裁爲合歡扇 마름질하여 부채로 만드니
온객행은 장포를 벗어 주서에게 둘러주며 품에 안았다.
“주서.”
주서는 온객행의 손에 이끌려 마차에 타면서도 아무말 하지 않았다. 온객행은 마차에 타기전에 마부에게 뭐라고 말을 하고 마차 안에 먼저 앉아 있는 주서의 바로 옆자리에 와서 앉더니 주서의 허리춤에 팔을 두르고 꼭 붙어 앉았다. 주서는 온객행이 둘러준 장포를 손에 꼭 쥐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온객행은 한참 주서의 목덜미에 머리를 기대고 있다가 말했다.
“정말 걱정했어요. 혹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닌지… 정말 다행입니다.”
그리고 주서를 놓아주고는 이리저리 보더니 물었다.
“어디 다치신 데는 없습니까?”
온객행은 고개를 들지 않는 주서가 야속해서 조금은 애원하듯 고개를 숙여 주서와 눈을 맞추며 그를 불렀다.
“주서….”
주서는 대답없이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온객행은 그의 물음에 답해준 그의 몸짓이 기꺼워서 다시 주서를 끌어안고 말했다.
“주서 하고 싶은 것은 저에게 다 말해주세요. 제가 다 해드리겠습니다.”
주서는 온객행의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온객행은 그를 끌어안고 있느라 그것을 보지 못했다. 온객행은 신발을 신지 않은 흙이 잔뜩 묻은 주서의 발을 보고 안타까워 자기 신발을 벗어 건네려다 멈췄다.
온객행의 마차는 조금 서둘러서 동시(東市)를 지나 통금이 시작되는 삼경(三更; 23-01시)전에 장안성의 동문 춘명문(春明門)을 나왔다. 장안성을 나와 속도를 올린 마차는 자정이 다 지나서 장안성 북쪽에 있는 온가의 별장인 천수장원(千樹莊園)에 도착했다. 위수(渭水)와 파수(灞水)가 만나는 곳으로 토지가 매우 비옥하여 이곳에서 나는 작물은 황궁에 납품하는 특상품이다. 너무 늦은 시간이라 천수장원의 하인들도 모두 잠자리에 든 모양이었다. 어둠이 내려 앉은 장원 저택에 장명등(長明燈)만 켜져 있다. 온객행과 함께 온 마부가 저택에 기별하자 곧 장원을 관리하는 가령(家令)이 급하게 나와 온객행을 맞이했다. 마차에서 내리는 주서의 시중을 드는 온객행을 본 가령이 온객행의 호위를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주서를 안아 들려는 온객행을 멈춘 호위는 가령에게 어서 내원으로 길을 안내하라고 했다. 온객행은 아쉬운 듯 주자서의 옆에 꼭 붙어 서서 말했다.
“화로를 준비해주게. 간단히 요기할 음식도 부탁하네. 위장에 무리가 가지 않는 음식으로 부탁하네.”
길을 안내하던 가령이 고개만 돌려 온객행의 옆에 있는 주서를 힐끔보고 호위를 보았다. 호위는 조용히 고개를 젓고 길을 재촉했다.
내원에 도착하여 가령은 온객행과 손님을 사랑채에 모시고 하인 몇 명을 불러 내실을 정리하게 했다. 온가의 식구들은 보통 매우 바빠서 공적인 일이 아니면 장원에 잘 오지 않았다. 풍년제를 지내는 봄이나 수확이 끝나고 정산을 위한 늦가을이 아니면 주인이 머무는 내원은 계속 비어 있었기 때문에 조금 정리가 필요했다. 게다가 셋째공자는 상단일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더욱 더 보기 힘들었다. 내원에 도착한 온객행은 주서를 평상에 앉혀 놓고 혼자 부산을 떨었다. 보이는 하인을 붙잡고 이것 저것 필요한 것을 말했다. 그런 온객행을 보고 온객행의 호위가 콧방귀를 뀌었다. 온객행이 호위에게 다가가 말했다.
“부몽. 이제 가서 쉬어.”
