混戰 | 상대가 혼란한 틈을 타서…
주요는 황룡이 부리던 가신 중에 제일 존재감이 없는 상강(湘江)의 훼룡(虺龍)이었다. 후토는 삼하궁 근처의 동정호 근처뿐만 아니라 장강의 지류에 있는 용들도 대다수 천거했다. 그의 호방한 성격과 풍치를 즐기며 노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 탓에 그를 따르는 이들은 항상 차고 넘쳤다. 주요는 주변에 있던 다른 훼룡을 따라 후토를 모시기 시작했다. 주요가 처음으로 후토를 만났을 때 후토는 주요를 포함한 훼룡에게 말했다.
“나도 훼룡으로 태어났으니 그대들도 등선하여 나를 도울 훌륭한 각룡(角龍)이 되시게!”
후토는 훼룡들에게 술을 직접 따라주고 함께 술을 마셨다. 주요는 밝게 빛나는 후토에게 마음이 사로잡혔다. 주요는 후토 같은 용이 되고 싶었다.
그런 후토가 이상해지기 시작한 것은 치우와의 전쟁이 끝난 후였다. 그 전투로 주요는 훼룡에서 교룡이 되었다. 그 전보다 더 많이 자주 사람들과 어울리게 된 후토는 사람들의 타오르는 생명력에 매료되었다. 찰나를 태워 불꽃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은 영력이 충만했다. 사람들의 상상력은 대단한 것이라 그들은 모르는 것에 대한 경외(敬畏)를 설화와 노래로 표현했는데 그 노래는 맞는 것도 있고 틀린 것도 있어서 종종 분란을 야기했다. 욕심이 생기고 계급이 생기고 나라가 생겨났다. 사람들은 잔인하고 격렬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다정하고 차가웠다. 그들의 믿음과 노래가 신선의 권력이 되었다.
주요는 후토가 사람의 여인과 사내를 취하는 것을 수도 없이 보았다. 후토의 말로는 여흥을 즐기는 것이라고 했지만 주요는 그 행위가 단순히 여흥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후토는 삼하궁으로 돌아오는 날이 점점 더 적어졌다. 다른 오룡과의 관계도 점점 더 소원해졌다. 후토 곁에서 그에게 간언(諫言)을 하던 많은 신선과 요괴들이 후토를 떠났다. 삼하궁은 예전만큼 떠들썩하지 않았다. 주요는 삼하궁에 남은 몇 안되는 요괴였다. 후토의 일을 도맡게 된 주요는 곧 서왕모의 명으로 옥산의 약수를 건너 수원이라는 이름을 얻고 등선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마에서 뿔이 자라기 시작했다. 용에게 있어 뿔이 자라는 일은 명예롭고 경사스러운 일이라 주요는 아주 오랜만에 땅에 있는 황룡을 만나러 갔다.
황룡은 동정호에 위도재(爲道齋)를 지어 놓고 사람과 요괴를 가리지 않고 매일 연회를 베풀었다. 그가 입고 마시고 사용하는 모든 것들은 삼하궁의 재산으로, 그가 땅으로 내려간 이후로 그에게 바쳐지는 공물이 늘어났기 때문에 위도재는 언제나 모든 물건이 많았다. 오랜만에 찾은 위도재에는 요괴뿐만 아니라 사람도 아주 많았다. 주요는 하인의 안내로 후토가 머물고 있는 별원으로 향했다. 위도재 안에 있는 커다란 연못은 삼하궁에 있는 것 못지 않게 아주 크고 아름다웠다. 하인이 주요에게 말했다.
“주인께서 곧 오실 겁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주요는 연못의 연꽃을 구경하며 후토를 기다렸다. 날이 다 질때까지 기다렸지만 후토는 주요를 만나러 오지 않았다. 주요가 작게 한숨을 쉬고 자리를 떠나려 는데 누군가 다가와 말했다.
“누구를 기다리고 계십니까?”
주요가 고개를 돌려 다가온 남자를 보았다. 남자는 소매를 들어 공수하더니 인사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저는 미평(羋萍)이라 합니다.”
주요도 얼른 소매를 들어 인사했다.
“수원이라 합니다.”
