蛇苺外傳 第6完

敵戰 | 서로 비등할 때 필요한 기묘한 계략.

기룡은 곡우에게 그림 그리는 방법을 가르쳤다. 계낭인 곡우는 용인 기룡만큼의 영력을 낼 수 없었기 때문에 기룡이 그린 그림처럼 신비한 도술이 깃들지는 않았지만 기룡의 기교는 모두 배웠다. 그 사이 여러 번의 가을이 지났다. 주자서는 스스로 사람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의 영력을 모았고 지주와 기룡에 이어 노유와 미원을 스승으로 모셨다. 하늘의 일은 매번 바뀌기도 하지만 또 항상 바뀌는 것이 아니라 크고 작은 일을 겪은 온객행은 주극성의 일에 익숙해졌다. 현명은 징계받았던 기간보다는 조금 먼저 주극성으로 돌아왔는데 그 이유는 산천대제가 자주 천궁에 보고를 하러 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산천대제는 황룡과의 일로 원래는 금모원군이 하던 땅의 일을 보고하는 일을 맡았다. 땅의 일을 보고 받는 진군과 현녀는 호락호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전처럼 남에게 일을 맡길 수 없었다. 현명이 돌아온 주극성은 그 전보다 일이 더 줄어서 온객행은 더 자주 오래 태평호에 머무를 수 있었다. 온객행이 주극성을 떠나는 날 천존께서 그에게 죄를 사하며 내린 천명은 매년 삼원(三元)에 참가하여 현무를 보좌하는 일이었다. 주자서 역시 요대와 삼하궁에 종종 불려가 시중을 드는 일을 해야 했다.

기룡은 곡우를 데리고 사람이 사는 세상을 여행하기 위해 떠났다. 기룡과 곡우가 떠나기 전에 곡우는 주자서에게 그림을 선물했다. 그 그림은 아주 막역해 보이는 두 공자의 뒷모습을 그린 것인데 그들은 태평호를 바라보고 있다. 주자서는 곡우가 선물한 그림이 마음에 들어 백택의 정전 사당에 그림을 걸었다. 온객행이 태평호로 돌아온 다음 해에 노유와 미원은 삼하궁으로 돌아가 등선했다. 삼하궁의 소부(少府)에 소속된 상서랑중(尙書郞中)이 되어 수원대선과 함께 황룡을 보좌했다. 종종 말도 없이 구름 마차나 천마를 보내 주자서를 삼하궁으로 불러 일을 시키는 일이 늘었다. 주자서는 스승님의 일이라 거절할 수 없었고, 이제 현무 대리가 아닌 온객행은 일개 수선이라 거절할 수 없었다. 그럴 때마다 주자서를 따라 삼하궁에 가서 고상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그러면 생기는 일을 무마하기 위해 무례를 저지른 대선과 요괴에게 기룡이 두고 간 그림을 선물하다 보니 백택에는 곡우가 그린 그림 밖에 남지 않았다.


영월(令月; 음력 2월)은 상원이 끝나고 봄을 준비하는 달이라 하늘도 땅도 바쁘지 않은 달이다. 주자서는 오랜만에 동이 틀 때까지 침상 위에서 나오지 않았다. 영력이 쌓였다고는 하나 이제 막 화사가 된 주자서는 추위에 약했는데 겨울이 다가오면 백택으로 거처를 옮기거나 아니면 삼하궁에 가서 지내는 경우가 많았다. 올해는 삼하궁에 손님이 많아 주자서가 거절하여 태평호에 머물게 되었다. 부유각 내에는 주작에게서 선물 받은 화로가 있었는데 그 안에는 주작의 깃털이 들어 탄을 넣지 않아도 끊임없이 타올랐다. 주자서는 누워서 침상 아래 있는 타오르는 깃털을 물끄러미 보았다. 언제인가 중원인가 하원에 누군가를 돕고 받은 것이다. 온객행은 몸에 지닐 수 있는 봉황의 깃털을 원했던 것 같은데 주작의 깃털을 얻었다. 날이 춥지 않으면 주작의 깃털로 밥을 한다는 것을 주작이 아시면 어떨까 같은 생각을 하던 주자서는 부스스 웃고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부유각 내부는 온객행이 주극성에서 가져온 물건들로 조금 어수선했다. 주자서는 슬슬 온객행을 잘 구슬려서 거처를 백택으로 옮겨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신발을 신고 물을 받아 간단히 관수하고 병풍에 걸린 장포를 대충 걸쳐 입었다. 침상 곁에 있던 화로를 평상 근쳐로 옮겨서 물 주전자를 올렸다. 그동안 차를 마시는 일에 익숙해진 참이다. 온객행은 어디에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주자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온객행이 가져온 물건들을 살펴보았다. 크고 작은 함에 별자리에 관련된 서책도 있었고 옷과 비단도 있었다. 모두 어디에서 얻은 것인지 온객행이 신이 나서 설명해 주었지만 주자서는 별로 관심 있는 것들이 아니라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주자서가 찻잎을 찻주전자에 넣고 막 마시려는데 온객행이 부유각으로 들어왔다. 장지문을 열고 휘장을 걷고 들어오는 온객행은 족제비 털이 달린 하얀 피풍의를 입었다. 주자서가 고개를 돌려 온객행을 보고 웃었다.

