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扇 第5

入君懷袖 그대의 품속, 소매 드나들며

온객행은 나부몽이 기루의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매우 화가 났다. 기루에서 만났던 기예를 파는 이들에게 하듯이 주서를 대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대체 그들과 주서가 다른 점이 무엇일까 생각해보았다. 정작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없어서 온객행은 한동안 나부몽을 쳐다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오히려 나부몽이 온객행의 반응에 조금 당황한 눈치였다. 나부몽은 찬합에서 음식을 꺼내 탁자에 올려놓고 침상을 보았다. 온객행은 나부몽이 주서를 보는 시선이 기분 나빠졌다. 음식을 모두 꺼내 놓은 나부몽이 침상으로 가려 하는 것을 막은 온객행이 말했다.
“부몽, 여기는 나에게 맡기고 가서 어서 요기해.”
나부몽은 온객행의 다정한 말에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얼굴을 살폈다. 나부몽은 곧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인사한 후에 방을 나갔다.

나부몽이 장지문을 닫고 나가자 온객행이 얼른 침상으로 다가가 주서를 보았다. 주서는 고개를 숙인채로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온객행은 조심스럽게 주서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물었다.
“아서. 왜 그래? 졸려?”
온객행의 목소리에 눈을 번쩍 뜬 주서는 온객행의 얼굴을 보고 희미하게 웃었다.
“노온.”
주서가 부르는 목소리가 애달파서 온객행이 침상에 앉아 주서를 마주보고 말했다.
“아서. 너무 피곤해? 뭐라도 먹어야지.”
온객행은 침상 옆에 가지런히 놓인 신발을 주서에게 신기고 그를 침상에서 일으켰다. 주서는 온객행이 하는 대로 시중을 받으며 온객행을 빤히 보았다. 탁자에 주서를 앉힌 온객행은 얼른 옆에 앉아서 앞접시에 음식을 담았다. 온객행이 하는 것을 보던 주서가 물었다.
“노온. 여기는 극락(極樂)일까요? 나락(奈落)일까요?”
온객행은 영문을 몰라 웃으며 답했다.
“나는 아서랑 극락에 가고 싶어. 우리 나락에는 가지 말자.”
온객행의 대답에 주서가 부스스 웃었다. 온객행도 주서를 따라 웃었다.

다시 온택에서 온객행을 부른 것은 온객행이 장원으로 돌아오고 사흘 뒤였다. 가주가 온객행을 찾는 기간이 짧아지고 빈도가 늘었다. 나부몽은 온객행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고 조금 긴장했다. 나부몽이 말했다.
“손님을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온객행은 한참 말없이 가주의 서신을 보고 있다가 말했다.
“이틀 뒤에 올 테니 떠날 채비를 해.”
나부몽이 온객행을 보고 물었다.
“어디로 가시게요?”
온객행이 다시 표정을 꾸며 웃으며 말했다.
“어디든. 부친이 나를 부르지 못하는 곳으로.”
나부몽은 걱정이 되어 말했다.
“공자, 그것은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습니다.”
온객행이 나부몽의 팔을 토닥이며 말했다.
“부몽은 걱정할 것 없어. 나 없는 동안 아서를 잘 부탁해. 처소를 객실에서 내원으로 옮기는 것도 좋겠어.”
나부몽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확실히 객실에는 눈이 너무 많습니다.”
온객행이 옷매무새를 가지런히 하고 방을 나가며 말했다.
“내가 이틀 안에 돌아오지 않으면 함양성에 가 있어. 평안은장에 내 이름으로 돈을 맡겨 놓았으니 필요한 만큼 써도 좋아.”
나부몽이 표정을 구기며 말했다.
“평안은장에요? 가주께서 아시면….”
온객행이 고개를 흔들고 웃으며 말했다.
“부몽, 부몽. 너무 걱정 마. 나의 소중한 영매께 부탁한 일이니 부친께서 아실 일은 없어.”
나부몽은 겸연쩍은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장안성으로 떠나는 온객행을 배웅했다.