미평이 몸을 바로 세우고 말했다.
“오늘은 후공을 만나 뵐 수 있을까 했는데 후공 대신 미인을 만났습니다.”
주요가 소매를 들어 얼굴을 가리고 말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미평이 웃으며 말했다.
“위도재에는 미인이 많다 들었는데 과연 사실입니다.”
주요는 미평의 말에 부끄러워져서 얼굴을 붉혔다. 미평이 연꽃을 보고 말했다.
“후공께서는 예전만큼 나라의 일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주요가 고개를 돌려 미평을 보았다. 미평이 한숨을 쉬고 말했다.
“답답하고 우울한 마음 시름에 겨워 괴롭다. 정을 억누르고 뜻을 헤아려 원통함을 삼키고 참는다. 모난 것을 깎아 둥글게 만들어도 이미 있는 규범은 바꾸지 않는데 근본이나 초지를 고치는 것은 군자를 희롱하는 것이라.” (8)
주요가 눈썹을 찌푸리고 미평을 보았다. 미평이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나의 쓸모가 다한 듯 하오.”
미평이 다시 소매를 들어 인사하고 몸을 돌렸다. 주요는 돌아선 미평의 뒷모습을 보고 있다가 그를 뒤따라 가서 소매를 잡고 말했다.
“소인 가르침을 청합니다.”
미평이 주요를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 주요가 소매를 놓고 공수하여 인사하고 말했다.
“견문(見聞)이 부족하여 미공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으니 주요, 가르침을 청합니다.”
미평은 조아리고 있는 주요를 보고 있다가 웃으며 말했다.
“낭자(娘子)께 도움이 된다면 저의 쓸모도 아주 없는 것은 아니겠지요.”
미평의 견식은 왠만한 요괴를 뛰어 넘는 것이라 주요는 어째서 후토가 미평을 만나주지 않는지 알 수 없었다. 미평과의 만남이 길어질수록 주요는 후토를 떠난 신선과 요괴들이 떠올랐다. 부러질지 언정 휘어지지 않는 올곧음은 후토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이다. 주요는 미평이 자신을 여인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딱히 정정하지 않았다. 이제 막 신선이 된 주요는 몸이 작았기 때문에 관을 하지 않은 주요의 모습은 이제 막 과년(過年)이 지난 소녀로도 보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위도재에서 만났다. 미평은 주요에게 사람들의 세상 이곳 저곳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주요는 미평의 학식을 뛰어넘어 미평이라는 사람 자체를 좋아했다. 미평 역시 재능 넘치는 꽃다운 주요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정하고 배려 넘치는 미평은 주요가 위도재를 찾는 주요 목적이 되었다. 주요는 후토에게 삼하궁의 보고를 마치고 별원으로 향했다. 그들은 별원의 서쪽에 있는 작은 정각에서 만나 시를 읊거나 금을 탔다. 주요는 미평에게 금을 타는 법을 배웠다.
옷차림새가 점점 여인 같아진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여인처럼 치장하는 주요는 곧 삼하궁에 있는 다른 요괴들에게 손가락질 받았다. 남자와 여자의 차이를 많이 두지는 않았지만 남자가 여자의 옷을 입는 것은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기 때문에 요괴와 신선들은 주요를 두고 손가락질하거나 수근거리기 시작했다. 미평에게 푹 빠진 주요가 그것을 눈치 챈 것은 후토에게 삼하궁의 일을 보고할 때였다. 후토는 주요가 소반에 들고 들어온 죽간을 펼쳐보지도 않고 서안 위에 올려 놓고 말했다.
“주요, 왠지 공물이 줄어든 것 같은데?”
주요가 소매를 들어 공수하고 말했다.
“가뭄이 길어져 수확이 많지 않아 그렇습니다.”
후토는 ‘흠’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후토 옆에 있던 지선(池仙) 몇이 주요를 보고 킥킥댔다. 후토는 그들을 한번 쳐다보고 혀를 찬 뒤 주요에게 말했다.
“삼하궁에서 줄일 수 있는 것은 줄이고 위도재의 일을 우선으로 하게.”