나부몽은 온객행의 손님을 한번 더 위아래로 훑어보고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짓고 내원을 나갔다. 곧 하인이 들어와 차를 준비하며 주서를 힐끔힐끔 훔쳐봤다. 온객행은 자신이 하겠다며 하인을 내쫓고 열어 놓은 장지문도 모두 닫았다. 둘만 남은 내원 사랑채에 침묵이 내려 앉았다.
온객행은 주서가 없어진 것을 알고 화가 났었다. 그를 다시 만나면 묻지 못했던 것을 전부 묻고 목숨을 구해주었으니 평생 은혜를 갚으라고 할 참이었다. 그런데 주서가 비연각의 사졸들에게 붙잡혀 있는 것을 본 순간 온객행이 했던 생각은 한순간에 휘발되었다. 비연각의 사졸들이 온객행에게 돈이야기를 꺼냈을 때 온객행은 살아생전 처음으로 신의상단 아들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겨우 금 반냥. 비연각의 사졸들이 온객행에게 그의 전재산을 내놓으라고 했어도 온객행은 전부 다 내어 줬을지도 모르겠다. 주서를 품에 안았을 때 온객행은 채워지지 않았던 그의 마음이 처음으로 충만했다. 온객행은 주서가 혹시 자신에게 부채감을 가지면 어쩌나 생각하다 부채감으로 그를 옆에 묶어 둘 수 있다면 그것도 썩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온객행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을 주서에게 건네고 말했다.
“주서. 일단 몸을 좀 녹이세요. 춥지는 않으십니까?”
주서는 고개를 끄덕이고 온객행이 건네는 찻잔을 받았다. 온객행은 주서가 자신이 주는 무언가를 받았다는 것이 기뻐서 금방 기분이 좋아졌다. 차를 거의 다 마셔갈 때 즈음 하인이 요기거리를 가지고 기별했다. 온객행은 일어나 장지문으로 가서 소반을 받아 가지고 돌아와 다시 장지문을 닫았다. 온객행은 슬슬 하인들이 주서를 쳐다보는 시선이 짜증나는 참이다.
온객행은 주서의 손에서 찻잔을 받아 옆에 협탁에 두고 그를 일으켜 탁자에 앉히고 소반에 있는 타락죽(駝酪粥)을 권했다. 주서는 온택에서처럼 또 물끄러미 자신의 앞에 놓인 그릇을 한참 보고만 있었다. 온객행은 자기분의 타락죽에 꿀을 넣으며 말했다.
“저는 달콤한 것을 좋아해서 꿀을 넣어 먹습니다. 주공자도 꿀을 넣어 드릴까요?”
주서는 온객행이 죽을 다 먹을 때까지도 움직이지 않다가 온객행이 죽을 다 먹고 숟가락을 내려놓자 고개를 들고 온객행을 똑바로 보고 말했다.
“온공자. 저는 온공자께 드릴 것이 없습니다.”
온객행은 주서의 말에 조금 기분이 상했다. 그러다 온객행이 주서에게 받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했다. 온객행은 주서에게 뭔가 받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온객행은 그 마음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몰라서 머리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한동안 말없이 주서를 보고 있던 온객행은 다급하게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주서. 아니예요.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니예요.”
주서는 온객행의 태도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온객행은 그의 몸짓이 안타까워 자리에서 일어나 주서가 앉은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그의 손을 잡았다. 온객행이 마음을 전해보려고 하는데 가령이 사랑채 밖에서 기별했다.
“공자님. 내실이 준비되었습니다.”
온객행은 주서의 숙인 얼굴을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어깨에 팔을 둘러 일으키고는 말했다.
“주서. 오늘은 밤이 늦었으니 일단 피로를 푸세요.”
그리고 주서를 내실로 안내했다. 내실에 도착한 온객행은 주서를 침상에 앉히고 그가 두르고 있는 장포를 걷어냈다. 온객행은 하인에게 부탁한 옷가지를 찾아서 주서에게 건네고 가령과 하인과 함께 내실을 나가며 말했다.
“주서. 편히 쉬세요.”
