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시간들

被遺忘的時光 蔡琴(채금)

是誰 在敲打我窓 是誰 在了動琴弦
누가 내 창문을 두드리고 있나요? 누가 거문고를 연주하고 있나요?

那一段 被遺忘的時光 漸漸地 回升出我心坎
그 잊혀진 시간들이 점차 내 마음 속에 떠올라요

是誰 在敲打我窓 是誰 在了動琴弦
누가 내 창문을 두드리고 있나요? 누가 거문고를 연주하고 있나요?

記憶中 那歡樂的情景 慢慢地 浮現在我的腦海
기억 속의 그 즐거운 모습들이 천천히 내 머릿 속에 떠올라요

那緩緩飄落的小雨 不停地打在我窓
천천히 흩날리는 빗방울이 끊임없이 나의 창을 두드리고

只有那沈默無語的我 不停地 回想過去
나는 홀로 조용히 끊임 없이 옛 생각에 잠겨요.

是誰 在敲打我窓 是誰 在了動琴弦
누가 내 창문을 두드리고 있나요? 누가 거문고를 연주하고 있나요?

記憶中 那歡樂的情景 慢慢地 浮現在我的腦海
기억 속의 그 즐거운 모습들이 천천히 내 머릿 속에 떠올라요.

최근에 무간도를 정주행했다. 뭔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아져서 이어지는 부분이랑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지만 그래도 각각의 영화의 완성도가 참 좋아서 더 씁쓸했다. 이제 그 나라에서 이런 작품은 나올 수 없겠지. 막 홍콩이 반환되고 혼란했던 그 시기와 스토리가 잘 연결이 되서 더 많이 여운이 남는것 같다. 정주행하면서 느낀 것은 아! 나는 1편이랑 3편만 봤어구나 왜지? 그리고 정말 많은 배우가 나왔었구나... 처음 봤을 때는 그냥 음 친숙한 얼굴이군 싶었던 사람들이 모두 엄청 유명한 배우들이었다. 진도명이라던가 황추생이라던가... 진도명은 계속해서 작품활동을 이어 나가시는것 같은데 참 볼만한게 없다. 공산당 홍보물 너무 많은거 아닙니까? 뭐 그런것 밖에 못하니까 그러시는 거겠지만 아직도 그나라에서 랑야방 나온게 제일 신기하다.

秋扇 第5

入君懷袖 그대의 품속, 소매 드나들며

온객행은 나부몽이 기루의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매우 화가 났다. 기루에서 만났던 기예를 파는 이들에게 하듯이 주서를 대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대체 그들과 주서가 다른 점이 무엇일까 생각해보았다. 정작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없어서 온객행은 한동안 나부몽을 쳐다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오히려 나부몽이 온객행의 반응에 조금 당황한 눈치였다. 나부몽은 찬합에서 음식을 꺼내 탁자에 올려놓고 침상을 보았다. 온객행은 나부몽이 주서를 보는 시선이 기분 나빠졌다. 음식을 모두 꺼내 놓은 나부몽이 침상으로 가려 하는 것을 막은 온객행이 말했다.
“부몽, 여기는 나에게 맡기고 가서 어서 요기해.”
나부몽은 온객행의 다정한 말에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얼굴을 살폈다. 나부몽은 곧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인사한 후에 방을 나갔다.

나부몽이 장지문을 닫고 나가자 온객행이 얼른 침상으로 다가가 주서를 보았다. 주서는 고개를 숙인채로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온객행은 조심스럽게 주서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물었다.
“아서. 왜 그래? 졸려?”
온객행의 목소리에 눈을 번쩍 뜬 주서는 온객행의 얼굴을 보고 희미하게 웃었다.
“노온.”
주서가 부르는 목소리가 애달파서 온객행이 침상에 앉아 주서를 마주보고 말했다.
“아서. 너무 피곤해? 뭐라도 먹어야지.”
온객행은 침상 옆에 가지런히 놓인 신발을 주서에게 신기고 그를 침상에서 일으켰다. 주서는 온객행이 하는 대로 시중을 받으며 온객행을 빤히 보았다. 탁자에 주서를 앉힌 온객행은 얼른 옆에 앉아서 앞접시에 음식을 담았다. 온객행이 하는 것을 보던 주서가 물었다.
“노온. 여기는 극락(極樂)일까요? 나락(奈落)일까요?”
온객행은 영문을 몰라 웃으며 답했다.
“나는 아서랑 극락에 가고 싶어. 우리 나락에는 가지 말자.”
온객행의 대답에 주서가 부스스 웃었다. 온객행도 주서를 따라 웃었다.

다시 온택에서 온객행을 부른 것은 온객행이 장원으로 돌아오고 사흘 뒤였다. 가주가 온객행을 찾는 기간이 짧아지고 빈도가 늘었다. 나부몽은 온객행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고 조금 긴장했다. 나부몽이 말했다.
“손님을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온객행은 한참 말없이 가주의 서신을 보고 있다가 말했다.
“이틀 뒤에 올 테니 떠날 채비를 해.”
나부몽이 온객행을 보고 물었다.
“어디로 가시게요?”
온객행이 다시 표정을 꾸며 웃으며 말했다.
“어디든. 부친이 나를 부르지 못하는 곳으로.”
나부몽은 걱정이 되어 말했다.
“공자, 그것은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습니다.”
온객행이 나부몽의 팔을 토닥이며 말했다.
“부몽은 걱정할 것 없어. 나 없는 동안 아서를 잘 부탁해. 처소를 객실에서 내원으로 옮기는 것도 좋겠어.”
나부몽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확실히 객실에는 눈이 너무 많습니다.”
온객행이 옷매무새를 가지런히 하고 방을 나가며 말했다.
“내가 이틀 안에 돌아오지 않으면 함양성에 가 있어. 평안은장에 내 이름으로 돈을 맡겨 놓았으니 필요한 만큼 써도 좋아.”
나부몽이 표정을 구기며 말했다.
“평안은장에요? 가주께서 아시면….”
온객행이 고개를 흔들고 웃으며 말했다.
“부몽, 부몽. 너무 걱정 마. 나의 소중한 영매께 부탁한 일이니 부친께서 아실 일은 없어.”
나부몽은 겸연쩍은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장안성으로 떠나는 온객행을 배웅했다.

주자서는 자신에게 다정하게 구는 온객행을 볼때마다 마음이 술렁였다. 꿈을 꾸는 것인지 아니면 이미 죽은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다시 황궁에 갇힌 줄 알았는데 운신이 가능하여 둘러본 처소는 황궁과는 달랐다. 다시 잘 살펴보니 시위나 시비들의 옷차림도 보았던 것들과 조금씩 달랐다. 주자서는 많은 시간을 할애해서 온객행의 모습을 보는 일에 집중했다. 혹시라도 꿈이라면 깨어났을 때, 그를 좀 더 선명하게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것이 아니라면 주자서는 죄가 많아 극락에는 갈 수 없을 테니 나락으로 가기 위해 하늘이 그를 심판하는 지도 모르겠다. 주자서는 아직 자신에 대해 온객행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온객행은 그런 주자서를 다그치거나 나무라지 않는다. 주자서는 온객행의 관대함을 이용하고 있다. 온객행이 주자서에 대해 알게 되면 나찰과 같은 모습으로 변해 주자서를 심판하려고 기다리는 것일까? 주자서는 익숙한 한숨을 가늘게 내쉬었다. 온객행과 함께 끼니를 잘 챙기니 몸에 힘이 붙었다. 날이 갈수록 몸은 편해지는데 마음이 무겁다.

토끼털을 두른 얇은 피풍의를 두르고 주자서는 창가에 앉아 지는 해를 바라보고 있다. 온객행은 주자서가 추위를 타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스스로를 숨기는 일은 그 누구보다 자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주자서는 보잘 것 없는 재주도 쓸모가 없다고 생각하니 조금 우울해졌다. 해가 다져서 객실 안으로 기별없이 하인이 들어왔다. 등롱을 켜고 주자서가 몇 술 뜨지 못한 차갑게 식은 음식을 찬합에 넣어 인사도 없이 객실을 나갔다. 장원의 소등시간이 지나서 온객행이 나부몽이라고 소개한 시비가 와서 주자서의 처소를 내원으로 옮겼다. 주자서는 나부몽을 따라가는 내내 고개를 숙이고 다른 하인들의 시선을 피했다. 나부몽은 내원을 나오는 문에서 가장 가까운 사랑채에 있는 처소로 주자서를 안내했다. 처소 안에는 방금까지 사람이 있었던 것처럼 화로가 준비되어 있었고 찻물이 끓고 있었다. 주자서는 온기가 반가워 자기도 모르게 처소안에 들어가자마자 화로 곁으로 가서 몸을 녹였다. 주자서가 하는 것을 보고 있던 나부몽이 차를 준비하며 말했다.
“중추월인데도 춥습니다. 밤에 주무실 때 탄을 꼭 확인하고 주무십시오.”
주자서는 대답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온객행을 찾았다. 주자서가 무엇인가 찾는 기색을 눈치챈 나부몽이 물었다.
“무엇을 찾으십니까?”
주자서는 어깨를 튀며 깜짝 놀랐다. 주자서는 부끄러워져서 또 고개를 숙이고 고개를 흔들었다. 나부몽은 더 묻지 않고 침상의 잠자리를 확인하더니 내실을 나갔다.

주자서는 한참 화로를 보고 있다가 창가로 가서 창문을 열려다 말았다. 올해 중추월은 다른 때보다 더 추운 것 같다. 아니면 벌써 날이 많이 지나 중양절이 가까울 지도 모르겠다. 중양절에 황제는 종남산(終南山) 남오대(南五臺)에 올라 유명한 시인들을 불러 시를 짓게 하고 국화주를 하사했다. 남오대는 불가의 성지이기 때문에 불교에 심취한 부태후가 항상 참가했고, 부태후가 가면 조황후 역시 가야했기 때문에 중추절이 지나고 나서 중양절이 될때까지 황궁의 육궁은 조용했다. 그래서 주자서는 아직도 황궁에 있는 줄로만 알았다. 주자서는 꿈이라면 최대한 깨지 않기를 바랬고 나찰이 심판을 하는 것이라면 기다리기로 했다. 심판이 끝나기 전에 더 많이 보고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주자서는 생각했다. 그것으로 그동안 거짓말로 황궁과 사람을 속인 것에 대한 벌을 받을 때 위안을 삼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주자서는 다시 화로 앞으로 가서 쪼그리고 앉았다. ‘나찰에게서 도망칠 수 있을까? 언제 바스러질지 모르는 이 몸둥이로?’ 주자서는 자조했다. 주자서는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 정언(井鄢; 화장실)에 다녀온다는 핑계로 먹은 것을 자주 게워냈다. 하루에 한끼도 과분한 그의 몸이 음식을 거부하는 것은 처음이 아니다. 주자서는 한눈에 보아도 귀한 음식들이 낭비되는 것 같아 죄스러웠다.

나부몽은 추위를 타면서도 창문을 열어놓는 주서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한증이 들어서 몸을 따뜻하게 해주어야 한다는 소리를 들은 온객행이 담비털로 피풍의를 준비했다. 나부몽은 경을 칠일 있냐며 온객행에게 한참 잔소리를 하고 자신이 겨울에 입는 토끼털로 만든 얇은 피풍의를 꺼내 둘러 주었다. 주서에게 조금 짧은 하얀 피풍의를 둘러주니 볼수록 참으로 여인 같다. 몸짓이나 말투도 그렇다. 소등시간이 되어 등롱을 끄러 다시 내실로 들어온 나부몽이 본 것은 화로 앞에 쪼그리고 앉아 고개를 무릎에 괴고 졸고 있는 주서의 모습이었다. 탄을 확인하고 자라고 했더니 탄을 보며 자려고 했던 모양이다. 화로안에 얼마 남지 않은 탄은 붉고 검기보다 잿빛이었다. 나부몽은 크게 한숨을 쉬고 입구 근처에 두었던 탄 바구니를 가져가 화로에 탄을 채워 넣었다. 나부몽이 객실에서 부산을 떠는 소리에도 주서는 일어나지 않았다.

나부몽은 가져온 제등에 등롱을 넣고 주서에게 다가가 말했다.
“주공자. 날이 늦었으니 침수(寢睡)하십시오.”
주서는 나부몽의 목소리에 스르르 눈을 떴다. 아주 자고 있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나부몽이 다시 말했다.
“주공자. 침상에서 주무세요.”
나부몽의 목소리에 주자서가 몸을 바로 하고 일어나서 말했다.
“저는 괜찮으니 어서 가서 주무세요.”
나부몽은 주서가 침상에 눕는 것을 보고 나가고 싶어서 말없이 버티고 서서 주서를 보았다. 주서는 다시 시선을 내려 나부몽이 채워 놓은 화로의 탄을 보았다. 나부몽은 주서가 뭘 보고 있나 싶어서 화로를 보았다. 탄이 빨갛게 타는 것이 보일 뿐이다. 조용한 내실에 탄이 타는 소리가 난다. 주서는 일각 넘게 미동도 하지 않고 서서 화로를 보았다. 나부몽은 기다림에 조금 지쳐서 작게 헛기침했다. 주서는 나부몽이 아직도 거기 있는지 몰랐다는 듯 놀란 얼굴로 나부몽을 보고 말했다.
“어서 가서 주무세요.”
나부몽이 고개를 흔들고 말했다.
“소등시간이 지났으니 어서 침상에 드십시오.”
주서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천천히 몸을 침상 쪽으로 움직였다. 나부몽은 화로를 침상 가까이에 옮겨 놓고 장지문 근처에 놓아둔 제등을 들었다. 주자서는 침상에 걸터앉아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다. 나부몽은 조금 답답해져서 다시 제등을 내려놓고 다가가 피풍의를 벗기고 신발도 벗겼다. 이불을 펴서 주서에게 잘 덮어주고 휘장도 내렸다. 나부몽은 어린아이를 돌보는 기분이 들어서 피식 웃었다. 피풍의를 옷걸이에 잘 걸어 두고 침상에 드리워진 휘장을 한번 더 확인한 뒤 나부몽은 제등을 들고 내실을 나갔다.

온객행은 다행히 이틀 뒤에 마차를 타고 천수장원으로 돌아왔다. 온객행이 장원을 비운동안 주서는 온객행을 찾는 기색이 역력했다. 주서가 아무것도 묻지 않기에 나부몽 역시 답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온객행이 돌아와 내실로 들어오며 말했다.
“아서!”
온객행의 목소리에 창문을 열고 하늘을 보고 있던 주서의 고개가 장지문으로 돌아갔다. 주서는 여태 본적 없는 밝은 얼굴로 온객행을 불렀다.
“노온!”
주서의 호칭에 멋쩍은 것은 차시중을 들고 있던 나부몽 뿐이었다. 두 사람은 몇 년만에 만난 사람들처럼 손을 마주잡고 한참 얼굴을 마주 보았다. 괜히 쑥스러워진 나부몽이 헛기침을 하자 온객행이 주서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그를 밖으로 이끌며 말했다.
“아서 촉경(蜀京)에 가본적 있어?”
나부몽은 미리 준비해 두었던 짐을 들고 온객행의 뒤를 따랐다. 주서는 딱히 가진 것이 없었기 때문에 짐을 챙기는 것이 수월했다. 봇짐 하나도 안되는 적은 짐을 힐끔 본 온객행이 혀를 찼지만 나부몽은 본척도 하지 않았다. 온객행과 주서가 탄 마차는 함양성으로 향했다.

마차에 탄 온객행은 마차의 휘장을 걷어 바깥을 보며 말했다.
“아서. 위수를 따라 옹성(甕城)으로 갈거야. 거기서 남쪽으로 조금 더 내려가면 낭수(閬水)가 나오는데 낭수를 따라 가면 금방 촉경이야.”
주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온객행이 하는 말을 들었으나 그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솔직히 온객행은 주서가 이해하던 말던 별로 상관없었다. 장안이나 함양에는 온객행을 알아보는 이가 많으니 온객행을 잘 모르는 곳에 가서 주서와 함께 유람을 하고 싶은 것뿐이다. 미시(未時; 13-15시) 넘어서 천수장원을 출발한 마차는 신시(申時 15-17시)가 지나서 함양성에 도착했다. 함양성에 도착한 마차는 위수 물목에 있는 선착장에서 멈췄다. 온객행은 주서가 두른 피풍의를 잘 여며주고 먼저 마차에서 내렸다. 나부몽이 온객행을 보고 물었다.
“촉경에는 왜 가십니까? 가주께서 허락하신 일입니까?”
온객행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지금 조위녕이 어디 있는 줄 아는가?”
나부몽은 갑자기 온상 아가씨의 약혼자 이름이 나와 당황하며 표정을 구겼다.
“조공자는 왜요?”
온객행은 마차에서 내리는 주서의 손을 잡았다. 온객행은 휘청거리는 주서의 허리를 잡아주며 말했다.
“아서. 조심해.”
나부몽은 온객행의 행동에 콧방귀를 끼었지만 내심 주서라면 마차에서 내리다가 실족사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부몽은 선착장에 있는 일엽선(一葉船)을 보고 조금 놀랐다. 일엽선은 온여옥이 신의상단의 후계를 정하고 나서 부인 곡묘묘와 함께 황하를 유람하기 위해 만든 배인데, 온부인은 배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사고로 명을 달리했다. 그 이후로 이 배의 존재와 사용은 온가 내에서 암암리에 금지되어 왔다. 나부몽의 놀란 기색을 읽은 온객행이 웃으며 말했다.
“장안 선평방에 있는 온택보다 비싼 배인데 사용하지 않으면 아깝지 않소.”
나부몽은 말없이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 먼저 승선했다. 주서는 커다란 배를 보고 조금 사색이 되어 온객행의 소매를 잡고 말했다.
“노온. 배를 탑니까?”
온객행은 주서가 부르는 호칭에 금방 기분이 좋아져서 활짝 웃으며 말했다.
“응. 아서.”
온객행은 주서를 배에 올라타는 선창으로 가며 말했다.
“아서 입엽선에 온 것을 환영해!”
주서는 조금 망설이더니 온객행에게 이끌려 배위에 발을 올려 놓았다. 온객행은 제일 상갑판에 있는 작은 누각으로 주서를 안내하며 말했다.
“옹성까지는 하루도 안 걸려. 촉경에 다녀오면 일엽선을 타고 황하를 유람하자.”
주서는 온객행에게 꼭 붙어 서서 말없이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해가지기 전에 일엽선은 함양의 선착장을 출발해 옹성으로 향했다. 옹성에서 낭수까지는 험준한 산길을 통과해서 가야하기 때문에 준비할 것이 많았다. 온객행은 준비해 둔 객실에 주서를 데려다 놓고 온가에서 고용한 선원을 확인하러 다시 갑판으로 가야 했다. 객실에 도착한 온객행은 화로를 평상 가까이에 가져와 찻물을 올려 놓으며 말했다.
“아서. 잠깐만 기다려. 선장을 만나고 올게.”
주서는 온객행의 소매를 잡고 고개를 흔들었다.
“노온.”
온객행이 주서의 손을 잡고 말했다.
“아서. 금방 다시 올게. 잠깐만 확인하고 올 거야”
온객행은 주서가 붙잡는 것이 좋아서 주서의 불안한 기색을 잘 읽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온객행은 주서를 탁상에 앉히고 남방에서 가져온 향을 태우고 말했다.
“이 향이 다 타기 전에 올 테니까 잠깐만 기다려.”
온객행이 장지문으로 향하자 주서는 자리에 일어나서 다시 온객행을 불렀다.
“노온….”
온객행은 주서를 향해 활짝 웃고는 장지문을 닫고 서둘러서 갑판으로 향했다.