주요가 고개를 조아리고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주요는 공손히 인사하고 별궁 외실을 나왔다. 주요가 작게 한숨을 쉬고 별원으로 향했다. 주요는 미평을 만날 생각에 주변을 살피는 것을 조금 소홀히 했는지도 모르겠다.
길에서 부딪힌 요괴는 파사였다. 파사는 동정호의 요괴로 이 근처에 숫자도 제일 많고 세력도 가장 컸다. 주요가 소매를 들어 사과했다. 파사는 주요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이게 누구야? 삼하궁의 무지기잖아?”
주요가 표정을 구기고 파사를 보았다. 주요가 몸을 치장하기 시작한 이후로 다른 요괴와 신선은 주요를 무지기라고 조롱했다. 주요는 그들과 분란을 만들고 싶지 않아 피했지만 가끔 이렇게 뜻하지 않게 부딪히는 일이 생겼다. 주요가 작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주의를 살피지 않아 무례를 범했습니다.”
파사는 기세가 등등하여 주요의 앞섶을 잡고 말했다.
“어디 정말 계집인지 사내인지 확인을 해볼까?”
주요에게 파사 따위는 힘으로도 지위로도 뒤쳐지지 않았다. 주요가 입술을 꾹 다물고 다음 행보를 고민할 때 뒤에서 미평이 나와 그들을 말리며 말했다.
“이게 무슨 짓이오? 그만 두시오.”
파사는 미평을 보고 코웃음 치며 말했다.
“어디 감히 인간따위가 끼어드느냐?”
미평이 당황하여 주요의 앞섶을 잡은 파사의 소매를 잡고 말했다.
“말로 하시오! 야만스럽게 이게 무슨!”
주요는 자신을 감싸는 미평을 한참 보고 있다가 영력을 조금 써서 파사의 손을 뿌리쳤다. 파사가 손을 떼고 소리 질렀다.
“해보자는 것인가? 무지기 따위가 감히!”
미평은 파사의 말에 놀라서 주요를 보았다. 주요는 미평의 두려워하는 표정을 보고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주요는 미평과 파사를 번갈아 보다가 별원을 향해 내달렸다. 주요는 서쪽의 정각에 닿을 때까지 멈추지 않고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정도로 뛰었다. 그러다 미평이 다시는 정각으로 오지 않을까 두려워서 삼하궁으로 향했다. 주요가 별원의 정각으로 가지 않으면 미평이 왔는지 오지 않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동정호 파사의 우두머리 만자(萬子)가 찾아와 주요에게 사과했다. 그녀는 동정호에서 가장 오래된 파사로 모든 파사의 어머니이다. 그녀는 대선이 될 수 있을 만큼의 영력을 쌓았지만 동정호에서 자식들을 기르고 지키는 것 말고는 관심이 없는 뱀이다. 감히 신선에게 요괴가 대들었다며 많은 양의 비단과 장신구를 선물로 두고 갔다. 만자는 주요에게 사과하며 말했다.
“사내가 하는 일, 여인이 하는 일이 생긴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예절과 풍속이라는 이름으로 제한하는 것은 사람들이 하는 것으로 충분해요.”
주요는 착잡하게 웃으며 선물을 거절했지만 만자는 개의치 않고 선물을 삼하궁에 두고 갔다. 그 일 이후로 주요 곁에 주요를 모시는 파사의 여인들이 늘어났다. 주요의 재물을 탐한 이도 있었고 주요의 지식을 흠모하는 이도 있었고 주요를 이용하여 권력을 잡으려는 여인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주요의 겉모습을 비웃지는 않았다. 아주 사소하고 작은 배려가 주요를 위로했다.
주요는 오랜만에 위도재를 찾았다. 봄이 지나 여름이 다가오고 있었다. 벌써 몇 갑자 동안 천도연에 참가하지 않은 후토를 초대하기 위해 서왕모에게 부탁을 받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와야 했다. 주요는 얼른 보고를 마치고 다시 삼하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위도재에 올 때는 평소에 잘 입지 않는 어둡고 칙칙한 옷을 입어야 했다. 주요의 원래 모습은 하얀 백룡이었기 때문에 어둡고 칙칙한 옷을 입어도 은은하게 빛이 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모습은 그를 조롱하는 이들에게 구차한 구실이 되었다. 후토는 딱히 주요의 행색에 대해 별말 하지 않았다. 어쩌면 삼하궁에서 황룡의 일을 대신할 이가 주요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주요가 보고를 마치고 별궁의 외실을 나와 다시 삼하궁으로 향하려고 하는데 누군가 그를 불렀다.
