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扇 第1

新裂齊紈素 제나라의 고운 비단 새롭게 자르니

중추절은 큰 명절이다. 별로 높지 않은 신분의 후궁에게도 황제의 하사품이 내려올 만큼 말이다. 벌써 10년째 장안성 대명궁(大明宮)에 갇힌 주자서는 누이를 대신에 첩여 노릇을 하고 있다. 15살에 입궁한 주자서는 시집온지 사흘만에 과부가 되었다. 오늘 내일 하던 무제를 독살한 것이 황후였는지 귀비였는지 지금은 알 수 없다. 제일 홀대 받던 다섯째 황자 유흔(劉欣)이 태후 부씨(傅氏)의 세력으로 태자였던 유오(劉驁)를 죽이고 찬탈로 황제가 된 이후 모두 숙청당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주자서는 변변치 않은 출신과 배경으로 내명부에서 가장 낮은 지위로 상전이 되어버렸다. 황제의 승하 후에 후궁 중 나이가 어린 부인들은 제후의 후처자리로 보내거나 부모에게 다시 보내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주자서는 관동(關東)에서 가장 큰 파양군(鄱陽郡) 제후의 자식이었기 때문에 선황이 죽고 나서도 부태후의 명령으로 육궁에서 지내게 되었다. 볼모인 셈이다.

구중심처에서 황후 조씨(趙氏)가 지내는 교태전에서 가장 멀고, 육궁을 나가는 내전 북문에서 제일 가까운 곳에 있는 중명원(重名苑)이 주자서가 거처하는 곳이다. 주첩여는 선황이 승하하면서 공식적으로 주부인(周夫人)이라 불렸지만 내명부에서 일하는 하인들은 그를 서부인(絮夫人)이라고 불렀다. 주자서는 여인의 옷을 입어야 했기 때문에 항상 마른 몸을 유지해야 했고 점점 크는 키를 어찌 할 수 없어 자세도 구부정했다. 오래된 이불에서 꺼낸 헌 솜(絮)같이 축 늘어져 볼품없는 그와 꽤 어울리는 호칭이라 주자서도 내심 인정하는 호칭이다. 총애는 다퉈본 적도 없고, 벌써 몇 해째 병중인 주부인의 모습은 중명원에서 시중을 드는 시비 몇 명을 빼고는 얼굴도 잘 몰랐다. 큰 키를 가려보고자 가채도 하지 않았고 머리 장식이라고는 가장 좋은 것이 백옥으로 만든 비녀 정도였다. 옷도 항상 색이 없는 무채색 계열의 옷을 입었다. 명절이 다가오면 선태후는 자신전(紫宸殿)에서 연회를 베풀었기 때문에 주자서는 어쩔 수 없이 옅은 푸른색의 예복을 입고 단장을 했지만 화려한 선태후와 황후 바로 아래 앉는 주자서의 모습은 다른 후궁과 비교했을 때 너무 단출하여 오히려 눈에 띄었다.

주자서는 오랜만에 보는 눈 앞에 차려진 음식을 보고 허기가 일었지만 주변의 눈치가 보여 침만 삼키고 있었다. 부태후와 조황후가 들어와 상석에 앉았다. 주자서는 구부정하게 일어나 인사를 했고 그 뒤로 후궁들이 태후께 인사를 했다. 후궁들의 인사가 어느정도 마무리되었을 때 황제가 부태후 소생인 진왕(晉王)을 데리고 내전으로 들어왔다. 선태후와 황후는 황제와 같은 자리에 앉아 연회를 즐겼다. 먹지 못할 때 다른 사람이 먹고 마시는 것을 보는 것은 고통스럽기까지 한 일이라 주자서는 나풀거리는 옷을 입고 춤을 추는 무희를 멍하게 보고 있었다. 예복을 입기 위해 며칠 굶어야 했던 주자서는 정말 몸이 좋지 않았다. 파리한 안색으로 앉아 있던 주자서를 못마땅하게 보고 있던 부태후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주자서의 안색에 혀를 차며 몸이 좋지 않으면 처소로 돌아가도 좋다고 허락했다. 주자서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감사의 인사를 전한 뒤에 자리에서 일어나 중명원으로 향했다. 그는 자신전을 나오면서 비틀거리지 않기 위해 최대한 노력했다. 그를 부축하던 시비도 자신전을 나오자 곧 자기들이 원래 일하던 위치로 돌아가 버렸다.

