蛇苺 第13

反間計 | 13. 반간은 반드시 중심에 둔다.

주자서는 온객행이 가져온 옷들을 살펴보더니 아마포로 만든 엷은 쪽빛의 장포를 중의도 없이 입었다. 은은하게 비치는 내의가 야살스러워서 온객행은 한참 달아오른 뺨을 식혔다. 영문을 모르는 주자서는 망상이 가져온 죽을 비웠다. 찐쌀과 연밥을 넣고 간을 하지 않고 끓인 담백한 죽이었다. 주자서는 오랜만에 조금 배가 찰 만큼 식사를 했다. 주자서가 찻잔에 차를 따르며 물었다.
“이것은 제가 산 찐쌀로 만든 것입니까?”
온객행이 주자서의 머리 장식을 바꿔준다며 함을 뒤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자서는 고개를 끄덕이고 소반에 먹은 그릇을 치우고 일어났다. 온객행이 주자서를 따라 일어나며 말했다.
“그냥 두시오. 내가 하겠소.”
주자서는 소반을 들고 서서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너무 객실에만 있어서 심심하니 구경이라도 갑시다.”
온객행이 주자서의 손에서 소반을 빼앗아 들고 말했다.
“망상이 있는 부엌에 가겠소?”
주자서가 표정을 구기고 한참 망설이더니 온객행을 힐끔 보고 말했다.
“혼자 다니는 것이 아니면 괜찮을 것 같은데….”
온객행이 웃으며 말했다.
“아! 내가 같이 가 주겠소. 아니 나와 함께 갑시다.”
주자서는 온객행을 대신해서 장지문을 열었다.

온객행은 부엌에 소반을 가져다주고 망상에게 아주 맛있었다며 감사의 인사를 했다. 주자서도 옆에 서서 소매를 들어 공수하고 인사했다. 망상은 온객행 옆에 서 있는 주자서를 보고 소매를 들어 ‘까르르’ 웃었다. 주자서는 온객행에게 좀 더 붙어 서서 부엌을 나왔다. 두 사람은 배의 여기저기를 함께 둘러봤다. 현리에게 부탁할까 하다가 또 흰소리를 할 것 같아서 둘이 편연주를 둘러보았다. 객실 바로 아래층에는 부엌과 화물칸이 있었고 그 아래층은 노를 젓는 하갑판이 있었다. 배는 아주 큰 편이라 비가 와서 조금 출렁이는 장강의 흐름에도 그다지 영향을 받지 않는 듯했다. 그것이 현리의 능력인지 아니면 배의 성능인지 알 수 없다.

온객행이 물었다.
“유서는 이렇게 큰 배를 타본 적이 있는가?”
주자서가 노를 젓는 나어를 보고 온객행에게 속삭이듯 물었다.
“저들도 사람을 먹습니까?”
온객행이 살포시 웃고 말했다.
“유서. 걱정할 것 없어. 유서에게서 나의 냄새가 많이 나니까 함부로 먹지 못 할 것이오.”
주자서가 온객행을 보고 표정을 구기더니 소매를 들어 ‘킁킁’ 냄새를 맡고 말했다.
“냄새?”
온객행이 주자서의 등허리에 손을 얹어 그를 객실이 있는 층으로 인내하며 말했다.
“사람이 맡을 수 있는 냄새가 아니니 걱정 말게.”
온객행은 주자서의 목덜미에 얼굴을 붙여 숨을 들이마시고 말했다.
“아주 좋은 냄새만 나.”
주자서가 온객행을 못마땅하게 보며 간격을 벌렸다.


둘이 객실로 돌아왔을 때 객실 앞 장지문에 망상이 서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망상이 말했다.
“흑망공자. 금모원군의 별성(別星) 청조(靑鳥)께서 오셨습니다.”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이고 갑판을 올라가는 계단을 보고 말했다.
“갑판에 계시는가?”
망상이 작게 고개를 흔들고 말했다.
“밖에 비가 와서 사랑(舍廊)에 계십니다.”
온객행이 선미를 보고 말했다.
“길을 안내하게.”
망상이 소매를 들어 고개를 조아리고 돌아서서 사랑으로 향했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그가 물어서 생긴 잇자국 주변을 핥고 입을 맞췄다. 주자서가 놀라서 바르작대며 앞서 걸어가는 망상을 가리키고 말했다.
“어찌! 어찌!”
온객행이 낮게 웃고 말했다.
“희첩 말고 부인 하시오.”
주자서가 온객행의 얼굴을 손으로 밀어내며 말했다.
“희첩이든 부인이든 마음대로 하시오.”