주자서는 자신에게 다정하게 구는 온객행을 볼때마다 마음이 술렁였다. 꿈을 꾸는 것인지 아니면 이미 죽은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다시 황궁에 갇힌 줄 알았는데 운신이 가능하여 둘러본 처소는 황궁과는 달랐다. 다시 잘 살펴보니 시위나 시비들의 옷차림도 보았던 것들과 조금씩 달랐다. 주자서는 많은 시간을 할애해서 온객행의 모습을 보는 일에 집중했다. 혹시라도 꿈이라면 깨어났을 때, 그를 좀 더 선명하게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것이 아니라면 주자서는 죄가 많아 극락에는 갈 수 없을 테니 나락으로 가기 위해 하늘이 그를 심판하는 지도 모르겠다. 주자서는 아직 자신에 대해 온객행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온객행은 그런 주자서를 다그치거나 나무라지 않는다. 주자서는 온객행의 관대함을 이용하고 있다. 온객행이 주자서에 대해 알게 되면 나찰과 같은 모습으로 변해 주자서를 심판하려고 기다리는 것일까? 주자서는 익숙한 한숨을 가늘게 내쉬었다. 온객행과 함께 끼니를 잘 챙기니 몸에 힘이 붙었다. 날이 갈수록 몸은 편해지는데 마음이 무겁다.

토끼털을 두른 얇은 피풍의를 두르고 주자서는 창가에 앉아 지는 해를 바라보고 있다. 온객행은 주자서가 추위를 타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스스로를 숨기는 일은 그 누구보다 자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주자서는 보잘 것 없는 재주도 쓸모가 없다고 생각하니 조금 우울해졌다. 해가 다져서 객실 안으로 기별없이 하인이 들어왔다. 등롱을 켜고 주자서가 몇 술 뜨지 못한 차갑게 식은 음식을 찬합에 넣어 인사도 없이 객실을 나갔다. 장원의 소등시간이 지나서 온객행이 나부몽이라고 소개한 시비가 와서 주자서의 처소를 내원으로 옮겼다. 주자서는 나부몽을 따라가는 내내 고개를 숙이고 다른 하인들의 시선을 피했다. 나부몽은 내원을 나오는 문에서 가장 가까운 사랑채에 있는 처소로 주자서를 안내했다. 처소 안에는 방금까지 사람이 있었던 것처럼 화로가 준비되어 있었고 찻물이 끓고 있었다. 주자서는 온기가 반가워 자기도 모르게 처소안에 들어가자마자 화로 곁으로 가서 몸을 녹였다. 주자서가 하는 것을 보고 있던 나부몽이 차를 준비하며 말했다.
“중추월인데도 춥습니다. 밤에 주무실 때 탄을 꼭 확인하고 주무십시오.”
주자서는 대답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온객행을 찾았다. 주자서가 무엇인가 찾는 기색을 눈치챈 나부몽이 물었다.
“무엇을 찾으십니까?”
주자서는 어깨를 튀며 깜짝 놀랐다. 주자서는 부끄러워져서 또 고개를 숙이고 고개를 흔들었다. 나부몽은 더 묻지 않고 침상의 잠자리를 확인하더니 내실을 나갔다.

주자서는 한참 화로를 보고 있다가 창가로 가서 창문을 열려다 말았다. 올해 중추월은 다른 때보다 더 추운 것 같다. 아니면 벌써 날이 많이 지나 중양절이 가까울 지도 모르겠다. 중양절에 황제는 종남산(終南山) 남오대(南五臺)에 올라 유명한 시인들을 불러 시를 짓게 하고 국화주를 하사했다. 남오대는 불가의 성지이기 때문에 불교에 심취한 부태후가 항상 참가했고, 부태후가 가면 조황후 역시 가야했기 때문에 중추절이 지나고 나서 중양절이 될때까지 황궁의 육궁은 조용했다. 그래서 주자서는 아직도 황궁에 있는 줄로만 알았다. 주자서는 꿈이라면 최대한 깨지 않기를 바랬고 나찰이 심판을 하는 것이라면 기다리기로 했다. 심판이 끝나기 전에 더 많이 보고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주자서는 생각했다. 그것으로 그동안 거짓말로 황궁과 사람을 속인 것에 대한 벌을 받을 때 위안을 삼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주자서는 다시 화로 앞으로 가서 쪼그리고 앉았다. ‘나찰에게서 도망칠 수 있을까? 언제 바스러질지 모르는 이 몸둥이로?’ 주자서는 자조했다. 주자서는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 정언(井鄢; 화장실)에 다녀온다는 핑계로 먹은 것을 자주 게워냈다. 하루에 한끼도 과분한 그의 몸이 음식을 거부하는 것은 처음이 아니다. 주자서는 한눈에 보아도 귀한 음식들이 낭비되는 것 같아 죄스러웠다.

