團圓似明月 둥근 모양 밝은 달과 같네.
주서가 잠들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부몽이 마차를 끌고 왔다. 마차가 다가오는 소리에도 주서는 눈을 뜨지 못했다. 나부몽이 말에서 내려 모닥불 앞에 앉아 있는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어쩔 셈이십니까?”
온객행이 고개를 들어 나부몽을 보고 말했다.
“뭘?”
나부몽은 대답하지 않고 온객행 품속에 있는 남자에게 턱짓했다. 온객행은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주자서를 안아들고 말했다.
“마차를 준비하다니 역시 부몽이야. 그래서 늦었구나.”
나부몽은 온객행의 말에 콧방귀를 뀌고 말했다.
“장원의 가령이 가주께 소식을 보낸 것을 아십니까?”
온객행은 마차로 다가가 마부를 시켜 뒷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주서를 실었다. 그리고 나부몽을 보고 서서 말했다.
“그래?”
나부몽은 고개를 흔들고 온객행과 주서가 타고 왔던 말을 살펴보았다. 한마리는 마차 뒤에 묶어두고 나머지 하나는 자신이 타고 온 말의 안장에 고삐를 묶었다. 나부몽이 하고 있던 것을 보고 있던 온객행이 말했다.
“부친께서 뭘 어쩌시겠어. 그냥 내 손님인데.”
나부몽은 말없이 말에 올라탔다. 온객행도 그런 나부몽이 발을 굴러 말을 몰자 얼른 마차에 올라탔다.
온객행은 마차 내부 의자에 있던 포단을 바닥에 깔고 앉았다. 그리고 바닥에 눕힌 주서를 끌어안았다. 온객행은 나부몽의 물음으로 불안했던 마음이 조금 진정되는 기분이 들었다. 손님인 것은 차치하고 신분이라도 만들어 둬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너무 주변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온객행의 가슴을 베고 누워있는 주서는 어두운 마차 안에서도 창백했다. 온객행은 겁이 나서 코 밑을 손가락을 대보았다. 미약하나마 쉬어지는 숨이 애달파서 온객행은 주서를 더 꼭 끌어안았다.
“아서를 누구라고 하면 좋을까?”
온객행은 언젠가 읽었던 서책에서 양주(揚州) 여강(廬江)에 미주랑(美周郞; 주유)이 떠올랐다. 주(周)씨는 관중보다 관동 장강(長江) 근처에서 흔한 성씨다. 온객행은 파촉(巴蜀)에서 거래하는 상인중에 주씨가 많은 것이 떠올랐다. 파촉은 거리적으로 너무 가까워 부친이 조금만 손쓰면 금방 진위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최대한 멀리 있는 동쪽 양주 서현(舒縣)사람이라고 둘러대면 될 것이다. 과거시험을 보기위해 장안으로 오는 유생이 많았으니 그도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해 온 유생이라고 소개하면 그만이다. 아직 온객행은 알지 못한 사실이긴 하지만, 재미있게도 주자서는 사실 여강 서현의 남쪽에 있는 파양현(鄱陽縣) 도독(都督)의 아들이다.
온객행은 장원에 도착해서 왜 나부몽이 시간이 조금 더 걸려도 마차를 가져왔는지 알 수 있었다. 장안성에서 온 가주의 호위가 온객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온객행은 품에 안고 있던 주서를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마차에서 내리며 나부몽에게 눈짓했다. 나부몽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온객행은 별말 없이 가주의 호위가 하자는 대로 순순히 장안성으로 향했다. 시간이 늦어 아직 통금이 풀리지 않은 시간에 장안성을 드나드는 것은 신의상단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온객행이 장안성 온택에 도착했을 때는 날이 밝아 진시(辰時; 7-9시)가 넘었다. 온객행은 가주가 머무르는 내원 사랑채에서 부친을 기다렸다. 바로 같은 곳에서 부친의 설교를 들었던 것이 며칠 지나지 않았다. 탁자에 턱을 괴고 앉은 온객행이 일각 정도 기다리자 온상이 온여옥의 팔을 잡고 함께 사랑채로 들어왔다. 온객행은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히 소매를 모으고 인사했다.
“부친 기침하셨습니까.”
온객행의 인사에 온상이 콧방귀를 끼며 말했다.
“참 오랜만에 뵙습니다. 오라버니.”