온객행은 얼른 주자서 곁으로 와서 앉아서 주자서가 내린 차를 찻잔에 따르고 말했다.
“유서. 왜 벌써 일어났어?”
주자서가 차를 마시고 고개를 끄덕였다. 온객행이 차로 입을 축이고 말을 이었다.
“오늘은 오후에 비가 올 것 같아. 안개가 아주 많아. 주자서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온객행이 내실을 둘러보고 말했다.
“유서. 왜 등롱도 켜지 않았어?”
주자서가 찻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이제 켜지 않아도 잘 보입니다.”
온객행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 벌써? 우리 유서는 수재(秀才)인가 봐.”
주자서가 낮게 웃으며 말했다.
“비가 오면 오늘은 춥겠네요.”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조용히 차를 마셨다. 주자서가 다시 물었다.
“객행. 슬슬 거처를 백택으로 옮기는 게 어떻습니까?”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게. 예전에는 작은 줄 몰랐는데….”
주자서가 온객행의 팔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내실을 정리해서 여름에만 사용하는 것도 좋겠습니다.”
온객행이 주자서의 손을 잡고 말했다.
“응. 아니면 부유각을 증축할까?”
주자서가 작게 고개를 흔들고 말했다.
“부유각은 부유각인채로 좋습니다.”
온객행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응. 나도. 나도 그래. 유서.”

주자서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그럼 오늘은 실내에서 정리를 좀 할까요?”
온객행이 주자서를 따라 일어나며 말했다.
“그럴까요?”
주자서가 피풍의를 찾아 둘러 입고 말했다.
“장지문을 열고 입하랑 입추를 불러서 같이 합시다.”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이고 주자서의 피풍의를 여며주며 말했다.
“제가 백택에 얼른 다녀올 테니 여기 계세요.”
주자서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커다란 함은 혼자서 옮길 수가 없어서 주자서는 일단 작은 함부터 열어 종류별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어떤 함에는 장신구와 보옥이 들었고 어떤 함에는 찻잎이 들었다.

주자서는 찻잎이 들어 있는 함은 다구를 넣는 함 근처에 놓았다. 그렇게 정리하다 보니 내실은 전보다 조금 더 어수선했다. 서책을 찾아 책장 위에 올려 두면서 날을 잡아 백택에 있는 서책과 함께 정리하여 재실에 남아 있는 각고에 장서각을 만들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 책장 위에 처음 보는 함을 발견했다. 주자서는 눈썹을 찌푸리고 잠깐 생각했다. 온객행이 가져온 물건 중에 주자서에게 설명하지 않은 물건은 거의 없었다.

온객행이 설명하지 않은 것은 보통 계낭이나 백택에서 자주 사용하는 물건들로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그 용도가 명확한 것들이다. 함에는 자물쇠가 달려 있었지만 잠겨 있지는 않았다. 주자서는 책장에서 함을 꺼내 탁상 위에 올려 놓고 함을 열었다. 함 안에는 죽간과 종이로 만든 화첩이 들어 있었다. 주자서는 대체 무슨 내용의 책이길래 자물쇠를 달아 보관했나 싶어서 죽간을 들어 제목을 보았다. 이상하게도 죽간은 보관 주머니도 씌워져 있지 않았고 제목도 없었다. 주자서는 조금 의아하여 바닥에 깔린 화첩을 꺼내 들었다. 화첩은 서피(書皮)를 비단으로 했는데 아주 질이 좋은 비단이었다. 종이가 아니라 어쩌면 비단에 그린 화첩일 지도 모르겠다. 이 화첩 역시 제목이 겉에는 어디에도 쓰여 있지 않았다. 주자서는 혹시나 보면 안되는 것인가 한참 고민하다가 화첩을 펼쳤다.