나부몽은 추위를 타면서도 창문을 열어놓는 주서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한증이 들어서 몸을 따뜻하게 해주어야 한다는 소리를 들은 온객행이 담비털로 피풍의를 준비했다. 나부몽은 경을 칠일 있냐며 온객행에게 한참 잔소리를 하고 자신이 겨울에 입는 토끼털로 만든 얇은 피풍의를 꺼내 둘러 주었다. 주서에게 조금 짧은 하얀 피풍의를 둘러주니 볼수록 참으로 여인 같다. 몸짓이나 말투도 그렇다. 소등시간이 되어 등롱을 끄러 다시 내실로 들어온 나부몽이 본 것은 화로 앞에 쪼그리고 앉아 고개를 무릎에 괴고 졸고 있는 주서의 모습이었다. 탄을 확인하고 자라고 했더니 탄을 보며 자려고 했던 모양이다. 화로안에 얼마 남지 않은 탄은 붉고 검기보다 잿빛이었다. 나부몽은 크게 한숨을 쉬고 입구 근처에 두었던 탄 바구니를 가져가 화로에 탄을 채워 넣었다. 나부몽이 객실에서 부산을 떠는 소리에도 주서는 일어나지 않았다.

나부몽은 가져온 제등에 등롱을 넣고 주서에게 다가가 말했다.
“주공자. 날이 늦었으니 침수(寢睡)하십시오.”
주서는 나부몽의 목소리에 스르르 눈을 떴다. 아주 자고 있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나부몽이 다시 말했다.
“주공자. 침상에서 주무세요.”
나부몽의 목소리에 주자서가 몸을 바로 하고 일어나서 말했다.
“저는 괜찮으니 어서 가서 주무세요.”
나부몽은 주서가 침상에 눕는 것을 보고 나가고 싶어서 말없이 버티고 서서 주서를 보았다. 주서는 다시 시선을 내려 나부몽이 채워 놓은 화로의 탄을 보았다. 나부몽은 주서가 뭘 보고 있나 싶어서 화로를 보았다. 탄이 빨갛게 타는 것이 보일 뿐이다. 조용한 내실에 탄이 타는 소리가 난다. 주서는 일각 넘게 미동도 하지 않고 서서 화로를 보았다. 나부몽은 기다림에 조금 지쳐서 작게 헛기침했다. 주서는 나부몽이 아직도 거기 있는지 몰랐다는 듯 놀란 얼굴로 나부몽을 보고 말했다.
“어서 가서 주무세요.”
나부몽이 고개를 흔들고 말했다.
“소등시간이 지났으니 어서 침상에 드십시오.”
주서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천천히 몸을 침상 쪽으로 움직였다. 나부몽은 화로를 침상 가까이에 옮겨 놓고 장지문 근처에 놓아둔 제등을 들었다. 주자서는 침상에 걸터앉아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다. 나부몽은 조금 답답해져서 다시 제등을 내려놓고 다가가 피풍의를 벗기고 신발도 벗겼다. 이불을 펴서 주서에게 잘 덮어주고 휘장도 내렸다. 나부몽은 어린아이를 돌보는 기분이 들어서 피식 웃었다. 피풍의를 옷걸이에 잘 걸어 두고 침상에 드리워진 휘장을 한번 더 확인한 뒤 나부몽은 제등을 들고 내실을 나갔다.

온객행은 다행히 이틀 뒤에 마차를 타고 천수장원으로 돌아왔다. 온객행이 장원을 비운동안 주서는 온객행을 찾는 기색이 역력했다. 주서가 아무것도 묻지 않기에 나부몽 역시 답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온객행이 돌아와 내실로 들어오며 말했다.
“아서!”
온객행의 목소리에 창문을 열고 하늘을 보고 있던 주서의 고개가 장지문으로 돌아갔다. 주서는 여태 본적 없는 밝은 얼굴로 온객행을 불렀다.
“노온!”
주서의 호칭에 멋쩍은 것은 차시중을 들고 있던 나부몽 뿐이었다. 두 사람은 몇 년만에 만난 사람들처럼 손을 마주잡고 한참 얼굴을 마주 보았다. 괜히 쑥스러워진 나부몽이 헛기침을 하자 온객행이 주서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그를 밖으로 이끌며 말했다.
“아서 촉경(蜀京)에 가본적 있어?”
나부몽은 미리 준비해 두었던 짐을 들고 온객행의 뒤를 따랐다. 주서는 딱히 가진 것이 없었기 때문에 짐을 챙기는 것이 수월했다. 봇짐 하나도 안되는 적은 짐을 힐끔 본 온객행이 혀를 찼지만 나부몽은 본척도 하지 않았다. 온객행과 주서가 탄 마차는 함양성으로 향했다.