중명원에 머무르며 일하는 시비가 없는 것은 주자서에게 다행인 일이기도 했기 때문에 주자서는 별말 없이 처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주자서는 제등 하나 없이 내전의 길을 걸었다. 내명부에서 일하는 하인들은 모두 자신전으로 갔는지 처소로 향하는 동안 주자서는 아무도 마주치지 않았다. 조금은 무거운 발자국 소리에 주자서는 자기도 모르게 발걸음이 조금 빨라졌는지도 모르겠다. 뒤쪽에서 누군가 그를 불렀다.
“부인! 부인.”
치렁치렁하고 무거운 예복을 입고 걷는 다는 것은 넘어지지 않기 위해 조심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 주자서는 몇 걸음 가지 못해 넘어지고 말했다. 남자는 들고 온 제등을 옆에 두고 주자서의 팔을 잡아 일으키며 말했다.
“부인. 괜찮으십니까?”
주자서는 놀라서 남자의 손을 뿌리치고 벽쪽에 몸을 기댔다. 남자는 주자서의 행동에 낮게 웃으며 말했다.
“주부인, 시비는 어디에 두시고 혼자 처소로 향하십니까? 걱정이 되어 따라왔습니다.”
남자는 부태후 소생의 진왕이었다. 주자서는 작게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기운이 없어 바람 빠지는 소리 같은 주자서의 목소리에 진왕이 주자서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밤이 이렇게 어두운데 어찌 혼자 길을 가십니까?”

주자서는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주자서는 보통 남자보다도 키가 컸는데 진왕은 주자서보다도 키가 컸다. 주자서는 어찌할 바를 몰라 숨을 헐떡이다가 사레에 들려 기침을 했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뚱이는 기침하는 것도 힘에 겨웠는지 신물이 올라오더니 결국 주자서는 피를 울컥 토하고 말았다. 진왕은 주자서가 바닥에 뱉은 피를 보고 깜짝 놀라 물러나더니 곧 주변을 이리저리 살펴보고는 제등을 들고 자리를 떠났다. 주자서는 한참 그 자리에 주저 앉아 기침을 하며 피를 토했다. 정말 당장 내일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데 참으로 질긴 목숨을 가졌다고 한탄을 하려고 하니 웃음이 났다. 주자서는 별로 죽고 싶은 생각은 없기 때문이다. 주자서의 기침소리는 웃음소리와 섞여서 조금은 괴이하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이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한 주자서는 중명원이 아니라 태액지(太液池)로 향했다. 왜 그렇게 했는지 주자서는 알 수 없었다. 함양(咸陽)에서는 중추달이 되면 한달 내내 위수(渭水)에 화등을 띄워 화등제를 한다고 들었는데 주자서는 본 적이 없다.
“그대 보지 못했는가? 황하의 물이 하늘에서 내려와 세차게 흘러 바다에 이르러 다시 돌아오지 못함을….(1)
주자서가 막 장안으로 들어올 때 유행하던 시가이다. 이제는 기억이 바래서 정말 그런 구절이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내쉬는 모든 숨이 한숨이 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밝은 달빛아래 연못은 참으로 아름답다. 감히 황제가 머문다는 누각으로 갈 수 없어 주자서는 길을 벗어나 하얀 월계화가 피어있는 연못가로 갔다. 얼핏 물 위로 보면 달빛에 빛나는 하얀 꽃이 화등처럼 보이기도 했다. 주자서는 잠시 쉬기 위해 바위에 걸터앉으려다 발을 헛디뎌 연못 속으로 빠졌다. 발이 닿지 않는 바닥을 찾아 허우적대던 주자서는 생각했다. ‘아… 드디어 끝이구나.’ 죽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살기위해 발버둥칠 힘이 남아 있지도 않았다. 주자서는 연못 바닥으로 가라 앉으며 생각했다. ‘세차게 흘러 바다에 이르기를….’


