물 근처에서 보초를 서던 사람들이 모두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하늘을 보니 서원 위로 구름이 둥글게 모여들어 마치 방금 뭔가 하늘로 승천한 것처럼 보였다.

주자서는 지붕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르고 생각했다. 막상 정말로 도망치려고 하니 갈 데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친께 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온객행에게 가자니 방법이 없었다. 그러다 주자서는 혹시 뱀이 된 고상에게 그 지주라는 자가 몹쓸 짓을 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주자서는 머리에 있는 비녀를 찾았다. 비녀를 보고 한참 앉아있던 주자서는 비녀를 부러뜨리려고 했다. 주요가 준 비녀는 조금 짧아서 손으로 부러뜨리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었다. 주자서는 한참 씨름을 하다가 비녀를 지붕 위에 올려 놓고 발로 밟았다. 그제야 비녀가 부러지더니 조금씩 삭아 들기 시작했다. 전부 삭아 가루가 된 비녀는 돌풍을 일으키며 사라졌다. 주자서는 비녀가 사라진 곳을 보고 있다가 주변을 살펴보고 지붕 아래로 내려왔다. 주변에 쓰러져 있는 병졸과 옷을 바꿔 입고 머리를 정리해서 병졸처럼 상투를 틀었다. 옷을 갈아입혀 놓고 보니 붉은 장포는 정말 여인이 입는 옷 같았다.


손에 얼굴을 묻고 울고 있던 주요는 주자서에게 주었던 비녀가 깨진 것을 느꼈다. 고개를 들어 금모원군을 보고 말했다.
“유서는 어디 있습니까?”
금모원군이 곤란한 표정을 했다. 청구가 들어와 금모원군에게 인사했다.
“원군. 부르셨습니까?”
주요가 자리에서 일어나 청구에게 물었다.
“화사와 발의 아이는 어디 있소?”
청구가 금모원군의 눈치를 보고 고개를 더 깊숙이 조아렸다. 금모원군이 작게 혀를 차며 말했다.
“아무래도 현무가….”
주요가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금정(金頂)”
금모원군이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어찌 아는가?”
주요가 금모원군을 보고 말했다.
“유서가 그곳에 있습니다. 지금 당장 가 봐야겠어요.”
금모원군이 주요를 막으며 말했다.
“내가 방금 적송자를 보내지 않았나? 적송자께서 화사를 데려오실 거야.”
주요가 금모원군을 뿌리치고 말했다.
“아니요. 아상은 제가 데려오겠습니다.”
금모원군이 주요의 팔을 잡고 말했다.
“그럼 흑망을 등선시키게. 그럼 보내주지.”
주요가 금모원군을 보고 말했다.
“무슨 뜻입니까? 원군?”

금모원군이 주요를 보고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흑망이 흑룡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차고 넘치지 않는가?”
주요가 잠시 생각하더니 다시 물었다.
“천존께서 흑망에게 주시려는 자리가 북해 용왕자리가 아닙니까?”
금모원군이 주요의 어깨를 감싸 안고 말했다.
“그래. 이래야 수원이지.”
주요가 고개를 돌려 평상에 누워있는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등선한다고 해도 그 자리를 하려고 하지 않을 텐데요?”
금모원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 촉룡의 제자들은 하나같이 욕심이 없어서 말이야.”
주요가 다시 고개를 돌려 금모원군을 보았다. 금모원군이 주요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일단 구색을 갖추자는 것이지 혹시 모를 일 아닌가?”
주요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흑망을 등선시키는 것은 어려울 일이 아니지요. 내자에게 푹 빠져 있으니 내자를 쥐고 흔들면 됩니다. 그러니 제가 더욱 더 금정에 가야지요.”
금모원군은 눈을 굴리고 잠깐 생각하더니 대답하지 않았다.

주요가 금모원군의 품에서 나와 소매를 들어 공수하고 말했다.
“원군. 적송자께서는 유서를 모릅니다. 저를 보내주세요.”
금모원군이 평상에서 자는 온객행을 힐끔 보고 말했다.
“발의 영력으로 찾으실 수 있을 걸세. 걱정 말라니까?”
주요가 표정을 구기며 말했다.
“원군!”
금모원군이 고개를 끄덕이며 주요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
“알겠네! 알겠어. 가보게. 대신 후토를 죽여서는 안되네.”
주요가 고개를 들어 금모원군을 보았다. 금모원군이 주요에게 다가가 귓가에 속삭였다.
“그는 궁기(窮奇)가 되어 규산(刲山)에 봉인되어야 하니까.”
주요는 더 묻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아상과 유서가 걱정되어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현악으로 향했다. 놀다가 다쳐서 진이 지워진 것이라고 별일 아니라고 계속 되뇌었지만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불안을 어찌할 수 없어 주요의 영력이 한껏 날카로워졌다.

금모원군이 뇌공에게 다가가 말했다.
“이제 공공은 다시 동쪽으로 돌아가도 되겠어요.”
뇌공이 공공을 보고 말했다.
“이제 자는 척은 그만하게.”
공공이 표정을 구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원군. 저는 사흉이에요.”
뇌공이 코웃음 치며 말했다.
“그러게 응룡을 돕긴 왜 도왔나?”
공공이 자리에서 일어나 소매를 털고 말했다.
“청룡이 하도 닦달을 해대니 저라고 방법이 있습니까?”
금모원군이 공공에게 물었다.
“검영은 어떨 것 같나?”
공공이 코웃음 치며 말했다.
“원군께서 말씀하셨잖아요. 촉룡의 제자들은 욕심이 없다고.”
금모원군이 한숨을 쉬고 말했다.
“하긴 그랬으니 촉룡께서 제자로 받았겠지.”
공공이 금모원군을 쏘아보며 말했다.
“처음부터 후토가 어디 있는지 아셨죠?”
금모원군이 놀라는 척을 하고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나는 정말 몰랐네. 천존께서 하시는 일을 내가 어찌 알겠나?”
공공이 코웃음 치며 말했다.
“진군께 뭔가 들은 것이 있으시지요?”
금모원군이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돌려 뇌공을 보았다.

뇌공이 누워있는 온객행을 보고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이 치는…?”
금모원군이 뇌공의 소매를 잡고 말했다.
“뇌공.”
공공이 눈치를 보다가 금모원군에게 말했다.
“원군. 발의 아이는 어떻게 됐습니까?”
원군이 온객행을 보며 말했다.
“촉룡께서 이미 주인이 있다 하셨으니 그것은 걱정할 필요 없어.”
공공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아이참! 원군 이렇게 안일하셔서.”
원군이 웃으며 공공을 보고 말했다.
“그러니 그대가 나를 돕는 것이 아닌가?”
공공이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태평호의 수선(水仙)으로 봉하시지요.”
금모원군이 눈썹을 찌푸리고 말했다.
“태평호?”
공공이 고개를 끄덕이며 소매를 들어 공수하고 말했다.
“흑망이 살던 서호에는 이미 다른 아이가 있으니 비어 있는 태평호에 봉하십시오.”
금모원군이 ‘흠’ 하더니 말했다.
“그 쪽은 사람이 별로 없어서 정말 한직이 될 텐데….”
공공이 몸을 세우고 금모원군을 보고 말했다.
“수선이 되고 난 다음에 그가 뭐가 될지는 천존께서 정하시겠지요.”
금모원군이 웃으며 말했다.
“그것도 그렇군.”

뇌공이 금모원군을 보고 말했다.
“그 사람과 닮았군.”
공공이 겸연쩍게 웃으며 말했다.
“본인이 모르는 것 같아서 그냥 두었는데 그렇게 되었습니다.”
뇌공이 다시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누군가 이 치를 위해 별이 되었나 보군.”
금모원군이 작게 한숨 쉬고 말했다.
“깨어나면 바로 봉하도록 하겠습니다.”
뇌공이 금모원군을 보고 물었다. 흑망은 사내가 아닌가? 어찌 자네가 봉작(封爵)을 내리는가? 동왕공은?”
금모원군이 코웃음 치며 말했다.
“동왕공이 일 하는 것을 보셨습니까?”
뇌공이 표정을 구기며 말했다.
“그래도 동왕공의 옥새(玉璽)가 필요하지 않은가?”
금모원군이 몸을 돌려 중궁으로 향하며 말했다.
“천존께서 내리신 옥새는 하나뿐입니다. 그리고 그 옥새는 한 번도 제 손을 떠난 적이 없지요.”
뇌공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동왕공을 죽이라니까.”
금모원군이 몸을 돌려 뇌공을 보고 소매를 들어 인사하며 말했다.
“죽을 만큼 잘못하지 않았어요. 단지 분수에 맞지 않는 자리에 앉아 있을 뿐. 뇌공께서는 어서 도예께 가보세요. 필요하신 것은 말씀만 하세요. 서왕모가 돕겠습니다.”
뇌공은 고개를 끄덕이고 남궁을 나가며 말했다.
“오늘 마신 술이 도화주(桃花酒)인가? 아주 맛이 좋더군.”
서왕모가 뇌공이 나가는 길에 인사하며 말했다.
“기린편에 도예께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온객행이 눈을 떴을 때 온객행은 혼자 남궁 외실 평상에 누워 있었다. 주안상은 모두 치워진 상태였고 녹색 옷을 입은 시동이 입구에 서 있었다. 온객행이 일어난 것을 보고 물이 담긴 대야를 가져와 건네며 말했다.
“흑망께서는 중궁으로 드시지요.”
온객행은 대야에 간단히 관수하고 옷매무새를 단정히 했다. 그러다 동궁에 주자서가 생각나 시동에게 물었다.
“죄송한데… 내자를 만나고 가도 되겠습니까?”
시동이 단호하게 고개를 젓고 말했다.
“원군의 허락 없이 동궁에 가실 수 없습니다.”
온객행은 고개를 끄덕이고 시동을 따라 중궁으로 향했다. 오래 잤는지 해가 높이 떠 있었다. 중궁에 도착하자 용호좌 위에 나른하게 앉아 있는 금모원군이 보였다. 온객행이 나아가 소매를 들어 공수하고 인사했다.
“흑망. 원군을 뵙습니다.”
금모원군이 고개를 돌려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취수와 약수는 건넜으니 봉호(封號)를 내리 노라.”
금모원군 옆에 있던 섬여가 두루마리를 들고 온객행에게 왔다. 온객행은 얼떨결에 두루마리를 받고 금모원군에게 머리를 조아려 인사했다.
“서호의 흑망. 원군의 명령을 받습니다.”

蛇苺 第24

笑裏藏刀 | 24. 웃음 속에 칼을 감춘다.

온객행은 주서(周絮)를 좋아하는 마음이 커질수록 사람의 유한한 시간이 마음에 걸렸다. 그에 대한 마음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 불안감은 더했다. 그러다 먹으면 신선이 될 수 있다는 복숭아, 반도가 떠오른 것이다. 금모원군의 반도원(蟠桃園)에 열리는 반도는 모두 주인이 정해져 있다. 금모원군의 요대는 금모원군의 거처이기도 하지만 땅의 신선이 하늘로 올라갈 때 반드시 거치는 관문이기도 했다. 반도원의 복숭아는 요대를 거쳐 하늘로 올라가는 길에 오르는 것이 가능한 신선에게만 허락된 것이다. 온객행은 금모원군을 만나기 위해 옥산에서 행패를 부렸다. 취수와 약수로 둘러싸인 옥산은 들어올 수 있는 존재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온객행의 횡포는 평화롭게 살고 있던 옥산의 화사와 삼족오는 물론 요대를 지키는 여우들에게 까지도 위협이 되었다. 커다란 뱀으로 변한 온객행은 옥산에 머물면서 삼족오와 여우를 못살게 굴었다. 그 과정에서 옥산의 복숭아나무 반 이상이 뽑혀 나갔다. 몇몇 오래된 화사들은 약수와 취수의 물길이 조금 바뀌었다고도 한다.

사흘동안 난리를 피웠지만 금모원군은 온객행을 만나주지 않았다. 온객행이 사학(肆虐)을 멈춘 것은 복숭아에서 태어나는 화사를 처음 봤기 때문이다. 보통 붉은 색에 검은색이나 흰색 반점이 생기는 화사들은 모두 복숭아에서 태어난다. 맨 처음에 화사가 되었던 이는 옥산의 복숭아가 아니라 반도원의 복숭아에서 태어났다고 했다. 그 이후로 화사는 복숭아에서 태어나 복숭아를 기르고 지키는 일을 한다고 했다. 그 화사는 다른 화사와는 달리 노란빛을 띄었다. 그 화사가 태어난 열매 역시 복숭아라고 하기보다는 귤이나 유자 같았다. 못생긴 열매에서 태어난 못생긴 화사가 측은하여 온객행은 행패를 멈추었다.

주서는 동정호 근처에 있는 절파고금(浙派古琴)을 수학하는 악사(樂士)였다. 그는 원래 익주(益州) 출신으로 원래라면 촉파(蜀派)에서 수학해야 했지만 자리가 나지 않아 형주(荊州)의 절파로 유학을 온 것이다. 대부분의 악사가 형주 출신인 절파에서 혼자 익주 출신으로 종종 불이익을 당하거나 고초를 겪었지만 주서는 언제나 웃는 얼굴이었다. 온객행은 문득 너무 오래 주서를 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많지 않은 시간 중에 벌써 사흘이나 낭비했으면 그것으로 된 것이라고. 이제부터 더는 낭비하지 않으면 된 것이라고. 그가 다시 서호로 돌아갔을 때 주서는 아주 반갑게 그를 맞아주었다. 온객행은 다짐했다. 다시는 주서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그 이후로 온객행은 행복했다. 그의 긴 인생에서 처음으로 온객행의 마음을 채운 이가 나타난 것이다. 하얀 연꽃 같은 옷을 입고 사람들이 상상하는 하늘의 신을 노래하는 그는 사람인데 빛이 났다. 주서는 금을 타는 것을 좋아했는데 하늘의 신을 노래하는 가사를 붙여 금을 탈 때면 온객행은 그가 노래하는 하늘의 신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서를 만나기 위해 사람들의 세상으로 나온 온객행은 사람처럼 살았다. 먹고 마시고 웃고 울면서 점점 더 주서를 사랑했다. 청명이 조금 지나 마을이 어수선해졌다. 마을에 찾아온 법사는 마을의 기운이 요사스럽기 때문에 요괴를 퇴치해야 한다고 했다. 동정호 근처에는 항상 요괴가 많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법사의 말을 듣지 않았다. 하지만 법사가 나타난 이후에 마을에 큰 홍수가 나고 민심이 흉흉해지자 사람들은 요괴를 탓하기 시작했다.

법사는 사람들에게 웅황(雄黃) 가루로 만든 향낭을 만들어 팔며 말했다. 단양절 가장 밝은 중천에 요괴가 웅황 가루로 만든 술을 마시면 본래 모습으로 돌아간다고 말이다. 사람들은 웅황 가루가 든 향낭을 몸에 지니고 다니기 시작했다. 사실 웅황과는 크게 상관없이 영력이 부족한 요괴는 단양절이 되면 그 기가 약해져서 술을 마시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딱히 술을 마시지 않으면 크게 위험한 일이 없었기 때문에 온객행도 웃으며 주서가 건네는 향낭을 몸에 달았다. 한가지 온객행이 간과한 것이라면 웅황은 땅꾼이 뱀을 잡을 때 사용하는 독이라는 점이었다. 단양절 중천에 사람들이 모여 용 모양의 배를 띄웠다. 온객행은 주서와 함께 강가를 거닐었다. 주서는 흥이 올라 온객행에게 술을 권했고 한잔 정도는 괜찮을 것이라고 안일하게 생각한 온객행의 몸이 거대한 뱀으로 변하고 말았다. 온객행도 갑작스럽게 변화한 자신의 모습에 놀라 별수 없이 장강으로 몸을 숨겼다.

주서는 온객행과 함께 있었다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질타(叱咤)받았다. 주서는 끝까지 온객행을 두둔했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들어주지도 믿어주지도 않았다. 그의 노온(老溫)은 사람을 절대 해치지 않는다고, 그의 노온은 홍수를 일으키지 않았다고. 온객행이 다시 영력을 회복해 사람의 모습이 되었을 때 주서는 옥에 갇혀 온객행을 만날 수 없었다. 주서를 찾는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 온객행은 감옥에서 실려 나오는 시신들 속에서 주검으로 변한 주서를 찾았다. 그의 가느다란 몸에 난 상처를 하나하나 쓰다듬던 온객행의 비애(悲哀)는 살의(殺意)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서호 근처에 있던 마을이 물에 잠겼다. 서호의 장마는 눈이 내릴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그것을 보고 있던 공공이 온객행을 멈추고 벌한 것이다.

주서는 옥황상제(玉皇上帝) 앞에 무릎 꿇고 빌었다. 온객행의 죄를 대신해서 자신이 벌을 받겠다고 빌었다. 옥황상제는 그에게 은하수에 몸을 던질 것을 명했다. 별이 흐르는 강물에 빠진 사람은 다시는 환생할 수 없다. 주서는 옥황상제의 처분에 답했다.
“감은합니다.”
온객행의 죗값을 대신 지고 은하수에 몸을 던진 주서를 진성현녀가 거두었다. 태양 가장 가까이에 척박하고 외로운 진성에 그렇다 할 가신 한 명 없는 진성현녀가 주서를 가신으로 삼았다. 주서가 진성현녀의 가신이 되기 전에 그녀에게 부탁한 것이 한 가지 있는데, 진성현녀에게 빚이 있는 천존은 진성현녀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주서는 속세에서의 모든 기억을 버리고 다시는 땅의 일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서약(誓約)을 하고 진성사자(辰星使者)가 되었다.


주자서는 온몸이 타오르는 것 같은 열기를 버텨보고자 눈을 감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점점 하얗게 바래는 그의 의식을 더는 잡을 수 없어 그만 놓고 말았다. 주자서는 정신을 놓으면서 생각했다. ‘이게 마지막이구나… 흑랑께서 슬퍼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어쩌면 주자서는 온객행을 이미 좋아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주자서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작은 조각배 위에 앉아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강물 위에 크고 작은 배가 보였다. 주자서는 작게 한숨을 쉬고 은은하게 빛나는 강물을 보았다. 반짝이는 작은 별들이 모여 강이 되었다. 직녀가 견우를 만나기 위해 건너야 한다는 은하수가 이럴까? 강물로 손을 가져가는 주자서를 막은 것은 배에 함께 타고 있던 사람이었다. 온화하게 웃고 있는 그는 연꽃을 닮은 옷을 입고 있었는데 주자서는 왜 그 옷이 연꽃을 닮았다고 생각했는지 알 수 없었다.

남자가 주자서에게 웃으며 말했다.
“노온은 잘 지내는가?”
주자서가 고개를 들어 남자를 보고 말했다.
“노온?”
남자가 고개를 숙이고 작게 웃으며 말했다.
“너는 그를 뭐라고 부르지?”
주자서는 한참 남자를 보고 있다가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흑랑.”
남자가 다시 고개를 들어 주자서를 보고 말했다.
“우리 여러 번 만났는데 기억하는가?”
주자서가 눈썹을 찌푸리자 남자가 말했다.
“너무 애쓰지 않아도 되네. 천존께서도 전부 들어주실 수는 없으셨겠지.”
주자서가 소매를 들어 공손히 인사했다.
“기산의 주가 자서. 인사드립니다.”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덕분에 현녀께서도 모두 내려 놓을 수 있게 되었네.”
주자서는 남자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어서 소매를 내리고 고개를 숙였다. 남자가 말을 이었다.
“받기만 원하는 자는 그에게 주고 있는 자를 참으로 쉽게 잊더군.”
남자가 한숨을 쉬고 말했다.
“노온은 다행히 받기만 원하지는 않았어. 앞으로 그를 잘 부탁하네.”

주자서가 고개를 들어 남자를 보고 말했다.
“제가 뭐라고 그를 부탁하십니까? 직접 하십시오.”
남자가 주자서를 보고 낮게 웃으며 말했다.
“그가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주자서가 표정을 구기며 말했다.
“남이 슬퍼하는 것을 즐기는 치가 어디 있소?”
남자가 조금 놀란 듯 주자서에게 말했다.
“그런가? 남의 슬픔을 즐기는 치는 아주 많은 줄 알았는데.”
주자서도 남자가 하는 말의 뜻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작게 코웃음 쳤다. 남자가 강물에 손을 담그며 말했다.
“그대의 영혼은 아직 이곳에 올 때가 되지 않았으니 돌아가는 것이 좋겠네.”
남자의 손에 담긴 강물이 반짝반짝 빛났다. 주자서가 그의 손을 보고 말했다.
“은하수 같습니다.”
남자는 ‘하하하’ 웃으며 말했다.
“그대는 알고 있는가 은하수의 기원(基源)을? 이 빛나는 별들이 무엇인지 아는가?”

주자서가 남자를 보고 말했다.
“별이 되고 싶은 혼령들이었겠지요. 땅에 있는 이들을 지켜보고자 하는 사람들이었겠지요.”
남자가 주자서를 보고 슬프게 웃으며 말했다.
“맞아. 사랑하는 이들을 지키기 위해 영혼을 태워 별이 되었지.”
남자가 손에 쥔 강물을 놓고 말했다.
“너는 영혼을 태워 별이 되고 싶을 만큼 사랑한 이가 있는가?”
주자서는 곰곰이 생각하다 말했다.
“모친을 위해서라면 그리 하겠소.”
남자가 잠시 강물을 들여다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그것은 자네 몫이 아니군.”
주자서가 남자를 보고 물었다.
“무슨 소리요?”
남자는 대답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주자서를 내려보고 말했다.
“그대가 찾기를 바라겠네. 영혼을 태워 지키고 싶을 만큼 사랑하는 이를. 쉽지 않네. 모두 찾는 것도 아니네. 하지만 찾으려고 하면 누구든 찾을 수 있지.”
주자서가 고개를 들어 남자를 보았다. 남자는 인자하게 웃으며 주자서에게 말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끝났네. 나의 노온을 부탁한다는 말은 철회(撤回)하지. 대신 그대가 행복하기를 바라겠어.”
남자는 주자서에게 다가가 그의 이마에 손을 올려 놓았다. 남자의 손이 닿은 부분이 점점 뜨거워지더니 곧 주자서의 시야가 또 다시 새하얗게 바랬다. 주자서는 정신을 잃어가면서도 남자가 왜 마지막에 그에게 온객행을 부탁한다는 말을 철회했는지 알 수 없었다. 남자가 부탁했다면 주자서는 부채감으로 온객행을 받아 주었을 텐데.


온객행은 적송자의 팔에 매달려 울먹이며 말했다.
“유서에게 물비린내가 난다고 말했다구요. 우리 유서는 헤엄도 못 치고, 물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데 말입니다.”
적송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을 보았다. 주요는 온객행 옆에 앉아 고개를 흔들었고 공공과 뇌공은 심각한 대화를 하는 중이었고 금모원군과 청구는 어디에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적송자가 온객행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그래도 올 때 보니 자네가 뽑은 복숭아나무는 다시 잘 심었는지 옥산은 울창하던데?”
온객행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유서는 겁이 많아서 귀신이나 요괴를 무서워해요. 놀랄 때마다 저에게 붙어오는데 그의 체온이 너무 따뜻해서….”
적송자는 얼굴을 구기며 주요를 보았다. 주요는 못 볼 꼴을 봤다는 표정으로 온객행을 보며 혀를 찼다. 온객행은 한참 새로 얻은 내자의 사랑스러움을 자랑하다가 주안상에 머리를 처박고 곯아떨어졌다.

적송자가 주요를 보고 말했다.
“그럼 그 사람은 잊은 건가?”
주요가 온객행을 일으켜 자기 몸에 기대게 하고 말했다.
“난 자리를 채웠으니 그걸로 된 것 아닙니까?”
주요가 술잔을 들어 비우고는 말했다.
“원군께서는 대체 왜 이렇게 독한 술을 대접하는 걸까요?”
적송자가 금모원군이 앉아 있던 상석을 힐끔 보고 말했다.
“원군이 하려는 일에 딱히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자네도 알지 않는가? 나와 뇌공에게 남은 원한이 있다는 것을.”
주요가 웃으며 말했다.
“적송자. 적송자. 어찌 아직도 모르십니까?”
적송자가 주요를 쏘아보며 술잔을 들어 비웠다. 주요가 온객행을 바닥에 잘 눕히고 말했다.
“적송자. 원한은 스스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제 내려 놓으세요.”
적송자가 주요와 자기 술잔에 술을 채우며 말했다.
“하하하. 수원. 정말 대선 같은 말을 하는군.”

주요가 술잔을 들어 적송자에게 보이며 말했다.
“적송자께서 원하시면 언제든지 그 은원은 관용의 계기가 됩니다.”
그리고 술잔을 들어 비웠다. 적송자 역시 술잔을 들어 비우고 말했다.
“나는 치욕을 잊을 수가 없어.”
주요가 슬프게 웃으며 말했다.
“적송자. 제 삶은 그 자체가 치욕입니다.”
적송자가 주요를 보고 슬프게 웃으며 말했다.
“용케 버티고 있군.”
주요가 웃으며 말했다.
“우리 모두 애써서 버티고 있지요.”
적송자는 술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아무래도 뇌공하고 좀 대화를 해야겠어.”
주요가 일어나는 적송자를 힐끔 보고 말했다.
“원군께서 부탁하시는 일을 거절하지 마세요. 이번 일에 책임을 지게 되시면 그 전보다 더 뒷방으로 가셔야 될 겁니다.”
적송자가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수원?”
주요가 고개를 들어 적송자를 보고 말했다.
“애초에 원망의 대상이 틀렸어요.”
적송자는 ‘허’하고 코웃음 치고 뇌공과 공공이 있는 자리로 갔다.