온객행이 손을 내리고 온상을 보고 말했다.
“귀한 영매(令妹)를 뵙습니다.”
온상은 온객행을 쏘아보며 온여옥이 탁자에 앉는 것을 도왔다. 하인이 간단한 음식을 내왔고 온상은 온여옥의 옆에 앉아 부친을 챙겼다. 온객행도 탁자에 앉아 두사람의 아기자기하고 사이좋은 모습을 뚱한 표정으로 구경했다.
가주의 부름을 받고 장안성으로 간 온객행은 이틀동안 연락이 없었다. 온객행을 잘 아는 나부몽은 괜히 서신을 보내 가주에게 책잡히지 않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행동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장원에 머무르며 온객행의 손님을 보살폈다. 주서는 말을 타고 돌아온 뒤로 침상에서 한발짝도 나오지 못했다. 나부몽은 혹시라도 중병을 얻은 것인가 걱정하여 의원까지 불렀다. 의원의 진맥은 온택에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굶주림에 의한 내장손상과 한증, 거기에 추가된 것은 극심한 기울(氣鬱)이다. 급작스럽게 몸을 움직여 근골이 놀랐다는 것이다. 몸이 너무 허약해서 약을 함부로 쓸 수 없다는 점은 온택에서와 같다. 침상에 누워있는 주서는 가끔 정신이 들어 눈을 뜨기도 했지만 일어나거나 말을 하지는 않았다. 온객행이 장안성으로 돌아간 날, 나부몽은 주자서가 기운을 회복할 수 있게 자게 두었다. 일어나면 먹으라고 둔 쌀죽이 딱딱하게 말라 있는 것을 발견한 나부몽은 이러다 송장을 치우는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온객행이 장원을 떠나고 사흘째 되는 날, 나부몽은 호위 복장을 벗고 시비가 입는 옷을 입었다. 주서는 남자 하인과 호위를 거북해했다. 방 안에 호위가 있으면 거의 먹지 않았고, 남자 하인이 떠주는 것보다 여자 하인이 떠주는 죽을 더 잘 먹었다. 나부몽은 온객행을 위해 주서와 하인들의 접촉을 최소화하고 싶었기 때문에 평소에 입는 옷보다는 소매가 길고 나풀거리는 옷을 입고 타락죽을 소반에 담아 객실로 향했다. 타락죽에서 고소한 냄새가 난다. 낙장(酪漿; 소나 염소의 젖)은 귀한 식재료로 평생 한번도 입에 데지 못하고 죽는 사람이 훨씬 많았다. 그런 낙장을 매일 먹는 호사를 누리는 것을 저 손님은 아는지 모르는지 한 작(勺; 약 18㎖로 한 잔에 해당한다.)도 먹지 못한다.
나부몽이 객실에 들어갔을 때 주서는 몸이 조금 나아졌는지 침상 위에 휘장을 걷고 앉아 있었다. 주서는 소반을 들고 들어오는 나부몽을 보고 작게 한숨을 쉬더니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먹을 테니 두고 가세요.”
나부몽은 주서가 한말을 듣지 못했다는 듯이 침상 옆에 있는 협탁에 소반을 내려놓고 의자에 앉았다. 주서는 물끄러미 나부몽이 하는 것을 보더니 또 한숨을 쉬었다. 나부몽은 그릇을 들어 죽을 한술 떠서 주서의 입 앞으로 가져갔다. 주서가 고개를 돌렸지만 나부몽은 아랑곳하지 않고 숟가락을 든 채로 기다렸다. 보통 주서에게 무언가를 먹인다는 것은 이런 식이다. 주서는 점잖게 말로 먼저 거절하고 그 다음에는 고개를 돌리고 그래도 안되면 수긍하고 먹었다.
오늘은 그동안 먹인 것이 어느정도 효과가 있었는지 나부몽의 손에 들려 있던 숟가락을 건네받았다. 나부몽은 순순히 죽그릇을 주서의 손에 들려주고 침상 옆에 있는 화로를 확인하고 찻물을 끓이는 주전자를 찾았다. 나부몽이 차를 준비하느라 눈을 뗀 사이 주서는 겨우 한술 죽을 떴을 뿐이다. 나부몽은 무의식적으로 크게 한숨을 쉬었다. 나부몽의 한숨소리를 들은 주서가 들고 있던 죽그릇을 내려놓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며칠 문안인사를 올리지 못했는데 태후께서는 강녕 하십니까?”