온객행은 가령과 하인을 먼저 보내고 내실 장지문 밖에 한참 서서 내실의 등롱이 꺼질 때까지 기다렸다. 온객행은 자기 마음이 대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방법이 무엇이던 옆에 묶어 둘 수 있으면 되는 줄 알았다. 분명히 부채감으로 묶어 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주서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 순간 온객행은 그 생각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 주서를 향한 선의가 그를 향한 마음이 퇴색하는 기분이다. 온객행은 주서가 자신에게 뭔가를 갚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수용할 수 없었다.
온객행의 행동은 주자서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온객행은 끊임없이 주자서를 걱정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다른 사람의 걱정을 받아본다. 남자들에게 끌려갈 때만해도 곧 죽겠구나 생각했는데, 그 사이 정이 들었는지 다시 만나게 된 온객행의 얼굴이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그러다 남자들이 한 이야기가 떠올라 그냥 반가울 수만은 없었다. ‘장안성에서 대가 없는 호의는 없다….”
온객행은 남자들에게서 돈을 주고 주자서를 샀다. 금 반냥이면 열개의 대대(大隊; 열 오(伍)로 편제한 50여 명의 군사)를 사흘간 먹일 수 있는 금액이다. 사람을 사고 판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도성내에서 그러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대로 남자들에게 끌려갔다면 주자서는 대체 무슨 일을 했을까? 주자서는 갑작스러운 한기에 침상의 이불을 손으로 쓸었다. 그러다 흙이 잔뜩 묻은 족건이 눈에 띄었다. 불편했던 가죽신발을 어디에 두었더라 생각하며 주자서는 침상에 몸을 뉘였다. 몸에 닿는 비단의 감촉이 부드러워서 주자서는 잠깐만 눈을 붙이고 일어나서 어떻게 할지 정할 참이다. 주자서는 침상 옆에 놓아둔 화로의 탄이 타는 소리를 들으며 방에 켜 놓은 등롱의 기름이 다하는 것을 보았다. 등롱이 꺼지고도 한참동안 장지문 밖에 서있는 사람의 기척이 났다. 주자서는 ‘호위를 세워 두었구나.’ 생각하고 잠이 들었다. 잠결에 들린 한숨소리가 온객행의 것이라 주자서는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다음날 주자서는 해가 중천에 떠서야 겨우 눈을 떴다. 누군가 자고 있는 그의 옷을 갈아 입혔는지 전에 입고 있던 옷보다 조금 두꺼운 내의와 깨끗한 족건을 신고 있다. 주자서는 다른 사람이 자신의 몸을 만졌는데도 푹 잔 것이 무안해서 한동안 누운 채로 꼼짝하지 않았다. 황궁에 있을 때 주자서의 일과는 통금이 끝나는 묘시(卯時; 5-7시)에 일어나 늦지 않게 부태후께 문안을 드리고, 태후께 문안인사를 오는 다른 후궁들의 인사를 받았다. 그리고 다시 중명원으로 돌아와 해가 뜰때까지 조금 더 자다가 운이 좋으면 끼니를 챙기고 그것이 아니면 중명원의 내원을 조금 걷다가 불교에 심취한 태후께 바칠 불공을 베껴 썼다. 해가 지면 다시 태후께 인사를 하고 자신전에서 중명원으로 향하는 길 위에서 황혼을 조금 구경하다 처소로 돌아갔다. 처소에서도 여유가 되면 등롱을 켜고 유경을 읽었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중명원은 한겨울보다 가을이 더 추웠다. 겨울에는 부태후가 내전을 보살핀다는 이유로 각 후궁의 거처마다 목탄을 지급했지만 가을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명원에는 후궁전에서 보기 흔한 차를 끓이는 화로도 없었다. 주자서는 문득 어젯밤에 보다 잠든 화로를 보았다. 누군가가 화로를 채웠는지 빨갛게 타고 있는 목탄이 보인다.
내실의 누군가가 주자서가 잠에서 깬 것을 눈치 챘는지 침상으로 다가와 휘장을 열었다. 환하게 웃는 어린 얼굴. 온객행이다. 주자서는 즐거워 보이는 그의 얼굴이 기꺼워 자기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주자서가 웃는 모습을 보고 온객행은 침상에 걸터앉아 주자서의 이불을 걷고 말했다.
