潔如霜雪 희고 깨끗함 서리와 눈 같구나.
나흘동안 온객행이 지켜본 바로 주서라는 사내는 참 조용하고 정적인 사람이다. 부득이한 사정으로 온객행이 집을 비운 날 하인들은 온객행에게 손님이 있는 줄 모르고 끼니를 챙겨주지 않았는데 방에서 한발짝도 나오지 않았던 모양이다. 해 질 녘 방으로 돌아간 온객행이 본 것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신발도 신지 않은 채로 창가에 앉아 창밖을 보고 있는 주서였다. 그 모습이 금방이라도 바스라질것 같아 온객행은 주방에 따로 부탁하여 두 시진마다 위장에 부담이 가지 않는 음식을 준비하게 했다. 하지만 그것도 대부분 거절하거나 먹지 않았고 그나마 온객행이 식사를 제안하면 조금 먹는 정도였다. 강박적으로 음식을 먹지 않는 그가 걱정되어 온객행만 전전긍긍하였다. 온객행은 그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이 많았으나 함부로 묻지 못했다. 묻고 나면, 그에 대해 알게 되면 그가 떠난다고 할까 봐 두려웠다.
온객행은 사람을 시켜 귀족들의 남첩에 대해 알아보라고 시켰다. 아마도 고관대작의 첩일 것이다. 그는 사치품에 대한 태도가 매우 익숙했기 때문이다. 지금 그가 마시고 있는 차는 관중에서는 취급하는 곳이 손에 꼽히는 흑차(黑茶)이고 그것을 우린 자사호와 다기(茶器)는 시장에서 부르는 것이 값이다. 머리를 정리해 주겠다고 하자 주변을 둘러보더니 서역에서 가져온 유리로 만든 면경(面鏡) 앞으로 가서 앉았다. 유리로 만든 면경을 익숙하게 봤던 사람처럼 말이다. 그의 머리카락은 세심하게 관리한 티가 났다. 그의 영양상태를 고려하면 윤기가 흐르는 머리카락과 희미하게 나는 동백꽃의 향기는 누군가 매일 그의 머리카락을 빗어 주었다는 것이다. 온객행은 주서의 머리카락을 정리하여 푸른 비단 끈으로 묶었다. 비단끈 하나로 머리를 묶었을 뿐인데 희고 깨끗한 얼굴색과 대비되어 사내인지 여인인지 알 수 없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온객행은 탁자로 가서 찻잔에 차를 따라 마셨다. 주서도 면경의 자신의 모습을 한참 보더니 피식 웃고 탁자로 다가와 마시던 찻잔에 차를 조금 더 따라 마시며 말했다.
“흑차가 아주 맛이 좋습니다. 저는 생차보다 숙차를 좋아하는데 아주 잘 숙성된 것 같아요.”
온객행이 찻잔을 비우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도 생차보다는 숙차를 좋아합니다. 향도 그렇고 맛도 그렇고.”
그리고 또 한동안 둘은 아무말 없이 탁자에 앉아서 차를 마셨다. 온객행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종일 방에 계시면 따분하지는 않으십니까?”
주서는 온객행의 말에 조금 긴장했는지 찻잔을 내려놓고 고개를 숙였다. 마치 죄를 지은 사람 같은 모습이라 온객행이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서재가 바로 옆에 있는데 가서 보시겠습니까?”
주서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온객행이 장지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 하인이 내원으로 들어왔다. 하인이 온객행에게 말했다.
“공자님 가주께서 찾으십니다.”
온객행은 얼굴을 찌푸리고 말했다.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인가?”
하인이 어색하게 웃으며 옆에 있는 주서를 힐끔 보았다. 온객행은 고개를 끄덕이고 하인을 먼저 보냈다. 온객행이 소매를 들어 주서를 서재로 안내하며 말했다.
“주공자 잠시 다녀와야 하겠습니다. 편히 둘러보십시오.”
주서는 서재안으로 들어가 소매를 모아 인사하며 말했다.
“천천히 다녀오십시오.”
온객행은 다녀오라는 주서의 말에 기분이 좋았다가 천천히 오라는 말에 조금 서운해졌다. 온객행은 조금 심통이 나서 말했다.
“부친께서 부르시는 일은 서둘러 다녀오고 싶습니다.”