온객행은 중추절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황실과 연을 대고 싶어서 항상 많은 돈을 쓰는 온객행의 아버지, 온여옥(溫如玉)은 신의상단(新義商團)을 운영하며 황하에서 온상(溫商)이라고 불리는 유명한 상인이다. 그는 원래 견씨였으나 장사 수완이 좋아 선대의 양자가 되었다. 선대의 재산을 배 이상으로 불린 온여옥은 정치에 관심이 많아 자식들을 모두 유명한 학자에게 공부를 시켰다. 온객행은 공부를 하면 할수록 나랏일이라던가 상단일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매년 오는 흔한 명절에 온여옥은 수천 수백금을 들여 권문세가에 아첨을 하고 인맥을 만들었다. 관직을 얻기 위해서는 과거시험을 보는 방법도 있었지만 제후나 귀족에게 천거를 부탁하는 것이 훨씬 쉬운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온객행의 큰 형인 온세중(溫世仲)과 둘째 형 온추명(溫秋明)은 온여옥의 인맥으로 각각 이부(吏部)와 예부(禮部)에서 정6품에 해당하는 원외랑(員外郞) 좌사와 우사를 하고 있다. 관직에 있으면서 상인 출신인 것은 커다란 흠이었는데 명문가의 귀족들은 온가의 재화는 탐하면서 그들의 출신을 가지고 그들을 낮잡아 보았다. 온객행은 그런 이중적인 귀족들의 태도에 이골이 나서 형들처럼 관직을 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렇다고 온여옥의 뒤를 이어 상인이 되고자 하는 마음도 없었다.

온객행이 황궁에서 나오는 수로를 따라 곡강(曲江)근처까지 온 것은 어쩌면 흔한 변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중추절이라고 한껏 들뜬 그 떠들썩함이 온객행을 조금 지치게 했다. 장안성의 화등제도 매년 보면 특별할 것이 없다. 온객행은 온여옥 덕분에 귀족 못지 않은 호사를 누렸고 그래서 모든 일에 무감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멀리서 희미하게 들리는 폭죽소리에 온객행은 조금 짜증이 나서 장안성 남쪽의 황성의 수로가 이어진 곡강의 끝 부용지(芙蓉池)로 향했다. 중추절에는 사람의 발걸음이 많지 않은 곳이라 한산하고 어두웠으나 곡강의 줄기를 따라 희고 붉은 월계화가 피었다. 달빛에 빛나는 그 모습에 잠시 넋을 놓은 온객행은 도를 닦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고 생각하며 길을 걸었다. 조금 걷다 보니 자갈이 깔린 연못의 기슭이 나왔다. 온객행은 괜히 연못에 비친 달을 보겠다고 기슭으로 다가갔다. 올해는 작년보다 더 빨리 추워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 기슭의 돌뿌리에 걸린 커다랗고 하얀 물체를 보고 놀라서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으악!”
온객행은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그 물체를 보았다. 사람이다. 중추절에 실연한 여인들이 수로에 몸을 던진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던 터라 온객행은 표정을 구기며 발로 엎어져 있는 사람의 몸을 뒤집었다.

달빛에 보이는 파리한 안색은 현실감이 조금 없었다. 사내인지 여인인지 가냘픈 몸에 달라붙은 하얀 비단이 사람의 신분이 높았음을 말할 뿐이다. 온객행은 쪼그리고 앉아 사람의 얼굴을 만져보았다. 연못의 물은 아주 찬 모양이다. 사람의 뺨은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식어 있었다. 그래서 온객행은 그 사람의 작은 한숨에 깜짝 놀라 뒤로 덜퍼덕 주저 앉았다. 가늘고 미미한 한숨이 안타까워 온객행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사람을 뭍으로 끌어 올리고 입고 있던 장포를 벗어 둘러주었다. 점점 젖어가는 장포를 보고 있던 온객행은 이러다 정말 사람이 죽겠다 싶어서 흠뻑 젖은 그 사람을 품에 안아 들어 올렸다. 온객행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가벼워서 온객행은 여인인가 보다 했다. 온객행의 품에 안긴 사람은 숨소리가 점차 고르게 변하더니 몸을 심하게 떨기 시작했다. 며칠을 굶었는지 사람의 몸은 옷을 겹겹이 입고 있음에도 가늘고 야위었다. 물에 빠지고도 숨이 붙어 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온객행은 품에 안은 사람의 손과 발을 주무르며 생각했다.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온객행은 연못 정원 한 켠에 앉아 자신의 옷이 점점 젖어가는 것을 느꼈다. 곧 통금이라 움직일 수도 없어서 더욱 난감했다.