나부몽은 주서의 말에 눈썹을 찌푸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답 없는 나부몽의 눈치를 보던 주서가 말했다.
“저는… 언제쯤 중명원으로 돌아가나요?”
나부몽은 주서가 한 말 뜻을 알지 못해 소매를 들어 공수하고 말했다.
“소인이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주서는 나부몽의 말에 납득했는지 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나부몽이 침상 곁으로 다가가 협탁에 놓인 죽그릇을 물끄러미 보았다. 한 작도 먹지 않았다. 그새 식었는지 타락죽은 조금 굳어 있었다. 주서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누워만 있었더니 속이 더부룩합니다.”
나부몽이 주서를 보고 말했다.
“의관을 부를까요?”
주자서는 눈에 띄게 당황하며 손을 내젓고 말했다.
“아니요. 아닙니다.”
주서는 협탁에 놓인 죽그릇을 다시 들고 숟가락을 들었다. 나부몽은 주서가 죽 한그릇을 비우는 동안 찻물을 네 번이나 끓였다. 겨우 비운 죽그릇을 들고 나가는 나부몽에게 주서는 다시 말했다.
“중명원으로 돌아가고 싶은데… 태후께 말씀드려 주시겠습니까?”
나부몽은 침상 쪽으로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말없이 객실을 나왔다. 나부몽은 객실을 나오자마자 급하게 장안성으로 서신을 보냈다. 황제에게도 남첩이 있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 없다. 그렇다고 남첩이 없다는 뜻도 아니다.
온객행은 서신을 받은 다음날 아침 장원으로 돌아왔다. 돌아오자 마자 나부몽을 찾은 온객행이 물었다.
“태후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나부몽은 주서를 돌보면서 들었던 이야기를 온객행에게 해주었다. 온객행은 탁자에 놓여있는 찻주전자에서 차를 따라 목을 축였다. 온객행은 예부에 있는 둘째형님께 최근 황궁에서 흉례(凶禮)가 있었는지 물어본 참이다. 예장(禮葬)에 해당하는 품계가 높은 지위는 없었고 선황의 후궁 중 한 명이 물에 빠져 실족사했다고 들었다. 그 후궁은 관동 제후의 딸로 정3품 첩여라고 했다. 그 후궁에게는 자식이 있는 것도 아니라 황실사당에 모실 수 없어 시신을 찾아 관동으로 보냈다는 것이다. 선황이 남색을 가까이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 없다. 태후에게 문안을 드릴 수 있는 것은 보통 3품이내 후궁과 태후의 자식들 정도다. 주서는 주씨이니 태후의 자식일 수는 없고, 황실과 혼인관계로 척분(戚分)이 있는 귀족 중에 주씨는 없다. 온객행이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크게 한숨을 쉬자 나부몽이 말했다.
“왜 주공자께 직접 묻지 않으십니까?”
온객행은 고개를 들지 않고 답했다.
“싫어. 아서가 누구인지 별로 알고 싶지 않아. 나는 그냥 아서가 너무 좋단말이야.”
나부몽이 표정을 구기며 말했다.
“주공자를 좋아하세요?”
온객행이 얼른 고개를 들고 나부몽을 보며 말했다.
“뭐라구? 내가 뭐라고 했어?”
나부몽이 한쪽눈썹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주공자가 너무 좋다구요?”
온객행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부몽을 보며 말했다.
“내가 그렇게 말했어?”
나부몽은 대답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온객행은 한동안 눈동자를 굴리며 나부몽을 보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말했다.
“아서를 좋아하나 봐!”
나부몽은 다시 표정을 구기며 말했다.
“모르셨어요?”
온객행이 나부몽에게 다가가 말했다.
“사람이 좋아진 것은 처음이야. 그렇지?”
나부몽이 온객행을 보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온객행은 나부몽을 보고 물었다.
“자꾸 보고싶어. 만지고 싶어.”
나부몽이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런 말씀은 안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온객행이 나부몽의 손을 잡고 물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어떻게 하는 거야? 좋아한다고 말해도 괜찮아?”
나부몽은 온객행의 소매를 잡아 의자에 앉히고 찻잔을 손에 쥐여주며 말했다.