주서가 고개를 들어 온객행을 보고 살포시 웃으며 말했다.
“그럼 서둘러 다녀오십시오.”
주서의 말에 기분이 좋아진 온객행은 활짝 웃으며 서재를 나갔다.
주자서는 주자서 나름대로 고민이 많았다. 자신을 온객행에게 누구라고 소개해야 할지도 아직 정하지 못했다. 온객행의 호의가 언제까지 지속될지도 모르고 갈 곳도 아직 정하지 못했다. 서재에 혼자 남은 주자서가 가장 처음 한 일은 서안 뒤쪽에 있는 방의 창문을 여는 일이었다. 중명원에 있을 때는 남의 눈이 무서워 함부로 열지 못하던 창문을 열면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주자서는 서재를 둘러볼 생각도 하지 않고 바로 서안에 앉아 고개를 괴었다. ‘나를 찾고 있을까?’ 주자서가 가장 두려운 것은 사실 그것이었다. 궁궐에서 그를 찾고 있을까? 중명원은 사람의 발길이 많지 않은 곳이라 아직 주첩여가 사라진 것을 모를 수도 있다. 진왕이 주자서가 피를 토하는 것을 보았으니 물에 빠져 죽었다고 생각할지도 모를 일이다. 주자서가 태액지로 향하는 것을 내전 북문에 있는 호위가 보았다. 주자서는 비틀거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혀를 꽉 물었던 것이 기억이 났다.
주자서는 서안 앞쪽에 걸려 있는 화려한 장식이 있는 검을 보고 잠시 옛 생각에 빠졌다. 검술을 연마하고 말을 달리며 제후의 법도를 배우던 소년은 이제 없다. 주자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소매를 털었다. 온객행이 빌려준 가죽 신발은 딱딱하고 주자서에게 조금 커서 불편했다. 주자서는 신발을 벗어버리고 서재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죽간과 종이로 만든 책을 비롯해 비단 위에 그려진 그림과 지도도 있었다. 서역에서 온듯한 유리로 만든 물건은 주자서도 처음 보는 것이라 한참 구경했다. 주자서는 말로만 들어본 신기한 것 들이 많았다. 별자리를 표시한다는 혼천의(渾天儀)도 있었다. 주자서는 비단 두루마리를 구경하다 관동의 지도를 발견했다. 주자서의 고향 파양호가 그려진 지도는 주자서가 기억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 더욱 반가웠다. 지도를 보고 있을 때 밖에서 하인이 기별했다.
“공자님. 요기하실 음식을 가져왔습니다.”
주자서는 깜짝 놀라 지도에서 손을 떼고 소리가 나는 장지문을 보았다. 주자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있었다. 하인이 안으로 들어오려는 소리가 났다. 주자서는 너무 당황하여 자리에 주저 앉아 몸을 숨겼다. 하인은 장지문을 열어 고개를 들이밀고 여기저기 살펴본 뒤 문을 닫고 서재를 나갔다.
흰 쌀죽 한그릇으로 하루를 버티는 주자서에게 끼니를 챙기는 것은 생각보다 귀찮은 일이라 주자서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숨어있는 책장 바로 앞에 비단 두루마리에는 장안에서 유행한다는 시가가 적혀 있었다. 후궁들이 후원에서 하는 얘기로 들었던 사람의 시가이다. 주자서는 시가를 읽으며 생각했다. ‘이 사람은 금을 잘 탄다 하였는데….’ 주자서는 노래하며 금을 타는 시인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워졌다. 황궁에 있을 때 부태후는 사람을 모아 연회를 여는 것을 좋아하여 음악과 춤을 구경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연회에 참가할때면 주자서는 남의 눈을 신경쓰느라 기예(技藝)를 감상할 여유가 전혀 없었다. 무료(無聊)한 황궁생활은 서책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주자서도 서책을 가까이하게 했다. 그러나 지위가 낮은 후궁이 서책을 구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기 주자서가 가지고 있는 책들은 대부분 황실의 법도를 근간으로 하는 유경(儒經)이 대부분이었다. 주자서는 바닥에 주저앉아 손에 잡히는 비단 두루마리를 모두 펼쳐 읽어보았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것도 서로를 그리워하는 애정시도 주자서에게 너무나 낯선 것들이라 괜히 마음을 들뜨게 했다.