정원의 나무에 기대어 설핏 잠들었던 온객행을 깨운 것은 품속에서 바르작거리던 것이 갑자기 그를 밀치는 힘이다. 뒤로 벌렁 눕게 된 온객행은 잠결에 이 상황이 조금 우스워서 ‘하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던 사람은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지 온객행의 가슴팍으로 몸이 기울다 쓰러졌다. 그 사람은 당황하여 몸을 한참 버둥대다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온객행은 누운 채로 사람의 등을 쓸며 말했다.
“진정하시오. 진정하시오.”
그 사람은 한참 기침을 진정하려고 노력하다 울컥 피를 토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온객행이 소매에서 손수건을 찾아 입가에 대어주며 말했다.
“진정하시오! 병이 있으시오?”
온객행은 그 사람의 손목으로 손을 가져가 맥을 짚으려고 했다. 그 사람은 온객행의 손길을 거칠게 뿌리치며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안간힘을 썼다. 온객행은 그 사람을 놓아주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가 자리에 일어설 수 있게 도왔다. 그 사람은 잠깐 서 있는 듯하더니 다시 바닥에 주저 앉고 말았다. 온객행이 쪼그리고 앉아 그 사람의 팔을 잡고 말했다.
“진정하시오. 그대를 해치려는 것이 아니오. 오히려 반대지. 내가 그대의 목숨을 구했소.”
그 사람은 온객행의 말을 듣고 한참이나 아무 말도 없더니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허탈하게 웃었다.

주자서는 그렇게 바닥에 주저앉아 웃었다. 웃고 있는 줄 알았다. 눈 앞에 사람이 그의 뺨에 손을 들어 눈물을 닦아주지 않았다면 말이다. 주자서는 스스로 울고 있는 줄도 몰랐다. 주자서가 흩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세차게 흘러 바다에 이르러 다시 돌아오지 못함을….”
남자는 주자서의 말을 듣더니 웃으며 말했다.
“인생의 의미는 즐거움으로 만드는 것이니, 비싼 금 술잔이 빈 채로 달을 마주하지 마시오.”
주자서는 남자의 말을 듣고 생각했다. ‘그 다음 구절이 그랬던가? 푸른 실에 눈이 내리지 않았던가?’ 주자서는 정말 온 몸에 힘이 쭉 빠져서 정신을 잃었다.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은 얼굴로 애처롭게 울고 있는 이의 목소리는 많이 쉬어 있었다. 온객행은 쓰러진 사람을 부축한다는 핑계로 몸 여기저기를 더듬어 보았다. 아주 야위고 가벼웠으나 사내였다. 사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몸은 위화감까지 들게 했다. 저 멀리서 날이 밝아 오는 것을 보니 통금은 금방 풀린 것 같았다. 온객행은 사내를 들쳐업고 왔던 길을 되돌아 선평방으로 향했다. 중추절 다음 날이라 쉬는 곳이 많아서였는지 온객행은 선평방으로 향하는 한시진 동안 사람을 별로 마주치지 못했다. 온객행이 사내를 업고 집안에 들어와서 제일 처음 만난 것은 장성령이었다. 양주 경호파의 셋째아들로 상인이 되고 싶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저 멀리 양주에서 유학을 왔다.