“아서. 어서 일어나. 밥먹어. 벌써 오시(午時 11-13시)가 넘었어.”
주자서는 부르는 호칭에 기막혀서 온객행을 보았다. 온객행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주자서의 몸 여기저기를 더듬으며 옷을 입혀주고 신발도 신겨주었다. 그리고는 탁자에 놓여있는 찻주전자를 데워 주자서에게 차를 건넸다. 주자서는 어젯밤과 사뭇 다른 분위기에 휩쓸려 찻잔을 받았다. 주자서가 따뜻한 차로 입을 축이는 동안 하인들이 내실로 음식을 가지고 들어왔다. 온택에서와 달리 여러가지의 음식이 나왔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옆에 앉아서 앞접시에 이런 저런 음식을 덜어주며 음식을 설명했다.
“아서. 어제 위수에서 잡은 백련어(白鰱魚)야. 연잎에 싸서 찐 것이라 향긋하고 아주 맛이 좋아.”
주자서는 온객행이 건넨 앞접시를 받고 온객행을 보았다. 온객행은 주자서를 보고 웃더니 앞접시에 있는 음식을 집어 주자서의 입 속에 넣어 주었다. 주자서는 입안에 들어온 음식을 뱉을 수는 없어서 씹어 삼키며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했다.
온객행이 말로 권해서 주자서가 받아주지 않으면 온객행은 그 음식을 주자서의 입 속에 넣어 주었다. 주자서는 고개도 흔들어보고 말로도 거절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팔과 허리춤을 더듬으며 말했다.
“아서. 이렇게 말라서 바람이 불면 날아가겠어.”
주자서가 눈썹을 찌푸리자 온객행이 웃으며 주자서의 미간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아서, 예쁜 눈썹을 왜 찌푸리고 그래.”
주자서는 온객행의 태도에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났다. 온객행은 주자서가 웃는 것을 보고 같이 웃었다. 온객행의 웃음소리가 청량(淸亮)해서 주자서는 어색하고 쑥스러웠다. 정말 오랜만에 속이 더부룩할 정도로 식사를 한 주자서는 포만감에 밀려오는 졸음을 참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온객행이 주자서를 따라 일어나며 장지문 밖에 서 있는 하인에게 탁자를 치우게 했다.
온객행은 주자서에게 차를 권하며 평상에 앉았다.
“아서. 숙차도 좋지만 가끔은 생차도 괜찮지?”
온객행이 건넨 차는 동정공부차(洞庭功夫茶)다. 조황후가 좋아하는 차라서 주자서도 익숙하다. 공부차는 향도 좋고 은은하게 단맛이 나서 잘 모르고 빈속에 마시다 보면 위통을 일으킨다. 주자서가 생차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주자서가 온객행이 건넨 차를 받기만 하고 마시지 않자 온객행이 자신의 잔을 주자서의 손에 들린 잔에 부딪혀오며 말했다.
“아서. 한시도 낭비하지 말고 즐거움으로 흐르는 세월을 채우자.(1)”
온객행은 단숨에 잔을 들어 비우고 빈 잔을 주자서에게 보여주며 웃었다. 빈 잔을 본 주자서는 찻잔의 차가 다 식을 때까지 온객행을 보고 있다가 잔을 비우고 온객행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그대에게 권하니, 종일 실컷 취하세.(2)”
주자서의 말에 온객행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하지만 금방 얼굴을 꾸며낸 온객행이 주자서의 손에 들린 찻잔을 빼앗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서는 아직 안돼.”
온객행은 주자서의 손을 잡고 내실 밖으로 나왔다.