주요는 바닥에 웅크리고 자는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어쩌다 여기까지 왔을까? 우리는?”
주요가 온객행의 뺨에 손을 올려 쓸었다. ‘처음 태평호에 왔을 때 온객행이 어떠했더라?’ 같은 생각을 하며 주요는 웃었다. 주요는 갑자기 고상이 많이 보고 싶었다. 태평호에 아직 돌아오지 않은 천교와 보살도 보고 싶었다. 적송자를 만난 김에 천교와 보살 얘기를 하여 그 아이들도 신분을 올려주는 것이 맞는 것 같아 주요는 자리에서 일어나 적송자를 찾았다. 공공과 뇌공, 적송자가 대화하는 것을 보고 있던 주요는 참으로 오랜만에 대선 자리가 아쉬웠다. 평생 그럴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자신하였었는데 역시 아직도 깨우칠 것이 많이 남은 중생(衆生)인 것이다. 사실 주요는 대선으로 살았을 때보다 무지기로 살면서 소중한 것이 훨씬 많이 생겼다.


금모원군은 거처로 보낸 양조가 다시 남궁으로 들어오자 미간을 찌푸렸다. 옆에서 시중을 들던 섬여가 고개를 돌려 양조를 보고 눈치껏 청구를 동궁으로 보냈다. 양조가 금모원군에게 다가와 말했다.
“원군. 수원께서 데려온 화사와 발의 아이가 사라졌습니다.”
금모원군이 작게 한숨을 쉬자 양조가 말을 이었다.
“봉황께서는 아무래도 동왕공과 현무가 벌인 일 같다고 하십니다.”
금모원군이 혀를 차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섬여에게 말했다.
“섬여. 가서 독한 술을 가져와라. 오늘 남궁에서 모시는 손님들 중 단 한 명도 내일 중천까지 남궁을 떠나서는 안된다.”
섬여가 고개를 조아리고 상석에서 폴짝 뛰어 남궁의 내실로 향했다. 원군이 양조의 시중을 받아 동궁으로 향하며 말했다.
“지금 동궁에는 누가 있지?”
양조가 손님들의 눈치를 보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린자께서 계셨는데 희발께 가신 것 같습니다. 지금은 봉황 혼자 계십니다.”
원군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가서 대려와 소려를 불러와라. 천존께 급히 전할 것이 있다.”
양조가 포권하여 인사하고 북궁을 향해 뛰기 시작하자 원군이 그를 말리며 말했다.
“양조! 아니다. 내가 가는 것이 빠르겠다. 너는 어서 가서 쉬어라.”
양조가 멋쩍게 웃자 원군이 양조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
“내일 중천까지 모두 기력을 회복해 두어라. 너희는 그것을 가장 최우선으로 해라.”
양조가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네. 원군.”

훌쩍 날아 북궁에 도착한 금모원군은 대려와 소려를 찾았다. 대려가 금모원군의 기척을 읽고 처소에서 나와 인사하며 말했다.
“원군.”
금모원군이 대려의 소매를 잡고 말했다.
“교견. 봉호(蜂虎)랑 다녀올 곳이 있다.”
대려가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원군. 봉호는 지금 번을 서고 있어요. 대정을 시키시지요.”
금모원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대정은 어디 있지?”
대려가 휘파람을 불자 중궁 쪽에서 청조가 날아왔다. 금모원군을 발견한 청조가 금모원군 앞에 착지하고 인사했다. 금모원군이 대려와 청조의 소매를 잡고 북궁의 외실로 향하며 말했다.
“너희는 삼원(三垣)으로 가서 천존과 진성현녀께 소식을 전하도록 해라.”
대려가 고개를 들어 청조를 보고 말했다.
“원군. 아직 청조는….”
금모원군이 청조를 보며 말했다.
“너는 능히 할 수 있다.”
청조가 결연한 표정으로 금모원군과 대려를 보며 말했다.
“네. 할 수 있습니다.”

원군이 대려와 청조를 하늘로 보내고 다시 남궁으로 돌아왔을 때, 공공과 온객행은 평상에 누워있었고 적송자와 뇌공, 주요만 탁상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원군이 나타나자 적송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금모원군에게 다가가 말했다.
“원군. 어디 다녀오십니까? 이제 막 술자리가 시작되었는데.”
금모원군이 적송자를 다시 자리로 안내하며 말했다.
“오늘은 정말 끝까지 마셔봅시다.”
그리고 곁에서 술 시중을 들고 있는 섬여를 시켜 술을 더 들이게 했다. 주요는 고개를 흔들며 금모원군에게 말했다.
“원군. 저희에게 이 술이 다 무슨 의미입니까? 하실 말씀이 있으면 어서 하세요.”
원군이 자리에 앉아 주요를 보고 말했다.
“수원. 우리는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가 있으니 그것은 잠시 미루도록 하지.”
주요가 적송자와 뇌공의 눈치를 보고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뇌공이 말했다.
“원군께서 한직이라고 하는데 오히려 한직이라도 됐으면 좋겠소.”
금모원군이 뇌공을 보고 말했다.
“뇌공. 왜 이제야 오셨어요. 저에게 오셨으면 제가 설마 뇌공을 홀대라도 할까 봐요?”
적송자가 코웃음 치고 말했다.
“요즘에는 사방신이니 사령이니 하는 것들이 판을 치니 우리가 뭘 할 수 있겠는가?”
금모원군이 미간을 찡그리고 말했다.
“어디 감히 사방신과 사령이 뇌공과 적송자께 무례를 범한다는 말입니까?”
뇌공이 ‘허허허’ 웃으며 말했다.
“아니네. 아니야. 무슨 무례를. 그냥 늙은이와 어울려 준 것이지.”
적송자가 뇌공을 쏘아보며 말했다.
“이 노인네는 술만 들어가면 뭐든 ‘허허허’ 하고 넘기지.”
금모원군이 적송자를 보고 말했다.
“요대의 이야기는 누구에게 듣고 오셨습니까?”
뇌공이 술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서왕모의 요대를 서왕모 허락 없이 찾을 수 있는 자가 누구이겠는가?”
적송자가 뇌공에게 술잔을 내밀며 말했다.
“그러게 내가 그때 동왕하고 혼인하지 말라고 했잖아.”
금모원군이 적송자가 하는 것처럼 뇌공에게 술잔을 내밀며 말했다.
“그도 처음부터 그렇지는 않았어요.”
뇌공이 적송자와 원군의 술잔을 채우고 말했다.
“허허허. 그것은 내가 제일 잘 알지.”

금모원군이 적송자에게 말했다.
“적송자께서 혹시 괜찮으시면 우리 패하를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적송자가 술잔을 비우고 금모원군을 보며 말했다.
“영귀를?”
금모원군이 고개를 끄덕이고 술잔을 비웠다. 뇌공이 다시 술잔을 채우며 말했다.
“북쪽에 무슨 일이 있는가?”
금모원군이 술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현천상제가 조락(凋落)하신 이후로 일이 끊이지 않습니다.”
뇌공이 술잔을 들어 비우고 말했다.
“그 정도 인가?”
주요가 거들었다.
“지금 현무를 하고 있는 현명은 원래 동북에 살던 수귀(水龜)로 현무자리에 앉기는 좀 부족하긴 하지요.”
적송자가 술잔에 술을 채우며 말했다.
“아무래도 현천상제 후임으로 가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본인이 하겠다고 하니 시켜준 것이지.”
금모원군이 적송자를 보고 말했다.
“적송자께서 한다고 하셨으면 좋잖아요.”
적송자가 금모원군을 보고 말했다.
“시켜주겠는가? 나의 상전은 치우였는데?”
금모원군이 코웃음 치고 말했다.
“치우의 신하이시니 더욱 알맞은 자리가 아닙니까?”
뇌공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원군 우리는 우리를 따르는 가신도 한 명 없네. 언제적 치우인가?”
금모원군이 뇌공을 보고 말했다.
“가신이야 필요 없으시니 안 두신 것 아닙니까? 필요하시면 말씀하세요. 요대에 쓸만한 아이들이 많으니.”
적송자가 표정을 구기며 말했다.
“그럼 나는 패하의 가신이 되는 건가?”
금모원군이 ‘하하하’ 웃으며 말했다.
“설마요. 패하가 적송자의 제자가 되는 것이겠지요.”
적송자가 화색을 하며 물었다.
“서왕모. 패하를 내 제자로 들여도 좋다는 말인가?”
금모원군이 술잔을 채우며 말했다.
“우리 패하가 적송자 성에 차시면 그리하세요.”
적송자가 ‘허허허’ 웃으며 술잔을 들었다.

금모원군이 뇌공을 보고 말했다.
“뇌공께서도 아시지요. 도예께서 요즘….”
뇌공이 술잔을 멈추고 금모원군을 보았다. 금모원군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다행히 읍강과 희발을 기억하셔서 저희가 돌봐 드리고 있는데….”
적송자가 코웃음 치며 말했다.
“백룡과 백호는 뭐하고 그것을 기린이 한다는 말인가?”
금모원군이 표정을 구기며 말했다.
“적송자께서 잊으셨어요? 도예를 봉인한 것이 누구인지를?”
적송자가 ‘아’하고 작게 탄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뇌공이 말했다.
“그렇지 욕수는 백호로 봉해진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어쩔 수가 없었겠군.”
금모원군이 뇌공의 소매를 잡고 말했다.
“기린은 사령의 수장이라 수장의 일로도 바쁜데 도예의 일로 묶여 있으니 좀처럼 요대에도 오질 못해요.”
뇌공이 ‘허허허’ 웃으며 말했다.
“도예가 나를 알아볼지 모르겠군.”
금모원군이 뇌공의 술잔을 채우며 말했다.
“당연히 기억하지요. 어찌 잊겠습니까? 필요하신 것은 말씀만 하세요. 서왕모가 돕겠습니다.”

뇌공이 술잔을 비우고 말했다.
“산천대제는….”
금모원군이 뇌공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저희 부군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설마 제가 죽이기라도 하겠어요?”
적송자가 원군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차라리 죽이게. 그 치는 오히려 죽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어.”
뇌공이 맞장구 치며 말했다.
“죽이는 것이야 어렵지 않지. 그 죄를 누가 감당하는 것인가의 문제 아닌가.”
금모원군이 웃으며 말했다.
“동왕공의 일이야 사방신과 오룡을 잘 다스리면 될 일입니다.”
뇌공이 금모원군을 힐끔 보더니 물었다.
“누구를 갈아 치우려고 그런 말을 하는가?”
금모원군이 술잔을 들어 입술을 축이고 말했다.
“제일 쓸모없는 것부터 치워야지요.”
적송자가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동왕공을 죽이자니까?”
주요가 소매를 들어 입을 가리고 웃으며 말했다.
“동왕공을 담금질하는 자들부터 치워야지요.”

적송자가 술잔을 내려놓고 주요를 보며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금모원군이 적송자와 뇌공의 술잔을 채우며 말했다.
“그러니 다음부터는 일을 하시기 전에 좀 알아보고 하십시오.”
뇌공이 눈썹을 찌푸리며 금모원군을 보았다. 적송자가 뭔가 말하려는데 주요가 손을 들어 그들을 멈추고 말했다.
“혹시 기억하십니까? 제가 왜 무지기가 되었는지?”
뇌공이 주요의 말에 고개를 꺾어 ‘하하하’ 하고 웃었다. 적송자 역시 ‘하하하’ 웃으며 말했다.
“그대가 어찌 무지기라는 말인가?”
주요가 금모원군을 보고 말했다.
“원군. 저는 놓아줄 준비가 된 것 같습니다.”
금모원군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 다행이구나.”
뇌공이 다시 술병을 들어 다른 이들의 술잔을 채우며 말했다.
“큰일이 일어나려 하는가?”
금모원군이 양손으로 술잔을 들고 말했다.
“세상이 조용하다 해도 수많은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법이지요. 그것의 크고 작음을 정하는 것은 하늘입니다.”
금모원군의 말에 적송자와 뇌공도 술잔을 들었다. 주요도 두 손으로 술잔을 들었다.

蛇苺 第23

釜底抽薪 | 23. 솥 밑의 장작을 빼낸다.

고상은 어둠 속으로 빠져들어 가면서 주자서를 놓치지 않기 위해 그를 꼭 끌어안았다. 주자서는 평상에서 일어나려고 하다가 더 깊숙하게 그림자 속으로 빠지고 말았다. 한참 아래로 떨어지던 둘은 그림자를 벗어나 검은 안개가 가득 찬 곳에 닿았다. 고상이 주자서의 몸을 이리저리 더듬으며 말했다.
“유서. 괜찮은가?”
주자서가 주변을 살펴보고 고상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말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아상께서는 괜찮으세요?”
고상이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을 보았다. 검은 안개가 걷히자 그들은 축축한 동굴 속에 있었다. 고상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물길?”
빛이 하나도 없어 어둑한 동굴 속에서 주자서는 보이는 것이 얼마 없어 고상을 가까이 안고 말했다.
“아상. 뭐가 보이십니까?”
고상이 눈을 감고 안개를 만들어 주자서와 자기를 감싸더니 말했다.
“어딘지 모르겠는데 해화상의 길인 것 같아. 유서, 나에게서 떨어지지 마라.”
고상이 만들어낸 안개에서는 은은하게 빛이 나서 그제야 주자서는 주변이 조금 보였는데 태평호에서 파양호에 갈 때 거쳤던 물길과 비슷한 동굴이었다.

고상은 잠깐 방향을 가늠하더니 물길을 걷기 시작했다. 주자서가 고상을 따르며 말했다.
“아상. 한 자리에 있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고상이 물길을 둘러보며 말했다.
“누군가 오고 있네. 숨는 것이 좋겠어.”
그리고 둘의 몸을 바위틈 사이에 숨기고 안개를 조금 더 만들어 둘을 가렸다. 고상이 한참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더니 말했다.
“여기 하수(夏水) 근처 같아.”
주자서가 몸을 움츠리며 말했다.
“하수?”
고상이 주자서의 입을 막고는 말했다.
“쉿!”
발소리가 들리고 검은 옷으로 무장한 이들이 횃불을 들고 동굴 안을 살폈다.
“여기 있을 것이다. 찾아라.”
고상이 미간을 찌푸리며 작게 말했다.
“사람?”
고상의 말에 주자서가 동굴 안에 있는 사람들을 보았다. 옷과 무기를 보니 어느 귀한 집안의 사졸이나 호위 같았다. 군에서 사용하는 갑옷을 입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허리에 두른 가죽으로 만든 요대는 군병이 사용하는 것이었다. 군관이 그들이 쪼그려 앉아 숨어있는 틈까지 다가와 횃불을 이리저리 들춰보며 그들을 찾았다. 바로 앞에서 횃불을 흔드는 모습에 주자서가 몸을 뒤로 하자 고상이 그를 달래려는 듯 어깨에 팔을 둘렀다.


“분명히 여기라고 했는데 왜 보이지 않지?”
대장으로 보이는 사람이 군관들에게 닦달했다. 곧 군관들이 들어온 쪽에 어떤 남자가 들어오더니 말했다.
“흠.”
대장이 그에게 인사하며 말했다.
“지주대인(蜘蛛大人). 저희가 찾았지만 보이지 않습니다.”
남자는 그들이 수색했다는 곳을 둘러보다가 고상과 주자서가 있는 틈을 보고 말했다.
“아주 예쁜 화사로군.”
고상이 혀를 차고 일어나며 안개를 걷었다.
“망충(網蟲).”
지주가 고상을 보고 표정을 구기며 말했다.
“화사.”
주자서가 고상 앞에 서며 말했다.
“그대들은 누구인데 해화상의 길에 계십니까?”
지주가 주자서를 보고 웃으며 물었다.
“네가 발의 후손인가?”
지주는 고상과 주자서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말했다.
“발의 후손이 왜 화사가 되었지?”
동굴을 수색하던 사람들이 고상과 주자서를 틈에서 끌어내어 지주 앞에 무릎 꿇게 했다.

고상이 지주를 보고 말했다.
“망충! 주인께서 알면 가만 두실 것 같아?”
지주가 고상에게 다가가 그녀의 턱을 손가락으로 들고 말했다.
“그러게. 무지기가 알기 전에 어서 해치워 버려야지.”
고상이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나를 건들기만 해봐! 내 몸에 그려진 진(陣)을 건들기만 해도 네놈들이 누구인지 밝혀내는 것은 일도 아니야!”
지주가 피식 웃으며 고상의 옷깃을 잡자 주자서가 몸부림을 치며 말했다.
“그만두시오! 어찌 여인을 욕보인다는 말이오!”
지주가 주자서를 보고 재밌다는 듯이 말했다.
“욕보여? 네 눈에는 이 뱀이 사람으로 보이나 보지?”
지주의 몸에서 가느다란 실이 뿜어져 나오더니 고상을 감쌌다. 주자서가 놀라서 고상을 보고 소리쳤다.
“아상!”
고상은 지주의 몸에서 나온 붉은 실에 휘감기더니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는 사람의 소리에서 점점 뱀이 내는 소리인 ‘쉭쉭’ 대는 소리로 바뀌었는데 지주의 실이 고상의 몸 안으로 녹는 것처럼 사라지더니 고상의 몸이 능소화 빛깔의 뱀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주자서는 ‘하!’ 하고 작게 숨을 들이켜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를 잡고 있던 군관들이 그를 놓아주자 주자서는 무릎 꿇고 뱀으로 변한 고상에게 다가갔다.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뱀을 만지자 뱀이 주자서의 손에 머리를 비볐다. 주자서는 얼른 뱀을 손안에 들고 말했다.
“이게… 이게 무슨 짓이오?”
지주가 주자서를 보고 말했다.
“겨우 화사 주제에 감히.”
주자서가 뱀을 조심스럽게 품에 안고 지주를 보고 말했다.
“나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오?”
지주가 주자서를 보고 말했다.
“발의 후손인데 왜 사내지?”
주자서는 조금 짜증이 난 기색으로 말했다.
“하늘이 하는 일을 내가 어찌 안다는 말이오!”
지주가 주자서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그것도 그렇네.”
그리고 군관에게 고갯짓하자 주자서를 놓아주었던 군관이 주자서를 일으켜 팔을 잡았다. 주자서가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원하는 것이 무엇이오?”
지주가 코웃음 치며 말했다.
“너 따위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 고작 사람 주제에.”
지주가 몸을 돌려 군관에게 지시하더니 금방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남은 군관들은 주자서를 데리고 물길을 걸어 밖으로 나왔다. 물길 밖은 물가 근처일 것이라는 주자서의 예상을 뒤 엎고 산에 있는 서원이었다.


군관들은 주자서를 감옥이 아니라 객실에 가뒀다. 주자서는 고상을 품속에 안고 그들이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따라 주었다. 물길에서 서원으로 오는 길에 보았던 군관들은 주인이 그들 대접을 잘했는지 위계질서도 있었고 지치거나 배를 곯은 기색이 없었다. 무기가 없는 주자서 혼자 당해낼 수 있을 만한 무리가 아니었기 때문에 주자서는 일단 그들이 시키는 대로 따라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주자서가 대장으로 보이는 이에게 물었다.
“여기는 어디입니까?”
대장은 주자서를 품평하듯 위아래로 보더니 말했다.
“계집 같은 꼴을 해서는….”
주자서가 표정을 구기고 말했다.
“그게 무슨 뜻이오?”
군관의 대장은 주자서의 말을 무시하고 부하들에게 그를 지키라는 말을 하고 장지문을 닫았다. 주자서가 나가려고 하자 장지문 옆에 서 있던 군관이 그를 막았다. 주자서는 그들을 빤히 보다가 작게 한숨을 쉬고 얌전히 객실 안으로 들어왔다.

주자서는 침상 위에 안고 있던 작은 뱀을 놓아주고 그 아래 앉아서 뱀과 눈높이를 맞추고 말했다.
“아상께서도 뱀이셨군요.”
주자서가 뱀의 머리를 손가락 끝으로 문지르며 말했다.
“우리는 어쩌죠?”
뱀은 주자서가 쓰다듬어 주는 것을 한참 즐기다가 똬리를 틀었다. 주자서는 뱀에게서 시선을 떼고 객실을 둘러보았다. 이곳저곳에 놓인 서책과 죽간이 아니면 어느 귀족 집의 외실로도 보였다. 태평호 이후로 주자서는 참으로 분수에 맞지 않는 곳에 머무는 일이 많아졌다. 자리에서 일어나 혹시 무기로 쓸만한 것이 있을까 싶어 둘러보았지만 서신을 뜯는 날붙이 하나 없었다. 다시 침상으로 가서 똬리를 틀고 있는 뱀 옆에 앉아 말했다.
“사람이면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것도 아닌 모양입니다.”
주자서는 작게 한숨 쉬고 뱀을 보았다. 뱀은 머리를 몸에 기대더니 곧 붉은 눈을 감았다. 주자서는 침상 위에 있는 이불을 펴서 뱀에게 덮어주고 죽간이 쌓여 있는 서안으로 가서 앉았다. 따로 보관하는 서책 같으니 읽어 보면 이곳이 뭐 하는 곳인지 알 수 있을까 싶어 주자서는 서책을 읽기 시작했다.

고상이 다시 눈을 떴을 때, 고상은 침상 위에 금침 위에 있었다. 해가 이미 졌는지 방안은 어슴푸레했다. 고상이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펴보자 주자서는 서안에 기대어 잠이 든 것 같았다. 고상은 천천히 침상에서 내려와 주자서에게 다가갔다. 서안을 타고 올라가자 주자서가 읽던 죽간이 보였다. 벌써 몇 개 읽었는지 서안 위에는 죽간 여러 책이 이리저리 놓여 있었다. 고상은 다른 기척을 읽고 얼른 주자서의 품속으로 들어갔다. 횃불을 들고 들어온 군관은 객실을 살펴보더니 서안에 앉아 고개를 괴고 잠들어 있는 주자서를 발견하고 말했다.
“야! 일어나라!”
주자서가 군관의 목소리에 어깨가 튀더니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이보시오. 내게도 이름이 있네. 어찌….”
군관이 주자서에게 다가가 그의 팔을 잡고 일으키며 말했다.
“주인이 오셨으니 일어나라!”
주자서가 일어나서 소매를 털며 옷매무새를 가다듬자 장지문을 열고 금색 옷을 입은 남자가 들어왔다.

금색 옷을 입은 남자가 들어와 상석에 가서 앉자 군관이 주자서의 팔을 잡고 그의 앞으로 가게 한 뒤에 무릎을 꿇게 했다. 주자서는 순순히 남자 앞에 무릎을 꿇고 소매를 들어 인사했다.
“기산의 주가 자서라 합니다.”
금색 옷을 입은 남자가 주자서를 한참 들여다보더니 혀를 차며 말했다.
“어찌 사내란 말이냐?”
주자서가 고개를 흔들고 말했다.
“하늘이 하시는 일을….”
남자가 주자서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나는 후토. 황룡이네.”
주자서가 고개를 들고 자기를 황룡이라 소개하는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이제 막 장령(壯齡)에 들어선 남자는 인자하게 웃으며 주자서를 보았다. 주자서가 황룡을 보고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황룡…?”

황룡이 주자서에게 다가가 말했다.
“네가 발의 후손이라고?”
황룡은 주자서의 얼굴을 조금 더 보다가 그의 머리채를 잡고 말했다.
“감히 계집 주제에 나를 뛰어넘어?”
주자서가 잡힌 머리를 잡고 말했다.
“나… 나는….”
황룡이 주자서의 머리채를 쥐고 흔들며 말했다.
“네가 하늘에서 어떠한지 내 알 바 아니지만 땅에서까지 나를 능가하려 하느냐?”
주자서가 황룡의 손길이 이리저리 휘둘리며 말했다.
“무슨… 무슨 말씀….”
황룡이 주자서의 머리채를 거칠게 놓고 말했다.
“천존께서는 어째서 너 따위에게!”
주자서가 바닥에 고꾸라지자 황룡이 다가가 주자서의 몸을 발로 차며 말했다.
“산천대제께서 너의 힘을 갖고 나면 감히 누가 너 따위에게 관심을 두겠느냐? 감히! 감히!”
주자서는 몸을 동그랗게 말고 황룡의 발길질을 견뎠다.

내실 안으로 즉저와 지주가 들어왔다. 즉저가 말했다.
“그쯤 하시오. 산천대제께서 오고 계시는 중이니.”
황룡이 화를 삭이지 못하고 씩씩거리며 바닥에 누워있는 주자서에게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너의 공은 내가 가졌어야 마땅한데 어찌! 어찌!”
즉저가 탁상에 있는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영력을 빼앗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일개 사람일 뿐이니 참으시오.”
황룡이 탁자로 가서 앉으며 말했다.
“요대의 일은 어떻게 되었소?”
지주가 바닥에 누워 있는 주자서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봉황 한 마리가 노망난 노인네 둘을 어찌 하겠습니까?”
즉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차피 천존께서는 노인네 노망으로 치실 테니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황룡이 주자서를 노려보며 말했다.
“어서 저것을 치우고 끊어냈으면 합니다”
즉저가 황룡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그리 될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지주가 객실을 둘러보고 뭔가 말하려고 할때 산천대제가 현명대선과 함께 객실 안으로 들어왔다. 즉저와 지주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조아려 인사했다. 현무가 소매를 들어 황룡에게 인사하며 말했다.
“후토.”
황룡도 자리에서 일어나 현무에게 인사했다.
“현명.”
산천대제가 바닥에 쓰러져 있는 주자서를 발견하고 다가가며 말했다.
“발의 아이야.”
주자서가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나 소매를 들고 고개를 조아려 인사했다. 주자서가 인사하는 모습을 본 현명이 ‘흥’하고 코웃음 쳤다. 산천대제가 주자서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그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어 냄새를 맡더니 말했다.
“아… 발의 아이야.”
주자서가 몸을 바르작대며 품에서 나오려고 하자 산천대제가 주자서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끌어안고는 황룡에게 물었다.
“이… 이 영력을 어떻게? 어떻게?”
황룡이 산천대제를 보고 고개를 조아려 인사하고 말했다.
“팔주령은 가져오셨습니까?”
산천대제가 현무를 보자 현무가 소매에서 금동으로 만든 팔주령을 꺼내 탁상 위에 두었다.

