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끊는 슬픔

《문선(文选)》의 주석란에 육신(六臣)의 한 명인 여향(吕向)이 “『칠애(七哀)』는 통(痛), 의(義), 감(感), 원(怨), 이목문견((耳目聞見),구탄(口歎), 비산(鼻酸) 등의 애(哀)라 했다.”고 주석을 달았다. 그러나 이는 확실한 뜻을 알지 못하면서 글자만 보고 대강 뜻을 짐작한 말이다. 원나라 사람 이야(李冶)는 그의 저서 《경제고금주(敬斋古今黈)》에서 “사람의 칠정 희로애락애오옥(喜怒哀樂愛惡欲) 중 哀가 가장 앞선 감정으로 슬퍼함이 너무 심하니 나머지 감정이 없어지고 애만 남았음으로 『칠애(七哀)』라고 했다.” 그러나 이 말도 견강부회한 면이 없지 않다. 『칠애(七哀)』는 악부(樂府) 가사(歌辭)다. 진(晉)나라 악부시가의《원시행(怨詩行)》에 『칠애(七哀)』라는 편명이 수록되어 있다. 출처


七哀詩 曹植
칠애시 조식

明月照高樓 流光正徘徊
밝은 달은 높은 누각을 비치니 달빛은 흘러 누각의 주위를 배회한다.
上有愁思婦 悲歎有餘哀
누각의 우수에 잠긴 부인 슬픈 탄식소리 애처로움이 넘친다.
借問歎者誰 雲是宕子妻
탄식하는 이 누구냐고 물으니 집 떠난 사람의 처라고 한다.
君行逾十年 孤妾常獨棲
당신이 집을 떠난지 10년이 넘었어요. 외로운 첩은 항상 외롭게 지내고 있어요.
君若清路塵 妾若濁水泥
당신이 만약 맑은 길 위의 먼지라면 첩은 흐린 물속의 진흙이에요.
浮沉各異勢 會合何時諧
떠다니고 가라앉음은 서로 처지가 다르지요. 만나더라도 언제나 화목하게 지낼 수 있을까요?
願爲西南風 長逝入君懷
원컨대 서남풍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멀리 바람이 되어 당신의 품으로 날아가게요.
君懷良不開 賤妾當何依
당신의 품이 열리지 않는다면 천첩은 어디에 기대야할까요?


조식의 칠애시 화자는 집나간 남편을 기다리는 여성이다. 개인적인 감상으로는 남편이 저잣거리의 먼지 따위라면 어찌 못의 진흙이 먼지따위를 기다릴까? 한대 시인 장곡이 행로난에서 말했다. 龍蟠泥中未有雲 不能生彼昇天翼(용반니중미유운 불능생피생천익; 용도 진흙 속에 서려있고, 구름 없으면 저 하늘에 오를 날개 생겨나지 못한다네.) 용이 서리고 맑은 연꽃을 피워내는 진흙이 길에서 굴러다니는 먼지따위를 기다린다는 뜻이므로 숨은 뜻은 어쩌면 어찌 천한 니가 귀한 나를 기다리게 하느냐 뭐 그런 의미 아니엇을까?

조식의 상황을 보면 그럴수도 있다. 나는 조식이 왜 마음을 고쳐먹고 촉이나 오로 가지 않았는지 그냥 안타까울 뿐이다. 물론 그리로 간다고 해서 등용 될수 있을지 없을 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혈족들한테 천대당하는 것보다는 그게 나을것 같은데... 조식은 조비가 죽고 조비의 아들 조예가 등극한 후에도 계속해서 등용을 바랬는데 쓰마이와 소비의 외척, 친척들이 그의 덕망을 두려워해 오랫동안 위의 성도인 사례에 발으 붙이지 못했다. 그가 변방을 떠돌기 전에 쓰인 시는 대체로 공자의 호방함과 화려한 생활이 담겨있다면 그 이후에 쓰인 시는 이처럼 떠난이를 그리워하거나 아무도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외로움에 대한 시를 많이 썼다.

오랫동안 떠돌면서 얻은 병에 40에 죽었는데 그 생몰일이 알려지지 않은 아들들을 포함하면 대체적으로 40대 전후로 사망한 아들이 많다. 전쟁에 죽고 당쟁에 죽고 쫒겨나서 죽고.. 조조는 아들이 진짜 많은데 하필 그 많은 아들중에 조비를 골랐을까 꼭 지같은 애를 왕으로 만들어서 나중에 쓰마이한테 다 뺏긴다. 뭐 쓰마이도 결국 종친으로 망하기 때문에 능력없는 사람을 단지 혈연으로 천거하는 것이 얼마나 폐단이 많은지 증명한다.


七哀詩 王粲
칠애시 왕찬

其一

西京亂無象 豺虎方遘患
장안은 난리가 나서 무법천지가 되고 승냥이 호랑이들은 환난을 일으켰다.
復棄中國去 委身適荊蠻
다시 중원 땅을 버리고 떠나 형만으로 가서 몸을 의탁하려고 하니,
親戚對我悲 朋友相追攀
친척들을 나를 보고 슬퍼하고친구들은 뒤따라와 손을 잡고 아쉬워한다.
出門無所見 白骨蔽平原
집을 나서니 보이는 것이라고는 들판에 가득 찬 백골만 뿐이다.
路有飢婦人 抱子棄草間
길가의 굶주린 아낙내들 아이를 안아다 풀 속에다 버리고는,
顧聞號泣聲 揮涕獨不還
울부짖는 아이의 울음소리에 뒤돌아보며 곡을 한다. 눈물 훔치며 홀로 떠나지 못하고
未知身死處 何能兩相完
「이 몸 죽을 곳도 몰라 어찌 두 목숨 보전할 수 있나요!」
驅馬棄之去 不忍聽此言
말을 달려 자리를 떠난 것은 차마 이 말을 들을 수가 없어서였다.
南登霸陵岸 回首望長安
남쪽의 패릉 위로 올라 머리 돌려 장안을 바라보니,
悟彼下泉人 喟然傷心肝
《하천》시를 지은 사람 이해되어 간장 끊어지는 슬픔에 탄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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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경(西京):서한왕조가 국도로 삼았던 장안(長安)을 말한다. 서한의 뒤를 이은 동한왕조가 낙양을 도성으로 삼아 동도(東都)라고 했으나 동탁이 한헌제(漢獻帝)를 겁박하여 장안으로 천도했다. 무상(無象)은 사회가 혼란하여 법도가 사라진 상태를 말한다.
  2. 시호(豺虎):승냥이와 호랑이라는 뜻으로 동탁의 부장으로 동탁이 죽자 란을 일으킨 이각(李傕)과 곽사(郭汜)를 말한다. 구환(遘患)은 백성들에게 닥친 재난을 말한다.
  3. 위신(委身)은 몸을 의탁함이고 형만(荊蠻)은 형주(荊州)를 지칭한다. 형만은 중국고대에 있어서 남쪽에 거주했던 만족을 비하하는 말이다. 당시 형주에는 중원의 전란이 미치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란을 피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일찍이 왕찬의 조부 왕창(王暢)으로부터 학문을 배운 당시 형주자사 유표는 왕찬의 집안과는 인연이 있었다. 이에 왕찬이 유표에게 몸을 의탁한 것이다.
  4. 추반(追攀):뒤를 따르며 손을 붙잡고 있는 손을 놔주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별을 아쉬어하는 모습.
  5. 패릉(霸陵):한문제 유항(劉恒)의 능묘다. 지금의 섬서성 장안현(長安縣) 동쪽에 있다. 한문제는 한왕조 4백 년 기간 가장 현군으로 이름이 높았던 황제다. 문제의 치세 기간 동안 사회는 질서가 잡히고 안정되었으며 경제가 급속히 발전되었다. 그래서 왕찬은 당시의 혼란했던 사회와 대비하여 격앙된 마음을 표현했다.
  6. 《하천(下泉)》:《시경(詩經)·조풍(曹風)》에 실려 있는 시가다. 한 대의 오경박사들은 이 시를 조나라의 국인들이 명왕과 현군을 애타게 바라면서 부른 노래라고 여겼다. 하천은 지하수를 말한다.
  7. 위연(喟然):위(喟)는 휴(虧)로 마음이 상해 한숨짓는 모습이다.

이 시의 마지막 4구는 한문제의 능을 지나가다 당시의 란세와 대비되어 마음이 아픈 나머지 시경의《하천(下泉)》이란 제목의 시를 생각하며 밝은 임금과 현능한 신하들에 대한 절박한 심정을 읊은 것이다.
그래서「장안은 난리가 나서 무법천지가 되고 승냥이 호랑이들은 환난을 일으켰다(西京亂無象,豺虎方遘患)」라고 한탄한 것이다.
동한(東漢) 왕조는 도읍을 낙양(洛陽)에 정하고 동도(東都)라 부르고 서안은 낙양의 동쪽에 있었음으로 서경(西京)이라고 불렀다.
시호(豺虎)로 지칭한 동탁(董卓)의 부장(部將) 이각(李傕)과 곽사(郭汜)가 란을 일으켜 백성들을 대거 살해하고 재산을 빼앗아 생긴 재앙이었다. 왕찬은 이 두 구절을 통해 당시 사회에 불어 닥친 동란 때문에 장안을 떠나는 이유를 밝혔다.

其二

荊蠻非我鄉 何爲久滯淫
형만은 원래 내 고향이 아닌데 어찌하여 오래 동안 머물고 있는가?
方舟泝大江 日暮愁我心
방주를 타고 강수를 거슬러 올라가니 저녁 해가 나를 슬프게 한다.
山岡有餘映 岩阿增重陰
산언덕에는 아직 그림자 드리워 있고 바위는 그늘을 짙게 만든다.
狐狸馳赴穴 飛鳥翔故林
여우와 삵쾡이는 자기의 굴로 달려가고 나는 새는 옛날 살던 숲으로 날아간다.
流波激清響 猴猿臨岸吟
밀려오는 파도소리 크고 맑은데 강변의 원숭이 울부짖는다.
迅風拂裳袂 白露沾衣襟
새찬 바람은 내 소매자락을 휘날리고 하얀 이슬방울 내 옷깃을 적신다.
獨夜不能寐 攝衣起撫琴
홀로 잠 못이루고 깨어 있으니 옷깃을 여미고 일어나 거문고를 집어든다.
絲桐感人情 爲我發悲音
거문고의 명주실과 오동나무 통은 내 마음 이해하고 나를 위해 슬픈 소리 토해낸다.
覊旅無終極 憂思壯難任
타향을 떠도는 나그네 신세 몸 둘 곳 몰라, 고향 생각 떨쳐버릴 수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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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루부(登樓賦)》의「情眷眷而懷歸兮(정권권이회귀혜),孰憂思之可任(수우사지가임!) 즉 고향을 생각하는 마음은 더욱 간절하니 누구인들 이 슬픔을 참을 수 있겟는가!」라고 노래한 심정의 다른 표현이다.
이 시는 칠애시 3수 중 2번째 편이다. 오랫동안 형주에서 객지생활을 하며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시인의 마음을 표현했다. 내용은 시인의 또다른 유명한 작품《등루부(登楼赋)》와 유사하고 대략 서기 208년 형주에 머물고 있을 때의 작품으로 생각된다.
其三

邊城使心悲 昔吾親更之
내 마음 슬프게 했던 변방의 외로운 성, 옛날 내가 직접 가본 적이 있었네.
冰雪截肌膚 風飄無止期
빙설은 살 갗을 애이고 매서운 회오리바람은 끊이지 않는다.
百里不見人 草木誰當遲
백리 간에 보이는 사람 없고 무성한 잡초와 나무는 누가 돌보겠는가?
登城望亭燧 翩翩飛戍旗
성루에 올라 봉수대를 바라보니 펄럭이는 영기는 군진을 엄하게 지킨다.
行者不顧反 出門與家辭
출정하는 사람 돌아올 생각 못하고 성문 밖에서 가족들과 이별을 나눈다.
子弟多俘虜 哭泣無已時
대부분의 자제들 오랑캐의 포로가 되니 울부짖는 소리 끊이지 않는다.
天下盡樂土 何爲久留茲
천하는 모두 전쟁터로 변해 락토라고는 없으니 어찌 오랫동안 이 곳에 머물러 살 수 있겠는가?
蓼蟲不知辛 去來勿與諮
여뀌풀을 늘상 먹는 요충은 아픔을 모르듯이 떠나는 사람이 구태여 도움말을 구할 필요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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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애시(七哀詩)》세 번째 편이다. 변방에서 벌어지는 전쟁의 비애를 그렸다. 여관영(餘冠英)은《악서시선(樂府詩選)》에서 「건안(建安) 20년(서기 215년) 조조(曹操)가 서쪽을 원정하여 평정한 금성(金城)이 바로 변성이다.」라고 했다. 금성은 지금의 감숙성 란주시(蘭州市) 서남쪽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건안 16년 조조가 마초를 정벌하기 위해 서쪽으로 원정할 때 왕찬이 종군한 서북변의 안정(安定)에 이르고 그 해 12월 장안으로 개선했을 때의 일이라 하여 변성은 안정을 지칭한다고 했다. 안정은 지금의 섬서성 보계시(寶鷄市) 일대다. 그러나 금성이든 안정이든 당시 혹독한 자연환경을 읊은 것만은 사실이다.

왕찬(王粲 : 177-217)은 건안칠자 중 가장 뛰어난 재능을 지녔다고 평가된다. 삼국연의에서는 유표 사후 유종을 설득하여 조조에게 형주를 바치게 한 장본인으로 소설의 독자로 하여금 상당한 분노를 느끼게 하는 인물이지만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른다. 태어난 해는 확실하지는 않으나 희평 원년 177년에 태어나 건안 22년 217년 당시에 창궐한 전염병에 죽었다는 설과 조식과 친분이 깊었던 이유로 건안 칠자를 살해할 때 같이 죽었다는 설도 있다.

왕찬의 아버지 왕겸(王謙)은 대장군 하진의 장사(長史)였는데, 하진은 왕겸의 집안이 삼공을 배출한 곳이었으므로 인척 관계를 맺으려고 자신의 두 딸을 보여 둘 중 한 명과 혼인하도록 보냈지만 왕겸은 이를 거절한 이유로 면직되어 머지않아 후에 질병으로 집에서 죽었다.

왕찬은 황족을 존중했으며 명분가 문벌을 중시하고 경사(經史)와 유학(儒學)을 애호하고 예를 높이고 교화를 중시했다. 또한 아악을 제정하고 복식과 패물로 치장하고 그의 시문들은 소제(昭帝)와 현제(顯帝)시대의 정화였음으로 그는 공당에서 상좌에 앉아 조정의 의례를 주재했다. 왕찬은 채옹(蔡邕)에게 발탁되었으나 거절하고 유표에게 의탁하지만 유표에게서 중용되지 못했고, 조조의 수하로 들어가서 고위직에 임명이 되었긴 하지만 실권이 없는 자리였다. 유표와 조조에게 중용되지 못했지만 그의 정치적 야심은 그가 지은 시와 행적에 남아있다. 출처

아들이 두 명 있었는데, 왕찬이 죽은 지 2년 후인 건안 24년 위풍(魏風)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에 연루되어 둘 모두 처형되었고, 왕찬의 대는 끊기고 말았다.

사마가가 여러모로 큰일 했다. 조씨도 모자라 왕씨 대도 끊어 놓다니... 8왕의 난을 생각하면 그게 과연 왕씨 뿐이었을까 싶기도 하다.

雨霖鈴 第23

23. 昊天罔極
어버이의 은혜가 넓고 큰 하늘과 같이 다함이 없다.

오경이 끝나는 종소리가 네 번 울리고 온객행은 인기척에 눈을 떴다. 언제 일어났는지 주자서는 옷을 다 입고 관수도 마쳤는지 얼굴이 말갛다. 화로에 물을 끓이고 있었다. 어스름한 새벽 빛에 화롯불이 더해지자 희미하게 보이는 주자서의 얼굴이 곱다. 머리를 하나로 올려 묶어서 보이는 목덜미가 요염하다. 호복을 입어도 맞지 않는 심의를 입어도 저와 같은 무명 장포를 입어도 고상해 보인다.

사계산장이 있는 양주는 망한 나라의 영지다. 그 곳은 황폐하고 수탈이 심하다고 들었는데 주자서는 영 고생하고 자란 티가 나지 않았다. 한참 주자서를 구경하고 있는데 주자서가 고개를 돌렸다. 주자서는 고개를 흔들더니 온객행의 신발을 가지고 온객행에게 다가왔다. “일어나셨소.” 온객행이 몸을 일으키며 주자서를 불렀다. “아서. 벌써 일어났어? 아직 바깥이 어두운데…” 주자서는 온객행이 일어난 침상에 걸터앉아 말했다. “아침 설법이 끝나면 주지스님께 인사하고 등봉으로 출발하세.” 신발을 신는 온객행의 족건이 더러워진 것을 본 주자서가 온객행을 쏘아보았다. 온객행은 헤실헤실 웃으며 개어 두었던 옷을 주워 입었다.

주자서는 어제 얻어온 만두와 서신을 챙겨 작은 봇짐을 어깨에 매고 대웅보전으로 향했다. 간단히 관수를 마친 온객행도 얼른 주자서의 뒤를 따랐다. 설법을 마친 스님들이 하나 둘 법당에서 나오고 주지와 회주 법주 몇 명이 법당에 남아 제자들의 인사를 받았다. 자순사태와 그녀의 제자들도 합장하고 앉아 불경을 외고 있었다. 엽백의는 보이지 않았다. 주자서는 조용히 주지스님께 다가가 아침문안 인사와 외출을 고하고 다소곳이 절했다.

주지는 주자서에게 잘 다녀오라고 말하면서 온객행을 보았다. 온객행은 가볍게 포권하여 인사한 뒤에 주자서를 따라 나왔다. 아직 날이 밝지 않아 산문을 지키는 스님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주자서는 자는 사람에게 공손히 인사한 뒤에 산문을 넘어 등봉으로 향하는 길에 들었다. 온객행은 일부러 큰소리로 “스님! 다녀오겠습니다!” 라고 말하며 주자서 뒤를 따라왔다. 온객행의 목소리에 스님이 깜짝 놀라 깨고는 멀어지는 온객행에게 불평을 했다. 온객행은 ‘히히히’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소림사에서 등봉으로 난 길은 숭산에서 공의로 이어지는 길에 연결 되어있는 관도라 길이 넓고 사람 손을 타서 정비가 잘 되어 있었다. 온객행은 주자서 뒤를 따르며 봄이 완연한 산길을 걸었다. 온객행이 읊는다. “객당에 어젯밤 봄바람 불어오니, 멀리 양주의 미인 생각나네. 베개 위 짧은 봄의 꿈속에서 수천리를 헤맸네.”(71) 주자서는 아무것도 듣지 않았다는 듯이 부지런히 발걸음을 놀렸다. 온객행은 멈추지 않고 주자서에게 치대며 길을 걸었다. “아서 힘들지 않아?” 날이 밝아오자 봄 볕이 들기 시작했다.

한시진쯤 걸으니 불어오는 바람이 따뜻하여 이마에 땀이 맺혔다. 온객행이 소매를 들어 주자서의 땀을 닦아주려고 하자 주자서가 손길을 뿌리치며 손등으로 땀을 훔쳤다. 아침에 일어나서 온객행이 난리를 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반만 내린 머리가 땀에 젖은 목덜미와 얼굴에 달라붙어서 주자서는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 땀을 식힐 겸 가던 길을 멈추고 길가에 앉아 가져온 만두로 요기한 두사람은 해가 중천이 되어서야 등봉에 도착했다.

등봉에 도착한 주자서는 성안으로 들어가서 은장이나 표국을 찾았다. 어디로 서신을 보내려고 하는 것 같았다. 주자서가 봇짐에 챙긴 서신이 주구전이 보내온 서신이라고 생각했던 온객행은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알았다. 어디서 구했는지 귀한 종이봉투에 넣은 서신은 사계산장의 이름으로 날인되어 있다. 보내는 사람은 양주의 율령사 정회다. 점원에게 가서 편지를 부치고 값을 치러야 하는데 주자서는 돈이 없는 모양이었다.

주자서가 온객행을 보자 온객행은 모르는 척 물었다. “아서 돈이 없어?” 주자서는 대답하지 않고 고갯짓으로 점원을 가리켰다. 온객행은 기가 막혀서 허탈하게 웃으면서도 품에서 염낭을 꺼내 값을 치렀다. 은장을 나오면서 온객행이 말했다. “아서 내가 값을 치렀으니 서신의 내용을 알아야겠어.” 주자서는 온객행을 무시하고 걸었다. 온객행이 뒤를 따르며 말했다. “아서! 서신을 부치기 위해 일부러 등봉까지 온 거야?” 주자서가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등봉은 낙양을 거치는 곳에 있어서 번화가가 아주 컸다. 주자서는 늘어놓은 좌판과 지나다니는 다양한 복식의 사람들을 구경하며 걸었다. 온객행은 노점에서 이런 저런 군음식을 사서 주자서에게 권했다. 꿀을 섞은 떡도 있었고 다양한 속을 채운 월병도 있었다. 산지라 말린 육포나 과일도 많았다. 이제 막 움트기 시작한 나물과 꽃망울이 맺힌 매화가지도 있다. 커다란 나무 밑에 상과 의자를 놓고 말린 과일과 차를 파는 노점에 앉아 온객행과 주자서는 주전자에 있는 차를 마셨다.