온가의 별장을 천수장원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곳에 천 그루의 다양한 나무를 심었기 때문이다. 심은 나무 중에는 관중(關中)에서 보기 힘든 나무들도 있었고 과실과 꽃을 위한 나무도 있었다. 한창 철인 산사나무에 꽃사과가 잔뜩 열렸다. 온객행은 별장 이곳 저곳을 다니며 주자서에게 설명해주었다. 주자서는 온객행의 빠른 발걸음이 조금 버거웠지만 즐거웠다. 온객행이 새로 준비해준 신발은 주자서의 발에 꼭 맞았다. 온객행이 준비해준 새로운 옷 역시 전에 입었던 옷보다는 소매가 짧고 옷감이 거칠었지만 움직이기 훨씬 편했다. 여인이 입는 예복을 입지 않는 것만으로도 넘어지는 것을 걱정하지 않고 걷는 것만으로도 주자서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온객행은 주자서를 ‘아서’ 라고 부르기 시작한 이후로 불편한 대화를 하려는 기색이 보이면 얼른 화두를 돌렸다. 주자서는 소년 같이 앳된 온객행이 싫지 않아 온객행과 함께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유예하는 중이다. 며칠동안 주자서는 정해진 시간에 먹고 자고 온객행의 시중을 받으며 천수장원을 유람했다. 온객행은 한순간도 주자서를 혼자 두지 않았다. 심지어 잠도 평상 위에서 내실에서 주자서와 함께 잤다. 주자서는 객의 위치이기도 하고 같은 침상을 쓰는 것도 아니라 크게 개의치 않았다.
주서는 며칠 잘 먹이고 재웠더니 뺨에 살이 올랐다. 화롯불에 빨갛게 익은 뺨을 만지고 싶어서 먼저 나아간 손으로 온객행은 주서의 머리를 쓸어 넘기고 말했다.
“아서. 머리를 정리할까?”
그러면 주서는 온객행의 손길을 뿌리치기는커녕 뒤돌아서 머리를 내어주었다. 한참 머리를 매만져 주면 주서는 스르르 잠이 들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조는 모습을 면경으로 보던 온객행은 주서가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원래 말이 많지 않은 사람인지 갑작스럽게 좁힌 거리감을 어색해 하더니 주서는 수긍하듯 온객행을 받아주었다. 온객행은 기뻐서 주서에게 더 많은 것을 해주고 싶어졌다. 주서의 몸이 기울어 지는 것을 허리에 팔을 둘러 받은 온객행이 그를 들어 침상 위에 눕혔다. 주서는 온객행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온객행은 주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두 알고 싶었다. 이불을 덮어주고 뺨을 쓸어보았다. 주서는 바깥을 돌아보고 오면 항상 지친 듯 이르게 잠자리에 들었는데 잠이 들면 잘 깨지 않았다. 산사나무를 구경하고 온 날 밤 온객행은 밤새 주서의 침상 곁에 앉아서 그가 잠자는 얼굴을 구경했다. 그의 누에나방 같은 눈썹과 날렵한 콧날, 조금은 안타까운 뺨도 쓸어보고 흘러내린 머리도 넘겨주었다. 계속 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는 얼굴이다. 조금 차오른 뺨이 기뻐서 온객행은 피곤도 잊은 채 주서를 보았다.
날이 화창하고 날씨가 좋았다. 온객행은 주서와 함께 내원에 나와 있다가 물었다.
“아서. 말을 탈 줄 알아?”
주서는 저 멀리 구름 사이로 사라지는 기러기떼를 보며 답했다.
“그럼. 나는 우리 군영에서 말을 제일 잘탔어.”
온객행은 주서가 말한 그 군영이 어디인지 혀끝에 올라온 물음을 삼키고 말했다.
“그럼 아서, 말을 타고 위수를 구경하고 올까?”
온객행의 말에 주서가 고개를 돌려 온객행을 보고 웃었다. 온객행은 기분이 좋아져서 말했다.
“아니면 함양성에 갈까? 아서?”
주서는 다시 대답없이 고개를 돌려 하늘을 보았다. 주서는 하늘을 볼 때가 많았다. 처음에는 달을 구경하나 했다. 그 다음에는 구름을 보고 있나 했다. 주서는 그냥 탁 트인 하늘을 갈망하듯 보고 있을 때가 많았다. 온객행은 혹시 자기가 그를 이곳에 속박하고 있는 것인가 죄책감이 들어 그에게 몇번이나 외출을 권유했지만 주서는 항상 아무 말없이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온객행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서의 손을 잡고 마구간으로 그를 이끌었다.