산천대제가 주자서를 끌고 탁상으로 가서 팔주령을 손에 쥐었다. 산천대제가 현무와 황룡을 번갈아 보고 물었다.
“어찌하면 되는가? 어떻게 해야 발의 봉인을 풀 수 있지?”
현무와 황룡이 잠깐 시선을 마주했다 한숨을 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즉저가 소매를 들어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대제께서 직접 하셔야 합니다. 봉인을 푼 자에게 힘이 깃드니까요.”
산천대제는 팔주령을 주자서의 손에 쥐여 주더니 그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주자서는 조금 당황하여 대제의 팔을 잡고 말했다.
“동왕공. 이 방법은 아닌 것 같은데….”
현무가 대제의 소매를 잡고 주자서를 보며 말했다.
“이 치가 스스로 봉인을 풀 수 없으니 대제께서 직접 봉인을 깨신 뒤에 그 힘을 팔주령에 담으시면 됩니다.”
대제가 현무를 보고 물었다.
“봉인은 어떻게 깨는가?”
현무가 대제를 보고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일단 영을 들여다보시고 발의 힘을 찾으신 뒤에 부수면 됩니다.”
대제가 소매를 털어 현무의 손을 뿌리치고 말했다.
“그니까 그것을 어떻게 하냐는 말이네!”

황룡이 주자서를 빤히 보더니 말했다.
“이미 봉인이 깨어진 것 같으니 그냥 취하시지요.”
대제가 황룡을 보고 물었다.
“어떻게?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대제가 주자서의 앞섶에 고개를 박고 숨을 들이쉬더니 말했다.
“정말 충만한 영력이 느껴지는구나.”
황룡이 대제를 보고 낮게 웃으며 말했다.
“손으로 직접 꺼내시면 됩니다.”
그리고는 주자서의 등허리에 손을 대더니 그의 몸 안으로 황룡의 손이 들어가 주자서 몸 안을 헤집었다. 주자서는 ‘하!’하고 숨을 들이쉬고 고개를 들었다. 주자서의 눈과 입안에서 빛이 새기 시작하자 산천대제가 그의 얼굴을 붙잡았다. 주자서는 고개를 흔들어 얼굴을 붙여오는 산천대제를 밀어냈다. 곧 주자서의 품속에서 작은 뱀이 나와 주자서의 입속으로 들어갔다. 산천대제가 놀라서 뱀을 잡아보려 했으나 잡지 못했다. 뱀이 주자서의 몸속으로 들어가자마자 주자서의 온몸에서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당황한 산천대제가 주자서를 놓아주자 주자서의 몸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뇌공과 한참 힘겨루기를 하던 읍강이 고개를 돌려 동궁을 보자 뇌공이 말했다.
“이제 나도 우습게 보이는가? 린?”
읍강이 고개를 돌려 뇌공을 보고 말했다.
“갑자기 왜 이러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뇌공이 ‘하하하’ 하고 크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원래 싸우는 것을 좋아하네? 나의 상전이 치우(蚩尤)였다는 것을 잊었나?”
읍강이 중궁을 보고 말했다.
“뇌공. 원군께서는 이런 일을 바라셔서 그리 하신 것이 아닙니다.”
뇌공이 뇌부(雷斧)를 휘둘러 벼락을 만들며 웃고 말했다.
“하하하. 뒷방 늙은이에게 무서운 것이 뭐가 있겠나? 어차피 나는 하늘로 올라가지도 못하니 그저 즐거우면 그만이지.”
읍강이 뇌공의 벼락을 피하자 곧 중궁에서 커다란 용이 나와 뇌공을 보고 말했다.
“뇌공께서 즐거우시면 수원이 어울려 드려야지요.”
주요를 본 뇌공이 모습을 사람으로 바꾸고는 말했다.
“수원. 그대가 왜 여기 있는가?”
주요 역시 용의 모습을 사람의 모습으로 바꾸고 말했다.
“원군께서 청하셔서 이렇게 왔습니다.”
읍강 역시 모습을 바꿔 동궁으로 향했다.

주요가 동궁으로 가는 읍강을 보고 뇌공에게 말했다.
“뇌공. 적송자께서는 이미 원군을 뵙고 계십니다.”
뇌공이 표정을 구기며 말했다.
“수원 그대가 있는 줄 알았으면 오지 않았네.”
주요가 공손히 고개를 조아리고 별궁 쪽으로 손바닥을 펴며 말했다.
“원군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가시지요.”
뇌공이 한숨을 쉬고 별궁으로 향했다. 별궁에는 흠뻑 젖은 봉황과 청구, 양조가 원군 곁에 서 있었고. 그 앞에 적송자와 온객행이 대치하고 있었다. 적송자가 부루퉁하게 말했다.
“역시 촉룡의 제자 답군.”
온객행이 소매를 들고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제가 어찌 우사(雨師)께 무례를 범하겠습니까?”
적송자가 금모원군을 보며 말했다.
“그러니까 요대에는 날짐승만 있으니 비가 오면 위험하다고.”
봉황이 몸에 물을 털어내며 말했다.
“적송자! 어찌….”
금모원군이 봉황의 말을 자르고 말했다.
“적송자. 우리 아이들 괴롭히는 일은 그만두세요. 날짐승만 있다니요. 적송자는 제가 무엇인지 잊으셨습니까?”
금모원군이 적송자를 쏘아보자 적송자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에 서왕모와 겨루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금모원군이 조금 날카로운 기색으로 말했다.
“하필 왜 이런 시기에 이러십니까?”
적송자가 양손을 펼쳐 보이며 말했다.
“나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난 정말 심심해서 놀러 온 것뿐이야.”
금모원군이 봉황과 양조 쪽으로 손을 펴고 버럭 소리질렀다.
“심심해서 우리 아이들을 괴롭힌다는 말입니까!”

주요가 금모원군에게 소매를 모아 인사하고 말했다.
“원군. 고정하소서.”
뇌공이 금모원군을 보고 말했다.
“원군 이렇게 화낼 일인가?”
금모원군이 뇌공을 쏘아보며 말했다.
“두분께서는 한직에 계시니 한가하셔서 좋겠습니다. 이렇게 한가하신 줄 알았으면 어서 찾아뵙고 도움을 청했어야 하는데!”
주요가 원군의 소매를 잡고 말했다.
“원군. 이렇게 오셨으니 지금 하시지요.”
원군이 주요를 한참 보더니 표정을 바꿔 적송자와 뇌공을 보고 말했다.
“오랜만에 요대를 찾아 주셨으니 이 서왕모가 어찌 그냥 보낼 수 있겠습니까? 섬여!”
남궁 쪽에서 섬여가 폴짝 뛰어나와 말했다.
“원군.”
금모원군이 말했다.
“남궁에서 연회를 열어야 하겠다.”
섬여가 고개를 조아리고 남궁의 외실로 향했다. 남궁 외실에서 공공이 나와 적송자와 뇌공을 보고 소매를 들어 인사하며 말했다.
“적송자! 뇌공!”
뇌공이 공공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공공! 여기 있었는가?”
적송자가 금모원군의 눈치를 보며 주요에게 말했다.
“어서 흑망을 승천시키게.”
주요가 고개를 돌려 적송자를 보고 미간을 찌푸리자 적송자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원군이 원하는 것을 이루려면 저 치가 흑룡인 편이 쉽네.”
주요가 고개를 돌려 원군 옆에 서 있는 온객행을 보았다.

양조는 적송자의 비를 맞아 한동안 날 수 없었기 때문에 요대를 호위하는 군관들이 모두 여우로 바뀌었다. 삼족오를 통솔하는 양조는 원군에게 허락을 구하고 처소로 돌아갔다. 봉황 역시 원군과 손님들께 양해를 구하고 동궁으로 돌아갔다. 온객행이 주요를 보고 물었다.
“동궁에는 별일 없지요?”
주요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궁에 린자가 계신 것을 몰랐던 것 같아.”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원군께 뭘 부탁하셨소?”
주요가 온객행을 쏘아보며 말했다.
“왜?”
온객행이 주요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
“귀한 자리로 가시는 것 아니오?”
주요가 표정을 구기고 말했다.
“시끄럽네. 자네야 말로 원군께 부탁드려 어서 흑룡으로 승천하시게.”
온객행이 고개를 돌려 주요를 보고 말했다.
“제가요?”
주요가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말했다.
“일단 흑룡이 되는 편이 여러모로 편할 거야.”
온객행이 곰곰이 생각하더니 말했다.
“흑룡이 되면 유서가 물비린내 난다는 소리는 안 듣겠지요?”
주요가 온객행을 마주 보며 표정을 구기자 온객행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흑룡의 내자에게 물비린내 난다는 소리는 안 하겠지요?”
주요는 어이가 없어서 고개를 흔들며 헛웃음 쳤다.


봉황이 동궁에 도착해서 외실을 지나 거처로 향하는데 읍강이 나와 봉황을 보고 말했다.
“큰일이네.”
봉황이 다 젖은 깃털을 털며 말했다.
“린자. 무슨 일입니까?”
읍강이 봉황의 소매를 잡아 객실로 잡아 끌며 말했다.
“누가 화사와 발의 후손을 데려갔어.”
봉황이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린자?”
읍강이 객실 안으로 들어가 방안을 살피며 말했다.
“그림자야. 그림자를 쓰는 자네.”
봉황이 눈을 감았다 뜨자 그의 눈이 황금색으로 빛났다. 방안을 둘러보던 봉황이 평상이 있던 자리로 가서 주변을 보고 말했다.
“현명?”
읍강이 봉황에게 다가와 그의 팔을 잡고 말했다.
“수원과 흑망이 알아서는 안 되네.”
봉황이 읍강을 보고 말했다.
“어찌?”
읍강이 봉황을 보고 말했다.
“일단 흑망을 흑룡으로 등선 시키고 난 다음에 알려도 늦지 않네.”
봉황이 한숨 쉬며 말했다.
“린자. 저는 적송자의 비를 맞아서….”
읍강이 고개를 끄덕이고 봉황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일단 이곳을 지키고 있게. 내가 희발에게 가보겠네.”
봉황이 읍강에게 말했다.
“패하께 말씀드리세요. 이 일에 현명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읍강이 코웃음 치며 말했다.
“내가 모르겠는가?”
봉황이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서 움직이시죠.”
읍강이 봉황을 보고 작게 웃고는 고개를 끄덕이고 객실을 나갔다. 봉황은 방안을 둘러보다 평상 위로 올라가 벌렁 눕고 생각했다. ‘산천대제를 뭐 어떻게 하고 말일이 아니게 돼 버렸네….’


남궁의 연회에 자리를 안내받은 온객행과 주요는 자리에 앉아 태평호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적송자가 다가와 흑망에게 말했다.
“자네는 왜 여기 있나?”
온객행이 자리에서 일어나 적송자에게 공손히 인사했다. 온객행은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운 기색으로 말했다.
“원군께 부탁이 있어서….”
주요도 일어나 적송자에게 인사하고 말했다.
“이 치의 내자에게 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적송자가 주요를 보고 물었다.
“이 치의 내자인데 자네는 왜 여기 있나?”
주요가 공공 쪽으로 눈짓하며 말했다.
“공공께서 나의 화사를 찾으시니 와야지요.”
적송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그 화사가 왜 자네 화사인가? 파사를 감시하라고 붙인 것이 아니었나?”
주요가 온객행의 턱을 잡고 흔들며 말했다.
“이 파사도 제 파사입니다.”
온객행이 부스스 웃으며 말했다.
“수원께서 중매를 안 하셨으면 제가 어찌 내자를 얻었겠습니까.”
적송자가 주요와 온객행을 번갈아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태평호에서 잘 지내고 있었나 보군.”

주요가 적송자를 보며 말했다.
“우사께서는 하늘이 이 지경이 될 동안 뭐하셨소?”
적송자가 표정을 구기며 말했다.
“뒷방 늙은이인 내가 뭘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주요가 적송자를 흘겨보며 말했다.
“정말 무슨 부탁을 받고 오신 것은 아니지요?”
적송자가 공공과 대화하고 있는 뇌공을 가리키고 말했다.
“우린 진짜 심심해서 왔어. 이제 아무도 우리랑 교류하려고 하지 않으니까.”
주요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제가 모르겠습니까.”
온객행이 적송자와 주요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말했다.
“뒷방 늙은이들께서 오늘 흑망에게 주도(酒道)를 가르쳐 주셔야 하겠습니다. 요대의 술을 모두 마셔봅시다.”
적송자가 웃으며 말했다.
“흑망 그대는 어서 가서 취수를 건너고 오라니까.”
온객행이 적송자를 보고 말했다.
“아직 영력이 다 돌아오지 않았는데 제가 건널 수 있을까요?”
적송자가 온객행의 어깨에 팔을 둘러 어깨동무하고 말했다.
“내가 볼 때 나 등선할 때보다 더 기세가 좋아.”
온객행이 웃으며 말했다.
“제가요?”
적송자가 말했다.
“자네도 이제 꽤 나이가 있지 않나? 내자도 생겼으니 어서 등선 해야지.”

주요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네 내자가 흔한 사람은 아니니 어서 원군께 부탁드려 취수를 건너도록 해라.”
온객행이 남궁으로 들어오는 주안상을 보고 말했다.
“일단 술부터 마시면 안됩니까?”
적송자 역시 주안상을 보고 말했다.
“그것도 그렇군. 요대 나흘마의 솜씨는 하늘에서 유명하니까.”
온객행이 주요를 보고 말했다.
“주요. 알잖아요. 난 요대에서 환대를 받아본 적이 없소. 유서와 처음 왔을 때 내가 어디서 지냈는지 아시오?”
적송자가 어깨동무를 풀고 온객행을 주안상 앞에 앉히며 말했다.
“내가 들어줄 테니 말해보게.”
주요가 온객행에게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온객행. 자업자득이야. 네가 옥산에서 친 사고를 생각하면 별궁에 들인 것만으로도 환대야.”
적송자가 ‘허허허’ 웃으며 말했다.
“내가 모르는 일이 있었나 보군. 무슨 일이 있었나? 내게 털어 놔 보게.”
온객행이 주요를 쏘아보며 적송자 옆에 앉아 한탄을 시작했다.

蛇苺 第22

聲東擊西 | 22. 동에서 소리를 내고 서를 친다.

동궁의 주방은 갖춰져 있긴 했지만 먹을 만한 것이 있지는 않았다. 봉황이 주방 옆에 있는 곳간에 들어가더니 찬합을 들고나오며 말했다.
“옥산에서 보낸 복숭아와 나의 영지에서 보낸 양분(涼粉)이 있는데 드셔 보시겠어요?”
고상이 찬합을 받아 내려놓고 열어 보며 말했다.
“양분이 뭐에요? 처음 들어봐요.”
봉황이 주방을 여기저기 둘러보더니 흑당을 찾아 물에 녹이고 양분을 작게 잘라 넣고 말했다.
“선초(仙草)로 만든 하얀 묵인데 과일과 함께 달게 먹으면 아주 맛이 좋습니다.”
그리고 그릇을 고상에게 건넸다. 고상이 근처에서 숟가락을 찾아 그릇을 들어 봉황에게 인사하고 양분탕을 먹었다. 고상이 한입 먹어보더니 봉황을 보고 활짝 웃으며 말했다.
“달아요. 맛있어요.”
봉황이 고상에게 먹일 것을 더 찾으며 말했다.
“맛있다니 다행입니다.”
양조가 봉황에게 다가가 말했다.
“주방일을 할 나흘마(癩疙痲)를 데려올까요?”
봉황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섬여에게 부탁해야 하겠어요.”
양조가 봉황에게 포권하여 인사하고 주방을 나갔다.

고상이 다 먹은 양분탕을 내려놓고 봉황을 보고 말했다.
“봉황께서는 안 드십니까?”
봉황이 고상에게 다가가 말했다.
“제가 다스리는 지역은 단 음식을 즐기는데 저는 단 음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요.”
고상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우리 유서도 단 것을 안 좋아해요. 나는 맛있어서 좋은데.”
봉황이 고상 옆에 앉으며 말했다.
“저는 죽순을 좋아해요. 제가 사는 남쪽 단혈궁(丹穴宮)에는 대나무를 많이 심었답니다.”
고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대나무 통에 죽순을 넣고 밥을 지으면 정말 맛있어요. 저도 좋아해요. 백택의 재실 뒤쪽에 대나무 숲이 있거든요. 죽순을 캐지 않으면 너무 빽빽해져서 단양절 오기 전에 죽순을 캐요. 죽순 캐는 것은 힘들지만 그래도 죽순은 맛있어요.”
봉황이 고상을 보고 말했다.
“죽순을 직접 캐셨습니까?”
고상이 찬합에 들어 있는 복숭아를 이리저리 고르더니 말했다.
“천교랑 보살이랑 캤어요. 주요는 도와주지도 않으면서 이래라저래라 시키기만 하고. 그런데 정말 신기하게 주요가 파라고 하는 데는 죽순이 있어요.”
고상은 복숭아를 손을 닦더니 한입 베어 물었다. 봉황이 웃으며 말했다.
“죽순은 지나치면 금방 자라니까요.”
고상이 말했다.
“너무 자라서 질긴 것은 말려서 차로 마시는데 알싸해서 맛있어요.”
봉황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주요가 태평호에서 잘 지냈다니 다행입니다.”

고상이 자리에서 일어나 봉황의 눈치를 보며 찬합에 음식을 챙기고 말했다.
“여기… 이 양분탕 우리 유서 줘도 될까요?”
봉황이 고상의 소매를 잡고 그녀를 곳간으로 이끌며 말했다.
“이리 와서 보고 먹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드세요. 양조가 나흘마를 데리고 오면 뭐든 해달라고 하세요.”
고상이 소매를 들어 다소곳이 인사하고 말했다.
“봉황. 감은(感恩)하옵니다.”
봉황이 고상의 팔을 잡아 일으키며 말했다.
“화사. 제가 나중에 부탁할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어요. 그러니 무슨 일이 있으면 저에게 말씀하세요. 제가 돕겠습니다.”
고상이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봉황을 보고 말했다.
“어… 봉황께서 저에게요?”
봉황은 고상에게 미소 짓고 고개를 끄덕였다. 동궁의 외실로 누군가 들어오는 기척이 났다. 봉황이 몸을 돌려 외실로 향하며 말했다.
“동궁에 계시는 동안 태평호에 계신 것처럼 편히 지내셨으면 좋겠습니다.”
고상이 봉황을 따라 외실로 나가며 말했다.
“감은하옵니다.”

봉황이 외실로 들어온 읍강을 보고 인사했다.
“린자(麟姉)!”
읍강이 봉황과 고상을 발견하고 말했다.
“안시. 오랜만이군.”
이마에 하얀 뿔이 달린 읍강은 은은하게 빛나는 하얀 옷을 입은 아름다운 여인이었는데 고상을 보고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처음 보는 화사구나.”
고상은 얼른 소매를 들어 읍강에게 인사했다.
“고상. 기린을 뵙습니다.”
읍강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 네가 수원이 데려온 화사구나.”
봉황이 읍강을 보고 물었다.
“벌써 수원을 만나셨습니까?”
읍강이 정각의 자리를 권하며 말했다.
“그래. 원군께 청할 것이 있다 하여 나는 좀 쉬러 왔다.”
봉황이 읍강의 시중을 들며 말했다.
“도예께서는 안녕하십니까?”
읍강이 미간을 찡그리고 말했다.
“많이 좋아지셨어. 나와 희발을 기억하시니 얼마나 다행이야.”
봉황이 읍강 옆에 앉으며 말했다.
“요즘같이 하늘이 어수선할 때 또 말썽이 생길까 걱정입니다. 자리가 다 무엇이라고 그러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읍강이 봉황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우리야 이 자리에 오래 앉아 있었으니 미련이 없지만 다른 이는 또 모를 일이지.”
봉황이 고개를 흔들며 한숨을 쉬었다. 고상이 읍강과 봉황의 눈치를 보다 자리에서 슬그머니 일어나 소매를 들어 공수하고 말했다.
“기린, 봉황. 저는 배가 고파서 요기를 하러 가보겠습니다. 편히 말씀 나누십시오.”
읍강이 고상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그래. 물러가 보아라.”
고상은 고개를 조아려 인사하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고상이 곳간에 있는 식자재를 이리저리 둘러보는 동안 양조가 나흘마를 데리고 돌아왔다. 황토색 옷을 입은 어멈이 양조에게 말했다.
“식사를 준비할까요?”
양조가 고상을 보고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사람이 먹는 것으로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나흘마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대답했다.
“네. 어디서 드시겠습니까?”
양조가 정각에 앉아 있는 읍강을 발견하고 한참 생각하더니 답했다.
“객실에 부탁드립니다. 너무 많이 준비하지 말고 서넛이 먹을 정도로 부탁드립니다.”
나흘마가 고개를 조아렸다. 양조가 고상에게 다가가 물었다.
“린자께서 언제 오셨나?”
고상이 정각을 힐끔 보고 말했다.
“방금 오셨어요. 주인께서 원군을 뵈러 가셨습니까?”
양조가 고상을 내려보고 눈을 굴리더니 말했다.
“아마.”
고상이 찬합을 들고 온객행과 주자서가 머무는 객실로 향하며 물었다.
“양조께서도 같이 드실래요?”
양조가 고상을 보고 물었다.
“무엇을?”
고상이 양조의 소매를 잡고 객실로 이끌며 말했다.
“에이! 그냥 같이 드세요. 봉황께서 해 주신 양분탕 진짜 맛있었어요.”


온객행과 주자서가 머무는 객실은 기척 없이 아주 조용했다. 양조는 고상이 내려놓은 찬합을 탁상 위에 올려 두고 열어 보았다. 옥산에서 보낸 천도복숭아 사이에 양분과 흑당을 담은 그릇이 들어 있었다. 작게 웃은 양조는 자리에 앉아 고상을 보았다. 고상은 객실에 있는 평상과 침상을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옷이 걸려있는 병풍 뒤로 거침없이 걸어가 소리를 질렀다.
“파사! 유서! 일어나 밥 먹자!”
곧 온객행의 볼멘소리가 들리고 옷을 걸치는 소리가 들렸다. 한동안 옷을 입는다고 시끄럽더니 고상이 주자서를 데리고 나오며 말했다.
“유서. 피곤해서 그래? 어디 아파?”
주자서가 고개를 작게 흔들고 손을 들어 눈을 비비고 말했다.
“제가 얼마나 잤습니까?”
뒤에 온객행이 둘을 뒤따라 나오며 말했다.
“아직 좀 더 자도 괜찮다니까. 우리는 손님이잖아.”
고상이 온객행을 쏘아보며 말했다.
“우리 유서 잘 먹인 거 맞아? 태평호에 있었을 때와 다른 것 같아!”
온객행이 대야에 물을 받으며 말했다.
“그래? 먹이는 건 조금 걸렀어도 재우는 것은 따뜻하게 잘 재웠는데.”
고상이 온객행이 가져온 대야에 수건을 적셔 주자서의 얼굴을 닦아주려고 하자 주자서가 손을 들어 거절하더니 세수를 하고 손을 닦았다. 고상은 주자서가 씻은 물을 다시 온객행에게 건네고 주자서를 탁상에 있는 자리에 앉혔다.

“유서. 이제 내가 있으니까 걱정 마. 우리 아기. 많이 먹어.”
주자서는 고상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아상. 저는 정말 괜찮아요. 아상께서는 드셨어요?”
고상이 찬합에서 그릇을 꺼내 양분을 자르며 말했다.
“아이참! 같이 먹으려고 가져왔지. 먹어보고 흑당을 넣으면 돼. 그게 싫으면 복숭아를 잘라서 넣어 줄게. 과일은 괜찮지?”
주자서가 그릇에 담긴 흑당을 보고 아연하여 말했다.
“흑당이요? 이 귀한 것을….”
고상이 주자서에게 양분이 담긴 그릇을 건네며 말했다.
“봉황께서 주셨어. 맛있어 얼른 먹어봐.”
온객행도 대야에 얼굴을 씻었는지 맑은 얼굴로 주자서 옆에 앉았다. 온객행이 주자서가 들고 있는 그릇을 보고 말했다.
“귀한 것이라도 유서는 단 것을 좋아하지 않으니까. 유서. 내가 죽을 끓일까?”
주자서는 대답 없이 숟가락을 들어 양분을 먹었다. 물컹한 식감이 신기하여 주자서가 연거푸 입에 넣자 고상이 깎은 복숭아를 그릇에 넣어 주었다.
“복숭아랑 먹어 봐. 원래 과일이랑 먹는 거래.”
고상은 그릇을 더 꺼내서 양조와 온객행 분의 그릇에도 복숭아와 양분을 잘라 넣었다. 양조가 손사래 치며 말했다.
“화사. 나는 괜찮으니 어서 드시게.”
고상이 그릇을 건네고 말했다.
“드셔보세요. 진짜 맛있어요.”
양조는 그릇을 들고 음식을 먹는 온객행과 주자서를 보다가 숟가락을 들어 양분을 먹어 보았다. 얼마 만에 먹는 음식인지 기억나지 않았지만 달고 맛있었다.