마차에 탄 온객행은 마차의 휘장을 걷어 바깥을 보며 말했다.
“아서. 위수를 따라 옹성(甕城)으로 갈거야. 거기서 남쪽으로 조금 더 내려가면 낭수(閬水)가 나오는데 낭수를 따라 가면 금방 촉경이야.”
주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온객행이 하는 말을 들었으나 그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솔직히 온객행은 주서가 이해하던 말던 별로 상관없었다. 장안이나 함양에는 온객행을 알아보는 이가 많으니 온객행을 잘 모르는 곳에 가서 주서와 함께 유람을 하고 싶은 것뿐이다. 미시(未時; 13-15시) 넘어서 천수장원을 출발한 마차는 신시(申時 15-17시)가 지나서 함양성에 도착했다. 함양성에 도착한 마차는 위수 물목에 있는 선착장에서 멈췄다. 온객행은 주서가 두른 피풍의를 잘 여며주고 먼저 마차에서 내렸다. 나부몽이 온객행을 보고 물었다.
“촉경에는 왜 가십니까? 가주께서 허락하신 일입니까?”
온객행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지금 조위녕이 어디 있는 줄 아는가?”
나부몽은 갑자기 온상 아가씨의 약혼자 이름이 나와 당황하며 표정을 구겼다.
“조공자는 왜요?”
온객행은 마차에서 내리는 주서의 손을 잡았다. 온객행은 휘청거리는 주서의 허리를 잡아주며 말했다.
“아서. 조심해.”
나부몽은 온객행의 행동에 콧방귀를 끼었지만 내심 주서라면 마차에서 내리다가 실족사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부몽은 선착장에 있는 일엽선(一葉船)을 보고 조금 놀랐다. 일엽선은 온여옥이 신의상단의 후계를 정하고 나서 부인 곡묘묘와 함께 황하를 유람하기 위해 만든 배인데, 온부인은 배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사고로 명을 달리했다. 그 이후로 이 배의 존재와 사용은 온가 내에서 암암리에 금지되어 왔다. 나부몽의 놀란 기색을 읽은 온객행이 웃으며 말했다.
“장안 선평방에 있는 온택보다 비싼 배인데 사용하지 않으면 아깝지 않소.”
나부몽은 말없이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 먼저 승선했다. 주서는 커다란 배를 보고 조금 사색이 되어 온객행의 소매를 잡고 말했다.
“노온. 배를 탑니까?”
온객행은 주서가 부르는 호칭에 금방 기분이 좋아져서 활짝 웃으며 말했다.
“응. 아서.”
온객행은 주서를 배에 올라타는 선창으로 가며 말했다.
“아서 입엽선에 온 것을 환영해!”
주서는 조금 망설이더니 온객행에게 이끌려 배위에 발을 올려 놓았다. 온객행은 제일 상갑판에 있는 작은 누각으로 주서를 안내하며 말했다.
“옹성까지는 하루도 안 걸려. 촉경에 다녀오면 일엽선을 타고 황하를 유람하자.”
주서는 온객행에게 꼭 붙어 서서 말없이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해가지기 전에 일엽선은 함양의 선착장을 출발해 옹성으로 향했다. 옹성에서 낭수까지는 험준한 산길을 통과해서 가야하기 때문에 준비할 것이 많았다. 온객행은 준비해 둔 객실에 주서를 데려다 놓고 온가에서 고용한 선원을 확인하러 다시 갑판으로 가야 했다. 객실에 도착한 온객행은 화로를 평상 가까이에 가져와 찻물을 올려 놓으며 말했다.
“아서. 잠깐만 기다려. 선장을 만나고 올게.”
주서는 온객행의 소매를 잡고 고개를 흔들었다.
“노온.”
온객행이 주서의 손을 잡고 말했다.
“아서. 금방 다시 올게. 잠깐만 확인하고 올 거야”
온객행은 주서가 붙잡는 것이 좋아서 주서의 불안한 기색을 잘 읽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온객행은 주서를 탁상에 앉히고 남방에서 가져온 향을 태우고 말했다.
“이 향이 다 타기 전에 올 테니까 잠깐만 기다려.”
온객행이 장지문으로 향하자 주서는 자리에 일어나서 다시 온객행을 불렀다.
“노온….”
온객행은 주서를 향해 활짝 웃고는 장지문을 닫고 서둘러서 갑판으로 향했다.