등에 업힌 사람을 보더니 장성령이 웃으며 말했다.
“어제는 갑자기 어디로 사라진 것입니까? 어디서 그렇게 마셔서 어느 집 공자님을 업고 오시는 것이에요?”
온객행이 한숨을 쉬고 말했다.
“이 공자에게 병이 있는듯하니 의원을 불러주게.”
장성령이 깜짝 놀라 온객행의 등에 업혀 있는 사내를 부축하며 말했다.
“병이 있다고요? 병이 있는 분과 술을 밤새 마신 겁니까?”
온객행이 조금 짜증을 내며 말했다.
“내가 술을 마신 것은 당연한 일인가? 잔말 말고 어서 의원이나 불러오게.”
장성령이 부축하던 팔을 놓고 말했다.
“온공자의 방으로 모시겠습니까?”
온객행은 잠깐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이고 자신의 처소로 향했다. 온객행은 침대 위에 사내를 올려놓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이불을 덮다가 보인 하얀 발이 추워 보여서 온객행은 부산을 떨며 화로를 찾았다.

상단에 기거하는 의원이 찾아와 사내의 맥을 짚고 갔다. 의원은 이 사내가 꽤 오랫동안 음식을 제대로 먹지 않았다는 점과 그로 인한 내장의 손상, 그리고 물에 빠지면서 한증이 들었다고 말했다. 의원은 사내의 목덜미에 올라온 발진을 보며 함부로 약을 처방하면 몸에 오히려 무리가 올 수 있으니 제때 끼니를 챙겨 기본적인 기를 보한 후에 치료가 가능하다는 말도 했다. 온객행은 사내가 입고 있던 비단을 만져보며 고개를 끄덕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의원이 나가고 하인이 백미로 쑨 하얀 죽을 가지고 들어왔다. 온객행은 사내가 누운 침대 옆에서 죽이 다 식어 가는 것을 지켜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갔다.

사내가 입고 있던 옷은 황실에 납품하는 은조사(銀造紗)로 짠 비단이다. 겹겹이 입어야 하는 황실 예복 특성상 시판되는 비단보다 얇고 실이 더 가늘다. 그래야 통기성이 좋아 여름에도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온객행은 장부를 모아 놓는 서각에 가서 최근에 은조사를 거래한 기록에 대해 조금 찾아보았다. 비단은 나라에서 관리하는 물품 중에 하나로 아무리 돈이 많은 상인이나 귀족이라도 함부로 살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사내가 입고 있던 중의는 남성의 중의라고 하기에 소매가 너무 크기도 했다. 마치 후궁이 입는 것 같은 중의를 입은 사내. 그는 대체 정체가 뭘까?


주자서는 낯선 곳에서 눈을 떴다. 며칠 굶는 것은 몸이 조금 고달플 뿐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자주 반복되니 큰 일이 된 모양이다. 점점 쇠하는 몸을 뭐 어떻게 할 수 없어서 방치했더니 이런 사달이 일어난 것이다. 물에 빠진 순간 살아 남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 주자서는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이 조금은 얼떨떨하기까지 했다. 주자서의 목숨을 구했다는 남자는 당장 시야에 보이지 않았다. 힘겹게 침상에서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귀족 자제인지 집안에 있는 물건들이 황실에서 보던 것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주자서가 덮고 있는 이불도 중명원에서 주자서가 쓰던 낡은 이불보다 좋아 보였다. 주자서는 작게 한숨을 쉬다 침상 옆에 협탁에 놓인 딱딱하게 굳은 흰 쌀죽을 보았다. 주자서는 허기가 일었지만 마음이 불안하여 이내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육궁에서 했던 것처럼.