요기를 하고 찬합과 그릇을 치운 고상과 주자서는 꼭 붙어서 객실의 여기저기를 구경했다. 온객행은 그것이 마음에 안 들어 조금 토라진 상태였다. 별실에 걸린 사령의 편액을 구경하며 고상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주자서는 온객행이 알고 있는 주자서가 아니라 조금 낯설기까지 했다. 주자서가 고상에게 객실 곳곳에 놓인 사령의 문양을 보고 이야기를 해주면 고상이 그 말에 호응하는 식이다. 주자서가 말했다.
“봉황은 상서로운 신수로 산짐승을 드시지 않고 오동나무가 아니면 쉬지 않으시며 대나무 열매가 아니며 먹지 않고, 예천이 아니면 마시지 않는다 하였습니다.”(4)
고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 봉황께서 죽순을 좋아한다고 하셨어. 태평호에 돌아가면 가을이 오기 전에 죽순을 좀 더 캐자.”

주자서가 고상을 보고 물었다.
“봉황께서 죽순을 좋아하십니까?”
고상이 주자서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응. 단혈궁에 많이 심으셨데.”
주자서가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
“그 궁궐은 오동나무로 지었을까요?”
고상이 어깨너머로 밖으로 나가는 장지문을 보고 말했다.
“내가 가서 물어보고 올까?”
주자서도 고개를 돌려 장지문을 보더니 고개를 흔들고 말했다.
“아니요.”
고상이 주자서에게 가까이 몸을 붙이고 말했다.
“나… 기린도 봤어.”
주자서가 고상에게 물었다.
“기린이요?”
고상이 고개를 끄덕이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응. 근데 머리에 하얀 뿔이 있었어. 엄청 멋있었어.”
주자서가 자기 이마를 만지더니 말했다.
“뿔이요? 그럼 그분은 린(麟)이겠군요.”
고상이 다른 편액(扁額)을 가리키며 무엇이 쓰여 있는지를 묻자 주자서가 고상에게 글자를 읽어주었다.

고상과 주자서가 객실을 둘러보는 것을 구경하던 양조가 온객행에게 물었다.
“오늘이라도 어서 취수를 건너게.”
온객행이 일어나 화로를 가져오며 말했다.
“왜요? 저는 파사인 편이 낫지 않습니까? 제가 뭘 할 줄 아시고….”
양조가 웃으며 말했다.
“그대가 말썽을 피우면 이제 누굴 잡으면 되는지 알았으니 어서 하라는 것 아닌가?”
하고 주자서 쪽으로 고갯짓했다. 온객행이 소매에서 다구를 꺼내고 말했다.
“봉인이 풀려 힘을 찾으려면 못해도 한 갑자는 있어야 할 텐데 뭘 그렇게 서두르십니까?”
양조가 온객행이 차를 준비하는 것을 보고 말했다.
“그대의 유서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그렇지.”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산천대제께서는 왜 발의 힘을 찾고 계신 겁니까?”
양조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내가 그런 것까지 어떻게 알겠나?”
온객행이 코웃음 치며 말했다.
“대제께서는 어째 영력이 조금도 늘지 않으십니까?”

양조가 표정을 구기며 말했다.
“원군께서 왜 그 치를 부군 삼으셨는지 나는 아직도 모르겠네.”
온객행이 다구에서 시선을 옮겨 양조를 보며 말했다.
“아마 천존께서 그렇게 하지 않으셨을까요? 제가 알기로 서왕모께서 원군이 되시기 전에 이미 동왕공과 혼인하신 것 같은데.”
양조가 눈을 가늘게 뜨고 온객행을 보며 말했다.
“그런 것은 또 어떻게 아는가?”
온객행이 낮게 웃으며 말했다.
“다들 종종 잊으시는 것 같은데 저는 탁음대선의 제자입니다.”
양조가 온객행을 보고 물었다.
“촉룡께서 그런 말도 해주시는가?”
온객행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모든 진실은 말과 말 사이에 숨어있으니까요.”
양조가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말하니 정말 탁음대선 제자 같군.”
온객행이 찻주전자에 끓인 물을 담고 찻잎을 넣었다.

차를 다 내린 온객행이 찻잔에 차를 따르며 말했다.
“아상, 유서. 차를 마십시다.”
주자서가 쪼그리고 앉아 있는 고상의 팔을 잡아 일으키고 탁상에 와서 앉으며 말했다.
“흑랑. 원군을 뵙지 않으십니까?”
주자서의 호칭에 고상이 고개를 꺾어 ‘하하하’ 웃으며 말했다.
“흑랑? 하하하.”
온객행이 고상을 흘겨보며 말했다.
“처모! 뭐가 그렇게 재미있으십니까?”
고상이 자신을 부르는 말에 더 크게 웃으며 말했다.
“처모? 아하하하.”
주자서가 고개를 흔들고 말했다.
“흑랑. 그래도 나갔다 왔으니 찾아뵙는 것이 맞지 않을까요? 제가 잘 몰라서….”
온객행이 주자서에게 찻잔을 건네며 말했다.
“그렇게 걱정할 필요 없소.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유서는 동궁에서 쉬고 계세요.”
온객행의 말에 양조가 코웃음 치며 말했다.
“원군을 뵙고 나면 희상랑에게도 가서 인사하게. 그대의 유서를 잘 돌봐 주지 않았나?”
온객행이 주자서의 빨간 장포 자락을 만지며 말했다.
“가서 현리가 해준 옷을 찾아와야 하니까.”
주자서가 자리에서 일어나 장포를 벗으려 하자 온객행이 주자서를 말리며 말했다.
“입고 계시오. 입고 계시오. 내가 사례할 테니 일단 입고 계시오.”
주자서는 다시 자리에 앉아 찻잔을 들었다.

이제 막 웃음이 멎은 고상이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진짜 오랜만에 웃었네.”
온객행이 고상을 쏘아보며 말했다.
“주요가 오면 나도 원군을 뵈러 가야겠어.”
고상이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뭘 기다렸다 가? 얼른 다녀와. 얼른 가서 주요도 데려와.”
온객행이 고상을 보고 물었다.
“주요가 뭐라고 말 없었어?”
고상이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말했다.
“그건… 그건 주요에게 듣는 것이 좋겠네.”
그리고 찻잔을 들어 입을 축였다. 온객행은 ‘흥’하고 코웃음 치고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양조가 따라 일어나며 말했다.
“지금 중궁에 계실 텐데 혼자 갈 수 있겠나?”
온객행이 앉아서 차를 마시는 주자서를 보고 있다가 다가가 끌어안고 말했다.
“길이야 잃겠습니까? 어차피 동궁에서 중궁까지 가는 회랑은 하나인데.”
주자서는 얌전히 안겨 있다가 말했다.
“말로 부탁할 수 있는 일은 말로 하시오.”
온객행이 주자서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유서랑 단 둘이 있고 싶네.”
주자서가 온객행을 밀어내고 말했다.
“흑랑.”

양조가 조금 질린 듯한 기색으로 말했다.
“아무래도 불안한데….”
고상이 일어나 내원으로 향하는 장지문을 열고 말했다.
“봉황이랑 기린이 계시는데 설마 무슨 일이 있겠어요?”
양조가 온객행에게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말썽부리면 이제 자네가 아니라 자네 내자를 괴롭히겠네.”
온객행이 주자서를 껴안고 양조를 쏘아보며 말했다.
“유서가 무슨 상관이라고 유서를 괴롭힌다는 말이오!”
주자서가 자리에서 일어나 온객행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그 괴롭힘이 흑랑만 하겠습니까?”
주자서의 말에 양조와 고상이 ‘하하하’ 하고 웃었다. 양조와 온객행을 배웅한다고 내실로 나가는 길에 주자서와 고상은 아직도 정각에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는 기린과 봉황을 만났다. 기린에게 공손히 인사하고 양조와 온객행이 동궁을 나갔다.

다시 객실로 돌아온 고상이 찻주전자의 차를 비우고 새로 물을 올리며 말했다.
“유서. 싸움에서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지?”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구를 정리했다. 고상이 소매에서 연잎차를 꺼내고 말했다.
“아마 기린이랑 봉황께서는 정말 많은 것을 알고 계실 거야. 우리의 원군이 되면 더욱 좋고.”
주자서가 또 고개를 끄덕이며 소반에 다구를 올려 놓았다. 물이 끓자 고상은 찻주전자에 찻잎을 넣고 소반 위에 올려 놓으며 말했다.
“요대는 우리 둘 다 잘 모르니까. 원군은 많을수록 좋지.”
주자서가 소반을 들고 일어나며 말했다.
“지피지기 백전불태 (知彼知己, 百戰不殆.)”
고상이 주자서를 보고 결연한 표정을 하고 말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로움이 없다.”
그리고 장지문을 열고 정각으로 향하며 말했다.
“근데 유서. 나는 사실 나에 대해 잘 모르겠어.”
주자서가 고상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아상. 그건 저도 마찬가지예요.”
고상은 주자서를 보고 웃었다.


읍강은 객실에서 나오는 고상과 주자서를 보고 봉황에게 물었다.
“저 아이가 발의 아이?”
봉황이 고개를 돌려 다가오는 둘을 보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 맞습니다.”
읍강이 ‘흠’하고 주자서를 보더니 말했다.
“복잡하군.”
봉황이 기린을 보고 힘겹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상이 소매를 들어 인사하며 말했다.
“기린, 봉황. 태평호에서 온 고상과 유서가 인사드립니다.”
봉황이 일어나 고상의 팔을 잡아 일으키며 말했다.
“고상. 예를 거두세요.”
주자서가 다구가 담긴 소반을 놓고 읍강과 봉황에게 찻잔을 건네고 찻주전자를 들어 조심스럽게 차를 따랐다. 읍강이 고상과 주자서에게 자리를 권하며 말했다.
“이건 무슨 차지요?”
고상이 공손히 고개를 조아리고 답했다.
“태평호에서 딴 연잎입니다. 단양절이 지나고 따서 아주 향이 좋아요.”
읍강이 찻잔을 들어 향을 맡고 말했다.
“향이 아주 좋네요.”
읍강이 찻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연실을 맺으려면 여름이 오기 전에 잎을 따주어야 하니까요.”
고상이 웃으며 말했다.
“연실을 좋아하십니까?”
읍강이 고상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그럼요.”
고상은 신이 나서 읍강과 봉황에게 태평호의 이야기를 했다. 여름에는 무엇을 하는지 또 가을에는 무엇을 하는지. 고상의 이야기를 듣던 주자서는 모친과 당질을 데리고 태평호에 가서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흐뭇한 얼굴로 고상의 이야기를 듣던 봉황의 표정이 날카로워지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찌?”
읍강이 봉황의 소매를 잡고 말했다.
“안시. 진정하게. 이곳이 어디 인지 잊었는가?”
봉황이 읍강의 손을 잡고 말했다.
“린자. 적송자(赤松子)인 것 같아요. 적송자의 비가 내리면 날짐승은 하늘을 날 수 없습니다.”
봉황이 하늘로 날아오르며 말했다.
“린자. 발의 아이를 부탁드립니다.”
읍강이 정각에서 나와 하늘을 보며 말했다.
“적송자께서 혼자 오신 게 아니군.”
봉황은 주변을 살펴보다가 동문이 있는 쪽으로 날아갔다. 고상이 주자서에게 다가가 그의 팔을 잡고 말했다.
“무슨 일이지?”
읍강이 객실 쪽으로 손을 펴고 말했다.
“밖은 소란스러울 것 같으니 안으로 들어가지.”
주자서가 자리에서 일어나 소반을 챙겼다. 고상이 주자서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유서 괜찮으니 두고 어서 와. 들어가자.”
그리고 읍강의 뒤에 가깝게 붙어서 객실 안으로 들어갔다. 읍강은 고상과 주자서가 객실 안으로 들어오자 곧 고개를 숙이고 숨을 고르더니 뿔 끝에서부터 온 몸이 하얗게 빛나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주자서가 고상에게 몸을 붙이자 고상이 주자서의 몸에 팔을 두르며 말했다.
“괜찮아. 괜찮다. 나의 아가. 괜찮아.”
주자서는 자신의 몸에 둘러싸인 고상의 팔이 떨리는 것을 느끼고 고상의 손을 마주 잡았다. 순간 온 방 안이 하얗게 바래더니 사방이 조용해졌다. 주자서는 고상의 몸을 감싸듯 안고 눈을 감았다.

고상이 주자서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유서. 괜찮아. 내가 있잖아.”
주자서가 눈을 뜨고 고상을 보았다. 고상이 주자서를 올려보며 장지문이 있던 쪽으로 고갯짓을 했다. 주자서가 고상을 놓아주고 뒤를 보자 새하얀 기린이 장지문 앞에 앉아 있었다. 주자서가 놀라서 고상을 보고 말했다.
“아… 기린?”
읍강이 고상과 주자서를 보고 말했다.
“아무래도 산천대제가 일을 크게 벌이는 모양입니다.”
고상이 표정을 구기며 물었다.
“기린?”
읍강이 고상을 보고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갈아 치울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죠.”
고상이 읍강에게 다가가 말했다.
“기린… 주요는요? 파사는요?”
읍강이 다가온 고상의 몸을 코로 밀며 말했다.
“걱정 마세요. 수원은 봉황보다 나으니.”
고상이 바닥에 주저앉고 울먹이며 말했다.
“주요는… 주요는….”

주자서가 다가가 고상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말했다.
“아상. 괜찮을 거예요. 흑랑도 같이 있잖아요. 우리는 여기 얌전히 있는 것이 돕는 거예요.”
고상이 주자서를 끌어안고 훌쩍이며 말했다.
“주요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나는 어떡해.”
주자서가 고상을 달래며 말했다.
“저는 주인보다 저희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무서워요.”
고상이 주자서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말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열심히 수련할 걸. 앞으로는 진짜 열심히 할 거야.”
주자서가 부스스 웃었다. 읍강이 고상을 보고 말했다.
“너는 나이에 비해 수련의 경지가 높구나.”
고상이 고개를 돌려 읍강을 보자 읍강이 웃으며 말했다.
“네 아이를 지키거라. 너에게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
고상이 주자서를 더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
“우리 아이는 아무도 안 줄 거예요. 유서는 내가 지킬 거야.”

밖에서 천둥이 치더니 곧 벼락이 쏟아졌다. 커다란 소리에 놀란 주자서가 고상을 끌어당겼다. 자리에서 일어난 읍강이 작게 코웃음 치더니 장지문을 뚫고 밖으로 나갔다. 곧 밖에서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치는 소리와 벼락이 치는 소리가 들렸다. 고상이 주자서를 보고 말했다.
“영력이 조금만 더 있었으면 구경하러 갔을 텐데.”
주자서가 표정을 구기며 말했다.
“아상!”
고상이 주자서를 보고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아이참! 이런 구경을 또 어디서 해? 뇌공(雷公)이 오신 것 같은데. 난 본적 없단 말이야.”
주자서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이런 구경은 평생 안 하고 싶어요.”
고상이 주자서의 코를 손가락으로 ‘톡톡’ 치고 말했다.
“우리 유서는 겁쟁이야.”

주자서는 살면서 다른 사람에게 겁쟁이라는 소리를 들어 본적이 없어서 헛웃음이 절로 났다.
“아상. 저는 오래 살고 싶어요.”
고상이 자세를 바르게 하고 주자서의 양 어깨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그건 걱정 마. 반은 화사니까, 일반 사람보다는 오래 살 거야.”
주자서가 커다란 벼락 떨어지는 소리에 어깨를 움츠리며 말했다.
“아상. 정말 여기 있는 것이 안전한 걸까요?”
고상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주요가 그랬어. 동궁은 사령의 영력이 깃들어서 허락 없이 아무나 함부로 못 들어온다고.”
주자서도 고상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밖에서 커다란 벼락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고상과 주자서는 평상으로 가서 망가진 장지문을 보며 어깨를 붙이고 앉았다.

고상이 주자서의 손을 잡고 말했다.
“만약에 말이야. 만약에 무슨 일이 생기면 나를 버리고 도망가야 해.”
주자서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아상. 그럴 일은 없어요. 그럴 일이 생긴다고 해도 아상께서 도망치셔야죠.”
고상이 말했다.
“아이참! 유서. 너는 내가 시키는 대로 해. 내가 너를 지켜 줄 수 없는 상황이 오면 주요가 준 비녀를 부러뜨리고 도망가.”
주자서는 그제야 주요가 준 비녀가 생각나서 머리를 더듬었다. 고상이 주자서의 손을 멈추고 말했다.
“내가 너 하나 지키지 못할까? 내 아가.”
고상이 주자서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주자서가 고상의 등을 쓸며 말했다.
“제 몸에 있다는 이 영력을 쓸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고상이 고개를 들어 주자서를 보았다. 주자서는 고상의 표정이 슬퍼 보여서 조금 의아했다. 주자서가 고상에게 뭔가 물으려는 순간 둘이 앉아 있던 평상이 그림자 속으로 빠지기 시작했다. 고상이 주자서를 잡고 말했다.
“즉저. 이 나쁜 놈.”
그리고 두사람은 어둠 속으로 잠겨 들어갔다.


(4) 장자(莊子) 외편(外篇) 제17 추수(秋水)
南方有鳥,其名爲鵷鶵,子知之乎?夫鵷鶵發於南海而飛於北海,非梧桐不止,非練實不食,非醴泉不飲
“남쪽 지방에 새가 사는데, 그 이름을 봉황의 일종인 원추鵷鶵라 한다네. 자넨 알고 있는가? 그 원추라는 새는 남쪽 바다에서 출발해 북쪽 날아가는데, 오동나무가 아니면 머물지 않고,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도 않으며, 달디 단 샘물인 예천(醴泉)이 아니면 마시지 않는다네.”

蛇苺 第21

指桑罵槐 | 21. 뽕나무를 가리켜 회나무를 욕하다.

주요는 청구와 양조의 말을 듣고 나서야 금모원군께서 공공을 시켜 일부러 고상을 불렀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래서 요대에 도착해서 금모원군의 알현을 청했지만 거절당했던 것이다. 할 수 없이 공공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 보려고 했는데 이제 보니 공공을 만나기도 틀린 것 같다. 주요가 작게 한숨 쉬고 고상에게 말했다.
“아상. 아무래도 공공을 오늘 뵙기는 힘들 것 같으니 내일 아침에 다시 오자.”
고상이 주자서의 손을 잡고 주요에게 가서 말했다.
“주요. 아직 나도 혼인을 안 했는데 우리 아이가 먼저….”

주요가 고상의 뺨을 쓸고 말했다.
“너무 서운해 마라. 이 아이도 파사의 변덕에 장단을 맞추는 것뿐이니.”
온객행이 주자서의 곁에 붙어서 그의 허리를 안고 말했다.
“변덕 같은 것이 아니오.”
주자서가 온객행을 힐끔 보더니 ‘하’하고 헛웃음 쳤다. 온객행이 눈썹을 늘어뜨리고 말했다.
“유서!”
고상이 주자서에게서 온객행을 떼어내고 말했다.
“아직 나는 우리 아이를 보낼 마음이 없단 말이오! 이제 막 솜털 같은 우리 아이를 꼬드겨서!”
주자서가 한숨을 쉬고 이 상황이 재미있다는 듯이 보고 있는 청구와 양조에게 말했다.
“저희는 어디에 머무릅니까? 별궁으로 갈까요?”

주자서가 먼저 남궁의 동쪽에 있는 별궁으로 향하자 양조가 다가와 그의 소매를 잡고 말했다.
“아니오. 동궁으로 갈 거요.”
주자서가 눈썹을 찌푸리고 청구와 양조를 보았지만 더 말하지 않았다. 주자서가 청구와 양조를 따라 움직이자 고상이 청구와 양조의 눈치를 보며 주자서의 팔에 매달렸다. 청구가 고상을 보고 말했다.
“네가 그 화사구나. 너는 물가에 산다지?”
고상이 주자서의 눈치를 보고 똑바로 서더니 다소곳이 손을 모으고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고상. 청구 어르신과 양조 어르신을 뵙습니다.”
양조가 동궁으로 향하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아직 이름도 없구나.”
청구가 양조를 따르며 말했다.
“아직 원군을 뵙지 않았으니까. 원군을 뵙고 나면 하늘에서 부르는 이름이 생기겠지.”

청구는 어깨너머로 화사의 옷을 입고 있는 고상과 주자서를 보고 웃었다. 주자서가 청구와 양조의 뒤를 따르자 고상이 다시 주자서의 소매를 잡고 기대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유서. 나는 요대에 처음 와 봐.”
주자서가 손을 펼쳐 귓속말하듯이 고상에게 물었다.
“아상께서도 구름을 밟고 오셨어요?”
고상이 주자서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주자서가 ‘흠’하고 다시 앞을 보고 걸었다. 고상이 주자서의 소매를 당겨 물었다.
“왜? 유서는 구름을 못 타?”
주자서가 고상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고상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왜? 주요의 비녀도 있고 내 피도 마셨는데 왜?”
주자서가 고상을 보고 고개를 흔들었다. 고상이 주자서에게 몸을 붙이고 말했다.
“왜 그렇지? 있다가 처소에 도착하면 주요에게 봐 달라고 할게.”
주자서가 부스스 웃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아상께서 걱정하실 일이 아니에요.”

고상이 주자서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고 말했다.
“여기 살 것도 아닌데 구름 좀 못 타면 어때. 내가 안고 가면 되지.”
주자서가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영력을 쓰셔도 되겠어요?”
고상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정말… 여기 있는 모든 것이 나보다 영력이 많은 것 같아. 좀 무서워.”
주자서가 동조하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여기 계신 분들은 육신이 아니라 혼령을 먹는데요.”
고상이 고개를 들어 주자서를 보고 말했다.
“혼령도 먹을 수 있어?”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상이 눈썹을 찌푸리고 물었다.
“혼령은 어떻게 먹는데?”
주자서는 고상의 의문에 조금 질려서 작게 웃고 말했다.
“왜요? 제 혼령을 드시게요?”
고상이 몸을 바로 하고 주자서의 어깨를 밀고는 말했다.
“유서를 내가 왜 먹어. 먹을 거였으면 내 아이 삼지도 않았지.”
주자서와 고상은 서로 마주 보고 웃음을 참았다. 시시덕거리는 주자서와 고상의 이야기를 듣던 양조와 청구도 어깨를 들썩이며 조금 웃었다.

온객행은 딱 붙어서 앞서 걷고 있는 주자서와 고상이 못마땅해 표정을 구기고 걸었다. 주요가 온객행을 보고 ‘흥’하고 웃으며 말했다.
“겁이 많아서 싫다더니.”
온객행이 주요를 보고 부루퉁하게 말했다.
“그러는 그대는 사내는 싫다더니 이렇게 친히 지켜주러 오셨소.”
주요가 온객행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찌르며 말했다.
“내가 즉저에게 얼마나 많이 뺏겼는지 아는가? 용왕이 되면 다 갚게.”
온객행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용왕 안 한다는데 다들 왜 이러시나.”
주요가 온객행을 쏘아보며 말했다.
“그럼 무슨 수로 지키려고 하나?”
온객행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주요. 발의 영력은 봉인된 것이 아니오?”
주요가 앞서 걷는 주자서를 보고 말했다.
“아무래도 내가 봉인을 깬 것 같아. 다행히 유서가 잘 버텨주고 있는데 얼마나 갈지 모르겠어.”
온객행이 주요의 소매를 잡고 물었다.
“발의 영력을 옮길 방법은 정말 없소?”
주요가 한숨을 쉬고 말했다.
“영력을 옮기는 방법이야 많지.”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이고 주자서를 보았다.
“유서가 버틸 수 있을까요?”
주요가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그게 문제야.”
온객행도 한숨을 쉬고 앞서 걷는 주자서를 보았다.


동궁은 온객행과 주자서가 머물렀던 허름한 별궁의 객실과는 차원이 달랐다. 커다란 외실 안쪽으로 중앙에 사령의 처소가 있고 왼편에는 서재와 집무실이 오른편에는 별실과 객실이 있었다. 그 앞에 작은 정원에는 정각이 있었는데 그곳에 앉아서 차를 마시던 봉황이 그들을 반겼다.
“수원!”
주요가 봉황을 보고 인사했다.
“안시선을 뵙습니다.”
봉황이 주요에게 다가와 팔을 잡고 말했다.
“수원. 예를 거두게. 오랜만이군.”
주요가 작게 고개를 흔들자 봉황이 혀를 차며 말했다.
“그대는 내게 수원이니 그리 알게.”
그리고 제일 큰 객실로 주요를 안내했다. 봉황이 주요에게 말했다.
“동궁은 손님이 많지 않아서 객실이 크지 않으니 불편해도 참아주게.”
주자서는 백택의 정전보다도 넓은 객실을 보고 조금은 의아한 표정으로 봉황을 보았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상도 객실의 내부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져서 봉황의 눈치를 보았다. 봉황이 주요에게 말했다.
“시중을 들 아이가 필요하면 말하게.”
주요가 고개를 흔들고 고상의 손을 잡고 말했다.
“화사가 할 테니 걱정 마십시오.”