황실에서 강호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모르면 이렇게 평범한 일상을 보낸다. 소소한 일상으로 충만함을 느끼는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다. 올해 새로 딴 찻잎이라며 바가지를 씌우려는 노점상과 한참 실랑이를 하고 두사람은 등봉성을 나왔다. 주자서는 온객행을 힐끔 보며 뭔가 할말이 있는 눈치였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 걷다 보니 온객행은 그제야 가고 있는 이 길이 소림사를 향하는 길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다.


온객행이 앞서 걷는 주자서와 발걸음을 맞추며 물었다. “아서 어디로 가는 거야? 소림사로 가는 길은 저쪽이야.” 관도에서 벗어나 가파른 산을 잇는 작은 오솔길에 들어섰다. 주자서는 온객행에게 대답하지 않고 가파른 길을 올랐다. 몇차례 발을 헛디뎌 넘어지려는 주자서를 붙잡은 온객행이 주자서의 허리를 안고 경공으로 훌쩍 가파른 길을 넘었다. 주자서는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지만 나무라지는 않았다.

숲의 안쪽으로 조금 더 들어가자 양지바른 곳에 작은 사당이 있었다. 그 사당은 숭양서원에 붙어있는 속가사당으로 서원에서는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온객행은 주위를 둘러봤지만 사당주변에 싸리로 엮은 울타리 말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래도 종종 사람들이 와서 관리를 하는지 사당 내부는 깨끗했다. 위패 여러 개가 모셔진 사당에는 촛대는 물론 선향에도 불이 꺼져 있었다. 온객행은 왜 편하게 숭양서원을 가로지르지 않고 빙 돌아 험준한 산길로 사당에 왔는지 알 수 없었다.

주자서는 봇짐을 내리고 짚으로 엮은 포단을 제단 아래에서 찾아 꺼내어 놓고 소매에서 향낭을 꺼냈다. 주머니를 열어 제단 위에 있는 커다란 향로에 향목을 쏟아 놓고 제단 양 옆에 있는 초가 없는 촛대 아래에서 화섭자를 찾아 향로에 불을 붙였다. 소매를 털어 몸을 가지런히 한 주자서가 포단위에 무릎을 꿇었다.

온객행은 제단 근처를 어슬렁거리며 모셔진 위패를 보았다. 봉호와 이름을 보니 아주 귀한 신분들이 모셔진 사당인 것 같다. 자세히 보니 위패에 글자는 금가루로 썼다. 보통 이렇게 호화롭게 위패를 꾸미는 사람들은 돈이 썩어 나게 많은 상인이거나 귀족이다. 주자서는 소매를 수평으로 들어 귀족이 제례에서 하는 것처럼 신위에 세번 절했다. 주자서의 조상은 귀족인 것인가? 주자서는 양주 회계의 주가(周家)가 아닌가?

모셔진 위패는 대다수가 황제와 같은 사마씨다. 임씨도 유씨도 주(朱)씨도 있지만 주(周)씨는 없다. 온객행은 절을 다하고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는 주자서 옆에 가서 바닥에 덜퍼덕 앉았다. 말을 붙여볼까 싶어 주자서의 얼굴을 보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차라리 울어버렸으면 나았을까? 보는 사람도 애달프게 만드는 표정이다. 온객행은 고개를 들어 신위를 보았다. 촛불 하나 밝히지 않은 사당은 어둡다. 금니(金泥)로 쓰인 위패가 하찮다.

온객행은 부모님의 묘가 생각났다. 부모님 만의 묘는 아니고 누군가가 청성곡의 시신을 수습하여 양지 바른 곳에 안장하고 신의당이 있던 근처에 돌을 세워 묘비를 만들어 놓았다. 묘비에는 청성곡이라고 쓰여 있다. 온객행과 주자서는 작은 사당에 해가 질때까지 앉아 있었다.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주자서가 일어나면서 크게 휘청거렸다. 온객행은 얼른 일어나 주자서의 팔을 잡았다. 향로위에 향목은 다 탄지 오래 되어 흔적도 없다. 주자서는 신위에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나와 사당의 문을 닫고 또 한참 문 앞에 서 있었다. 주자서는 한숨을 가늘게 내쉬며 자세를 바로 하고 왔던 길로 향했다.

온객행은 숭양서원을 뒤로하고 주자서를 따라 갔다. 오르는 길보다 내려가는 길은 더 험해 주자서는 결국 온객행의 품에 안겨 소림사로 향하는 관도에 닿았다. 주자서는 무언가 내려놓은 사람처럼 심드렁하게 옷을 추스르고는 소림사로 향했다. 두사람은 해가 지고 사위가 완전히 어두워져서 소림사 산문에 도착했다.


산문 앞에 서 있는 스님 둘이 심각하게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온객행과 주자서를 보자 스님들이 그들에게 아는 척을 했다. “상선의 제자가 아니십니까? 이렇게 늦게 어디에 다녀오시는 길입니까?” 온객행과 주자서가 공손히 인사하자 그들은 예를 거두라며 말했다. “벌써 제등시간이 지났는데 어서 처소로 돌아가시지요.” 두사람은 산문의 스님들께 인사하고 지객당으로 향했다. 제등시간이 지나 소림사 내부에 있는 건물에는 대웅보전으로 향하는 길을 제외하고 모든 불이 소등된 상태였다. 오늘은 삭일이라 달빛도 없어 길이 더욱 어두웠다.

길을 더듬어 지객당에 도착한 두 사람은 불을 켜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잠자리에 들었다. 온객행은 잠결에 주자서가 훌쩍이는 소리를 들었던 것도 같다. 아니면 꿈속에서 어린 온객행이 훌쩍인 것일지도 모르겠다. 온객행은 비가 내리는 청성곡에 앉아 한참을 훌쩍이다가 어깨를 잡아오는 손을 뿌리쳤다.

눈을 번쩍 뜬 온객행 앞에 사람의 인영이 비쳤다. 방안이 어두워 누구인지 몰라 당황한 온객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 “노온.”이라고 불러오는 주자서의 목소리에 온객행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주자서는 온객행의 침상에 걸터앉아 닫힌 창호문을 보았다. 밖에서 희미하게 비가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주자서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온객행을 다시 침상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온객행의 가슴을 토닥이며 말했다. “내 사제 중에는 고아가 많아. 잠 못 이루는 날은 누구나 있어.” 주자서의 말에 온객행이 가슴을 토닥이는 주자서의 손을 잡았다. “아서도 잠 못 이루는 날이야?” 어둠에 익숙해진 온객행에게 주자서의 표정이 무너지는 것이 보였다. 온객행은 모르는 척 말했다. “아서가 옆에 있으면 잠이 잘 올 것 같아.”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이불을 들췄다.

주자서는 또 한동안 아무 말도 없이 사당에서 봤던 애달픈 표정을 하고 있다가 신발을 벗고 온객행 옆에 누웠다. 주자서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계산장에서는 사제와 같이 바닥에서 자. 침상에서 주무시는 건 사부님들뿐이야.” 온객행은 옆으로 돌아 누워 주자서의 가슴에 팔을 두르며 말했다. “그럼 아서의 사형제들은 모두 아서의 침상에 올랐겠네.”

주자서가 가슴에 올려진 팔을 치우며 온객행쪽으로 돌아 누웠다. “노온.” 주자서가 부르는 소리가 좋아 온객행이 답했다. “응. 아서.” 주자서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오늘 사당에 다녀온 것은 우리 둘만의 비밀이야.” 온객행은 딱히 다른 사람에게 말할 생각도 없었지만 주자서가 ‘둘만의 비밀’이라고 말한 것이 좋았다. “응. 아서랑 나랑 둘만의 비밀.” 주자서가 부스스 웃는 것을 보고 온객행도 따라 웃었다.

온객행이 눈을 떴을 때 온객행은 주자서의 목덜미에 코를 박고 있었다. 몸을 말고 자는 주자서의 허리에 팔을 감고 뒤에서 껴안고 있었다. 주자서는 아직 깨지 않았는지 몸이 따끈하고 부드러웠다.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져 얼굴을 들자 엽백의가 온객행을 실눈으로 보고 있었다. 온객행은 엽백의를 보고 씨익 웃은 다음에 다시 주자서의 목덜미에 얼굴을 비볐다.

엽백의는 온객행이 하는 짓을 보고 있다가 코웃음을 치고 말했다. “기왕이 죽었다.” 엽백의의 말에 고개를 번쩍 든 온객행이 다시 물었다. “기왕 사마영이 죽었단 말이오?” 온객행의 목소리에 주자서도 잠에서 깼는지 눈을 떴다. 자신을 안고 있는 온객행을 느꼈는지 몸이 경직되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침상을 내려다보고 있는 엽백의를 발견하고는 불에 데인 것처럼 온객행을 밀쳤다. “어르신!”

주자서가 침상에서 내려와 인사하려고 하자 엽백의가 탁자로 가 앉으며 말했다. “중독으로 기왕이 죽은 것 같다.” 옷을 주워 입던 주자서가 크게 놀라며 엽백의에게 물었다. “기왕 전하가 등하 하셨습니까?” 엽백의는 주자서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주자서는 옷을 입다 말고 바닥에 털썩 주저 앉았다. 온객행이 주저 않은 주자서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황후 입니까?”

엽백의는 ‘흠’하더니 말했다. “낭야왕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온객행은 주자서를 침상위에 앉히고 다 식은 찻물을 가져다 주자서에게 건넸다. 주자서는 정신이 없는듯 작은 소리로 “희란형님께서 왜…?” 엽백의는 크게 동요하는 주자서와 그의 시중을 드는 온객행을 보며 말했다.


기왕은 풍년제를 지내러 황제가 정주에 갔을 때 죽은 듯하다. 앵속에 중독되어 그 용량을 알지 못하는 이가 결국 허용량을 초과하여 저승문을 연 것이다. 음용하는 것으로는 초무관에서 공급하는 앵속은 불순물이 많아 죽음에 이르게 할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그것을 향에 섞어 태워 흡입했다면 불순물과 앵속의 약효가 어떻게 섞여 무슨 작용을 할지 아무도 알 수 없다.

금족령이 내려진 기왕을 찾는 사람은 많지 않았으니 황제가 정주에서 낙양으로 돌아오기 전까지 그가 죽었는지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황후도 뒤늦게 발견하는 바람에 기왕의 앵속을 감추지 못했다. 황제는 진노하여 황후와 진왕을 감옥에 가두었다고 했다. 진왕은 한가롭게 주자서를 찾아올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정주의 일이 아직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일이 몰아치니 시국이 불안하다. 조왕은 황후의 선처를 빌며 기왕의 장례를 도맡았고 낙양 근처에 봉지를 가진 황족들이 하나 둘 불필요해 보이는 군사를 이끌고 낙양으로 향하고 있다. 황제는 아들을 잃은 슬픔으로 앓아 누웠으며 황제의 재종형제인 진사왕 사마예와 남중랑장 사마흠(司馬歆)이 황제의 일을 대신하고 있다.

엽백의의 말을 부들부들 떨리는 몸으로 듣고 있던 주자서가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整蘭)정란, 네놈이 결국!” 조왕의 자를 들은 엽백의는 조금 놀랐다. 주자서가 무슨 생각으로 감히 군왕의 자를 존칭없이 부르는지 몰랐다. 옆에서 주자서의 시중을 들던 온객행이 주자서의 어깨에 팔을 둘러 다시 침상에 앉힌 다음 꽉 쥐어진 주자서의 주먹을 쓸며 그를 달랬다. 온객행과 주자서의 모습이 다정하여 엽백의는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이 어느 시국인데 애정 놀음인지.’

엽백의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너희는 외출을 자제하고 처신을 조심하도록 해라.” 온객행이 고개를 들어 엽백의를 보며 말했다. “노야 어디 가시오?” 엽백의가 말했다. “채미공자가 사라졌다.” 낙양성에서 앵속을 취급하고 사용하는 것은 초무관 밖에 없다. 채미공자가 사라졌다면 앵속의 출처는 알아내기 힘들 것이다.

온객행이 말했다. “초무관에서 일하는 자들은 모두 그대로 입니까?” 엽백의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문성왕에게 선물을 보낸 것은 채미공자가 아니라 그곳에서 일하고 있던 소녀… 소년입니다.” 엽백의가 말했다. “화산파와 태산파에 관련된 자들은 이미 초무관을 떠났다. 지금 그곳은 호위하는 사람이 없는 기루이니…” 엽백의는 고개를 끄덕이고 훌쩍 지객당을 나갔다.

조왕과 낭야왕은 황제를 독살하려고 계획 한 일로 처벌을 받지 않은 것 같다. 애초에 황제가 죽지 않았고 죽을 만큼의 양도 아니었다. 배위에서 일하던 하인들에게 누명을 씌워 죄를 덮었을 것이다. 낭야왕이 다시 봉지로 돌아가 기왕의 일로 군사를 끌고 낙양으로 들어온다면 낙양성 근처의 교위와 낙양성안의 금위군만으로는 그를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강호와 관련된 이들이 낭야왕을 돕는다면 찬탈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황후와 내통했다는 자는 강호인이 아니라 낭야왕일지도 모르겠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온객행은 침상에 걸터앉아 넋이 나간 주자서 옆에 몸을 붙여 앉았다. 조용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아서, 아서…” 주자서는 양손에 얼굴을 묻고 숨을 몰아 쉬고 있었다. 이유를 모르는 온객행은 애가 타서 주자서의 등을 문지르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참 얄궂은 일이다. 어제 황족의 사당에 다녀왔는데 오늘 기왕의 죽음에 대해 듣게 되다니. 주자서는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게 앉아 온객행이 드는 시중을 받았다. 젖은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주어도, 차를 마시라고 잔을 입에 대주어도 고분고분 따라주었다. 저녁 늦게 사계산장에서 서신이 도착했다. 온객행은 주자서에게 옷을 입히고 머리를 빗겨 주었다. 넋이 나간 그를 데리고 자운당으로 갔다.

주지는 서신을 건내 주면서 펴보라고 눈치를 주었는데 주자서는 서신을 받고도 멍하게 앉아만 있었다. 온객행이 옆에 앉아 주자서의 변명을 했다. 등봉으로 다녀오는 길이 고되어서 몸이 좋지 않다고 둘러댔다. 예전에도 잠이 부족하여 열이 났던 적이 있었으니 주지는 별다른 의심없이 그들을 돌려보냈다. 지객당으로 걸어오는 내내 주자서는 말없이 서신을 품에 안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어 답답해진 온객행이 입을 열었다. “아서 아무래도 양주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어.” 주자서가 발길을 멈췄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그를 다시 처소로 이끌며 말했다. “아무래도 낙양에 좋지 못한 일이 일어날 것 같으니 양주로 내려가는 것이 좋겠어. 주대인이 오시면 내가 잘 말할게.” 온객행의 말에 주자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넋이 나간 표정이 아닌 표정을 오늘 처음 본 온객행은 주자서의 팔을 문지르며 계속 말을 이었다. “사계산장으로 돌아가서 기다리고 있으면 내가 사주단자를 보낼게. 아니지 아서가 장명산으로 사주단자를 보내야 돼.” 주자서는 온객행의 얼굴을 보고 기가 막히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온객행은 멈추지 않고 말했다. “그럼 내가 노야를 졸라서 사계산장을 가득 채울 예단을 준비해 갈게.” 주자서가 온객행의 팔을 뿌리치며 말했다. “노온 나는 지금 돌아갈 수 없어.” 온객행은 주구전이 주자서를 데리고 양주로 못 돌아가서 안달이었던 것이 떠올랐다. 주자서는 품에 안고 있는 서신을 한참 보더니 뭔가 결심한듯 힘차게 처소를 향해 걸었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넋이 돌아온 것 같아 기쁘면서도 이제 고분고분 제 시중을 안 받아주면 어쩌나 걱정하였다.

처소로 돌아온 주자서는 봇짐을 싸기 시작했다. 날이 다 늦어 사위가 캄캄한데 어디로 가려는 것인지 작게 봇짐을 멘 주자서가 처소를 나가려고 하자 온객행이 주자서를 붙잡았다. “아서! 아서, 지금 어딜 가려고?” 주자서는 온객행을 뿌리치고 싶었지만 내공이 흩어진 지금 주자서가 온객행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아서 진정해 일단 오늘은 쉬고 내일 날이 밝으면 떠나.”

주자서가 몸부림을 멈추고 자신의 팔을 잡아오는 온객행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노온 난 어서 태산으로 가야 하겠어.” 온객행이 당황하여 물었다. “갑자기 태산에는 왜?” 주자서는 입을 꾹 다물고 말하지 않았다. 온객행이 단호하게 말했다. “말하지 않으면 나도 못 놔줘.” 그리고는 주자서를 어깨에 매고 처소 안으로 들어가 침상 위로 던졌다. 주자서는 다시 벌떡 일어나 문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렇게 둘이 실랑이를 하고 있는데 밖에서 소등시간을 알리는 목탁소리가 났다.

목탁소리는 점점 가까워지더니 처소 근처까지 와서 객실의 문을 벌컥 열었다. 한참 실랑이 중이던 온객행과 주자서는 누가 들어온 줄도 몰랐다. 두 사람을 구경하던 심아가 목탁을 치며 외쳤다. “해시요! 밤의 시작 해시요!” 온객행에게 붙잡혀 버린 주자서는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낑낑댔다.

심아는 한참 구경하다 밖에서 부르는 소리에 아쉽다는 듯이 두사람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을 나갔다. 하루 종일 넋이 나가 먹고 마시는 것을 소홀이 했던 주자서는 힘이 쭉 빠져서 온객행에게 기대고는 말했다. “온객행 내가 내공만 있었으면 너는…” 온객행은 주자서의 등에 매인 봇짐을 풀어 멀리 던져두고 주자서를 침상에 앉혔다.

주자서가 고분고분 자리에 앉자 온객행도 그 옆에 앉아서 주자서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주자서는 숨이 찼는지 숨을 몰아쉬며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온객행. 허튼 짓 할 생각 하지마.” 엽백의에게도 들었던 말을 주자서에게 들으니 신선하다. 온객행은 모르는 척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아서 대체 그 허튼 짓은 뭘 말하는 거야?” 주자서가 대답없이 고개를 돌려버렸다. 온객행은 드러난 목덜미에 아침에 했던 것처럼 코를 박고 냄새를 맡았다. 아침에 맡았던 그 체향이다.

주자서는 손을 들어 온객행의 얼굴을 밀었다. 온객행이 물었다. “이것도 허튼 짓이야?” 주자서는 대답없이 온객행의 팔을 뿌리쳤다. 멀리 던져진 봇짐과 온객행을 번갈아 보던 주자서가 다시 일어나자 온객행이 그의 팔을 붙잡고 다시 앉히며 말했다. “아서. 접문해주면 태산까지 가는 것도 도와주고 왜 가는지 묻지도 않을게.” 온객행의 말에 주자서는 코웃음 쳤다. “노온 아내는 남편을 대함에 있어 유순함이 제일 귀하고, 열락을 탐하여 음란한 것은 아내의 도리가 아닌 것을 모르는가?”(72) 온객행은 주자서가 자신을 아내 취급하는 것이 기꺼워 웃으며 말했다. “부군, 음란함이 일어나는 것이 어찌 음란한 자가 만드는 것이겠습니까?”(73) 그리고는 눈을 감고 입을 쭉 내밀었다. 주자서는 내밀어진 온객행의 입을 찰싹 때리고는 침상에 누워 버렸다.

(71) 잠삼 봄의 꿈 春夢
洞房昨夜春風起 遙憶美人湘江水 枕上片時春夢中 行盡江南數千里
동방에 어젯밤 봄바람 불어오니, 멀리 상강가의 미인 생각하네. 베개 위 짧은 봄꿈 속에 강남 수천리 두루 돌아다녔네.

(72) 대학연의 6권 明道術 명도술 天理人倫之正 천리인륜지정
婦之於夫 貴乎柔巽 苟不由正則狃説而流於淫 非妻道也
아내는 남편을 대함에 있어 유순함을 귀하게 여기지만, 진실로 정도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열락을 탐하여 음란으로 흐르게 되니 아내의 도리가 아닙니다

(73) 노자미지예략(老子微旨例略) 하편 6장
夫邪之興也는 豈邪者之所爲乎리오 淫之所起也는 豈淫者之所造乎
사악함이 생겨나는 것이 어찌 사악한 자가 하는 것이겠으며, 음란함이 일어나는 것이 어찌 음란한 자가 만드는 것이겠는가?