온객행은 별로 유쾌하지 않은 부친과의 대화를 마치고 다시 처소로 향했다. 형들이 관직에 나아 갔으니 가문은 온객행 아니면 고명딸인 온상(溫湘)이 대를 이어야 하는데 아무래도 온여옥은 한살이라도 더 많은 온객행이 상단을 물려받기를 원했다. 해가 짧아진 것인지 아니면 대화가 길어진 것인지는 몰라도 처마 위로 어스름하게 땅거미가 내려 앉았다. 온객행은 처소로 돌아가는 길에 주방에 들렀다. 온객행을 본 하인이 그를 반기며 말했다.
“공자님! 서재에 계시지 않아 찾았습니다.”
온객행이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서재에 손님이 있지 않소?”
하인이 웃으며 꿀에 절인 산사자(山査子; 아가위, 꽃사과)를 가져왔다.
“손님이요? 손님이 계십니까?”
온객행은 하인이 가져온 꽃사과를 보고 물었다.
“언제쯤 다녀오셨소?”
하인이 온객행의 손에 꽃사과가 든 소반을 쥐어 주며 말했다.
“벌써 한 두 시진은 지난 것 같은데요? 시장하십니까? 저녁을 준비할까요?”
온객행은 꿀에 절여져 반질반질한 꽃사과를 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서둘러 서재로 향했다.
“저녁은 서재에서 먹겠습니다. 위장에 부담되지 않는 음식으로 부탁하오.”
하인이 시원스럽게 인사하며 온객행을 배웅했다.
온객행이 서재로 돌아왔을 때 방안은 꽤 어두워서 안이 잘 보이지 않았다. 온객행은 얼른 등롱을 찾아 불을 붙였다. 서재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온객행은 의아하여 주변을 둘러보다 서안 옆에 다소곳이 벗어 놓은 가죽신을 발견했다. 서안 위에 들고 온 소반을 놓고 자리에 앉아 꽃사과를 하나 집어먹었다. 새콤하고 달콤한 맛은 온객행이 좋아하는 맛이다. 서재를 둘러보던 온객행의 시선에 책장 아래 흐트러진 옷가지가 보였다. 온객행은 자리에서 일어나 옷가지가 보이는 책장으로 갔다. 바닥에 기대고 앉아 고개를 살짝 들고 눈을 감고 있는 주서가 보였다. 잠이 든 모양이다. 주서는 책장에 비단 책자를 걸어 놓았다. 주서가 걸어 놓은 책자는 요절(夭折)했다는 비운의 시인의 노래다.
‘유리 술잔에 호박 빛깔 술이 짙어 술방울이 진주처럼 붉다.
용을 삶고 봉황을 구워 옥 같은 기름이 흐르고 비단 휘장과 수놓은 장막에는 향기로운 바람 에워쌌네.
피리 불고 북 치니 하얀 이의 미인 노래하고 가는 허리의 미녀 춤을 춘다.
더구나 화창한 봄에 해가 저무니 복숭아꽃 어지러이 떨어져 붉은 비 같구나.
그대에게 권하니, 종일 실컷 취하라. 술은 유영의 무덤까지 이르지 않으니.’ (2)
금을 잘 탔다던 그는 고귀한 신분에도 불구하고 뜻을 펼치지 못하고 죽었다고 했다. 주서가 읊조리던 다른 노래 역시 술을 권하는 시였는데 주서는 퍽이나 술 마시는 것을 즐기는 모양이다. 온객행은 주서를 좀더 자세히 보기 위해 쪼그리고 앉았다. 그러다 혹시 기생이었나 싶어서 주서의 손을 들어 손끝을 보았다. 보통 기생은 악기를 다루기 때문에 손끝이 거칠거나 모양이 변형되어 있다. 주서의 손은 조금 차갑고 하얗다. 여인의 손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크고 사내의 손이라고 하기에는 부드럽고 곱다. 붓을 쥐거나 검을 쥐었던 흔적도 없다. 온객행은 주서에 대해 하나 둘 알아 갈때마다 알 수 없는 질투를 느꼈다. ‘정녕 누군가의 첩일까? 그가 기생이라면 돈으로 그를 살 수 있을까?’ 온객행은 자기도 모르게 주서의 손을 꼭 쥐었다. 온객행은 한참 주서의 손을 잡고 있었다. 온객행의 체온으로 주서의 손이 따뜻해 질때까지 그는 깨어나지 않았다. 온객행은 주서가 깨어나지 않을까 덜컥 마음이 내려 앉아 주서의 어깨를 흔들었다.