나부몽은 배의 상황을 슬쩍 둘러보고 움직이기 편한 옷으로 갈아 입었다. 슬쩍 둘러보니 선원은 이번에 새로 고용한 사람들이고 하인들은 온택에서 온객행을 모시던 몇 명만 온 것 같았다. 온객행이 좋아하는 음식을 잘하는 어멈 몇과 내실의 하인 몇이 보였다. 나부몽은 눈짓으로 그들에게 인사를 하고 갑판 위로 올라갔다. 갑판에는 온객행과 선장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주서가 보이지 않았다. 나부몽은 의아하여 몸을 돌려 갑판 바로 아래 있는 객실로 향했다. 나부몽이 몇 번이나 밖에서 기별했지만 답이 없었다. 장원에 있을 때도 그런 적이 많았기 때문에 나부몽은 크게 한숨을 쉬고 들어간다는 티를 한참 내고 나서야 장지문을 열고 들어갔다. 나부몽이 예상하지 못한 것은 객실은 비어 있다는 점이었다. 나부몽은 객실 내부에서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퇴로를 모두 확인한 후에 객실을 나왔다. 온객행이 알기 전에 먼저 찾기를 바라면서 나부몽은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온객행이 객실에 주자서를 혼자 놔두고 나가자 마자 주자서는 장안으로 왔을 때가 떠올랐다. 누이와 함께 남창(南倉)에서 배를 타고 한양(漢陽)에 도착해서 두 사람은 옷을 바꿔 입었다. 한수(漢水)를 따라 장안으로 가는 길은 너무나 짧았다. 누이가 사랑한다던 그 사람이 벌써 곤주에 닿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주자서의 누이는 장안성에서 주자서와 헤어져 북쪽으로 향했다. 그게 누이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다. 황궁에 오고 나서는 금방 황제가 승하하는 바람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기대감에 부푼 적도 있었다. 부질없고 순진했던 옛날이야기. 주자서는 조금 웃음이 났다. 주자서는 부태후를 위해 베껴 쓰던 불경의 내용 중에 사람이 죽으면 그동안의 일을 되돌아보며 지옥의 왕들에게 재판을 받는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주자서가 조금은 바랬을지도 모를 죽음이 이미 다가와 코앞에 있었다는 사실에 조금은 화가 났다. 인생의 절반을 황궁에서 허비했다는 것이 너무 아깝고 억울했다. 운이 좋아 윤회의 굴레에 들어서면 그때는 또 어떤 고통으로 삶을 원망하게 될까? 그 어떤 지옥도 지금 주자서가 살고 있는 이 지옥보다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자서는 숨을 크게 들이 마시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방금 온객행이 나간 장지문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객실 바깥 복도에는 하인과 선원이 짐을 옮기고 있었지만 주자서에게 딱히 관심이 없었다. 주자서는 태연하게 문을 닫고 나와 짐을 싣고 있는 하인의 뒤를 따라 다시 선창으로 내려갔다. 주자서가 배에서 내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배 안에 있던 선원이 선창에 대놓았던 판자를 치우고 출항 준비를 했다. 주자서는 조금씩 멀어지는 배를 보며 생각했다. 온객행은 정말 나찰이었을까? 주자서는 딱히 갈 곳도 없었기 때문에 선창에 앉아 들어오고 나가는 배를 구경했다. 그러다 노을이 비치는 붉은 위수를 보았다. ‘집채만한 화등을 띄운다고 했는데….’ 주자서는 막연히 위수 강가에 앉아 처음으로 중추월에 화등을 구경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어쩌면 주자서는 아직도 조금 부질없고 순진할지도 모르겠다.

일엽선은 컸지만 승선한 인원을 얼추 파악하고 있는 나부몽은 갑판으로 올라가 선원에게 배를 멈추게 했다. 옆에서 배의 경로를 듣고 있던 온객행이 놀라 나부몽에게 물었다.
“부몽! 무슨 일인가?”
나부몽이 선원에게 지시를 하고 난간에 기대 방금 떠나온 하구를 보며 말했다.
“공자. 주서가 배 안에 없습니다.”
온객행은 잠깐 나부몽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헛웃음을 치고 말했다.
“부몽. 그게 무슨 소리야? 아서는 객실에….”
나부몽이 일엽선 근처로 온 작은 조각배 위로 훌쩍 뛰어내렸다. 고개를 들어 온객행을 보고 나부몽이 말했다.
“제가 데려올 테니 잠시 기다리십시오.”
온객행은 당황하여 서둘러 갑판을 내려가 객실로 향했다.

나부몽은 조각배를 얻어 타고 다시 하구에 도착했다. 일엽선을 댔던 곳에서 멀지 않은 강가에 주서는 멀뚱히 서서 강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위태로워 나부몽은 자기도 모르게 주서를 큰소리로 불렀다. 나부몽이 몇 번이나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주서는 돌아보지 않았다. 나부몽이 다가가 주서의 소매를 잡아 챘을 때 주서는 나부몽의 거친 손길에 몸을 휘청였다. 놀란 나부몽이 주서를 부축하며 말했다.
“주공자! 몇 번이나 불렀는데!”
주서는 나부몽이 잡은 소매를 한참 보더니 나부몽을 보고 말했다.
“누이께서는 북쪽에서 안녕하십니까?”
나부몽은 슬슬 주서가 몸뿐만 아니라 정신도 아픈 것은 아닌가 의심됐다. 나부몽은 말없이 주서를 잡아당겨 다시 하구로 이끌었다. 주서는 나부몽이 하는대로 이리저리 휘둘리며 말했다.
“충추월에 위수에서 화등제를 한다 하는데….”
나부몽이 주자서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벌써 계추월입니다. 화등제는 끝났어요.”
나부몽의 말에 주서는 조금 울상이 되었다. 나부몽은 괜히 미안해져서 말했다.
“내년에 또 할 테니 그때 보러 옵시다.”
주자서는 나부몽의 말에 작게 코웃음 치고 말했다.
“내년….”

온객행은 나부몽의 손에 이끌려 다시 배에 승선한 주서에게 흰여우털이 달린 하얀 비단 피풍의를 둘러 주었다. 해가 져서 날씨가 쌀쌀해졌기 때문이다. 온객행이 웃으며 말했다.
“아서. 오늘만 참아. 배에 탄 줄도 모르게 아주 천천히 가라고 할게.”
주서는 온객행을 보고 웃는 얼굴을 꾸며보았지만 잘 되지 않았다. 온객행은 걱정이 되어 주서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객실로 향하며 말했다.
“부몽. 나대신 촉경까지의 경로를 좀 확인해 둬.”
나부몽은 객실로 향하는 온객행과 주서의 뒷모습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선장의 얼굴이 궁금증으로 가득했으나 무슨 일인지 묻지 않는 것으로 보아 아주 멍청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객실로 돌아온 온객행은 주서를 평상에 앉혀 놓고 화로를 보았다. 탄을 조금 더 넣고 찻물을 올렸다. 주서는 피풍의를 두르고 화로를 보고 있었다. 온객행이 얼른 차를 내려 주서의 손에 찻잔을 쥐여주며 말했다.
“아서. 오늘만 참아. 배가 싫었으면 말을 하지…. 미안해. 몰랐어.”
주서는 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표정 없이 멍하게 화로만 보았다. 애가 탄 온객행이 주서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목덜미에 고개를 기대며 말했다.
“아서. 미안해. 나는 아서에 대해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
주서가 온객행의 말에 작게 웃었다. 온객행이 고개를 돌려 주서를 보았지만 주서는 의미없이 웃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온객행은 주서의 행동에 겁이 나서 주서를 꽉 끌어안고 말했다.
“아서. 왜 그래. 내가 잘못했어.”

주서는 화로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그대에게 권하니 종일 실컷 취하라. 어차피 유영(류영)의 무덤까지 닿지 않으니…. 세상을 떠돌던 유영도 죽을 때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 앞에서 죽었다 하니 저도 고향으로 가야 하겠습니다.(2)
온객행은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아 주서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
“아서! 즐거움으로 세월을 채우기로 했잖아.(1)
주서가 온객행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그렇습니까?”
온객행은 주서가 더 말하려는 것을 얼른 손을 들어 막았다.
“아서. 아서가 누구인지 나는 중요하지 않아. 그러니까 그런 말 하지 마.”
주서는 슬픈 눈으로 온객행을 보았다. 온객행은 조심스럽게 주서의 입에서 손을 떼고 주서와 이마를 맞대고 말했다.
“아서. 장안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자. 아무도 우리를 모르는 곳으로 가서 둘이 살자.”
주서는 대답없이 온객행의 손을 잡았다. 온객행은 주서의 손이 차가워서 안타까웠다. 온객행이 손을 마주 잡자 주서가 웃었다. 이번에는 꾸며낸 웃음이 아니었다.
“아서… 아서.”
온객행은 주서가 애달파 어쩔 줄 몰라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주자서도 온객행을 마주 안고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주서는 온객행에게 점점 몸을 기대더니 종국에는 축 늘어졌다. 온객행은 주서를 평상에 눕히고 침상으로 가서 휘장을 열고 이불을 폈다. 주서는 그동안의 보살핌이 무색하게 가볍다. 온객행은 작게 한숨을 쉬고 주서를 침상 위에 올려 놓고 이불을 덮었다. 온객행은 그대로 침상 앞에 주저 앉아 주서의 얼굴을 보았다. 그러다 감긴 눈을 한번 콧날을 한번 그리고 까슬까슬한 입술을 만져보았다. 조금 야위었을 뿐 앳된 얼굴이다. 표정이 별로 없어서 안타깝고 애달픈 얼굴이다. 주서의 표정 하나하나에 온객행의 기분이 바닥에서 하늘을 오갔다. 벌써 두 번이나 주서는 온객행에게서 도망가려고 했다. 주서는 벌써 아는 걸까? 온객행이 얼마나 집요하고 주서에게 연연(戀戀)하고 있는지 말이다. 온객행은 차라리 주서가 아파서 몸을 움직일 수 없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가 주서가 아픈 것이 두려워서 금방 떨쳐냈다. 온객행은 주서의 뺨을 쓸며 말했다.
“어떻게 해야 아서를 나에게 동여맬 수 있을까?”
온객행은 팔을 올려 턱을 괴고 눈을 감고 있는 주서의 얼굴을 보았다.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는 얼굴이다.

온객행은 요기거리를 가지고 객실에 들어온 나부몽의 손길에 눈을 떴다. 나부몽이 온객행의 얼굴을 보고 기가 막힌다는 듯 말했다.
“그렇게 좋습니까?”
온객행은 고개를 돌려 자고 있는 주서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응. 아서가 너무 좋아.”
나부몽은 조금 질린다는 듯이 말했다.
“벌써 두번이나 도망간 놈이 뭐가 좋다고.”
온객행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부몽의 팔뚝을 치며 조용히 말했다.
“부몽! 그렇게 말하지 마.”
나부몽이 주서를 보고 말했다.
“제가 보기에 정신도 성치 않은 것 같습니다.”
온객행이 찻잔에 차로 입을 축이고 말했다.
“어서 몸이 나아져야 치료라도 해볼텐데….”
나부몽이 고개를 끄덕이며 탁자로 가서 찻잔에 차를 따라 침대 협탁에 두었다. 나부몽이 하는 것을 보고 있던 온객행이 웃으며 말했다.
“이번에는 아서랑 좀 친해졌어?”
나부몽이 온객행을 보고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죽은 사람 보다는 산 사람이 나으니까요.”
온객행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부몽을 향해 소리쳤다.
“부몽!”
온객행은 큰소리에 놀라 얼른 손을 들어 입을 막고 침상을 보았다. 주서는 온객행의 소란에도 눈을 뜨지 못했다. 침상 근처에 있던 나부몽이 주서에게 다가가 코 밑에 손가락을 넣어 숨을 쉬는 것을 확인했다. 나부몽이 온객행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온객행이 입에서 손을 떼고 작게 한숨을 쉬며 의자에 털썩 앉았다. 나부몽 역시 작게 한숨을 쉬며 다시 탁자로 가서 자리에 앉았다.

원망의 노래

怨歌行 班婕妤
원가행 반첩여

新裂齊紈素 皎潔如霜雪
제(齊) 땅에서 난 흰 비단 새로 잘라내니 희고 깨끗함 서리와 눈 같구나.
裁爲合歡扇 團圓似明月
마름질하여 합환선(合歡扇) 만드니 둥근 모양 밝은 달과 같네.
出入君懷袖 動搖微風發
임의 품속과 소매 드나들며 움직일 때마다 서늘한 바람 일으킨다오.
常恐秋節至 凉飇奪炎熱
항상 두려운 것은 가을철 이르러 시원한 바람이 더위 빼앗아 가면,
棄捐篋笥中 恩情中道絶
대나무 상자 속에 버려져 은혜로운 정 중도에 끊어질까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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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가행(怨歌行)은 '원망의 노래'라는 뜻으로 여름 한 때 주목을 받던 부채가 가을이 되니 버려진다는 내용이다. 이 시에 나오는 추풍선(秋風扇)이라는 말은 쓸모가 없어진 물건이나 총애를 잃은 여자의 비유로 많이 쓰인다.

첩여 반씨(婕妤 班氏 B.C 48~2)는 한성제(漢成帝)의 후궁이며 유명한 시인이다. 반씨는 처음에 입궁하여 비교적 지위가 낮은 소사(少使)에 머물다가 총애를 받아 금방 첩여(婕妤)에 책봉되었다. 그녀는 성제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낳았으나 얼마 되지 않아 모두 죽고 말았다. 반첩여는 초기에는 매우 총애를 받는 후궁이었으나, 젊고 아름다운 조비연(趙飛燕)과 그 여동생이 후비로 입궁하면서 점점 실총(失寵)하게 된다. 조비연 자매는 그녀와 허황후(許皇后)를 제거하기 위해 성제에게 허씨와 반씨가 후궁들과 성제를 저주하고 있다고 무고하였고 이 때문에 허황후는 폐위되었다.

반첩여도 모진 고문을 당했으나 결백을 주장하여 결국은 혐의가 풀리고 금까지 하사받았다. 혐의는 풀렸지만 반첩여의 신세는 그 옛날 총애를 한 몸에 받던 때와 같지 않았다. 결국 또다시 모함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 반첩여는 자신을 귀여워하던 왕정군 태후를 모신다는 이유로 궁을 나가 장신궁(長信宮)으로 떠나버렸다. 반첩여는 장신궁에 머물며 자도부(自悼賦), 도소부(搗素賦), 원가행(怨歌行) 등 세 편의 시를 지었는데 그 중에 원가행만이 오늘날까지 전한다.

후에 한성제가 붕어하고 곁에서 모시던 조합덕이 죄를 물을까 두려워 자살하자 황위는 정도태후의 손자인 유흔에게 돌아갔다. 장안성으로 다시 돌아온 부태후는 처음엔 겸손했지만 새황제의 권력을 내세워 점점 본색을 들어내기 시작했다. 황태태후가 된 부태후는 태황태후 왕정군을 무시하고 그 일가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그러나 서로 간의 세력다툼으로 입은 피해가 너무 심했기에 서로 한 걸음씩 양보해 서로를 견제하는 쪽으로 머물게 되었다. 부태후는 평소에 왕정군을 힘없는 늙은이라며 대놓고 괄시를 했으며 힘있는 자에게 약한 왕정군은 아무 말도 못했다.

부태후의 권력이 절정에 달할 무렵, 생각지도 못한 복병을 만났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손자인 황제였다. 한애제는 자신의 몸종이었던 미남자 동현을 사랑하게 되었다. 이에 부태후는 불같이 반발했고 한애제 또한 할머니 밑에서 간섭당하며 살아야 하는 것에 염증을 느끼고 서로 대립하기 시작했다. 한애제는 동현을 대사마의 장군에 올린 것은 물론 그의 일가에 파격적인 벼슬을 주기에 이르렀다.

황궁에 할머니와 손자간의 싸움은 서로를 중병에 이르게 만들었고 먼저 병으로 세상을 떠난 부태후를 뒤따라 한애제도 붕어하고 만다. 이때 왕정군은 황제의 옥쇄를 움켜줘고 급히 왕망을 불러 대사마의 직위에 올리고 중산왕의 아들 유연을 새황제에 올리고 죽은 부태후와 그때까지 살아있던 황태후 조비연, 동현의 세력을 일순간에 숙청했는데 아둔했던 그녀에게 이러한 비상한 책략을 내놓은 것은 바로 장신궁에서 왕정군을 곁에 모시던 반첩여였다. 한성제가 아끼던 조비연은 황태후, 황후, 서민으로 신분으로 추락하다 결국 강요 못이겨 자살했으나 반첩여는 홀로 한성제의 능묘를 지키며 그의 추억하는 것으로 일생을 보냈다고 한다.

장가행이나 단가행이 인생의 길고 짧음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 유행하던 장단의 이름인것 처럼, 어쩌면 원가행 역시 당시에 유행하던 장단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알못이기 때문에 정확하게는 모른다.

秋扇 第4

團圓似明月 둥근 모양 밝은 달과 같네.

주서가 잠들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부몽이 마차를 끌고 왔다. 마차가 다가오는 소리에도 주서는 눈을 뜨지 못했다. 나부몽이 말에서 내려 모닥불 앞에 앉아 있는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어쩔 셈이십니까?”
온객행이 고개를 들어 나부몽을 보고 말했다.
“뭘?”
나부몽은 대답하지 않고 온객행 품속에 있는 남자에게 턱짓했다. 온객행은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주자서를 안아들고 말했다.
“마차를 준비하다니 역시 부몽이야. 그래서 늦었구나.”
나부몽은 온객행의 말에 콧방귀를 뀌고 말했다.
“장원의 가령이 가주께 소식을 보낸 것을 아십니까?”
온객행은 마차로 다가가 마부를 시켜 뒷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주서를 실었다. 그리고 나부몽을 보고 서서 말했다.
“그래?”
나부몽은 고개를 흔들고 온객행과 주서가 타고 왔던 말을 살펴보았다. 한마리는 마차 뒤에 묶어두고 나머지 하나는 자신이 타고 온 말의 안장에 고삐를 묶었다. 나부몽이 하고 있던 것을 보고 있던 온객행이 말했다.
“부친께서 뭘 어쩌시겠어. 그냥 내 손님인데.”
나부몽은 말없이 말에 올라탔다. 온객행도 그런 나부몽이 발을 굴러 말을 몰자 얼른 마차에 올라탔다.

온객행은 마차 내부 의자에 있던 포단을 바닥에 깔고 앉았다. 그리고 바닥에 눕힌 주서를 끌어안았다. 온객행은 나부몽의 물음으로 불안했던 마음이 조금 진정되는 기분이 들었다. 손님인 것은 차치하고 신분이라도 만들어 둬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너무 주변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온객행의 가슴을 베고 누워있는 주서는 어두운 마차 안에서도 창백했다. 온객행은 겁이 나서 코 밑을 손가락을 대보았다. 미약하나마 쉬어지는 숨이 애달파서 온객행은 주서를 더 꼭 끌어안았다.
“아서를 누구라고 하면 좋을까?”
온객행은 언젠가 읽었던 서책에서 양주(揚州) 여강(廬江)에 미주랑(美周郞; 주유)이 떠올랐다. 주(周)씨는 관중보다 관동 장강(長江) 근처에서 흔한 성씨다. 온객행은 파촉(巴蜀)에서 거래하는 상인중에 주씨가 많은 것이 떠올랐다. 파촉은 거리적으로 너무 가까워 부친이 조금만 손쓰면 금방 진위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최대한 멀리 있는 동쪽 양주 서현(舒縣)사람이라고 둘러대면 될 것이다. 과거시험을 보기위해 장안으로 오는 유생이 많았으니 그도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해 온 유생이라고 소개하면 그만이다. 아직 온객행은 알지 못한 사실이긴 하지만, 재미있게도 주자서는 사실 여강 서현의 남쪽에 있는 파양현(鄱陽縣) 도독(都督)의 아들이다.

온객행은 장원에 도착해서 왜 나부몽이 시간이 조금 더 걸려도 마차를 가져왔는지 알 수 있었다. 장안성에서 온 가주의 호위가 온객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온객행은 품에 안고 있던 주서를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마차에서 내리며 나부몽에게 눈짓했다. 나부몽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온객행은 별말 없이 가주의 호위가 하자는 대로 순순히 장안성으로 향했다. 시간이 늦어 아직 통금이 풀리지 않은 시간에 장안성을 드나드는 것은 신의상단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온객행이 장안성 온택에 도착했을 때는 날이 밝아 진시(辰時; 7-9시)가 넘었다. 온객행은 가주가 머무르는 내원 사랑채에서 부친을 기다렸다. 바로 같은 곳에서 부친의 설교를 들었던 것이 며칠 지나지 않았다. 탁자에 턱을 괴고 앉은 온객행이 일각 정도 기다리자 온상이 온여옥의 팔을 잡고 함께 사랑채로 들어왔다. 온객행은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히 소매를 모으고 인사했다.
“부친 기침하셨습니까.”
온객행의 인사에 온상이 콧방귀를 끼며 말했다.
“참 오랜만에 뵙습니다. 오라버니.”
온객행이 손을 내리고 온상을 보고 말했다.
“귀한 영매(令妹)를 뵙습니다.”
온상은 온객행을 쏘아보며 온여옥이 탁자에 앉는 것을 도왔다. 하인이 간단한 음식을 내왔고 온상은 온여옥의 옆에 앉아 부친을 챙겼다. 온객행도 탁자에 앉아 두사람의 아기자기하고 사이좋은 모습을 뚱한 표정으로 구경했다.