봉황이 고상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이 아이가 물가에 산다는 화사군.”
고상이 다소곳이 손을 모으고 인사했다. 봉황이 고상의 팔을 잡아 일으키며 말했다.
“벌써 해시가 넘었으니 쉬시게.”
봉황이 온객행에게 다가가 말했다.
“자네와 내자는 옆에 있는 객실을 쓰게.”
온객행이 봉황에게 소매를 들어 인사하고 주자서를 끌고 객실을 나갔다. 고상이 주자서를 따라 나가려고 하자 주요가 고상을 붙잡고 고개를 흔들었다. 봉황은 온객행과 주자서가 나가자 청구와 양조를 불러 뭐라고 말했다. 곧 청구와 양조도 객실을 나갔다. 봉황이 탁자에 있는 자리를 주요에게 권하며 말했다.
“수원. 그대가 알아 둬야 할 것이 있네.”
주요가 고상을 보자 봉황이 고상에게 손짓하여 자리를 권하고 말했다.
“공석인 자리는 북해 용왕 자리 만이 아니네.”
주요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무도 하려고 하지 않는 자리니까요.”
봉황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산천대제를 폐할 수도 없고 대신할 수도 없으니 일이 더 복잡하지.”
주요가 눈을 커다랗게 뜨고 봉황을 보았다.
“무… 무슨?”
봉황이 주요를 보고 힘겹게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으며 말했다.
“그대가 모르는 일이 있네.”
그리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금모원군이 발의 영력을 거두었을 때 생긴 일이다. 금모원군은 발의 영력을 금동으로 만든 팔주령(八珠鈴)에 봉인해 두었다. 금모원군의 거처에 둔 그 신물(神物)은 천존의 허락을 받은 물건이라 아무나 만지거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당시 산천대제는 자신에게 아리따운 요괴와 사람을 보내주는 황룡을 가까이했다. 황룡은 사방신과 오룡의 수장이 되면 금모원군보다 더 큰 힘을 얻게 된다는 사람들의 노래를 듣고 현천상제를 도발했다. 그리고 아무도 현천상제를 도울 수 없게 일부러 산천대제에게 팔주령에 대한 정보를 흘렸다. 영력이 부족하여 무시를 당하는 일이 많았던 산천대제는 금모원군의 거처에 들어가 팔주령을 훔쳐 발의 힘을 휘둘렀다. 산천대제가 휘두르는 힘을 수습하느라 금모원군과 사방신과 오룡, 사령이 바쁜 틈을 타서 황룡은 현천상제가 다스리는 북방의 땅에 황룡의 치세를 드높이는 노래를 퍼뜨리고 현무의 자리를 위태롭게 했다. 현천상제의 힘이 가장 약한 염절(炎節)을 기다렸다가 그를 도발한 것도 처음부터 모두 계획된 일이었던 것이다.

황룡이 현천상제를 죽인 것은 단순히 실수라고 치부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천존께서는 황룡을 땅으로 추방하고 다시는 그가 하늘로 돌아올 수 없다는 축객령만 내리고 더 벌하지 않으셨다. 팔주령으로 하늘을 어지럽힌 산천대제의 입지는 그 전보다 더욱 좁아졌고 발의 강력한 영력을 맛보았던 산천대제는 그 이후로 계속해서 발의 영력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산천대제는 발의 영력의 위치를 황룡이 알고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서 황룡을 찾는데 가장 적극적이었다. 어쩌면 이미 찾아서 어디에 숨겨 놓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금모원군은 아무도 몰래 발을 찾아가 그 힘을 돌려주려고 했는데 발은 이미 천존의 명을 받들어 태양에서 가장 가까운 진성(辰星)의 현녀가 되었고 발의 딸들은 그녀의 성과 이름을 세습하며 발의 영력을 봉인하게 된 것이다.

그런 발의 후손을 땅에 있던 황룡이 찾았다. 발의 후손을 다시 하늘로 돌아갈 수 있는 수단으로 보았던 황룡에게서 도망치다 발 후손의 부군이 살해당했다. 그것을 너무 늦게 알아버린 금모원군이 시랑을 보내 발의 후손을 찾게 했지만 때가 너무 늦어 흔적이 끊어진 것이다. 발의 힘을 쫓았던 시랑이 찾아낸 주자서가 사내였기 때문에 시랑은 발의 아이에 대한 자취를 놓쳤다고 생각했다. 금모원군은 주요가 찾아왔을 때, 일부러 황제의 후손이라는 말만 흘렸다. 주요가 대선에서 쫓겨나 한낮 무지기가 된 것도 황룡을 감싸다 그렇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금모원군은 주요가 다시 황룡을 만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만나서 결자해지(結者解之)했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사람이 되어버린 황룡이 다시 주요를 찾지 않았으니 이제 놓아주라고. 황룡은 언제든지 주요를 찾을 수 있었지만 찾지 않았으니 네가 그를 버리라고.


주요는 봉황의 말에 미간을 찡그리고 눈을 감았다. 봉황이 주요의 기색을 살피며 말했다.
“원군께서는 아직도 그대를 많이 걱정하고 계시네.”
주요가 고개를 숙이고 울상으로 말했다.
“저 때문에… 원군께 죄를 지었습니다.”
봉황이 주요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그게 아니네. 수원. 그게 아니야.”
봉황이 고상에게 눈치를 주자 고상이 객실 안을 둘러보더니 일어나서 차를 준비했다. 봉황이 주요에게 말했다.
“원군께서는 그대가 황룡의 자리를 맡아주었으면 하네.”
주요가 고개를 들어 봉황을 보고 말했다.
“제가 어찌!”
봉황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그대는 이미 죗값을 충분히 치렀네. 과했지. 언제까지 황룡의 자리를 공석으로 둘 수는 없지 않은가? 산천대제께서도 그대라면 수긍하실 테니….”
주요가 자리에서 일어나 소매를 모아 공수하며 말했다.
“안시선. 어찌 무지기가 황룡이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봉황이 인상을 쓰고 말했다.
“수원! 그대가 어찌 무지기인가?”

고상이 주요와 봉황의 눈치를 보다가 주요에게 다가가 팔을 붙잡고 말했다.
“주인, 주인께서 좋아하시는 동정차(洞庭茶)로 할까요? 아니면 올해 새로 딴 연잎 차로 할까요?”
주요는 고상의 목소리에 격앙된 마음이 조금 진정되었다. 눈치를 보며 저에게 다가와 좋아하는 차를 말하는 아이가 귀여워 주요가 고상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벌써 연잎을 땄어? 어디 맛보자.”
주요가 다시 자리에 앉고 고상이 막 끓은 물을 담은 찻주전자에 말린 연잎을 놓고 주요 옆에 앉아 주요의 시중을 들었다. 차시중을 드는 일은 서툴렀는데 천룡이 머무는 동안 익숙해졌는지 곧잘 했다. 고상이 하는 것을 보고 있던 봉황이 주요를 보고 말했다.
“황룡이 되면 가신이 많이 필요할 테니 이 아이도 데려오면 되겠군.”

고상이 봉황 앞에, 주요 앞에 찻잔을 놓고 차를 따르며 말했다.
“올해는 유서가 도와줘서 백련잎을 아주 많이 땄어요.”
그리고 주요를 보고 웃었다. 봉황이 찻잔을 들어 향을 맡고 말했다.
“그대가 태평호에서 더 기다린다 한들 황룡이 오겠나?”
주요는 고개를 숙이고 찻잔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고상이 주요의 소매를 잡으며 눈치를 보자 주요가 찻잔을 들어 향을 맡고 입을 축인 다음 말했다.
“아주 맛이 좋네. 아상.”
고상이 주요를 보고 배시시 웃었다. 주요는 그 모습이 또 예뻐서 한껏 날이 섰던 마음이 누그러졌다. 봉황이 찻잔을 비우고 일어나며 말했다.
“아주 귀한 차를 마셨으니 내게 보답할 기회를 주게.”
그리고 소매를 들어 인사하고 객실을 나갔다.

봉황이 객실을 나가자 고상이 주요에게 기대며 말했다.
“주요. 황룡이 되면 태평호를 떠날 거야?”
주요는 고개를 흔들고 말했다.
“내가 어딜 가겠어.”
고상이 주요의 손을 잡고 말했다.
“주요. 주요가 황룡이 되어 하늘로 가면 나도 따라갈래.”
주요는 고상을 보고 울상을 만들고 말했다.
“거길 어떻게 따라서 오려고.”
고상이 주요의 얼굴을 보고 말했다.
“주요가 하라고 하는 거 열심히 할 게. 이제 도망도 안 가고 다 열심히 할 게. 그니까 파사도 데리고 가자.”
주요가 부스스 웃으며 고상의 코를 손가락으로 ‘톡톡’ 치고 말했다.
“그건 온객행에게 물어봐야지.”
고상이 웃으며 말했다.
“에이 주요! 걱정 마. 유서는 내 아이니까. 유서를 데려가면 파사도 올 거야.”
주요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정말 아주 좋은 미끼네.”
고상이 손을 들어 입을 가리더니 ‘히히히’ 웃었다.


주자서는 봉황이 말한 크지 않은 객실을 보고 조금 넋이 나갔다. 주요와 고상이 머무는 가장 큰 객실도 화려했지만 온객행과 주자서에게 머물라고 한 객실도 매우 컸다. 청구와 양조가 탁자에 가서 앉고는 말했다.
“앞으로 잘 부탁하네.”
주자서가 공손히 소매를 들어 조아리며 말했다.
“망극합니다.”
양조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나는 평상에서 잘 테니 어서 쉬게. 사람은 매일 먹고 잔다지?”
청구가 일어나 화로에 물을 올리며 말했다.
“그래. 우리는 불편해 말고 어서 쉬게.”
온객행이 주자서의 등허리에 손을 얹고 침상으로 가며 말했다.
“객실 안에 함께 있는데 어찌 편히 쉬라는 말씀이오?”
양조가 온객행을 쏘아보며 말했다.
“흑망 너더러 쉬라고 한적 없네.”
주자서가 온객행의 손길을 피해 평상으로 가며 말했다.
“저 때문에 고생이 많으신데 먼저 쉬시지요.”
청구가 낮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는 자거나 먹지 않아도 되니 상관하지 말고 어서 쉬게.”
온객행이 평상에 가서 앉은 주자서 옆에 앉으며 말했다.
“부부가 있는 방에서 무슨 구경을 하시려구요?”
양조가 고개를 돌려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왜? 무슨 구경시켜줄 텐가?”
청구가 찻주전자에 물을 담고 온객행을 힐끔 보고 말했다.
“오랜만에 좋은 구경하겠군.”
청구가 찻잔과 찻주전자가 담긴 소반을 들고 탁자로 가서 양조 앞에 앉아 차를 나눠 마시며 온객행을 보았다.

주자서가 자리에서 일어나 소매를 모으고 말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그리고 커다란 병풍 뒤에 있는 침상으로 가서 붉은 장포를 벗었다. 온객행이 주자서가 벗어 놓은 장포를 옷걸이에 잘 걸어 놓고 침대로 다가와 말했다.
“유서. 아무것도 먹지 않았는데 뭐라도 먹겠어? 지금 준비할까?”
주자서는 작게 고개를 흔들고 신발을 벗고 침상 위로 올라갔다. 온객행이 주자서의 소매를 잡아 그를 멈추고 중의를 벗기려고 하자 주자서가 손을 뿌리치고 말했다.
“그냥 두십시오. 괜찮습니다.”
온객행이 앞섶을 잡아 벌리며 말했다.
“그럼 불편하잖아. 우리는 손님이니까 오래 자도 괜찮다니까.”
주자서는 작게 한숨 쉬고 온객행이 하자는 대로 순순히 따르고 침상 위에 몸을 뉘었다. 주자서는 부드러운 비단 금침에 얼굴을 묻고 금방 잠이 들었다. 온객행도 겉에 입은 장포를 벗고 침상 위로 올라갔다. 요즘 주자서는 금방 잠들고 잘 깨어나지 못했다. 전보다 더 안 먹고 안 마시니 온객행만 애가 타서 안절부절못했다. 축 늘어진 주자서를 끌어안고 온객행이 말했다.
“유서. 내일은 지백에게 가서 잉어를 먹자.”
그리고 주자서의 가슴에 고개를 기댔다. ‘쿵쿵’ 뛰는 심장 소리가 기꺼워 뺨을 비볐다.

온객행이 눈을 떴을 때 주자서는 온객행의 등에 고개를 기대고 팔을 둘러 온객행을 안고 자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려 어깨너머로 보니 주자서는 아직도 자는 모양이다. 온객행은 눈을 감고 주변의 기척을 읽었다. 특별히 잠들기 전과 다른 기척이 없어 온객행은 뒤에서 느껴지는 주자서의 온기를 느꼈다. ‘이렇게 안겨 있는 것도 좋구나.’ 하고 생각한 온객행이 배시시 웃었다. 한 시진쯤 주자서에게 안겨 있던 온객행은 주자서가 등에 뺨을 비비는 것을 느꼈다. 온객행에게 둘러싸인 팔이 들리자 온객행은 얼른 주자서의 손을 잡고 뒤돌아 누웠다. 주자서는 아직 잠이 덜 깬 듯 눈을 깜빡이더니 다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제가 얼마나 잤습니까?”
온객행은 주자서와 더 누워 있고 싶어서 말했다.
“아직 더 자도 괜찮아. 더 자게.”
주자서는 다시 눈을 감더니 금방 숨소리가 일정하다. 다시 잠든 주자서의 입술에 입을 살짝 맞추고 가슴에 고개를 기대며 그를 끌어안았다. 주자서는 조금 뒤척이더니 다시 축 늘어져 잠이 들었다.


주요는 고상을 재우고 밤새 생각을 하다 답답해져서 객실을 나와 내원에 있는 정각으로 갔다. 의자에 앉아 한숨을 쉬자 언제 나왔는지 청구가 다가와 인사했다.
“대선. 피로하지 않으십니까? 쉬시지 왜 나오셨어요?”
주요가 청구를 보고 물었다.
“그대는 얼마나 알고 있나요?”
청구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야 원군께서 말씀해 주신 것만 알고 있지요.”
주요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유서는 얼마나 버틸 것 같소?”
청구가 주요 옆에 앉으며 말했다.
“영혼이 타기 시작한 것 같아요.”
주요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청구가 자기가 나온 객실을 보고 말했다.
“흑망은 진심인 것 같아요.”
주요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원군께 부탁해서 반도원의 반도라도 먹일까요? 명(命)이라도 붙잡고 있으면 혼이 좀 덜 탈까요?”

청구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주요에게 다가가 말했다.
“그것이 이상해요. 그 아이에게서 발의 영력과 그 아이의 영혼 말고 다른 것도 느껴져요.”
주요가 고개를 돌려 청구를 보았다. 청구가 주요에게 더 가깝게 다가가 말했다.
“이건 청조께서 해준 말인데. 그 아이에게 천강의 기운이 있다 합니다.”
주요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천강?”
청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무래도 발의 후손이 사내가 된 이유는 그 천강의 기운 때문인 것 같아요.”
주요가 온객행과 주자서가 머무는 객실을 보고 말했다.
“원군께서 따로 하신 말씀은 없으시구요?”
청구가 다시 몸을 바로 하고 기침으로 목을 가다듬더니 말했다.
“이대로 타면 아마 천도연까지 버티지 못할 것 같아요.”
주요가 말했다.
“제가 원군을 뵐 수 있게 도와주시겠어요?”
청구가 중궁 쪽을 보더니 말했다.
“지금이라도 알현하시겠습니까?”
주요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청구가 외실로 손바닥을 펴며 말했다.
“대선, 가시죠.”

양조가 객실에서 나와 청구와 주요가 중궁으로 향하는 것을 보고 봉황의 처소로 갔다.
“봉황. 수원대선께서 원군을 뵈러 가셨습니다.”
봉황이 장지문을 열고 나와 말했다.
“어떨 것 같은가? 황룡을 맡으실 것 같은가?”
양조가 손사래 치며 말했다.
“저에게 물으십니까?”
봉황이 주요의 객실을 보고 말했다.
“그 고상이라는 아이를 아끼는 듯하니 그 아이를 잘 구슬리면 되지 않을까요?”
양조가 객실을 보고 말했다.
“아직 너무 어리고 영력이 부족하여 하늘에서 못 버틸 텐데요.”
봉황이
“쯧”
혀를 차며 말했다.
“그러게 황룡의 자리는 왜 공석으로 둬서 이 사달을 만드는지….”
양조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무도 하려고 하지 않아서 문제지요. 북해 용왕 자리는 하겠다는 이들 천지인데 천존께서 원하는 치는 관심도 없으니.”
봉황이 온객행이 있는 객실 쪽을 고갯짓하고 물었다.
“발의 후손은 좀 어떻습니까? 버틸 것 같아요?”
양조가 고개를 작게 흔들며 말했다.
“벌써 영혼이 타기 시작했어요. 천도연까지 못 버틸 겁니다.”

봉황이 혀를 차며 말했다.
“이러다 흑망의 내자가 죽기라도 하면 흑망은 또 어떡합니까?”
양조가 봉황을 빤히 보더니 물었다.
“봉황께서는 느끼셨습니까?”
봉황이 양조에게 물었다.
“뭘 말이오?”
양조가 말했다.
“청조께서 말씀하시기를 천강의 기운이 있다 합니다.”
봉황이 양조의 말을 듣고 눈을 내리깔며 입을 다물자 양조가 말했다.
“삼원(三垣; 천궁)과 관계 있는 일 아닙니까?”
봉황이 양조를 힐끔 보더니 피식 웃으며 말했다.
“원군께 내가 여쭤봤는데 그쪽은 우리가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양조가 다시 시선을 다시 객실로 돌리고 말했다.
“흑망의 힘은 아직 다 돌아오지 않았어요. 그의 봉인된 힘이 모두 돌아오면 제가 막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봉황이 동조하며 말했다.
“차라리 취수를 건너서 얼른 승천했으면 좋겠는데 말이죠.”
양조가 고개를 돌려 봉황을 보고 놀란 기색을 하고 물었다.
“아직 힘이 다 돌아오지 않았는데도 가능합니까?”
봉황이 말했다.
“아마 가능할 겁니다. 지킬 것이 생겼으니 더 강해지겠죠.”

양조가 한숨을 쉬고 말했다.
“발의 후손이라는 치는 참 유순하여 다루기 쉬울 것 같은데….”
봉황이 웃으며 말했다.
“그가 발의 후손이라면 그것도 모르는 일이지 않겠습니까?”
양조가 봉황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그것도 그렇네요.”
봉황이 양조에게 물었다.
“수원은 원군께 뭘 청할까요?”
양조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정말 모르겠어요. 자리를 거절하러 가신 것인지 아니면 흑망의 내자를 위해 부탁을 하러 가신 것인지.”
봉황이 중궁 쪽으로 몸을 돌리고 말했다.
“아니면 둘 다일지.”
양조가 말했다.
“대선께서 데려온 화사와 발의 후손이 아는 사이 같았어요. 둘의 영이 비슷하게 닮아 있는 것도 이상합니다.”
봉황이 미간을 찡그리고 물었다.
“그래요?”
양조가 말을 이었다.
“그 화사는 아직 어린데 영력이 꽤 강한 편이에요.”
봉황이 어깨너머로 객실을 보고 말했다.
“참 오래 살다 보니 옥산을 나가 살아남은 화사는 내 평생 처음 봅니다.”
양조가 봉황에게 말했다.
“본인은 모르는 것 같던데….”
봉황이 말했다.
“공공과 원군께서 그 아이에게 바라는 것이 있으니 지켜봅시다.”


고상이 객실에서 나와 주변을 둘러보더니 봉황과 양조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봉황. 양조. 기침하셨습니까?”
고상의 인사에 봉황이 밝게 웃으며 말했다.
“예를 거두세요. 잘 주무셨습니까? 불편하지는 않으셨어요?”
고상이 부스스 웃으며 말했다.
“저는 원래 물 속에서 자는데 침상에서 자는 것은 오랜만이었어요.”
고상의 말에 양조가 ‘하하하’ 웃으며 말했다.
“태평호 전체가 화사의 침상이겠군요?”
고상이 양조에게 웃으며 말했다.
“에이, 어르신 말씀 편하게 하세요. 저는 좀 배가 고픈데 먹을 게 없나요?”
봉황이 외실 오른편에 있는 작은 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쪽에 주방이 있긴 합니다만 사용하지 않은지 오래되어서 쓸만한지 모르겠군요. 저와 가서 보시겠습니까?”
고상이 봉황의 소매를 잡고 그 건물로 향하며 말했다.
“봉황 어르신은 뭘 좋아하십니까?”

蛇苺 第20

無中生有 | 20. 무에서 유가 생겨난다.

산천대제는 주작과 백호를 힐끔 보더니 말했다.
“흑망은 천존께서 사하신 일은 결정했는가?”
온객행이 소매를 들어 고개를 조아리고 말했다.
“스승님께 고견(高見)을 듣고 결정할까 합니다.”
온객행이 계속해서 종화산에 가려는 것을 고집하자 짜증이 났는지 산천대제가 온객행의 뒤에 서 있는 주자서의 소매를 잡아 끌며 말했다.
“그럼 종화산에 다녀오시게. 그동안 그대의 내자는 내가 데리고 있지.”
주자서는 소매를 빼려고 힘을 줬지만 보이는 것과 달리 산천대제의 힘이 좋아 오히려 주자서가 휘청거렸다. 주작은 산천대제가 하는 것을 보고 있다가 말했다.
“대제. 아무리 그래도 남의 내자만 데리고 있는 것은 좀….”
산천대제가 표정을 구기고 주작을 보며 말했다.
“내가 황룡의 상전인데 무엇이 이상하다는 말이냐?”
백호가 주자서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며 말했다.
“정말 발의 영력이 느껴지는군.”
그리고 손을 들어 주자서를 잡으려고 하자 산천대제가 백호의 손을 후려치고 말했다.
“어디 감히!”
백호가 산천대제를 보고 못마땅한 표정을 하고는 고개를 조아렸다.

주자서가 소매를 들어 말하려고 하는데 하늘에서 돌풍이 몰아쳤다. 당황한 산천대제가 주자서의 소매를 놓자 주자서는 재빨리 온객행이 있는 쪽으로 몸을 틀었다. 돌풍 사이에서 응룡이 나타나 땅에 발을 디뎠다.
“원군께서 산천대제를 배웅하라 명하셨으니, 제가 대제를 동해까지 모시겠습니다.”
백호가 응룡을 보고 코웃음 치며 말했다.
“주작과 백호인 내가 있는데 그것은 무슨 뜻이오?”
주작이 백호를 말리며 말했다.
“경진선께서 그렇게 해주시겠습니까?”
응룡이 산천대제에게 포권하고 말했다.
“동쪽에 사는 신선 중에 동왕공께서 제일 한가하시니까요.”
백호가 으르렁 대며 말했다.
“그게 무슨 뜻인가! 무엄하다!”

주작은 고개를 흔들고 응룡과 백호를 번갈아 보더니 붉은 날개를 펼쳐 하늘로 날아오르며 말했다.
“원군께서 경진선께 부탁하셨으니 그럼 저는 경진선만 믿고 이만 남쪽으로 가보겠습니다.”
응룡이 하늘로 날아오른 주작에게 포권하고 말했다.
“축융대선, 안시선께서 요대의 일을 마치면 찾아뵙겠다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주작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백호를 보고 말했다.
“욕수. 그대가 기형(麒兄)과 린자(麟姊)에게 입은 은혜를 생각하게. 기린 덕택에 도예께서 조용한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말이야.”
백호가 주작을 보고 표정을 구기며 말했다.
“걱정 마시오! 내가 언제까지 애들일 것 같소?”
주작이 백호를 보고 혀를 차며 말했다.
“현명 하나로 충분하니 제발 사고 치지 말게. 산천대제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주작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산천대제의 대답도 듣지 않고 남쪽으로 날아가 버렸다. 산천대제가 날아가는 주작의 뒷모습을 못마땅하게 보며 다시 주자서를 찾았다.

주자서는 온객행의 소매를 붙들고 그의 뒤에 서 있었다. 무슨 얘기를 했는지 온객행의 얼굴에 미소가 걸려있다. 산천대제가 온객행에게 말했다.
“종화산에 굳이 내자까지 가야 하겠는가? 흑망이 올 때까지 내가 옥산에서 그대의 내자와 기다리고 있겠네. 이름이 뭐라고 했지?”
응룡이 온객행 앞을 가로 막고 말했다.
“산천대제. 하늘에 소문이 자자합니다. 산천대제께서 희롱한 사람과 요괴가 한둘입니까? 대제의 뒤치다꺼리를 원군께서만 하셨겠어요?”
백호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산천대제를 보았다. 산천대제는 여인이고 사내고 그저 마음에 들면 멋대로 취하고 버렸기 때문에 신선들 사이에서 평판이 좋지 못했다. 사방신이나 오룡보다도 낮은 영력에 자기 일은 보통 사방신이나 금모원군에게 미루고 미색이나 탐했기 때문이다. 주자서가 발의 후손인 것을 모른다면 겉으로 보기에는 또 산천대제가 온객행의 내자를 탐하는 모양새였기 때문에 백호도 응룡의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응룡이 산천대제에게 손바닥을 펼쳐 길을 안내하며 말했다.
“산천대제 이쯤하고 동해로 가시지요.”
산천대제가 백호를 보자 백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흑망이 북해 용왕이 되면 어차피 오룡의 신하가 될 테니 걱정 마십시오.”
산천대제가 ‘흥’하고 코웃음 치고 응룡이 안내하는 데로 발걸음을 돌렸다. 응룡이 고개를 돌려 온객행에게 말했다.
“흑망. 종화산으로 가서 괜히 촉룡을 귀찮게 하지 말고 요대로 돌아가게.”
온객행이 소매를 들어 응룡에게 공수하고 말했다.
“경진선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산천대제가 응룡과 함께 사라지자 백호가 온객행에게 말했다.
“그 치가 발의 후손이오?”
온객행이 백호에게 소매를 들어 인사하며 말했다.
“흑망 욕수대선을 뵙습니다.”
주자서도 소매를 들어 인사했다. 백호가 주자서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예를 거두게. 발의 능력이 느껴지는군.”
주자서가 고개를 들어 백호를 보았다. 백호는 주자서의 얼굴을 한참 보더니 말했다.
“여인 치고는 흠….”
주자서가 자세를 바로 하고 소매를 털자 백호보다 세 치는 키가 컸다. 백호가 주자서를 올려보며 말했다.
“크군.”