“아서, 말을 타보자. 기분이 좋아질 거야.”
주서는 말을 보더니 능숙하게 말을 다뤘다. 말을 쓰다듬는 손길이나 안장을 매만지는 솜씨가 그가 말을 다루는 것이 익숙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주서가 말에 오르려고 하다가 휘청이는 것을 본 온객행이 얼른 다가가 그의 허리를 잡았다. 양손에 다 들어오는 허리는 여인처럼 가늘다. 주서는 당황하지 않고 온객행의 도움을 받아 등자에 발을 얹고 안장에 앉았다. 몸을 이리저리 틀어 자세를 잡더니 가볍게 등자를 굴러 말을 몰았다. 온객행도 얼른 안장 위에 올라 주서 곁으로 다가가 말했다.
“아서 내가 위수로 나가는 지름길을 알아.”
그리고는 앞장서서 말을 달렸다. 장원의 북문을 나와 북쪽으로 함양으로 향했다. 가을에는 위수의 물이 얕기 때문에 나오는 길이 있었다. 물이 말라 드러나는 갯바닥은 중간중간 늪이 있었기 때문에 길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달리면 위험할 수 있었다. 온객행은 말을 조금 달려 위수 근처에 도착했을 때 말을 멈추고 주서에게 말했다.
“아서! 조심해 여기부터는 늪이라 빠질 수 있어.”
주서는 고삐를 당겨 말을 멈췄지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말이 멈추지 않았다. 온객행이 놀라서 주서를 부렀다.
“아서!”
주서가 더욱 고삐를 세게 당기며 말했다.
“계행(啓行)하시오!”
주서의 목소리는 그동안 온객행이 들어온 그 어떤 목소리보다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의 당황을 느낀 온객행이 서둘러 주서의 앞으로 말을 달려나가 길을 이끌었다.
온객행과 주서를 따라오던 호위들도 뒤쳐져 위수 유역 어디인가에서 헤어졌다. 말이 흥분을 가라앉히고 멈췄을 때 저 멀리 함양성이 보였다. 말의 등에 바짝 엎드려 숨을 고르는 주서에게 다가가 온객행이 말했다.
“오늘은 함양성에서 하룻밤 지낼까요?”
주서는 지친 기색이 만연했다. 온객행은 걱정이 되어 훌쩍 말에서 내려서 주서가 탄 말의 고삐를 잡았다.
“아서?”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주서가 힘겹게 몸을 세워 온객행에게 뭐라고 답하려는 순간 주서의 눈동자가 뒤로 넘어가며 그의 몸이 기울었다. 온객행은 잡고 있던 고삐도 놓아버리고 떨어지려는 주서의 몸을 품에 안았다.
“주서!”
온객행은 근처 나무에 주서를 내려놓고 타고온 말의 고삐를 나무에 묶어 두었다. 그러다 잠시 나오려고 염낭을 챙기지 않은 것이 떠올랐다. 같이 나온 하인과 호위는 보이지 않고 날은 저물어 가고 있어서 온객행은 조금 초조해졌다. 온객행은 다시 주서를 눕혀 놓은 곳에 가서 주서의 상태를 살폈다. 너무 갑작스럽게 말을 타서 그런 것일까 주서의 몸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온객행은 주서의 손과 팔을 이리저리 주무르며 그가 의식을 되찾기를 바라며 그를 불렀다.
“아서! 아서! 정신차려봐. 아서!”
주자서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주자서는 모닥불 앞에 앉아 있었다. 어깨에서 느껴지는 숨결에 주자서가 고개를 돌리자 온객행의 잠든 얼굴이 보였다. 온객행은 주자서를 뒤에서 안은 채로 앉아서 모닥불을 보고 있었다. 주자서는 어찌해야 할지 몰라 멍하게 모닥불을 보았다. 주자서가 움직이는 것을 눈치챈 온객행이 고개를 들고 일어나 주자서의 몸에 둘렀던 팔을 펴서 기지개를 펴며 말했다.
“아서, 정신이 좀 들어?”