가주의 부름을 받고 장안성으로 간 온객행은 이틀동안 연락이 없었다. 온객행을 잘 아는 나부몽은 괜히 서신을 보내 가주에게 책잡히지 않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행동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장원에 머무르며 온객행의 손님을 보살폈다. 주서는 말을 타고 돌아온 뒤로 침상에서 한발짝도 나오지 못했다. 나부몽은 혹시라도 중병을 얻은 것인가 걱정하여 의원까지 불렀다. 의원의 진맥은 온택에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굶주림에 의한 내장손상과 한증, 거기에 추가된 것은 극심한 기울(氣鬱)이다. 급작스럽게 몸을 움직여 근골이 놀랐다는 것이다. 몸이 너무 허약해서 약을 함부로 쓸 수 없다는 점은 온택에서와 같다. 침상에 누워있는 주서는 가끔 정신이 들어 눈을 뜨기도 했지만 일어나거나 말을 하지는 않았다. 온객행이 장안성으로 돌아간 날, 나부몽은 주자서가 기운을 회복할 수 있게 자게 두었다. 일어나면 먹으라고 둔 쌀죽이 딱딱하게 말라 있는 것을 발견한 나부몽은 이러다 송장을 치우는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온객행이 장원을 떠나고 사흘째 되는 날, 나부몽은 호위 복장을 벗고 시비가 입는 옷을 입었다. 주서는 남자 하인과 호위를 거북해했다. 방 안에 호위가 있으면 거의 먹지 않았고, 남자 하인이 떠주는 것보다 여자 하인이 떠주는 죽을 더 잘 먹었다. 나부몽은 온객행을 위해 주서와 하인들의 접촉을 최소화하고 싶었기 때문에 평소에 입는 옷보다는 소매가 길고 나풀거리는 옷을 입고 타락죽을 소반에 담아 객실로 향했다. 타락죽에서 고소한 냄새가 난다. 낙장(酪漿; 소나 염소의 젖)은 귀한 식재료로 평생 한번도 입에 데지 못하고 죽는 사람이 훨씬 많았다. 그런 낙장을 매일 먹는 호사를 누리는 것을 저 손님은 아는지 모르는지 한 작(勺; 약 18㎖로 한 잔에 해당한다.)도 먹지 못한다.

나부몽이 객실에 들어갔을 때 주서는 몸이 조금 나아졌는지 침상 위에 휘장을 걷고 앉아 있었다. 주서는 소반을 들고 들어오는 나부몽을 보고 작게 한숨을 쉬더니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먹을 테니 두고 가세요.”
나부몽은 주서가 한말을 듣지 못했다는 듯이 침상 옆에 있는 협탁에 소반을 내려놓고 의자에 앉았다. 주서는 물끄러미 나부몽이 하는 것을 보더니 또 한숨을 쉬었다. 나부몽은 그릇을 들어 죽을 한술 떠서 주서의 입 앞으로 가져갔다. 주서가 고개를 돌렸지만 나부몽은 아랑곳하지 않고 숟가락을 든 채로 기다렸다. 보통 주서에게 무언가를 먹인다는 것은 이런 식이다. 주서는 점잖게 말로 먼저 거절하고 그 다음에는 고개를 돌리고 그래도 안되면 수긍하고 먹었다.

오늘은 그동안 먹인 것이 어느정도 효과가 있었는지 나부몽의 손에 들려 있던 숟가락을 건네받았다. 나부몽은 순순히 죽그릇을 주서의 손에 들려주고 침상 옆에 있는 화로를 확인하고 찻물을 끓이는 주전자를 찾았다. 나부몽이 차를 준비하느라 눈을 뗀 사이 주서는 겨우 한술 죽을 떴을 뿐이다. 나부몽은 무의식적으로 크게 한숨을 쉬었다. 나부몽의 한숨소리를 들은 주서가 들고 있던 죽그릇을 내려놓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며칠 문안인사를 올리지 못했는데 태후께서는 강녕 하십니까?”
나부몽은 주서의 말에 눈썹을 찌푸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답 없는 나부몽의 눈치를 보던 주서가 말했다.
“저는… 언제쯤 중명원으로 돌아가나요?”
나부몽은 주서가 한 말 뜻을 알지 못해 소매를 들어 공수하고 말했다.
“소인이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주서는 나부몽의 말에 납득했는지 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나부몽이 침상 곁으로 다가가 협탁에 놓인 죽그릇을 물끄러미 보았다. 한 작도 먹지 않았다. 그새 식었는지 타락죽은 조금 굳어 있었다. 주서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누워만 있었더니 속이 더부룩합니다.”
나부몽이 주서를 보고 말했다.
“의관을 부를까요?”
주자서는 눈에 띄게 당황하며 손을 내젓고 말했다.
“아니요. 아닙니다.”
주서는 협탁에 놓인 죽그릇을 다시 들고 숟가락을 들었다. 나부몽은 주서가 죽 한그릇을 비우는 동안 찻물을 네 번이나 끓였다. 겨우 비운 죽그릇을 들고 나가는 나부몽에게 주서는 다시 말했다.
“중명원으로 돌아가고 싶은데… 태후께 말씀드려 주시겠습니까?”
나부몽은 침상 쪽으로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말없이 객실을 나왔다. 나부몽은 객실을 나오자마자 급하게 장안성으로 서신을 보냈다. 황제에게도 남첩이 있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 없다. 그렇다고 남첩이 없다는 뜻도 아니다.

온객행은 서신을 받은 다음날 아침 장원으로 돌아왔다. 돌아오자 마자 나부몽을 찾은 온객행이 물었다.
“태후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나부몽은 주서를 돌보면서 들었던 이야기를 온객행에게 해주었다. 온객행은 탁자에 놓여있는 찻주전자에서 차를 따라 목을 축였다. 온객행은 예부에 있는 둘째형님께 최근 황궁에서 흉례(凶禮)가 있었는지 물어본 참이다. 예장(禮葬)에 해당하는 품계가 높은 지위는 없었고 선황의 후궁 중 한 명이 물에 빠져 실족사했다고 들었다. 그 후궁은 관동 제후의 딸로 정3품 첩여라고 했다. 그 후궁에게는 자식이 있는 것도 아니라 황실사당에 모실 수 없어 시신을 찾아 관동으로 보냈다는 것이다. 선황이 남색을 가까이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 없다. 태후에게 문안을 드릴 수 있는 것은 보통 3품이내 후궁과 태후의 자식들 정도다. 주서는 주씨이니 태후의 자식일 수는 없고, 황실과 혼인관계로 척분(戚分)이 있는 귀족 중에 주씨는 없다. 온객행이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크게 한숨을 쉬자 나부몽이 말했다.
“왜 주공자께 직접 묻지 않으십니까?”
온객행은 고개를 들지 않고 답했다.
“싫어. 아서가 누구인지 별로 알고 싶지 않아. 나는 그냥 아서가 너무 좋단말이야.”

나부몽이 표정을 구기며 말했다.
“주공자를 좋아하세요?”
온객행이 얼른 고개를 들고 나부몽을 보며 말했다.
“뭐라구? 내가 뭐라고 했어?”
나부몽이 한쪽눈썹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주공자가 너무 좋다구요?”
온객행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부몽을 보며 말했다.
“내가 그렇게 말했어?”
나부몽은 대답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온객행은 한동안 눈동자를 굴리며 나부몽을 보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말했다.
“아서를 좋아하나 봐!”
나부몽은 다시 표정을 구기며 말했다.
“모르셨어요?”
온객행이 나부몽에게 다가가 말했다.
“사람이 좋아진 것은 처음이야. 그렇지?”
나부몽이 온객행을 보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온객행은 나부몽을 보고 물었다.
“자꾸 보고싶어. 만지고 싶어.”
나부몽이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런 말씀은 안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온객행이 나부몽의 손을 잡고 물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어떻게 하는 거야? 좋아한다고 말해도 괜찮아?”

나부몽은 온객행의 소매를 잡아 의자에 앉히고 찻잔을 손에 쥐여주며 말했다.
“좋아하는 것에도 종류가 많지요.”
온객행이 나부몽을 보고 물었다.
“종류?”
나부몽은 탁자에 걸터앉아 말했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방법은 세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세가지?”
나부몽은 찻잔을 꺼내 자기 몫의 차를 따랐다. 온객행은 나부몽에게 닦달하며 말했다.
“그 세가지가 대체 무엇인데?”
나부몽이 ‘큼큼’ 작게 기침하고 말했다.
“세가지 모두 그 사람을 좋아하고 소중히 하는 마음은 같아요.”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연민(憐愍)일 수도 있고 애착(愛着)일 수도 있어요. 보통 남녀간의 정념(情念)은 성애(性愛)라고 부릅니다. 온객행이 나부몽의 말을 곱씹으며 말했다.
“연민, 애착, 성애….”

나부몽은 온객행이 충년(沖年; 9-10세 사이 어린아이)일 때부터 봐왔다. 벌써 10년 넘게 온가에서 호위로 일하면서 온객행이 사람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처음 보았다. 온가에서 관례(冠禮)를 치르고도 혼인하지 않은 사람은 온객행 뿐이다. 관례가 다가오는 온상 아가씨께서도 조황후의 당질(堂姪)인 조위녕과 혼약을 맺은 참이다. 온가의 혼처 중에 가장 황실과 가까운 척분이다. 온객행에게도 많은 혼담이 오고 갔으나 온객행의 행실은 그의 형제자매와는 조금 다른 것이라 말만 오간 것이 벌써 3년이다. 가주께서는 온객행이 상단을 이어 가업을 잇지 않으려고 하는 것보다 혼인하지 않았다는 것을 더 큰 흉이라고 생각했다. 상단을 잇는 일은 온상 아가씨께서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조황후의 당질 조위녕은 종손이 아니었기 때문에 온여옥은 데릴사위 들이듯 데려와 상단을 잇게 할 참이다. 어차피 쓸모와 상관없이 높은 신분 때문에 혼처가 마땅치 않았던 조가에서도 그렇게 나쁘기만 한 조건은 아니었다.

나부몽이 한참 온가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온객행이 말했다.
“나는 세 개 다인 것 같아.”
나부몽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온객행을 보자 온객행이 말했다.
“아서를 보고 있으면 불쌍하고 가련해서 소중히 하고 싶어. 이건 연민이잖아. 그리고 너무 좋아서 떨어지기 싫어. 어디 보내기도 싫어. 이건 애착이지? 그리고….”
나부몽은 온객행이 더 말하려는 것을 얼른 멈추고 말했다.
“공자! 더 말하지 않아도 알겠으니 그만 하십시오.”
온객행이 나부몽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자꾸 보고 싶고 만지고 싶어. 열망(熱望)해. 이건 성애지?”
나부몽은 못들을 걸 들었다는 듯 표정을 구겼다. 온객행이 웃으며 말했다.
“사람을 좋아하면 이렇구나. 머리속에서 아서가 떠나지 않아. 아서 생각만 나고 계속 아서랑 같이 있고 싶어. 근데 아서랑 만나면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서 뭐라고 말하면 좋을지 모르겠어.”

나부몽은 고개를 흔들며 한숨을 쉬고 말했다.
“가주께서는 뭐라고 하십니까?”
이번엔 온객행이 표정을 구기며 말했다.
“똑같지 뭐. 이번엔 예부 장종사(張從士)의 조카래. 둘째 형님께서 괜한 일을 하셨지.”
나부몽이 온객행을 보고 물었다.
“그래서 어쩌실 참입니까?”
온객행이 나부몽을 보고 되물었다.
“뭘?”
나부몽은 말없이 한동안 온객행을 보고 있다가 말했다.
“공자님의 손님께서는 언제까지 장원에 계십니까?”
온객행은 한참 생각하더니 말했다.
“나 출가할까?”
나부몽이 대답없이 눈만 깜빡이자 온객행이 말했다.
“부친께 출가한다고 한 다음에 아서랑 둘이 살래.”
나부몽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이 났다. 온객행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속세를 벗어나 강호를 떠도는 거지. 무술을 배울까?”
나부몽이 콧방귀를 끼고 말했다.
“시기가 너무 늦어진 것은 아닙니까?”
온객행이 나부몽을 보고 물었다.
“배움에 시기가 어디 있는가? 하고자 하는 마음이 제일 중요하지.”
나부몽이 고개를 흔들고 말했다.
“시기도 중요합니다. 아미파에서는 충년이 넘은 자는 제자로 받지 않습니다.”
온객행이 시무룩해져서 되물었다.
“그래?”

나부몽은 온객행을 한참 보고 있다가 물었다.
“주공자를 뵈러 가지 않으십니까?”
온객행이 나부몽에게 물었다.
“지금 여기가 어디인지 잘 모른다며… 내가 갑자기 나타나면 당황할 수 있으니까 좀 정신을 차린 다음에….”
나부몽이 고개를 흔들고 말했다.
“그럼 장원에는 다시 왜 오셨어요?”
온객행이 방긋 웃으며 말했다.
“부친을 피해서 왔지.”
나부몽은 점점 어두워지는 실내를 등롱을 찾아 불을 밝히며 말했다.
“슬슬 끼니 때이니 어서 가서 주공자와 석찬을 드세요.”
온객행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나 없는 동안 아서는 잘 먹었어?”
나부몽은 내실을 나가는 온객행을 향해 고개를 흔들었다. 나부몽이 다시 탁자로 가서 찻잔에 차를 따르며 자리에 앉자 온객행이 물었다.
“부몽은 안 와?”
나부몽이 찻잔으로 입을 축이고 물었다.
“제가 왜요?”
온객행이 물었다.
“그동안 아서랑 좀 친해지지 않았어?”
나부몽이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제가요?”
온객행은 나부몽의 표정을 살피다가 금방 고개를 돌려 내실을 나갔다.

주자서는 생전 처음 보는 곳에서 눈을 떴다. 꿈속에서 주자서는 참으로 오랜만에 말을 몰았다. 꿈에서 만난 온객행이라는 사람은 정말로 실존하는 사람일까? 그냥 그런 친우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주자서가 환상으로 만들어낸 것은 아니었을까? 시비들이 가지고 들어오는 음식의 질이 좋은 것으로 보아 태후께서 주첩여의 상태를 걱정하여 육궁에 있는 어딘가로 주자서를 옮긴 것 같았다. 폭신한 비단 이불에 중추월에 화로까지… 이번에는 정말로 죽을 뻔했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전의 여관(女官)들은 주자서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아마 그들이 중명원에 머무는 주자서보다 형편이 좋을 것이다. 감히 첩여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인지도 몰라 에둘러 거절해도 주자서의 거절은 그들에게 의미가 없다. 흠씬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픈 몸둥이보다 어디인지도 모르는 곳에 갇혀 있는 신세가 더 아팠다. 오히려 너무 아파서 움직일 수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방안에 어둠이 내려 앉는다. 중명원에서 주첩여는 등롱을 켜고 끄는 것도 여유가 없어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이 곳은 어떠려나 하는 생각에 주자서는 조금 웃음이 나왔다. 주자서는 꿈속에서 보았던 비단 두루마리에 쓰여 있던 시를 생각했다. ‘얇디 얇은 봉황무늬 비단을 겹치고 벽문원정(碧文圓頂; 결혼식에 쓰는 푸르고 둥근 장막) 밤새 기웠다. 동그란 합환선으로 여윈 얼굴을 다 가리지 못하고, 양수레 소리 우레와 같아 대화도 나누지 못했다. 등롱이 다 타버린 적막의 어둠속에서 지내니 석류가 붉게 피었다고 소식조차 전할 수 없네. 그대의 말은 수양버들 언덕에 매여 있는데 어디 계시오? 나는 서남풍(4)되어 그대 소식 기다리네.’ (3) 주자서는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마음은 잘 알 수 없었다. 그런 사람이 생기기도 전에 황궁으로 왔고 아마 죽을 때까지 그런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 신세가 조금 슬퍼져서 누군가를 그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주자서는 생각했다. 그러다 온객행이 떠올랐다. 당장 그리워할 만한 사람이 온객행 밖에 없었다. 주자서는 생각했다. 서남풍이 되어 그에게 가고 싶다고. 어디로든 황궁이 아니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밖에서 여관이 기별했다. 주자서는 더는 태후께서 내리는 음식을 거절할 구실이 없어서 반쯤 마음을 내려 놓았다. 몸이 조금 나을 때까지 먹는다고 갑자기 체중이 불거나 외관이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주자서는 힘겹게 몸을 일으켜 앉았다. 중명원에 있었다면 마음은 편안했을 텐데 몸은 편안해도 마음이 고단하니 한시도 쉴 수가 없다.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에 주자서는 고개를 숙이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아서!”
주자서를 친근하게 부르는 목소리에 주자서는 얼른 고개를 들었다. 온객행이 소반에 작은 그릇을 들고 들어왔다. 주자서는 보고 싶다고 생각만 했을 뿐인데 다시 보게 된 온객행이 반가워서 웃음이 났다. 온객행도 주자서의 웃음을 보고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아서. 내가 보고 싶었어?”
주자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온객행을 다시 잘 보았다.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르는 얼굴이니 잘 기억해 두고 싶어서 그렇게 했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시선을 개의치 않고 침상 옆에 앉아 소반을 협탁에 내려 놓았다. 온객행이 가져온 죽에는 아주 작은 토하(土蝦; 민물새우)가 들었다. 주자서의 고향에서는 말린 민물새우를 소금대신 썼기 때문에 아주 반가운 식재료다. 주자서가 죽을 보고 말했다.
“토하….”
온객행이 낮게 웃으며 말했다.
“아니야 아서. 이건 모하(毛蝦)야. 바다새우라구.”
주자서는 다시 그릇을 보고 숟가락으로 작은 새우를 찾았다. 확실히 토하라고 하기에는 색이 붉다. 온객행이 주자서에게 말했다.
“어서 먹어봐 아주 맛있어. 아서는 새우를 좋아하는구나.”
주자서는 딱히 좋아하는 음식이 없었다. 어릴 때는 부족한 것 없이 먹어서 음식에 관심이 없었고, 조금 커서 군영생활에 적응하면서 부터는 배를 채울 수 있는 음식이면 뭐든 잘 먹었다. 황궁에 오고 나서 갑작스럽게 커지는 몸이 두려워 극단적으로 식단을 조절한 이후로 음식은 주자서에게 두렵고 무서운 것이다. 두렵고 무서운 것을 좋아할 수는 없다. 주자서는 괜히 온객행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아서 그의 말을 정정(訂正)하지 않았다. 주자서는 숟가락을 들어 죽을 한술 떴다.

온객행은 주자서를 닦달하거나 서두르지 않고 침상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아 말했다.
“오랜만에 말을 타서 그런가? 넓적다리가 너무 아파. 며칠 걸을 수가 없어서 아서를 보러 올 수가 없었어.”
주자서는 온객행이 한 말에 조금 공감이 가서 고개를 끄덕였다. 주자서의 동조가 기꺼웠는지 온객행은 신나서 방문하지 못했던 함양성에 대해 떠들어 댔다.
“장안성의 화등제는 지겹게 봤으니까 함양성에서 한다는 위수에서 하는 화등제를 보러 가고 싶어. 장안성에 있는 수로랑 달리 위수는 크니까 집채만한 화등을 띄운데.”
주자서는 천천히 모하죽을 뜨며 온객행의 말을 들었다. 자신전에서도 중추절 밤에 태액지에서 화등을 띄운다. 태액지에서 띄운 화등은 장안성을 돌고 돌아 곡강을 넘어 부용지까지 간다고 했다. 주자서는 항상 병을 핑계로 연회 도중에 중명원으로 향했기 때문에 한번도 본적은 없다. 주자서는 지난 밤 태액지에서 본 월계화 같을까 싶었다.

주자서는 자기도 모르게 온객행에게 물었다.
“온공자께서는 화등제에 가 보셨나요?”
온객행이 주자서를 빤히 보며 대답하지 않았다. 주자서는 또 자기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그에게 들리지 않은 줄 알고 숟가락을 내려놓고 온객행에게 몸을 붙여 귓가에 대고 말했다.
“온공자께서는….”
온객행은 가까이 몸을 붙여오는 주자서를 피하지 않고 있다가 팔을 둘러 주자서를 끌어안았다. 당황한 주자서가 바르작대자 온객행이 말했다.
“왜 노온이라고 안 불러? 노온이라고 부르겠다며.”
주자서는 죽을 쏟을까봐 온객행을 밀치지도 못하고 안겨있었다. 온객행이 주자서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노온이라고 부르면 놔 줄게. 아니야. 앞으로 노온이라고 부르겠다고 약속하면 놓아 줄래.”
주자서가 당황하며 말했다.
“온공자 죽이….”
온객행은 잠시 주자서를 놓아주고 주자서 손에 들려 있던 죽과 숟가락을 다시 협탁 위에 올려놓고 주자서를 와락 끌어안았다.