온객행이 주자서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말했다.
“욕수대선, 우리 유서는 사내에요.”
백호가 주자서에게 시선을 떼지 못하고 말했다.
“발의 후손인데…?”
그러더니 온객행을 보고 물었다.
“발의 영력은 어떠한가? 벌써 취했는가?”
온객행이 표정을 구기고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무엇을 취한다는 말입니까? 영력은 금모원군께서 봉인하셔서 쓸 수 없습니다.”
백호가 아깝다는 듯이 온객행에게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너무 오래 봉인되어 있었나 보군! 이렇게 영력이 느껴질 정도인데 어찌 취할 수 없다는 말인가?”
온객행이 주자서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고 말했다.
“그 영력 때문에 우리 유서가 아파요.”
주자서는 온객행의 말에 눈을 굴리다 고개를 흔들었다.

백호가 주자서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내가… 내가….”
온객행이 주자서를 좀 더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탁음대선께서 발의 힘은 이미 주인이 있다 하셨습니다.”
백호가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그게 나일지 누가 아는가?”
온객행이 코웃음 치고 말했다.
“욕수대선께서는 태초의 가뭄을 모르십니까?”
백호가 주자서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그것이야 태초의 일이니 지금과는 다르지 않은가?”
온객행이 백호의 앞을 막아섰다.
“욕수대선께서는 오늘 제가 등선하는 것을 꼭 보셔야 하겠습니까?”
백호가 옥산 주변에 흐르는 강을 힐끔 보고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흑망 그런 뜻이 아니네. 그냥… 어떠한가 궁금해서 그랬네. 오랜만이기도 하지 않은가? 오광군(敖廣君; 청룡)과 전당군(錢塘君; 적룡)일지도 모르겠군.”
백호가 한발짝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그렇게 날을 세울 것 없네. 정말 별다른 뜻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야.”
온객행이 주자서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자기 옆에 붙이며 말했다.
“우리 유서를 위해서라면 등선은 일도 아니지요.”
백호가 표정을 구기고 말했다.
“촉룡의 제자인데 아무렴.”

백호가 한숨을 쉬고 말했다.
“그럼 나도 이만 가보겠네. 천도연때 또 보겠군.”
온객행이 주자서를 놓아주고 공수하여 인사하고 말했다.
“현명대선께 소금 잘 먹었다고 전해주십시오.”
백호가 고개를 휙 돌려서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아니! 흑망에게도 줬으면서 왜 나한테는!”
온객행이 웃으며 말했다.
“저야 수원대선께서 선물 받으신 것을 좀 얻어먹은 수준이지요.”
백호가 온객행에게 물었다.
“수원대선께서는 강녕하신가?”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태평호에 갇혀 계시지요.”
백호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그렇지… 어차피 그럴 것이면 도철(饕餮)이라도 되면 얼마나 좋은가?”
온객행이 백호를 쏘아보며 말했다.
“그게 무슨 뜻이오?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백호가 손사래를 치고 말했다.
“내가 실수했군. 못 들은 것으로 하게.”
온객행이 헛웃음 치고 말했다.
“욕수대선께서는 입을 조심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태금의 말씀을 잘 들으세요.”
백호가 하늘을 향해 우렁차게 ‘어흥’하고 울부짖자 하늘에서 구름이 쏟아졌다. 백호가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나야 태금이 하라는 대로만 하지.”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소매를 들어 고개를 조아려 인사했다. 주자서도 온객행을 따라 인사했다. 백호가 구름을 타고 서쪽으로 향했다.


주자서는 허리를 세우고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더니 말했다.
“조아리는 것도 일입니다.”
온객행이 주자서의 손을 잡고 말했다.
“조아리기 싫은가? 나도 어서 등선할까?”
주자서가 온객행을 흘겨보며 말했다.
“지금도 과분한데 뭐가 되시려구요?”
온객행이 주자서에게 몸을 붙이며 말했다.
“산천대제도 대제를 하고 있으니 나라고 못 되라는 법 있나?”
주자서가 골똘히 생각하더니 물었다.
“금모원군께 장가드시게요?”
온객행이 주자서의 말에 고개를 꺾어 ‘하하하’하고 크게 웃었다. 주자서는 온객행이 웃는 것을 보고 있다가 헛웃음을 치고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요대로 돌아갑니까?”
주자서의 말에 온객행이 웃음을 멈추고 주자서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주자서가 온객행에게 대답을 종용하듯 잡힌 손을 흔들자 온객행이 웃으며 말했다.
“우리라는 말 좋다.”
주자서는 별 시답지 않은 소리를 한다고 생각하며 한숨을 쉬고 말했다.
“그래서 요대로 갑니까?”
온객행이 주자서의 팔에 매달리며 말했다.
“유서. 우리 어떡할까? 우리 어떡하지?”

주자서가 잡힌 손으로 온객행을 ‘툭툭’ 치며 말했다.
“금모원군의 요대는 함부로 갈 수 없다고 하니 원군께서 부르실 때까지 기다립니까?”
온객행이 주자서의 얼굴을 보다가 얼굴을 붙여오자 주자서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정말. 흑랑!”
온객행이 눈썹을 늘어뜨리고 입을 내밀며 말했다.
“유서. 나 아픈 것 같네.”
주자서가 온객행의 손을 뿌리치려고 하자 온객행이 다시 주자서의 소매를 잡아 그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에이 알겠어. 복숭아나무 몇 그루 뽑으면 될 일을.”
주자서가 온객행을 휙 돌아보며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요? 애먼 복숭아나무는 왜 뽑으시오?”
온객행이 근처에 있는 복숭아나무를 살펴보며 말했다.
“말썽을 부리면 원군께서 벌하셔야 하니 나를 찾지 않겠소.”

주자서가 혀를 차며 말했다.
“어찌 그리 괴팍하시오?”
그리고 온객행을 화사 마을이 있는 중턱으로 이끌었다.
“말로 부탁할 수 있는 일은 말로 하시오.”
온객행이 주자서가 이끄는 대로 걸으며 말했다.
“그럼 내가 입 맞추고 싶으면 입 맞추고 싶다고 부탁하면 될 일이오?”
주자서가 인상을 쓰고 짜증 내며 말했다.
“정말, 그것은 그대만 좋은 일 아니오.”
온객행이 발걸음을 멈추고 주자서를 돌려 세웠다. 주자서가 온객행을 힐끔 보고 다시 몸을 돌려 가려고 하자 온객행이 주자서에게 말했다.
“정말 나만 좋은 일이오?”
주자서가 온객행을 보고 한숨 쉬며 말했다.
“그럼 나도 좋을 일이오?”
온객행이 주자서의 허리를 안고 몸을 붙이며 말했다.
“그럼 유서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을 때까지 합시다.”
주자서는 고개를 돌려 다가오는 온객행을 피하며 말했다.
“나는 사내를 좋아하지 않소!”
온객행이 주자서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고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내가 여인이라고 생각하고 해보시오.”
주자서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어찌… 그건 그대에게 못 할 짓이지 않소.”

온객행은 터지는 웃음을 겨우 참아내고 주자서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유서. 나는 정말 그대가 좋아요.”
주자서가 팔을 들어 온객행의 등을 쓸며 말했다.
“저도 싫어하지는 않습니다.”
온객행이 주자서를 더 당겨 안고 말했다.
“좋아해 주세요.”
주자서가 말없이 온객행의 등을 쓸었다. 온객행이 주자서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고 말했다.
“그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해주겠소. 그러니 나를 좋아해 주시오.”
주자서가 온객행의 말에 작게 웃었다. 정말 절절한 사랑 고백이다. 주자서는 자기의 뭐가 좋아서 온객행이 저에게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만난 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서로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더 많은데. 참으로 용감하다. 게다가 주자서는 내심 자신의 원서(遠逝)가 멀지 않았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딱히 몸이 아프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종종 아득하게 멀어지는 정신은 이제 주자서가 의지로 붙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온객행에게 짧다는 한 갑자도 채우지 못할 것 같아 또 상처를 주지는 않을까 걱정이 됐다. 주자서에게 싫어하지 않는다는 말은 좋아한다는 말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온객행이 그것을 알리 없으니 서로 엇갈리고 마는 것이다.


하늘에서 앙소가 내려와 물었다.
“내가 방해한 것인가?”
주자서가 온객행을 놓고 소매를 들어 인사하며 말했다.
“현조 어르신. 혹시 요대에 갈 수 있는 방법을 아십니까?”
앙소가 온객행을 힐끔 보고 말했다.
“내가 청조께 가서 고하고 오겠네. 조금 기다려 주겠나?”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이고 머리를 조아려 인사했다. 온객행도 주자서를 따라 고개를 끄덕였다. 앙소가 주자서에게 말했다.
“어디 가지 말고 거기 있게. 금방 오겠네.”
주자서는 앙소가 날아가는 것을 보고 있다가 복숭아나무 아래에 가서 앉았다. 해가 져서 어스름한 숲은 조금 스산하여 주자서가 온객행의 소매를 잡고 그를 옆에 앉혔다. 온객행이 주자서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붙어 앉으며 말했다.
“유서 배고프지 않나? 목마르지 않아?”
그리고 소매에서 대나무 수통을 꺼내 주자서에게 건넸다.

주자서는 수통의 물을 조금 마시고 고개를 흔들었다.
“괜찮습니다.”
온객행이 입을 내밀고 말했다.
“괜찮다는 말을 금지해야 하겠어.”
주자서가 수통을 다시 건네며 말했다.
“정말 괜찮아서 괜찮다 하는 것인데 금지라니요.”
온객행이 수통을 다시 소매 안에 넣고 말했다.
“괜찮아도 안 괜찮다고 해줬으면 좋겠네. 나에게 앙탈하고 기댔으면 좋겠어.”
주자서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앙탈이라니….”
온객행이 팔을 둘러 주자서를 안고 목덜미에 입술을 비비고 말했다.
“나에게만… 나에게만 그랬으면 좋겠어.”
주자서가 하늘을 보고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저까지 앙탈합니까? 흑랑께서 제 몫까지 하고 계시는데요.”
온객행이 주자서에게 얼굴을 떼고 ‘아!’하더니 말했다.
“그럼 내 앙탈만 받아주시오. 다른 사람 앙탈은 쳐다보지도 마시오.”
주자서가 웃으며 말했다.
“저에게 앙탈한들 제가 뭘 할 수 있겠습니까?”

온객행이 주자서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그냥 옆에 있어만 주면 됩니다. 다른 데 가지 말고 제 옆에 계세요.”
주자서의 턱을 잡아 자기 쪽으로 돌린 온객행이 주자서 입술에 입을 맞추고 말했다.
“받아주세요. 제 앙탈.”
주자서가 온객행의 얼굴을 한참 보더니 부스스 웃었다. 온객행이 다시 얼굴을 붙여 오자 주자서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밖에서 이러지 않기로 하셨잖아요.”
온객행이 주자서의 뺨에 입을 맞추고 말했다.
“여긴 아무도 없지 않소.”
주자서는 서늘한 온객행의 입술이 뺨과 목덜미를 희롱하는 것을 참아내고 있었다. 처음에는 조금 부끄러웠으나 음란한 일도 많이 하다 보면 익숙해지는 것인지 이제는 목덜미나 입술쯤, 닳는 것도 아닌데 맞붙이고 싶다고 하면 그냥 하게 두는 경우에 이르렀다. 남들 앞에서 그러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주자서는 하늘을 보며 ‘앙소가 언제쯤 오려나’ 같은 생각을 하며 온객행의 앙탈을 받아주었다.


명백히 희롱하는 꼴인 두 사람 앞으로 구름이 쏟아져 내리더니 청조가 나타났다. 주자서가 온객행을 밀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청조가 혀를 차며 말했다.
“정말이지. 요대에 볼일이 없어 간다고 한 이는 흑망 그대가 아닌가?”
온객행이 주자서 옆에 붙어 서며 볼멘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응룡께서 권하셨는데 거절합니까?”
청조가 온객행을 노려보며 손가락질했다. 청조의 뒤에 서 있던 청구와 양조가 앞으로 나와 온객행에게 말했다.
“원군께서 자네의 내자를 보살피라 명하셨으니 잘 부탁하네.”
주자서가 소매를 들어 인사했다.
“유서… 신수(神獸)를 뵙습니다.”
주자서의 호칭에 청조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신수… 사람들이 그렇게 부른다지?”

청구가 주자서를 보고 말했다.
“흑망. 왜 화사처럼 입혀 놓았는가? 너의 의취인가?”
온객행이 소매를 들어 청구와 양조에게 인사하고 말했다.
“그동안 평안하셨습니까?”
양조가 웃으며 말했다.
“덕분에.”
청구가 온객행에게 고갯짓하며 말했다.
“어서 오르시게. 요대로 가지. 수원대선이 왔어.”
온객행이 주자서의 허리를 안고 구름에 오르며 말했다.
“주요가?”
양조가 온객행을 쏘아보며 말했다.
“어디 감히 대선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느냐.”
온객행이 웃으며 말했다.
“다섯 갑자 동안 동고동락(同苦同樂)한 사이이니 이름 정도야….”
청조가 더는 못 봐주겠다는 듯 고개를 획 돌리고 먼저 앞서 걸었다. 양조가 다가와 주자서의 옷자락을 만지며 말했다.
“얘도 수원대선처럼 여인의 옷을 입는 것을 즐기는가?”
주자서가 표정을 구기며 말했다.
“아니오!”
온객행이 웃으며 말했다.
“우리 유서는 뭘 입어도 아름답지요.”
청구가 ‘허’하고 헛웃음 짓고 말했다.
“유서. 흑망을 잘 부탁하네. 제발 말썽부리지 못하게 꽉 잡고 계시게.”
주자서가 청구를 보고 말했다.
“제가요?”
양조가 청구에게 말했다.
“흑망이 잡는다고 잡혀 주겠나?”
온객행이 주자서를 보고 말했다.
“유서가 잡으면 잡혀주겠네.”
온객행의 말에 청구와 양조가 고개를 꺾어 ‘하하하’하고 크게 웃었다.

요대에 도착해서 온객행은 주자서를 놓아주고 중궁으로 향했다. 일단 요대에 들어왔으니 금모원군께 인사를 드리는 것이 순서에 맞았기 때문이다. 온객행이 조금 지친 듯한 주자서의 허리를 안고 청구에게 물었다.
“청구. 중궁으로 갑니까?”
청구가 고개를 돌려 어깨너머로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아니네. 원군께서는 좀 바빠. 천도연의 일도 있고 그대 내자의 일도 있고.”
양조가 주자서 곁으로 와서 그의 소매를 잡고 물었다.
“유서 왜 그러는가?”
온객행이 양조의 손을 치우고 말했다.
“밥도 안 먹이고 이렇게 오래 걸었으니 힘들어서 그렇지요.”
양조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배가 고파서 그런가?”
주자서가 고개를 흔들고 온객행을 밀어내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괘념치 마소서.”
온객행이 입을 앞으로 내밀고 부루퉁하게 말했다.
“나는 유서가 그 말하는 것이 제일 싫어.”
앞서 걷던 청구가 ‘하’하고 헛웃음 치고 말했다.
“유난은.”
양조가 주자서를 빤히 보며 말했다.
“뭐 못 봐줄 정도는 아니야.”
온객행이 주자서를 다시 자기 품으로 끌어안고 말했다.
“그만 보시오! 닳겠소.”
주자서가 깊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언제쯤 도착합니까?”
청구가 손가락으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문을 지나면 금방이네.”
남궁에 도착해서 온객행과 주자서는 주요와 다시 만났다.

복숭아빛깔 옷을 입고 얌전히 주요 옆에 앉아 눈치를 보던 고상은 남궁으로 들어오는 온객행을 보고 달려가 와락 끌어안고 말했다.
“파사!”
온객행이 당황하여 고상을 마주 안으며 말했다.
“아상! 아상도 같이 왔구나.”
주자서가 소매를 들어 고상에게 인사했다.
“아상.”
고상은 온객행 옆에 붉은 옷을 입은 사람이 주자서라는 것을 알고 활짝 웃으며 주자서도 끌어안았다.
“우리 아기.”
주자서가 낮게 웃으며 말했다.
“아상. 저 아상의 누이를 만났어요.”
고상이 고개를 들어 주자서의 뺨에 손을 대고 말했다.
“우리 아가. 파사가 잘 챙겨줬어?”
주자서가 온객행을 힐끔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고상이 물었다.
“우리 언니? 소나를 만났어?”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이고 머뭇거리더니 말했다.
“아상께서 주신 비녀가 마음에 드신다고 하셔서 드렸어요.”
고상이 눈썹을 찌푸리더니 금방 다시 웃으며 머리에 있는 나비 장식 하나를 떼서 주자서의 머리에 달아주며 말했다.
“이렇게 다시 만났으니까 됐어. 우리 유서.”
고상이 주자서가 입고 있는 옷을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나보다 더 화사 같네.”

고상을 지켜보고 있던 주요가 청구와 양조에게 인사하려고 하자 청구가 주요의 소매를 잡고 말했다.
“어찌 대선께 인사를 받습니까? 예를 거두세요.”
주요가 웃으며 말했다.
“나는 대선이 아니네.”
양조가 주요의 팔을 잡고 말했다.
“저희에게는 대선이시니 예를 거두세요.”
주요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그래. 이렇게 자주 보니 좋구나.”
양조가 웃으며 물었다.
“천룡은 어떻게 잘 떼고 오셨어요?”
주요가 표정을 구기며 고개를 흔들고 말했다.
“아주 탐욕스러운 아이야. 사자형제보다 더 해.”
청구가 웃으며 말했다.
“가시기 전에 또 들러 주세요.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말씀하시구요. 다 드리겠습니다.”
양조가 청구를 거들며 말했다.
“필요하신 것이 있으면 빼앗아서라도 드릴 테니 꼭 말씀하세요.”
주요가 웃으며 말했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네. 정말….”

청구가 물었다.
“원군은 만나 뵈셨어요?”
주요가 고상에게 고갯짓하고 말했다.
“우리 아이를 공공께서 부르셔서 나는 같이 왔어.”
청구와 양조가 주자서를 꼭 안고 있는 고상을 보고 말했다.
“저 화사 말씀이십니까?”
주요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네. 예쁘지?”
양조가 웃으며 말했다.
“많이 컸네요.”
주요가 청구의 소매를 잡고 물었다.
“공공께서는 어디에 머무시는가?”
청구가 고개를 들어 남궁을 지키는 군관 몇에게 눈짓하더니 말했다.
“남궁 내실에 머무세요. 원군께서 수원대선께서 오시면 동궁으로 모시라고 하셨습니다.”
주요가 손사래 치고 말했다.
“내가 어찌 동궁에? 안될 말이네. 별궁에 머물러야지.”
양조가 주요에게 바짝 다가가 귓가에 속삭였다.
“송구스럽습니다만 발의 아이를 부탁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요가 미간을 찌푸리고 청구와 양조를 보았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려 주자서와 고상을 보았다. 비슷한 옷에 비슷한 머리 모양을 하고 있는 고상과 주자서는 얼핏 보면 정말 혈육 같아 보였다.

주요가 주자서에게 다가가 말했다.
“어찌 화사의 옷을 입었는가?”
주자서가 고상을 떼어놓고 소매를 들어 공수하여 인사하며 말했다.
“주인.”
온객행이 주자서의 등허리에 손을 얹고 말했다.
“주요. 나 유서에게 장가들었네. 그대가 중매한 것으로 했어.”
주요와 고상이 동시에 온객행을 보고 소리 질렀다.
“뭐?!”
“뭐라구!”
주요가 관자놀이를 짚으며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온객행. 뭐라고?”
온객행이 주자서의 손을 잡고 말했다.
“종화산에서 가약을 맺었소. 덕분에 참한 내자를 얻었으니 정말 천은(天恩)이 망극하오.”
주자서가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소첩은 정말 소박맞고 싶습니다.”
온객행이 주자서를 보고 울상을 만들어 말했다.
“어찌 얻은 내자인데… 게다가 어찌 중매한 사람 앞에서 그런 모진 말이시오.”

주요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내가 언제 중매를 했다는 말인가?”
온객행이 주자서의 머리에 꽂혀 있는 비녀를 매만지며 말했다.
“주요가 아니었으면 나 같은 파사가 어디서 이런 내자를 얻었겠소.”
고상이 온객행을 밀며 말했다.
“이게 무슨 소리야? 우리 아가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온객행은 고상에게 웃으며 말했다.
“아상, 이제 내 처모(妻母)가 되시니 제가 예의를 갖춰야 하겠네요.”
그리고 고상에게 소매를 들어 절했다. 고상이 온객행의 팔을 잡고 말했다.
“안돼! 내가 못 봤잖아. 우리 아이가 혼인했는데 내가 못 보는 게 어디 있어? 다시 해! 내가 보는 데서 다시 해!”
주자서가 다급하게 아상의 소매를 붙들고 말했다.
“아상. 그게 아니에요. 희첩이라 언제 내쳐질지 모릅니다.”
고상이 주자서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말했다.
“어디 감히 우리 아이를 내친다는 말이야? 희첩이라니? 우리 아이는 정실이 아니면 못 줘.”
주자서가 표정을 구기며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을 하며 고상의 팔을 잡고 말했다.
“아상….”

蛇苺 第19

暗渡陳倉 | 19. 은밀히 진창을 건넌다.

온객행은 금모원군에게 종화산으로 돌아가겠다는 소리는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남궁에서 산천대제를 기다리고 있는 주작(朱雀)과 백호(白虎)를 만나러 갔다. 남궁의 외실에 앉아 있던 주작과 백호가 금모원군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다.
“원군.”
금모원군은 두 사람의 인사를 받지 않고 제일 상석으로 가서 쓰러지듯 누우며 말했다.
“축융(祝融), 욕수(蓐收), 우리가 이렇게 자주 보는 사이였던가요?”
붉게 타는 듯한 깃털 장식을 한 주작이 소매를 들어 올려 고개를 조아리고 말했다.
“원군. 북해 용왕의 일로 바빠서 동왕공께 소홀했습니다.”
하얀 호랑이의 가죽을 피풍의처럼 두른 백호가 옆에 무릎 꿇고 말했다.
“청룡이 중원의 일로 너무 바빠서 동왕공께 소홀 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산천대제가 백호와 주작을 보고 혀를 차며 말했다.
“그대들이 모시는 상전은 서왕모인가?”
그리고 걸어서 금모원군이 앉은 상석 옆에 앉았다. 백호와 주작은 표정을 구기고 산천대제를 힐끔 보더니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한숨을 쉬었다.

봉황이 들어와 주작과 백호를 일으키며 말했다.
“축융대선, 욕수대선 예를 거두세요. 원군께서 그대들을 탓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말에 금모원군이 옆에 있는 산천대제를 쏘아보며 ‘흥’하고 코웃음 쳤다. 주작과 백호가 금모원군의 눈치를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응룡이 다가와 말했다.
“요즘 동쪽이 퍽 시끄럽습니다.”
응룡의 말에 백호가 응룡을 노려보며 말했다.
“구망대선(句芒大仙)께서는 중원을 준비하신다고 눈코 뜰 새 없이 바쁜데 어찌 경진선께서는 한가해 보이십니다?”
주작이 백호를 나무라며 말했다.
“원군과 대제 앞에서 이게 무슨 무례인가? 욕수!”
백호가 다시 시선을 상석을 돌리고 고개를 조아렸다. 응룡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분수에 맞지 않은 일을 하고 계시니 스스로 우환을 만들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까? 구망대선께서는….”

황룡이 하늘에서 쫓겨난 이후에 사방신과 오룡의 수장이었던 현천상제의 부재를 대신해서 사방신과 오룡에 모두 속한 청룡 구망대선이 그들을 지휘하는 일을 맡았다. 청룡은 현무가 된 현명대선과 사이가 좋지 못했다. 원래 사방신과 오룡의 수장은 항상 현무가 맡아 왔고, 원래대로라면 현명대선이 수장을 맡는 것이 맞았으나 사방신과 오룡 중에서도 가장 어리고 하늘의 일에 관하여 잘 모르는 현명대선을 수장으로 둘 수는 없는 지라 청룡이 현명대선이 자리를 잡을 때까지 임시로 맡았던 수장직이 굳어져 그렇게 되었다. 다른 사방신과 오룡은 각자 맡은 일이 바빠 수장 자리에 큰 관심이 없었고, 청룡 역시 사방신과 오룡의 일로 늘 바빴기 때문에 그저 이름뿐인 자리이기도 했다.

그 이름뿐인 자리를 현명대선은 가지고 싶어서 안달인 것이고, 그것을 얻어보고자 산천대제를 꼬드겨서 일을 키우는 것이다. 응룡은 너무 바쁜 청룡 대신해 팔자에도 없는 사방신 노릇까지 해야 하니 사방신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봉황이 응룡을 나무라려고 하는데 백호가 불쑥 끼어들어 말했다.
“흑망의 내자가 발의 후손이라는 것이 사실이오?”
봉황과 응룡 뒤에 얌전히 서 있던 온객행이 백호의 말에 표정을 구기며 생각했다. ‘태금께서 벌써 고(告)했군.’ 백호가 온객행에게 다가와 물었다.
“내자는 어디 있는가?”
온객행이 소매를 들어 백호에게 인사했다.
“흑망. 욕수대선을 뵙습니다.”
백호가 온객행의 소매를 잡아 일으키며 말했다.
“예를 거두게. 태금에게 들었어. 그 아이는 어디 있지?”