“좋아하는 것에도 종류가 많지요.”
온객행이 나부몽을 보고 물었다.
“종류?”
나부몽은 탁자에 걸터앉아 말했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방법은 세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세가지?”
나부몽은 찻잔을 꺼내 자기 몫의 차를 따랐다. 온객행은 나부몽에게 닦달하며 말했다.
“그 세가지가 대체 무엇인데?”
나부몽이 ‘큼큼’ 작게 기침하고 말했다.
“세가지 모두 그 사람을 좋아하고 소중히 하는 마음은 같아요.”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연민(憐愍)일 수도 있고 애착(愛着)일 수도 있어요. 보통 남녀간의 정념(情念)은 성애(性愛)라고 부릅니다. 온객행이 나부몽의 말을 곱씹으며 말했다.
“연민, 애착, 성애….”
나부몽은 온객행이 충년(沖年; 9-10세 사이 어린아이)일 때부터 봐왔다. 벌써 10년 넘게 온가에서 호위로 일하면서 온객행이 사람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처음 보았다. 온가에서 관례(冠禮)를 치르고도 혼인하지 않은 사람은 온객행 뿐이다. 관례가 다가오는 온상 아가씨께서도 조황후의 당질(堂姪)인 조위녕과 혼약을 맺은 참이다. 온가의 혼처 중에 가장 황실과 가까운 척분이다. 온객행에게도 많은 혼담이 오고 갔으나 온객행의 행실은 그의 형제자매와는 조금 다른 것이라 말만 오간 것이 벌써 3년이다. 가주께서는 온객행이 상단을 이어 가업을 잇지 않으려고 하는 것보다 혼인하지 않았다는 것을 더 큰 흉이라고 생각했다. 상단을 잇는 일은 온상 아가씨께서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조황후의 당질 조위녕은 종손이 아니었기 때문에 온여옥은 데릴사위 들이듯 데려와 상단을 잇게 할 참이다. 어차피 쓸모와 상관없이 높은 신분 때문에 혼처가 마땅치 않았던 조가에서도 그렇게 나쁘기만 한 조건은 아니었다.
나부몽이 한참 온가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온객행이 말했다.
“나는 세 개 다인 것 같아.”
나부몽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온객행을 보자 온객행이 말했다.
“아서를 보고 있으면 불쌍하고 가련해서 소중히 하고 싶어. 이건 연민이잖아. 그리고 너무 좋아서 떨어지기 싫어. 어디 보내기도 싫어. 이건 애착이지? 그리고….”
나부몽은 온객행이 더 말하려는 것을 얼른 멈추고 말했다.
“공자! 더 말하지 않아도 알겠으니 그만 하십시오.”
온객행이 나부몽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자꾸 보고 싶고 만지고 싶어. 열망(熱望)해. 이건 성애지?”
나부몽은 못들을 걸 들었다는 듯 표정을 구겼다. 온객행이 웃으며 말했다.
“사람을 좋아하면 이렇구나. 머리속에서 아서가 떠나지 않아. 아서 생각만 나고 계속 아서랑 같이 있고 싶어. 근데 아서랑 만나면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서 뭐라고 말하면 좋을지 모르겠어.”
나부몽은 고개를 흔들며 한숨을 쉬고 말했다.
“가주께서는 뭐라고 하십니까?”
이번엔 온객행이 표정을 구기며 말했다.
“똑같지 뭐. 이번엔 예부 장종사(張從士)의 조카래. 둘째 형님께서 괜한 일을 하셨지.”
나부몽이 온객행을 보고 물었다.
“그래서 어쩌실 참입니까?”
온객행이 나부몽을 보고 되물었다.
“뭘?”
나부몽은 말없이 한동안 온객행을 보고 있다가 말했다.
“공자님의 손님께서는 언제까지 장원에 계십니까?”
온객행은 한참 생각하더니 말했다.
“나 출가할까?”
나부몽이 대답없이 눈만 깜빡이자 온객행이 말했다.
“부친께 출가한다고 한 다음에 아서랑 둘이 살래.”
나부몽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이 났다. 온객행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속세를 벗어나 강호를 떠도는 거지. 무술을 배울까?”
나부몽이 콧방귀를 끼고 말했다.
“시기가 너무 늦어진 것은 아닙니까?”
온객행이 나부몽을 보고 물었다.