온객행은 입하, 입추와 함께 간단히 요기할 떡을 들고 부유각으로 향했다. 입하가 말했다.
“응룡께서 보내신 떡이 아주 맛이 좋습니다. 주인께서도 좋아하셨으면 좋겠어요.”
입추가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달지도 않고 안에 들어 있는 견과가 고소하여 아주 맛있습니다.”
온객행이 거들었다.
“입하, 입추도 많이 드세요. 단오 때 스승님께 다녀오면서 요대에 들러 또 부탁해 두겠습니다.”
입하가 물었다.
“단오 때 촉룡께 가시려구요?”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한동안 뵙지 않았으니 이번에 다녀오려고요.”
입추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주인께서도 가십니까?”

입하가 얼굴을 구기며 입추를 보았다. 온객행은 금방 울상을 하더니 말했다.
“당연하지요! 스승님께서는 아직 유서가 화사가 된 것을 보지 못하셨으니 이번에 가서 여쭐 것이 아주 많습니다.”
입추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아… 그렇군요. 하지만 주인께서는….”
입하가 입추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촉룡께서는 뭘 좋아하십니까? 저희가 선물을 준비할까요?”
온객행이 손을 내젓고 말했다.
“아닙니다. 스승님께 드릴 선물은 제가 준비하겠습니다.”
부유각에 도착한 셋은 금방 선창을 지나 갑판에 발을 올렸다.

온객행이 휘장을 걷고 실내로 들어오자 주자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보고 있던 화첩을 다시 함에 넣고 함을 ‘쾅’하고 다급하게 닫았다. 얼굴이 새빨개진 주자서를 보고 온객행이 다가가 물었다.
“유서?”
주자서가 당황하여 몸을 돌리고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입추와 입하는 어서 가서 밥을 드세요.”
사시가 훌쩍 넘어 이미 다른 계낭과 밥을 먹은 입추와 입하는 주자서의 눈치를 보고 찬합을 탁상 위에 올려놓고 인사했다.
“저희는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입하가 눈치껏 장지문을 닫고 입추와 백택으로 향했다. 정리하는 것을 마음먹었으니 백택도 조금 청소해 두어야 했기 때문이다.

입하가 입추에게 손바닥을 펴며 말했다.
“봐. 내 말이 맞지?”
입추가 입을 삐죽이며 품속에서 작은 꾸러미를 입하에게 건네고 말했다.
“입하. 너는 이런 눈치가 참 좋단 말이야.”
입하가 입추가 건넨 꾸러미를 열어 안에 들어 있는 사탕을 입에 넣고 말했다.
“대부분 수선과 주인께서 같이 쓰시는 물건인데 우리가 도와드리긴 힘들지.”
입추가 어깨너머로 부유각을 보고 말했다.
“설마 싸우시지는 않겠지?”
입하가 고개를 꺾어 ‘하하하’ 웃으며 말했다.
“싸움이 되기는 할까?”
입추가 따라 웃으며 말했다.
“하긴. 주인께서 항상 이기시니까.”
입하는 송문을 지키고 있는 계낭에게도 입추에게 빼앗은 사탕을 주었다. 입추는 아깝다는 듯 입하를 보고 말했다.
“아껴 드시게! 황룡께서 보내준 것이란 말일세.”


주자서는 입하와 입추가 내실을 나가는 것을 보고 있다가 다시 몸을 돌려 온객행을 마주 보고 말했다.
“온객행!”
온객행은 탁상 위에 올려 놓은 함을 물끄러미 보다가 그 옆에 있는 찬합을 열며 말했다.
“유서. 응룡께서 떡을 보내셨어. 어서 먹어봐. 별로 달지도 않고 아주 맛이 좋아.”
주자서가 다시 함을 열어 안에 들어 있는 화첩 하나를 꺼내 온객행에게 내밀며 말했다.
“이게 무엇입니까?”
온객행은 묘하게 낯익은 화첩을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펼쳐보았다. 예전에 현리가 보내준 춘화첩이다. 다른 점이라면 이 춘화첩에는 여인이 없다는 점이다.