“주요!”
삼하궁에 있는 이들은 주요를 모두 수원이라고 부른다. 주요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후토, 그리고 후토를 떠난 요괴와 신선들 정도이다. 주요가 뒤돌아 자신을 부른 이를 보았다. 미평이었다.
미평이 주요에게 다가갔다. 주요는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미공.”
미평이 주요에게 소매를 들어 인사하고 말했다.
“이제 저의 가르침이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주요는 생각하기도 전에 이미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주요가 소매를 들어 인사하고 말했다.
“미공. 저는… 저는….”
미평이 주요에게 다가가 말했다.
“그 순간 놀랐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당신이 사람이던 요괴이던 신선이던… 무지기이던 아무 상관없어졌어요.”
주요가 소매로 얼굴을 가리고 말했다.
“미공. 저는….”
미평이 주요를 보고 말했다.
“나는 그대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어요.”
미평이 주요에게 다가가 말했다.
“미평은 그대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주요가 소매를 내리고 미평을 보고 말했다.
“미공. 저는 사람도 아니고 소녀도 아니에요.”
미평이 고개를 끄덕이고 주요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소녀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주요가 고개를 들어 눈썹을 찌푸리고 미평을 보았다. 미평이 주요에게 다가가 목젖을 쓰다듬고 말했다.
“그대는 미인이니까.”
주요는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숙였다.
“여인의 모습을 한 것이 이상했습니까?”
미평이 웃으며 말했다.
“그대는 미인이니 무엇을 해도 아름답습니다. 당신이 좋아하는 것 그 어떤 것도 이상한 것은 없어요.”
주요는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흉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앞에 서 있는 미평을 덥석 끌어안았다. 미평은 주요를 마주 안고 웃으며 말했다.
“주요 보고 싶었어요.”
후토는 주요와 미평의 관계를 눈치채고 미평을 가까이 두기 시작했다. 미평은 후토가 듣기 싫은 소리만 골라서 했다. 듣기 싫은 것과는 별개로 미평의 말은 대체로 잘 들어 맞았기 때문에 못마땅해도 곁에 두었다. 그런 미평을 싫어하고 시기하는 무리가 생기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염절이 다가오고 있었다. 후토와 미평은 자주 북쪽으로 향했다. 주요는 삼하궁과 위도재의 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가끔 미평에게서 오는 서신이 주요가 위안을 삼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그렇게 후토도 미평도 위도재로 돌아오지 못했다.
주요는 현조에게 포박당해 순순히 천궁의 태미원(太微垣)으로 끌려갔다. 수많은 진군(眞君)과 현녀(玄女) 앞에서 주요는 후토의 죄가 까발려 지는 것을 구경할 수밖에 없었다. 주요는 후토가 그런 일을 하고 있는 줄도 몰랐다. 후토의 위도재를 부족함 없이 관리하기 위해 삼하궁의 살림이 궁핍해진 것은 당연한 이야기이다. 하늘의 제사와 연회를 치르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보충한다고 주요는 정말 바쁘게 일했다. 만자가 두고 간 비단과 패물도 모두 위도재를 운영하는데 다 써버렸다. 변명도 하지 않는 주요를 보고 있던 금모원군이 주요의 변호를 했다. 주요는 우왕(禹王)의 영지에 봉인되었다. 주요는 우왕이 죽어 삼원에 들어서는 날까지 우왕의 신하로 살아야 한다는 벌을 받았다. 우왕의 영지에서 일하면서 주요는 그 전보다 더 사내를 미워하고 싫어하게 됐다. 우왕은 그런 주요에게 삼원으로 가면서 부탁했다. 여인들 만이라도 굽어살펴 주시라고. 사람을 보살펴 주시라고.