온객행이 자신의 얼굴을 밀어내는 손의 손목을 잡아 손바닥에 입을 맞추고 말했다.
“그럼 아상이 나의 처모(妻母)가 되는 건가?”
주자서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손목을 빼려고 하자 온객행이 순순히 손목을 놓아주고 말했다.
“그대가 말한 대로 앞으로는 주의하겠소.”
온객행이 주자서를 보고 눈꼬리를 접어 웃었다. 주자서는 눈이 감기기 전에 보았던 온객행의 눈에 흰자위가 없어서 온객행의 얼굴을 빤히 보고 물었다.
“왜 자꾸 천곽(天廓)이…?”
온객행이 다시 눈을 떠서 주자서를 보았을 때에는 다시 흰자위가 보였다. 주자서가 고개를 갸웃하며 미간을 찌푸리자 온객행이 손을 들어 그의 미간을 쓸고 말했다.
“청조는 미남을 좋아하니 조심하는 것이 좋겠소.”
주자서가 고개를 흔들었다.

망상이 사랑 앞에 도착해 작게 기침하여 기별하고 말했다.
“주인. 흑망공자께서 오셨습니다.”
안에서 현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라 이르게.”
망상이 사랑의 장지문을 열고 온객행에게 손짓했다. 온객행은 주자서를 놓아주고 소매를 털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주자서가 고개를 들어 외실 안쪽을 힐끔 보았다. 안에는 현리와 밝은 파란색 옷을 입은 창백한 미인이 앉아 있었다. 온객행이 소매를 들어 미인에게 인사했다.
“흑망. 청조를 뵙습니다.”
청조는 고개를 돌려 온객행 뒤에 있는 주자서를 보고 눈썹을 찡그렸다. 현리가 청조의 불편한 기색을 눈치채고 말했다.
“대정자(戴胜姊) 제가 서신에서 설명하지 않았었나요?”
청조가 자리에서 일어나 주자서에게 다가가 말했다.
“네가 발의 후손이냐?”
주자서가 고개를 조아리고 답했다.
“기산(岐山) 주가(周家) 자서(子舒), 청조께 인사드립니다.”
청조가 주자서의 턱을 쥐고 들어 올려 그의 얼굴을 보고 말했다.
“정말 사내잖아?”
온객행이 다급하게 덧붙였다.
“저의 내자(內子)입니다.”

청조는 그제야 온객행을 발견했다는 듯이 표정을 구기고 말했다.
“흑망이 아닌가. 벌써 봉인이 풀렸나?”
온객행이 청조를 보고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자애로우신 천존께서 죄를 사하여 주셔서 망극할 따름입니다.”
청조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천존께서….”
청조는 주자서를 놓아주고 다시 앉아 있던 자리로 가서 앉았다. 현리가 청조의 눈치를 보며 온객행과 주자서에게도 자리를 권하고 차를 준비했다. 청조가 한참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
“이렇게 물비린내가 잔뜩 묻어서 어찌 원군께 데려간다는 말이냐?”
현리가 온객행을 힐끔 보고 말했다.
“흑망이 오랫동안 봉인되어 있어 아직 영력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니 청조께서 이해하세요. 에이, 대정자(戴胜姊) 오랜만에 만났는데 서왕모께서는 강녕하십니까?”

청조가 고개를 돌려 현리를 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별일이야 있겠는가? 요즘 통 얼굴을 비추지 않아서 조금 걱정하시더구나.”
현리가 청조의 찻잔에 차를 더 따르고 말했다.
“올해 단오절에는 부리는 사람들 때문에 일이 있어서 찾아뵙지 못했는데 백종절(百種節)에는 꼭 가서 찾아뵐 것입니다. 원군께 드리려고 우사금(藕絲錦; 연꽃으로 짠 비단)을 준비해 놓았는 걸요.”
청조가 살포시 웃으며 말했다.
“우사금을? 원군께서 좋아하시겠구나.”
온객행은 청조의 눈치를 보며 옆에 앉아 있는 주자서의 손을 잡았다. 주자서는 차가운 온객행의 손에 흠칫 놀랐다가 그것이 온객행의 손인 것을 보고 온객행을 흘겨보았지만 뿌리치지는 않았다.