온객행은 입을 벙긋거리다 말했다.
“이… 이것이 어찌 여기에….”
주자서가 내실에 있는 책장을 가리키고 말했다.
“책장 위에 자물쇠도 없이 있었습니다. 남이 보면 어쩌시려고 이런 것을 두셨습니까?”
온객행은 한참 춘화첩을 들여다보더니 주자서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유서. 우리 이건 아직 안 해본 것 같은데….”
주자서가 온객행의 손에서 춘화첩을 거칠게 빼앗고 말했다.
“온객행!”

온객행이 웃으며 말했다.
“유서. 화내지 마세요. 예전에 예부인께서 보내주신 겁니다. 왜 그… 우리가 아직 사내끼리 정을 어떻게 통하는지 모를 때에….”
주자서가 다급하게 다가가 온객행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주자서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입술을 꾹 다물고 화난 듯 부끄러운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온객행은 처음 보는 표정이라 배시시 웃어버렸다. 주자서가 온객행의 얼굴을 밀고 말했다.
“온객행! 입하와 입추가 부유각에 들락날락하는데 이런 것을 어찌 소홀히 관리하셨습니까?”
온객행이 주자서에게 다가가 손을 잡고 말했다.
“소홀히 관리하다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때가 되면 꺼내서 말리고 얼마나 소중히 했는데요.”

주자서가 얼굴을 구기고 말했다.
“꺼내서 말려요?”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이며 함 안에 있는 다른 춘화첩을 꺼내고 말했다.
“비단에 그린 그림이라 가끔 꺼내서 말려주지 않으면 상한다고 했거든요.”
주자서는 온객행이 들고 있는 춘화첩을 빼앗아 다시 함에 넣고 물었다.
“어디… 어디에? 누가… 직접 하셨습니까?”
온객행이 죽간을 꺼내 들고 말했다.
“혹시 화첩이 상할 수도 있으니 따로 죽간에 정리해서 적어 두었습니다.”
그리고는 꺼내든 죽간을 흔들었다. 주자서는 고개를 흔들며 깊게 한숨을 쉬었다.

온객행이 죽간을 펼쳐 읽으며 말했다.
“걱정 마세요. 제가 직접 적었으니 화첩이 소실되더라도 책이 있으면 됩니다.”
주자서는 얼른 온객행이 들고 있는 죽간을 빼앗아 둘둘 말아 다시 함안으로 집어넣고 뚜껑을 닫았다. 걸려 있는 자물쇠에서 열쇠를 빼서 함을 잠갔다. 주자서는 한참 함을 노려보다가 온객행을 보고 물었다.
“더 있습니까?”
온객행이 주자서에게 다가가 허리를 끌어안고 말했다.
“뭐가 말입니까?”
주자서가 고개를 돌려 온객행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이런… 이런 것이 또 있느냐는 말입니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뺨에 입을 맞추고 웃으며 말했다.
“이런 것? 이런 것이 무엇입니까?”
주자서가 온객행의 턱을 잡고 말했다.
“온객행. 더 있어? 없어?”
온객행이 입을 앞으로 쭉 내밀어 주자서에게 뽀뽀할 것처럼 굴자 주자서가 온객행의 턱을 놓아주고 잠긴 함을 다시 책장 위에 올려 두며 말했다.
“제가 부족하여 수선께 음란한 화첩을 찾게 하였으니, 이것은 모두 저의 부덕함 때문입니다.”

온객행이 놀라서 주자서의 팔을 잡고 말했다.
“유서.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에요.”
주자서가 온객행을 보고 소매를 들어 고개를 조아리고 말했다.
“부족한 저를 내쳐 주소서.”
온객행이 주자서를 품에 끌어안고 말했다.
“아이참! 유서 그런 것이 아니에요. 처음에는 학습용이었고 지금은 그냥 참고용이에요.”
주자서가 고개를 들어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참고?”
온객행이 주자서를 다시 꼭 끌어안고 말했다.
“나는 유서를 만나기 전까지 이런… 정을 통하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단 말이오.”
주자서는 부끄러워져서 온객행의 허리를 안고 온객행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온객행이 주자서의 귓가에 입을 맞추고 말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유서가 나를 더 좋아했으면 좋겠기에….”
둘은 꼭 서로를 꼭 안고 한참 붙어서 있었다. 주자서가 물었다.
“이게 다 입니까?”
온객행이 주자서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고 말했다.
“유서랑 해보고 싶은 것들은 따로 적어 두었어요. 어느 순간 잊은 것 같지만….”