雨霖鈴 第22

22. 落花流水
떨어지는 꽃과 흐르는 물.

주자서는 사흘 내내 온객행을 웃는 낯으로 대하면서도 묘하게 거리를 두었다. 덥석덥석 끌어안아도 작게 한숨을 쉴 뿐 반응이 없다. 그래서 온객행은 더 치댔다. 소림사는 아침이 이르다. 듣기로 하루에 총 두번의 설법을 하는데 그 중 첫번째 설법이 오경 끝나자 마자 한다고 했다. 그래서 소림사에서는 묘시와 중천 그리고 술시에 종각의 종을 쳤다. 범종은 일각의 간격으로 네 번 울리는데 주자서는 네 번의 종이 다 울리기 전에 기침하는 편이었다.

일찍 일어나는 주자서 덕분에 덩달아 일찍 일어나게 된 온객행은 주자서와 함께 주방에서 아침을 먹었다. 주방장이 온객행을 기억하는지 온객행은 눈칫밥도 잔뜩 먹었다. 아침 일찍 주자서는 주구전에게 서신을 두개 받았는데 주구전이 떠난 지 사흘만이다. 하나는 주자서에게 하나는 엽백의에게 온 서신이다.

주자서의 서신은 주자서가 탁상에 앉아 읽을 때 보았다. 태산에 가기 전에 개봉에서 개방의 장로를 만났다는 내용이다. 그 때문에 태산으로 가는 길이 늦어 졌으니 돌아오는 길 역시 지체될 것이다. 주자서는 읽은 서신을 다시 고이 접어 행낭에 넣어 두고 다른 서신 하나를 들고 자운당에 있는 엽백의에게 갔다. 곡우가 다가오니 점점 날이 길어지는 것이 보였다. 이제 막 진시(辰時)가 시작된 것 같은데 벌써 대낮같이 환했다.

지객당과 주방을 오가며 보니 소림사가 부산하였는데 길을 가던 스님께 여쭈니 어제 저녁 늦게 아미파에서 보낸 사람들이 도착한 듯하다. 여성의 출입이 금지된 소림사에 아미파가 왔다고 하니 신기하다. 온객행은 대웅보전으로 가서 그들을 구경하고 싶은 마음 반, 그리고 주자서를 졸졸 따라다니고 싶은 마음 반이었다. 온객행이 주자서의 소매를 잡으며 말했다. “아서 아미파래, 우리 가서 구경하지 않을래?”

주자서는 옷을 정리하는 척 소매를 털며 말했다. “온공자께서 궁금하시면 가서 보시지요.” 온객행이 뿌리쳐진 손으로 다시 주자서의 손목을 잡으며 말했다. “그래 같이 가서 보자.” 온객행이 끄는 힘에 휘청이는 주자서가 당황하며 말했다. “온공자!” 둘은 대웅보전 앞까지 갔지만 결국 안에 들어가지는 못했다. 원주와 도감이 대웅보전 주변을 촘촘히 경계하고 있었다. 괜히 아쉬워 얼굴을 아는 스님들께 사정해 보았지만 안에는 주지와 검선 그리고 아미파에서 왔다는 자순사태와 그녀의 제자들이 있다고 했다. 소림사에서 여성을 허가하는 일은 드문 일이기 때문에 이렇게 엄중하게 경계하는 것도 일리가 있다.

온객행은 괜히 김이 빠져서 스님께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지객당으로 향했다. 주자서는 온객행의 몫까지 차분하고 공손하게 인사하고 온객행의 뒤를 따랐다. 어깨너머로 주자서를 보니 주자서는 요 며칠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했다. 몇차례 무슨 일이냐고 물어도 웃으며 아무 일도 아니라는 대답만 들었다.

괜히 심통이 난 온객행은 갑자기 가던 길을 멈추고 휙 돌아섰다. 뒤에 따라오던 주자서가 온객행의 등에 부딪혀 거리를 벌리자 온객행이 주자서의 허리를 잡아 들었다. 당황한 주자서가 버둥거리며 온객행을 불렀다. “노온!” 온객행은 반가운 호칭에 빙글빙글 자리에서 몇 바퀴 돌다가 주자서를 내려 놓았다. 옷차림을 정리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린 주자서가 스님 몇을 발견하고는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온공자! 이게 무슨 짓이오!”

온객행이 자신의 소매를 펼치며 말했다. “가는 허리의 미인 춤추네! 더구나 화창한 봄에 그대에게 권하니 종일토록 실컷 취하리.”(67) 주자서는 아주 작지만 확실하게 ‘쯧’하고 혀를 차면서 온객행을 지나 지객당으로 향했다. 혀를 차는 소리가 기꺼워 온객행은 주자서에게 들러붙으며 말했다. “아서 오늘도 하루 종일 불경만 읽을 거야? 같은 장을 몇 시진씩 보면 뭐가 보여?” 주자서는 눈을 굴리며 온객행의 말을 무시했다. 온객행이 말했다. “아서 그러지 말고 공의에 다녀오자. 아니면 배를 타고 우주나 여양을 가 볼까? 온객행의 말에 구미가 당겼는지 주자서가 온객행을 보았다.

온객행의 손길을 치워낸 주자서는 다시 말없이 지객당으로 향했다. 지객당에 도착해서 어제 보았던 낡은 죽간을 펼쳐 놓고 한시진이면 다 읽을 책을 중천이 다 될 때까지 보고 있다. 심심한 온객행은 주자서 옆에서 주자서가 읽는 죽간을 보았다가 스님들께 얻어온 차를 우려 주자서와 나눠 마시기도 했다가 우물가에서 물을 길어 오기도 했다.

중천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 주자서가 앉은 탁상 앞에 턱을 괴고 주자서를 보며 말했다. “아서 배 안 고파?” 주자서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죽간에 시선을 두고 있다. 온객행은 또 지객당 여기저기를 어슬렁거리다 빗을 들고 주자서가 앉은 자리 뒤에 앉아서 주자서의 머리를 빗기 시작했다. 끝이 갈라지고 푸석푸석한 머리에 머릿기름을 발라주고 싶었지만 찾아도 없으니 그냥 잘 빗는 수밖에 없다.

처음엔 놀라서 하지 말라고 하던 주자서도 말린다고 그만둘 치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서 그냥 내버려 두었다. 온객행은 묶여 있던 주자서의 머리를 풀어 잘 빗은 다음 엽백의가 머리를 올릴 때 쓰는 기다랗고 하얀 천으로 흘러내리지 않게 반만 묶었다. 온객행은 한동안 눈을 내리깔고 책을 읽는 주자서를 구경했다. 한참 보고 있다 주자서와 눈이 마주쳤다. 주자서가 말했다. “다 보았는가?” 온객행은 ‘히히히’ 웃었다.

온객행은 주자서를 남겨두고 주방에 가서 만두 몇 개를 얻어 대나무 바구니에 넣었다. 주방에서 밥을 먹는 이들 중에 온객행을 곁눈질로 보는 이들이 많았다. 그 이유는 지객당으로 돌아오는 길에 만난 엽백의를 보고 알았다. 엽백의 옆에는 그와 아주 비슷한 옷을 입은 여인이 있었다. 온객행은 대나무 바구니를 내려놓고 엽백의에게 포권하여 인사하며 말했다. “스승님! 언제 아미파의 사태가 되셨습니까?” 온객행의 말에 엽백의 옆에 서있던 여인이 살며시 웃었다.

엽백의가 온객행에게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 온객행은 웃으며 자순사태(慈順師太)에게 인사했다. “장명산의 제자 온객행 사태를 뵙습니다.” 자순사태는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예를 거두게.” 온객행은 인사를 하고 다시 가던 길을 가기 위해 내려 놓았던 대나무 찬합을 들었다. 엽백의가 물었다. “어디 가느냐?” 온객행은 대답하지 않고 엽백의를 보았다. 엽백의는 ‘흥’하고 코웃음 치며 말했다. “네 모과에게 가는 길이냐?”

온객행은 엽백의의 말을 듣고 헤실헤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엽백의는 품에서 주구전에게 받은 서신을 온객행에게 건네며 말했다. “내 누누이 말하지만, 미리 안다는 것은 도의 허황된 꽃이요 어리석음의 시작이다.(68) 우리는 원한을 사러 온 것이 아니다.” 엽백의의 말에 옆에 있던 자순사태가 미간을 찡그렸다. 온객행은 공손히 두손으로 엽백의의 서신을 받았다. 엽백의는 온객행의 인사도 듣지 않고 주방으로 향했다. 엽백의 뒤를 자순사태와 아미파의 제자들이 따랐다.


온객행이 지객당으로 돌아왔을 때 주자서는 보이지 않았다. 당황한 온객행은 찬합을 놓고 지객당 근처를 뒤졌지만 주자서는 보이지 않았다. 일각쯤 추보당 근처와 비랑을 어슬렁거리던 온객행은 자운당 쪽에서 걸어오는 주자서를 발견하고 다가갔다. “아서 어디 다녀왔어?” 주자서는 온객행에게 고갯짓으로 인사를 하고 지객당으로 향했다.

지객당에 도착해서 온객행은 주방에서 얻어온 찬합에서 만두를 꺼내 주자서에게 내밀었다. “아서 배고프지? 대체 어디를 다녀온 거야? 벌써 조금 식었네…” 주자서는 만두를 보고 있다가 시선을 들어 온객행을 보았다. “내일 등봉에 다녀올 거야.” 등봉은 숭산 동남쪽에 위치한 성이다. 보통 숭산에 도착했다고 말하면 숭산 기슭에 있는 이 등봉을 말하는 것이다. 숭산은 산이 크고 험준하여 악산이라고도 불리는데 그래서 근처에 성이 들어선 도시가 많지 않다.

등봉은 숭산을 넘어 사례로 가기 위해 꼭 거처야 하는 관문이다. 온객행이 물었다. “등봉에는 왜?” 주자서가 바구니에 들어 있던 만두를 먹었다. 온객행도 손에 들려 있는 만두를 입으로 가져갔다. 만두를 하나씩 사이좋게 나눠 먹은 후에도 말이 없기에 온객행은 조바심이 나서 다시 물었다. “아서 등봉에는 왜 가는 거야?” 주자서는 여상하게 차를 우리며 온객행의 말을 무시했다. 온객행은 어차피 따라갈 것이니 가서 보면 되겠다고 생각하고 더 묻지 않았다.

온객행은 고민하고 있었다. 주구전의 서신을 주자서에게 보여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 주자서가 없어지는 바람에 잠시 잊은 서신이 아직도 품속에 있다. 온객행은 지객당으로 오기 전에 오는 길에 읽어 보았다. 낭야왕의 사병에 관련된 내용이었다. 사례를 벗어나자마자 주구전은 무엇인가 다르다는 것을 눈치챘다. 개봉에서 만난 개방의 방주는 아주 거만하여 주구전을 만나주지도 않았다. 개방의 특색을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다.

개봉성 안에는 개방에 소속되어 있는 거지인지 아닌지 모를 거지들이 굉장히 많았는데 모두 무공실력이 좋은 사람들이라고 한다. 개방에서 일부러 무공이 높은 자들을 불러들인 것 같다고 말했다. 태산으로 향하는 연주를 지나면서 주구전은 양주로 서신을 보냈다고 한다. 사계산장의 제자들을 시켜 태호파와 양주 일대의 문파를 떠보게 한 것이다.

온객행은 사계산장의 소식이 있으니 알려주는 것이 맞았지만 왜 등봉에 가는지 알려주지 않는 주자서에게 심술이 나서 조용히 입을 다물고 차를 마셨다. 소림사의 차는 생차로 녹차였는데 아주 맛이 좋았다. 같이 잔을 드는 이도 보는 맛이 좋다.

해가 뉘엿거리기 시작할 때 오랜만에 만나는 심아가 온객행과 주자서를 데리러 왔다. 심아는 그들을 자운당으로 안내했다. 자운당 근처는 그 전과 다르게 스님들이 주변을 감시하고 있었다. 자운당 안으로 들어가자 엽백의와 주지 그리고 자순사태가 앉아 있었다. 온객행은 포권하여 주자서는 공수하여 인사했다. 온객행이 먼저 인사했다. “온객행 인사드립니다.” 그리고 그 뒤에 주자서가 인사했다. “양주 사계산장 주자서 인사드립니다.” 온객행은 고개를 돌려 주자서를 보았다. 그가 온객행을 제외한 다른 사람에게 사계산장의 제자라는 것을 밝힌 것은 온객행이 알기로 이번이 처음이다.

그 말을 들은 엽백의가 ‘흥’하고 코웃음 치며 말했다. “사계산장의 제자라는 놈이 내공은 어찌 했느냐?” 주자서가 손을 내리고 다소곳이 앉아 대답했다. “조부께서는 이 일에 사계산장이 관여하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천자께 저를 유생이라 소개하셨습니다.” 주구전은 숭산을 방문하는 일을 개인적인 일로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서신의 내용을 떠올려보니 원하든 원치 않든 이 일에 휘말리지 않기는 어렵다.

확실하게 일어난 일에 대해 모르는 것 치고는 꽤나 파격적인 선택이다. 엽백의가 말했다. “아는 것으로 시의를 판단하는 것은 부득이하게 필요하기 때문이다.”(69) 엽백의가 온객행을 보며 말했다. “사계산장도 이 일에 관여하게 되었으니 너는 앞으로 처신을 조심하도록 해라.” 주자서가 머리를 바닥에 붙여 절했다.

엽백의는 온객행에게 황제의 배 위에서 일어났던 일과 초무관에 다녀온 이야기를 하게 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자순사태가 입을 열었다. “문성왕은 예전부터 이상한 사람이었으니 의심을 피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아미산은 익주에 있으니 익주에 봉지를 가진 현재 좌장사인 사마헌을 알고 있었다. 엽백의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온객행이 말을 이었다. “초무관에서는 제가 진왕이 보내온 사람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확신하지는 않았는지 초무관을 빠져나와서 숭산으로 오는 길까지 저를 추적했습니다.” 그러자 옆에서 염주를 굴리고 있던 주지 여운이 말했다. “요즘 숭산 근처에 불온한 자들이 많습니다. 아직 돌아가지 않고 근처를 떠도는 문파도 있습니다.” 소림사에 머무는 객 중에 소림사를 나가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섣불리 나갔다가 의심을 살까 모두 몸을 사리는 중이었다. 게다가 단양파, 경호파, 태산파와 화산파의 장문이 묶여 있으니 속이 아마 까맣게 타 들어가는 중일 것이다.

밖에서 공동파의 손님이 도착했다는 기별을 했다. 엽백의는 자순사태와 주지를 한번보고 온객행과 주자서에게 물러가라 말했다. 공동파에서 보낸 자는 굉장히 젊어 보였다. 공동파는 천마교가 있는 천천산맥을 마주하고 있어 크고 작게 분란이 많았기 때문에 중원에서 일어나는 일에 무심했다.

공동산은 마교가 중원으로 들어오기 위해 꼭 거쳐야 하는 길목에 있었으므로 그들이 이 일에 사람을 보낸 것은 이번 일이 천마교와도 닿아 있다는 것을 넌지시 시사했다. 초무관에서 얻은 앵속과 독약으로 마교와의 관계를 짐작했던 온객행은 그제야 왜 주지가 부러 아미파와 공동파를 함께 불렀는지 알 것 같았다.


지객당으로 돌아온 주자서는 덧문을 닫자마자 온객행에게 손을 뻗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내밀어진 손을 잡고 온객행이 웃자 주자서는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조부께서 보낸 서신을 어서 내놓으시오.” 온객행은 주자서가 언제 눈치챘는지 몰라 일단 모르는 척했다. “아서 그게 무슨 소리야?” 주자서가 미간을 찡그리며 다시 손을 내밀었다. “조부께서 어르신께 보낸 서신을 내놓으란 말이오”

온객행은 서신이 들어있는 품에 양손을 올리며 말했다. “무슨 서신 나는 몰라.” 온객행이 두 손을 짚은 앞섶을 보며 주자서가 눈을 가늘게 떴다. “온객행. 말로 할 때 내놔.” 온객행이 한발짝 물러나며 말했다. “아이 아서 화내지 마 내일 등봉에 왜 가는지 알려주면 줄게.”

주자서는 온객행이 멀어진 만큼 다가서며 말했다. “그것은 온공자가 관여할 일이 아니니 어서 서신을 내놓으시오.” 온객행은 대답없이 고개를 도리질했다. 주자서는 콧김을 ‘흥’하고 내뿜은 뒤에 온객행의 앞섶을 잡았다. 당황한 온객행이 웃으며 말했다. “부군 소인을 가련히 여기소서!” 주자서는 앞섶을 잡아 벌리기 위해 온객행과 몸싸움을 했다.

둘이 그렇게 실랑이를 하고 있는데 밖에서 바구니를 든 심아 스님이 기별도 없이 문을 벌컥 열었다. 온객행은 양손을 가슴에 모은 채로 주자서는 온객행의 앞섶에 손을 쥔 채로 심아를 맞이하고 말았다. 심아스님은 움직임을 멈춘 주자서와 온객행을 번갈아 가며 보더니 히죽거리며 말했다. “법주스님께서 가져온 귤 좀 드셔 보세요.” 그리고는 손에 든 바구니를 탁상위에 올려 놓았다.

주자서는 온객행의 앞섶을 밀어 놓고 쏘아보며 말했다. “무슨 일입니까?” 주자서의 노기 섞인 목소리에 놀란 심아가 말했다. “주공자, 주공자! 안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려 놀라서 무례를 범했습니다. 용서하세요.” 유들유들하게 웃으며 바구니에 들어 있는 귤을 권한다. 저 중놈이 무슨 꼴을 보고자 기별도 없이 방문을 열어 젖힌 것인지 온객행은 모를 수가 없었다. 주자서는 허탈하여 한숨을 쉬고 탁상 앞에 앉아 바구니에서 귤을 하나 들어 까기 시작했다.

온객행은 앞섶에 손을 모은 채 심아에게 말했다. “살구꽃 날아들어 봄은 흩날리고 밝은 달 창문에 그윽한 사람 찾아 옷 걷고 달 아래 거닐며 꽃그림자 밟으니…”(70) 주자서가 바구니에 있던 귤을 온객행에게 던지며 소리쳤다. “온객행! 그 입 좀!” 온객행은 주자서가 던진 귤을 받으며 다시 말했다. “내게 귤을 주시는데 무엇으로 보답하나 굳이 갚자는 것이 아니라 길이 사이좋게 지내 보자며….”(28) 주자서는 한숨을 크게 쉰 뒤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심아는 갑자기 손을 앞으로 내젓고 말했다. “제가 두 공자님의 흥을 방해한 모양입니다. 심아는 이만 물러 가겠사오니…” 반장을 하고 인사한 심아가 문을 닫으며 객당을 나갔다. 온객행은 심아가 아직도 문밖에 붙어 있는 것을 알고 일부러 문에 가까이 다가서서 말했다. “아서, 부군! 소인을 가련히 여기소서!” 그리고는 문을 확 밀었다.

밖에서 장지문에 귀를 대고 듣고 있던 심아가 바닥으로 철버덕 넘어졌다. 온객행은 들고 있던 귤을 심아에게 던지며 말했다. “스님 살펴 가십시오.” 심아가 멋쩍게 자리를 털고 일어나 반장하며 멀어졌다. 온객행은 심아가 지객당에서 꽤 멀어진 다음에 창호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왔다.

주자서는 탁상 앞에 그린 듯이 앉아 귤을 먹고 있었다. 온객행이 탁상으로 다가가 바구니에서 귤을 꺼내며 말했다. “아서 맛있어? 아서는 귤을 좋아해?” 주자서가 까놓은 귤을 떼어 온객행의 입에 넣어 주며 말했다. “노온 귤이 아주 맛이 좋네, 맛보게.” 온객행은 주자서가 주는 귤이 기꺼워 몸을 가까이 붙여 주자서의 손에서 귤을 받아먹었다. 주자서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온객행의 앞섶으로 손을 넣어 서신을 손에 쥐었다.

온객행이 놀라 몸을 뒤로 뺐지만 서신은 이미 주자서의 손에 있었다. 주자서는 온객행을 보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리고는 서신을 펴서 읽었다. 앞섶을 정리한 온객행이 턱을 괴고 주자서에게 말했다. “아서 귤이 정말 맛있다. 더 줘.” 그리고 입을 벌렸다. 주자서는 다 읽은 서신을 탁상에 내려 놓고 바구니에서 새로운 귤을 들어 온객행의 입에 껍질을 까지도 않고 넣었다. “알아서 드시게.” 온객행은 입안으로 들어온 귤을 정성스럽게 까서 주자서의 입 앞으로 가져갔다.