온객행이 난처해하며 대답을 망설이자 응룡이 다가와 온객행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말했다.
“발의 후손에게 왜 이렇게까지 관심을 두십니까? 산천대제께서 하신 것처럼 백호께서도 흑망의 내자를 범하시려고요?”
백호가 깜짝 놀라 산천대제를 보고 말했다.
“대제께서?”
산천대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응룡에게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내가 언제 발의 아이를 욕보였다는 말인가? 그저 그 아이가 양친의 허락도 없이 혼례를 올린 것이 잘못되었으니 바로잡으려고 그리 한 것이지!”

금모원군이 불편하다는 듯이 한숨을 쉬자 상석 옆에 있던 초록색 옷을 입은 시동이 다가와 금모원군의 시중을 들었다. 금모원군이 말했다.
“시끄럽다. 시끄러워. 이 이야기를 어찌 내 앞에서 하는가? 가서 촉룡께 하라니까?”
봉황이 산천대제에게 소매를 들어 공수하고 말했다.
“탁음대선께서 허락하신 혼인인데 감히 누가 시야비야(是也非也)할 수 있겠습니까?”
촉룡의 이름이 나오자 산천대제도 백호도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며 입을 꾹 다물었다. 온객행이 주변의 눈치를 보며 금모원군께 공수하고 말했다.
“원군께 더는 폐를 끼칠 수 없어 흑망은 스승님께 가려고 합니다.”

금모원군이 산천대제를 보고 눈썹을 들어 올리더니 물었다.
“동왕공. 어찌 하시겠소? 흑망과 종화산에 가시겠소?”
산천대제가 다시 금모원군 곁으로 가서 그녀의 소매를 잡고 말했다.
“부인, 정말 다른 뜻이 있어서 그 아이를 데려가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초조한 듯 온객행에게 손가락질하더니 말했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천도연인데 언제 갔다 언제 다시 오겠다는 말인가?”
금모원군이 소매를 털자 청구와 양조가 나타나 금모원군에게 다가갔다. 금모원군은 그들에게 뭐라고 말한 다음 자리에서 일어나 상석 아래로 내려갔다.

산천대제가 금모원군을 따르자 금모원군이 말했다.
“동왕공. 동왕공. 나는 자리싸움에는 관심이 없어요. 원군 자리가 탐이 나시는 거면 가서 천존께 달라고 하세요. 어찌나 일이 많은지 당장이라도 때려 치고 싶은데….”
산천대제의 대제라는 칭호는 순전히 금모원군 덕분이었다. 그가 금모원군의 부군이 아니었다면 그는 대선은커녕 승천하지 못했을 것이다. 금모원군의 말을 들은 응룡과 봉황이 금모원군께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원군. 통촉(洞燭)하소서.”
금모원군이 봉황과 응룡의 어깨를 손으로 짚어 그들을 일으키고 말했다.
“그래. 그래. 나 때문에 우리 아이들이 고생이지.”
금모원군이 어깨너머로 산천대제를 쏘아보며 말했다.
“그대들의 아이들이 그대를 위해 고생하는 것은 아십니까?”
그리고 주작과 백호를 마주하고 말했다.
“축융, 욕수, 어서 대제를 데리고 동해(東海)로 돌아가세요.”
주작과 백호가 금모원군에게 인사하고 산천대제를 부축했다.

산천대제가 표정을 구기며 주작과 백호를 보았다. 금모원군이 산천대제를 보고 말했다.
“우리는 천존께서 정한 대로 격년에 한 번만 만나는 것으로 되어 있으니 다음 격년에는 뵙지 않겠습니다. 천도연에는 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주작의 팔에 손을 올리고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축융. 사방신과 오룡은 천도연에서 해야 할 일이 있으니 말을 전해 참석하도록 하세요.”
주작과 백호가 고개를 끄덕이고 산천대제를 부축하며 남궁을 나갔다. 산천대제는 나가면서 서 있는 온객행을 노려보았는데 온객행은 소매를 들어 공수하며 고개를 조아렸다.

금모원군이 봉황과 응룡을 데리고 중궁으로 향하며 말했다.
“패하(覇下)는 아직 안 왔는가?”
봉황이 고개를 조아리고 말했다.
“백룡과 흑룡의 일 때문에 잠시 늦어지는 듯합니다.”
금모원군이 고개를 끄덕이며 온객행에게 고갯짓했다. 온객행은 봉황과 응룡의 뒤를 따랐다. 응룡이 말했다.
“희발(姬發)도 패하를 도우러 가셨으니 아마 늦어질 것 같습니다.”
금모원군이 고개를 돌려 응룡을 보고 말했다.
“그럼 읍강(邑姜)은?”
응룡이 봉황을 힐끔 보자 봉황이 대신 답했다.
“린자(麟姊)는 지금 오고 계시는 중입니다.”
금모원군이 잠깐 눈을 감고 숨을 고르더니 눈썹을 찌푸리고 말했다.
“그런데 발의 아이는 어디에 갔지?”
온객행이 고개를 들어 금모원군을 보고 물었다.
“원군. 무슨 말씀입니까? 유서는 지금 별궁에….”
금모원군이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요대에 없는데?”
온객행의 놀란 얼굴을 하더니 곧 금모원군과 사령(四靈)을 지나쳐 별궁으로 달려갔다.

금모원군이 온객행의 뒷모습을 보고 응룡에게 기대더니 말했다.
“경진. 네가 동왕공을 배웅해라. 혹시 또 발의 아이를 데려가려고 하거든… 흠… 혼내 줘라.”
응룡이 밝게 웃으며 두 손을 공손하게 모으고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원군! 원군께서 허락하신 겁니다. 봉황! 들었지?”
봉황이 ‘허허허’ 웃으며 응룡에게 손짓하자 응룡은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다시 남궁으로 향했다. 봉황이 금모원군께 다가가 물었다.
“원군. 천도연에 오성진군(五星眞君)께서 오십니까?”
금모원군이 웃으며 봉황의 얼굴을 톡톡 쳤다.
“우리 안시는 눈치가 너무 좋구나.”
금모원군은 다시 중궁으로 향하며 말했다.
“진군께서 미천한 원군의 연회에 오시겠는가? 걱정 말게. 천존께서 생각하신 것이 있으실 테니 우리는 그저 할 일을 하면 돼.”
그리고 봉황을 향해 빙긋 웃었다.

온객행은 정말 오랜만에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만큼 달렸다. 별궁에 도착하여 객실의 문을 열고 주자서를 찾았다.
“유서! 유서!”
방 안에는 가구가 몇 없어 황량했기 때문에 객실 안에 아무도 없다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었다. 온객행의 눈에 동문이 있는 쪽으로 열린 창호 문이 보였다. 온객행은 객실을 나와 창호 문이 보이는 곳에 있는 정원과 객실을 모두 뒤졌지만 주자서는 보이지 않았다. 온객행이 객실에서 멀지 않은 동문에 있는 군병에게 물었다.
“우리 유서를… 검은 옷을 입은 사내… 우리 유서를….”
허둥지둥 정신없이 말하는 온객행을 보고 깃털 갑옷을 입은 군관이 말했다.
“검은 옷을 입은 파사라면 보았지요. 어떻게 요대에 들어왔는지는 몰라도 제 발로 옥산으로 나갔으니 별일 없을 거요.”
온객행이 군관의 어깨를 잡고 흔들며 말했다.
“그는 파사가 아니란 말이오!”
온객행의 날카로운 영력에 군관이 주춤하며 무기에 손을 가져갔다.

온객행은 군관을 놓고 말했다.
“원군께 흑망이 종화산으로 갔다고 전해주시오.”
군관이 온객행을 막으며 말했다.
“그것은 원군께서 허락한 일이오?”
온객행이 한숨을 쉬고 옷매무새를 정갈히 하고 군관을 보고 말했다.
“촉룡의 제자 흑망이 스승님께 간다고 전해 주시오.”
그리고 동문의 보초를 서는 군관을 위아래로 보고 피식 웃더니 말했다.
“요대의 군령(軍令)은 몹시 누긋한가 보오?”
온객행의 말에 보초를 서고 있던 군관들이 온객행을 위협하며 말했다.
“흑망! 요대에서 무엄하다!”
온객행이 웃으며 말했다.
“요대에 볼일이 없으니 이만 가보겠소.”
군관들은 온객행이 나가는 것을 막으려고 하였으나 그의 영력에 기가 눌려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들은 유유히 걸어 동문을 나가는 온객행을 구경할 수밖에 없었다. 곧 별궁 근처를 순찰하던 군관이 동문의 소란을 발견하고 다가왔지만 온객행은 이미 동문을 빠져나간 뒤였다. 깃털 갑옷을 입은 군관이 날아올라 중궁으로 향했다.


성령은 소나에게 먹어도 좋다고 허락을 받은 복숭아를 주자서에게 건넸다. 주자서는 소매에서 작은 칼을 꺼내 복숭아를 깎아서 성령이를 먹였다. 주자서가 하는 것을 보고 있던 주변의 복숭아를 받은 아이들이 주자서에게 다가와 하나둘 복숭아를 내밀었다. 주자서는 웃으며 복숭아를 받아 그것을 까서 아이들의 입에 넣어 주었다. 어떤 아이는 등에 검은 날개가 있었고 어떤 아이는 고상처럼 눈이 온통 새빨갰다.

성령이 신이 나서 말했다.
“시랑께서 하신 말씀 기억나?”
아이들이 복숭아를 먹으며 성령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시랑께서 사람은 정말 맛있다고 했어. 그런데 사람을 먹으면 정신이 나가서 미칠 수도 있다고 하셨어.”
복숭아를 먹던 빨간 눈의 아이가 말했다.
“사람을 먹으면 영력이 많아진 데.”
주자서는 해맑은 얼굴로 사람을 먹는다는 말을 하는 애들에게 좀 질려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빨간 눈의 아이가 주자서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왜 너에게서 파사 냄새가 나?”
주자서가 소매를 들어 몸에 냄새를 맡고 물었다.
“그래?”
아이들이 주자서의 옷자락을 들고 하나둘 냄새를 맡으며 말했다.
“정말 파사 냄새가 나. 근데 화사 냄새도 나.”
성령이 주자서를 보고 물었다.
“너는 화사야?”
주자서는 조금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아마 절반 정도는….”
아이들이 웃으며 말했다.
“에이, 그게 뭐야.”

주자서가 복숭아를 20개쯤 깠을 때 소린이 다가와 말했다.
“주자서! 희상랑께서 찾으시네.”
주자서는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 반가워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들이 주자서의 소매를 잡고 말했다.
“아이, 복숭아는 그럼 누가 까줘.”
소린이 아이들을 주자서에게 떼어내며 말했다.
“원래는 껍질째 잘 먹으면서 갑자기 왜들 이래!”
주자서가 눈을 가늘게 뜨고 아이들을 보다가 ‘하하하’ 하고 웃었다. 그리고 소매를 들어 소린에게 인사하며 말했다.
“소린낭자. 손이 더러워서 그런데 손을 씻을 수 있을까요?”
주자서의 공손한 말에 소린이 조금 당황하며 말했다.
“어… 어… 저쪽에 우물이 있으니 그 쪽에 가서 닦으시오!”

주자서가 성큼성큼 걸어서 우물로 향하자 성령이 소린에게 다가와 말했다.
“소린자 나 저 사람 좋아. 우리랑 같이 살면 안돼?”
소린이 성령의 뺨을 쓰다듬고 말했다.
“안돼. 사람이 어떻게 옥산에서 살아.”
축(筑)이 다가와 말했다.
“언니. 저 사람한테서 화사 냄새가 나.”
성령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절반 정도는 화사래.”
소린이 눈썹을 찌푸리고 우물에서 손을 씻는 주자서를 보며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절반은 화사라니?”
축이 말했다.
“사람한테서 좋은 냄새나.”
그리고 성령을 보더니 뭐가 재미있는지 둘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히히히’ 웃었다.

주자서는 소린과 함께 다시 신당으로 들어갔다. 어느 정도 준비를 마쳤는지 커다란 함에 비단 천으로 감싼 복숭아와 찬합 여러 개가 근처에 있었다. 부몽이 같이 들어온 소린을 손짓으로 물리고 주자서의 소매를 잡아 신당 내부로 데려가며 말했다.
“일단 이 시커먼 옷부터 어떻게 해보자.”
내실 안에는 분홍색 옷을 입은 소녀들과 소나가 있었는데 소나가 주자서를 위아래로 보더니 말했다.
“말랐군.”
소녀들이 주자서를 세워놓고 이리저리 자를 대보더니 붉은색 옷감을 가지고 바느질을 하기 시작했다.

소나가 주자서를 의자에 앉히고 머리에 비녀를 보고 말했다.
“아! 수원대선!”
소나는 주자서의 머리의 비녀를 빼서 손에 만져보더니 주자서를 쏘아보고 말했다.
“감히 너 따위가.”
주자서는 여태 머리를 고정하던 옥비녀가 갑자기 황송(惶悚)했다. 주자서가 뭐라고 말할 새도 없이 부몽이 다가와 그의 머리를 소녀들의 머리처럼 빗겨주고 소나의 손에서 옥비녀를 빼앗아 주자서의 머리를 고정하며 말했다.
“소나. 수원대선께서 주시지 않았으면 이런 미천한 것이 어찌 그분의 물건을 가질 수 있겠어.”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조금 화난 기색의 소나를 보았다. 소나는 씩씩대더니 내실을 나가버렸다.

부몽이 주자서의 머리를 이리저리 돌려 보더니 말했다.
“그래도 아주 눈치가 없는 놈은 아닌가 보다.”
주자서가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제가 지은 죄가 많아 천벌을 받는 중이지요.”
부몽이 주자서의 말에 ‘하하하’ 하고 웃었다. 바느질을 하던 아이들이 붉은 색 장포를 부몽에게 건넸다. 부몽이 장포를 주자서에게 건네며 물었다.
“시중이 필요한가?”
주자서가 고개를 흔들고 말했다.
“괜찮습니다.”
그리고 내실을 둘러보더니 옷걸이와 병풍이 있는 곳으로 가서 요대를 풀고 검은 장포를 벗었다. 그가 하는 것을 보고 있던 소녀들이 ‘까르르’하고 웃었다. 부몽이 소녀들을 보고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저 아이의 키가 크니 높은 신발을 신어야겠다.”
부몽의 말에 소녀들이 분주하게 부몽을 데리고 내실을 나갔다. 주자서는 텅 비어 있는 내실을 여기저기 둘러보다가 이곳이 여인의 방인 것이 생각나서 ‘큼큼’하고 헛기침을 한 뒤에 탁자에 가서 앉았다. 소녀들과 비슷한 머리모양을 한 것이 어색해서 머리에 있는 비녀를 손으로 더듬었다. ‘그렇게 대단한 것인지 몰랐네….’

소나가 내실로 들어와 주자서에게 고갯짓했다. 주자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소나를 따라 다시 신당으로 갔다. 부몽은 높은 신발에 화려한 머리 장식을 하고 소나가 준비한 천도(天桃)가 든 함을 살펴보더니 소나를 보고 활짝 웃었다. 소나가 고개를 숙여 부몽에게 인사했다.
“희상랑.”
부몽이 주자서를 위아래로 보더니 말했다.
“그대는 요대에 도착할 때까지 고개를 들지 말게.”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부몽은 고분고분한 주자서의 행동에 조금 마음이 누그러진 상태였다. 부몽이 신당의 신위를 향해 절을 하고 양손을 들어 입김을 불더니 그 입김이 점점 안개가 되어 신당 안을 가득 채웠다. 주자서는 고상이 부유각을 안개로 채운 것이 생각나서 작게 웃었다. 곧 신당의 신위에서 구름이 내려오더니 요대로 향하는 구름길이 나타났다.

부몽이 구름 위로 올라서자 소나가 복숭아가 든 함을 들었다. 주자서도 소나 옆으로 가서 복숭아가 든 함을 들었다. 소나와 주자서가 구름길로 올라 가려고 하는데 주자서는 구름을 밟을 수가 없어서 주춤하는 바람에 소나가 얼른 영력으로 함을 잡았다. 소나가 주자서를 보고 혀를 차면서 말했다.
“정말이지 쓸모라고는….”
주자서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소나가 함을 앞으로 먼저 보내고 주자서에게 다가와 그의 팔을 붙잡았다. 주자서는 여인에게 매달리는 것이 조금 부끄러웠으나 다른 방법이 없어 소나의 소매를 붙잡았다. 소나는 눈을 감고 숨을 고르더니 주자서의 요대를 잡았다.

깜짝 놀란 주자서가 소나를 보았다. 소나의 눈은 고상이 그랬던 것처럼 새빨갛게 변해 있었다.
“너는 꼼짝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
소나의 말에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이고 소나의 소매를 놓았다. 세 사람이 구름길을 거의 다 지나 요대 입구가 보이는 즈음 삼족오가 날아와 부몽에게 말했다.
“희상랑! 흑망이! 흑망이!”
부몽이 고개를 돌려 구름길 끝을 보았다. 부몽이 작게 고개를 흔들고 소나에게 말했다.
“소나. 그 아이를 놔줘라.”
소나는 부몽의 말을 듣자마자 고민하는 기색 없이 주자서의 요대를 놓았다. 주자서는 소나의 소매를 다급하게 잡으려다 소나의 매서운 눈초리에 움찔하며 때를 놓쳤다. 그리고 바닥으로 밑으로 꺼지기 시작했다. 주자서는 자기도 모르게 그를 찾았다.
“흑랑!”


추락하는 주자서를 받은 것은 온객행이 아니라 현조 앙소였다. 앙소가 주자서의 손을 잡아 그를 구름 위에 있는 온객행에게 안겨주었다. 주자서는 온객행의 얼굴을 보고 조금 반가워서 웃었다. 온객행은 주자서를 품에 안더니 어깨에 고개를 묻고 말했다.
“유서. 유서….”
주자서가 온객행을 마주 안으며 말했다.
“요대가 그렇게 가기 힘든 곳인지 몰랐소.”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주자서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구름 위에서 뛰어내렸다. 주자서는 놀라서 온객행의 목에 팔을 감고 눈을 꼭 감았다. 옥산 아래로 내려온 온객행이 주자서를 땅에 내려놓고 이리저리 살펴보며 물었다.
“유서 어디 다친 곳은 없는가?”

주자서는 조금 놀라서 자리에 주저앉으며 말했다.
“흑랑. 어디서 뛰어내릴 거면 좀 말을 하고 하시오.”
온객행이 주자서의 타박에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말했다.
“유서….”
주자서가 한숨 쉬고 말했다.
“괜찮습니다. 별일 없었어요. 그냥 옥산의 화사들과 복숭아를 먹었습니다.”
온객행이 주자서를 와락 안고 말했다.
“말도 없이 어디를 간 거야?”
주자서가 온객행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아… 그러게 왜 가둬 두셨소?”
온객행이 주자서를 놓아주고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가둔 것이 아니네. 내가 그대를 왜 가두겠는가? 못 들어오게 막은 거지.”
주자서는 온객행을 보고 눈을 깜빡이더니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아… 그렇군.”
온객행이 주자서에게 물었다.
“그렇게 답답했는가? 도망가고 싶을 만큼?”
주자서가 온객행을 보고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도망쳐도 됩니까?”
온객행이 다시 주자서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안 돼. 안 되네. 절대 안 돼.”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초연(超然)하게 말했다.
“역시 그렇겠죠.”

온객행은 한참 동안 주자서를 놓아주지 않고 품에 안고 있었다. 주자서는 혹시 또 우나 싶어서 그의 기색을 살폈지만 온객행은 주자서의 어깨에 고개를 묻고 놀란 마음을 진정하고 있는 것 같았다. 죽지도 않았고 다시 만났는데 유난스럽다고 생각한 주자서는 안겨서 주변에 있는 복숭아나무를 구경했다. 저 멀리 복숭아를 따는 아이들이 둘을 보고 경계하는 것이 보이길래 소매를 들어 그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주자서가 손짓한 곳을 힐끔 돌아본 온객행이 일어나서 주자서를 일으키며 말했다.
“화사가 되기로 하셨소?”
주자서가 소매를 들어 이리저리 펄럭이더니 말했다.
“뭐 이미 반쯤은 화사가 아니오.”
온객행이 일어난 주자서의 허리를 끌어안고 주자서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주자서는 작게 한숨 쉬며 말했다.
“덕분에 물비린내가 난다 합니다.”
온객행이 표정을 구기고 주자서를 놓아주며 말했다.
“누가 그런 소리를 한다는 말이오?”
주자서가 손바닥을 펴더니 하나씩 꼽으며 말했다.
“현리낭자, 청조, 금모원군, 산천대제, 희상랑….”

온객행은 하나씩 접히는 손가락을 보고 ‘그렇게 많았나?’ 생각하며 주자서의 손을 잡고 말했다.
“아이, 유서 그런 것이 무슨 상관인가?”
주자서가 온객행의 손을 놓고 붉은 소매를 털며 말했다.
“헤엄도 못 치는데 물비린내가 난다고 하니 억울해서 그렇지요.”
온객행이 주자서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말했다.
“내가 가르쳐 주겠네.”
주자서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물은 싫습니다.”
온객행이 주자서에게 기대며 말했다.
“어쩌지? 내가 용왕이 되면 물속에서 살지도 모르는데.”
주자서가 온객행을 보고 물었다.
“용왕이 되시게요?”
온객행이 주자서 얼굴을 빤히 보다가 가깝게 붙여오자 주자서가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밖에서 이러는 것도 싫습니다.”
온객행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고 말했다.
“주변에 아무도 없으면 괜찮은 것 아닌가?”
주자서가 온객행의 품에서 나와 옥산을 둘러보며 말했다.
“싫으면 내치시오.”
온객행이 얼른 주자서에게 다가가 손을 잡으며 말했다.
“내가 언제 싫다 했는가? 그냥… 아쉬워서 그렇지….”

주자서는 주변을 둘러보고 물었다.
“요대로 돌아갑니까?”
온객행이 주자서에게 물었다.
“돌아가고 싶소?”
주자서가 잠시 고민하는 사이 하늘에서 구름이 쏟아지더니 산천대제와 주작, 백호가 나타났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손을 잡아 그의 곁으로 끌어당겼다. 산천대제가 온객행에게 다가가 말했다.
“촉룡께서 허락하셨다고는 하나 어찌 부모의 허락 없이 혼례를 올린다는 말인가?”
온객행이 소매를 들어 공수하고 인사하며 말했다.
“내자의 병이 나으면 찾아 뵐 것입니다.”
산천대제가 주자서를 보고 말했다.
“병? 아프다는 말이냐?”

산천대제가 가까이 다가오자 주자서가 공수하고 손을 모아 말했다.
“대제께서 어찌 소인을 찾으십니까?”
주자서의 말에 산천대제가 그의 팔을 잡고 말했다.
“그대가 발의 후손이니 내가 그대에게 전하고자 하는 것이 있어서 그러하네.”
주자서가 산천대제의 손을 소매를 털어 뿌리치고 말했다.
“소인은 이미 흑망의 내자가 되었으니 전하고자 하는 것이 있으시면 그에게 전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온객행의 뒤로 가서 섰다. 온객행이 다시 소매를 들어 공수하고 산천대제에게 말했다.
“저희 내외는 종화산 탁음대선께 금모원군의 초대를 전하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뒤에 서 있던 백호가 코웃음 치고 말했다.
“언제 촉룡께서 초대에 응하신 적이 있는가?”
온객행이 소매를 내리고 백호를 보며 말했다.
“이번엔 또 모르는 일이지요.”

蛇苺 第18

連環計 | 18. 고리를 잇는 방법.

산천대제가 다녀간 이후로 별궁 근처에는 그 전보다 더 많은 군병이 배치되었다. 별궁 내부이긴 하지만 동문에서 멀지 않은 주자서와 온객행의 객실은 그전에도 다른 곳보다 지켜보는 눈이 많았는데 지금은 그것보다 훨씬 많은 눈이 그들을 감시하고 있다. 보호라는 명목의 감시는 주자서의 행동 범위를 객실 내부로 한정하게 했는데, 깃털 갑옷을 입은 군관부터 푸른색 가죽 비늘갑옷을 입은 군관까지 종류도 다양했다. 그들의 눈이 신경 쓰여서 정언(井鄢; 화장실)에 다녀오는 것도 눈치가 보였다. 주자서는 그래서 전보다 더 안 마시고 더 안 먹었다. 딱히 몸을 움직이는 일을 하는 것도 아니라 그렇게 배가 고프지도 않아서 몸을 소홀히 하니 주자서는 잠이 많아지고 멍하게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런 주자서를 보고 있는 온객행만 애가 타서 온객행의 영력이 한껏 날이 서 있었다.