주자서가 온객행의 품을 벗어나려고 하자 온객행이 주자서의 허리에 팔을 둘러 그를 안으며 말했다.
“아서. 벌써 해가 다졌어. 너무 추워.”
주자서는 온객행을 뿌리칠 힘이 없어서 온객행에게 몸을 기대고 앉아버렸다. 온객행은 주서의 어깨에 고개를 괴고 모닥불을 보며 말했다.
“급하게 나오느라 염낭도 잊은거 있지? 함양성에는 내가 아는 사람이 없어서… 조금 기다리면 부몽이 올 줄 알았는데 안 오네.”
주자서는 온객행의 말을 듣고 피식 웃어버렸다. 주자서의 웃는 소리가 기분 좋았는지 온객행이 주자서를 더 꼭 안으며 말했다.
“아서. 돌아갈 때는 말을 같이 타야겠어.”
주자서가 고개를 흔들고 말했다.
“아닙니다. 저는 괜찮아요. 천천히 가면 되지요.”
온객행은 주자서의 대답을 듣지 못했다는 듯 주자서의 목덜미에 얼굴을 비볐다. 주자서는 온객행이 어린아이처럼 투정을 부린다고 생각했다. 단지 그것이 무엇에 대한 투정인지 알 수가 없을 뿐이다.
모닥불에 나무를 더 넣지 않으면 꺼져버릴 것이다. 주자서는 걱정이 되어 몸을 움직였다. 온객행은 그제야 주자서를 놓아주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주자서의 팔을 잡아 그를 일으키며 말했다.
“아서, 정말 탈 수 있겠어? 너무 무리하면 안돼. 갑작스럽게 몸을 움직이면 근골이 놀라서 병을 얻을 수도 있어.”
주자서는 내심 이미 병든 근골에 다른 병이 든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겠나 싶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아마 제대로 제때 힘을 주지 못해서 말이 멈추지 않은 것이다. 주자서는 다시 땅을 딛고 일어서며 느껴지는 다리 통증에 조금 놀랐다. 예전에는 걷는 것만큼 쉽고 당연했던 말타기가 그를 이렇게까지 지치게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주자서는 작게 한숨을 쉬며 모닥불 근처에 놓인 뗄감을 모닥불에 던져 넣었다. 주자서는 온객행과 함께 말을 탄다는 사실 자체가 조금 부끄러웠다. 어린 아이도 아니고 여인도 아닌데 다 큰 남자 둘이 같이 말을 타는 것은 어폐(語弊)가 있었다. 모닥불을 쬐면 조금 나아지겠거니 싶은 생각에 주자서는 쪼그려 앉으려다 털썩 주저 앉고 말았다.
말을 살펴보고 온 온객행이 모닥불 앞에 주저 앉아 있는 주자서를 발견하고 다가와 말했다.
“아서. 노숙을 하기에 아서의 옷이 너무 얇다.”
그러더니 자기가 입고 있던 장포를 벗어 주자서에게 둘러 주었다. 주자서는 눈썹을 찌푸리고 말했다.
“괜찮습니다. 온공자께서 입으세요.”
온객행은 얼른 주자서 옆에 앉더니 주자서의 몸에 둘러진 장포를 조금 덮고 말했다.
“아서. 이렇게 같이 덮으면 되잖아.”
그리고 주자서의 어깨에 팔을 둘러 그를 가깝게 끌어안았다. 온객행의 거리감은 주자서에게 수수께끼와 같은 것이다. 친우라고 하기에는 너무 친밀하고 형제라고 할 만큼 스스럼없지는 않다. 주자서는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고 너무 피곤해서 더는 생각할 힘이 없었다. 온객행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고 모닥불을 보며 말했다.
“온공자께서 저를 아서라 부르시니 저는 온공자를 노온이라 불러야 할까요?”
주자서는 자기가 그 생각을 입밖으로 냈는지 아니면 생각만 한것인지도 구분하지 못했다. 주자서의 어깨에 있던 온객행의 팔은 그의 등을 감싸더니 점점 내려와 주자서의 허리에 둘렀다. 목덜미에 닿는 숨결이 간지럽다고 느끼며 주자서는 다시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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