나부몽은 배의 상황을 슬쩍 둘러보고 움직이기 편한 옷으로 갈아 입었다. 슬쩍 둘러보니 선원은 이번에 새로 고용한 사람들이고 하인들은 온택에서 온객행을 모시던 몇 명만 온 것 같았다. 온객행이 좋아하는 음식을 잘하는 어멈 몇과 내실의 하인 몇이 보였다. 나부몽은 눈짓으로 그들에게 인사를 하고 갑판 위로 올라갔다. 갑판에는 온객행과 선장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주서가 보이지 않았다. 나부몽은 의아하여 몸을 돌려 갑판 바로 아래 있는 객실로 향했다. 나부몽이 몇 번이나 밖에서 기별했지만 답이 없었다. 장원에 있을 때도 그런 적이 많았기 때문에 나부몽은 크게 한숨을 쉬고 들어간다는 티를 한참 내고 나서야 장지문을 열고 들어갔다. 나부몽이 예상하지 못한 것은 객실은 비어 있다는 점이었다. 나부몽은 객실 내부에서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퇴로를 모두 확인한 후에 객실을 나왔다. 온객행이 알기 전에 먼저 찾기를 바라면서 나부몽은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온객행이 객실에 주자서를 혼자 놔두고 나가자 마자 주자서는 장안으로 왔을 때가 떠올랐다. 누이와 함께 남창(南倉)에서 배를 타고 한양(漢陽)에 도착해서 두 사람은 옷을 바꿔 입었다. 한수(漢水)를 따라 장안으로 가는 길은 너무나 짧았다. 누이가 사랑한다던 그 사람이 벌써 곤주에 닿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주자서의 누이는 장안성에서 주자서와 헤어져 북쪽으로 향했다. 그게 누이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다. 황궁에 오고 나서는 금방 황제가 승하하는 바람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기대감에 부푼 적도 있었다. 부질없고 순진했던 옛날이야기. 주자서는 조금 웃음이 났다. 주자서는 부태후를 위해 베껴 쓰던 불경의 내용 중에 사람이 죽으면 그동안의 일을 되돌아보며 지옥의 왕들에게 재판을 받는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주자서가 조금은 바랬을지도 모를 죽음이 이미 다가와 코앞에 있었다는 사실에 조금은 화가 났다. 인생의 절반을 황궁에서 허비했다는 것이 너무 아깝고 억울했다. 운이 좋아 윤회의 굴레에 들어서면 그때는 또 어떤 고통으로 삶을 원망하게 될까? 그 어떤 지옥도 지금 주자서가 살고 있는 이 지옥보다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자서는 숨을 크게 들이 마시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방금 온객행이 나간 장지문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객실 바깥 복도에는 하인과 선원이 짐을 옮기고 있었지만 주자서에게 딱히 관심이 없었다. 주자서는 태연하게 문을 닫고 나와 짐을 싣고 있는 하인의 뒤를 따라 다시 선창으로 내려갔다. 주자서가 배에서 내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배 안에 있던 선원이 선창에 대놓았던 판자를 치우고 출항 준비를 했다. 주자서는 조금씩 멀어지는 배를 보며 생각했다. 온객행은 정말 나찰이었을까? 주자서는 딱히 갈 곳도 없었기 때문에 선창에 앉아 들어오고 나가는 배를 구경했다. 그러다 노을이 비치는 붉은 위수를 보았다. ‘집채만한 화등을 띄운다고 했는데….’ 주자서는 막연히 위수 강가에 앉아 처음으로 중추월에 화등을 구경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어쩌면 주자서는 아직도 조금 부질없고 순진할지도 모르겠다.