주서는 작게 한숨을 쉬더니 곧 눈을 떴다. 온객행은 주서의 손을 놓고 그의 팔을 잡아 일으키며 말했다.
“바닥에서 무엇을 하셨습니까?”
주서는 온객행을 보고 웃었다. 온객행은 괜히 부끄러워져서 일어난 주서의 옷을 털며 말했다.
“요기는 하셨습니까? 벌써 일경(一更; 19-21시)이 다 되어 갑니다.”
주서는 말없이 펼쳐 놓았던 비단 두루마리를 다시 감아서 있던 자리에 올려놓았다. 온객행이 주서가 올려 놓은 비단 두루마리를 들어 주서에게 건네며 말했다.
“마음에 드시면 가지셔도 좋습니다. 이 시인은 별로 인기가 없거든요.”
주서가 손을 내젓고 말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어째서 인기가 없을까요?”
온객행은 비단 두루마리를 주서의 손 위에 올려놓고 서안으로 가서 앉으며 말했다.
“그의 시는 온통 절망과 죽음뿐이니까요.”
주서는 받은 두루마리를 제자리에 놓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온객행은 서안 위에 올려 두었던 꽃사과를 권했다. 주서는 한참 진주처럼 붉은 꽃사과를 보고 있다가 고개를 저어 거절했다. 온객행이 꽃사과를 하나 더 집어먹으며 말했다.
“주공자께서는 술 마시는 것을 좋아하셨나 봅니다.”
주서는 온객행이 앉은 서안 옆에 벗어 놓은 신발을 발견하고 멋쩍게 웃으며 의자에 걸터앉아 신발을 신으며 말했다.
“제가요?”
온객행이 주서에게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저에게 술을 권하시는 겁니까?”
주서는 당황한듯 소매를 들어 입을 가리고 웃었다. 여인들이 하는 것처럼. 온객행은 그 모습이 낯설면서도 어울려서 기분이 이상해졌다. 주서의 목소리는 힘이 없고 작다. 주서가 뭔가 말했는데 온객행은 그의 몸짓을 보느라 듣지 못했다. 온객행이 주서에게 몸을 바짝 붙이며 물었다.
“뭐라구요?”
주서는 소매를 내리고 다가온 온객행의 귓가에 속삭였다.
“온공자께서는 술을 즐기십니까?”
온객행은 주서의 숨결이 닿은 귀가 뜨거워서 얼른 몸을 떼고 귀를 감쌌다.
온객행은 조금 혼란스러웠다. 온종일 주서를 보고 만지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주서의 행동 하나에 어디로 숨어버리고 싶은 부끄러운 기분을 동시에 느꼈다. 온객행의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조금 놀란 주서가 온객행에게 물었다.
“온공자?”
온객행은 당황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주서가 사랑스러워서 와락 끌어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도 모르게 정말로 그렇게 할 것 같아서 온객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주서가 앉은 자리에서 그를 올려보며 눈썹을 찌푸리자 온객행은 찡그려진 눈썹이 안타까워 자기도 모르게 손끝으로 주서의 눈썹을 그렸다.
“아미(蛾眉; 길고 얇은 누에나방 같은 눈썹).”
온객행의 말에 처연한 주서의 얼굴이 조금 더 슬퍼졌다. 온객행이 뭘 더 할 새도 없이 장지문 밖에서 하인이 기별했다.
“공자님, 저녁을 준비했습니다.”
하인은 온객행의 허락을 기다리지 않고 장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온객행은 불에 데인 듯 주서의 얼굴에서 손을 떼고 하인이 찬합을 내려놓은 탁자로 가서 앉았다. 주서는 한참 서안 옆에 앉아 있다가 탁자로 갔다.
하인이 서재를 정리하며 말했다.
“오늘도 서재에서 주무십니까?”
온객행은 건화(乾貨; 말린 전복)를 넣고 끓인 죽을 떠서 주서의 자리에 놓고 자신의 몫을 뜨며 말했다.
“그렇소.”
하인이 주서를 힐끔 보고 말했다.