주자서는 고개를 돌렸지만 온객행이 끈질기게 권하자 결국 귤을 받아먹었다. 이 귤은 달지 않았는지 주자서의 미간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고 있던 온객행이 말했다. “아서 등봉에는 왜 가는 거야?” 그러자 주자서가 온객행의 손에 있는 신 귤을 들어 온객행의 입안에 넣으며 말했다. “어차피 따라올 예정 아닌가? 등봉에 가면 알게 될 걸세.”

온객행은 신 귤을 씹어 삼키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귤을 다 먹은 온객행이 주자서에게 물었다. “등봉에는 나도 가는 거야?” 주자서는 바구니에 든 귤을 이리저리 고르면서 무심하게 말했다. “싫으면 말던지.” 온객행은 도리질하며 말했다. “아니야! 너무 좋아 꼭 갈래 아서랑 등봉에 가고 싶어!” 그리고 ‘히히히’ 하고 웃었다.

해시가 되자 소등시간을 알리는 목탁소리가 들렸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침상에 이불을 펴 놓고 주자서가 관수 마치기를 기다렸다. 어찌 하다 보니 온객행과 주자서는 같은 옷을 입게 되었는데 온객행에게는 조금 짧았고 주자서에게는 꼭 맞았다. 주자서가 의자에 벗어 놓은 하얀 장포와 중의를 잘 개어 놓고 온객행도 장포와 중의를 벗었다.

침상에 앉아 신발을 벗는 주자서 옆에 가서 주자서가 이불 덮는 것을 봐준 온객행이 한참 머뭇거리며 자리를 떠나지 않자 주자서가 온객행을 불렀다. “노온.” 온객행이 주자서를 보며 대답했다. “응. 아서 왜?” 주자서가 고갯짓으로 침상을 가리키며 말했다. “노온 내일 등봉에 가려면 어서 쉬는 것이 좋아.” 온객행은 주자서가 고갯짓한 침상을 한참 보다가 주자서에게 말했다. “아서 춥지 않아?”

주자서가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추우면 가서 중의를 덧입고 주무시게.” 그리고는 온객행에게 등을 보이며 돌아 누웠다. 온객행이 이불 안으로 손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아서어. 나는 좀 추운 것 같아.” 주자서는 벌떡 일어나 다시 침상에 걸터앉아 신발을 신었다. 온객행은 주자서가 나가려는 줄 알고 주자서의 팔을 붙들며 말했다. “아이요, 아서 알았어. 가서 잘게 어서 누워.” 주자서는 침상에서 일어나 온객행을 본인이 누워있던 침상에 눕혔다.

앞섶에 가지런히 손을 모으고 누워있는 온객행을 보고 코웃음친 주자서가 온객행의 신발을 벗겨 침상 옆에 두고 이불을 덮었다. 온객행은 영문을 몰라 주자서를 불렀다. “아서. 아서….” 주자서는 대답없이 온객행의 이불을 머리 끝까지 덮어버리고 온객행의 신발을 들고 남은 침상에 올라 이불을 펼쳤다.

온객행이 주자서에게 말했다. “아서 내가 아서를 두고 도망갈 리 없잖아. 신발은 왜?” 주자서가 침상에 올라 이불을 덮으며 말했다. “허튼 짓 하지 말고 어서 주무시게.” 온객행이 말했다. “허튼 짓이라니? 아서 무슨 허튼 짓을 말하는 거야?” 주자서에게 대꾸가 없자, 온객행은 또 한참동안 추운 것 같다 느니, 무섭다 느니 같은 말도 안되는 흰소리를 늘어놓았다. 주자서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등을 돌려버렸다.

달이 기우는 삭일이 다가오는 모양인지 객당 안이 어두웠다. 주자서의 숨소리가 일정해진 것을 눈치챈 온객행은 자리에 일어나서 깨금발로 주자서가 누워있는 침상으로 갔다. 춥지 않다면서 이불을 안고 잔뜩 몸을 말고 잔다. 이불이 짧았는지 이불 끝에 주자서의 족건(足巾)이 빼꼼 나와있다. ‘너를 보러 오는 일에 족건을 더럽히는 일쯤 이야.’ 온객행은 이불을 조금 더 끌어내려 주자서의 발을 잘 덮어주었다. 꽤 깊이 잠들었는지 몸을 틀어 바로 누웠다. 잠결에 풀어진 앞섶이 온객행의 마음을 울렁이게 했다. 이불을 끌어 잘 덮어준 뒤 온객행은 자리로 돌아와 누웠다. 장명산을 나온 이후로 잠이 부족했던 온객행은 금방 잠이 들었다.

(67) 이하(李賀) 장진주
皓齒歌細腰舞 況是靑春日將暮 桃花亂落如紅雨 勸君終日酩酊醉
하얀 이의 미인 노래하고 가는 허리의 미인 춤 춘다오. 더구나 화창한 봄에 해가 장차 저물려 하니 봉숭아꽃 어지러이 떨어져 붉은 비 같구나. 그대에게 권하노니 종일토록 실컷 취하라.

(68) 노자 도덕경 38장
夫禮者 忠信之薄 而亂之首 前識者 道之華 而愚之始
무릇 예란 진실함과 믿음이 얇으니 어지러움의 머리이고, 미리 안다는 것은 도의 허황된 꽃이요 어리석음의 시작이다.

(69) 장자 내편 6대종사
以知爲時者 不得已於事也
지식으로 시의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은 부득이 실무에 필요하기 때문이다. 실무에 필요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지식을 수단으로 삼는다는 뜻이다.

(70) 소식 월야여객음주행화하(月夜與客飮酒杏花下) 달밤에 손님과 살구꽃 아래에서 술을 마시다.
杏花飛簾散餘春 明月入戶尋幽人 褰衣步月踏花影 炯如流水涵靑蘋
살구꽃 주렴에 날아들어 남은 봄 흩날리고 밝은 달 창문에 들어와 그윽한 사람 찾아주네.
옷 걷고 달 아래 거닐며 꽃 그림자 밟으니 밝기가 흐르는 물에 푸른 마름 잠겨 있는 듯하다오

雨霖鈴 第21

21. 萍水相逢
부평초와 물이 서로 만난다.

주구전은 진왕이 언제든 자기들을 부르겠다는 뜻의 서신을 한참 보고 있다가 다시 하인에게 건네 주었다. 혀를 한번 ‘쯧’차고 주구전이 말했다. “진왕전하께 저희는 소림사에서 머무르고 있다고 전해주시오.” 하인이 공손하게 인사하며 말했다. “숭산으로 가는 길은 통금이 있사오니 오늘은 이곳에서 머무소서.” 그리고는 주자서와 주구전을 침실로 안내했다.

주머니가 가벼운 주구전은 괜히 거절하지 않고 침실로 들어갔다. 하인이 주구전과 주자서를 위아래로 힐끔 보더니 방문을 닫고 나갔다. 주구전이 침상 위에 가서 앉자 주자서가 침상위에 올려진 이불을 펼치며 말했다. “조부, 저는 벼슬을 하나요?” 주구전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신분상으로 문제될 것이 없으니 주시면 받아야지.” 잠자리를 정리하던 주자서가 주구전 옆에 앉아 한숨을 쉬었다.

주구전이 말했다. “자서야 아까 진왕 옆에 있던 무인을 보았느냐?”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자는 무공이 높은 자다 곤륜파 출신이라 더구나.” 그는 아마 다른 사람의 내력과 무공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주자서는 언제 주구전이 그런 정보를 얻었는지 궁금했다. “태산에 진영을 만나볼까 하는데 그동안 너는 소림사에 가 있거라.” 태산 태수 장순은 진영의 상사이자 주희의 매부이다.

주자서는 모친을 많이 닮은 듯하니 그들이 주자서를 알아볼 수도 있다. 혼자 훌쩍 다녀오는 편이 빠르다. 내공을 흩어내는 공자산을 먹은 주자서는 움직임이 느리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혼자 두기는 불안하여 주구전은 내일 아침 일찍 주자서를 숭산에 데려다 놔야겠다고 생각했다. 진왕이 찾기 전에 빨리 움직여야 했다. 통금은 오경이 지나야 풀리기 때문에 묘시에나 이 곳을 떠날 수 있다. 주구전은 예전에 사두었던 밀떡을 주자서에게 먹이고 침상에서 재웠다.

앉아서 운기조식을 하고 있던 주구전은 인기척에 감았던 눈을 떴다. 아침이 되자 밤새 소란스러웠던 청백루는 조금 조용해졌다. 아마도 객실 밖 복도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은 기루에서 일하는 하인이나 기녀들이 움직이는 소리일 것이다. 주구전은 침대에서 이불을 말고 자고 있는 주자서를 깨웠다. 주구전은 주변을 둘러보다 방 창문을 열었다. 아래쪽은 기루가 늘어선 대로이다. 주구전은 관수를 마치고 옷차림을 정리하던 주자서를 데리고 창문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옷이 휘날리는 소리에 주구전이 금방 골목으로 몸을 숨겼다. 공의성 남문으로 가면 거기서부터 숭산까지는 금방이다. 주구전은 노자돈이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한 후에 ‘아이요’하고 한숨을 쉬고 주자서에게 염낭을 건내 주며 말했다. “가서 말과 마차를 찾아오너라.” 주자서가 염낭을 받아 들고 주구전에게 물었다. “숭산에 마차로 갑니까?” 주구전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팔아야겠다.” 주자서는 들고 있는 염낭과 주구전을 번갈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남문에서 만나자.” 그리고 주구전은 훌쩍 지붕위로 올라갔다.

주자서가 마구간이 모여 있는 공의성 서쪽으로 이동하며 사라지는 것을 보던 주구전이 다시 청백루로 갔다. 진왕이 머무는 방을 찾아낸 주구전은 안쪽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제 강호의 개들까지 나를 물어 뜯으려 드는구나.” 방 안쪽에서 진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녀는 아양으로 진왕의 기분을 풀어보려 했다. “옛말에 원한은 원한으로 갚으라 하였다. 내가 원한이 무엇인지 보일 것이다.” 그리고 진왕이 그의 수하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주구전은 재빨리 지붕위로 올랐다. 남문이 있는 쪽으로 이동하며 주구전은 생각했다. 정주에서의 황제 독살은 진왕이 꾸민 일인가? 속인 것인지 아니면 속아 준 것인지 주구전은 황족들의 권모술수를 따라가기 버거웠다.


조부께 받은 염낭에는 마차와 말을 되찾는데 필요한 만큼의 돈만 들어 있었다. 주머니를 탈탈 털어 값을 치르고 말과 마차를 가지고 남문으로 갔다. 남문에 도착하자 그곳에는 조부와 짙은 감색의 장포를 입은 남자가 함께 서있었다. 주구전이 그 남자에게 말했다. “이보게, 용공자 우리가 이렇게 치사하게 흥정을 해야 하는 사이인가?”

용공자가 말했다. “주대인 은혜는 은혜고 거래는 거래입니다, 저는 장사치인데 당연히 상법에 의거해 흥정해야 하지 않습니까?” 주구전이 말했다. “아이야! 이렇게 야박하게 굴지 말게! 자네 부친께서 사계산장에서 마신 소흥주가…” 용공자가 주구전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그것이야 부친과의 거래지 저와 무슨 상관입니까? 그럼 부친께 말씀하십시오.” 떠나려는 용공자를 잡은 주구전이 말했다. “우리는 또 볼 사이인데 이러지 말게 용공자.”

용공자가 주대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러니 그냥 받으세요! 뭘 판다 하십니까? 마차는 제가 나중에 사계산장으로 돌려보내겠습니다.” 주구전이 손에 쥐어지는 염낭을 곤란하다는 듯이 웃으며 받았다. 주자서가 다가온 것을 발견한 주구전이 용공자에게 말했다. “이 아이는 내 종손 자서네.” 용공자는 주자서를 보고 포권해 인사했다. “주공자.” 주자서도 양손을 모아 공수하여 인사했다.

주구전이 말했다. “자서야 여기는 익주 건령 용연각의 각주 용작(龍雀)이다.” 주자서가 말했다. “용대인.” 용작은 한참 주자서를 보고 주구전을 보다가 부스스 웃더니 주자서의 손에서 말의 고삐를 뺐어 들었다. “아무래도 복잡한 일에 휘말리신 것 같으니 저는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나중에 사계산장으로 마차를 보내면 아버님께서 좋아하시는 소흥주나 보내주십시오.” 용작이 인사하자 주구전과 주자서도 그에게 공손히 인사했다.

주구전이 그에게 말했다. “나중에 아버님께 사계산장에 꼭 들리라고 하게. 내가 기장으로 담근 백주를 열겠네.” 용작이 허허 웃으며 주구전에게 말했다. “양주로 어서 돌아가 기다려 주십시오. 회장에게도 안부 전해주시구요.” 주구전은 ‘그러마’ 하고 용작에게 손을 흔들었다. 주구전은 용작이 건네 준 염낭을 열어보고 놀랐다. 작은 은정과 은자가 들어있었다. 이 돈이면 사계산장 제자들 모두 배불리 두 달은 먹을 수 있는 금액이다. 주구전은 빚을 진 것 같아서 용연각에 미안해졌다.

진시가 될 때까지 성문은 열리지 않으니 주구전과 주자서는 문 근처에 앉아 남은 밀떡을 나눠 먹으며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문이 열리자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주구전은 동전 몇 개로 들어오는 사람들에게서 짚으로 얼기설기 엮어 짠 쓰개를 사서 썼다. 흰색 무명옷에 쓰개를 쓰니, 영락없이 도를 닦는 모습이라 문지기도 구태여 둘을 붙잡지 않았다. 부지런히 걸어서 중천이 되기 전에 소림사의 산문에 도착했다.

주구전이 말했다. “서두르면 이틀 안에 태산에 도착할 것이다. 태산에 도착하면 숭산으로 기별할 테니 내가 오기 전까지는 절대 진왕을 만나서는 안된다. 닷새 후에도 내가 오지 못하면 그때는 장명산 검선을 찾아가거라.” 주자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구전의 손을 잡았다. “종조부, 기다리겠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주구전이 주자서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그래 내가 오기 전까지 진왕을 잘 피하고 있거라.” 주자서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주자서가 산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 주구전은 서둘러 태산으로 향했다.


주자서는 스님들의 안내로 대웅보전 안으로 들어왔다. 대웅보전 안에는 사람이 많았는데 서로 이야기를 하느라 실내가 소란스러웠다. 스님들의 안내로 들어온 주자서를 발견한 도감스님 혜립이 그를 알아보고 다가오며 인사했다. “아미타불 주공자!” 주자서도 공손히 손을 모아 인사했다. “도감스님.” 혜립은 주자서의 팔을 잡고 그를 안쪽으로 안내하며 말했다. 갑자기 나타난 주자서가 장명산 검선과 비슷한 옷을 입고 있으니 안에 있던 사람들이 술렁였다.

도감은 주자서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을 물리며 물었다. “어찌 혼자 오십니까? 주대인께서는요? 상선께 인사하셨습니까?” 주자서가 고개를 들어 도감에게 물었다. “장명산 어르신께서 여기 계십니까?” 도감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미타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며칠째 주지스님과 자운당에 계십니다.” 주자서는 도감스님께 검선을 만나게 해달라고 청했다. 도감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웅보전 근처에 서있는 젊은 스님을 자운당으로 보냈다.

심아 스님이 대웅보전에 들어와 도감스님에게 무언가 속삭였다. 도감스님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주자서와 심아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대웅보전 문을 닫고 도감스님이 말했다. “주공자께서는 일단 지객당으로 가시지요. 제가 상선께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도감스님은 자운당 쪽으로 심아와 주자서는 지객당을 향해 걸었다. 심아는 힐끔힐끔 주자서를 보았다. 주자서가 미간을 찌푸리자 심아스님이 반장하며 말했다. “주공자 오해 마세요, 온공자와 일부러 옷을 바꿔 입은 것이지요?” 주자서는 그게 무슨 소리인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심아가 말했다. “상선께서 주대인을 찾으시던데 알고 계십니까?” 주자서는 고개를 끄덕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심아는 신이 나서 그동안 소림사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엽백의와 주구전이 떠난 후 소림사에 남아있던 사람들을 주지가 모아 황실과 관련 있는 자들을 추려내었다는 내용이다. 대웅보전에는 악양파, 태호파, 고산파의 장문 후계와 단양파, 경호파, 태산파, 화산파의 장문 그리고 남궁세가의 소각주 남궁하가 남아있다고 말했다. 그들은 과거에 어떤 일과도 관계 있는 듯한데 그 것과 황후가 기왕을 데리고 벌인 일이 관계가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진왕과 조왕은 기왕을 좋아하지 않았으니 그 두사람이 황후를 도와 벌인 일이라고 말이다.

주자서는 황실의 일원이 그렇게 뻔히 보이는 술수를 썼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의 얘기에 별 반응이 없자 흥이 식은 심아는 주자서에게 요기는 하였느냐며 다정하게 물었다. 주자서가 고개를 흔들자 심아는 잠시 기다리라고 말한 뒤 지객당의 문을 닫고 나갔다.

주자서는 검선은 대체 무슨 은원으로 이 일에 간섭하고 계신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엽백의가 처음 소림사에 왔을 때 검선께서도 소림사의 초대를 받고 온 것이라 했다. 주자서가 알고 있는 바로는 검선께서는 황후에게 독약을 준 강호의 문파를 찾는 중이다. 그리고 그 독약은 진왕의 손에서 나왔다고는 하나 중명원과 평락원에서 들은 것을 토대로 유추하면 진왕은 조왕이 씌운 누명을 쓴 것이다.

조왕과 진왕의 사이는 쉽게 말하기 어려운 것이 있다. 둘 다 귀한 황자이며 적통 황족이다. 태자를 정하지 않은 황제에게 있어 모두 태자의 후보이다. 게다가 이 번 일로 기왕이 가택에 연금되었다고 하니 한동안은 그에게 신경 쓸 필요가 없을 테니 서로를 헐뜯고 있는 것이다.

주자서는 창가에 있는 의자에 앉으며 방안을 둘러보았다. 소림사를 떠났을 때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왠지 자신은 변한 것 같아 어색했다. 소매를 털어 정리하고 탁상 앞에 있는 짚으로 엮은 포단에 무릎 꿇고 앉았다. 진왕에게 소림사에서 머무른다는 말을 남겨 놓았으니 그가 찾아올 것이다. 조부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진왕을 피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온객행은 자운당에 앉아 엽백의가 하문하는 것을 듣고 있었다. 엽백의는 독과 관련된 질문을 에둘러 했다. 독초가 잘 자라는 지역과 기후 그리고 그 용례가 다양한 것부터 교묘하게 말을 꾸며 무엇을 묻는 것인지 알지 못하게 했다. 엽백의의 이런 교활한 점은 처음 보는 것이라 온객행은 엽백의가 낯설었다. 그리고 초무관은 대체 누구를 위해 움직이는 것일까? 진왕? 조왕? 아니면 낭야왕? 황제일 수도 있다.

청성곡에 독을 퍼트린 것은 초무관의 누군가가 확실하다. 소년이 말했던 전갈의 독, 그것은 중원에서는 널리 쓰이는 독이 아니다. 청성곡의 일에서 중독에 대한 의심을 시작한 이후로 여러가지 독에 대해 공부한 온객행은 그것이 서역에서 온 독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해독약이 없을 정도로 아주 맹독이라는 것도 안다. 그 양을 조절하여 죽음에 이르는 병리를 조절한 것이다. 마시거나 호흡으로 중독되며 몸안으로 한번 흡수되면 토하거나 남은 독을 제거해도 멈추지 않고 진행된다. 정말 사람을 죽이기 위한 독이다.

누군가가 청성곡을 떠나면서 마을 우물에 그 독을 탓을 것이다. 마을 우물 말고도 식수로 사용하던 수원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부러 남아서 화살로 남은 마을 사람들을 모두 죽인 것이다. 온객행은 화가 치밀어 대체 무슨 이유로 그렇게 했는지 묻고 싶었다. 마을 사람을 모두 죽여 없애 버릴 정도의 가치가 있는 것이 대체 무엇일까?

경호파의 장문 장익에게 질문을 하던 엽백의가 ‘흠’하고 말을 줄였다. 옆에서 눈치를 보고 있던 주지가 일어나 장익을 데리고 나갔다. 며칠 전 아들 장옥삼을 양주로 다시 내려 보낸 참이다. 각 문파의 몇 사람만 남기고 대부분의 문파는 자신들의 본거지로 돌아갔다. 주지가 결국 아미파와 공동파에 공식적으로 사람을 청했으니 그들이 오면 소림사는 지금보다 훨씬 더 시끄러워질 것이다.