주자서가 피식 웃고 물었다.
“어디 두셨습니까? 적어 두신 것은?”
온객행이 활짝 웃으며 주자서를 보고 물었다.
“해주게?”
주자서가 다시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고 온객행 어깨에 고개를 묻으며 말했다.
“봐서.”
온객행이 다시 주자서의 뺨에 목덜미에 입을 맞추고 웃으며 말했다.
“어서 찾아야 하겠다.”
주자서가 온객행을 놔주고 자물쇠의 열쇠를 온객행에게 건네며 말했다.
“아무튼! 앞으로는 꼭 열쇠로 잠가 두십시오.”
온객행이 주자서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말했다.
“왜? 어차피 우리 얘기도 아닌데. 내가 따로 적어 둔 것에는 유서와 내가 주인공이니까 그것은 각별히 유의해서 보관하겠소.”

빨갛게 뺨을 붉히면서도 입을 꾹 닫고 더 말하지 않는 주자서가 야속해서 온객행이 주자서의 입술을 맞췄다. 주자서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래서 어디 두셨소?”
온객행이 주자서를 놔주고 책장을 살피며 말했다.
“아주 중요한 내용이니 특별히 서귀께 부탁드려서 종이에 적어 두었소.”
온객행은 다시 함을 열어 살펴보더니 고개를 갸웃하고 그 주변을 찾았다. 주자서도 책장을 찾으며 말했다.
“종이로 된 책은 보지 못했는데요.”
온객행이 당황하며 말했다.
“어… 잠시 백택에 다녀오겠습니다.”
주자서가 온객행의 소매를 잡고 말했다.
“주극성에서 온 짐은 모두 여기 두셨잖아요.”
온객행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온객행이 급하게 주극성으로 향하고 주자서는 혼자 남아서 부유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부유각의 정리를 대충 마치니 뉘엿뉘엿 해가 저물어갔다. 주자서는 온객행이 아직 돌아오지 않은 것이 의아했지만 문귀에게 붙잡힌 거려니 생각하고 백택으로 발길을 돌렸다. 백택으로 들어가는 송문에 주자서는 알지 못하는 인영이 문을 지키는 계낭과 실랑이 중이었다.
“이곳은 사당으로 주인의 허락 없이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정중한 계낭의 거절에 아랑곳하지 않고 여인이 말했다.
“제발 살려주세요. 저를 도와주세요. 갈 곳이 없어서 찾아왔습니다. 이곳 사당의 주인께서 여인을 거두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왔어요.”
주자서는 여인의 말에 주요가 떠올랐다. 사람이 사는 곳에서 백택까지는 험한 산길을 지나거나 가파른 강물을 건너야 했기 때문에 여인의 행색은 별로 좋지 못했다. 여인은 한참 계낭과 실랑이하다가 뒤에 멀뚱히 서 있는 주자서를 발견하고 말했다.
“공자님! 제발 공자님 자비를 베푸세요.”

당황한 주자서가 말했다.
“어떤 사정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이곳에서 여인을 거두시던 주인께서는 승천하셔서 하늘에 계십니다.”
송문을 지키고 있던 계낭이 주자서에게 말했다.
“주인. 수선께서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여인은 주자서의 소매를 잡고 말했다.
“주인? 당신이 태평호의 주인입니까?”
주자서가 손사래 치고 말했다.
“아닙니다. 제가 어찌 감히… 저는… 저는….”
입하가 재실에서 나와 송문에서의 소란을 보고 다가가 말했다.
“태평공. 무슨 일이십니까?”
주자서가 입하를 보고 고개를 흔들었다. 여인이 주자서를 보고 말했다.
“태평공?”
입하가 주자서의 소매를 잡고 있는 여인과 주자서를 번갈아 보더니 여인의 소매를 잡고 말했다.
“낭자. 이곳은 태평호의 사당인데 어찌 사람을 거둔다는 말입니까?”
여인은 주자서의 팔을 붙잡고 늘어지며 말했다.
“공자님 제발 저를 거두어 주세요. 저는 갈 곳이 없습니다.”