“그러지 말고 손님을 객실로 모시지요.”
온객행이 숟가락을 들고 죽을 뜨며 말했다.
“부친께서 내 손님을 좋아하지 않는 것을 알지 않는가?”
주서는 의자에 앉아 자기 몫의 죽그릇을 보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인은 주서의 태도를 보고 기분이 상했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지만 온객행이 하인을 내보내며 말했다.
“어서 가서 일 보시게. 다 먹은 그릇은 정리하여 찬합에 넣어 둘 테니.”
하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한번 주서를 힐끔 보고 서재를 나갔다. 온객행이 음식을 먹는 소리와 등롱이 타들어 가는 소리가 방안을 채웠다. 온객행이 주서를 보고 말했다.
“주공자, 식기전에 어서 드세요.”
주서는 이번에도 음식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다가 대부분의 음식을 남겼다.
온객행은 걱정이 되어 물었다.
“주공자께서 좋아하는 음식은 무엇입니까? 제가 준비하라고 하겠습니다.”
주서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온객행은 애가 타서 주서의 팔을 잡고 말했다.
“주공자. 의원께서 기를 보하지 않으면 병을 치료할 수 없다 하셨습니다. 몸이 좋지 않은 것은 알고 계십니까?”
주서는 의아한 얼굴로 온객행에게 말했다.
“제가 아픕니까?”
온객행은 황당하여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치고 말았다.
“주공자!”
주서는 온객행의 윽박지르는 소리에 조금 기가 죽어서 몸을 움츠리더니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온공자께서 걱정하실 일이 아닙니다.”
온객행은 조금 화가 나서 주서의 양쪽 어깨를 잡고 말했다.
“이렇게 먹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어요.”
그러다 온객행은 어떻게 주서를 만나게 되었는지 생각났다. 온객행은 괜한 이야기를 시작한 것 같아 겁이 났다. 주서는 고개를 숙인 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온객행은 주서를 놓아주고 탁자에서 일어나 그릇을 정리해 찬합을 들고 서재를 나왔다.
주자서는 온객행의 행동에 위화감을 느꼈다. 주자서는 한참 전에 함께 수학했던 친우들을 떠올리려고 노력했으나 기억나는 것이 많지 않았다. 온객행의 손이 닿았던 눈썹의 그 느낌이 참으로 이상하다. 주자서는 손을 들어 눈썹을 만지며 말했다.
“아미…?”
그러다 보통 사내의 눈썹을 그렇게 말하던가 싶어서 의아했다. 그리고 후원에서 후궁들이 떠들던 말이 떠올랐다. 요즘 장안에는 사내를 첩으로 들이는 것이 유행이라고 했다. 온객행이 다른 마음이 있어서 그를 자기 집으로 데려온 것일까 싶어서 괜히 겁이 났다. 겨우 황궁의 후궁 생활을 벗어났는데 또 다시 누군가의 첩실이 되어 내원에 갇혀 살고 싶지 않았다. 주자서는 낮에 열어 두었던 창문으로 밖을 보았다. 날이 어두워져 풀벌레 우는 소리가 났다.
주자서는 탁자 위에 타고 있는 등롱의 불을 끄고 서안으로 가서 창밖을 보았다. 중추가 지났으니 저 달은 기우는 달이다. 옅은 구름에 가린 달은 중명원에서 보던 것과 꼭 같으면서도 다르다. ‘나는 자유를 그리워했구나.’ 그동안 얽매인 것이 너무 많아 자유로운 것이 무엇인지 잊고 살았다. 주자서의 고민은 의미가 없다. 살아서 다시 누릴 수 있을까 했던 자유를 손에 쥐었는데 두려워만 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다시 고개를 들어 달을 보니 달을 가리던 구름이 모두 흩어졌다. 주자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를 나가려고 하다가 밖에서 나는 인기척에 놀라서 몸을 숨겼다. 서재 주변에 번을 서는 호위가 보였다. 어제는 보지 못한 호위다. 주자서는 작게 한숨을 쉬고 다시 서재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머리의 끈을 풀어 높이 올려 묶고 입고 있던 비단 옷도 벗어 버렸다. 허리를 펴고 찌뿌둥한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고 나니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내의 차림으로는 밖에 나갈 수 없어서 서재 이곳 저곳을 뒤져보았으나 옷가지는 찾을 수 없었다. 한참 고민하던 주자서는 창문 옆에 서서 사람의 기척을 읽다가 조심스럽게 서재를 나왔다.