청조가 주자서를 보고 말했다.
“이 아이는 내가 원군께 데려가야겠다.”
온객행이 당황하여 말했다.
“유서는….”
현리가 온객행의 말을 자르며 그를 쏘아보고 말했다.
“그 아이는 흑망이 혼인하려고 데려온 아이라서 먼저 촉룡께 가려고 했는데….”
청조가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혼인?”
현리가 찻물로 입을 축이고 말했다.
“태평호의 수원대선께서 중매를 하셔서….”
청조가 현리를 보고 말했다.
“주요가?”
청조가 다시 주자서를 보고 말했다.
“주요는 사내를 싫어하는데 어찌?”
주자서는 자신을 훑어보는 청조의 시선이 부끄러워서 뺨을 붉히고 고개를 숙였다. 청조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그는 아직 사람이 아닌가?”

현리가 온객행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촉룡께서 허락하시면 원군께 부탁드려서 반도(蟠桃)를 먹이려고 했죠.”
청조가 현리를 보고 코웃음 치며 고개를 흔들었다.
“반도가 그리 쉽게 얻어지는 것인가?”
현리가 청조의 소매를 잡고 말했다.
“대정자, 수원대선께서 중매하였는데도 그러합니까?”
청조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주요가 중매했으면 정말 모를 일이기는 하네.”
그리고 온객행을 못마땅하다는 듯이 보고 말했다.
“어찌 뱀의 내자가 된다는 말인가?”
현리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돌렸다.
“대정자. 원군께서 이 아이를 어찌 하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까?”
청조가 고개를 흔들며 한숨을 쉬고 말했다.
“나도 잘 모르겠네. 발의 아이이니 원하면 천궁으로 들일 수는 있으나 과연 견딜 수 있을지….”
그리고 주자서를 보았다.

주자서가 고개를 들어 청조와 시선을 맞췄다. 청조가 주자서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말했다.
“사내라서 태양의 힘을 버티지 못 할 텐데.”
주자서가 손을 올려 공수하고 물었다.
“저에게 봉인된 이 힘을 다시 원군께서 거둘 수는 없는 것입니까?”
청조가 재미있다는 듯 입꼬리를 끌어 올리고 말했다.
“형평성에 맞지 않네. 원군께서 발의 힘을 갖게 되면 산천대제께서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현리가 부루퉁하게 말했다.
“산천대제께서 희첩 삼겠다고 하시겠지요 그 힘이 탐나서.”
청조가 고개를 끄덕이며 온객행을 보았다.
“그렇네. 탁음대선 제자의 내자인 편이 낫지.”
주자서가 잠시 생각하더니 물었다.
“탁음대선께서 발의 힘을 거두어 주실 수는 없습니까?”
청조가 놀란 듯 주자서를 한참 보더니 말했다.
“그 분께서 뭔가에 관심을 가지는 일이 있던가?”
온객행이 주자서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제자의 일이니 들어는 주실 겁니다.”
청조가 온객행을 보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
“버들개지가 퍽 마음에 든 모양이지?”
그리고 주자서를 보았다.

한참 주자서를 뚫어져라 보던 청조가 작게 탄식하며 말했다.
“너… 너는?”
그리고 고개를 휙 돌려 현리를 보았다. 현리가 어리둥절하여 청조를 보자 청조가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그럼 먼저 촉룡을 뵙고 태연으로 오게. 원군께 소식을 전하겠네.”
현리가 청조를 따라 일어나며 말했다.
“대정자, 오랜만에 오셨는데 어찌 그냥 가십니까? 제가 모은 것들을 봐주세요.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외실을 나가며 온객행에게 눈짓했다. 온객행이 고개를 작게 끄덕이고 주자서를 일으켜 공수하여 인사했다. 청조는 그 둘이 인사하는 것도 받지 않고 현리와 함께 외실을 나갔다.