“배움에 시기가 어디 있는가? 하고자 하는 마음이 제일 중요하지.”
나부몽이 고개를 흔들고 말했다.
“시기도 중요합니다. 아미파에서는 충년이 넘은 자는 제자로 받지 않습니다.”
온객행이 시무룩해져서 되물었다.
“그래?”
나부몽은 온객행을 한참 보고 있다가 물었다.
“주공자를 뵈러 가지 않으십니까?”
온객행이 나부몽에게 물었다.
“지금 여기가 어디인지 잘 모른다며… 내가 갑자기 나타나면 당황할 수 있으니까 좀 정신을 차린 다음에….”
나부몽이 고개를 흔들고 말했다.
“그럼 장원에는 다시 왜 오셨어요?”
온객행이 방긋 웃으며 말했다.
“부친을 피해서 왔지.”
나부몽은 점점 어두워지는 실내를 등롱을 찾아 불을 밝히며 말했다.
“슬슬 끼니 때이니 어서 가서 주공자와 석찬을 드세요.”
온객행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나 없는 동안 아서는 잘 먹었어?”
나부몽은 내실을 나가는 온객행을 향해 고개를 흔들었다. 나부몽이 다시 탁자로 가서 찻잔에 차를 따르며 자리에 앉자 온객행이 물었다.
“부몽은 안 와?”
나부몽이 찻잔으로 입을 축이고 물었다.
“제가 왜요?”
온객행이 물었다.
“그동안 아서랑 좀 친해지지 않았어?”
나부몽이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제가요?”
온객행은 나부몽의 표정을 살피다가 금방 고개를 돌려 내실을 나갔다.
주자서는 생전 처음 보는 곳에서 눈을 떴다. 꿈속에서 주자서는 참으로 오랜만에 말을 몰았다. 꿈에서 만난 온객행이라는 사람은 정말로 실존하는 사람일까? 그냥 그런 친우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주자서가 환상으로 만들어낸 것은 아니었을까? 시비들이 가지고 들어오는 음식의 질이 좋은 것으로 보아 태후께서 주첩여의 상태를 걱정하여 육궁에 있는 어딘가로 주자서를 옮긴 것 같았다. 폭신한 비단 이불에 중추월에 화로까지… 이번에는 정말로 죽을 뻔했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전의 여관(女官)들은 주자서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아마 그들이 중명원에 머무는 주자서보다 형편이 좋을 것이다. 감히 첩여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인지도 몰라 에둘러 거절해도 주자서의 거절은 그들에게 의미가 없다. 흠씬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픈 몸둥이보다 어디인지도 모르는 곳에 갇혀 있는 신세가 더 아팠다. 오히려 너무 아파서 움직일 수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방안에 어둠이 내려 앉는다. 중명원에서 주첩여는 등롱을 켜고 끄는 것도 여유가 없어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이 곳은 어떠려나 하는 생각에 주자서는 조금 웃음이 나왔다. 주자서는 꿈속에서 보았던 비단 두루마리에 쓰여 있던 시를 생각했다. ‘얇디 얇은 봉황무늬 비단을 겹치고 벽문원정(碧文圓頂; 결혼식에 쓰는 푸르고 둥근 장막) 밤새 기웠다. 동그란 합환선으로 여윈 얼굴을 다 가리지 못하고, 양수레 소리 우레와 같아 대화도 나누지 못했다. 등롱이 다 타버린 적막의 어둠속에서 지내니 석류가 붉게 피었다고 소식조차 전할 수 없네. 그대의 말은 수양버들 언덕에 매여 있는데 어디 계시오? 나는 서남풍(4)되어 그대 소식 기다리네.’ (3) 주자서는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마음은 잘 알 수 없었다. 그런 사람이 생기기도 전에 황궁으로 왔고 아마 죽을 때까지 그런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 신세가 조금 슬퍼져서 누군가를 그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주자서는 생각했다. 그러다 온객행이 떠올랐다. 당장 그리워할 만한 사람이 온객행 밖에 없었다. 주자서는 생각했다. 서남풍이 되어 그에게 가고 싶다고. 어디로든 황궁이 아니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밖에서 여관이 기별했다. 주자서는 더는 태후께서 내리는 음식을 거절할 구실이 없어서 반쯤 마음을 내려 놓았다. 몸이 조금 나을 때까지 먹는다고 갑자기 체중이 불거나 외관이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주자서는 힘겹게 몸을 일으켜 앉았다. 중명원에 있었다면 마음은 편안했을 텐데 몸은 편안해도 마음이 고단하니 한시도 쉴 수가 없다.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에 주자서는 고개를 숙이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아서!”