주자서가 간과한 것이 있다면 온객행이 정말 많이 부자라는 점이다. 집이 너무 넓어서 주자서는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우물가 근처까지 온 주자서는 우물 옆에 놓여 있는 작은 간이 의자에 앉아 숨을 돌렸다. 이제 일각? 반주향도 움직이지 않은 것 같은데 숨이 턱끝까지 차오른다. 숨을 고르고 있는데 소녀가 물을 길러 왔다. 주자서는 얼른 일어나 소녀가 물 긷는 것을 도왔다. 소녀는 주자서를 위 아래로 보더니 말했다.
“왜 내의만 입고 계시오? 날이 추운데 세목이라도 할 참이오?”
주자서가 웃으며 고개를 흔들자 소녀는 금방 가지고 온 물동이를 이고 가버렸다. 주자서는 조금 더 앉아 있다가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부르르 떨고 다시 나가는 길을 찾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주자서는 운이 좋게 빨래를 하는 곳에 닿아 하인들이 입는 무명옷을 빌려 입었다. 어설프게 옷을 갈아 입고 나온 주자서를 발견한 하인은 그를 마구간으로 데려가 말을 돌보게 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말이다. 후원에서는 마차를 탈 일도 구경할 일도 없고 밖으로 나가지 않으니 더욱 볼일이 없었다. 주자서는 하인을 도와 마구간을 치우고 말의 몸을 닦아주었다. 하인은 날이 늦었으니 처소로 돌아가라고 했지만 주자서는 고개를 흔들며 조금 더 정리하고 가겠다고 먼저 하인을 보냈다. 삼경(三更; 23-01시)은 온택의 소등시간이다. 주자서는 마구간 옆에 몸을 기대어 소등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나가는 문을 찾았다. 서쪽문은 말이 나가는 문이라 다른 문보다 조금 컸지만, 사람이 다닐 수 있게 샛문을 두기 때문에 운이 좋으면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나갈 수 있었다. 주자서는 호위들이 교대하는 시간을 틈타 온택을 나왔다. 거리로 나오자 시간을 알리는 보사(步士)가 북을 치며 오경(五更; 03-05시)이 끝나 통금이 해제된 것을 알렸다. 주자서는 운이 좋다고 생각하며 바로 장안성을 나가는 문으로 향했다.
주서에게 묻고 싶은 것이 너무나 많다. 수천번도 더 넘게 묻고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묻지 못했다. 온객행은 혹시 주서가 도망갈까 서재 주변에 호위를 세워 두었다. 온객행은 자신이 왜 주서에게 이렇게까지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평소라면 상대방의 기분 따위 맞추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떠나건 말던 온객행은 항상 호의를 베푸는 쪽이었기 때문에 아쉬울 것이 없었다. 그러다 서재에 이불이 있었는지 혹시 춥지는 않은지 걱정이 되어 처소에 있던 화로를 들고 서재로 향했다. 서재에 등롱이 꺼져 있다. 온객행은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주공자.”
대답이 없다. 온객행은 혹시 화가 났는가 싶어 밖에서 조금 더 기다리다가 다시 말했다.
“주공자 날이 찹니다. 화로를 가져왔어요.”
이번에도 역시 대답이 없다. 온객행은 주서가 혹시 잠들었나 싶어서 조용히 장지문을 열고 들어갔다. 열어놓은 창문으로 달빛이 쏟아져 서안을 비췄다. 서안 옆에는 벗어 놓은 옷가지가 보였다. 온객행은 어설픈 주서의 행동이 귀여워서 웃음이 나왔다. 온객행은 화로를 침상이 있는 곳 근처에 두고 휘장을 걷었다. 침상은 비어 있었다.
주자서는 운 좋게 마음씨 좋은 노파를 만나 수레를 얻어 타고 장안성의 서쪽에 있는 금광문(金光門)까지 나왔다. 주자서는 노파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 익주(益州)로 향하려고 했다. 서북의 땅은 이민족이 많이 사는 곳으로 산지가 험하고 사는 사람이 많지 않다고 했다. 그런 주자서를 노파가 잡았다. 주자서는 노파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고 하룻밤 노파의 집에서 신세를 지게 되었다. 잠자리에 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주자서는 거칠게 자신의 팔을 휘어잡는 손길에 놀라 잠에서 깼다. 주자서는 자신의 팔을 잡은 남자를 보았다. 노파는 어디에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무기로 무장한 건장한 남자 여럿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주자서가 당황하여 말했다.