주요는 삼하궁 별원의 정각에서 현리가 데려온 여인의 금소리를 듣고 정말 오랜만에 미평에 관한 일을 떠올렸다. 그는 금을 타는 것을 좋아했지만 저 여인처럼 금을 잘 타지는 못했다. 여인의 노랫소리가 청아하다.
“비록 시들어 버린다 해도 어찌 속을 상하겠는가? 거칠어진 꽃향기와 더러워진 꽃잎이 서러워서 그렇지.” (3)
주요는 금소리가 반가워 여인에게 삼하궁의 연꽃을 내렸다. 사람의 목숨을 한번 지켜준다는 삼하궁의 연꽃은 보물이다. 연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사람보다 더 오래 건강하게 살 수 있다. 삼하궁 연꽃 선물은 여인보다 오히려 현리가 더 기뻐했다.
주요가 웃으며 말했다.
“종종 들러 주세요. 그대의 금소리는 정말 아름답습니다.”
현리가 소매를 들어 인사하고 말했다.
“상선께서 찾으시면 언제든지 오겠습니다.”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소곳이 인사했다. 그 모습이 낯이 익어 주요는 고개를 갸웃했다. 주요는 하인에게 시켜 현리와 여인에게 삼하궁에 드나들어도 좋다는 통행패를 주었다. 현리가 노란색 옥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말했다.
“요즘은 요대보다 삼하궁에 더 자주 오는 것 같습니다.”
주요가 웃으며 말했다.
“황룡께서 아직 서투르셔서 여유가 없어서 미안하네.”
현리가 고개를 흔들고 웃으며 말했다.
“저희야 어디서든 불러만 주시면 감사합니다.”
주요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현리. 가끔 태평호도 들러 보도록 해라.”
주요의 말에 여인이 고개를 들었다. 주요는 삼하궁으로 향하며 말했다.
“다음에는 황룡께서도 함께 올 수 있도록 노력해 보마.”
현리는 나가는 주요에게 소매를 들어 인사했다.
기룡은 천교와 보살을 데리고 태평호로 가서 그곳에 틀어박히고 말았다. 예전부터 사람이 많지 않았던 태평호의 천혜(天惠)자연은 기룡의 영감(靈感)을 자극했다. 원래도 일손이 부족하던 삼하궁에 주요 인력이 태평호로 빠지는 바람에 주요와 고상은 더욱 바빠졌다. 지주는 주자서를 가르치는 것을 그만두고 태평호에 살던 계낭 네댓을 데려와 삼하궁에서 일했다. 천교와 보살도 명절때에는 삼하궁으로 돌아와 손을 거들었다. 고상이 황룡의 일과 삼하궁에 익숙해지자 주요에게도 약간의 틈이 생겼다. 그럴 때마다 주요는 별궁의 정각에 앉아 연꽃을 보았다. 마지막으로 미평을 만났을 때 무슨 대화를 했는지 어떤 모습이었는지 그 기억이 바래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그 기억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누군가를 그리워한다는 것은 마음이 허전한 상태로, 좀처럼 채워지지 않는다. 주요는 이 만성적인 헛헛함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주요는 이 헛헛함이 사라지면 삼원으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주요가 찻잔을 들어 입을 축이고 고상의 기척에 깊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아상.”
고상이 연못 속에서 불쑥 나와 주요를 보고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주요….”
주요가 자리에서 일어나 연못으로 가서 고상을 보고 말했다.
“일은 다 하고 노는 거야?”
고상이 주요의 질문에 눈을 굴리며 말했다.
“그게… 그러니까… 잘 모르는….”
주요가 성큼 고상에게 다가가 주요의 앞섶을 잡고 쭉 끌어 올렸다. 아상이 주요의 손을 잡고 말했다.
“모르는 게 너무 많단 말이야. 그걸 어떻게 일일이 다 찾아?”
주요가 고상의 몸에서 물을 흩어내고 말했다.
“뭘 모르는데. 가서 보자.”
고상이 주요의 손을 잡고 황룡의 거처인 진헌당(進賢堂)으로 향하며 말했다.
“주요는 앉아서 쉬어. 내가 읽고 내가 쓸게.”
주요가 웃으며 말했다.
“요즘 글씨 잘 쓰더라.”
고상이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그렇게 많이 썼는데 안 늘면 그게 더 이상해.”