주지가 고생을 사서 한다고 생각한 엽백의가 온객행을 보았다. 입고 있는 옷이 맞지 않아 소매 끝이 짧았다. 그 모습을 보자 한참 자라던 시기의 온객행이 떠올랐다. 초여름에 지나친 죽순처럼 쑥쑥 자라 금방 자신의 키도 장청(張靑)의 키도 넘었다. 비단 옷을 입겠다고 떼를 쓰던 아이가 허우대만 멀쩡하게 자란 것 같아 엽백의는 잠시 아쉬움에 젖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장명산을 나오지 말았어야 할까?’

엽백의의 시선을 눈치챈 온객행이 주지와 장익이 나간 것을 알고 입을 열었다. “노야, 초무관은 아무래도 그냥 이름만 빌린 것 같소.” 엽백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가 삼백상단의 인을 보았다고 했지?”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기루에서 일하는 아이들은 모두 태산파의 낙계(烙契)로 고용한 아이들입니다.” 엽백의가 말했다. “그것이 이상하단 말이다. 화산파의 우달이면 몰라 태산파의 오래자는 살면서 여자구경 한번 못해본 숙맥인데 그가 어찌… 게다가 소문으로는 태산파가 아니라 화산파라 하지 않느냐.”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쩌면 태산파 화산파도 아닌 다른 세력이 그 두 문파를 이용하는 것일지도…” 온객행의 말에 엽백의도 동의했다. 엽백의가 말을 이었다. “조경 그 놈은 청성곡에서 벌인 일에 비하면 양주에서 꽤나 그럴듯한 명성을 가졌구나. 삼백상단의 재화도 대단하다 하니…” 온객행이 말했다. “남궁세가는 그저 다리를 놓는 중개인인 듯합니다. 그들은 조왕의 사람임이 틀림없어요.”

엽백의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조왕? 진왕이 아니고?” 온객행이 설명했다. “남궁세가와 낭야왕은 꽤 오래전부터 거래를 이어왔고 이 온모가 추측한 바로는 남궁세가는 낭야왕의 손에 놀아나고 있는 것 같소.” 엽백의가 ‘흠’하더니 말했다. “너의 말대로 남궁세가는 낭야왕에게 놀아나고 있는 것뿐이다. 그들이 평안은장으로 첩정하는 것은 낭야왕도 조왕도 아니다.” 온객행이 나지막이 말했다. “진왕…?” 둘은 주지가 점심을 권하며 다시 자운당으로 돌아올 때까지 한참동안 말없이 앉아 있었다.


주지는 엽백의를 주방이 아닌 지객당으로 안내하며 말했다. “주대인을 찾으신다 하셨지요.” 엽백의는 그동안 자운당에서 하는 이야기들을 누군가가 엿듣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주지가 뻔뻔하게 물어오자 기가 찼다. 엽백의가 코웃음 치며 대답이 없자, 주지가 엽백의의 눈치를 보며 말을 이었다. “주공자가 낮에 찾아와 상선을 뵙기를 청했습니다.” 엽백의는 주공자라는 말에 뒤따라오던 온객행을 어깨너머로 보았다. 온객행은 주지의 말을 듣지 못했는지 심각한 얼굴로 무언가 생각하고 있었다.

지객당에 도착해 문을 열자 탁자 앞에 정갈히 무릎 꿇고 앉아 있는 주자서가 보였다. 어느 집 아들인지 기품이 넘친다. 주구전에게 하는 것을 보면 고분고분 한 것이 자꾸 온객행과 비교하게 됬다. 자신과 같은 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보니 온객행 못지 않게 태가 난다. 주구전을 졸라 제자로 달라 해볼까 생각하던 엽백의에게 주자서가 벌떡 일어나 공수하여 인사했다. “어르신”

주자서의 어깨를 잡고 인사를 대신한 엽백의가 탁상 앞에 앉으며 말했다. “주구전은 어디에 가고 너 혼자 있느냐?” 주자서는 아직도 지객당 안에 있는 지주와 심아 스님을 보고 눈치를 보더니 고개를 숙였다. 온객행은 이제야 주자서가 보였는지 주자서가 앉은 포단 옆에 몸을 붙여 앉고는 ‘아서’를 불러 댔다.

찬합을 들고 있던 심아스님이 탁상에 음식을 올려놓은 뒤 인사하고 나갔다. 엽백의가 주지스님을 빤히 쳐다보자 주지스님도 몇 번 헛기침을 하더니 방을 나갔다. 엽백의가 물었다. “낭야왕과 조왕은 처벌을 받았느냐?” 주자서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각각 낙양과 정주로 호송되었지만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엽백의가 물었다. “양주로 간다 들었는데 어찌 여기 있어?”

주자서가 말했다. “황제가 낙양으로 돌아가는 행렬에 있던 진왕을 공의에서 만났습니다.” 엽백의은 생각했다. ‘대체 진왕은 무엇 때문에 주구전을 붙잡아 두려고 하는 것이지? 그가 붙잡아 두려는 것이 주구전인지 아니면 이 기품 넘치는 주자서인지…’ 주자서 옆에 앉은 온객행이 주자서의 밥그릇에 찬을 올리며 말했다. “아서 양주로 돌아간 줄 알고 사계산장으로 모과 절임을 보냈는데.” 온객행이 히히히 하고 웃는 것을 본 엽백의와 주자서는 맥이 풀렸다.

방금 전까지 무서운 얼굴로 생각하고 있던 온객행은 어디 갔는지 느슨하게 풀어진 얼굴로 헤실헤실거리며 주자서를 마주보았다. 엽백의는 차라리 여기 이 고상한 공자가 온객행을 잡아주었으면 했다. 작은 원망은 갚을 만한 것이 못되고, 큰 원망은 사람들을 죽이고자 하는 것이니 원망을 잊고 살았으면 한다.(66) 이 것은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엽백의가 주자서에게 물었다. “주가는 언제 돌아오는가?” 주자서가 대답했다. “닷새 후에도 돌아오지 않으면 어르신을 찾으라 이르셨습니다.” 엽백의가 말했다. “에잇! 내가 한가롭게 아이나 돌봐야 하겠느냐!” 온객행이 젓가락을 내려놓고 말했다. “노야는 걱정마시오. 아서는 내가 지킬 테니. 어서 가서 일 보시오.” 주자서가 들러붙는 온객행의 손길을 거절하며 말했다. “어르신, 조부께서는 태산에 가셨습니다.”

엽백의가 화색이 되어 물었다. “그래? 역시 주가가 눈치 하나는 좋구나.” 엽백의가 ‘허허허’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을 나가기 전에 주자서를 한번, 온객행을 한번 보더니 말했다. “듣는 이가 많으니 자중하도록 해라.” 주자서는 영문을 몰라 미간을 찌푸리느라 객실을 나가는 엽백의에게 인사도 하지 못했다. 온객행은 나가는 엽백의에게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노야는 신경 끄시오!” 그리고는 엽백의가 앉아있던 탁상 앞으로 가 앉으며 주자서에게 음식을 권했다.

허기가 졌던 주자서는 젓가락을 들어 소림사의 음식을 맛보았다. 중명원에서 평락원에서 맛 보앗던 향긋한 요리도 맛있었지만 사계산장에서 먹는 음식과 비슷하게 담백한 사찰음식이라 입에 잘 맞았다. 주자서가 먹는 것을 보고 있던 온객행도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허기를 채우기 위해 젓가락을 놀렸다.

주자서는 밥을 다 먹은 뒤 심아 스님이 문간에 두고 간 찬합에 그릇을 담아 주방으로 향했다. 찬합을 돌려주며 주방장에게 저번에 받았던 음식이 맛이 있었다며 감사인사를 하는 것도 빼먹지 않았다. 소림사 곳곳에서는 강호에서 온 사람들이 스님들과 함께 있었는데 몇몇은 소림사에 머물고 몇몇은 공의나 등봉에 머물며 소림사로 찾아오는 듯했다. 자운당과 추보당을 지나 지객당이 보인다. 주자서는 한참 머뭇거리다 방안으로 들어갔다.


온객행은 오랜만에 만난 주자서가 낯설었다. 표정도 없고 몸짓도 경직되어 있다. ‘주대인이 곁에 없어서?’ 불안해하는 것이 느껴져 온객행도 덩달아 불안해졌다. 객실 안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부산을 떨고 있을 때 주자서가 장지문을 열고 들어왔다. 온객행이 주자서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아서! 어서와.” 그리고는 탁상 앞에 있는 포단을 털었다. 주자서의 얼굴에는 온화한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온객행은 별로 본적이 없는 얼굴이다.

온객행은 화로위에 올려 두었던 물을 가져와 차주전자에 넣고 차를 우렸다. 주자서가 문간에 있는 의자위에 올려놓은 봇짐을 눈치 채고 입을 열었다. “온공자께서 중명원에 다녀오셨군요.” 주자서의 목소리가 반갑기도 했지만 높이는 말에 당황하여 온객행은 손에 쥐고 있던 주전자를 내려놓고 주자서를 마주보고 앉아 말했다. “아서 왜 그래…” 주자서는 웃는 얼굴로 말했다. “온공자께 폐를 끼쳤네요. 조부께서 돌아오시면 꼭 사례하도록 하겠습니다.”

온객행은 눈썹을 늘어뜨리고 품속에서 옥으로 만든 옥패를 꺼내 주자서의 손에 쥐어 주며 말했다. “아서에게 이 영견이 잊을 수 없는 물건이라고 했지? 나에게 이 옥패 역시 그런 물건이야.” 주자서가 온객행이 쥐어준 옥패를 자세히 보았다. 예전에도 한번 받은 적 있는 옥패이다. 주자서가 얼굴을 찡그리자 온객행이 다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나는 아서에게 영견을 돌려줄 마음이 없어. 그러니까 이건 영견 대신이야.”

주자서가 고개를 내려 한동안 옥패를 보았다. 온객행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붙였다. 그러자 주자서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온공자. 영견은 내가 원해서 그대에게 준 것이니 돌려줄 필요도 그것을 대신할 물건을 줄 필요도 없습니다.” 주자서가 옥패를 온객행의 손 위에 올려 놓았다.

온객행은 옥패와 주자서의 손을 한꺼번에 잡고 말했다. “아서 왜 그래… 아서… 내가 잘못 했어 이러지 마.” 주자서가 고개를 돌린 채 말했다. “온공자께서 잘못 하신 것이 없는데 어찌 저에게 사과하십니까.” 온객행은 품속에서 영견을 꺼내 겹쳐 잡은 손위에 올리고 말했다. “이 영견이 그렇게 중요한 물건이면 돌려 줄게. 잘못 했어.” 주자서는 고개를 돌려 손위에 올려진 영견을 한참동안 봤다.

온객행은 괜히 애가 타서 주자서를 불렀다. “아서… 아서…” 주자서는 잡힌 손을 풀어 영견 위에 옥패를 올려놓고 그것을 온객행에게 건내 주며 말했다. “온공자 그대가 가지고 가세요. 제가 부탁드립니다.” 온객행은 주자서 손에 들린 영견과 옥패를 한참 보다가 그린 듯한 미소로 자신을 바라보는 주자서를 와락 안아버렸다. 주자서가 작게 한숨 쉬는 기척을 느낀 온객행은 불안해져서 주자서를 더 꽉 껴안았다.

(66) 노자 도덕경주 63
大小多少 報怨以德; 小怨은 則不足以報 大怨 則天下之所欲誅 順天下之所同者 德也
크든 작든 많든 적든 덕으로 원한을 갚으며; 작은 원망은 갚을 만한 것이 못 되고, 큰 원망은 천하 사람들이 죽이고자 하는 것이니 천하 사람들이 같이하는 바에 따르는 것이 덕이다.


雨霖鈴 第20

20. 笑啼兩難
웃거나 울기 둘 다 어렵다.

익주로 출발하기 전, 서국공은 진회장과 형주 악양에서 만났다. 그 곳에서 무고에 관련된 내용을 들은 진회장은 평소 친분이 있었던 악양파의 소장주 고숭과 그의 의형제인 경호파의 후계 장옥삼 그리고 단양파의 후계 육태충(陸太沖)과 함께 익주로 떠났다고 한다. 성도에 도착하기 전에 그들은 고산파 장주의 막내 심신(沈愼)과 태호파 장주의 사위 조경(趙敬)을 익주 부성에서 만났다고 했다. 그들이 익주로 간다는 내용을 알고 있는 사람은 진회장과 진회장이 도움을 청한 고숭, 장옥삼 그리고 육태충을 제외하고는 강호에 아는 이가 없었는데도 심신과 조경은 알고 그들을 부성까지 찾아왔다고 한다.

익주의 성도로 들어갔을 때 익주자사 문성왕을 만났고, 그들은 성도에서 며칠 머물며 수색에 대한 채비를 했다. 무고의 위치는 소문으로 밖에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기이하거나 사람들이 사라지는 사건들을 조사하면서 그 위치를 추적했다. 때문에 익주 관청의 사건 기록이 필요해서 익주자사에게 양해를 구하고 문서를 열람했다. 무고의 위치가 높은 산 근처에 있을 것이라는 추측으로 아미산일대와 청성곡 일대를 수색하기 위해 이동했다.

익주의 산들은 높고 깎아지는 듯한 절벽이 많았기 때문에 마을과 마을 사이의 간격이 넓었고 산 근처에는 큰 마을이 없었기 때문에 작은 취락에 며칠씩 지내면서 그 주변을 수색했다. 아미산의 수색이 끝났을 무렵 아미파의 제자였던 진회장의 아내에게 태기가 있어서 진회장은 서국공에게 서신을 남기고 양주 사계산장으로 돌아갔다. 서국공은 고숭을 따로 불러서 진회장이 떠날 때 함께 왔던 일행이 그와 함께 돌아가도 좋다고 말했지만 고숭은 진회장의 몫까지 서국공을 돕고 싶어했다. 청성곡에 도착했을 때 견곡주는 그들을 환대해 주었다. 청성곡의 사람들은 대다수가 의술에 조예가 깊고 약초를 캐러 험한 산지를 돌아다니기에 걸맞은 무공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서국공에게 많은 도움이 됐다.

서국공은 물자의 보급과 무고 수색에 대한 보고를 위해 종종 성도로 돌아가 익주자사와 만나고 왔다. 고숭과 청성곡의 마을 주민 그리고 조경이 수색하던 지역에서 무고를 발견한 날도 서국공은 성도에서 청성곡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서국공은 무고를 발견했던 사람들만 데리고 무고에 가서 옥으로 만든 열쇠로 무고를 열었다. 무고 안에는 무기로 보이는 것은 없었고 돌로 만든 거대한 제단과 여기저기 금과 은으로 만든 제기가 있었고 제단 주변 작은 석실에는 사람들의 시신과 알 수 없는 글자로 쓰여 있는 두루마리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다시 청성곡으로 돌아온 서국공은 무고를 발견한 사람들에게 무고에 대한 것을 함구할 것을 청했고 청성곡의 견곡주와 오랜시간 무엇인가를 논하는 듯했다. 우기가 시작되자 어떨 때는 빗방울이 굵었고 또 어떨 때는 이슬비가 왔지만 하루 종일 비가 멈추지 않았다. 무고를 방문한 이후로도 서국공은 무고에 수차례 방문했고 그동안 고숭과 그의 의형제들은 청성곡을 도와 축대 쌓는 것을 도왔다고 했다. 서국공이 청성곡을 떠나기로 결정한 한 날 견곡주는 비가 거세지기 전에 어서 하산하라며 그들을 재촉했다. 아침 일찍 청성곡을 나온 서국공 일행은 빗물에 질척한 길을 내려오느라 평소보다 더 많은 시간을 지체했고 다음날이 되어서야 성도에 도착했다.

서국공의 일행이 청성곡을 떠나고 견곡주는 사람들을 신의당으로 불렀다. 그는 서국공이 이 곳에 와서 무엇을 찾았는지 그리고 누구와 함께 왔었는지에 대해 잊으라고 했다. 신의곡 사람들은 곡주에게 뜻이 있어서 그리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각자 집으로 돌아간 사람들은 평소에 비가 오면 하던 대로 약초를 정리하거나 집안을 정리했다. 날이 어두워지자 비가 더 거세게 왔다. 온객행의 집은 비탈길에 있어서 비가 오면 항상 신의당에서 비가 지나기를 기다렸다. 그날도 밤 늦게 물이 불어 집 안까지 물이 들이치자 온객행의 부모님은 그를 안고 신의당으로 향했다. 신의당으로 향하는 동안 주변이 부산스러웠다.

신의당에 도착하자 이미 안에 다른 마을 사람들이 하나 둘 누워 있었다. 온객행의 아버지는 이유를 알기 위해 여기저기 다니며 맥을 짚었다. 시간이 지나자 더 많은 마을 사람들이 신의당으로 왔다. 어떤 사람은 이미 의식을 잃었고 어떤 사람은 아주 위독해 보였다. 마을 사람들이 약초를 구하기 위해 이집 저집 뛰어다니는 동안 온객행은 신의당에서 나와 집으로 향했다. 마을 사람들의 증상에 효과를 보이는 약초가 집에 있다는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한참 비를 맞으며 집으로 걸어가는데 산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자 산에서 쏟아진 토사물로 마을 절반이 묻혔고 마을에 남아 있던 사람들이 토사물을 치우기 위해 하나 둘 신의당 쪽으로 향했다. 온객행은 놀라 자리에 주저 앉고 말았다. 한참 비를 맞으며 앉아 있었는데 누군가 신의당 쪽으로 화살을 쏘았다. 굵은 빗방울에 칠흑 같은 어둠속에서 화살이 날아와 마을 사람들을 맞추었다. 온객행은 비를 맞으며 사람들이 쓰러져 가는 것을 보고 있었다. 마치 악몽을 꾸는 것처럼 사람들의 비명소리는 빗속에 파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빗길에 지친 서국공일행은 성도에서 이틀 정도 머물며 행낭을 재정비했고 부성으로 돌아가는 길 역시 비가 많이 와서 여러 차례 길을 멈추어야 했다고 한다. 일주일 정도 지나 부성에 도착했을 때 성도에서 서국공에게 보낸 소식으로 알게 되었다고 했다. 고숭이 잠시 생각하더니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둘째는 대체 어떻게 알았지?”

엽백의가 물었다. “둘째라면 누굴 말하는 것이오?” 고숭이 다시 자세를 바르게 하고 말했다. “부성에 도착하여 조경과 심신은 맡겨 놓은 짐이 있어 먼저 서국공과 인사하고 객잔으로 갔습니다. 저 역시 익주자사를 만나고 돌아온 서국공께 인사할 때, 서국공께서 청성곡 소식에 대해 알려주셨습니다. 객잔으로 돌아가서 청성곡으로 돌아갈 것에 대해 논의할 때 조경은 이미 알고 있는 듯했습니다. 묻지 않았거든요 왜 돌아가는지.”

엽백의가 물었다. “왜 청성곡으로 돌아가지 않았지?” 고숭이 대답했다. “어떻게 아셨는지 스승님께서 복귀를 재촉하는 서신을 보내오셨습니다. 스승님께 서국공의 일에 대해 말 할 수 없으니 벌을 받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러다 보니 결국 청성곡에는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아마 다른 형제들의 상황도 저와 비슷했을 겁니다.” 엽백의는 시기 적절하게 스승의 서신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태호파의 사위 조경은 하인의 아들이다. 그의 성인 조씨 역시 그의 주인의 성이었다. 그는 무공이 뛰어나 그의 주인에게 양자로 들어갔고, 그 신분으로 태호파 장문인 이경(李慶)의 딸 이요(李曜)와 혼인하였다. 그가 이요와 결혼하기 전에 주인의 딸과 결혼약속을 했었다는 것은 양주 회계사람이면 모르는 이가 없었다. 하지만 전염병으로 조가의 식솔 대부분은 살아남지 못했고 조가(趙家)의 딸 희상군(喜湘君)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조가의 재산은 결국 살아남은 양자인 조경의 몫이 되었고, 조경은 그 몫으로 태호파 장문의 딸 이요와 혼인하였다. 조경은 무공뿐만 아니라 학문도 뛰어나 그의 주변에는 항상 재능이 있는 사람이 모인다 하여 어떤 사람들은 그를 맹상군이라 불렀다. 그들의 재주로 태호파는 양주일대에서 가장 부자다. 그들이 운영하는 삼백상단 역시 양주지역에 있는 비단을 독점으로 거래하는 곳이다. 태호파가 만약 남궁세가와 협력하여 그들의 재력을 누군가에게 모은다면 정말로 하늘이 바뀌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

엽백의가 물었다. “무고의 위치는 청성곡 근처인가?” 고숭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근처는 아니고 두 시진 정도 서쪽으로 가면 있는 높은 절벽위에 있는 석굴에 문이 있고, 그 문을 열기 위해서는 옥을 만든 열쇠가 필요합니다.” 엽백의는 ‘흠’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축대 쌓는 것을 도왔다고… 그 위치가 혹 신의당이오?” 고숭이 고개를 들어 놀란 눈으로 엽백의를 보았다. “그날 고소협과 신의당 근처에 있는 축대를 보수한 사람은 혹시 조경이 아니오?” 고숭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그렇습니다.” 엽백의는 ‘흥’하고 코웃음을 치고는 온객행을 보았다.