창호 문을 열어 그 앞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고개를 괴고 정원을 구경하던 주자서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딱히 큰 의미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고 주자서는 좀 심심했다. 물론 산천대제가 다시 와서 난동을 부리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되기는 했다. 산천대제께서는 주자서를 왜 황룡에게 데려간다고 했을까? 태평호에서 서왕모의 요대까지 오는 길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지만 이 사달의 이유를 모르니, 지금 주자서의 뒤통수를 뚫어져라 애절하게 쳐다보고 있는 온객행이 알아서 하겠지 싶은 생각으로 마음을 내려 놓았다. 온객행이 말하는 그들의 짧은 한 갑자는 주자서에게는 너무 고달프고 길어서 이번 생에는 장수할 팔자는 아닌가 싶기도 했다. 주자서는 살랑이는 바람과 함께 실려 온 작약의 향기가 좋아서 눈을 감았다. 그 향이 월계화와 비슷하여 낙읍의 모친이 떠올라 주자서는 또 다시 한숨을 쉬고 말았다. 온객행이 주자서 옆에 의자를 붙여 놓고 앉아 말했다.
“유서….”
주자서는 다시 눈을 떠서 옆에 앉은 온객행을 힐끔 보았다.
“유서 배고프지 않은가? 목마르지 않은가?”
유서는 작게 고개를 흔들고 다시 시선을 창호 문밖으로 던졌다. 창호 밖의 풍경에 갑옷을 입은 군병이 들어와서 주자서는 작게 혀를 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온객행은 안절부절못하더니 객실을 나갔다.

주자서는 심심하여 객실 내부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넓다면 넓고 좁다면 좁은 객실에는 사실 가구가 많지 않아서 조금 텅 빈 느낌도 들었다. 벌써 이틀이나 온객행과 함께 잠을 청했던 침상은 자세히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크기가 커서 주자서는 자기의 몸이 큰 것인지 온객행의 몸이 큰 것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생각하다 헛웃음 치고 고개를 흔들었다. 겨우 이틀인데 한 침상에서 같이 자는 것은 별일 아닌 일이 되어 버린 것이 우스웠다. 딱히 주자서가 걱정할 만한 일을 온객행이 하지도 않았고, 조금 서늘한 온객행을 끌어안으면 잠이 잘 왔기 때문이다. 몸이 고단하여 죽은 듯이 자는 일이 허다했던 군영의 생활을 생각하면 이 곳의 생활은 안락하다 못해 무료한데 마음이 그렇지 못했다. 내려 놓으려고 해도 자꾸만 치미는 이 불안한 마음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으니 한숨만 쉬는 것이다. ‘죄를 지은 것은 하늘인데 어찌 천벌은 내가 받고 있는지….’ 주자서는 열린 창호 밖을 슬쩍 보고 장지문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주자서는 장지문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장지문은 열리지 않았다. 딱히 걸쇠를 걸어 놓거나 문 앞이나 뒤에 뭔가를 가져다 놓은 것도 아닌데 열리지 않았다. 주자서는 작게 혀를 차며 말했다.
“온객행.”
그리고 조금은 화가 나서 탁자로 가서 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러다 창호 문으로 다가가 밖을 살펴봤다. 요대의 동문으로 나가는 곳에 군병이 교대를 하고 있는지 조금 부산스러웠다. 주자서는 창호 문에 걸터앉아 있다가 훌쩍 창호 문을 넘어 밖으로 나왔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동문으로 갔다. 동문에 서 있는 관병은 자기들끼리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지 주자서가 동문을 넘어 요대를 나가는데도 아무것도 묻지 않고 손을 흔들어주었다. 주자서는 공손히 소매를 들어 인사하고 옥산으로 나왔다.


온객행은 답답하게 별궁에 갇혀 있는 주자서가 걱정이 되어 금모원군께 다시 종화산으로 돌아가겠다고 고하려던 참이다. 별궁을 나와 남궁에 들어서자 사령(四靈) 봉황(鳳凰)과 응룡(鷹龍)이 온객행을 발견하고 인사했다.
“흑망. 오랜만이네.”
온객행이 소매를 들어 응룡과 봉황에게 인사했다.
“안시선(安市仙), 경진선(庚辰仙).”
응룡이 웃으며 말했다.
“그 이름 참 오랜만에 듣는군.”
봉황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취수와 약수를 건너러 왔나? 천존게서 북해 용왕 자리를 사하셨다며?”
응룡이 온객행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
“축하하네. 승천하겠군.”
봉황이 웃으며 말했다.
“용왕이 되면 자주 보겠네.”
온객행이 고개를 젓고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저는 원군께 부탁이 있어서 잠시 들른 것입니다.”
응룡이 눈썹을 찌푸리고 물었다.
“무슨 뜻인가? 자리를 거절할 생각인가?”

봉황이 온객행에게 가까이 다가가 손을 들고 속삭였다.
“요즘 하늘이 아주 시끄럽네. 천존께서도 원군께서도 걱정이 많으시네.”
온객행이 눈을 굴리고 말했다.
“어찌 미천한 저에게 용왕 자리를….”
응룡이 온객행을 동궁 쪽으로 이끌며 말했다.
“묻고 싶은 것이 많으니 자리를 옮기지.”
봉황이 맞장구를 치며 온객행의 소매를 잡고 말했다.
“영귀(靈龜)와 기린(麒麟)은 만나보았는가? 그들은 요즘 그 북해 용왕 자리 때문에 아주 바쁘네.”
온객행이 아쉬운 듯 중궁을 바라보자 응룡이 그에게 말했다.
“장가 들었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내자는 어떠한가? 정말 묻고 싶은 것이 많아.”
봉황이 거들었다.
“맞아! 대체 어떻게 한 것인가? 봉인된 동안 대체 무슨 짓을 한 건가?”
그리고는 호쾌하게 ‘하하하’ 하고 웃었다.


옥산의 복숭아나무 가지 끝에 복숭아가 탐스럽게 열려있다. 주자서는 복숭아를 구경하며 걷다가 작은 아이가 높은 가지에 있는 복숭아를 따려는 것을 발견했다. 주자서는 주변을 둘러보고 혹시 다른 사람이 있는지 확인했지만 아이는 혼자서 커다란 망태기에 복숭아를 따고 있었다. 주자서가 다가가 가지 끝에 있는 복숭아를 따서 아이에게 건넸다. 아이가 활짝 웃으며 복숭아를 받아 들고 말했다.
“파사. 감사합니다.”
주자서는 자신을 파사라고 부르는 것이 의아했지만 고개를 작게 끄덕이고 말았다. 한동안 아이가 복숭아를 따는 것을 도왔는데 멀리서 아이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성령(成嶺)!”
아이가 커다란 망태기를 들려고 하자 주자서가 성령에게 물었다.
“들 수 있겠는가?”
망태기를 들어 아이의 등에 메 주려는 데 아이의 등에 아주 작은 검은 날개가 있었다. 성령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자서가 건네는 복숭아가 가득 든 망태기를 번쩍 들고 소녀를 불렀다.
“소린자(小憐姊)!”
아이는 소녀가 반가운지 그녀에게 달려갔다.

성령을 부른 소린이 주자서에게 다가와 말했다.
“누구신데 옥산에 계시오?”
주자서가 소매를 들어 공손히 공수했다. 뭐라고 소개하면 좋을까 생각하고 있는데 소린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파사가 왜 옥산에 있느냐는 말이오!”
소린은 자신에게 다가온 성령의 어깨를 잡아 자기 뒤로 오게 하고 경계하는 기색으로 주자서를 노려보았다. 주자서를 노려보는 소녀의 기세가 대단하여 주자서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아… 나는 파사가 아니오.”
소녀가 말했다.
“그럼 이 파사의 기운은 무엇이오!”
주자서가 손을 내리고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아… 그러니까 나는….”
하늘에서 ‘푸드득’ 하고 새가 나는 소리가 나더니 앙소가 내려와 말했다.
“소린, 무슨 일이냐?”
소린이 앙소에게 달려가 그의 소매를 잡고 주자서에게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현조어르신, 파사가 들어왔어요.”

앙소가 주자서를 발견하고 놀라며 말했다.
“아! 흑망의 내자?”
소린이 앙소의 허리를 안고 두려워하는 기색으로 말했다.
“흑망?”
앙소가 소녀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아. 괜찮다. 괜찮아 저 자는 사람이니 무서워할 것 없다.”
성령이 주자서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사람?”
소린이 얼른 앙소의 품에서 나와 성령의 소매를 붙잡고 말했다.
“성령!”
아이가 웃으며 주자서에게 손가락질하고 말했다.
“시랑(豺狼)께서 사람은 맛있다고 그랬어.”
앙소가 아이를 붙잡고 말했다.
“성령! 안돼. 저것의 주인은 파사라서 먹으면 안된다.”
주자서는 조금 당황하여 얼굴을 굳히고 조금 뒷걸음질 쳤다. 저렇게 조그만 아이도 사람을 먹는다고 하니 확실히 요괴들이 있는 곳이구나 싶어서 주자서가 다시 소매를 들어 공수하고 말했다.
“저는 이만 별궁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앙소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원군의 허락 없이 요대에 들어갈 수 없네. 어떻게 나왔나?”
주자서는 주변을 둘러보며 나왔던 동문을 찾았다. 하지만 동문은커녕 건물도 보이지 않았다. 앙소가 표정을 구기며 말했다.
“요대에는 원군의 허락이 없으면 함부로 들어갈 수 없네.”
주자서는 조금 허탈하여 고개를 끄덕이고 앙소를 보았다. 앙소는 물끄러미 주자서를 보더니 말했다.
“나는 옥산을 지키는 일개 말단이라 요대에 들어갈 수 없네.”
성령이 앙소의 소매에 매달리며 ‘까르르’ 웃고 말했다.
“현조 어르신이 말단이래.”
소린이 얼굴에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오늘 천도(天桃)를 요대에 올리는 날입니다.”
앙소가 소린의 얼굴을 쓸며 말했다.
“그래. 오늘은 누가 가지고 들어가느냐?”
성령이 대신 답했다.
“희상랑(稀喪娘).”
앙소가 한숨을 쉬고 말했다.
“화사는 파사를 싫어하는데 어쩌나.”
주자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화사?”
앙소가 성령과 소린을 놓아주고 주자서의 소매를 잡고 말했다.
“일단 부몽에게 말해보고 안되면… 그건 그다음에 생각합시다.”

주자서는 소령과 소린, 앙소와 함께 옥산 중턱에 있는 작은 마을로 들어갔다. 성령, 소린과 비슷해 보이는 나이 또래의 아이들이 복숭아를 담은 망태기를 들고 붉은 옷을 입은 여인에게 다가가자 여인은 망태기를 받아 안에 든 복숭아를 꺼내 이리저리 골랐다. 복숭앗빛의 연한 색의 옷을 입은 소녀들이 여인이 골라낸 복숭아를 옥으로 만든 쟁반에 담아 마을 중앙에 있는 신당(神堂) 같은 곳으로 가져갔다. 앙소가 붉은 옷을 입은 여인에게 말했다.
“부몽(浮夢).”
여인이 앙소를 발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다.
“현조. 여기까지 무슨 일인가?”
앙소가 손을 내젓고 말했다.
“자네까지 현조라 부르는가.”
여인이 살포시 웃더니 앙소의 옆에 서 있는 주자서를 발견하게 고갯짓을 했다. 앙소가 말했다.
“이쪽은….”
성령이 주자서의 소매를 잡고 말했다.
“흑망의 내자래요.”
앙소가 얼른 성령의 입을 막고 다급하게 말했다.
“발의 후손이오!”
주자서를 쳐다보고 있던 여인의 시선이 한순간에 날카로워졌다. 앙소의 말에 그녀가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발의 후손?”

주자서는 이 여인도 고상과 같은 화사라고 하니 조금은 친밀한 마음이 들었다. 주자서는 눈치껏 소매를 들어 인사했다.
“기산 주가 자서라고 합니다.”
부몽이 다가와 주자서를 보더니 표정을 구기고 소매로 얼굴을 가리며 말했다.
“물비린내가 진동을 하는군.”
요대에서 청조에게 들었던 물비린내 소리를 다시 들으니 주자서는 조금 마음이 주눅 들었다. 주자서가 소매를 든 채로 부몽을 힐끔 보았다. 부몽이 앙소에게 시선을 옮기며 물었다.
“이 치가 왜 여기 있소?”
앙소가 곤란하다는 듯이 허리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그러니까 그것이 말이네….”

성령이 주자서의 소매를 잡아 내리더니 그의 손을 ‘앙’ 물고 말했다.
“희상랑. 우리가 먹으면 안 돼요?”
부몽이 코웃음 치며 말했다.
“네가 그 아이를 먹으면 이번엔 옥산 전체가 쑥대밭이 될지도 모르겠구나.”
주자서가 아이를 꺼리는 기색을 보이지 않자 소린도 주자서에게 다가가 그를 만져보며 말했다.
“살아 있는 사람은 처음 봐요.”
아이들이 만지작거리는 것을 개의치 않고 주자서가 앙소를 향해 고개를 돌려 물었다.
“흑랑이 찾지 않을까요?”
앙소가 주자서의 호칭에 ‘하하하’ 웃더니 말했다.
“흑랑?”
부몽도 소매를 든 채로 점점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주자서는 아이들의 손에 이끌려서 분홍색 옷을 입은 소녀들이 복숭아를 가져다 놓는 신당으로 향했다. 그 곳에는 붉은 옷을 입은 여인이 한 명 더 있었는데 그 여인은 찬합을 여러 개 펼쳐 놓고 옥 쟁반 위에 올려진 복숭아를 이리저리 살펴본 뒤에 찬합에 넣었다. 여인이 아이들을 발견하고 말했다.
“성령, 소린. 복숭아는 모두 땄는가?”
성령이 여인에게 달려가 안기며 말했다.
“소이(俏姨)! 내가 사람을 주웠어.”
주자서는 성령의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소나(俏羅)가 자리에서 일어나 주자서를 보고 말했다.
“사람이라고? 하지만…?”
부몽이 신당 안으로 들어오며 소나의 말을 끊고 말했다.
“소나. 요대로 가려면 얼마나 남았지?”
소나가 장지문 밖에 있는 해를 보고 시간을 가늠하더니 말했다.
“술시(戌時) 지나서 해 질 녘 즈음이니 아직 두 시진도 더 남았습니다.”
부몽이 주자서를 보고 말했다.
“그동안 이 사람을 어쩌지?”

소나가 주자서에게 다가와 그를 유심히 보더니 말했다.
“혹 고상을 아시오?”
주자서가 고상의 이름을 듣고 품속에서 고상이 주었던 꽃 비녀를 꺼내 들고 말했다.
“내 모… 은인(恩人)이시오.”
소나가 주자서의 손에 들린 꽃 비녀를 보더니 작게 탄식하며 꽃 비녀를 쓸었다.
“아상.”
주자서가 꽃 비녀를 건네고 말했다.
“고상을 아시오?”
소나가 비녀를 뺨에 대보더니 주자서를 보고 말했다.
“아상은 나의 누이동생이오.”
부몽이 소나에게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소나. 수원대선께서 잘 보살펴 주실 거야.”
소나가 울상을 만들어 부몽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고 말했다.
“화사가 어찌 물가에 산다는 말입니까?”

주자서가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에 고개를 돌리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상께서는 잘 지내고 계십니다.”
소나가 몸을 틀어 주자서를 마주 보고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우리 아상은 잘 지냅니까? 건강해요? 그 망할 파사가 괴롭히지는 않습니까?”
주자서는 그 망할 파사가 자신의 부군이라는 것은 말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며 답했다.
“수원대선께서 잘 보살펴 주고 계세요. 태평호는 조용해서 심심한 것이 제일 걱정이신 걸요.”
소나가 얼굴을 구기며 말했다.
“파사의 봉인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습니까?”
주자서가 앙소를 힐끔 보며 눈치를 보자 부몽이 다가와 소나를 달래며 말했다.
“봉인이 끝나면 다시 돌아올 것이다. 살아 있으니 언젠가는 만나지 않겠니.”
소나가 손에 들린 꽃 비녀를 보고 주자서를 보았다. 주자서는 꽃 비녀와 소나의 얼굴을 번갈아 보다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그 비녀는 저보다….”
소나는 주자서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비녀에 입을 맞추더니 머리에 꽂았다. 부몽이 소나의 머리카락을 넘기며 말했다.
“예쁘다.”
소나가 부몽을 마주 보고 웃었다.


온객행은 요대의 동궁에는 처음 와 보는 참이다. 이 곳은 금모원군이 부리는 사령이 지내는 곳으로 금모원군의 거처인 북궁과 서궁의 규모와 비교하면 조금 작았지만 남궁보다는 컸다. 이 곳은 요대에 있는 다른 전각과는 달리 호위나 병졸이 보초를 서지 않았는데 보통 사령은 이곳에서 지내는 날보다 각자가 수호하는 지역에 머무는 날이 많기도 했고 감히 요대까지 침범하여 사령을 공격한다 해도 그들을 이길 수 있는 존재는 손에 꼽혔기 때문이다. 응룡이 서툴게 이리저리 움직이며 차를 준비하자 온객행이 눈치껏 소매에서 다구를 꺼내 차를 내리며 말했다.
“올해 태평호의 연잎향이 좋습니다.”
응룡과 황룡이 자리에 앉아 온객행이 권한 찻잔을 들어 향을 맡고 말했다.
“정말 향이 좋군.”
황룡이 찻잔을 ‘후후’ 불며 말했다.
“기린께서 아주 곤란하게 됐어.”
응룡이 찻잔을 비우고 다시 온객행에게 찻잔을 내밀며 말했다.
“맞아. 백룡이랑 함께 발등에 불이 떨어졌겠군.”

온객행이 차로 입을 축이고 물었다.
“도예(檮杌)께서는 아직도 봉인되어 계십니까?”
응룡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요즘 정신이 다시 돌아오신 것 같던데 또 모르지. 그 노인네는 너무 오래 살았으니까.”
봉황이 헛웃음 치고 말했다.
“아무도 사흉이 되고 싶어 하지 않으니 그렇지. 공공이 혼돈(渾沌)이 된 지도 벌써….”
응룡이 작게 한숨 쉬고 말했다.
“공공은 그 자리를 즐기는 듯해서 다행이야.”
봉황이 응룡을 보고 말했다.
“공공은 원래 사람을 좋아했으니까.”
온객행이 응룡과 봉황의 찻잔을 채우고 물었다.
“황룡의 일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봉황이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그 치 이야기는 무엇 하러 꺼내는가 괜히 마음만 답답해지게.”
응룡이 찻잔을 들고 얼굴을 구기더니 말했다.
“대체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찾을 수가 없어서 말이야.”

온객행이 응룡을 보고 물었다.
“황룡을 왜 찾으십니까?”
봉황이 온객행을 말리며 말했다.
“흑망. 그만두게. 응룡이 어찌 천궁에 갈 수 없게 되었는지 그대도 알지 않는가.”
온객행이 응룡을 향해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경진선 무례를 범했습니다.”
응룡이 ‘쯧’하고 혀를 차고 온객행 쪽으로 손을 흔들며 말했다.
“예를 거두게. 그게 자네 잘못인가? 천존께서 왜 그를 사람의 세상으로 보내셨는지 모르겠어.”
봉황이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사람들의 세상은 어떠한가? 하늘만큼 어지러운가?”
온객행이 찻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법이니까요.”
응룡이 온객행에게 물었다.
“사람들의 세상에는 전쟁이 났다던데 이러다 하늘에서도 무슨 일이 나는 건지 모르겠어.”
봉황이 응룡에게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응룡! 경진선. 입을 조심하게.”
응룡이 봉황을 향해 코웃음 치며 말했다.
“들으라면 들으라고 하게. 내게 더 잃을 게 뭐가 있겠나?”

온객행은 다시 찻잔을 들어 입을 축이고 말했다.
“제가 내자 삼은 이가….”
봉황이 화색을 하며 온객행에게 몸을 붙이고 물었다.
“그래! 혼인을 했다고? 촉룡께서는 허락하셨는가?”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룡이 말했다.
“촉룡께서 허락하신다고 티를 내겠는가? 어떤 이와 했는가? 사람인가?”
온객행이 다시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발의 후손과 혼인했습니다.”
응룡이 찻잔을 내려놓고 온객행에게 가깝게 붙어 앉으며 말했다.
“뭐?! 발?”
봉황이 놀란 기색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온객행에게 다시 물었다.
“황룡의 딸 발 말인가? 그녀의 후손이라고?”

응룡이 온객행에게 물었다.
“진성현녀(辰星玄女)께서 아시는가?”
봉황이 응룡의 입을 막으며 말했다.
“경진! 그 입을 정말….”
응룡이 입을 손으로 가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온객행이 응룡과 봉황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진성현녀께서 발을 거두셨군요.”
봉황이 ‘쯧’하고 혀를 차며 응룡에게 말했다.
“자네는 별안간 귀도 얇고 입이 가벼우니 우환(憂患)이 끊이지 않는 것이네!”
응룡이 봉황을 쏘아보며 말했다.
“흑망이 북해 용왕이 되면 다 알게 될 일인데 뭘 그러나.”
온객행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저는 부족해서 용왕 자리는….”

응룡이 온객행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오늘이라도 취수와 약수를 넘어 승천하면 될 일 아닌가?”
온객행이 한숨을 쉬고 한참 뜸을 들이자 봉황이 물었다.
“왜? 무슨 문제가 있는가?”
온객행이 눈썹을 축 늘어뜨리고 울상을 만들어 조금 울먹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의 내자 몸에 발의 능력이 봉인되어 있는데 그것이 조금 깨진 것 같습니다. 그 힘을 내자가 견디지 못하면….”
그리고 품에서 영견을 꺼내 눈꼬리를 찍었다. 응룡이 온객행의 등을 쓸며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말해보게.”
봉황이 다시 자리에 앉아 물었다.
“혹 사내인가?”
온객행이 고개를 들어 봉황을 보고 물었다.
“혹시 아시는 것이 있으십니까?”
봉황이 온객행을 한참 쳐다보더니 고개를 작게 흔들고 말했다.
“아니네. 내가 말할 자리가 아니니 원군께 듣게.”
온객행이 일어나 봉황에게 무릎 꿇고 소매를 들어 공수하며 말했다.
“안시선. 제발 안시선. 우리 유서를 구해주십시오.”
봉황이 자리에서 일어나 온객행을 일으키며 말했다.
“흑망. 이러지 말게.”

응룡이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이름이 유서라고? 버들개지처럼 아주 귀여운 여인이겠군.”
온객행이 고개를 젓고 영견으로 눈꼬리를 찍고는 말했다.
“유서는 사내입니다.”
봉황이 온객행을 다시 의자에 앉히고 말했다.
“사내라고… 정말 봉인이 깨지면 영혼이 타버릴지도 모르겠군.”
온객행이 봉황의 소매를 붙들고 말했다.
“안시선. 제발 우리 유서를 살려주세요.”
응룡이 봉황을 보고 말했다.
“이건 우리가 어찌 할 수 있는 정도를 아득히 뛰어넘는군.”
봉황이 응룡을 마주 보며 말했다.
“그러게. 흑망 그대는 언제나 나를 놀라게 하는군.”

응룡이 온객행을 보고 물었다.
“그런데 중궁에는 왜 가는 길이었나?”
온객행이 말했다.
“유서가 별궁 안에 갇혀 있는 것이 답답한 것 같아서 천도연까지 종화산에 가있으려구요.”
봉황이 자리에 가서 앉으며 말했다.
“그래서 별궁에 호위를 늘린 거군.”
응룡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원군께는 안가는 것이 좋네. 지금 동왕공이 와서 아주 기분이 안 좋으셔.”
봉황이 몸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동왕공은 대체 요대를 어떻게 찾으시는 걸까?”
응룡이 찻잔에 차를 따르며 말했다.
“싫어도 서왕모의 부군이시니까요.”
봉황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근데 오룡 하나 대동 안 하시고 뭐가 그렇게 급하셔서 혼자 오셨지?”
응룡이 온객행을 손가락질하고 말했다.
“발 때문이겠죠”
봉황이 고개를 흔들더니 말했다.
“복잡하군.”

온객행이 봉황을 보고 물었다.
“산천대제께서는 왜 발의 힘을 탐하십니까?”
응룡이 온객행의 질문을 듣고 ‘하!’ 하고 숨을 들이켰다. 봉황이 응룡을 보고 혀를 차며 그를 불렀다.
“쯧! 경진!”
온객행이 다시 영견을 들어 나지도 않은 눈물을 찍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래도 내자가 불편해하니 종화산으로 가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응룡이 봉황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그래. 동왕공도 촉룡께는 뭘 못하시겠지.”
봉황이 깊게 한숨 쉬며 말했다.
“정말 못하셔야 할 텐데 말이야. 동왕공께서 촉룡을 도발하면 진짜 하늘이 뒤집어지는 일이 일어날 거야.”
온객행이 소매를 들어 응룡과 봉황에게 인사하려고 하자 응룡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같이 가세. 나도 원군을 뵙고 드려야 할 말이 있으니.”
봉황도 일어나 나가는 장지문을 열고 손바닥을 펴며 말했다.
“그래. 같이 가지.”
온객행이 응룡과 봉황을 따라 동궁에서 중궁으로 연결된 회랑으로 나왔다.

중궁에는 금모원군이 용호좌에 앉아 있고 그 옆에 있는 작은 의자에 산천대제가 앉아 있었다. 산천대제가 연신 금모원군에게 무언가 말을 하고 있었는데 주유가 고하여 들어온 응룡과 봉황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동왕공. 나는 일이 바쁘니 약속된 날에 다시 오세요.”
산천대제가 금모원군을 따라 급히 상석에서 내려오며 말했다.
“서왕모. 그러지 말고 내 말을 들어보게.”
금모원군이 고개를 돌려 산천대제를 쏘아보며 말했다.
“여태 듣지 않았습니까? 발의 아이를 데려가려면 흑망도 데려가세요. 탁음대선 앞에서 혼인을 치렀는데 어찌 없는 일 친다는 말입니까? 그럼 가서 탁음대선께 말하고 오세요.”
금모원군은 응룡과 봉황 뒤에 서 있는 흑망을 발견하고 고개 너머로 산천대제를 힐끔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