주요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떤 부분을 모르는 것인데?”
고상이 투덜대며 말했다.
“제례는 말이 너무 어려워. 아는 글자인데 다 뜻이 달라.”
주요가 고개를 흔들고 웃으며 말했다.
“또! 내가 읽으라는 것을 읽지 않았지?”
고상이 울상을 하고 말했다.
“그 책은 너무 재미없단 말이야!”
주요가 코웃음 치고 말했다.
“내 말은 다 잘 듣겠다고 하더니 다 거짓말.”
고상이 주요의 팔에 매달리며 말했다.
“아니야. 다 잘 들을 거야. 제악은 다 재미 있었어. 주요 나도 악기를 배워볼까?”
주요가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상 너 당헤는 어디 두고 혼자 있어?”
고상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말했다.
“그러게 당헤 어디 갔지?”
그들이 진헌당에 가까워지자 당헤가 고상에게 달려와 소매를 붙잡고 울며 말했다.
“황룡… 저를 버리고 어디를 다녀오신 것입니까? 아직 처리해야 할 사안이 한가득인데….”
당헤가 주요를 발견하고 소매를 들어 인사하며 훌쩍였다.
“대선… 살려주세요. 휴식시간을 방해한 것은 정말 죄송합니다.”
주요가 당헤의 어깨를 쓸고 말했다.
“당헤가 고생이 많아요. 울지 마세요. 가서 봅시다.”
당헤가 소매로 눈물을 닦고 주요를 외실안으로 안내했다. 고상이 뒤따르며 말했다.
“당헤는 맨날 울어.”
주요가 고상을 쏘아보고 말했다.
“너 때문이잖아!”
당헤 역시 억울한 얼굴로 고상을 보았다. 고상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목마르지? 차를 준비할까?”
삼하궁에 있는 신하들은 고상보다는 주요 쪽을 더 신뢰하는 편이다.
주자서는 조각배 위에 앉아서 먹을 갈고 있었다. 고요한 태평호에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강줄기 너머 보이는 산등성이가 운치 있다. 평소 풍류를 잘 모르는 주자서도 기룡을 스승님으로 모시고 난 이후 풍경을 즐기는 일에 취미를 붙인 참이다. 기룡이 붓을 들고 곰곰이 생각하다 종이 위에 황산의 능선을 그렸다. 잎이 다 떨어진 산은 또 그 나름대로의 우아한 멋이 있었다. 종이 위에 그려지는 황산을 구경하던 주자서가 다시 먹을 갈기 시작했다. 온객행이 보낸 먹이다. 기룡이 태평호로 온 이후로 온객행과 주자서는 나무함을 사용하는 일이 줄었다. 기룡이 선물한 태평호의 그림은 주자서가 보기에 빈 공간이 너무 많아서 아쉬웠지만 온객행은 극찬하며 좋아했다. 온객행이 그림을 받고 며칠 동안이나 주자서는 밤마다 만나는 온객행이 꿈 인줄 알았다. 온객행이 말해주지 않았다면 아마 아직도 밤마다 만나는 온객행이 꿈인 줄 알았을 것이다.
천교와 보살이 기룡을 모시고 온 날 주자서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입하와 입추는 계낭을 잘 통솔하여 수확을 마무리하고 있었고, 지주는 주극성에 일이 있어서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하원 전까지는 손님을 맞이할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주자서의 안일한 예상을 뒤엎고 기룡이 천교와 보살을 대동하고 태평호에 나타났다. 기룡은 도착하자마자 허락도 없이 부유각의 누각에 올라 태평호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천교와 보살은 백택으로 들어가 입하와 입추를 부리며 사당을 정리하는데 바빴기 때문에 주자서 혼자 기룡의 시중을 들게 되었다. 기룡은 들고 온 화구함(畵具函)을 열더니 벼루를 여러 개 꺼내 놓고 먹을 갈기 시작했다. 주자서도 눈치껏 옆에 앉아 먹을 갈았다. 주자서가 먹을 가는 것을 보고 있던 기룡이 말없이 주자서에게 미소 짓고 종이를 꺼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기룡이 제일 처음 그린 그림은 부유각에서 보는 태평호의 전경이었다. 해가 다 져서 주자서가 얼른 내실에 가서 등롱을 밝혀오자 기룡이 말했다.