“이게 대체…?”
남자는 주자서의 턱을 잡아 그의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 보더니 말했다.
“그 노파가 거짓말을 하진 않았군. 정말 반반하게 생겼어.”
옆에 서있던 남자가 말했다.
“사내가 뭐가 좋다고 비역질을 하나 싶은데 또 이런 애들을 보면 나도 동한다는 말이야.”
남자의 말에 옆에 있던 이들도 동조하며 시시덕거렸다. 주자서는 잡힌 팔을 뿌리치려고 발버둥쳤지만 소용이 없었다. 주자서의 팔을 잡은 남자가 말했다.
“장안에서 그냥 주어지는 호의가 어디 있겠는가? 그 노파는 너를 팔고 두둑히 한몫 챙겼으니 앞으로 볼일 없겠군.”
주자서는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표정을 구긴 채로 남자들을 보았다. 주자서를 보고 동한다고 말했던 남자가 다가와 주자서의 미간을 문지르더니 말했다.
“찡그린 얼굴도 나쁘지 않군. 아주 비싸게 팔 수 있겠어.”
주자서는 뭘 어떻게 해보지도 못하고 다시 수레에 실려 장안성 안으로 들어왔다.
처음에는 서재 어디에 잠이 들었나 했다. 하지만 서재 어디에서도 발견하지 못했을 때는 혹시 온객행의 처소로 돌아간 것인가 생각했다. 온택을 뒤져도 주서가 나오지 않자 온객행은 매우 언짢았다. 평소에 감정의 기복이 크지 않은 온객행이 동요하는 모습을 보고 그의 호위가 조금 놀랐을 정도로 온객행의 감정은 술렁이고 있었다. 그 이후에 무엇을 했는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았다. 장안성을 나가는 모든 문에 있는 문지기를 매수하고 사방으로 그를 찾다가 온택이 있는 선평방(宣平坊)에서 그다지 소문이 좋지 못한 비연각(飛燕閣)의 사졸이 주서를 수레에 싣고 가는 것을 보았다. 온객행은 타고 있던 마차에서 훌쩍 내려 수레에 탄 주서를 불렀다.
“주서!”
주서는 온객행이 부르는 소리에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온객행은 그것이 또 화가 나서 수레를 멈추고 주서의 어깨를 잡았다.
“주서!”
주서는 온객행의 목소리를 듣고 놀랐는지 고개를 들어 온객행을 보고 안심한 기색을 보였다. 온객행은 자신을 따라온 호위의 칼을 빼앗아 주자서의 손목을 묶은 밧줄을 잘라버리고 그가 수레에서 내릴 수 있게 부축하며 말했다.
“아직 몸이 성치 않은데 어디에 다녀오십니까?”
주서는 말없이 온객행이 부축하는대로 수레에서 내렸다. 주서는 자신을 붙잡아온 비연각의 사졸들을 보았다. 온객행이 고개를 돌려 사졸들을 보자 비연각의 사졸들은 조금 불편한 기색으로 말했다.
“온공자, 이자는 조모가 돈을 갚지 못해 대신 데려온 사람이오. 사람을 잘못 보신 것 아니오?”
온객행이 표정을 구기며 물었다.
“조모가 빚진 돈이 얼마요?”
사졸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다가 말했다.
“금 반냥이오.”
온객행은 콧방귀를 끼며 말했다.
“겨우?”
온객행은 소매를 뒤져 자신의 염낭을 꺼내 사졸에게 던지며 말했다.
“금 반냥은 넘을 것이오.”
비연각의 사졸이 온객행의 염낭을 열어 돈을 확인했다. 수레를 끌던 사졸이 온객행을 막으려고 하자 온객행 옆에 있던 호위가 말했다.
“배짱 좋게 장안성 안에서 사람을 사고 파십니까? 현위(縣尉) 어르신께서 알고 계신가요? 차용증 좀 봅시다.”
사졸은 호위의 말에 우물쭈물하다가 비연각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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