주자서가 곤란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자 입하가 말했다.
“낭자. 이곳은 사당이니 먼저 예를 갖추시지요.”
하고는 정전이 있는 쪽으로 여인을 안내했다. 여인은 앳되어 보이는 계낭을 살펴보더니 주자서의 팔을 잡고 정전으로 향했다. 주자서는 이 팔을 뿌리쳐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여인은 곡우가 그린 그림이 걸린 정전에 닿았다. 여인은 신위에 걸린 그림을 보고 한참 신당 내부를 살펴보더니 말했다.
“사당의 주인께서는 어디 계십니까?”
주자서가 여인에게서 팔을 빼며 말했다.
“수선께서는 잠시 주… 잠시 출타 중이십니다.”
여인은 계낭의 눈치를 보며 신위에 예를 올렸다. 주자서는 그녀가 절하는 것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 여인은 신분이 변변치 못한 것인지 절하는 모습이 어색했다. 주자서는 조용히 정전에서 나와 재실로 향했다. 입추가 주자서를 발견하고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사람이요?”

주자서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수원대선을 찾으시는데….”
입추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이상합니다. 어떻게 찾아왔을까요? 수원대선께서 떠나신 지 벌써…”
입하가 여인을 정전에서 데리고 나왔다. 여인은 주자서를 발견하자마자 다시 팔에 매달렸다. 주자서는 갑자기 잡아 오는 손길에 놀라서 팔을 뿌리치려고 하다가 여인을 밀쳤다. 여인은 놀라서 바닥에 털퍼덕 주저앉았다. 주자서는 놀라서 여인에게 손을 내밀고 말했다.
“낭자. 정말 죄송합니다. 너무 놀라서….”
여인은 주자서의 손을 잡고 일어나더니 갑자기 주자서 품에 달려들어 훌쩍이기 시작했다. 주자서는 어찌할 바를 몰라 그 자리에 굳어버리고 말았다. 입하와 입추가 놀라서 말했다.
“낭자! 이게 무슨 무례입니까?”
입하와 입추가 여인을 떼어내기 위해 여인의 소매를 잡고 법석을 떨었다.


온객행이 주극성에서 문귀에게 욕을 잔뜩 얻어먹고 겨우 찾아온 서책을 소중히 가슴에 안고 백택에 도착했을 때 본 것은 주자서의 품에 어떤 여인이 안겨서 입하와 입추의 손길을 거절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 여인은 품에 안기다 못해 주자서의 허리를 안고 있었는데 온객행은 너무 놀라서 여인을 보고 소리를 질렀다.
“그 손 놓으시오!”
주자서는 이미 반쯤 정신을 놓았는지 여인과 입하 입추가 하는 대로 이리저리 휘둘리고 있었다.
“이… 이러지 마십시오. 낭자”
주자서를 붙들고 있던 여인은 온객행을 발견하고 입하와 입추를 보았다. 입하와 입추는 온객행을 향해 소매를 들고 말했다.
“수선. 그러니까… 이것은….”
온객행은 주자서에게 다가가 여인의 손을 떼어내고 말했다.
“그대는 누구인데 나의 사당에 계시오?”
여인은 온객행과 주자서를 번갈아 가며 보다가 이번엔 온객행에게 달려들었다. 온객행은 한발짝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무슨 일인지 말로 하시오.”

여인은 조금 당황한 듯 바닥에 주저앉아 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주인… 제발 저를 거두어 주세요.”
온객행이 얼굴을 구기며 말했다.
“그게 무슨 뜻이오? 그대는 사람이 아니오? 요괴의 밥이 되겠다는 뜻이오?”
여인이 고개를 번쩍 들어 온객행을 보고 물었다.
“여인을 거두어 준다는 태평호의 주인이 아니시오?”
온객행이 고개를 흔들고 말했다.
“그분은 하늘로 승천하셔서 더는 이곳에 계시지 않습니다.”
여인은 다시 소매를 들어 울면서 사정을 했다. 박복한 그녀의 사정은 안타까웠으나 온객행과 주자서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온객행은 여인에게 신당 객실을 내주고 며칠 융숭히 대접했다. 여인은 지내는 내내 주자서에게 들러붙었는데 냉정하게 거절하는 온객행보다 주자서가 다정했기 때문이다. 나흘 정도 지났을 때 여인은 객실에 있던 장신구와 비단옷을 가지고 도망쳤다. 온객행이 엉망으로 어질러진 객실을 보고 말했다.
“보통 사람은 다 이런가?”
주자서가 객실을 정리하며 말했다.
“어디서 듣고 온 걸까요?”