다른 사람과 이렇게 친밀하게 맞닿은 것이 언제였는지 주자서는 기억나지 않았다. 싫지 않은 온기다. 온객행의 맥박이 들렸다. 주자서는 좀더 자세히 들어 보려고 얼굴을 온객행의 목덜미에 가깝게 붙였다. 어깨에 둘러졌던 온객행의 팔 하나가 등허리를 감싸며 더 가깝게 주자서를 껴안았다. 온객행의 맥박은 주자서의 맥박보다 빠르다. 뒤엉킨 두사람의 맥박이 주자서가 온전히 혼자가 아니라고 노래하는 것 같아서 듣기 좋았다. 온객행이 주자서의 귓가에 말했다.
“아서. 어서 약속해. 약속하지 않으면 이렇게 계속 안고 있을 거야.”
주자서는 온객행의 제안이 마냥 싫지만은 않아서 작게 웃었다. 그러다 밖에서 사람이 기별하는 소리를 듣고 온객행을 밀쳤다. 하지만 온객행은 정말 놓아줄 생각이 없는지 주자서를 더 꼭 껴안았다.

주자서는 점점 당황해서 온객행의 등에 손을 올려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온공자, 알겠습니다. 노온이라고 부를게요. 놓아주세요.”
온객행은 ‘응응’하고 주자서의 말에 대답해 주었지만 놓아주지는 않았다. 주자서는 작게 한숨을 쉬고 그를 불러 보았다.
“노온.”
온객행은 원하는 대답을 듣고도 한참 목덜미에 얼굴을 비비다 주자서를 놓아주었다. 그리고 조금 붉어진 얼굴로 말했다.
“아서. 이제부터 노온이라고 불러야 해. 그렇지 않으면 안아버릴 거야.”
주자서는 밖에서 사람이 들어오고 나면 온객행이 사라질까 봐 자기도 모르게 온객행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다시 한번 그를 불러보았다.
“노온.”
온객행이 주자서를 마주보고 웃으며 말했다.
“아서.”
온객행의 목소리가 듣기 좋아서 주자서는 한번 더 온객행을 불러보았다.
“노온.”
온객행이 주자서의 손을 양손으로 마주잡으며 말했다.
“응. 아서.”
조금은 땀이 베인듯한 온객행의 손이 크고 따뜻해서 주자서는 놓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장지문이 열리는 소리에 주자서는 화들짝 놀라서 온객행의 손을 놓았다.

객실로 들어온 나부몽이 본 것은 침상에 나란히 앉아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온객행과 주서였다. 나부몽은 고개를 갸웃하며 저 두사람이 저렇게 친했던가 생각했다. 나부몽은 탁자 위에 가져온 찬합을 올려놓고 말했다.
“공자님. 석찬을 드시지요.”
한참 주자서를 바라보고 있던 온객행이 자리에서 일어나 탁자 위에 음식을 꺼내 놓는 나부몽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부몽. 아서도 나를 좋아하나 봐.”
나부몽은 별일 아니라는 듯 온객행을 보고 물었다.
“어떻게요?”
온객행이 찬합에서 나온 찬을 보다가 다시 나부몽을 보고 물었다.
“어떻게?”
나부몽이 침상에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는 주자서를 보고 물었다.
“연민입니까? 애착입니까? 아니면….”
온객행이 놀라서 나부몽의 입을 막고 말했다.
“부몽! 그런건 어떻게 물어봐. 아니 물어봐도 되는 거야?”
나부몽은 물끄러미 온객행을 보았다. 온객행은 얼른 손을 치우고 말했다.
“미안. 근데 서로 좋아하면 뭘 하는데?”
나부몽이 한숨을 쉬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거기서부터?”
온객행이 다시 나부몽에게 가깝게 다가서며 귀를 가져다 댔다. 나부몽은 고개를 기울여 침상에 조신하게 앉아 있는 주서를 한번 힐끔 보고 온객행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그간 기루에서 뭘 하셨습니까?”


(3) 이상은 무제 봉황무늬비단 얇게 겹치고
鳳尾香羅薄幾重, 碧文圓頂夜深縫.
봉황꼬리 무늬의 향라(香羅) 얇게 몇 겹을 치고 푸른 무늬, 둥근 장식의 장막을 깊은 밤에 꿰맨다.
扇裁月魄羞難掩, 車走雷聲語未通.
달 모양의 부채는 부끄러움을 다 가리지 못하였고 수레 소리 우레 같아 대화를 나누지 못하였지.
曾是寂寥金燼暗, 斷無消息石榴紅.
촛불 다 탄 적막한 어둠 속에서 보냈었는데 석류 붉게 핀 시절에도 소식조차 없구나.
斑騅只繫垂楊岸, 何處西南待好風.
그대의 반추마는 수양버들 언덕에 매어 있는데 어디서 서남풍 불어오기 기다릴거나.

秋扇 第3

裁爲合歡扇 마름질하여 부채로 만드니

온객행은 장포를 벗어 주서에게 둘러주며 품에 안았다.
“주서.”
주서는 온객행의 손에 이끌려 마차에 타면서도 아무말 하지 않았다. 온객행은 마차에 타기전에 마부에게 뭐라고 말을 하고 마차 안에 먼저 앉아 있는 주서의 바로 옆자리에 와서 앉더니 주서의 허리춤에 팔을 두르고 꼭 붙어 앉았다. 주서는 온객행이 둘러준 장포를 손에 꼭 쥐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온객행은 한참 주서의 목덜미에 머리를 기대고 있다가 말했다.
“정말 걱정했어요. 혹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닌지… 정말 다행입니다.”
그리고 주서를 놓아주고는 이리저리 보더니 물었다.
“어디 다치신 데는 없습니까?”
온객행은 고개를 들지 않는 주서가 야속해서 조금은 애원하듯 고개를 숙여 주서와 눈을 맞추며 그를 불렀다.
“주서….”
주서는 대답없이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온객행은 그의 물음에 답해준 그의 몸짓이 기꺼워서 다시 주서를 끌어안고 말했다.
“주서 하고 싶은 것은 저에게 다 말해주세요. 제가 다 해드리겠습니다.”
주서는 온객행의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온객행은 그를 끌어안고 있느라 그것을 보지 못했다. 온객행은 신발을 신지 않은 흙이 잔뜩 묻은 주서의 발을 보고 안타까워 자기 신발을 벗어 건네려다 멈췄다.

온객행의 마차는 조금 서둘러서 동시(東市)를 지나 통금이 시작되는 삼경(三更; 23-01시)전에 장안성의 동문 춘명문(春明門)을 나왔다. 장안성을 나와 속도를 올린 마차는 자정이 다 지나서 장안성 북쪽에 있는 온가의 별장인 천수장원(千樹莊園)에 도착했다. 위수(渭水)와 파수(灞水)가 만나는 곳으로 토지가 매우 비옥하여 이곳에서 나는 작물은 황궁에 납품하는 특상품이다. 너무 늦은 시간이라 천수장원의 하인들도 모두 잠자리에 든 모양이었다. 어둠이 내려 앉은 장원 저택에 장명등(長明燈)만 켜져 있다. 온객행과 함께 온 마부가 저택에 기별하자 곧 장원을 관리하는 가령(家令)이 급하게 나와 온객행을 맞이했다. 마차에서 내리는 주서의 시중을 드는 온객행을 본 가령이 온객행의 호위를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주서를 안아 들려는 온객행을 멈춘 호위는 가령에게 어서 내원으로 길을 안내하라고 했다. 온객행은 아쉬운 듯 주자서의 옆에 꼭 붙어 서서 말했다.
“화로를 준비해주게. 간단히 요기할 음식도 부탁하네. 위장에 무리가 가지 않는 음식으로 부탁하네.”
길을 안내하던 가령이 고개만 돌려 온객행의 옆에 있는 주서를 힐끔보고 호위를 보았다. 호위는 조용히 고개를 젓고 길을 재촉했다.

내원에 도착하여 가령은 온객행과 손님을 사랑채에 모시고 하인 몇 명을 불러 내실을 정리하게 했다. 온가의 식구들은 보통 매우 바빠서 공적인 일이 아니면 장원에 잘 오지 않았다. 풍년제를 지내는 봄이나 수확이 끝나고 정산을 위한 늦가을이 아니면 주인이 머무는 내원은 계속 비어 있었기 때문에 조금 정리가 필요했다. 게다가 셋째공자는 상단일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더욱 더 보기 힘들었다. 내원에 도착한 온객행은 주서를 평상에 앉혀 놓고 혼자 부산을 떨었다. 보이는 하인을 붙잡고 이것 저것 필요한 것을 말했다. 그런 온객행을 보고 온객행의 호위가 콧방귀를 뀌었다. 온객행이 호위에게 다가가 말했다.
“부몽. 이제 가서 쉬어.”
나부몽은 온객행의 손님을 한번 더 위아래로 훑어보고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짓고 내원을 나갔다. 곧 하인이 들어와 차를 준비하며 주서를 힐끔힐끔 훔쳐봤다. 온객행은 자신이 하겠다며 하인을 내쫓고 열어 놓은 장지문도 모두 닫았다. 둘만 남은 내원 사랑채에 침묵이 내려 앉았다.

온객행은 주서가 없어진 것을 알고 화가 났었다. 그를 다시 만나면 묻지 못했던 것을 전부 묻고 목숨을 구해주었으니 평생 은혜를 갚으라고 할 참이었다. 그런데 주서가 비연각의 사졸들에게 붙잡혀 있는 것을 본 순간 온객행이 했던 생각은 한순간에 휘발되었다. 비연각의 사졸들이 온객행에게 돈이야기를 꺼냈을 때 온객행은 살아생전 처음으로 신의상단 아들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겨우 금 반냥. 비연각의 사졸들이 온객행에게 그의 전재산을 내놓으라고 했어도 온객행은 전부 다 내어 줬을지도 모르겠다. 주서를 품에 안았을 때 온객행은 채워지지 않았던 그의 마음이 처음으로 충만했다. 온객행은 주서가 혹시 자신에게 부채감을 가지면 어쩌나 생각하다 부채감으로 그를 옆에 묶어 둘 수 있다면 그것도 썩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온객행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을 주서에게 건네고 말했다.
“주서. 일단 몸을 좀 녹이세요. 춥지는 않으십니까?”
주서는 고개를 끄덕이고 온객행이 건네는 찻잔을 받았다. 온객행은 주서가 자신이 주는 무언가를 받았다는 것이 기뻐서 금방 기분이 좋아졌다. 차를 거의 다 마셔갈 때 즈음 하인이 요기거리를 가지고 기별했다. 온객행은 일어나 장지문으로 가서 소반을 받아 가지고 돌아와 다시 장지문을 닫았다. 온객행은 슬슬 하인들이 주서를 쳐다보는 시선이 짜증나는 참이다.

온객행은 주서의 손에서 찻잔을 받아 옆에 협탁에 두고 그를 일으켜 탁자에 앉히고 소반에 있는 타락죽(駝酪粥)을 권했다. 주서는 온택에서처럼 또 물끄러미 자신의 앞에 놓인 그릇을 한참 보고만 있었다. 온객행은 자기분의 타락죽에 꿀을 넣으며 말했다.
“저는 달콤한 것을 좋아해서 꿀을 넣어 먹습니다. 주공자도 꿀을 넣어 드릴까요?”
주서는 온객행이 죽을 다 먹을 때까지도 움직이지 않다가 온객행이 죽을 다 먹고 숟가락을 내려놓자 고개를 들고 온객행을 똑바로 보고 말했다.
“온공자. 저는 온공자께 드릴 것이 없습니다.”
온객행은 주서의 말에 조금 기분이 상했다. 그러다 온객행이 주서에게 받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했다. 온객행은 주서에게 뭔가 받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온객행은 그 마음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몰라서 머리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한동안 말없이 주서를 보고 있던 온객행은 다급하게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주서. 아니예요.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니예요.”
주서는 온객행의 태도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온객행은 그의 몸짓이 안타까워 자리에서 일어나 주서가 앉은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그의 손을 잡았다. 온객행이 마음을 전해보려고 하는데 가령이 사랑채 밖에서 기별했다.
“공자님. 내실이 준비되었습니다.”
온객행은 주서의 숙인 얼굴을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어깨에 팔을 둘러 일으키고는 말했다.
“주서. 오늘은 밤이 늦었으니 일단 피로를 푸세요.”
그리고 주서를 내실로 안내했다. 내실에 도착한 온객행은 주서를 침상에 앉히고 그가 두르고 있는 장포를 걷어냈다. 온객행은 하인에게 부탁한 옷가지를 찾아서 주서에게 건네고 가령과 하인과 함께 내실을 나가며 말했다.
“주서. 편히 쉬세요.”
온객행은 가령과 하인을 먼저 보내고 내실 장지문 밖에 한참 서서 내실의 등롱이 꺼질 때까지 기다렸다. 온객행은 자기 마음이 대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방법이 무엇이던 옆에 묶어 둘 수 있으면 되는 줄 알았다. 분명히 부채감으로 묶어 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주서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 순간 온객행은 그 생각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 주서를 향한 선의가 그를 향한 마음이 퇴색하는 기분이다. 온객행은 주서가 자신에게 뭔가를 갚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수용할 수 없었다.

온객행의 행동은 주자서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온객행은 끊임없이 주자서를 걱정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다른 사람의 걱정을 받아본다. 남자들에게 끌려갈 때만해도 곧 죽겠구나 생각했는데, 그 사이 정이 들었는지 다시 만나게 된 온객행의 얼굴이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그러다 남자들이 한 이야기가 떠올라 그냥 반가울 수만은 없었다. ‘장안성에서 대가 없는 호의는 없다….”
온객행은 남자들에게서 돈을 주고 주자서를 샀다. 금 반냥이면 열개의 대대(大隊; 열 오(伍)로 편제한 50여 명의 군사)를 사흘간 먹일 수 있는 금액이다. 사람을 사고 판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도성내에서 그러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대로 남자들에게 끌려갔다면 주자서는 대체 무슨 일을 했을까? 주자서는 갑작스러운 한기에 침상의 이불을 손으로 쓸었다. 그러다 흙이 잔뜩 묻은 족건이 눈에 띄었다. 불편했던 가죽신발을 어디에 두었더라 생각하며 주자서는 침상에 몸을 뉘였다. 몸에 닿는 비단의 감촉이 부드러워서 주자서는 잠깐만 눈을 붙이고 일어나서 어떻게 할지 정할 참이다. 주자서는 침상 옆에 놓아둔 화로의 탄이 타는 소리를 들으며 방에 켜 놓은 등롱의 기름이 다하는 것을 보았다. 등롱이 꺼지고도 한참동안 장지문 밖에 서있는 사람의 기척이 났다. 주자서는 ‘호위를 세워 두었구나.’ 생각하고 잠이 들었다. 잠결에 들린 한숨소리가 온객행의 것이라 주자서는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다음날 주자서는 해가 중천에 떠서야 겨우 눈을 떴다. 누군가 자고 있는 그의 옷을 갈아 입혔는지 전에 입고 있던 옷보다 조금 두꺼운 내의와 깨끗한 족건을 신고 있다. 주자서는 다른 사람이 자신의 몸을 만졌는데도 푹 잔 것이 무안해서 한동안 누운 채로 꼼짝하지 않았다. 황궁에 있을 때 주자서의 일과는 통금이 끝나는 묘시(卯時; 5-7시)에 일어나 늦지 않게 부태후께 문안을 드리고, 태후께 문안인사를 오는 다른 후궁들의 인사를 받았다. 그리고 다시 중명원으로 돌아와 해가 뜰때까지 조금 더 자다가 운이 좋으면 끼니를 챙기고 그것이 아니면 중명원의 내원을 조금 걷다가 불교에 심취한 태후께 바칠 불공을 베껴 썼다. 해가 지면 다시 태후께 인사를 하고 자신전에서 중명원으로 향하는 길 위에서 황혼을 조금 구경하다 처소로 돌아갔다. 처소에서도 여유가 되면 등롱을 켜고 유경을 읽었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중명원은 한겨울보다 가을이 더 추웠다. 겨울에는 부태후가 내전을 보살핀다는 이유로 각 후궁의 거처마다 목탄을 지급했지만 가을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명원에는 후궁전에서 보기 흔한 차를 끓이는 화로도 없었다. 주자서는 문득 어젯밤에 보다 잠든 화로를 보았다. 누군가가 화로를 채웠는지 빨갛게 타고 있는 목탄이 보인다.

내실의 누군가가 주자서가 잠에서 깬 것을 눈치 챘는지 침상으로 다가와 휘장을 열었다. 환하게 웃는 어린 얼굴. 온객행이다. 주자서는 즐거워 보이는 그의 얼굴이 기꺼워 자기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주자서가 웃는 모습을 보고 온객행은 침상에 걸터앉아 주자서의 이불을 걷고 말했다.
“아서. 어서 일어나. 밥먹어. 벌써 오시(午時 11-13시)가 넘었어.”
주자서는 부르는 호칭에 기막혀서 온객행을 보았다. 온객행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주자서의 몸 여기저기를 더듬으며 옷을 입혀주고 신발도 신겨주었다. 그리고는 탁자에 놓여있는 찻주전자를 데워 주자서에게 차를 건넸다. 주자서는 어젯밤과 사뭇 다른 분위기에 휩쓸려 찻잔을 받았다. 주자서가 따뜻한 차로 입을 축이는 동안 하인들이 내실로 음식을 가지고 들어왔다. 온택에서와 달리 여러가지의 음식이 나왔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옆에 앉아서 앞접시에 이런 저런 음식을 덜어주며 음식을 설명했다.
“아서. 어제 위수에서 잡은 백련어(白鰱魚)야. 연잎에 싸서 찐 것이라 향긋하고 아주 맛이 좋아.”
주자서는 온객행이 건넨 앞접시를 받고 온객행을 보았다. 온객행은 주자서를 보고 웃더니 앞접시에 있는 음식을 집어 주자서의 입 속에 넣어 주었다. 주자서는 입안에 들어온 음식을 뱉을 수는 없어서 씹어 삼키며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했다.

온객행이 말로 권해서 주자서가 받아주지 않으면 온객행은 그 음식을 주자서의 입 속에 넣어 주었다. 주자서는 고개도 흔들어보고 말로도 거절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팔과 허리춤을 더듬으며 말했다.
“아서. 이렇게 말라서 바람이 불면 날아가겠어.”
주자서가 눈썹을 찌푸리자 온객행이 웃으며 주자서의 미간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아서, 예쁜 눈썹을 왜 찌푸리고 그래.”
주자서는 온객행의 태도에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났다. 온객행은 주자서가 웃는 것을 보고 같이 웃었다. 온객행의 웃음소리가 청량(淸亮)해서 주자서는 어색하고 쑥스러웠다. 정말 오랜만에 속이 더부룩할 정도로 식사를 한 주자서는 포만감에 밀려오는 졸음을 참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온객행이 주자서를 따라 일어나며 장지문 밖에 서 있는 하인에게 탁자를 치우게 했다.

온객행은 주자서에게 차를 권하며 평상에 앉았다.
“아서. 숙차도 좋지만 가끔은 생차도 괜찮지?”
온객행이 건넨 차는 동정공부차(洞庭功夫茶)다. 조황후가 좋아하는 차라서 주자서도 익숙하다. 공부차는 향도 좋고 은은하게 단맛이 나서 잘 모르고 빈속에 마시다 보면 위통을 일으킨다. 주자서가 생차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주자서가 온객행이 건넨 차를 받기만 하고 마시지 않자 온객행이 자신의 잔을 주자서의 손에 들린 잔에 부딪혀오며 말했다.
“아서. 한시도 낭비하지 말고 즐거움으로 흐르는 세월을 채우자.(1)
온객행은 단숨에 잔을 들어 비우고 빈 잔을 주자서에게 보여주며 웃었다. 빈 잔을 본 주자서는 찻잔의 차가 다 식을 때까지 온객행을 보고 있다가 잔을 비우고 온객행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그대에게 권하니, 종일 실컷 취하세.(2)
주자서의 말에 온객행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하지만 금방 얼굴을 꾸며낸 온객행이 주자서의 손에 들린 찻잔을 빼앗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서는 아직 안돼.”
온객행은 주자서의 손을 잡고 내실 밖으로 나왔다.