다른 곡식이 섞이지 않은 흰 밥은 부의 상징이다. 주자서는 황궁에 와서야 처음으로 먹어 보았다. 그 남자는 아주 많이 부자인 모양이다. 그러다 주자서는 불현듯 혹시 궁궐에서 자신을 찾지는 않을까 마음이 불편했다. 입고 있던 옷은, 머리를 장식했던 장신구는 모두 어디에 갔는지 주자서는 내의 차림에 머리를 푸르고 있다. 주자서는 말을 듣지 않은 몸을 잘 달래서 침상에서 나와 일어섰다. 신발을 찾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맨발에 닿는 바닥의 감촉이 차갑다. 주자서는 다시 발끝부터 온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이대로 도망친다면 어디로 갈 수 있을까? 어차피 주자서를 주첩여를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주자서는 다시 파양군으로, 양친께 갈 수도 없었다. 누이를 대신해 장안으로 향하면서 절연했기 때문이다. 다시 황궁으로 돌아가는 것을 생각하니 주자서는 몸에 힘이 빠져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어스름한 저녁노을이 창호문을 붉게 물들이고 온객행은 방을 나가기 전보다 더 많은 궁금증을 가진 채로 처소로 돌아왔다. 온객행은 문을 열자마자 본 침상이 비어 있어 당황했지만 곧 멀지 않은 바닥에 앉아 있는 사내를 발견하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사내는 죄를 지은 사람처럼 두 손으로 겨우 바닥을 지탱하고 앉아서 움직이지 않았다. 온객행이 사내에게 다가가 그의 팔을 잡아 일으키며 말했다.
“바닥이 찬데 어찌 여기 계십니까?”
주자서는 화들짝 놀라 남자의 손을 뿌리쳤다. 온객행은 뿌리쳐진 손을 멋쩍게 보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바닥에 앉아 있는 사내를 보았다.
“나는 온가 객행이오. 그대의 이름은 무엇이오?”

주자서는 물에서 나와 처음으로 자신을 구했다는 남자의 얼굴을 자세히 보았다. 앳되고 어린 얼굴이다. 주자서도 장안에 오기 전에 저런 얼굴을 하고 있었을까?”
주자서는 대답없이 물끄러미 온객행을 보았다. 온객행은 답답하여 다시 주자서의 팔을 잡아 일으켜 침대에 앉히고는 말했다.
“무슨 사연으로 가을의 차가운 연못에 몸을 던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너무 슬퍼마시오. 원래 인연이라는 것은….”
주자서는 침상에 걸터앉아 자기 앞에서 정인이니 애정시니 하는 뜻 모를 소리를 하는 온객행을 보다가 피식 웃었다. 온객행은 얼굴을 찌푸리더니 주자서 옆에 털썩 앉아 주자서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말했다.
“그대가 말하지 않았소 황하의 물이 하늘 위에서 내려와 세차게 흘러 바다에 이르러 다시 돌아오지 못하니, 우리는 한시도 낭비하지 말고 즐거움으로 흐르는 세월을 채워야 하는 것이오.(1)

주자서는 참으로 오랜만에 맞닿은 사람의 온기가 싫지 않았다.
“서(絮)….”
주자서는 자기도 모르게 내명부에서 그를 부르는 멸칭으로 자신을 소개할 뻔했다. 온객행이 고개를 돌려 주자서를 보고 물었다.
“서?”
주자서가 고개를 작게 끄덕이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주서….”
온객행이 주자서를 보고 웃으며 물었다.
“무슨 서를 쓰시오?”
주자서가 말없이 고개를 돌려 이불을 손으로 만지자 온객행이 말했다.
“버들개지(柳絮)할 때 서를 쓰시오? 버들개지 마냥 마음이 가벼워 이 험난한 세상을 어찌 헤쳐 가시려고.”
주자서는 온객행의 말에 머리를 얻어 맞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 그 서는 케케묵은 오랜 솜을 뜻하는 글자이기도 했지만 봄에 흩날리는 버들개지를 뜻하는 글자이기도 했다. 그러다 주자서는 문득 버들개지처럼 멀리멀리 날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도 그를 모르는 곳으로 아주 멀리 말이다. 주자서는 마음이 조금 홀가분해졌다. 온객행이 주자서를 놓아주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일단 나는 배가 아주 고파서 밥을 좀 먹어야 하겠소.”
온객행이 탁자 옆에 딱딱하게 말라붙은 흰죽을 가지고 방을 나갔다.