“다 됐다. 밥 먹으러 가자.”
주자서는 얼떨떨하게 등롱을 들고 기룡의 뒤를 따라 백택으로 향했다.
기룡은 백택의 정전에 머물며 그림을 그렸다. 기룡이 그림을 그리는 동안 천교와 보살은 홍주를 담그느라 정신이 없었다. 마당에 나와 있는 수많은 단지를 끓인 물로 닦고 계낭과 주자서가 따서 말려 둔 구기자와 새로 딴 구기자를 섞어 으깬 뒤 누룩을 조금 넣고 봉황에게 얻어온 흑당과 꿀을 섞었다. 기룡은 우사첩과 계룡이 술을 담그는 것도 그렸다. 주자서는 옆에서 먹을 갈기도하고 홍주를 만드는 마당에서 일손이 필요하면 가서 단지를 이리저리 옮기는 일을 했다. 지주가 태평호로 돌아오는 날이 점점 줄어들고 기룡이 태평호에 도착한지 이레 뒤에 하원까지 얼마 안 남은 날 갑작스럽게 온객행이 지주와 함께 태평호를 방문했다. 지주는 아끼는 계낭을 데리고 삼하궁으로 떠났다.
“이제 더 가르칠 것이 없다. 애초에 내가 가르친 건 별로 없었어. 잘 지내. 놀러올게.”
온객행도 기룡에게 인사하고 그림을 받은 뒤 금방 돌아갔다.
주자서가 아쉬워서 말했다.
“객행….”
온객행이 주자서의 손을 잡고 말했다.
“유서. 정말 급하게 온 거라 오래 못 있어.”
주자서가 말없이 온객행의 손을 놓지 못하자 온객행이 웃으며 말했다.
“유서. 나랑 같이 주극성에 갈까?”
주자서는 한참 고민하다 힘겹게 고개를 흔들었다. 온객행은 주자서를 품에 안고 말했다.
“미안해. 유서. 정말 미안해.”
주자서는 온객행을 놓아주고 웃으며 말했다.
“객행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언제든지 돌아오세요.”
온객행은 얼굴을 붙여 오다가 주변에 기룡과 우사첩을 보고 고개를 돌려 주자서를 꽉 끌어안았다. 주자서는 다른 사람이 보고 있는데도 입을 맞추지 못한 것이 아쉬워서 그날 저녁때까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다른 날보다 조금 일찍 부유각으로 돌아온 주자서는 장포도 벗지 않은 채로 침상 위에 벌렁 누웠다. 설핏 잠이 든 주자서를 일으키는 손길에 주자서가 눈을 떴다.
“…객행?”
온객행이 주자서의 장포를 벗기며 말했다.
“응. 왜 옷도 벗지 않고 자고 있어?”
주자서가 몸을 일으켜 눈을 비비고 말했다.
“아직 씻지도 않았는데….”
온객행이 웃으며 말했다.
“피곤하면 내일 씻어. 어서 누워.”
주자서는 온객행의 허리를 끌어안고 말했다.
“객행. 신선들은 대체 무슨 제사를 그렇게 많이 지내는 겁니까? 삼청더러 내려와서 지내라고 하세요.”
온객행이 웃으며 주자서와 같이 침상 위에 누웠다.
“유서. 그건 너무 불경한 얘기 아니야?”
주자서가 온객행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말했다.
“괜히 주극성을 나왔나 매일 후회해요.”
온객행이 주자서를 감싸 안고 말했다.
“그건 정말 잘한 것 같아. 난 현무가 될 마음이 없으니까. 유서가 있었다면 교활한 거북이들이 날 주극성에 붙잡아 놓으려고 무슨 짓이든 했을 거야.”
주자서가 웃으며 말했다.
“교활한 거북이라니… 뭔가 어울리지 않는 말이네.”
온객행이 주자의 몸을 토닥이며 말했다.
“미안해 유서. 얼른 자.”