온가의 별장을 천수장원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곳에 천 그루의 다양한 나무를 심었기 때문이다. 심은 나무 중에는 관중(關中)에서 보기 힘든 나무들도 있었고 과실과 꽃을 위한 나무도 있었다. 한창 철인 산사나무에 꽃사과가 잔뜩 열렸다. 온객행은 별장 이곳 저곳을 다니며 주자서에게 설명해주었다. 주자서는 온객행의 빠른 발걸음이 조금 버거웠지만 즐거웠다. 온객행이 새로 준비해준 신발은 주자서의 발에 꼭 맞았다. 온객행이 준비해준 새로운 옷 역시 전에 입었던 옷보다는 소매가 짧고 옷감이 거칠었지만 움직이기 훨씬 편했다. 여인이 입는 예복을 입지 않는 것만으로도 넘어지는 것을 걱정하지 않고 걷는 것만으로도 주자서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온객행은 주자서를 ‘아서’ 라고 부르기 시작한 이후로 불편한 대화를 하려는 기색이 보이면 얼른 화두를 돌렸다. 주자서는 소년 같이 앳된 온객행이 싫지 않아 온객행과 함께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유예하는 중이다. 며칠동안 주자서는 정해진 시간에 먹고 자고 온객행의 시중을 받으며 천수장원을 유람했다. 온객행은 한순간도 주자서를 혼자 두지 않았다. 심지어 잠도 평상 위에서 내실에서 주자서와 함께 잤다. 주자서는 객의 위치이기도 하고 같은 침상을 쓰는 것도 아니라 크게 개의치 않았다.

주서는 며칠 잘 먹이고 재웠더니 뺨에 살이 올랐다. 화롯불에 빨갛게 익은 뺨을 만지고 싶어서 먼저 나아간 손으로 온객행은 주서의 머리를 쓸어 넘기고 말했다.
“아서. 머리를 정리할까?”
그러면 주서는 온객행의 손길을 뿌리치기는커녕 뒤돌아서 머리를 내어주었다. 한참 머리를 매만져 주면 주서는 스르르 잠이 들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조는 모습을 면경으로 보던 온객행은 주서가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원래 말이 많지 않은 사람인지 갑작스럽게 좁힌 거리감을 어색해 하더니 주서는 수긍하듯 온객행을 받아주었다. 온객행은 기뻐서 주서에게 더 많은 것을 해주고 싶어졌다. 주서의 몸이 기울어 지는 것을 허리에 팔을 둘러 받은 온객행이 그를 들어 침상 위에 눕혔다. 주서는 온객행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온객행은 주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두 알고 싶었다. 이불을 덮어주고 뺨을 쓸어보았다. 주서는 바깥을 돌아보고 오면 항상 지친 듯 이르게 잠자리에 들었는데 잠이 들면 잘 깨지 않았다. 산사나무를 구경하고 온 날 밤 온객행은 밤새 주서의 침상 곁에 앉아서 그가 잠자는 얼굴을 구경했다. 그의 누에나방 같은 눈썹과 날렵한 콧날, 조금은 안타까운 뺨도 쓸어보고 흘러내린 머리도 넘겨주었다. 계속 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는 얼굴이다. 조금 차오른 뺨이 기뻐서 온객행은 피곤도 잊은 채 주서를 보았다.

날이 화창하고 날씨가 좋았다. 온객행은 주서와 함께 내원에 나와 있다가 물었다.
“아서. 말을 탈 줄 알아?”
주서는 저 멀리 구름 사이로 사라지는 기러기떼를 보며 답했다.
“그럼. 나는 우리 군영에서 말을 제일 잘탔어.”
온객행은 주서가 말한 그 군영이 어디인지 혀끝에 올라온 물음을 삼키고 말했다.
“그럼 아서, 말을 타고 위수를 구경하고 올까?”
온객행의 말에 주서가 고개를 돌려 온객행을 보고 웃었다. 온객행은 기분이 좋아져서 말했다.
“아니면 함양성에 갈까? 아서?”
주서는 다시 대답없이 고개를 돌려 하늘을 보았다. 주서는 하늘을 볼 때가 많았다. 처음에는 달을 구경하나 했다. 그 다음에는 구름을 보고 있나 했다. 주서는 그냥 탁 트인 하늘을 갈망하듯 보고 있을 때가 많았다. 온객행은 혹시 자기가 그를 이곳에 속박하고 있는 것인가 죄책감이 들어 그에게 몇번이나 외출을 권유했지만 주서는 항상 아무 말없이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온객행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서의 손을 잡고 마구간으로 그를 이끌었다.
“아서, 말을 타보자. 기분이 좋아질 거야.”

주서는 말을 보더니 능숙하게 말을 다뤘다. 말을 쓰다듬는 손길이나 안장을 매만지는 솜씨가 그가 말을 다루는 것이 익숙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주서가 말에 오르려고 하다가 휘청이는 것을 본 온객행이 얼른 다가가 그의 허리를 잡았다. 양손에 다 들어오는 허리는 여인처럼 가늘다. 주서는 당황하지 않고 온객행의 도움을 받아 등자에 발을 얹고 안장에 앉았다. 몸을 이리저리 틀어 자세를 잡더니 가볍게 등자를 굴러 말을 몰았다. 온객행도 얼른 안장 위에 올라 주서 곁으로 다가가 말했다.
“아서 내가 위수로 나가는 지름길을 알아.”
그리고는 앞장서서 말을 달렸다. 장원의 북문을 나와 북쪽으로 함양으로 향했다. 가을에는 위수의 물이 얕기 때문에 나오는 길이 있었다. 물이 말라 드러나는 갯바닥은 중간중간 늪이 있었기 때문에 길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달리면 위험할 수 있었다. 온객행은 말을 조금 달려 위수 근처에 도착했을 때 말을 멈추고 주서에게 말했다.
“아서! 조심해 여기부터는 늪이라 빠질 수 있어.”
주서는 고삐를 당겨 말을 멈췄지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말이 멈추지 않았다. 온객행이 놀라서 주서를 부렀다.
“아서!”
주서가 더욱 고삐를 세게 당기며 말했다.
“계행(啓行)하시오!”
주서의 목소리는 그동안 온객행이 들어온 그 어떤 목소리보다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의 당황을 느낀 온객행이 서둘러 주서의 앞으로 말을 달려나가 길을 이끌었다.

온객행과 주서를 따라오던 호위들도 뒤쳐져 위수 유역 어디인가에서 헤어졌다. 말이 흥분을 가라앉히고 멈췄을 때 저 멀리 함양성이 보였다. 말의 등에 바짝 엎드려 숨을 고르는 주서에게 다가가 온객행이 말했다.
“오늘은 함양성에서 하룻밤 지낼까요?”
주서는 지친 기색이 만연했다. 온객행은 걱정이 되어 훌쩍 말에서 내려서 주서가 탄 말의 고삐를 잡았다.
“아서?”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주서가 힘겹게 몸을 세워 온객행에게 뭐라고 답하려는 순간 주서의 눈동자가 뒤로 넘어가며 그의 몸이 기울었다. 온객행은 잡고 있던 고삐도 놓아버리고 떨어지려는 주서의 몸을 품에 안았다.
“주서!”
온객행은 근처 나무에 주서를 내려놓고 타고온 말의 고삐를 나무에 묶어 두었다. 그러다 잠시 나오려고 염낭을 챙기지 않은 것이 떠올랐다. 같이 나온 하인과 호위는 보이지 않고 날은 저물어 가고 있어서 온객행은 조금 초조해졌다. 온객행은 다시 주서를 눕혀 놓은 곳에 가서 주서의 상태를 살폈다. 너무 갑작스럽게 말을 타서 그런 것일까 주서의 몸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온객행은 주서의 손과 팔을 이리저리 주무르며 그가 의식을 되찾기를 바라며 그를 불렀다.
“아서! 아서! 정신차려봐. 아서!”

주자서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주자서는 모닥불 앞에 앉아 있었다. 어깨에서 느껴지는 숨결에 주자서가 고개를 돌리자 온객행의 잠든 얼굴이 보였다. 온객행은 주자서를 뒤에서 안은 채로 앉아서 모닥불을 보고 있었다. 주자서는 어찌해야 할지 몰라 멍하게 모닥불을 보았다. 주자서가 움직이는 것을 눈치챈 온객행이 고개를 들고 일어나 주자서의 몸에 둘렀던 팔을 펴서 기지개를 펴며 말했다.
“아서, 정신이 좀 들어?”
주자서가 온객행의 품을 벗어나려고 하자 온객행이 주자서의 허리에 팔을 둘러 그를 안으며 말했다.
“아서. 벌써 해가 다졌어. 너무 추워.”
주자서는 온객행을 뿌리칠 힘이 없어서 온객행에게 몸을 기대고 앉아버렸다. 온객행은 주서의 어깨에 고개를 괴고 모닥불을 보며 말했다.
“급하게 나오느라 염낭도 잊은거 있지? 함양성에는 내가 아는 사람이 없어서… 조금 기다리면 부몽이 올 줄 알았는데 안 오네.”
주자서는 온객행의 말을 듣고 피식 웃어버렸다. 주자서의 웃는 소리가 기분 좋았는지 온객행이 주자서를 더 꼭 안으며 말했다.
“아서. 돌아갈 때는 말을 같이 타야겠어.”
주자서가 고개를 흔들고 말했다.
“아닙니다. 저는 괜찮아요. 천천히 가면 되지요.”
온객행은 주자서의 대답을 듣지 못했다는 듯 주자서의 목덜미에 얼굴을 비볐다. 주자서는 온객행이 어린아이처럼 투정을 부린다고 생각했다. 단지 그것이 무엇에 대한 투정인지 알 수가 없을 뿐이다.

모닥불에 나무를 더 넣지 않으면 꺼져버릴 것이다. 주자서는 걱정이 되어 몸을 움직였다. 온객행은 그제야 주자서를 놓아주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주자서의 팔을 잡아 그를 일으키며 말했다.
“아서, 정말 탈 수 있겠어? 너무 무리하면 안돼. 갑작스럽게 몸을 움직이면 근골이 놀라서 병을 얻을 수도 있어.”
주자서는 내심 이미 병든 근골에 다른 병이 든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겠나 싶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아마 제대로 제때 힘을 주지 못해서 말이 멈추지 않은 것이다. 주자서는 다시 땅을 딛고 일어서며 느껴지는 다리 통증에 조금 놀랐다. 예전에는 걷는 것만큼 쉽고 당연했던 말타기가 그를 이렇게까지 지치게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주자서는 작게 한숨을 쉬며 모닥불 근처에 놓인 뗄감을 모닥불에 던져 넣었다. 주자서는 온객행과 함께 말을 탄다는 사실 자체가 조금 부끄러웠다. 어린 아이도 아니고 여인도 아닌데 다 큰 남자 둘이 같이 말을 타는 것은 어폐(語弊)가 있었다. 모닥불을 쬐면 조금 나아지겠거니 싶은 생각에 주자서는 쪼그려 앉으려다 털썩 주저 앉고 말았다.

말을 살펴보고 온 온객행이 모닥불 앞에 주저 앉아 있는 주자서를 발견하고 다가와 말했다.
“아서. 노숙을 하기에 아서의 옷이 너무 얇다.”
그러더니 자기가 입고 있던 장포를 벗어 주자서에게 둘러 주었다. 주자서는 눈썹을 찌푸리고 말했다.
“괜찮습니다. 온공자께서 입으세요.”
온객행은 얼른 주자서 옆에 앉더니 주자서의 몸에 둘러진 장포를 조금 덮고 말했다.
“아서. 이렇게 같이 덮으면 되잖아.”
그리고 주자서의 어깨에 팔을 둘러 그를 가깝게 끌어안았다. 온객행의 거리감은 주자서에게 수수께끼와 같은 것이다. 친우라고 하기에는 너무 친밀하고 형제라고 할 만큼 스스럼없지는 않다. 주자서는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고 너무 피곤해서 더는 생각할 힘이 없었다. 온객행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고 모닥불을 보며 말했다.
“온공자께서 저를 아서라 부르시니 저는 온공자를 노온이라 불러야 할까요?”
주자서는 자기가 그 생각을 입밖으로 냈는지 아니면 생각만 한것인지도 구분하지 못했다. 주자서의 어깨에 있던 온객행의 팔은 그의 등을 감싸더니 점점 내려와 주자서의 허리에 둘렀다. 목덜미에 닿는 숨결이 간지럽다고 느끼며 주자서는 다시 잠이 들었다.

어부사

漁父辭 屈原(굴원)

屈原旣放 游於江潭 行吟澤畔 顔色樵悴 形容枯槁
굴원이 이미 쫓겨나 강가와 물가에 노닐고 못가에서 시를 읊조리고 다니는데, 얼굴색은 초췌하고모습은 수척해 보였다.
漁父見而問之曰, 子非三閭大夫與
어부가 그를 보고 묻기를, ‘그대는 삼려대부가 아니십니까?
何故至於斯
무슨 까닭으로 이 지경에 이르셨습니까?’ 하니,
屈原曰 擧世皆濁 我獨淸 衆人皆醉 我獨醒 是以見放
굴원이 말하기를, ‘세상이 다 혼탁한데 나 홀로 깨끗하고 모든 사람이 다 취해 있는데 나 홀로 깨어 있다. 이런 까닭에 추방을 당했다.’ 하니
漁父曰 聖人不凝滯於物 而能與世推移
어부가 말하기를, ‘성인은 세상 사물에 얽매이지 않지만 세상을 따라 변하여 갈 수 있어야 합니다.
世人皆濁 何不淈其泥而揚其波
세상 사람들이 모두 탁하면 어찌 진흙탕을 휘저어 물결을 일으키지 않으며,
衆人皆醉 何不飽其糟而歠其醨
뭇 사람이 모두 취해 있거늘 어찌하여 술지게미를 먹고 박주(薄酒;물탄 술)를 마시지 않으십니까?
何故 深思高擧 自令放爲
어찌하여 깊이 생각하고 고결하게 처신하여 스스로 쫓겨남을 당하게 하십니까?’ 하니
屈原曰 吾聞之 新沐者 必彈冠 新浴者 必振衣
굴원이 말하기를, ‘내가 듣건대 새로 머리를 감은 사람은 반드시 관을 털어서 쓰고, 새로 목욕한 사람은 반드시 옷을 털어서 입는다고 하였소.
安能以身之察察 受物之汶汶者乎
어찌 맑고 깨끗한 몸으로 더러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겠소?
寧赴湘流 葬於江魚之腹中
차라리 상수에 몸을 던져 물고기 뱃속에 장사를 지낼지언정
安能以皓皓之白 而蒙世俗之塵埃乎
어찌 결백한 몸으로서 세속의 티끌과 먼지를 뒤집어 쓸 수 있겠소?’ 하니
漁父 莞爾而笑 鼓枻而去 乃歌曰
어부는 빙그레 웃고서, 노를 두드리고 떠나가면서, 이렇게 노래하기를
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고,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으리라.’ 하고는
遂去不復與言
마침내 떠나가고 다시는 대화가 없었다.

사기 굴원전에 이르기를 초나라의 왕족이었던 굴원은 그의 친척이었던 회왕의 신임을 받아 젊은나이에 좌도라는 중책을 맡고 있었다. 법령입안때 궁정의 정적인 상관대부와 충돌해 중상모략으로 면직당하고 회왕과 멀어지게 된다. 굴원은 제(齊)와 동맹해 진(秦)을 대항해야한다고 주장했으나 진의 장의와 내통하고 있던 상관대부와 왕의 애첩때문에 아무도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왕은 제와 단교하고 진에게 기만당해 진의 포로가 되어 객사한다.

회왕이 죽기도전에 아들인 경양왕(頃襄王)이 즉위하고 회왕의 막내아들이자 회왕의 애첩의 아들인 자란(子蘭)이 재상이 되는데 굴원은 회왕을 객사하게 한 자란을 백성들과 함께 비난하다 또 다시 모함을 받아 장강(長江) 이남의 소택지(沼澤地)로 추방된다. 어부는 이때 쓴 작품이라고 알려져 있다. 후세에 창작됬다는 의심이 있기도 한데 일단 굴원이 남긴 시중에 가장 유명한 것이기에 일단은 굴원의 작품으로 친다.

굴원의 작품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중에 하나는 그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왕과 왕실을 비난하면서도 그 충정을 꺽지 않았기 때문이다. 굴원이 태어난 시대의 초나라는 이미 그 세가 많이 기운 상태였다. 회왕이 그의 말을 들었다고 해서 과연 진나라에게 망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부정부패가 심했고, 좀 괜찮은 관리나 책사는 모두 주변국에 빼앗긴 상태다. 굴원은 왕족으로써 문인으로써 지조와 절개를 지켰다. 개인적으로 초나라 최대 아웃풋이라 칭한다. 특히 마지막에 어부가 읊는 노래는 굴원이 진흙탕에 발을 씻느니 목숨을 던지리라 마음먹게 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결국 돌을 안고 상수에 몸을 던진다.

단오는 음력 5월 5일로, 원래는 굴원의 죽음을 애도하는 날이었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단오절이라고 하여 몸을 깨끗이하고 풍년제를 지내는 날인데, 중국에서는 굴원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상수에 물을 저어 물고기들이 굴원의 시신을 먹지 못하도록하고 쌀을 대신 뿌려 물고기밥을 줬다고 한다. 정확하게 멱라수 어느 위치에서 몸을 던졌는지는 모르나 그가 사망한 날은 백성들에 의해 기억되고 기록되어 아직도 중국에서는 굴원을 기리며 단원절에 粽子(종자; Zongzi)를 먹는다. 한국에서도 굴원을 기리고자 망개떡처럼 잎사귀에 싼 떡을 먹었다고 한다.

秋扇 第2

潔如霜雪 희고 깨끗함 서리와 눈 같구나.

나흘동안 온객행이 지켜본 바로 주서라는 사내는 참 조용하고 정적인 사람이다. 부득이한 사정으로 온객행이 집을 비운 날 하인들은 온객행에게 손님이 있는 줄 모르고 끼니를 챙겨주지 않았는데 방에서 한발짝도 나오지 않았던 모양이다. 해 질 녘 방으로 돌아간 온객행이 본 것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신발도 신지 않은 채로 창가에 앉아 창밖을 보고 있는 주서였다. 그 모습이 금방이라도 바스라질것 같아 온객행은 주방에 따로 부탁하여 두 시진마다 위장에 부담이 가지 않는 음식을 준비하게 했다. 하지만 그것도 대부분 거절하거나 먹지 않았고 그나마 온객행이 식사를 제안하면 조금 먹는 정도였다. 강박적으로 음식을 먹지 않는 그가 걱정되어 온객행만 전전긍긍하였다. 온객행은 그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이 많았으나 함부로 묻지 못했다. 묻고 나면, 그에 대해 알게 되면 그가 떠난다고 할까 봐 두려웠다.

온객행은 사람을 시켜 귀족들의 남첩에 대해 알아보라고 시켰다. 아마도 고관대작의 첩일 것이다. 그는 사치품에 대한 태도가 매우 익숙했기 때문이다. 지금 그가 마시고 있는 차는 관중에서는 취급하는 곳이 손에 꼽히는 흑차(黑茶)이고 그것을 우린 자사호와 다기(茶器)는 시장에서 부르는 것이 값이다. 머리를 정리해 주겠다고 하자 주변을 둘러보더니 서역에서 가져온 유리로 만든 면경(面鏡) 앞으로 가서 앉았다. 유리로 만든 면경을 익숙하게 봤던 사람처럼 말이다. 그의 머리카락은 세심하게 관리한 티가 났다. 그의 영양상태를 고려하면 윤기가 흐르는 머리카락과 희미하게 나는 동백꽃의 향기는 누군가 매일 그의 머리카락을 빗어 주었다는 것이다. 온객행은 주서의 머리카락을 정리하여 푸른 비단 끈으로 묶었다. 비단끈 하나로 머리를 묶었을 뿐인데 희고 깨끗한 얼굴색과 대비되어 사내인지 여인인지 알 수 없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온객행은 탁자로 가서 찻잔에 차를 따라 마셨다. 주서도 면경의 자신의 모습을 한참 보더니 피식 웃고 탁자로 다가와 마시던 찻잔에 차를 조금 더 따라 마시며 말했다.
“흑차가 아주 맛이 좋습니다. 저는 생차보다 숙차를 좋아하는데 아주 잘 숙성된 것 같아요.”
온객행이 찻잔을 비우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도 생차보다는 숙차를 좋아합니다. 향도 그렇고 맛도 그렇고.”
그리고 또 한동안 둘은 아무말 없이 탁자에 앉아서 차를 마셨다. 온객행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종일 방에 계시면 따분하지는 않으십니까?”
주서는 온객행의 말에 조금 긴장했는지 찻잔을 내려놓고 고개를 숙였다. 마치 죄를 지은 사람 같은 모습이라 온객행이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서재가 바로 옆에 있는데 가서 보시겠습니까?”
주서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온객행이 장지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 하인이 내원으로 들어왔다. 하인이 온객행에게 말했다.
“공자님 가주께서 찾으십니다.”
온객행은 얼굴을 찌푸리고 말했다.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인가?”
하인이 어색하게 웃으며 옆에 있는 주서를 힐끔 보았다. 온객행은 고개를 끄덕이고 하인을 먼저 보냈다. 온객행이 소매를 들어 주서를 서재로 안내하며 말했다.
“주공자 잠시 다녀와야 하겠습니다. 편히 둘러보십시오.”
주서는 서재안으로 들어가 소매를 모아 인사하며 말했다.
“천천히 다녀오십시오.”
온객행은 다녀오라는 주서의 말에 기분이 좋았다가 천천히 오라는 말에 조금 서운해졌다. 온객행은 조금 심통이 나서 말했다.
“부친께서 부르시는 일은 서둘러 다녀오고 싶습니다.”
주서가 고개를 들어 온객행을 보고 살포시 웃으며 말했다.
“그럼 서둘러 다녀오십시오.”
주서의 말에 기분이 좋아진 온객행은 활짝 웃으며 서재를 나갔다.