온객행은 고숭을 노려보고 있었다. 고숭이 말한 내용은 온객행이 기억하는 내용과 거의 일치한다. 고숭은 이후에 청성곡에 일어난 일에 대해 알지 못할뿐더러 관심조차 주지 않았으니 몇 달 후 누군가가 쑥대밭이 된 청성곡을 헤집어 놓은 것을 모를 것이다. 그들이 찾는 것은 보나마나 무고의 열쇠였을 것이다.

엽백의가 고숭에게 다시 물었다. “이 일에 대해 아는 것은 그대의 의형제들뿐인가?” 고숭은 한참 앉아서 고민하더니 말했다. “사계산장의 진회장은 서국공과 친밀한 사이였으니 무언가 알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엽백의가 미간을 찌푸리자 고숭은 다시 시선을 돌려 고개를 조아렸다. 엽백의가 말했다. “사계산장은 구강이 가물어 요 몇 년 먹고 사느라 고생인데, 만약 그들이 뭔가 알고 있었다면 서국공을 해친 자들이 그들을 왜 그냥 두었겠소? 그리고는 ’쯧쯧’하고 혀를 찼다.

주지 여운은 고숭을 잘 달래 내보내고 엽백의에게 물었다. “무고를 찾는 것이 천자입니까? 아니면…” 엽백의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만약 천자가 찾는 것이라면 걱정할 것이 없지만 그것이 아니면 그게 더 큰일이네.” 주지가 손에 들린 염주를 굴리며 불경을 외웠다. 엽백의는 포단위에 무릎 꿇고 앉아 있는 온객행을 불렀다. “온가야 허튼 짓은 시작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온객행이 고개를 들어 엽백의를 보며 말했다. “그럼 노야가 하는 이 짓은 허튼 짓이 아니오?” 온객행과 엽백의의 시선이 한동안 마주쳤다. 엽백의가 시선을 거두며 한숨을 쉬었다. “짐새는?” 엽백의가 묻는 말에 온객행은 한참동안 답하지 않았다. 엽백의가 주지에게 눈치를 주자 주지 여운은 자리에서 일어나 남궁세가의 소가주에게 물을 것이 있다며 일어났다. 자운당에 온객행 엽백의만 남아 앉아 있다.

온객행은 아주 작은 소리로 말했다. “기왕은 앵속에 중독되었소.” 엽백의가 되물었다. “앵속?” 그리고는 헛기침으로 소리를 조금 더 감추고 말했다. “초무관이냐?” 온객행이 엽백의를 힐끔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품속에서 초무관 소년에게 받은 호리병을 건내 주었다. 엽백의가 놀라 그것을 보고 온객행을 다시 보았다. “초무관에 다녀온 것이냐?” 엽백의의 물음에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순간 엽백의의 얼굴에 노기가 보였다. “온객행!” 온객행은 고개를 돌려 시선을 거두어 버렸다. 엽백의가 다시 물었다. “채미공자를 만난 것이냐?” 이번에 온객행은 고개를 떨구며 고개를 흔들었다. 엽백의는 저 머리통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몰라 답답했다. 엽백의가 한참 호리병을 보더니 물었다. “이것의 주인이 누구냐.” 온객행이 자운당의 문을 보며 말했다. “문성왕” 엽백의도 시선을 옮겨 문을 보았다.

엽백의가 말했다. “주대인은 어디 가고 너 혼자 왔느냐.” 온객행이 대답했다. “양주로 돌아가신다 하여 공의에서 헤어졌습니다.” 엽백의가 문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말했다. “그래 양주로 돌아 갔다는 말이지. 양주는 소흥주로 유명한 곳이니 장명산에 가기 전에 그곳을 둘러보는 것도 좋겠군.” 둘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문만 보았다.


조경은 소림사에 갇힌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게다가 아직까지 무고의 열쇠를 찾지 못한 것을 조왕이 눈치 챈다면 줄타기 같은 이 동맹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조경은 알고 싶지 않았다. 엽백의라는 장명산 검선이 무엇인가 눈치를 채고 자신에게 이것 저것 물어본 것 같은데, 고숭의 입만 조심하면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고숭은 의리와 협의를 지키지 못하는 것을 큰 흉으로 보았으니 스스로 입을 열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하지 않을 것이다. 익주에서 청성곡의 일에 대해 아는 자들은 모두 죽었다. 고숭과 조경의 이야기를 맞추면 청성곡은 큰 비로 비극을 맞이한 작은 촌락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조경은 무고 안에서 파사어로 쓰인 독술을 발견했다. 서국공과 다른 형제들 몰래 그것을 태호로 가져오기 위해 청성곡 사람들 모두를 죽였다. 무고에서 보았던 두루마리와 책들 중에는 조경이 가져온 두루마리에서 보다 더 대단한 마교의 무공이 적혀 있을 것이다. 열쇠는 청성곡에서 나오지 않았는데 대체 어디로 간 것인지 알 수 없다. 후에 열쇠를 찾기 위해 서국공의 집을 뒤졌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서국공의 물건이었으니 황실에 관련된 사람이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대체 낭야왕은 무슨 뜻으로 무고의 열쇠를 찾고 있는 것일까? 조왕이 자신과 낭야왕 사이에서 저울질을 하고 있는 것이라면 큰일이다.

조경은 초조 해졌다. 기왕은 마약에 중독되었으니 쓸모가 있을 때까지 초무관에서 잘 관리하면 된다. 황제의 독살사건으로 잠깐동안 비었던 도성 근처의 병력 덕분에 꽤 많은 물자를 도성에서 빼돌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물자는 화약과 독으로 바꾸어 맹진과 맹주에 숨겨 놓았다. 교활한 조왕이라면 그것을 빌미로 당장 조경의 목을 틀어쥐려고 한다 해도 이상하지 않다.

대웅보전 안으로 고숭이 주지와 함께 돌아왔다. 고숭의 표정이 좋지 않아 조경은 고숭에게 다가가 물었다. “형님 검선께서는 무엇을 물으셨소?” 고숭이 조경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조형제, 청성곡의 일을 기억하는가?” 조경은 뜨끔하여 고숭에게 놀란 얼굴을 꾸며내며 말했다. “청성곡이요? 익주의 청성곡 말입니까?” 고숭이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서 듣고 있던 경호파 장문 장익(張瀷)이 다가와 물었다. “숭아 대체 무슨 일로 지주께서 너를 찾으시냐?”

고숭이 포권하여 인사하며 말했다. “장숙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옆에 있던 조경도 포권하여 장익에게 인사했다. 장익이 조경과 고숭을 보며 말했다. “혹 삼이와 관련된 일이냐?” 고숭이 손사래 치며 말했다. “아닙니다. 숙부님 아니에요. 아무래도 나라에 무슨 일이 생길 모양입니다.” 장익의 표정이 어두워지며 말했다. “또 말이냐?” 그리고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 근처에 있던 문파의 사람들도 그들의 말을 들었는지 대웅보전 안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대웅보전을 나가는 주지와 남궁세가의 소가주 남궁하의 뒷모습이 보인다.


엽백의와 온객행은 쓰잘대기 없는 얘기를 하는 것처럼 꾸며 배 위에서 있었던 일과 평락원에서 있었던 일들을 서로 맞추어 보았다. 낙양 성문 밖을 지키는 교위들이 갑자기 정주로 모두 들어온 것은 정말 이상한 일이다. 배의 주인인 낭야왕과 배위에서의 연회를 준비한 조왕 역시 이번 일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아닌 또 다른 세력이 있다는 것일까?

문성왕 사마헌의 이름이 계속해서 언급되는 것을 보면 그도 청성곡의 일 아니면 무고의 일과 관계가 있는 사람이다. 게다가 초무관에서는 그를 죽이고 싶어한다. 엽백의는 고숭의 이야기를 들었으니 이제 문성왕 사마헌의 이야기를 들어봐야 겠다고 생각했다. 귀족들을 상대하는 일은 저보다 주구전이 나으니 주구전을 찾아야 한다. 그들은 정말 벌써 양주로 돌아간 것일까?

온객행은 주구전의 손주놈한테 관심이 있는 것 같았는데 또 그렇지도 않았던 모양이다. 쉽게 보내준 것을 보면 평소의 온객행의 태도와는 조금 다르다. 아니면 사계산장의 제자 답게 온객행을 따돌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엽백의가 물었다. “주공자는 네 성에 차지 않았느냐?” 주자서 얘기에 온객행이 얼굴을 찌푸렸다. “노야는 신경 끄시오.” 엽백의가 혀를 차며 말했다. “쯧쯧, 너의 그 괴팍한 성격에 질려서 도망간게지.” 온객행이 버럭 소리질렀다. “아니오! 정표도 받았소” 그리고는 품속에서 여인들이 쓰는 것 같은 비단 수건을 꺼내 들었다. 온객행은 손에 잡은 그 수건을 한참 쓰다듬더니 다시 품속에 넣었다.


주구전은 당황스러웠다. 주구전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인생에 이렇게 불편한 일은 많지 않았다. 엽백의에게 받은 흰색 장포를 둘러 입고 앉아서 비단옷을 입은 공자들과 속이 다비치는 옷을 입고 곁에 붙어 앉은 여인들을 보고 주구전은 혀를 차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중이다. 옆에 앉아 주구전의 시중을 들고 있는 주자서를 힐끔힐끔 주변 사람들이 쳐다보는 꼴 역시 울화가 치밀어 한숨 밖에 쉴 수 없다. 그는 어쩌다 본인이 낙수가 잘 보이는 청백루에 황족들과 앉아 술자리를 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저 누대 위에 상석에서 술잔을 들어 올려 흥을 내는 자는 진왕이다. 어째 진왕과는 만나야 할 때 만나고, 만나지 말아야 할 때도 만난다. 주구전의 술잔을 조심스럽게 채우는 주자서를 보고 또 한숨을 쉬었다. 결과적으로 주자서가 군자산을 먹은 것은 시기적절한 일이 되었다. 나중에 따로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야 하겠다고 생각한 주구전은 주자서가 따라준 술을 마셨다. 낙양성의 백주인 보풍주는 그 역사가 수천년이 넘는다 들었다. 과연 오랫동안 전해져 내려올 만큼 훌륭한 술이다.

한참 요기를 하던 주구전이 주자서에게도 음식을 권했다 주자서는 주변의 눈치를 보더니 고개를 흔들며 거절했다. 요 며칠 먹은 것이 신통치 않아 또 몸이 안 좋아질까 걱정된 주구전이 주자서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보았다. 사계산장에서 하던 대로 계화향이 나는 떡을 집어 입안에 넣어 주려다 주변의 시선이 따가워 손을 물렸다.

괜히 속이 타서 주구전은 주자서가 따라 놓은 술을 마셨다. ‘마음은 불편하나 입안은 즐겁구나.’ 주구전의 복잡한 심경을 눈치챘는지 주자서가 주구전을 보고 살포시 웃는다. 주구전은 그것이 기꺼워 ‘허허허’ 하고 웃고 말았다. 진왕이 원하는 대로 주자서 혼자만 낙양성 근처에 두고 갈 수는 없는 일이니 어찌 되었든 주자서를 데리고 양주로 돌아가야 한다.

주구전이 주자서에게 물었다. “자서야, 진왕이 준다는 벼슬 한번 해볼테냐?” 주자서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얼굴을 구기며 고개를 저었다. “싫습니다.” 주구전이 말했다. “저리 주신다는데 또 안 받기가 그렇구나.” 주자서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양주로 다시 서신을 보내야겠다.

주구전이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 시간이 많이 지났는지 옆에 앉아 있는 주자서는 꾸벅꾸벅 앉아서 졸고 있었다. 주자서의 어깨에 손을 올려 그를 깨운 뒤 시선을 돌려 진왕이 앉아 있던 자리를 보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공자들 몇몇은 자리에서 일어나 기루의 위층으로 올라가는 듯했고 진왕을 포함하여 몇몇은 보이지 않았다.

주구전은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여 주자서의 부축을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일어나자 옆에 서있던 하인이 그에게 다가와 서신을 건내 주었다. 주구전은 한참 고민을 하다 그 종이로 만든 서신을 펼쳐 보았다. 그 서신은 진왕이 공의 가좌로 천거하는 공자들의 이름을 적은 것이다. 그 이름 중에 주자서가 있다.

雨霖鈴 第19

19. 螳螂窺蟬 黃雀在後
매미 뒤에 사마귀, 사마귀 뒤에 참새.

얼굴을 가린 여인은 온객행에게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어울리지 않는 투박한 포단에 다소곳이 앉았다. 온객행은 아무 말도 없이 자리에 앉는 여인을 보았다. 잠시 후에 하인이 다구를 가져와 차를 우렸다. 하인은 차를 다 내리자 곧 방을 나갔다. 온객행과 여인은 한동안 찻잔에서 피어오르는 식어가는 차의 증기를 보았다. 여인이 물었다. “공자님께서 찾으시는 운일은 강호에 있는 새입니까?”(63) 온객행이 여인을 보았다.

대답이 없는 온객행을 보고 있던 여인의 눈썹이 올라갔다. “공자 아직 어린 것 같은데, 동력조의 대한 이야기는 누구에게 들었습니까?” 온객행은 사실 조금 당황하고 있었다. 이렇게 쉽게 독에 관련된 이야기를 나눌 줄은 생각 못했기 때문이다. 사실 앞에 앉아 차를 마시는 이 여인이 얼마나 알고 있을지도 의심하고 있었다. 온객행은 목이 타서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차를 마셨다. 여인은 시선을 돌리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온객행은 차 맛이 많이 쓰다고 생각했다. 마치 독을 섞은 것처럼.

여인은 일각이나 기다렸는데도 멀쩡히 앉아 있는 온객행을 보고 당황한 눈치였다. 여인은 온객행의 찻잔에 차를 조금 더 따르고 찻주전자의 뚜껑을 열어 냄새를 맡아 보고는 얼굴을 찡그렸다. 여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공자께서는 어디서 동력조의 이야기를 들으셨습니까?” 온객행은 앞에 있는 여자를 바라보기만 했다. 여자의 한쪽 눈이 파르르 떨리더니 곧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갔다.

온객행은 얼굴을 가린 여인이 나가자 여인이 했던 것처럼 주전자의 뚜껑을 열어 냄새를 맡고 안에 들어 있는 찻잎을 보았다. 독말풀이 들었지만 독성이 많지 않은 것으로 보아 개량한 것이다. 보통사람이 먹었다면 아마 현기증이 나서 쓰러졌을 것이다. 온객행은 어릴 때 독을 잘못 먹고 앓은 적이 있어서 독의 내성이 평범한 사람보다 높았다. 자신을 쓰러뜨려서 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했던 것일까? 밖이 소란스러워 방 밖으로 나가니 손님 중에 실랑이를 벌이는 이들이 보였다. 입은 옷으로 보아 높은 관리의 식솔인 것 같다.

초무관에 들어와서 처음 만났던 소녀가 온객행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주변의 눈치를 보더니 온객행을 침실이 있는 위층으로 안내했다. 온객행은 당황했지만 일단 소녀가 하는 데로 두었다. 침실로 들어오자 소녀는 온객행을 침상에 앉히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 침상으로 다가와 온객행이 앉아 있는 침상에 다리를 걸치며 온객행의 목에 칼을 들이 밀었다. 소녀의 목소리가 낮고 거칠게 변했다. “너는 뭐야?” 온객행이 멀뚱히 소년을 쳐다보자 소년은 손에 쥔 칼을 좀 더 바짝 온객행에게 가져다 대며 말했다. “이 칼에는 독이 발라져 있습니다. 공자, 머리가 붙어 있을 때, 입을 여시오.” 온객행이 얼굴을 찡그리자 소년이 얼굴을 붙여왔다.

온객행은 숨을 들이 마시더니 말했다. “동물의 독이군.” 소년이 한쪽 입술 끝을 끌어 올리며 웃었다. “누가 보냈지? 누구에게 듣고 온 거야?” 온객행은 ‘흠’하고 생각한 후에 말했다. “네가 채미공자인가?” 소년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내가 누구인지는 알 것 없고 누구에게 듣고 왔는지 말해.” 온객행이 말했다. “진왕” 소년이 온객행의 귓가에 속삭였다. “나는 인내심이 없는 사람이야. 장난하지 말고 빨리 말해.” 진왕이 보낸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안다는 것은 진왕은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온객행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기왕” 소년은 한참 생각하더니 말했다. “기왕이 널 보냈단 말이야?” 그리고 소년은 온객행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기왕은 초무관이 어디에 있는 줄도 모를걸? 나를 시험하러 온 건가?” 소년이 온객행에게서 칼을 거두며 물었다. 온객행은 당황한 기색 없이 말했다. “일처리가 부족했다는 소리는 하실 것 같더군.” 아마 이 상황을 보면 엽백의는 분명 온객행에게 한 소리 했을 것이다. 칼을 품속에 집어넣다 만 소년이 온객행을 매섭게 노려봤다. ‘흥’하고 코웃음친 소년이 말했다. “어디서 도 닦는 놈처럼 입고 기생집에 들어와서 대놓고 의심을 사고는 아직도 할말이 있어?”

온객행이 웃으며 말했다. “도라는 것은 원래 세상의 모든 일을…” 소년이 온객행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시끄럽고 정말 진왕이 떠보라고 보낸 거야?” 온객행이 소년을 물끄러미 보았다. 키가 작고 몸의 선이 가늘어 얼핏 보면 어린 소녀 같았으나 다시 보니 온객행과 비슷한 나이 또래의 소년으로 보였다. 몸짓과 말투를 지우니 그제야 소년의 모습이 보인다. 온객행이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원래 높으신 분들께는 모두 의심병이 있다는 것을 그대는 몰랐는가?” 소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병은 꼭대기에 있어야만 생기는 병 인줄 알았지.” 소년의 말에 이번엔 온객행이 ‘하하하’하고 소리를 내어 웃었다.

소년이 말했다. “원래 독은 죽이는 것보다 죽이지 않는 것이 더 어려운 법이야.” 소년의 말에 동의하듯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이 물었다. “그래서 너의 목표물은 누구지?” 온객행은 한참 머리를 굴리다 말했다. “좌장사 사마헌(司馬憲)” 소년이 온객행의 말을 듣고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드디어 그 쓸모 없는 놈을 처리하는구나.” 온객행은 그저 소년의 말에 동의하며 말을 줄였다.

소년이 다시 물었다. “그래서 중독이야 독살이야?” 온객행이 소년을 보며 말했다. “중독?” 소년은 온객행을 힐끔 보더니 말했다. “기왕처럼 말이야.” 온객행은 기왕이 중독되었다는 사실은 몰랐다. 황실에 연금되어 밖으로 잘 나오지 않는다는 풍문을 주워들은 적이 있다. 황후가 마시게 한 술이 대체 어떤 술이기에 중독이 된 것일까? 어쩌면 황후가 일을 꾸민 그 날 처음 마신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강호의 술이라고 했으니 어떤 복잡한 술법이든 독이든 섞인 술이었을 것이다. 온객행은 그것이 어떤 술인지 알아내기 위해 말했다. “그래 기왕처럼.” 그 말에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은 잠시 생각하는 것 같더니 침실을 나갔다.

다시 돌아온 소년의 손에는 작은 호리병이 들려 있었다. 밀랍으로 봉해져 있는 그 병을 온객행에게 주며 소년이 말했다. “앵속(양귀비)의 진액만 모아 굳힌 것이네. 용량은 그대도 알겠지만 조심하지 않으면…” 온객행이 병을 흔들자 안에 들어있는 환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앵속이었군.’ 앵속은 남방에서는 흔히 쓰이는 약재였지만 중원에서는 아직 사용이 많지 않았다. 게다가 앵속은 용량에 상관없이 중독성이 있어서 치료 후에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고통스러운 부작용이 따랐다. 기왕이 앵속에 중독된 것이라면 황후가 해달라는 것은 무엇이든 해주었을 것이다.

소년이 말을 이었다. “앵속의 진액뿐만 아니라 전갈의 맹독이 미량 포함되어 있으니 관리는 물론 취급에 주의하지 않으면 너도 위험할 거야.” 소년의 말에 미소를 지은 온객행이 병을 품속에 넣고 포권하며 말했다. “보잘 것 없는 소인의 목숨까지 걱정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소년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 보잘것없지. 나는 영원히 보잘것없을 생각은 없어.” 소년의 말에 온객행이 말했다. “그대 들어보지 못했나? 세속에서 귀천은 스스로에게 있는 것이 아니네.”(58) 그 말을 하면서도 온객행은 주자서가 해준 말을 떠올렸다. ‘사람의 기준으로 사람의 쓸모를 정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그랬지. 아서가 그렇게 말했었지.’ 온객행의 입꼬리에 미소가 걸렸다.