입하와 입추가 객실 안으로 들어가 정리하며 말했다.
“아… 노유께서 아끼시던 비단옷을 가져갔어요.”
온객행이 말했다.
“괜찮습니다. 천교가 고작 그런 일로 화내지 않을 겁니다. 그들은 이런 광경을 수도 없이 보았으니까요.”
주자서가 온객행을 보고 착잡하게 한숨을 쉬었다. 그 뒤로 몇 번이나 사람들이 백택에 찾아왔다. 사내도 있었고 여인도 있었다. 그들 중에는 송문을 지키는 계낭과 시비가 붙어 싸움을 거는 이들도 있었다. 참다못한 주자서가 검을 들자 그제야 그들은 물러갔다. 온객행과 주자서는 여러 가지로 고민해봤지만 다가오는 사람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온객행이 말했다.
“백택을 옮겨야 하겠습니다.”
주자서가 물었다.
“어디로 말입니까?”
온객행은 한참 생각하다 말했다.
“태평호 위로 옮깁시다.”
온객행이 으스대며 말했다.
“저는 이제 흑룡이니까요. 이 정도쯤이야 일도 아니지요.”
주자서가 고개를 젓고 말했다.
“물 위라고 사람이 찾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선창에는 기룡께서 타시던 배가 있잖아요.”


온객행은 며칠 뒤에 요대로 금모원군을 뵈러 갔다. 온객행이 요대에 다녀오는 사흘 동안 또 사람이 몇 찾아와서 백택에서 곡식을 훔쳐 달아났다. 온객행은 금모원군에게 앞으로 상원의 일을 돕겠다는 약속을 하고 보주(寶珠)를 얻어왔다. 그리고 그 보주로 태평호의 백택도 태연의 요대처럼 태평호의 물안개 위에 자리 잡게 되었다. 주자서는 선창에서 사라진 부유각을 찾으며 말했다.
“객행. 부유각은 어디 두셨습니까?”
온객행이 함을 들어 내실로 옮기며 말했다.
“나의 소매 속에, 유서가 말한 것처럼 여름에는 부유각에서 홍주와 하방탕을 즐깁시다.”
주자서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백택으로 옮긴 것이 아니라 부유각으로 옮긴 것이 되었네요.”
온객행이 웃으며 말했다.
“뭐 어찌 되었든 이제 지내는 공간이 많아졌으니 서실이랑 집무실도 따로 두고 싶어요.”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서쪽에 있는 작은 객실 몇 개를 정리하면 될 겁니다.”
온객행은 밖으로 향하며 계낭에게 서책을 내실 서쪽으로 옮겨달라고 부탁했다. 한창 내실을 정리하던 주자서가 급하게 온객행을 찾으며 말했다.
“객행! 그 함은 어디 두셨습니까?”
온객행이 옷을 정리에 함에 넣으면서 말했다.
“무슨 함이요? 오늘 옮긴 함이 한두 개입니까?”
주자서가 온객행에게 다가가 소매를 잡고 작게 속삭였다.
“열쇠가 달린! 자물쇠가 달린 함이요!”
온객행이 ‘아!’ 소리를 내고 급하게 함을 쌓아 놓은 사당의 남문 밖으로 달려갔다.

주자서가 온객행의 뒤를 따르며 물었다.
“그 종이로! 주극성에서 가져오신 종이로 만든 서책은 어디 두셨습니까?”
온객행은 가던 길을 멈추고 다시 내실로 들어가며 말했다.
“아!”
마침 입추가 열쇠가 달린 함을 가지고 오며 물었다.
“태평공. 이 함에는 열쇠가 있어 무엇이 들었는지 확인할 수 없습니다.”
주자서가 얼른 달려가 함을 받고 말했다.
“아… 어… 이 함은 그러니까….”
온객행이 정전 앞에서 우왕좌왕하자 주자서가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객행! 어서 가서 서책을!”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이고 내실로 향했다. 주자서가 입추를 보고 말했다.
“그러니까 이 함은….”
입추가 빨갛게 달아오른 주자서의 얼굴을 보고 말했다.
“주인 또 열이 오르십니까? 함은 제가 옮기겠습니다. 어서 안으로 들어가세요.”
주자서가 함을 놓지 않고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이 자물쇠가 달린 함에는 아주 중요한 것이 들어 있으니 제가… 제가 하겠습니다.”
입추가 주자서를 보고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렇습니까? 그렇게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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