주자서는 주자서 나름대로 고민이 많았다. 자신을 온객행에게 누구라고 소개해야 할지도 아직 정하지 못했다. 온객행의 호의가 언제까지 지속될지도 모르고 갈 곳도 아직 정하지 못했다. 서재에 혼자 남은 주자서가 가장 처음 한 일은 서안 뒤쪽에 있는 방의 창문을 여는 일이었다. 중명원에 있을 때는 남의 눈이 무서워 함부로 열지 못하던 창문을 열면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주자서는 서재를 둘러볼 생각도 하지 않고 바로 서안에 앉아 고개를 괴었다. ‘나를 찾고 있을까?’ 주자서가 가장 두려운 것은 사실 그것이었다. 궁궐에서 그를 찾고 있을까? 중명원은 사람의 발길이 많지 않은 곳이라 아직 주첩여가 사라진 것을 모를 수도 있다. 진왕이 주자서가 피를 토하는 것을 보았으니 물에 빠져 죽었다고 생각할지도 모를 일이다. 주자서가 태액지로 향하는 것을 내전 북문에 있는 호위가 보았다. 주자서는 비틀거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혀를 꽉 물었던 것이 기억이 났다. 

주자서는 서안 앞쪽에 걸려 있는 화려한 장식이 있는 검을 보고 잠시 옛 생각에 빠졌다. 검술을 연마하고 말을 달리며 제후의 법도를 배우던 소년은 이제 없다. 주자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소매를 털었다. 온객행이 빌려준 가죽 신발은 딱딱하고 주자서에게 조금 커서 불편했다. 주자서는 신발을 벗어버리고 서재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죽간과 종이로 만든 책을 비롯해 비단 위에 그려진 그림과 지도도 있었다. 서역에서 온듯한 유리로 만든 물건은 주자서도 처음 보는 것이라 한참 구경했다. 주자서는 말로만 들어본 신기한 것 들이 많았다. 별자리를 표시한다는 혼천의(渾天儀)도 있었다. 주자서는 비단 두루마리를 구경하다 관동의 지도를 발견했다. 주자서의 고향 파양호가 그려진 지도는 주자서가 기억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 더욱 반가웠다. 지도를 보고 있을 때 밖에서 하인이 기별했다.
“공자님. 요기하실 음식을 가져왔습니다.”
주자서는 깜짝 놀라 지도에서 손을 떼고 소리가 나는 장지문을 보았다. 주자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있었다. 하인이 안으로 들어오려는 소리가 났다. 주자서는 너무 당황하여 자리에 주저 앉아 몸을 숨겼다. 하인은 장지문을 열어 고개를 들이밀고 여기저기 살펴본 뒤 문을 닫고 서재를 나갔다.

흰 쌀죽 한그릇으로 하루를 버티는 주자서에게 끼니를 챙기는 것은 생각보다 귀찮은 일이라 주자서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숨어있는 책장 바로 앞에 비단 두루마리에는 장안에서 유행한다는 시가가 적혀 있었다. 후궁들이 후원에서 하는 얘기로 들었던 사람의 시가이다. 주자서는 시가를 읽으며 생각했다. ‘이 사람은 금을 잘 탄다 하였는데….’ 주자서는 노래하며 금을 타는 시인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워졌다. 황궁에 있을 때 부태후는 사람을 모아 연회를 여는 것을 좋아하여 음악과 춤을 구경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연회에 참가할때면 주자서는 남의 눈을 신경쓰느라 기예(技藝)를 감상할 여유가 전혀 없었다. 무료(無聊)한 황궁생활은 서책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주자서도 서책을 가까이하게 했다. 그러나 지위가 낮은 후궁이 서책을 구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기 주자서가 가지고 있는 책들은 대부분 황실의 법도를 근간으로 하는 유경(儒經)이 대부분이었다. 주자서는 바닥에 주저앉아 손에 잡히는 비단 두루마리를 모두 펼쳐 읽어보았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것도 서로를 그리워하는 애정시도 주자서에게 너무나 낯선 것들이라 괜히 마음을 들뜨게 했다.

온객행은 별로 유쾌하지 않은 부친과의 대화를 마치고 다시 처소로 향했다. 형들이 관직에 나아 갔으니 가문은 온객행 아니면 고명딸인 온상(溫湘)이 대를 이어야 하는데 아무래도 온여옥은 한살이라도 더 많은 온객행이 상단을 물려받기를 원했다. 해가 짧아진 것인지 아니면 대화가 길어진 것인지는 몰라도 처마 위로 어스름하게 땅거미가 내려 앉았다. 온객행은 처소로 돌아가는 길에 주방에 들렀다. 온객행을 본 하인이 그를 반기며 말했다.
“공자님! 서재에 계시지 않아 찾았습니다.”
온객행이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서재에 손님이 있지 않소?”
하인이 웃으며 꿀에 절인 산사자(山査子; 아가위, 꽃사과)를 가져왔다.
“손님이요? 손님이 계십니까?”
온객행은 하인이 가져온 꽃사과를 보고 물었다.
“언제쯤 다녀오셨소?”
하인이 온객행의 손에 꽃사과가 든 소반을 쥐어 주며 말했다.
“벌써 한 두 시진은 지난 것 같은데요? 시장하십니까? 저녁을 준비할까요?”
온객행은 꿀에 절여져 반질반질한 꽃사과를 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서둘러 서재로 향했다.
“저녁은 서재에서 먹겠습니다. 위장에 부담되지 않는 음식으로 부탁하오.”
하인이 시원스럽게 인사하며 온객행을 배웅했다.

온객행이 서재로 돌아왔을 때 방안은 꽤 어두워서 안이 잘 보이지 않았다. 온객행은 얼른 등롱을 찾아 불을 붙였다. 서재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온객행은 의아하여 주변을 둘러보다 서안 옆에 다소곳이 벗어 놓은 가죽신을 발견했다. 서안 위에 들고 온 소반을 놓고 자리에 앉아 꽃사과를 하나 집어먹었다. 새콤하고 달콤한 맛은 온객행이 좋아하는 맛이다. 서재를 둘러보던 온객행의 시선에 책장 아래 흐트러진 옷가지가 보였다. 온객행은 자리에서 일어나 옷가지가 보이는 책장으로 갔다. 바닥에 기대고 앉아 고개를 살짝 들고 눈을 감고 있는 주서가 보였다. 잠이 든 모양이다. 주서는 책장에 비단 책자를 걸어 놓았다. 주서가 걸어 놓은 책자는 요절(夭折)했다는 비운의 시인의 노래다.


‘유리 술잔에 호박 빛깔 술이 짙어 술방울이 진주처럼 붉다.

용을 삶고 봉황을 구워 옥 같은 기름이 흐르고 비단 휘장과 수놓은 장막에는 향기로운 바람 에워쌌네.

피리 불고 북 치니 하얀 이의 미인 노래하고 가는 허리의 미녀 춤을 춘다.

더구나 화창한 봄에 해가 저무니 복숭아꽃 어지러이 떨어져 붉은 비 같구나.

그대에게 권하니, 종일 실컷 취하라. 술은 유영의 무덤까지 이르지 않으니.’ (2)


금을 잘 탔다던 그는 고귀한 신분에도 불구하고 뜻을 펼치지 못하고 죽었다고 했다. 주서가 읊조리던 다른 노래 역시 술을 권하는 시였는데 주서는 퍽이나 술 마시는 것을 즐기는 모양이다. 온객행은 주서를 좀더 자세히 보기 위해 쪼그리고 앉았다. 그러다 혹시 기생이었나 싶어서 주서의 손을 들어 손끝을 보았다. 보통 기생은 악기를 다루기 때문에 손끝이 거칠거나 모양이 변형되어 있다. 주서의 손은 조금 차갑고 하얗다. 여인의 손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크고 사내의 손이라고 하기에는 부드럽고 곱다. 붓을 쥐거나 검을 쥐었던 흔적도 없다. 온객행은 주서에 대해 하나 둘 알아 갈때마다 알 수 없는 질투를 느꼈다. ‘정녕 누군가의 첩일까? 그가 기생이라면 돈으로 그를 살 수 있을까?’ 온객행은 자기도 모르게 주서의 손을 꼭 쥐었다. 온객행은 한참 주서의 손을 잡고 있었다. 온객행의 체온으로 주서의 손이 따뜻해 질때까지 그는 깨어나지 않았다. 온객행은 주서가 깨어나지 않을까 덜컥 마음이 내려 앉아 주서의 어깨를 흔들었다.

주서는 작게 한숨을 쉬더니 곧 눈을 떴다. 온객행은 주서의 손을 놓고 그의 팔을 잡아 일으키며 말했다.
“바닥에서 무엇을 하셨습니까?”
주서는 온객행을 보고 웃었다. 온객행은 괜히 부끄러워져서 일어난 주서의 옷을 털며 말했다.
“요기는 하셨습니까? 벌써 일경(一更; 19-21시)이 다 되어 갑니다.”
주서는 말없이 펼쳐 놓았던 비단 두루마리를 다시 감아서 있던 자리에 올려놓았다. 온객행이 주서가 올려 놓은 비단 두루마리를 들어 주서에게 건네며 말했다.
“마음에 드시면 가지셔도 좋습니다. 이 시인은 별로 인기가 없거든요.”
주서가 손을 내젓고 말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어째서 인기가 없을까요?”
온객행은 비단 두루마리를 주서의 손 위에 올려놓고 서안으로 가서 앉으며 말했다.
“그의 시는 온통 절망과 죽음뿐이니까요.”
주서는 받은 두루마리를 제자리에 놓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온객행은 서안 위에 올려 두었던 꽃사과를 권했다. 주서는 한참 진주처럼 붉은 꽃사과를 보고 있다가 고개를 저어 거절했다. 온객행이 꽃사과를 하나 더 집어먹으며 말했다.
“주공자께서는 술 마시는 것을 좋아하셨나 봅니다.”
주서는 온객행이 앉은 서안 옆에 벗어 놓은 신발을 발견하고 멋쩍게 웃으며 의자에 걸터앉아 신발을 신으며 말했다.
“제가요?”
온객행이 주서에게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저에게 술을 권하시는 겁니까?”
주서는 당황한듯 소매를 들어 입을 가리고 웃었다. 여인들이 하는 것처럼. 온객행은 그 모습이 낯설면서도 어울려서 기분이 이상해졌다. 주서의 목소리는 힘이 없고 작다. 주서가 뭔가 말했는데 온객행은 그의 몸짓을 보느라 듣지 못했다. 온객행이 주서에게 몸을 바짝 붙이며 물었다.
“뭐라구요?”
주서는 소매를 내리고 다가온 온객행의 귓가에 속삭였다.
“온공자께서는 술을 즐기십니까?”
온객행은 주서의 숨결이 닿은 귀가 뜨거워서 얼른 몸을 떼고 귀를 감쌌다.

온객행은 조금 혼란스러웠다. 온종일 주서를 보고 만지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주서의 행동 하나에 어디로 숨어버리고 싶은 부끄러운 기분을 동시에 느꼈다. 온객행의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조금 놀란 주서가 온객행에게 물었다.
“온공자?”
온객행은 당황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주서가 사랑스러워서 와락 끌어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도 모르게 정말로 그렇게 할 것 같아서 온객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주서가 앉은 자리에서 그를 올려보며 눈썹을 찌푸리자 온객행은 찡그려진 눈썹이 안타까워 자기도 모르게 손끝으로 주서의 눈썹을 그렸다.
“아미(蛾眉; 길고 얇은 누에나방 같은 눈썹).”
온객행의 말에 처연한 주서의 얼굴이 조금 더 슬퍼졌다. 온객행이 뭘 더 할 새도 없이 장지문 밖에서 하인이 기별했다.
“공자님, 저녁을 준비했습니다.”
하인은 온객행의 허락을 기다리지 않고 장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온객행은 불에 데인 듯 주서의 얼굴에서 손을 떼고 하인이 찬합을 내려놓은 탁자로 가서 앉았다. 주서는 한참 서안 옆에 앉아 있다가 탁자로 갔다.

하인이 서재를 정리하며 말했다.
“오늘도 서재에서 주무십니까?”
온객행은 건화(乾貨; 말린 전복)를 넣고 끓인 죽을 떠서 주서의 자리에 놓고 자신의 몫을 뜨며 말했다.
“그렇소.”
하인이 주서를 힐끔 보고 말했다.
“그러지 말고 손님을 객실로 모시지요.”
온객행이 숟가락을 들고 죽을 뜨며 말했다.
“부친께서 내 손님을 좋아하지 않는 것을 알지 않는가?”
주서는 의자에 앉아 자기 몫의 죽그릇을 보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인은 주서의 태도를 보고 기분이 상했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지만 온객행이 하인을 내보내며 말했다.
“어서 가서 일 보시게. 다 먹은 그릇은 정리하여 찬합에 넣어 둘 테니.”
하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한번 주서를 힐끔 보고 서재를 나갔다. 온객행이 음식을 먹는 소리와 등롱이 타들어 가는 소리가 방안을 채웠다. 온객행이 주서를 보고 말했다.
“주공자, 식기전에 어서 드세요.”
주서는 이번에도 음식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다가 대부분의 음식을 남겼다.

온객행은 걱정이 되어 물었다.
“주공자께서 좋아하는 음식은 무엇입니까? 제가 준비하라고 하겠습니다.”
주서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온객행은 애가 타서 주서의 팔을 잡고 말했다.
“주공자. 의원께서 기를 보하지 않으면 병을 치료할 수 없다 하셨습니다. 몸이 좋지 않은 것은 알고 계십니까?”
주서는 의아한 얼굴로 온객행에게 말했다.
“제가 아픕니까?”
온객행은 황당하여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치고 말았다.
“주공자!”
주서는 온객행의 윽박지르는 소리에 조금 기가 죽어서 몸을 움츠리더니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온공자께서 걱정하실 일이 아닙니다.”
온객행은 조금 화가 나서 주서의 양쪽 어깨를 잡고 말했다.
“이렇게 먹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어요.”
그러다 온객행은 어떻게 주서를 만나게 되었는지 생각났다. 온객행은 괜한 이야기를 시작한 것 같아 겁이 났다. 주서는 고개를 숙인 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온객행은 주서를 놓아주고 탁자에서 일어나 그릇을 정리해 찬합을 들고 서재를 나왔다.

주자서는 온객행의 행동에 위화감을 느꼈다. 주자서는 한참 전에 함께 수학했던 친우들을 떠올리려고 노력했으나 기억나는 것이 많지 않았다. 온객행의 손이 닿았던 눈썹의 그 느낌이 참으로 이상하다. 주자서는 손을 들어 눈썹을 만지며 말했다.
“아미…?”
그러다 보통 사내의 눈썹을 그렇게 말하던가 싶어서 의아했다. 그리고 후원에서 후궁들이 떠들던 말이 떠올랐다. 요즘 장안에는 사내를 첩으로 들이는 것이 유행이라고 했다. 온객행이 다른 마음이 있어서 그를 자기 집으로 데려온 것일까 싶어서 괜히 겁이 났다. 겨우 황궁의 후궁 생활을 벗어났는데 또 다시 누군가의 첩실이 되어 내원에 갇혀 살고 싶지 않았다. 주자서는 낮에 열어 두었던 창문으로 밖을 보았다. 날이 어두워져 풀벌레 우는 소리가 났다.

주자서는 탁자 위에 타고 있는 등롱의 불을 끄고 서안으로 가서 창밖을 보았다. 중추가 지났으니 저 달은 기우는 달이다. 옅은 구름에 가린 달은 중명원에서 보던 것과 꼭 같으면서도 다르다. ‘나는 자유를 그리워했구나.’ 그동안 얽매인 것이 너무 많아 자유로운 것이 무엇인지 잊고 살았다. 주자서의 고민은 의미가 없다. 살아서 다시 누릴 수 있을까 했던 자유를 손에 쥐었는데 두려워만 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다시 고개를 들어 달을 보니 달을 가리던 구름이 모두 흩어졌다. 주자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를 나가려고 하다가 밖에서 나는 인기척에 놀라서 몸을 숨겼다. 서재 주변에 번을 서는 호위가 보였다. 어제는 보지 못한 호위다. 주자서는 작게 한숨을 쉬고 다시 서재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머리의 끈을 풀어 높이 올려 묶고 입고 있던 비단 옷도 벗어 버렸다. 허리를 펴고 찌뿌둥한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고 나니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내의 차림으로는 밖에 나갈 수 없어서 서재 이곳 저곳을 뒤져보았으나 옷가지는 찾을 수 없었다. 한참 고민하던 주자서는 창문 옆에 서서 사람의 기척을 읽다가 조심스럽게 서재를 나왔다.

주자서가 간과한 것이 있다면 온객행이 정말 많이 부자라는 점이다. 집이 너무 넓어서 주자서는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우물가 근처까지 온 주자서는 우물 옆에 놓여 있는 작은 간이 의자에 앉아 숨을 돌렸다. 이제 일각? 반주향도 움직이지 않은 것 같은데 숨이 턱끝까지 차오른다. 숨을 고르고 있는데 소녀가 물을 길러 왔다. 주자서는 얼른 일어나 소녀가 물 긷는 것을 도왔다. 소녀는 주자서를 위 아래로 보더니 말했다.
“왜 내의만 입고 계시오? 날이 추운데 세목이라도 할 참이오?”
주자서가 웃으며 고개를 흔들자 소녀는 금방 가지고 온 물동이를 이고 가버렸다. 주자서는 조금 더 앉아 있다가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부르르 떨고 다시 나가는 길을 찾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주자서는 운이 좋게 빨래를 하는 곳에 닿아 하인들이 입는 무명옷을 빌려 입었다. 어설프게 옷을 갈아 입고 나온 주자서를 발견한 하인은 그를 마구간으로 데려가 말을 돌보게 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말이다. 후원에서는 마차를 탈 일도 구경할 일도 없고 밖으로 나가지 않으니 더욱 볼일이 없었다. 주자서는 하인을 도와 마구간을 치우고 말의 몸을 닦아주었다. 하인은 날이 늦었으니 처소로 돌아가라고 했지만 주자서는 고개를 흔들며 조금 더 정리하고 가겠다고 먼저 하인을 보냈다. 삼경(三更; 23-01시)은 온택의 소등시간이다. 주자서는 마구간 옆에 몸을 기대어 소등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나가는 문을 찾았다. 서쪽문은 말이 나가는 문이라 다른 문보다 조금 컸지만, 사람이 다닐 수 있게 샛문을 두기 때문에 운이 좋으면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나갈 수 있었다. 주자서는 호위들이 교대하는 시간을 틈타 온택을 나왔다. 거리로 나오자 시간을 알리는 보사(步士)가 북을 치며 오경(五更; 03-05시)이 끝나 통금이 해제된 것을 알렸다. 주자서는 운이 좋다고 생각하며 바로 장안성을 나가는 문으로 향했다.

주서에게 묻고 싶은 것이 너무나 많다. 수천번도 더 넘게 묻고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묻지 못했다. 온객행은 혹시 주서가 도망갈까 서재 주변에 호위를 세워 두었다. 온객행은 자신이 왜 주서에게 이렇게까지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평소라면 상대방의 기분 따위 맞추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떠나건 말던 온객행은 항상 호의를 베푸는 쪽이었기 때문에 아쉬울 것이 없었다. 그러다 서재에 이불이 있었는지 혹시 춥지는 않은지 걱정이 되어 처소에 있던 화로를 들고 서재로 향했다. 서재에 등롱이 꺼져 있다. 온객행은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주공자.”
대답이 없다. 온객행은 혹시 화가 났는가 싶어 밖에서 조금 더 기다리다가 다시 말했다.
“주공자 날이 찹니다. 화로를 가져왔어요.”
이번에도 역시 대답이 없다. 온객행은 주서가 혹시 잠들었나 싶어서 조용히 장지문을 열고 들어갔다. 열어놓은 창문으로 달빛이 쏟아져 서안을 비췄다. 서안 옆에는 벗어 놓은 옷가지가 보였다. 온객행은 어설픈 주서의 행동이 귀여워서 웃음이 나왔다. 온객행은 화로를 침상이 있는 곳 근처에 두고 휘장을 걷었다. 침상은 비어 있었다.