소년은 그런 온객행의 표정을 말없이 보고 있다가 그에게 다가와 앞섶을 헤치며 말했다. “나는 세속에 사는 사람이지 도를 닦을 마음은 없어. 그대 들어보지 못했나? 작은 도적은 잡히고 큰 도적은 제후가 된다는 말?”(64) 자신의 앞섶을 헤치는 소년의 손을 잡은 온객행이 놀라 소년을 보았다. “귀한 신분은 훔쳐서 얻으면 되는 거야” 소년의 말에 온객행이 그의 손을 뿌리치며 방문으로 걸어갔다. “나는 도를 닦는 놈이니 만물에 귀천이 없소.”

소년은 방금 온객행이 앉아 있던 침상에 풀썩 쓰러지며 다시 몸짓과 말투를 꾸몄다. “어떤 것이 추하고 어떤 것이 아름다운 것인지 알 수 없다. 성공하면 우두머리가 되어 존경받고 성공하지 못하면 꼬리가 되어 천대받으니….(64) 공자, 소녀는 이번에 꼭 성공해야겠습니다.” 온객행이 얼굴을 찌푸리자 소년이 다시 말했다. “걸왕의 개는 요임금께도 짖는다 하니 각자 잘 처신하도록 합시다.”(65) 소년이 살포시 웃었다. 그 모습이 예쁘기도 또 처연하기도 하여 온객행은 기분이 이상해졌다.


온객행은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는 소년이 흩어 놓은 앞섶을 잘 여미며 초무관을 나왔다. 초무관을 나오는 내내 2층 내실에서 들리는 월금 연주는 사람들의 발길을 잡았다. 여자 옷을 입고 있던 그 소년은 아마도 채미공자는 아닌듯하다. 익주장사 사마헌에게 악의를 보이는 것으로 보아 이들도 익주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알고 있는 것 같다. 배위에서 보았던 사마헌은 황제가 아끼는 신하들과 가까이했다. 황제의 내종형제이자 유격장군인 사마량(司馬量)과 대부분의 연회를 함께 했다. 연회준비를 도운 듯한 낭야왕과는 인사만 할 뿐 어떤 대화도 하지 않은 것 같다. 그것이 참 이상했다.

사마헌은 지금의 황제가 등극하기 전부터 낭야왕 사마운(司馬云)의 총신이었는데 말이다. 대체 무엇이 사마운과 사마헌의 사이를 갈라 놓았을까? 아니면 서로의 거동을 조심하는 것으로 보아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천금처럼 비싼 독약을 의심없이 내준 것은 정말로 이상한 일이다. 온객행은 괜히 두리번거리면 의심을 살 것 같아 그대로 걸어 낙양성 밖으로 나왔다. 누군가 그의 뒤를 쫓고 있었는지 온객행이 숲속으로 사라지자 검은 옷과 복면을 한 남자들이 우왕좌왕 온객행을 찾았다. 나무위에 앉아 그들이 지나갈 때를 기다린 온객행이 하늘을 보니 기울어가는 달이 보였다. “저 하늘 해와 달은 오늘도 동녘에 떠오르건만, 어찌해야 님의 마음잡을까요? 내게는 차갑기만 하니…”(21)

엽백의는 평락원을 나오면서 귀족들의 이야기는 나중에 주구전에게 묻기로 했다. 천자가 귀한 이유를 모르는 자들이 자신의 안위를 돌보느라 바쁜 것을 보고 있으면 화가 치밀어 주화입마에 빠질 것 같다. 엽백의는 이 일에 확실하게 관여하고 있는 화산파와 태호파의 입장을 알고 싶었다. 아직도 그들이 숭산에 있을지 아니면 예주로 양주로 돌아갔는지는 알 수 없다. 엽백의는 발을 놀려 숭산으로 향했다.

엽백의가 알기로 강호에서 연맹을 맺은 정파들은 어쩐지 모두 황실과 연관이 있었고, 그리고 그 황실과 연관이 있는 인사들은 모두 무고와 관련이 있었다. 당시 서국공 주희가 무고를 찾은 것은 사계산장의 소장주였던 진회장과 형주 악양성의 악양파의 장문후계 고숭(高崇) 덕분이다. 정확하게 무고의 위치를 알고 있는 것은 그것을 조사했던 서국공 그리고 그가 무고를 찾는데 그를 도운 청성곡 마을 주민 정도가 다이다. 추후에 황제에게 보고서를 올렸다면 아마 황제도 대략적인 위치를 알고 있을 것이다. 알 수 없는 것은 당시 서국공과 함께 무고를 찾아 헤매던 군관 중에 살아남은 이가 아무도 없다. 하다못해 병졸 중에도 없다.

추후에 서선공의 일가가 사망하고 그의 재산은 그 행방이 묘연하다. 주희에게는 형제자매가 있었는데 그들은 주희의 출신인 기주 낙릉에 집성촌을 이루어 거주하고 있다. 그의 매부인 장순(張純)은 태산지역의 태수를 하고 있다. 그가 주희의 인척 중에 주희를 제외하고 가장 높은 지위를 가졌다. 주희는 이룬 업적에 비해 주변에 총신이라 부를 만한 사람을 두지 않았는데 일부러 그런 것인지 아닌지는 이제 와서 알 수 없다.

애초에 현재 황제와의 소원한 관계로 금위군 장군임에도 불구하고 도성을 떠나 있는 날이 더 많았다고 하니 모두 천자의 눈치를 보느라 서선공을 고립시킨 것일 수도 있다. 그는 부마인데 어째서 그의 지위에 맞는 대접을 받지 못한 것일까? 주구전의 말 대로 강호에서 알지 못하는 황실의 사정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엽백의는 머리가 아파왔다. 이런 권모 술수에 관련된 이야기는 엽백의가 멀리하고 싶어하는 사정이다. 황실의 연원도 어찌 보면 개인의 사소한 연원인 것을 그것으로 전쟁을 하고 잇속을 챙기는 것은 멀리서 보는 것만으로도 질린다.

사계산장 사람들은 주구전처럼 ‘허허허’ 웃는 얼굴로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마음을 산다. 정보의 본질에 다가가지도 않으면서 잘도 찾아낸다. 그들의 무공은 낮지도 그렇다고 다른 무림 정파에 비해 그다지 높지도 않다. 사람들이 웃으며 흘리는 아주 작은 조각을 주워서 그럴듯하게 맞춰낸다. 그렇게 모은 정보는 돈을 주고 산 정보보다 더 자세하고 실용적이다. 그들의 정보는 권모 술수라고 부를 만한 것들이다. 그러니 주구전이 폐관수련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제자들의 출입을 제한하고 강호와의 거리를 벌린 것이다. 어쩌면 사계산장은 이미 예전에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엽백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 쥐고 일단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했다.

청성곡의 일은 황실의 일과 관계가 없는 줄 알았지만 강호에서 나타난 새로운 세력인 그 무림맹은 어째 무고와 관련된 자들이 대다수 연결되어 있다. 황실과 관여하여 무엇을 약속 받았는지 알아내면 관련된 문파를 찾는 것도 수월할 것이다. ‘성난 벌집쯤이야 태워버리면 그만인 것을.’ 엽백의는 화산파의 우달이 아직도 숭산에 있는지 궁금했다. 개방의 장로도 있었던 것 같은데, 그렇게 관련자들이 굳이 찾아갈 필요없이 한자리에 모여 있다면 엽백의의 일은 쉬워지는 것이다. 개방 장로가 두명이나 숭산을 방문했는데 아무런 기별이 없는 개방도 의심스럽다. 중놈들과 먼저 상황을 맞춰본 후에 다음일을 도모해야 할 것 같다.

온객행은 끈질긴 추격에 노숙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침이 되어서 관도에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났고 검은 복면을 쓰고 검은 옷을 입은 자들은 모두 그 자취를 감추었다. 아니면 복면을 벗고 온객행을 찾고 있는 지도 몰랐다. 온객행은 얼른 공의로 발걸음을 옮겼다. 중명원으로 가면 혹시 아서를 만날 수 있지는 않을까 생각했다. 중명원에 도착한 온객행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하인들은 다행히 온객행을 기억하는지 그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이상하게 주구전과 주자서가 그들을 찾아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며 그들의 짐을 온객행에게 주었다.

온객행은 주구전과 주자서의 짐을 들고 그들이 마차와 말을 맡겨 놓은 마구간으로 갔다. 하지만 그들은 마구간에도 오지 않았다. ‘일부러 짐을 찾지 않았나?’ 온객행은 마구간 옆에 주저 앉아 생각했다. 한시진이나 앉아서 주구전과 주자서를 기다렸지만 그들은 마구간으로 오지 않았다. 오시 넘어서야 온객행은 마구간에서 나와 시장으로 갔다. 단지에 들은 모과 절임을 들고 평안 은장으로 들어갔다. 서신에 ‘錦(금; 비단)’이라고 쓴 뒤에 사계산장으로 보냈다. 모과 절임이 동나기 전까지 꼭 아서를 만나러 가겠다고 생각했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짐에 들어있던 호복을 꺼내 옷을 갈아 입고 길게 늘어뜨린 머리도 올려 묶었다. 거기에 봇짐을 둘러 매니 평범한 시골뜨기로 보였다. 온객행은 초무관과 관련된 문파에 대해 조사하기로 했다. 엽백의에게 전해 들었던 청성곡의 상황을 보면 청성곡에는 간자가 있었다. 마을에서 축대를 쌓는 일은 우기를 보내는 도중에 가장 중요한 일이다. 청성곡이 자리를 잡고 십 수년간 일어나지 않았던 산사태가 그날 일어났다. 비가 많이 온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게 큰 비는 예전에도 있었다. 그 산사태는 청성곡 사람들의 죽음을 묻기 위해 조심스럽게 계획된 일이다.

장공은 복수를 원하지 않았다. 그저 딸의 시신을 잘 수습했으면 된 것이라고, 하지만 장공이 돌아가시고 나니 엽백의는 크게 휘청거린다. 내가 그 노야에게 놀아나는 것인지 아니면 노야가 내게 놀아나는 것인지 아니면 둘 다 아닌 다른 사람에게 휘말리고 있는 것인지 이야기를 종합할 필요가 있다. 엽백의를 찾는 것이 우선이다. 온객행은 다시 장명산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 때문에 일단 소림사에 가서 엽백의를 기다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직도 정파의 주요 인물들이 그곳에 남아 있다면 무언가 더 캘 수 있는 내용이 있을 것이다.


공의에서 숭산으로 올라가는 길은 꽤 한산했다. 날이 따뜻해서 들짐승이 자주 출몰한다 하니 뭉쳐서 산을 넘는 사람들이 많았다. 온객행은 해가 거의 넘어 갈 때 즈음 소림사 산문에 도착했다. 달라진 온객행의 모습을 알아보지 못한 스님들은 그에게 무슨 일로 찾아왔냐고 물었다. 온객행은 장명산 검선의 제자라고 소개하자 그들은 순순히 그를 대웅보전으로 안내했다. 법당에는 나이가 지긋한 회주와 법주 그리고 아직 떠나지 않은 문파 장문인들이 앉아 있었다.

지주가 보이지 않아 두리번거리자 도감 혜림이 온객행에게 반장하여 인사하며 다가왔다. “아미타불, 온공자!” 도감스님은 온객행을 데리고 법전 뒤쪽에 앉으며 물었다. “온공자,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하늘의 색이 바뀌다니…” 온객행도 공손히 포권하고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스승님께서 소림사에 계십니까?” 도감스님이 온객행을 보며 말했다. “알고 오신 것이 아닙니까? 상선께서 공자께 시키신 일이 있다 들었습니다.” 온객행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감스님은 온객행에게 괜히 묻지도 못하고 안절부절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웅보전 안으로 태호파 장문의 사위인 조경이 불편한 표정으로 들어왔다. 그를 데리고 온 스님은 조용히 온객행에게 다가와 그를 데리고 자운당으로 향했다. 자운당 안에는 주지 여운과 악양파의 후계 고숭 그리고 엽백의가 앉아 있었다. 온객행은 눈치를 흘끔 보고 포권하여 인사한 뒤에 자리에 앉았다.

엽백의가 온객행에게 눈치를 주었다. 상황을 보니 입을 열지 않는 편이 좋은 듯했다. 엽백의가 말했다. “고소협은 무고에 대해 알고 있소?” 고숭이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것은 왜 물으시는지요?” 엽백의가 말을 이었다. “지금 강호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과 관련이 있는 일입니다.” 주지와 엽백의의 눈치를 한참 본 고숭이 입을 열었다.

고숭과 그의 의형제 장옥삼은 10년전 진회장과 주희가 강호를 떠돌 때 그 길을 함께 했던 자들이다. 장옥삼(張玉森)은 양주 파양호 근처에 경호파(鏡湖派) 장문의 아들이다. 고숭은 한참 뜸을 들이며 말했다. 뭔가 떳떳치 못한 이야기가 있는 것이다. 그들이 익주의 무고를 찾는 동안 진회장의 처에게 태기가 있어 진회장은 먼저 양주로 돌아가고 남아 있던 고숭과 장옥삼 그리고 서국공 주희는 월수와 운남 근처를 수색했다고 한다.

청성곡 근처에서 결국 무고를 찾아내고 만 것이다. 고숭은 또 한동안 안절부절 못하더니 말했다. “그 곳은 마교와 관련이 있는 곳으로 보였습니다. 저희는 찾았다는 기쁨에 바로 서국공께 알리고 다음날 무고를 열었습니다. 하지만 무고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어요. 마교를 숭상하는 자들이 제단을 만들어 흉악한 짓을 일삼았던 곳인 것 같았습니다. 서국공은 몇 일이나 그곳을 둘러보고 나서 저희에게 이 일에 대해 알리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엽백의가 그 말을 듣고 혀를 찼다.

“고소협은 서국공이 낙양에서 비명을 달리했다는 것을 아시오?” 깜짝 놀란 고숭이 엽백의를 보며 말했다. “서국공께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반응으로 보면 고숭은 주희에게 일어난 일을 모르는 것 같았다. 엽백의가 물었다. “그 일에 대해 알고 있는 자는 고소협과 장옥삼 둘뿐이오?” 고숭이 얼굴을 찌푸리며 대답하지 못하자 엽백의가 말했다. “혹 청성곡에 은혜를 입지 않았소?” 고숭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무릎 꿇고 말했다. “악양파 소장주 고숭 상선께 사실을 고하겠습니다.” 무고는 청성곡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들은 그곳을 수색하면서 청성곡에 머무른 것이다. 무고를 찾아낸 것도 그들의 도움을 받은 것이다.

엽백의가 고숭을 쏘아보며 말했다. “청성곡이 물난리를 겪었을 때 그대는 어디 있었소?” 고숭은 이제 벌벌 떨며 말했다. 무고의 일을 없던 일로 하자며 다시 낙양성으로 돌아갈 것을 결정한 후에 그들은 며칠 더 청성곡에 머물렀다고 한다. 견곡주는 곧 우기라 비가오기 시작하면 산을 나가는 것이 곤란하다며 그들의 길을 재촉했고 견곡주의 말에 따라 그들은 곧 청성곡을 떠났다고했다.

그리고 그들이 떠나고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서국공의 일행이 부성에 도착했을 때 청성곡의 소식을 들었다고 했다. 엽백의가 미간을 찌푸렸다. 시간이 맞지 않는다. 청성곡의 비극은 그들이 떠난 다음날 일어났다. 엽백의가 물었다. “청성곡의 일은 누구에게 들은 것이오?” 고숭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넙죽 엎드렸다. 온객행이 고숭을 한참 몰아붙인 후에야 고숭이 답했다.


(64) 장자 잡편 29 도척
小盜者拘, 大盜者爲諸侯
작은 도적은 잡히고 큰 도적은 제후가 된다.
孰惡孰美? 成者爲首, 不成者爲尾 어떤 것이 나쁘고 어떤 것이 아름다운지 알 수가 없다. 성공을 하면 우두머리가 되어 존경받고, 성공하지 못하는 자는 꼬리가 되어 천대받게 된다.

(65) 한서 추양열전
桀犬吠堯, 堯非不仁, 特吠非其主耳
걸왕의 개가 요임금을 보고 짖는 것은 요임금이 어질지 못해서가 아니라 단지 주인이 아닌 자를 보고 짖을 뿐이다.

雨霖鈴 第18

18. 桑土綢繆
근심과 재앙에 미리 대비하라.

황제가 마신 것 중에 제일 의심스러운 것은 데운 술이었다. 연주자사의 부친 경릉공 왕혼이 바친 호골주는 황제와 조왕, 낭야왕 밖에 마시지 않았다. 그 셋 중에 술을 데워 마신 것은 황제뿐이다. 황제의 냉증은 황족뿐만 아니라 궁궐에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알고 있는 고질병이다. 원래 그 기운이 뜨거운 초오가 섞인 술을 데워 마셨으니 미량이라 하더라도 탈이 났을 것이다. 황제가 안주로 함께 먹은 잉어는 찬성질의 음식이니 초오의 기운이 천천히 돌게 했을 것이다.

엽백의는 조금 짜증이 났다. 처음 장명산에서 나왔을 때 알고자 했던 것은 황족의 권력 놀음이 아니었다. 엽백의가 알고자 하는 일에 황족이 연관된 일은 사실이나 황족의 일에 간섭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다. 다음날 황제는 기운을 보하는 탕약을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제는 재종형제인 남중랑장 사마흠을 시켜 일을 조사하게 했다. 그리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그날 오후 하구에서 풍년제를 지냈다. 엽백의는 황족들의 행태에 엽백의는 마음이 거북하였다.

황제의 일을 듣고 낙양에서 달려온 태의에게 천자의 증상을 말하고 엽백의가 떠나려고 하자 황제는 은인을 그냥 보낼 수 없다며 엽백의를 잡았다. 황제는 본인의 아들인 조왕과 진왕은 물론 그에게 충절을 맹세한 기왕도 믿지 못했다. 엽백의는 그가 원래부터 병을 앓고 있었는지 아니면 천자의 앉은 자리가 그를 병들게 했는지 알 수 없었다.

황제 앞에 무릎 꿇은 엽백의가 포권하며 말했다. “못에 물이 마르면 물고기는 땅밖에서 서로 살고자 습기를 나눕니다. 하지만 그것이 어찌 강과 호수에서 서로를 잊고 살 때와 같겠습니까?”(61) 엽백의는 황제가 제령을 잊었나 했다. 강호가 황실의 일에 관여하지 않듯, 황실 역시 강호의 일에 관여하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이제 보니 황실과 강호는 서로에게 너무 많이 관계하고 있는 것 같았다. 황제는 엽백의의 말을 듣고 아쉬운 듯 그에게 은 백 냥을 내렸다. 엽백의는 그것을 피난민들에게 나누어 주시라 부탁한 뒤에 평락원을 나왔다.


황제의 재종형제 중 하나인 사마헌은 10년전 문성왕으로 봉해져 익주자사가 되었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청성곡의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는 지금 사례지역의 치안을 담당하는 남군의 유격장군 사마량의 장사이다. 그는 10년전 청성곡의 일이 일어난 후 익주에서 떠나 다시 낙양으로 돌아왔다. 그가 익주에서 어떤 일을 했고, 왜 봉지를 버리고 다시 낙양으로 돌아왔을까? 10년 전 청성곡에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산세가 험하고 거주민이 별로 없는 익주에 문성왕 사마헌이 주자사로 봉해진 것은 아주 드문 일이었다. 그는 황제의 이복동생인 낭야왕 사마운의 총신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엽백의는 주구전에게서 청성곡의 일을 조사했던 서국공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가 살아있었다면 왜 청성곡의 마을 사람들이 그날 모두 독살당했는지 알 수 있을까?

청성곡의 사람들이 마신 독은 동물이나 식물에게서 얻을 수 있는 일반적인 독이 아니었다. 따로 독에 조예가 있는 자가 아주 교묘하게 조합한 것이다. 독에 의해 중독된 마을 사람들은 피할 겨를도 없이 산사태의 토사에 휩쓸려 죽었다. 장청의 딸 현의도 그 날 죽었다. 그 곳에서 엽백의는 청성곡 사람들의 시신을 수습하던 주구전을 만났다.

청성곡의 견곡주는 주구전의 은인이었다. 주구전의 동생 주구단이 막 이립이 지났을 즈음 갑작스럽게 앓아 누운 적이 있다. 그때 약초를 찾아 양주에 왔던 견곡주가 동생을 살려주었기 때문이다. 청성곡의 일을 전해 들은 주구전은 양주에서 말을 바쁘게 달려 달포만에 익주 청성곡에 도착했지만 마을은 이미 잿더미가 된 상태였다.