온객행이 자리에 다시 앉아 찻물을 마시고 말했다.
“서왕모의 휘하에 있는 자들은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주자서가 온객행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찻잔을 들어 마시고 말했다.
“뱀의 내자….”
온객행이 의자를 좀 더 가깝게 옮겨 어깨가 닳을 만큼 붙어 앉은 뒤 말했다.
“뱀의 내자는 싫은가? 그럼 내가 사람에게 시집을 가볼까?”
주자서가 부스스 웃으며 말했다.
“온공자께서 제 처가 되시겠다고요?”
온객행이 주자서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고 물었다.
“정실로 맞아 줄 텐가?”
주자서는 온객행을 밀어내며 말했다.
“농은 그만하시오. 발의 힘을 옮기려면 어찌해야 하오?”
온객행이 주자서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말했다.
“글쎄….”

온객행은 주자서의 어깨에 기대어 있다가 말했다.
“자모하(子母河)의 샘물을 마셔볼까?”
주자서가 고개를 돌려 온객행을 보고 물었다.
“자모하?”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서량여국(西梁女國)에 가면 아이를 수태(受胎)할 수 있게 해주는 샘물이 있는데….”
주자서가 온객행의 손을 뿌리치고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요? 대체!”
온객행이 놀라서 주자서를 보고 말했다.
“그 물을 마시면 사내도 아이를 낳을 수 있다고….”
주자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온객행!”

온객행이 고개를 들어 일어난 주자서를 보고 눈썹을 늘어뜨리고 말했다.
“유서. 왜 그러나? 성내지 말게.”
주자서가 얼굴이 새빨개져서 온객행에게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지금 나 더러 아이를 낳으라는 것이오?”
온객행이 자신에게 뻗어진 손을 잡고 말했다.
“그대가 딸을 낳으면 발의 힘은 자연스럽게 그 아이에게….”
주자서가 온객행의 입을 막고 말했다.
“그만! 제발 그만하시오.”
온객행이 자신의 입을 막은 주자서의 손을 양손으로 잡고 주자서를 보았다. 주자서는 화를 삭이는 듯 얼굴을 잔뜩 구기고 눈을 감고 있었는데 온객행은 그 모습도 귀여워서 웃음이 나왔다. 주자서가 눈을 뜨고 자기를 쏘아보는 것도 좋았다.

온객행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주자서의 허리를 안고 그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주자서는 온객행의 입에서 손을 떼고 온객행의 어깨를 밀어냈다. 마침 온객행의 시선에 주자서의 목덜미에 난 잇자국이 보여서 온객행은 그곳에 또 입을 맞추고 낮게 웃었다. 주자서가 크게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차라리 희첩의 일을 하겠소. 아이를 낳으라니 미쳤소? 나는 사내요.”
온객행이 주자서를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
“사람은 사내면 아이를 못 낳는가?”
주자서는 온객행의 말에 맥이 빠져서 온객행이 하는 대로 그의 품에 힘을 쭉 빼고 기댔다.

“그대가 싫으면 내가 낳아주겠네. 아… 그러면 소용이 없나?”
온객행은 주자서의 목덜미에 뺨을 비볐다.
“내가 무엇이든 해주겠네. 그대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주자서가 온객행의 몸을 밀어내며 말했다.
“그럼 일단 좀 떨어지시오. 제발 다른 이가 있을 때는 이러지 마시오.”
온객행은 주자서를 더 꼭 안으며 말했다.
“지금은 다른 이가 없지 않은가?”
주자서가 온객행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더니 ‘하아’ 하고 깊게 한숨을 쉬고 고개를 흔들었다. 온객행이 주자서를 놓아주고 말했다.
“아. 밥을 먹어야지.”
온객행이 주자서의 손을 잡고 그를 밖으로 이끌며 말했다.
“유서. 오늘 두 번째 밥을 먹으러 갑시다.”
주자서는 온객행에게 소매가 붙들려 이리저리 휘둘려 부엌으로 향했다.