주자서는 운 좋게 마음씨 좋은 노파를 만나 수레를 얻어 타고 장안성의 서쪽에 있는 금광문(金光門)까지 나왔다. 주자서는 노파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 익주(益州)로 향하려고 했다. 서북의 땅은 이민족이 많이 사는 곳으로 산지가 험하고 사는 사람이 많지 않다고 했다. 그런 주자서를 노파가 잡았다. 주자서는 노파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고 하룻밤 노파의 집에서 신세를 지게 되었다. 잠자리에 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주자서는 거칠게 자신의 팔을 휘어잡는 손길에 놀라 잠에서 깼다. 주자서는 자신의 팔을 잡은 남자를 보았다. 노파는 어디에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무기로 무장한 건장한 남자 여럿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주자서가 당황하여 말했다.
“이게 대체…?”

남자는 주자서의 턱을 잡아 그의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 보더니 말했다.
“그 노파가 거짓말을 하진 않았군. 정말 반반하게 생겼어.”
옆에 서있던 남자가 말했다.
“사내가 뭐가 좋다고 비역질을 하나 싶은데 또 이런 애들을 보면 나도 동한다는 말이야.”
남자의 말에 옆에 있던 이들도 동조하며 시시덕거렸다. 주자서는 잡힌 팔을 뿌리치려고 발버둥쳤지만 소용이 없었다. 주자서의 팔을 잡은 남자가 말했다.
“장안에서 그냥 주어지는 호의가 어디 있겠는가? 그 노파는 너를 팔고 두둑히 한몫 챙겼으니 앞으로 볼일 없겠군.”
주자서는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표정을 구긴 채로 남자들을 보았다. 주자서를 보고 동한다고 말했던 남자가 다가와 주자서의 미간을 문지르더니 말했다.
“찡그린 얼굴도 나쁘지 않군. 아주 비싸게 팔 수 있겠어.”
주자서는 뭘 어떻게 해보지도 못하고 다시 수레에 실려 장안성 안으로 들어왔다.

처음에는 서재 어디에 잠이 들었나 했다. 하지만 서재 어디에서도 발견하지 못했을 때는 혹시 온객행의 처소로 돌아간 것인가 생각했다. 온택을 뒤져도 주서가 나오지 않자 온객행은 매우 언짢았다. 평소에 감정의 기복이 크지 않은 온객행이 동요하는 모습을 보고 그의 호위가 조금 놀랐을 정도로 온객행의 감정은 술렁이고 있었다. 그 이후에 무엇을 했는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았다. 장안성을 나가는 모든 문에 있는 문지기를 매수하고 사방으로 그를 찾다가 온택이 있는 선평방(宣平坊)에서 그다지 소문이 좋지 못한 비연각(飛燕閣)의 사졸이 주서를 수레에 싣고 가는 것을 보았다. 온객행은 타고 있던 마차에서 훌쩍 내려 수레에 탄 주서를 불렀다.
“주서!”
주서는 온객행이 부르는 소리에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온객행은 그것이 또 화가 나서 수레를 멈추고 주서의 어깨를 잡았다.
“주서!”
주서는 온객행의 목소리를 듣고 놀랐는지 고개를 들어 온객행을 보고 안심한 기색을 보였다. 온객행은 자신을 따라온 호위의 칼을 빼앗아 주자서의 손목을 묶은 밧줄을 잘라버리고 그가 수레에서 내릴 수 있게 부축하며 말했다.
“아직 몸이 성치 않은데 어디에 다녀오십니까?”

주서는 말없이 온객행이 부축하는대로 수레에서 내렸다. 주서는 자신을 붙잡아온 비연각의 사졸들을 보았다. 온객행이 고개를 돌려 사졸들을 보자 비연각의 사졸들은 조금 불편한 기색으로 말했다.
“온공자, 이자는 조모가 돈을 갚지 못해 대신 데려온 사람이오. 사람을 잘못 보신 것 아니오?”
온객행이 표정을 구기며 물었다.
“조모가 빚진 돈이 얼마요?”
사졸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다가 말했다.
“금 반냥이오.”
온객행은 콧방귀를 끼며 말했다.
“겨우?”
온객행은 소매를 뒤져 자신의 염낭을 꺼내 사졸에게 던지며 말했다.
“금 반냥은 넘을 것이오.”
비연각의 사졸이 온객행의 염낭을 열어 돈을 확인했다. 수레를 끌던 사졸이 온객행을 막으려고 하자 온객행 옆에 있던 호위가 말했다.
“배짱 좋게 장안성 안에서 사람을 사고 파십니까? 현위(縣尉) 어르신께서 알고 계신가요? 차용증 좀 봅시다.”
사졸은 호위의 말에 우물쭈물하다가 비연각으로 돌아갔다.

秋扇 第1

新裂齊紈素 제나라의 고운 비단 새롭게 자르니

중추절은 큰 명절이다. 별로 높지 않은 신분의 후궁에게도 황제의 하사품이 내려올 만큼 말이다. 벌써 10년째 장안성 대명궁(大明宮)에 갇힌 주자서는 누이를 대신에 첩여 노릇을 하고 있다. 15살에 입궁한 주자서는 시집온지 사흘만에 과부가 되었다. 오늘 내일 하던 무제를 독살한 것이 황후였는지 귀비였는지 지금은 알 수 없다. 제일 홀대 받던 다섯째 황자 유흔(劉欣)이 태후 부씨(傅氏)의 세력으로 태자였던 유오(劉驁)를 죽이고 찬탈로 황제가 된 이후 모두 숙청당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주자서는 변변치 않은 출신과 배경으로 내명부에서 가장 낮은 지위로 상전이 되어버렸다. 황제의 승하 후에 후궁 중 나이가 어린 부인들은 제후의 후처자리로 보내거나 부모에게 다시 보내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주자서는 관동(關東)에서 가장 큰 파양군(鄱陽郡) 제후의 자식이었기 때문에 선황이 죽고 나서도 부태후의 명령으로 육궁에서 지내게 되었다. 볼모인 셈이다.

구중심처에서 황후 조씨(趙氏)가 지내는 교태전에서 가장 멀고, 육궁을 나가는 내전 북문에서 제일 가까운 곳에 있는 중명원(重名苑)이 주자서가 거처하는 곳이다. 주첩여는 선황이 승하하면서 공식적으로 주부인(周夫人)이라 불렸지만 내명부에서 일하는 하인들은 그를 서부인(絮夫人)이라고 불렀다. 주자서는 여인의 옷을 입어야 했기 때문에 항상 마른 몸을 유지해야 했고 점점 크는 키를 어찌 할 수 없어 자세도 구부정했다. 오래된 이불에서 꺼낸 헌 솜(絮)같이 축 늘어져 볼품없는 그와 꽤 어울리는 호칭이라 주자서도 내심 인정하는 호칭이다. 총애는 다퉈본 적도 없고, 벌써 몇 해째 병중인 주부인의 모습은 중명원에서 시중을 드는 시비 몇 명을 빼고는 얼굴도 잘 몰랐다. 큰 키를 가려보고자 가채도 하지 않았고 머리 장식이라고는 가장 좋은 것이 백옥으로 만든 비녀 정도였다. 옷도 항상 색이 없는 무채색 계열의 옷을 입었다. 명절이 다가오면 선태후는 자신전(紫宸殿)에서 연회를 베풀었기 때문에 주자서는 어쩔 수 없이 옅은 푸른색의 예복을 입고 단장을 했지만 화려한 선태후와 황후 바로 아래 앉는 주자서의 모습은 다른 후궁과 비교했을 때 너무 단출하여 오히려 눈에 띄었다.

주자서는 오랜만에 보는 눈 앞에 차려진 음식을 보고 허기가 일었지만 주변의 눈치가 보여 침만 삼키고 있었다. 부태후와 조황후가 들어와 상석에 앉았다. 주자서는 구부정하게 일어나 인사를 했고 그 뒤로 후궁들이 태후께 인사를 했다. 후궁들의 인사가 어느정도 마무리되었을 때 황제가 부태후 소생인 진왕(晉王)을 데리고 내전으로 들어왔다. 선태후와 황후는 황제와 같은 자리에 앉아 연회를 즐겼다. 먹지 못할 때 다른 사람이 먹고 마시는 것을 보는 것은 고통스럽기까지 한 일이라 주자서는 나풀거리는 옷을 입고 춤을 추는 무희를 멍하게 보고 있었다. 예복을 입기 위해 며칠 굶어야 했던 주자서는 정말 몸이 좋지 않았다. 파리한 안색으로 앉아 있던 주자서를 못마땅하게 보고 있던 부태후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주자서의 안색에 혀를 차며 몸이 좋지 않으면 처소로 돌아가도 좋다고 허락했다. 주자서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감사의 인사를 전한 뒤에 자리에서 일어나 중명원으로 향했다. 그는 자신전을 나오면서 비틀거리지 않기 위해 최대한 노력했다. 그를 부축하던 시비도 자신전을 나오자 곧 자기들이 원래 일하던 위치로 돌아가 버렸다.

중명원에 머무르며 일하는 시비가 없는 것은 주자서에게 다행인 일이기도 했기 때문에 주자서는 별말 없이 처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주자서는 제등 하나 없이 내전의 길을 걸었다. 내명부에서 일하는 하인들은 모두 자신전으로 갔는지 처소로 향하는 동안 주자서는 아무도 마주치지 않았다. 조금은 무거운 발자국 소리에 주자서는 자기도 모르게 발걸음이 조금 빨라졌는지도 모르겠다. 뒤쪽에서 누군가 그를 불렀다.
“부인! 부인.”
치렁치렁하고 무거운 예복을 입고 걷는 다는 것은 넘어지지 않기 위해 조심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 주자서는 몇 걸음 가지 못해 넘어지고 말했다. 남자는 들고 온 제등을 옆에 두고 주자서의 팔을 잡아 일으키며 말했다.
“부인. 괜찮으십니까?”
주자서는 놀라서 남자의 손을 뿌리치고 벽쪽에 몸을 기댔다. 남자는 주자서의 행동에 낮게 웃으며 말했다.
“주부인, 시비는 어디에 두시고 혼자 처소로 향하십니까? 걱정이 되어 따라왔습니다.”
남자는 부태후 소생의 진왕이었다. 주자서는 작게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기운이 없어 바람 빠지는 소리 같은 주자서의 목소리에 진왕이 주자서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밤이 이렇게 어두운데 어찌 혼자 길을 가십니까?”

주자서는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주자서는 보통 남자보다도 키가 컸는데 진왕은 주자서보다도 키가 컸다. 주자서는 어찌할 바를 몰라 숨을 헐떡이다가 사레에 들려 기침을 했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뚱이는 기침하는 것도 힘에 겨웠는지 신물이 올라오더니 결국 주자서는 피를 울컥 토하고 말았다. 진왕은 주자서가 바닥에 뱉은 피를 보고 깜짝 놀라 물러나더니 곧 주변을 이리저리 살펴보고는 제등을 들고 자리를 떠났다. 주자서는 한참 그 자리에 주저 앉아 기침을 하며 피를 토했다. 정말 당장 내일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데 참으로 질긴 목숨을 가졌다고 한탄을 하려고 하니 웃음이 났다. 주자서는 별로 죽고 싶은 생각은 없기 때문이다. 주자서의 기침소리는 웃음소리와 섞여서 조금은 괴이하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이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한 주자서는 중명원이 아니라 태액지(太液池)로 향했다. 왜 그렇게 했는지 주자서는 알 수 없었다. 함양(咸陽)에서는 중추달이 되면 한달 내내 위수(渭水)에 화등을 띄워 화등제를 한다고 들었는데 주자서는 본 적이 없다.
“그대 보지 못했는가? 황하의 물이 하늘에서 내려와 세차게 흘러 바다에 이르러 다시 돌아오지 못함을….(1)
주자서가 막 장안으로 들어올 때 유행하던 시가이다. 이제는 기억이 바래서 정말 그런 구절이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내쉬는 모든 숨이 한숨이 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밝은 달빛아래 연못은 참으로 아름답다. 감히 황제가 머문다는 누각으로 갈 수 없어 주자서는 길을 벗어나 하얀 월계화가 피어있는 연못가로 갔다. 얼핏 물 위로 보면 달빛에 빛나는 하얀 꽃이 화등처럼 보이기도 했다. 주자서는 잠시 쉬기 위해 바위에 걸터앉으려다 발을 헛디뎌 연못 속으로 빠졌다. 발이 닿지 않는 바닥을 찾아 허우적대던 주자서는 생각했다. ‘아… 드디어 끝이구나.’ 죽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살기위해 발버둥칠 힘이 남아 있지도 않았다. 주자서는 연못 바닥으로 가라 앉으며 생각했다. ‘세차게 흘러 바다에 이르기를….’


온객행은 중추절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황실과 연을 대고 싶어서 항상 많은 돈을 쓰는 온객행의 아버지, 온여옥(溫如玉)은 신의상단(新義商團)을 운영하며 황하에서 온상(溫商)이라고 불리는 유명한 상인이다. 그는 원래 견씨였으나 장사 수완이 좋아 선대의 양자가 되었다. 선대의 재산을 배 이상으로 불린 온여옥은 정치에 관심이 많아 자식들을 모두 유명한 학자에게 공부를 시켰다. 온객행은 공부를 하면 할수록 나랏일이라던가 상단일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매년 오는 흔한 명절에 온여옥은 수천 수백금을 들여 권문세가에 아첨을 하고 인맥을 만들었다. 관직을 얻기 위해서는 과거시험을 보는 방법도 있었지만 제후나 귀족에게 천거를 부탁하는 것이 훨씬 쉬운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온객행의 큰 형인 온세중(溫世仲)과 둘째 형 온추명(溫秋明)은 온여옥의 인맥으로 각각 이부(吏部)와 예부(禮部)에서 정6품에 해당하는 원외랑(員外郞) 좌사와 우사를 하고 있다. 관직에 있으면서 상인 출신인 것은 커다란 흠이었는데 명문가의 귀족들은 온가의 재화는 탐하면서 그들의 출신을 가지고 그들을 낮잡아 보았다. 온객행은 그런 이중적인 귀족들의 태도에 이골이 나서 형들처럼 관직을 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렇다고 온여옥의 뒤를 이어 상인이 되고자 하는 마음도 없었다.

온객행이 황궁에서 나오는 수로를 따라 곡강(曲江)근처까지 온 것은 어쩌면 흔한 변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중추절이라고 한껏 들뜬 그 떠들썩함이 온객행을 조금 지치게 했다. 장안성의 화등제도 매년 보면 특별할 것이 없다. 온객행은 온여옥 덕분에 귀족 못지 않은 호사를 누렸고 그래서 모든 일에 무감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멀리서 희미하게 들리는 폭죽소리에 온객행은 조금 짜증이 나서 장안성 남쪽의 황성의 수로가 이어진 곡강의 끝 부용지(芙蓉池)로 향했다. 중추절에는 사람의 발걸음이 많지 않은 곳이라 한산하고 어두웠으나 곡강의 줄기를 따라 희고 붉은 월계화가 피었다. 달빛에 빛나는 그 모습에 잠시 넋을 놓은 온객행은 도를 닦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고 생각하며 길을 걸었다. 조금 걷다 보니 자갈이 깔린 연못의 기슭이 나왔다. 온객행은 괜히 연못에 비친 달을 보겠다고 기슭으로 다가갔다. 올해는 작년보다 더 빨리 추워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 기슭의 돌뿌리에 걸린 커다랗고 하얀 물체를 보고 놀라서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으악!”
온객행은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그 물체를 보았다. 사람이다. 중추절에 실연한 여인들이 수로에 몸을 던진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던 터라 온객행은 표정을 구기며 발로 엎어져 있는 사람의 몸을 뒤집었다.

달빛에 보이는 파리한 안색은 현실감이 조금 없었다. 사내인지 여인인지 가냘픈 몸에 달라붙은 하얀 비단이 사람의 신분이 높았음을 말할 뿐이다. 온객행은 쪼그리고 앉아 사람의 얼굴을 만져보았다. 연못의 물은 아주 찬 모양이다. 사람의 뺨은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식어 있었다. 그래서 온객행은 그 사람의 작은 한숨에 깜짝 놀라 뒤로 덜퍼덕 주저 앉았다. 가늘고 미미한 한숨이 안타까워 온객행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사람을 뭍으로 끌어 올리고 입고 있던 장포를 벗어 둘러주었다. 점점 젖어가는 장포를 보고 있던 온객행은 이러다 정말 사람이 죽겠다 싶어서 흠뻑 젖은 그 사람을 품에 안아 들어 올렸다. 온객행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가벼워서 온객행은 여인인가 보다 했다. 온객행의 품에 안긴 사람은 숨소리가 점차 고르게 변하더니 몸을 심하게 떨기 시작했다. 며칠을 굶었는지 사람의 몸은 옷을 겹겹이 입고 있음에도 가늘고 야위었다. 물에 빠지고도 숨이 붙어 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온객행은 품에 안은 사람의 손과 발을 주무르며 생각했다.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온객행은 연못 정원 한 켠에 앉아 자신의 옷이 점점 젖어가는 것을 느꼈다. 곧 통금이라 움직일 수도 없어서 더욱 난감했다.

정원의 나무에 기대어 설핏 잠들었던 온객행을 깨운 것은 품속에서 바르작거리던 것이 갑자기 그를 밀치는 힘이다. 뒤로 벌렁 눕게 된 온객행은 잠결에 이 상황이 조금 우스워서 ‘하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던 사람은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지 온객행의 가슴팍으로 몸이 기울다 쓰러졌다. 그 사람은 당황하여 몸을 한참 버둥대다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온객행은 누운 채로 사람의 등을 쓸며 말했다.
“진정하시오. 진정하시오.”
그 사람은 한참 기침을 진정하려고 노력하다 울컥 피를 토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온객행이 소매에서 손수건을 찾아 입가에 대어주며 말했다.
“진정하시오! 병이 있으시오?”
온객행은 그 사람의 손목으로 손을 가져가 맥을 짚으려고 했다. 그 사람은 온객행의 손길을 거칠게 뿌리치며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안간힘을 썼다. 온객행은 그 사람을 놓아주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가 자리에 일어설 수 있게 도왔다. 그 사람은 잠깐 서 있는 듯하더니 다시 바닥에 주저 앉고 말았다. 온객행이 쪼그리고 앉아 그 사람의 팔을 잡고 말했다.
“진정하시오. 그대를 해치려는 것이 아니오. 오히려 반대지. 내가 그대의 목숨을 구했소.”
그 사람은 온객행의 말을 듣고 한참이나 아무 말도 없더니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허탈하게 웃었다.

주자서는 그렇게 바닥에 주저앉아 웃었다. 웃고 있는 줄 알았다. 눈 앞에 사람이 그의 뺨에 손을 들어 눈물을 닦아주지 않았다면 말이다. 주자서는 스스로 울고 있는 줄도 몰랐다. 주자서가 흩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세차게 흘러 바다에 이르러 다시 돌아오지 못함을….”
남자는 주자서의 말을 듣더니 웃으며 말했다.
“인생의 의미는 즐거움으로 만드는 것이니, 비싼 금 술잔이 빈 채로 달을 마주하지 마시오.”
주자서는 남자의 말을 듣고 생각했다. ‘그 다음 구절이 그랬던가? 푸른 실에 눈이 내리지 않았던가?’ 주자서는 정말 온 몸에 힘이 쭉 빠져서 정신을 잃었다.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은 얼굴로 애처롭게 울고 있는 이의 목소리는 많이 쉬어 있었다. 온객행은 쓰러진 사람을 부축한다는 핑계로 몸 여기저기를 더듬어 보았다. 아주 야위고 가벼웠으나 사내였다. 사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몸은 위화감까지 들게 했다. 저 멀리서 날이 밝아 오는 것을 보니 통금은 금방 풀린 것 같았다. 온객행은 사내를 들쳐업고 왔던 길을 되돌아 선평방으로 향했다. 중추절 다음 날이라 쉬는 곳이 많아서였는지 온객행은 선평방으로 향하는 한시진 동안 사람을 별로 마주치지 못했다. 온객행이 사내를 업고 집안에 들어와서 제일 처음 만난 것은 장성령이었다. 양주 경호파의 셋째아들로 상인이 되고 싶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저 멀리 양주에서 유학을 왔다.