살았던 마을사람 중에 아무도 그 폐허 같은 곳에서 살아나오지 못했다. 더 씁쓸했던 시신을 수습하는 사람도 한 명 없었다는 것이다. ‘청성곡에 은혜를 입은 그 많은 강호의 인사는 모두 어디에 있을까? 어디로 간 것일까?’ 주구전은 청성곡에서 몇 달 지내며 시신을 찾아 묻어 주었다. 주구전이 강호에 대해 회의감을 느끼기 시작한 것도 그 즈음이다. 청성곡에서 양주로 돌아가서 주구전은 한동안 사람을 만나지 않고 사계산장 뒷산에 머물렀다. 그때부터 주구전이 폐관중이라는 소문이 돌았던 것도 같다.


배 위에 하루동안 갇혀 있던 하인들은 갑판으로 나와 난간에 매달려 부두를 보았다. 밤에 보았단 병력중의 절반은 철수한듯 한산했고, 하구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나와 시끄럽고 어수선했다. 어젯밤 주구전이 잡았던 선원과 관련이 있는 하인들과 선원은 효기교위가 낙양의 관청으로 호송하였고, 조왕이 따로 고용한 하인들은 남중랑장의 명령에 의해 정주에 있는 관청으로 호송되었다. 지금 배 위에 남아 있는 하인들은 대부분 평락원 주방에서 일을 하는 하인들이었다.

대부분 과년(16세)에서 방년(20세전후)사이의 소녀들과 어멈들, 그리고 어린아이들이 배부분이다. 다행히 어제 연회가 끝난 후 짐을 다 내리지 못한 상태에서 배 안에 구금되었기 때문에 주구전은 사람들을 모아 요기를 했다. 하인들이 처벌을 두려워해 먹지 않자 주구전은 본인이 값을 치룰 테니 걱정할 필요 없다고 말했다.

주자서가 주구전의 눈치를 보았지만 다른 사람과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었다. 그 후 주구전은 배를 감시하고 있는 군관에게 가서 상황을 물었지만 아무런 대답을 듣지 못했다. 그러더니 어제 내리지 못한 남아있는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하인들은 주구전이 하는 모습을 보고 있다가 그를 도와 배 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어수선했던 배 안이 어느정도 정리되자 사람들은 갑판으로 나와 햇빛을 쬈다. 주구전은 물동이에 들은 물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한숨을 쉬었다. 주구전이 온객행에게 물었다. “온공자 원인이 무엇이오?” 온객행이 말했다. “초오 인듯합니다.” 온객행의 대답에 주구전이 눈살을 찌푸렸다. “부자(附子)가 아닌가?” 주구전의 말에 온객행이 물었다. “왜 그리 생각하십니까?”

주구전이 말했다. “도성 근처에서 초오를 구하기 쉽지 않네, 사례지역은 다른 곳에 비해 독성이 있는 약초의 반입이 까다로운데 황실에 관련되어 있는 자가 아니면 함부로 구할 수 없을뿐더러, 황족이 구한다 하더라도 기록을 남기게 되어 있네. 천자의 허가 없이 초오를 팔거나 산 사람은 모두 멸문의 화를 피하지 못한다 했네.”

온객행이 주구전을 보며 말했다. “어제 이 배에 탄 사람 중 절반이 황족인데 초오를 구하는 것이 어디 일이겠습니까?” 온객행은 독을 쓴 자가 독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엽백의가 찾으라고 했던 독을 쓰는 자는 대체 누구일까? 그리고 그는 조왕의 사람인지 아니면 진왕의 사람인지 아니면 강호의 인물인지 아직 알 수 없다.

미시(未時)가 되자 강 하구에 상단의 배들이 하나 둘 정박하기 시작했다. 부두에 사람이 많아지자 배를 감시하던 병력도 어느정도 분산되었다. 한시진쯤 지나서 월기교위 유연이 평락원의 하인들을 데리고 돌아갔다. 온객행에게 인사를 하고 주구전과 주자서를 위아래로 훑어본 유연은 별말 없이 자리를 떴다. 소림사에서 진왕과 함께 있던 자다. 그는 진왕의 세력일까?

온객행이 주구전에게 물었다. “월기교위에 대해 아는 것이 있습니까?” 주구전이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귀비의 당질이 아니오?” ‘귀비? 이번일에 귀비도 관련된 것인가?’ 온객행은 생각했다. 주구전이 말을 이었다. “평소 진왕과 친분이 두터운 듯하나 조금은 어울리지 않는 교분이라는 말이 있더이다.” 온객행이 저 멀리 평락원으로 가는 유교위에게서 시선을 돌려 주구전을 보았다. “어울리지 않는 교분이라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주구전이 말했다. “진왕은 황제의 의심을 사는 것이 두려워 평소에 군관이나 병사를 가진 자들과는 좀처럼 관계하지 않는다 들었는데…”

온객행은 유교위와 진왕이 종종 초무관이라는 기루에서 채미공자의 월금 연주를 즐긴다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조왕의 일을 진왕이 덮어쓰게 된 것도 유교위와 관련이 있다는 소문도 들은 적이 있다. 온객행은 그 채미공자라는 사람을 만나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온객행이 주구전에게 물었다. “주대인은 어디로 가십니까?” 주구전이 말했다. “공의에 짐과 마차를 두고 왔으니 그리로 갈까 하네. 소림사에 들러 이야기를 나누고 나는 용처럼 호랑이처럼 다투는 이들과 어울릴 깜냥이 되지 않은 것 같으니 양주로 돌아가고자 하네.”(53) 하고 ‘허허허’ 웃었다.

온객행은 조왕과 진왕이 주자서를 대하는 것이 묘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마치 어서 벗어나려는 듯 떠나려고 하는 주구전도 의심스럽다. ‘저 둘은 황실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라는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온객행이 포권하며 말했다. “주대인 우리 아직 낙양성의 모란 화채를 맛보지 못했는데, 이곳까지 와서 낙양성도 둘러보지 않고 돌아가시겠습니까?” 주구전이 허허허 웃으며 말했다. “큰 바람이 불기전에는 항상 조용하지요.” 주구전은 노야에게 뭔가 들은 말이 있는 것 같다.

공의에서 정주로 올 때 진왕의 마차를 타고 왔으니 갈 때는 걸어 가야 했다. 배를 탈까 했지만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뱃삯이 싸지 않았다. 사람이 많이 있는 곳에서 경공을 펼칠 수는 없으니 일단 정주성을 벗어나기로 했다. 주구전이 주자서에게 말했다. “괜히 군자산만 아깝게 됐구나.” 주자서가 주구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온객행이 물었다. “그러게 그런 것을 왜 먹인 겁니까?” 주구전은 허허 웃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온객행이 주자서 옆으로 가서 물었다. “아서 왜 군자산을 먹은 거야?” 주자서가 말했다. “종조부께서 나를 유생으로 소개하셨으니 황제를 모시는 군관중에 무공의 경지가 높은 자가 있었으면 나의 무공을 의심할 것이니 그리했지.” 온객행이 주자서 곁에서 걸으며 말했다. “주대인의 제자가 아니어야 하는 이유가 있어?” 주자서는 곤란한 표정을 했다.

주구전이 입을 열었다. “온공자 우리 아직 청성곡의 이야기를 마치지 못한 것 같은데…” 주구전의 말에 온객행이 입을 ‘합’하고 다물었다. 그들은 한시진을 걸어 정주성문에 도착했다. 성을 나가는 사람들을 확인하는 군관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배에 있던 시신을 수습하던 사람이라 주구전의 임기응변으로 정주성을 나왔다.


주구전은 가벼운 주머니를 열어 성밖 노점에서 밀떡을 세 개 구입했다. 주자서는 주구전이 산 밀떡을 소매안에 넣고 다시 공의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무공이 흩어진 주자서가 좀처럼 걸음을 따라잡지 못해 해가 넘어가기 시작할 즈음 예농현에 도착했다. 날이 어두워졌으니 오늘은 이 곳 객잔에서 머물고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기로 했다.

다행히 예농현은 작았지만 북쪽으로 흐르고 있는 황하와 정주성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었기 때문에 객잔이 아주 많았다. 주구전은 염낭이 가벼워 허름해 보이는 객잔으로 들어갔다. 온객행은 그런 주구전을 회유하여 근처에 그럭저럭 괜찮은 객잔에 방을 잡았다.

온객행은 돌아가지 않고 주구전 주자서와 함께 저녁을 먹었다. 생선요리와 돼지고기튀김이 아주 맛이 좋았다. 점원이 추천한 서주의 황주도 독하지 않은데다 향긋하여 셋은 두 단지를 나누어 마셨다. 온객행은 술을 마시는 내내 주자서와 잔을 부딪히고 싶어서 안달하였는데 그것을 눈치챈 주구전이 번번히 먼저 술잔을 부딪혀왔다. 노야가 말한대로 이 노인네는 쓸데없이 눈치가 매우 좋다.

식사를 마친 세사람은 간단히 씻고 각자의 객실로 들어갔다. 그다지 크지 않은 객실안에는 침상과 탁상이 놓여 있었다. 예농현에는 시간을 알려주는 관청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주자서가 주구전의 잠자리를 돌보는 동안 온객행은 주자서가 머무는 객실로 들어가 주자서를 기다렸다. 온객행은 점원을 시켜 차를 준비했다. 자기전에 몸을 따뜻하게 하면 푹 잘 수 있을 것이다. 주자서는 점원보다 먼저 객실로 들어왔다.

온객행을 발견한 주자서는 잠깐 놀란 듯하더니 온객행이 앉아있는 작은 탁상 앞에 마주보고 앉았다. “노온….” 주자서가 무언가 말하기 전에 밖에서 점원이 기별했다. 온객행이 일어나 차주전자와 찻잔이 담긴 소반을 받았다. 주자서는 온객행이 따라주는 차를 가만히 보고 있다 말했다. “노온 아무래도 우리의 인연은 여기까지 인가 하네.” 그리고는 품에서 주목 요패를 꺼냈다. 온객행이 찻잔을 들어 차를 마셨다.

주자서가 말했다. “정표를 돌려주시게.” 온객행은 품속에 넣고 있는 주자서의 영견을 돌려주고 싶지 않았다. 주자서가 어려워하는 울상을 만들어 말했다. “아서 아직 약속한 보름이 되지 않았잖아” 주자서가 눈을 굴리며 말했다. “그거야 진왕이 곁에 있을 때의 이야기 아닌가?” 온객행이 벌떡 일어나 물었다. “그럼 진왕을 데려오면 계속 정표를 가지고 있어도 좋다는 얘기야?”

온객행이 몸을 돌려 객실을 나가는 척하자 주자서가 얼른 일어나 온객행의 소매를 잡았다. “노온.” 주자서의 미안한 표정이 좋아 온객행은 다시 의자에 앉았다. 주자서가 온객행의 소매를 놓지 않고 말했다. “노온 나는 조부와 함께 양주로 돌아갈 예정이네. 상황을 보니 이 일은 우리가 어찌 할 수 없는 일인 듯해.”

온객행이 입을 앞으로 쭉 내밀며 말했다. “그래도 아직 보름이 안 지났잖아. 급히 약속하여 그 사람이 약속을 지키는지도 보아야 하고, 위급함을 알려 지절도 살펴보고 술에 취하게 하여 예의를 보고 호색한지도 봐야 하는데…”(62) 주자서가 웃으며 말했다. “주모 온공자께서 군자의 절개를 시험하시는지 몰라보았습니다.” 온객행이 주자서에게 몸을 붙이며 말했다. “그대가 나를 공경하는 것도 살피는 능력이 있는 것도 뛰어난 지능을 지닌 것도 알겠는데 나에게 충실할지 모르겠어.” 주자서는 온객행이 따라준 찻잔을 비우고 한참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온객행은 괜히 애가 탔다.

주목 요패를 탁상에 꺼내 놓은 주자서가 일어났다. 온객행도 덩달아 일어나며 말했다. “아서. 내게 준 영견을 돌려받지 않아도 좋아?” 주자서는 일어나서도 한참을 무언가 생각했다. 그의 눈동자에 슬픔이 차오르는 것이 보여 온객행은 어쩔 줄 몰랐다. 품속에서 비단 영견을 꺼내며 말했다. “아서, 돌려 줄게 가지마.” 온객행이 주자서의 소매를 잡았다. 주자서는 온객행이 꺼내든 영견을 보고도 한참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온객행은 처음으로 주자서가 준 영견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서투르게 놓여있는 버들잎의 자수가 귀엽다. 솜씨가 좋지 못한 소녀가 아서에게 선물한 것일까? 아니면 정말 아무 의미도 없는 물건일까 온객행은 억울했다. “아서, 이 영견은 정표로 줄 만큼 아서에게 소중한 물건이야?” 주자서의 눈동자가 반질반질하다.

말할 듯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주자서가 답답해서 온객행은 또 덥석 안아버렸다. 차라리 밀어내기라도 했으면 덜 조바심 났을까 가만히 안겨 있는 주자서는 조금만 더 세게 안으면 부서질 것 같았다. “아서 그러지 마, 그렇게, 그렇게… 사라질 것 같은 표정 하지 마.”

주자서가 온객행의 어깨를 잡아 밀어내며 말했다. “노온 그 영견이 마음에 들면 그대에게 줄게. 나에게 있어 평생 잊지 못할 물건이니….” 온객행은 괜히 심통이 나서 영견을 요패가 놓인 탁상위로 던져 놓았다. “이런 물건은 하나도 의미가 없어. 나는 아서를 원해. 아서가 가지고 싶어.” 주자서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물건이 아니니 아무도 가질 수 없네.” 온객행이 말했다. “그럼 나를 가져. 내가 줄게.” 온객행의 말에 주자서가 미간을 찡그렸다.

온객행은 또 그 찡그리는 얼굴에 마음이 간질간질했다. 주자서가 한발짝 뒤로 물러나며 온객행의 어깨를 놔주었다. 그가 뒤로 돌아서 방을 나가려고 하자 온객행이 얼른 팔을 낚아챘다. “주자서.” 온객행의 목소리에 주자서가 탁상위에 올려진 비단 영견을 보았다. 주자서가 다시 고개를 들어 온객행을 봤을 때 온객행은 처음으로 주자서가 낯설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표정을 꾸며낸 주자서가 말했다. “온공자 그대가 모든 것을 가지고 가시게. 내가 부탁하지.” 주자서의 말 뜻을 몰라 온객행은 주자서가 팔을 빼고 천천히 객실을 걸어 나가는 데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다시 탁상으로 와서 주자서가 올려놓고 간 요패와 영견을 보았다. 온객행은 질투가 일었다. 대체 이 영견을 준 사람은 누구기에 주자서에게 평생 잊히지 못할 사람이 되었을까? 요패와 영견을 품속에 집어넣고 온객행은 침상에 누웠다. 다시 일어나 주자서에게 갈까 하다가 예농현에서 공의까지는 걸어서 한나절은 가야 하니 그동안 동행하면서 마음을 돌려 보자고 안일하게 생각했다. 저번에도 그런 것처럼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밀어붙이면 주자서는 다정한 사람이라 온객행의 말을 들어줄 것이다. 보름 중에 이제 겨우 이틀이 지났을 뿐인데 온객행은 자신이 남에게 사랑받기 어려운 사람인가 스스로를 조금 자책했다.

일찍 일어난 온객행은 일부러 주대인에게 살갑게 굴었다. 주자서도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온객행에게 웃어 주었지만 그 전과 달랐다. 웃고 있는 얼굴이 같은 것 같은데 같지 않다. 오늘 만난 주자서는 그동안 온객행이 알고 있던 주자서가 아닌 것 같았다. 아침 일찍 출발하여 오후 다 늦게 공의에 도착했다. 오는 길 내내 온객행은 주자서에게 이런 저런 말을 해보고 울상을 지어 보기도하고 어깨동무를 하거나 팔에 매달리는 등 잔뜩 치댔지만 주자서는 그것을 다 받아 주면서 웃기만 했다. 차라리 밀어내고 불편했으면 좋았을까? 온객행은 점점 화가 났다.

온객행의 짧은 인생에서 처음으로 마음을 나누고 싶은 사람이었는데, 온객행은 그와 정인이 될 수 없다면 옆에서 지켜볼 수 있는 친구라도 되고 싶은 마음이다. 주구전과 주자서는 얌전히 공수하여 온객행에게 작별을 고하고 중명원으로 갔다. 온객행은 그 자리에 서서 두 사람이 멀어지는 것을 보았다. 온객행은 알 수 없는 행동과 몸짓의 주자서도 좋았다.

마음을 이미 다 줘버려서 텅 빈 것 같다. 사계산장의 제자라고 하니 사계산장이 없어지지 않는 이상 주자서는 그 곳에 있을 것이다. 온객행은 시간이 주자서의 마음을 돌려주기를 빌었다. 살면서 무언가 얻고자 빌어본 적이 별로 없는 온객행은 어찌 빌어야 할지도 막막했다.


온객행은 밤에도 쉬지 않고 걸어 밤늦게 낙양성에 도착했다. 낙양에도 통금이 있었지만 관의 허가가 있는 지역에서는 저녁에도 낮처럼 밝았다. 주루와 기루가 모여 있는 거리에 들어서자 인파가 대단했다. 사내는 물론 여인도 있었다. 초무관은 그 규모가 작지도 크지도 않았는데 위치가 거리의 제일 안쪽에 있었다. 화산파가 호위한다는 소문에 맞게 화산파의 호복을 입은 자가 드문드문 보였다.

채미공자는 월금으로 유명한 사람이니 뜨내기처럼 보이는 온객행이 어떻게 청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주변을 둘러보며 자리에 앉은 온객행 옆에 나이에 맞지 않게 한껏 꾸민 소녀가 앉았다. “공자님, 공자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초무관을 찾으셨나이까?” 소녀의 은근한 손길에 온객행이 새침하게 대답했다. “필요한 것이 있어 왔소.” 온객행은 일단 떠보기로 했다. 소녀가 살풋이 웃으며 말했다. “무엇을 구하러 오셨습니까?” 온객행이 소녀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짐새.”(63) 소녀는 잠시 얼굴에서 미소를 지웠다가 다시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주방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서있는 사내에게 무어라 말하더니 곧 주변에 있는 다른 손님 곁으로 자리를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금은 나이가 있어 보이는 여인이 온객행에게 다가왔다. “공자께서 동력조를 찾으신다고 하던데…” 온객행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여인은 온객행의 팔을 붙들며 그를 어디로 인가 이끌었다. “찾으시는 것이 운일입니까 음해입니까?” 온객행은 이들이 뭘 의미하는지 몰라 일단 대답했다. “운일이오.” 여인이 말했다. “그 운일에게 관(볏)이 있습니까?” 온객행이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그를 어떤 방으로 안내했다. 자리를 권하고 곧 방을 나갔다. 온객행은 자리에 앉기 전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 안에는 작은 탁자와 부들로 두텁게 짠 포단만 있었다. 포단위에 앉은 온객행이 조금 기다리자,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여인이 들어왔다.

(61) 장자 내편 6 대종사
泉涸 魚相與處於陸 相呴以濕 相濡以沫 不如相忘於江湖.
못에 물이 마르면 물고기들은 땅 위에서, 서로 습기를 뿜어주고 거품으로 적셔준다. 아무렴 강과 호수에서 서로를 잊고 살 때만 하겠는가?

(62) 장자 잡편 32. 열어구
故 君子 遠使之 而觀其忠 近使之 而觀其敬 煩使之 而觀其能 卒然問焉 而觀其知 急與之期 而觀其信 委之以財 而觀其仁 告之以危 而觀其節 醉之以酒 而觀其側 雜之以處 而觀其色
그 때문에 군자는 사람과 사귈 때 사람을 멀리 보내서 그 사람이 충실한지 살펴보고, 가까운 곳에서 일을 시켜 그가 일을 공경하는지를 살펴보고, 번거로운 일을 시켜보아서 그 능력을 살펴보고, 갑자기 질문해서 그 사람의 지능을 살펴보고, 급히 그와 약속을 하여 그 사람이 약속을 지키는지 살펴보고, 재화(財貨)를 위탁하여 그가 어진지를 살펴보고, 그에게 위급함을 알려서 지절을 살펴보고, 술로 취하게 해서 그 사람이 예의를 지키는지 살펴보고, 남녀가 한곳에 섞여 있도록 해서 호색한지 살펴본다.

(63) 짐새 혹은 짐조(鴆鳥) 중국 전설에 나오는 새로 새매(鷣)라는 새가 천년 묵으면 짐새로 변한다고 했다. 짐새는 독이 있는 벌레나 뱀을 잡아먹어 온몸에서 독이 뿜어져 나온다고 한다. 이 새는 동력조(同力鳥)라고 불리우며 수컷은 운일(雲日, 运日, 運日), 암컷은 음해(陰諧, 阴谐)라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