주자서를 친근하게 부르는 목소리에 주자서는 얼른 고개를 들었다. 온객행이 소반에 작은 그릇을 들고 들어왔다. 주자서는 보고 싶다고 생각만 했을 뿐인데 다시 보게 된 온객행이 반가워서 웃음이 났다. 온객행도 주자서의 웃음을 보고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아서. 내가 보고 싶었어?”
주자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온객행을 다시 잘 보았다.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르는 얼굴이니 잘 기억해 두고 싶어서 그렇게 했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시선을 개의치 않고 침상 옆에 앉아 소반을 협탁에 내려 놓았다. 온객행이 가져온 죽에는 아주 작은 토하(土蝦; 민물새우)가 들었다. 주자서의 고향에서는 말린 민물새우를 소금대신 썼기 때문에 아주 반가운 식재료다. 주자서가 죽을 보고 말했다.
“토하….”
온객행이 낮게 웃으며 말했다.
“아니야 아서. 이건 모하(毛蝦)야. 바다새우라구.”
주자서는 다시 그릇을 보고 숟가락으로 작은 새우를 찾았다. 확실히 토하라고 하기에는 색이 붉다. 온객행이 주자서에게 말했다.
“어서 먹어봐 아주 맛있어. 아서는 새우를 좋아하는구나.”
주자서는 딱히 좋아하는 음식이 없었다. 어릴 때는 부족한 것 없이 먹어서 음식에 관심이 없었고, 조금 커서 군영생활에 적응하면서 부터는 배를 채울 수 있는 음식이면 뭐든 잘 먹었다. 황궁에 오고 나서 갑작스럽게 커지는 몸이 두려워 극단적으로 식단을 조절한 이후로 음식은 주자서에게 두렵고 무서운 것이다. 두렵고 무서운 것을 좋아할 수는 없다. 주자서는 괜히 온객행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아서 그의 말을 정정(訂正)하지 않았다. 주자서는 숟가락을 들어 죽을 한술 떴다.
온객행은 주자서를 닦달하거나 서두르지 않고 침상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아 말했다.
“오랜만에 말을 타서 그런가? 넓적다리가 너무 아파. 며칠 걸을 수가 없어서 아서를 보러 올 수가 없었어.”
주자서는 온객행이 한 말에 조금 공감이 가서 고개를 끄덕였다. 주자서의 동조가 기꺼웠는지 온객행은 신나서 방문하지 못했던 함양성에 대해 떠들어 댔다.
“장안성의 화등제는 지겹게 봤으니까 함양성에서 한다는 위수에서 하는 화등제를 보러 가고 싶어. 장안성에 있는 수로랑 달리 위수는 크니까 집채만한 화등을 띄운데.”
주자서는 천천히 모하죽을 뜨며 온객행의 말을 들었다. 자신전에서도 중추절 밤에 태액지에서 화등을 띄운다. 태액지에서 띄운 화등은 장안성을 돌고 돌아 곡강을 넘어 부용지까지 간다고 했다. 주자서는 항상 병을 핑계로 연회 도중에 중명원으로 향했기 때문에 한번도 본적은 없다. 주자서는 지난 밤 태액지에서 본 월계화 같을까 싶었다.
주자서는 자기도 모르게 온객행에게 물었다.
“온공자께서는 화등제에 가 보셨나요?”
온객행이 주자서를 빤히 보며 대답하지 않았다. 주자서는 또 자기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그에게 들리지 않은 줄 알고 숟가락을 내려놓고 온객행에게 몸을 붙여 귓가에 대고 말했다.
“온공자께서는….”
온객행은 가까이 몸을 붙여오는 주자서를 피하지 않고 있다가 팔을 둘러 주자서를 끌어안았다. 당황한 주자서가 바르작대자 온객행이 말했다.
“왜 노온이라고 안 불러? 노온이라고 부르겠다며.”
주자서는 죽을 쏟을까봐 온객행을 밀치지도 못하고 안겨있었다. 온객행이 주자서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노온이라고 부르면 놔 줄게. 아니야. 앞으로 노온이라고 부르겠다고 약속하면 놓아 줄래.”