온객행이 잣을 넣고 끓인 죽을 가지고 돌아왔을 때 주서는 침상에 다리를 걸친채로 누워있었다. 신발 신지 않은 하얀 발이 조금 야살스러워서 온객행은 침을 꿀꺽 삼키고 헛기침을 했다. ‘큼큼’ 온객행의 기침소리에 주자서는 눈을 떴지만 몸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온객행이 방안을 뒤지더니 예전에 신던 가죽신을 찾아 침상 옆에 두었다. 말없이 누워 있던 주자서는 온객행이 침상으로 다가오고 나서야 겨우 일어나 앉아 온객행이 가져온 신발을 보았다.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가죽 신이다. 주자서는 몇 번만 신으면 금세 닳아버리는 비단신을 신고 산 세월이 길었다. 그것도 형편이 여의치 못해 병중인 것을 핑계삼아 대부분의 시간을 침상 위에서 보냈다. 운이 좋아 서책을 얻어 읽으면 조금 덜 심심하였으나 그 마저도 없으면 그냥 하루 종일 침상에 앉아 열리지 않는 장지문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주자서가 신발을 신기 위해 일어나자 온객행이 또 부산을 떨며 족건을 가져와 신겨주며 말했다.
“조금 클지 모르니 족건을 신으세요.”
주자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온객행이 하는 대로 두었다. 족건을 신고도 멀뚱히 있는 주자서를 빤히 보던 온객행은 웃으며 신발을 신겨주었다.

한참 주서를 이리저리 뜯어보던 온객행은 시선을 내려 주자서의 가슴팍을 보았다가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하얀 내의만 입고 있는 주서는 아슬아슬해 보여서 괜히 온객행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온객행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중추절에 입으라고 아버지께서 보내주신 푸른 비단 옷을 꺼내 주서에게 입혔다. 주서가 일어서니 온객행과 거의 비슷하게 키가 컸다. 온객행은 점점 구부정해지는 주서의 자세를 등허리에 손을 얹어 고쳐가며 옷을 입혔다. 주서는 시중을 받는 것이 익숙해 보였다. 온객행이 겉에 두르는 장포를 입히자 귀티나는 공자로 보이기 시작했다. 풀어진 머리를 정리할까 하다가 그가 며칠 굶었다는 의원의 말이 떠올라서 온객행은 주서의 소매를 잡아 탁자로 데려가 앉히고 말했다.
“일단 드시오. 시장하지 않으십니까?”

주자서는 온객행이 가져온 소반에 죽을 보고 허기가 일었다. 아직도 김이나는 고소한 잣냄새가 나는 죽이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반대편으로 가서 앉았다. 숟가락을 들어 잣죽을 뜨며 말했다.
“제가 위장병이 있어서 일단 죽으로 속을 달래 볼까 하는데 어떠십니까?”
주자서는 자기 앞에 있는 죽그릇을 보다가 머뭇거리며 숟가락을 들었다. 온객행은 주자서가 하는 행동을 뚫어져라 관찰하며 잣죽을 먹었다. 온객행이 잣죽을 다 비우고 한참 후에 하인이 들어와 등롱을 밝힐 때까지 주자서는 죽 한 그릇을 전부 비우지 못했다. 중간중간 기침을 해가며 겨우 죽 한그릇을 비우는 것을 본 온객행이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주공자께서도 위장병이 있으십니까?”
주자서는 이번에도 망설이다가 그냥 그렇다고 대답했다.

주자서는 너무 오랜만에 꾸미지 않은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조금 질린 참이다. 누가 들어도 사내의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과 이렇게 길게 대화를 한 것도 언제 마지막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오랜만에 느껴지는 포만감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중추월인데 벌써 꺼내 놓은 화로 때문이었을까? 주자서는 잠이 쏟아져 눈을 뜨고 있기가 힘들었다. 주자서는 탁자에 고개를 괴고 등롱을 보았다. 중명원에서 주자서가 가장 많이 한 일이다. 등롱을 보고 있기. 그것도 나중에는 기름이 아까워서 원하는 만큼 하지 못했다. 주자서는 온객행이 나가는 소리도 듣지 못하고 스르르 잠에 빠졌다.

온객행은 죽그릇을 들고 방을 나가면서 탁자에 고개를 괴고 등롱을 보고 있는 주서를 보았다. 위태롭고 처량하다. 사내인것 같으면서 여인같다. 고관대작들 사이에서는 남첩을 들이는 것이 유행이라 하던데 혹시 그는 누군가의 첩이었을까? 주서의 움푹 패인 눈두덩이와 볼에 살이 차올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온객행은 아직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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