일엽선은 컸지만 승선한 인원을 얼추 파악하고 있는 나부몽은 갑판으로 올라가 선원에게 배를 멈추게 했다. 옆에서 배의 경로를 듣고 있던 온객행이 놀라 나부몽에게 물었다.
“부몽! 무슨 일인가?”
나부몽이 선원에게 지시를 하고 난간에 기대 방금 떠나온 하구를 보며 말했다.
“공자. 주서가 배 안에 없습니다.”
온객행은 잠깐 나부몽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헛웃음을 치고 말했다.
“부몽. 그게 무슨 소리야? 아서는 객실에….”
나부몽이 일엽선 근처로 온 작은 조각배 위로 훌쩍 뛰어내렸다. 고개를 들어 온객행을 보고 나부몽이 말했다.
“제가 데려올 테니 잠시 기다리십시오.”
온객행은 당황하여 서둘러 갑판을 내려가 객실로 향했다.

나부몽은 조각배를 얻어 타고 다시 하구에 도착했다. 일엽선을 댔던 곳에서 멀지 않은 강가에 주서는 멀뚱히 서서 강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위태로워 나부몽은 자기도 모르게 주서를 큰소리로 불렀다. 나부몽이 몇 번이나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주서는 돌아보지 않았다. 나부몽이 다가가 주서의 소매를 잡아 챘을 때 주서는 나부몽의 거친 손길에 몸을 휘청였다. 놀란 나부몽이 주서를 부축하며 말했다.
“주공자! 몇 번이나 불렀는데!”
주서는 나부몽이 잡은 소매를 한참 보더니 나부몽을 보고 말했다.
“누이께서는 북쪽에서 안녕하십니까?”
나부몽은 슬슬 주서가 몸뿐만 아니라 정신도 아픈 것은 아닌가 의심됐다. 나부몽은 말없이 주서를 잡아당겨 다시 하구로 이끌었다. 주서는 나부몽이 하는대로 이리저리 휘둘리며 말했다.
“충추월에 위수에서 화등제를 한다 하는데….”
나부몽이 주자서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벌써 계추월입니다. 화등제는 끝났어요.”
나부몽의 말에 주서는 조금 울상이 되었다. 나부몽은 괜히 미안해져서 말했다.
“내년에 또 할 테니 그때 보러 옵시다.”
주자서는 나부몽의 말에 작게 코웃음 치고 말했다.
“내년….”

온객행은 나부몽의 손에 이끌려 다시 배에 승선한 주서에게 흰여우털이 달린 하얀 비단 피풍의를 둘러 주었다. 해가 져서 날씨가 쌀쌀해졌기 때문이다. 온객행이 웃으며 말했다.
“아서. 오늘만 참아. 배에 탄 줄도 모르게 아주 천천히 가라고 할게.”
주서는 온객행을 보고 웃는 얼굴을 꾸며보았지만 잘 되지 않았다. 온객행은 걱정이 되어 주서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객실로 향하며 말했다.
“부몽. 나대신 촉경까지의 경로를 좀 확인해 둬.”
나부몽은 객실로 향하는 온객행과 주서의 뒷모습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선장의 얼굴이 궁금증으로 가득했으나 무슨 일인지 묻지 않는 것으로 보아 아주 멍청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객실로 돌아온 온객행은 주서를 평상에 앉혀 놓고 화로를 보았다. 탄을 조금 더 넣고 찻물을 올렸다. 주서는 피풍의를 두르고 화로를 보고 있었다. 온객행이 얼른 차를 내려 주서의 손에 찻잔을 쥐여주며 말했다.
“아서. 오늘만 참아. 배가 싫었으면 말을 하지…. 미안해. 몰랐어.”
주서는 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표정 없이 멍하게 화로만 보았다. 애가 탄 온객행이 주서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목덜미에 고개를 기대며 말했다.
“아서. 미안해. 나는 아서에 대해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
주서가 온객행의 말에 작게 웃었다. 온객행이 고개를 돌려 주서를 보았지만 주서는 의미없이 웃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온객행은 주서의 행동에 겁이 나서 주서를 꽉 끌어안고 말했다.
“아서. 왜 그래. 내가 잘못했어.”