주자서가 당황하며 말했다.
“온공자 죽이….”
온객행은 잠시 주자서를 놓아주고 주자서 손에 들려 있던 죽과 숟가락을 다시 협탁 위에 올려놓고 주자서를 와락 끌어안았다.
다른 사람과 이렇게 친밀하게 맞닿은 것이 언제였는지 주자서는 기억나지 않았다. 싫지 않은 온기다. 온객행의 맥박이 들렸다. 주자서는 좀더 자세히 들어 보려고 얼굴을 온객행의 목덜미에 가깝게 붙였다. 어깨에 둘러졌던 온객행의 팔 하나가 등허리를 감싸며 더 가깝게 주자서를 껴안았다. 온객행의 맥박은 주자서의 맥박보다 빠르다. 뒤엉킨 두사람의 맥박이 주자서가 온전히 혼자가 아니라고 노래하는 것 같아서 듣기 좋았다. 온객행이 주자서의 귓가에 말했다.
“아서. 어서 약속해. 약속하지 않으면 이렇게 계속 안고 있을 거야.”
주자서는 온객행의 제안이 마냥 싫지만은 않아서 작게 웃었다. 그러다 밖에서 사람이 기별하는 소리를 듣고 온객행을 밀쳤다. 하지만 온객행은 정말 놓아줄 생각이 없는지 주자서를 더 꼭 껴안았다.
주자서는 점점 당황해서 온객행의 등에 손을 올려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온공자, 알겠습니다. 노온이라고 부를게요. 놓아주세요.”
온객행은 ‘응응’하고 주자서의 말에 대답해 주었지만 놓아주지는 않았다. 주자서는 작게 한숨을 쉬고 그를 불러 보았다.
“노온.”
온객행은 원하는 대답을 듣고도 한참 목덜미에 얼굴을 비비다 주자서를 놓아주었다. 그리고 조금 붉어진 얼굴로 말했다.
“아서. 이제부터 노온이라고 불러야 해. 그렇지 않으면 안아버릴 거야.”
주자서는 밖에서 사람이 들어오고 나면 온객행이 사라질까 봐 자기도 모르게 온객행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다시 한번 그를 불러보았다.
“노온.”
온객행이 주자서를 마주보고 웃으며 말했다.
“아서.”
온객행의 목소리가 듣기 좋아서 주자서는 한번 더 온객행을 불러보았다.
“노온.”
온객행이 주자서의 손을 양손으로 마주잡으며 말했다.
“응. 아서.”
조금은 땀이 베인듯한 온객행의 손이 크고 따뜻해서 주자서는 놓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장지문이 열리는 소리에 주자서는 화들짝 놀라서 온객행의 손을 놓았다.
객실로 들어온 나부몽이 본 것은 침상에 나란히 앉아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온객행과 주서였다. 나부몽은 고개를 갸웃하며 저 두사람이 저렇게 친했던가 생각했다. 나부몽은 탁자 위에 가져온 찬합을 올려놓고 말했다.
“공자님. 석찬을 드시지요.”
한참 주자서를 바라보고 있던 온객행이 자리에서 일어나 탁자 위에 음식을 꺼내 놓는 나부몽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부몽. 아서도 나를 좋아하나 봐.”
나부몽은 별일 아니라는 듯 온객행을 보고 물었다.
“어떻게요?”
온객행이 찬합에서 나온 찬을 보다가 다시 나부몽을 보고 물었다.
“어떻게?”
나부몽이 침상에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는 주자서를 보고 물었다.
“연민입니까? 애착입니까? 아니면….”
온객행이 놀라서 나부몽의 입을 막고 말했다.
“부몽! 그런건 어떻게 물어봐. 아니 물어봐도 되는 거야?”
나부몽은 물끄러미 온객행을 보았다. 온객행은 얼른 손을 치우고 말했다.
“미안. 근데 서로 좋아하면 뭘 하는데?”
나부몽이 한숨을 쉬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거기서부터?”
온객행이 다시 나부몽에게 가깝게 다가서며 귀를 가져다 댔다. 나부몽은 고개를 기울여 침상에 조신하게 앉아 있는 주서를 한번 힐끔 보고 온객행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그간 기루에서 뭘 하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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