등에 업힌 사람을 보더니 장성령이 웃으며 말했다.
“어제는 갑자기 어디로 사라진 것입니까? 어디서 그렇게 마셔서 어느 집 공자님을 업고 오시는 것이에요?”
온객행이 한숨을 쉬고 말했다.
“이 공자에게 병이 있는듯하니 의원을 불러주게.”
장성령이 깜짝 놀라 온객행의 등에 업혀 있는 사내를 부축하며 말했다.
“병이 있다고요? 병이 있는 분과 술을 밤새 마신 겁니까?”
온객행이 조금 짜증을 내며 말했다.
“내가 술을 마신 것은 당연한 일인가? 잔말 말고 어서 의원이나 불러오게.”
장성령이 부축하던 팔을 놓고 말했다.
“온공자의 방으로 모시겠습니까?”
온객행은 잠깐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이고 자신의 처소로 향했다. 온객행은 침대 위에 사내를 올려놓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이불을 덮다가 보인 하얀 발이 추워 보여서 온객행은 부산을 떨며 화로를 찾았다.

상단에 기거하는 의원이 찾아와 사내의 맥을 짚고 갔다. 의원은 이 사내가 꽤 오랫동안 음식을 제대로 먹지 않았다는 점과 그로 인한 내장의 손상, 그리고 물에 빠지면서 한증이 들었다고 말했다. 의원은 사내의 목덜미에 올라온 발진을 보며 함부로 약을 처방하면 몸에 오히려 무리가 올 수 있으니 제때 끼니를 챙겨 기본적인 기를 보한 후에 치료가 가능하다는 말도 했다. 온객행은 사내가 입고 있던 비단을 만져보며 고개를 끄덕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의원이 나가고 하인이 백미로 쑨 하얀 죽을 가지고 들어왔다. 온객행은 사내가 누운 침대 옆에서 죽이 다 식어 가는 것을 지켜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갔다.

사내가 입고 있던 옷은 황실에 납품하는 은조사(銀造紗)로 짠 비단이다. 겹겹이 입어야 하는 황실 예복 특성상 시판되는 비단보다 얇고 실이 더 가늘다. 그래야 통기성이 좋아 여름에도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온객행은 장부를 모아 놓는 서각에 가서 최근에 은조사를 거래한 기록에 대해 조금 찾아보았다. 비단은 나라에서 관리하는 물품 중에 하나로 아무리 돈이 많은 상인이나 귀족이라도 함부로 살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사내가 입고 있던 중의는 남성의 중의라고 하기에 소매가 너무 크기도 했다. 마치 후궁이 입는 것 같은 중의를 입은 사내. 그는 대체 정체가 뭘까?


주자서는 낯선 곳에서 눈을 떴다. 며칠 굶는 것은 몸이 조금 고달플 뿐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자주 반복되니 큰 일이 된 모양이다. 점점 쇠하는 몸을 뭐 어떻게 할 수 없어서 방치했더니 이런 사달이 일어난 것이다. 물에 빠진 순간 살아 남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 주자서는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이 조금은 얼떨떨하기까지 했다. 주자서의 목숨을 구했다는 남자는 당장 시야에 보이지 않았다. 힘겹게 침상에서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귀족 자제인지 집안에 있는 물건들이 황실에서 보던 것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주자서가 덮고 있는 이불도 중명원에서 주자서가 쓰던 낡은 이불보다 좋아 보였다. 주자서는 작게 한숨을 쉬다 침상 옆에 협탁에 놓인 딱딱하게 굳은 흰 쌀죽을 보았다. 주자서는 허기가 일었지만 마음이 불안하여 이내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육궁에서 했던 것처럼.

다른 곡식이 섞이지 않은 흰 밥은 부의 상징이다. 주자서는 황궁에 와서야 처음으로 먹어 보았다. 그 남자는 아주 많이 부자인 모양이다. 그러다 주자서는 불현듯 혹시 궁궐에서 자신을 찾지는 않을까 마음이 불편했다. 입고 있던 옷은, 머리를 장식했던 장신구는 모두 어디에 갔는지 주자서는 내의 차림에 머리를 푸르고 있다. 주자서는 말을 듣지 않은 몸을 잘 달래서 침상에서 나와 일어섰다. 신발을 찾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맨발에 닿는 바닥의 감촉이 차갑다. 주자서는 다시 발끝부터 온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이대로 도망친다면 어디로 갈 수 있을까? 어차피 주자서를 주첩여를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주자서는 다시 파양군으로, 양친께 갈 수도 없었다. 누이를 대신해 장안으로 향하면서 절연했기 때문이다. 다시 황궁으로 돌아가는 것을 생각하니 주자서는 몸에 힘이 빠져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어스름한 저녁노을이 창호문을 붉게 물들이고 온객행은 방을 나가기 전보다 더 많은 궁금증을 가진 채로 처소로 돌아왔다. 온객행은 문을 열자마자 본 침상이 비어 있어 당황했지만 곧 멀지 않은 바닥에 앉아 있는 사내를 발견하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사내는 죄를 지은 사람처럼 두 손으로 겨우 바닥을 지탱하고 앉아서 움직이지 않았다. 온객행이 사내에게 다가가 그의 팔을 잡아 일으키며 말했다.
“바닥이 찬데 어찌 여기 계십니까?”
주자서는 화들짝 놀라 남자의 손을 뿌리쳤다. 온객행은 뿌리쳐진 손을 멋쩍게 보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바닥에 앉아 있는 사내를 보았다.
“나는 온가 객행이오. 그대의 이름은 무엇이오?”

주자서는 물에서 나와 처음으로 자신을 구했다는 남자의 얼굴을 자세히 보았다. 앳되고 어린 얼굴이다. 주자서도 장안에 오기 전에 저런 얼굴을 하고 있었을까?”
주자서는 대답없이 물끄러미 온객행을 보았다. 온객행은 답답하여 다시 주자서의 팔을 잡아 일으켜 침대에 앉히고는 말했다.
“무슨 사연으로 가을의 차가운 연못에 몸을 던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너무 슬퍼마시오. 원래 인연이라는 것은….”
주자서는 침상에 걸터앉아 자기 앞에서 정인이니 애정시니 하는 뜻 모를 소리를 하는 온객행을 보다가 피식 웃었다. 온객행은 얼굴을 찌푸리더니 주자서 옆에 털썩 앉아 주자서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말했다.
“그대가 말하지 않았소 황하의 물이 하늘 위에서 내려와 세차게 흘러 바다에 이르러 다시 돌아오지 못하니, 우리는 한시도 낭비하지 말고 즐거움으로 흐르는 세월을 채워야 하는 것이오.(1)

주자서는 참으로 오랜만에 맞닿은 사람의 온기가 싫지 않았다.
“서(絮)….”
주자서는 자기도 모르게 내명부에서 그를 부르는 멸칭으로 자신을 소개할 뻔했다. 온객행이 고개를 돌려 주자서를 보고 물었다.
“서?”
주자서가 고개를 작게 끄덕이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주서….”
온객행이 주자서를 보고 웃으며 물었다.
“무슨 서를 쓰시오?”
주자서가 말없이 고개를 돌려 이불을 손으로 만지자 온객행이 말했다.
“버들개지(柳絮)할 때 서를 쓰시오? 버들개지 마냥 마음이 가벼워 이 험난한 세상을 어찌 헤쳐 가시려고.”
주자서는 온객행의 말에 머리를 얻어 맞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 그 서는 케케묵은 오랜 솜을 뜻하는 글자이기도 했지만 봄에 흩날리는 버들개지를 뜻하는 글자이기도 했다. 그러다 주자서는 문득 버들개지처럼 멀리멀리 날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도 그를 모르는 곳으로 아주 멀리 말이다. 주자서는 마음이 조금 홀가분해졌다. 온객행이 주자서를 놓아주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일단 나는 배가 아주 고파서 밥을 좀 먹어야 하겠소.”
온객행이 탁자 옆에 딱딱하게 말라붙은 흰죽을 가지고 방을 나갔다.


온객행이 잣을 넣고 끓인 죽을 가지고 돌아왔을 때 주서는 침상에 다리를 걸친채로 누워있었다. 신발 신지 않은 하얀 발이 조금 야살스러워서 온객행은 침을 꿀꺽 삼키고 헛기침을 했다. ‘큼큼’ 온객행의 기침소리에 주자서는 눈을 떴지만 몸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온객행이 방안을 뒤지더니 예전에 신던 가죽신을 찾아 침상 옆에 두었다. 말없이 누워 있던 주자서는 온객행이 침상으로 다가오고 나서야 겨우 일어나 앉아 온객행이 가져온 신발을 보았다.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가죽 신이다. 주자서는 몇 번만 신으면 금세 닳아버리는 비단신을 신고 산 세월이 길었다. 그것도 형편이 여의치 못해 병중인 것을 핑계삼아 대부분의 시간을 침상 위에서 보냈다. 운이 좋아 서책을 얻어 읽으면 조금 덜 심심하였으나 그 마저도 없으면 그냥 하루 종일 침상에 앉아 열리지 않는 장지문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주자서가 신발을 신기 위해 일어나자 온객행이 또 부산을 떨며 족건을 가져와 신겨주며 말했다.
“조금 클지 모르니 족건을 신으세요.”
주자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온객행이 하는 대로 두었다. 족건을 신고도 멀뚱히 있는 주자서를 빤히 보던 온객행은 웃으며 신발을 신겨주었다.

한참 주서를 이리저리 뜯어보던 온객행은 시선을 내려 주자서의 가슴팍을 보았다가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하얀 내의만 입고 있는 주서는 아슬아슬해 보여서 괜히 온객행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온객행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중추절에 입으라고 아버지께서 보내주신 푸른 비단 옷을 꺼내 주서에게 입혔다. 주서가 일어서니 온객행과 거의 비슷하게 키가 컸다. 온객행은 점점 구부정해지는 주서의 자세를 등허리에 손을 얹어 고쳐가며 옷을 입혔다. 주서는 시중을 받는 것이 익숙해 보였다. 온객행이 겉에 두르는 장포를 입히자 귀티나는 공자로 보이기 시작했다. 풀어진 머리를 정리할까 하다가 그가 며칠 굶었다는 의원의 말이 떠올라서 온객행은 주서의 소매를 잡아 탁자로 데려가 앉히고 말했다.
“일단 드시오. 시장하지 않으십니까?”

주자서는 온객행이 가져온 소반에 죽을 보고 허기가 일었다. 아직도 김이나는 고소한 잣냄새가 나는 죽이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반대편으로 가서 앉았다. 숟가락을 들어 잣죽을 뜨며 말했다.
“제가 위장병이 있어서 일단 죽으로 속을 달래 볼까 하는데 어떠십니까?”
주자서는 자기 앞에 있는 죽그릇을 보다가 머뭇거리며 숟가락을 들었다. 온객행은 주자서가 하는 행동을 뚫어져라 관찰하며 잣죽을 먹었다. 온객행이 잣죽을 다 비우고 한참 후에 하인이 들어와 등롱을 밝힐 때까지 주자서는 죽 한 그릇을 전부 비우지 못했다. 중간중간 기침을 해가며 겨우 죽 한그릇을 비우는 것을 본 온객행이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주공자께서도 위장병이 있으십니까?”
주자서는 이번에도 망설이다가 그냥 그렇다고 대답했다.

주자서는 너무 오랜만에 꾸미지 않은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조금 질린 참이다. 누가 들어도 사내의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과 이렇게 길게 대화를 한 것도 언제 마지막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오랜만에 느껴지는 포만감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중추월인데 벌써 꺼내 놓은 화로 때문이었을까? 주자서는 잠이 쏟아져 눈을 뜨고 있기가 힘들었다. 주자서는 탁자에 고개를 괴고 등롱을 보았다. 중명원에서 주자서가 가장 많이 한 일이다. 등롱을 보고 있기. 그것도 나중에는 기름이 아까워서 원하는 만큼 하지 못했다. 주자서는 온객행이 나가는 소리도 듣지 못하고 스르르 잠에 빠졌다.

온객행은 죽그릇을 들고 방을 나가면서 탁자에 고개를 괴고 등롱을 보고 있는 주서를 보았다. 위태롭고 처량하다. 사내인것 같으면서 여인같다. 고관대작들 사이에서는 남첩을 들이는 것이 유행이라 하던데 혹시 그는 누군가의 첩이었을까? 주서의 움푹 패인 눈두덩이와 볼에 살이 차올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온객행은 아직 알 수 없었다.

아름다운 사람

詩經 國風 衛風 碩人
시경 국풍 위풍 석인; 아름다운 사람

碩人其頎 衣錦褧衣
저 미인 키도 크고 날씬한데 비단에 엷은 홑옷 입었네.
齊侯之子 衛侯之妻
제후의 따님이며 위후의 아내요,
東宮之妹 邢侯之姨 譚公維私.
동궁의 누이며 형후의 처제요 담공의 처형이시네.
手如柔薺 膚如凝脂 領如蝤蠐 齒如瓠犀
손은 부드러운 띠싹 같고 살결은 기름처럼 보드랍고 목은 흰 나무벌레 같고 이는 박씨처럼 하얗고요.
螓首蛾眉 巧笑倩兮 美目盼兮.
매미같은 이마에 나방같은 눈섭 곱게 웃으니 보조개 지고 예쁜눈은 흑백이 또렷하네.
碩人敖敖 說于農郊
훌륭하신님 날씬하시고 도성 밖에 머물러 사신다네
四牡有驕 朱幩鑣鑣 翟茀以朝
수레 끄는 네 필 말은 장대하고 붉은 끈을 감은 재갈은 아름답고 꿩깃 덮개 덮고 조정에 간다네.
大夫夙退 無使君勞
대부들은 일찍 물러나며 임금님을괴롭히지 말자고 하셨다네.
河水洋洋 北流活活
강 물은 넘실거리고 북쪽으로 콸콸 흘러가고,
施罛濊濊 鱣鮪發發 葭菼揭揭
물 깊은 곳에 고기 그물 던지면,잉어 붕어때가 파닥거리고, 큰 갈대작은 갈대자랄데로 자라있네.
庶姜孼孼 庶士有朅
꾸미고 따라온 여인들 곱기도 하고 수행 관원들도 늠름하게 전송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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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碩人(석인)은 장강(莊姜)을 말하고 頎(기)는 훤칠하게 키가 큰 모양을 뜻한다.
  2. 錦(금)은 문채가 있는 옷이고, 褧(경)은 홑옷이니, 錦衣(금의)에 褧衣(경의)를 더한 것은 문채가 더욱 드러나기 때문이다.
  3. 東宮(동궁)은 태자가 거처하는 궁궐이니 제(齊)나라 태자 득신(得臣)이다.
  4. 석인은 태자와 같은 모친의 소생으로 매우 귀한 신분임을 말한 것이다. 뒤에 태어난 여자 형제를 妹(매)라 하고 妻(처)의 姊妹(자매), 즉 처제나 처형을 姨(이)라 하고 형부나 자부를 私(사)라 한다.
  5. 띠풀이 처음 난 것을 荑(이)라 하는데, 부드럽고 새하얀 것을 말한 것이다.
  6. 凝脂(응지)는 기름이 차가운 기운에 엉긴 것이니, 하얗게 빛나는 살결을 말한 것이다.
  7. 領(영)은 줄기이다.
  8. 蝤蠐(추제)는 하얗고 긴 나무굼뱅다.
  9. 瓠犀(호서)는 하얀 박속에 박힌 씨로 미인의 고르고 반듯하게 밝힌 하얀 치아를 뜻한다.
  10. 螓(진)은 그 이마가 넓고 아름다운 작은 매미로 미인의 이마를 말하고 蛾(아)는 누에이니, 그 눈썹이 가늘고 길며 동그랗게 구부러졌음을 뜻한다.
  11. 倩(천)은 보조개가 아름다운 것이고, 盼(반)은 눈동자의 흑백이 분명한 것이다.
  12. 敖敖(오오)는 키가 훤칠하고 아름다운 모양이다.
  13. 說(세)는 머무러 유숙함이다.
  14. 農郊(농교)는 도성 밖 근교다.
  15. 四牡(사모)는 수레를 끄는 네 마리의 말이고 驕(교)는 말이 씩씩한 모양이다.
  16. 幩(분)은 말의 재갈을 장식하는 천으로 주분은 군주되는 사람이 달 수 있는 장식이다.
  17. 적(翟)은 翟車(적거)이니, 부인이 타는 수레는 꿩깃으로 수레를 장식한다.
  18. 茀(불) 부녀자들이 타는 수레의 앞뒤를 가리는 포장이다.
  19. 夙退(숙퇴)은 일찍 물러감이다.
  20. 大夫夙退(대부숙퇴) 無使君勞(무사군로)는 대부들은 일찍 조회을 끝내고 퇴궐함으로 해서 위후(衛侯)가 새로 얻은 어여쁜 부인과 함께 지낼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는 뜻이다.
  21. 하수(河水)는 제(齊)나라의 서쪽과 위(衛)나라의 동쪽으로 흐르다가 북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바다로 들어가간다.
  22. 洋洋(양양)은 성대한 모양이요, 活活(괄괄)은 물이 세차게 흐르는 모양이다.
  23. 鱣魚(전어)는 용과 흡사하고 노란색의 머리에, 예리한 입이 턱 아래에 있으며, 등 위와 배 아래에 모두 껍질이 있으니, 큰 것은 천근이 넘는 것도 있다.
  24. 鮪(유)는 전어와 흡사한데 작고 색은 청흑색이다.
  25. 發發(발발)은 기가 성한 모양이다.
  26. 菼(담)은 갈대인데 , 또한 荻(적)이라고도 한다.
  27. 揭揭(걸걸)은 기름이다.
  28. 庶姜(서강)의 서(庶)는 무리이니 장강을 따라온 몸종들을 뜻한다.
  29. 孽孽(얼얼)은 화려하게 치장한 모양이고 庶士(서사) 역시 장강을 호위하기 위해 따라나선 무사들이다.
  30. 朅(흘)은 씩씩한 모양이다.
위의 내용은 모시전을 인용한 것이다. 출처

이 시는 부(賦)로 제장공(齊莊公)의 딸 장강(莊姜)이 위장공(衛莊公)에게 시집갈 때의 모습을 노래한 시가다. 위장공은 위무공(衛武公)의 아들로 기원전 757년에 즉위하여 735년에 죽은 위나라의 군주다. 위장공이 자식을 낳지 못한 장강을 멀리하고 다른 부인을 얻어 총애하자 위나라 국인들이 그것을 안타깝게 생각해서 이 노래를 지어 불렀다. 춘추좌씨전에도 내용이 나오는데 다음과 같다. 출처

衛莊公娶于齊東宮得臣之妹 曰莊姜.
위장공이 제나라 동궁득신(東宮得臣)의 누이를 아내로 맞이하였으니 그가 장강이다.
美而無子 衛人所爲賦碩人也 又娶于陳 曰厲嬀
미인이었으나 아들이 없으니, 위나라 사람이 그를 가엾게 여겨 석인을 지었다.위장공이 또 진(陳)나라에서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그가 여규(厲嬀)이다.
生孝伯 早死 其娣戴嬀 生桓公 莊姜以爲己子 公子州吁 嬖人之子也
효백(孝伯)을 낳았으나 일찍 죽었고,여규의 동생 대규(戴嬀)가 환공(桓公)을 낳으니, 장강은 환공을 자기의 아들로 삼았다. 공자주우(公子州吁)는 폐인(嬖人;첩)의 아들이다.
有寵而好兵 公弗禁 莊姜惡之
장공은 첩을 총애하여 그아들이 병사를 좋아하는데도 금하지 않으니, 장강이 그를 미워하였다.

후에 다른 해석을 한 사람들은 석인을 덕있는 사람으로 바꾸었는데 당시 상황이나 쓰여진 배경을 봤을 때, 석인을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해석하는게 개인적으로 제일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덕있는 사람이라고 해석한 이유는 시경 국풍 패풍의 녹의; 푸른 옷에 나오는데, 이 시는 위장공이 첩에게 빠져 정실부인인 장강을 돌보지 않아 첩보다 빛나고 정숙한 현부인인 장강의 쓸쓸함을 노래한 것이다. 장강이 정말 대단한 미모였다고 생각하는게 얼마나 예뻣길래 시경에 장강을 주제로 한 시가 2개나 있을까? 게다가 다른 두 나라에서! 석인은 위풍에 있지만 녹의는 패풍에 수록되어 있다.

이 시에 나오는 구절이 후대에 미인을 표현하는 관용어로 많이 사용 되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螓首蛾眉(진수아미)이다. 진수는 솜털이 보송보송 난 참매미의 몸통같은 이마를 가리키고, 아미는 누에나방의 더듬이처럼 가늘고 길게 굽어진 예쁜 눈썹을 뜻한다. 그 모습이 초승달을 닮아 아미월(蛾眉月)이라고도 불리며 미인을 뜻하는 대명사가 되었다. 요즘의 미의 잣대로 생각하기에 매미같은 이마는 뭐고 누에나방 같은 눈썹은 뭘까 싶다. 초승달같은 눈썹 하면 좀 무슨 뜻인지 알겠는데 매미같은 이마는 대체 뭘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