주서는 화로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그대에게 권하니 종일 실컷 취하라. 어차피 유영(류영)의 무덤까지 닿지 않으니…. 세상을 떠돌던 유영도 죽을 때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 앞에서 죽었다 하니 저도 고향으로 가야 하겠습니다.(2)
온객행은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아 주서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
“아서! 즐거움으로 세월을 채우기로 했잖아.(1)
주서가 온객행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그렇습니까?”
온객행은 주서가 더 말하려는 것을 얼른 손을 들어 막았다.
“아서. 아서가 누구인지 나는 중요하지 않아. 그러니까 그런 말 하지 마.”
주서는 슬픈 눈으로 온객행을 보았다. 온객행은 조심스럽게 주서의 입에서 손을 떼고 주서와 이마를 맞대고 말했다.
“아서. 장안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자. 아무도 우리를 모르는 곳으로 가서 둘이 살자.”
주서는 대답없이 온객행의 손을 잡았다. 온객행은 주서의 손이 차가워서 안타까웠다. 온객행이 손을 마주 잡자 주서가 웃었다. 이번에는 꾸며낸 웃음이 아니었다.
“아서… 아서.”
온객행은 주서가 애달파 어쩔 줄 몰라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주자서도 온객행을 마주 안고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주서는 온객행에게 점점 몸을 기대더니 종국에는 축 늘어졌다. 온객행은 주서를 평상에 눕히고 침상으로 가서 휘장을 열고 이불을 폈다. 주서는 그동안의 보살핌이 무색하게 가볍다. 온객행은 작게 한숨을 쉬고 주서를 침상 위에 올려 놓고 이불을 덮었다. 온객행은 그대로 침상 앞에 주저 앉아 주서의 얼굴을 보았다. 그러다 감긴 눈을 한번 콧날을 한번 그리고 까슬까슬한 입술을 만져보았다. 조금 야위었을 뿐 앳된 얼굴이다. 표정이 별로 없어서 안타깝고 애달픈 얼굴이다. 주서의 표정 하나하나에 온객행의 기분이 바닥에서 하늘을 오갔다. 벌써 두 번이나 주서는 온객행에게서 도망가려고 했다. 주서는 벌써 아는 걸까? 온객행이 얼마나 집요하고 주서에게 연연(戀戀)하고 있는지 말이다. 온객행은 차라리 주서가 아파서 몸을 움직일 수 없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가 주서가 아픈 것이 두려워서 금방 떨쳐냈다. 온객행은 주서의 뺨을 쓸며 말했다.
“어떻게 해야 아서를 나에게 동여맬 수 있을까?”
온객행은 팔을 올려 턱을 괴고 눈을 감고 있는 주서의 얼굴을 보았다.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는 얼굴이다.

온객행은 요기거리를 가지고 객실에 들어온 나부몽의 손길에 눈을 떴다. 나부몽이 온객행의 얼굴을 보고 기가 막힌다는 듯 말했다.
“그렇게 좋습니까?”
온객행은 고개를 돌려 자고 있는 주서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응. 아서가 너무 좋아.”
나부몽은 조금 질린다는 듯이 말했다.
“벌써 두번이나 도망간 놈이 뭐가 좋다고.”
온객행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부몽의 팔뚝을 치며 조용히 말했다.
“부몽! 그렇게 말하지 마.”
나부몽이 주서를 보고 말했다.
“제가 보기에 정신도 성치 않은 것 같습니다.”
온객행이 찻잔에 차로 입을 축이고 말했다.
“어서 몸이 나아져야 치료라도 해볼텐데….”
나부몽이 고개를 끄덕이며 탁자로 가서 찻잔에 차를 따라 침대 협탁에 두었다. 나부몽이 하는 것을 보고 있던 온객행이 웃으며 말했다.
“이번에는 아서랑 좀 친해졌어?”
나부몽이 온객행을 보고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죽은 사람 보다는 산 사람이 나으니까요.”
온객행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부몽을 향해 소리쳤다.
“부몽!”
온객행은 큰소리에 놀라 얼른 손을 들어 입을 막고 침상을 보았다. 주서는 온객행의 소란에도 눈을 뜨지 못했다. 침상 근처에 있던 나부몽이 주서에게 다가가 코 밑에 손가락을 넣어 숨을 쉬는 것을 확인했다. 나부몽이 온객행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온객행이 입에서 손을 떼고 작게 한숨을 쉬며 의자에 털썩 앉았다. 나부몽 역시 작게 한숨을 쉬며 다시 탁자로 가서 자리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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