주자서는 온객행을 꽉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이 꿈이 깨지 않기를 바라면서. 다음날 주자서는 보통보다 조금 늦게까지 잠을 잤다. 주자서는 온객행 꿈을 꿔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뭔가 묘하게 정리된 부유각 내부도 기분 탓으로 쳤다. 며칠 계속 온객행 꿈을 꾼 주자서는 기분이 좋았다. 주자서는 꿈에서 만난 온객행에게 잔뜩 투정을 부릴 수 있어서 좋았다. 주극성에서 혼자 애쓰고 있는 온객행에게는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다. 주자서는 꿈에서 온객행을 보고 싶어서 점점 빨라지는 일몰시간에 맞춰서 잠자리에 들었다.
잠깐 잠이 깬 주자서는 은은한 등롱불에 저를 내려보고 있는 온객행을 보고 부스스 웃었다. 온객행이 주자서의 뺨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유서. 내일은 하원이라 못 와. 하원이 지나면 이틀 정도 쉴 수 있게 해준데.”
주자서가 부루퉁하게 말했다.
“겨우 이틀?”
온객행이 낮게 웃으며 말했다.
“맞아. 겨우 이틀. 내가 며칠동안 잠도 안자고 일했는데….”
주자서가 눈썹을 축 늘어뜨리고 말했다.
“우리 객행 고생해서 어쩌지?”
온객행이 주자서를 품에 안고 말했다.
“이렇게 매일 밤에 만나니까 살 것 같아.”
주자서가 눈을 감고 말했다.
“나는 꿈에서 말고 진짜 온객행이 보고싶어.”
온객행이 웃으며 주자서에게 얼굴을 붙여왔다. 주자서는 온객행의 뺨을 잡고 입술을 맞췄다.
“한 갑자는 정말 길다.”
온객행이 주자서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고 말했다.
“응. 너무 길어.”
주자서는 온객행을 꼭 끌어안고 다시 잠을 청했다.
하원이 지나고 이틀 뒤에 온객행이 태평호에 왔다. 주자서는 너무 반가워서 체면도 내려놓고 온객행을 보자마자 달려가서 덥석 끌어안았다. 같이 온 문귀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나는 그럼 이만 가보겠네.”
주자서는 온객행을 놓아주고 온객행과 함께 다시 주극성으로 향하는 문귀에게 소매를 들어 인사했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손을 잡고 부유각으로 향하며 말했다.
“주서에게 주려고 선물을 가져왔어.”
주자서는 웃으며 말했다.
“객행이 온 것이 저에게는 제일 큰 선물이에요.”
온객행이 가던 길을 멈추고 주자서를 끌어안고 말했다.
“유서 정말 좋아해.”
주자서도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객행 좋아해요.”
온객행이 주자서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고 말했다.
“이틀은 너무 짧다.”
주자서가 고개를 들어 온객행을 보고 눈을 깜빡였다. 온객행이 주자서에게 입맞추고 말했다.
“내가 이틀 쉴 수 있다고 했잖아요.”
주자서가 온객행을 놓고 말했다.
“어… 언제요?”
주자서가 알기로는 온객행이 이틀동안 쉰다는 얘기는 꿈속에서 밖에 한적이 없었다. 요즘 온객행은 나무함에 뭔가 넣어 놓는 일이 줄어서 주자서는 내심 서운하던 참이다. 온객행이 주자서의 손을 잡고 부유각으로 향하며 말했다.
“내가 하원 전에 와서 말해줬잖아요. 침상 위에서.”
주자서가 가던 길을 멈추고 온객행을 보고 입을 벙긋거렸다. 온객행이 웃으며 주자서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말했다.
“기룡께서 그려 주신 그림으로 매일 밤에 만나러 왔잖아요. 유서.”
주자서의 얼굴이 점점 새빨갛게 변했다.
(8) 굴원 회사부(懷沙賦) 회왕을 그리며.
답답하고 울적한 마음 시름에 겨우니 못내 괴롭다.
정(情)을 억누르고 뜻을 헤아려 원통함을 삼키고 스스로 참네.
모난 것을 깎아서둥굴게 만들어도 일정한 규범은 바꾸지 않는데,
근본(根本)이나 초지(初志)를 고치는 것은 군자(君子)가 얕보는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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