부엌에서는 음식을 준비하는 망상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는데 그들이 하는 음식은 대체로 달고 기름진 과자였다. 온객행이 망상이 하는 음식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말했다.
“우리 유서는 단 것을 좋아하지 않는데….”
구석에서 앉아있던 망상이 온객행에게 다가와 말했다.
“흑망공자님. 오늘은 탕을 준비했는데 객실에서 드시겠습니까?”
온객행이 망상이 들고 있는 도자기 냄비를 보고 말했다.
“좋습니다. 제가 가지고 가지요.”
망상은 냄비에 뚜껑을 덮고 말했다.
“반주향 정도 끓이시면 됩니다. 꿩고기로 경단을 만들어 넣었어요.”
온객행이 주자서를 불러 냄비를 들게 하고 소매에서 작은 함을 꺼내 망상에게 건네며 말했다.
“이것은 올해 태평호에서 새로 딴 연잎으로 만든 차인데 맛보시오.”
망상이 차 함을 받아서 들고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주인님께서는 쓴 차는 즐기지 않으셔서….”
온객행이 주변을 둘러보다 벽에 걸어 놓은 약초 중에 감초를 찾아 건네며 말했다.
“감초와도 아주 잘 어울립니다. 올해 만든 것이라 향이 좋으니 좋아할 거예요.”


둘은 객실로 돌아가 탕을 나누어 먹었다. 온객행이 먹은 식기를 치우려고 잠깐 부엌에 간 사이에 객실 안으로 청조와 현리가 들어왔다. 차를 마시고 있던 주자서가 자리에서 일어나 소매를 들어 공수했다. 청조는 객실을 둘러보더니 주자서를 보고 말했다.
“흑망은 어디 갔지?”
주자서가 고개를 숙이고 대답을 하지 않자 현리가 청조에게 자리를 권하며 말했다.
“버들개지 먹인다고 뭘 찾고 있겠죠. 아직 사람이라 챙겨줘야 하니까.”
청조가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 앉았다. 주자서는 마시던 차를 버리고 새로 물을 올린 뒤 온객행이 두고 나간 차 함에서 연잎차를 찻주전자에 담았다. 청조가 차를 내리는 주자서를 보고 말했다.
“어찌 사내가 된 것이지? 너의 운명은 분명 여인이었을 텐데.”
주자서가 청조를 보고 눈을 굴리며 말했다.
“사람인 제가 어찌 하늘이 하는 일을 알 수 있겠습니까?”
현리가 주자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대정자, 왜 그러시는데요?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청조가 작게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어찌 그에게 천강(天江)의 기운이 있는가?”
현리가 고개를 돌려 주자서를 보고 말했다.
“천강?”
기별도 없이 객실의 장지문이 열리고 온객행이 들어왔다.

온객행이 작은 대나무 바구니를 들어 올려 주자서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유서, 이 원병(圓餠)은 고기로 속을 채웠다고 하네. 하나….”
그리고 탁자에 앉아 있는 청조와 현리를 발견하고는 얼른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청조, 현리.”
청조는 온객행을 보고 ‘흥’하고 코웃음 친 후에 자리에서 일어나 객실을 나갔다. 현리가 청조를 따라 나가며 말했다.
“청조께서 가시니 어서 배웅하게.”
온객행은 들고 온 바구니를 탁자에 놓고 주자서의 소매를 잡아 현리를 뒤따르며 말했다.
“청조께 부탁드립니다. 부디 원군께서 우리 유서를….”
청조가 갑판으로 향하던 길을 멈추고 뒤돌아서 온객행을 보며 말했다.
“원군께 또 부탁을 하겠다는 것인가?”
온객행이 공수하고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제가 무례를 범했으니, 달게 벌을 받겠습니다.”
청조가 주자서를 위아래로 보고 말했다.
“이번에는 위협이 아니라 정말 부탁이 맞는가?”
온객행이 자리에 무릎을 꿇고 넙죽 엎드려서 말했다.
“저의 죄를 부디 저의 내자에게 지우지 마소서.”
주자서는 온객행이 하는 것을 보고 있다가 눈치를 보고 따라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청조는 ‘허’하고 헛웃음을 치고는 다시 몸을 돌려 갑판으로 향했다.

온객행은 고개를 살짝 들어 청조가 갑판 위로 올라가는 것을 확인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자서의 팔을 잡아 그도 일으켜 객실로 향했다. 주자서가 갑판을 보며 물었다.
“배웅하지 않아도 괜찮은 것이오?”
온객행이 자신의 장포와 주자서의 장포를 털며 말했다.
“방금 하지 않았소. 배웅. 청조는 남이 조아리는 것을 좋아하니 이 정도면 됐습니다.”
온객행이 객실로 돌아와 주자서에게 찻잔을 건네고 말했다.
“이제 곧 파(巴)에 도착하는데 유서는 그곳에 가본 적이 있습니까?”
주자서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 후 고개를 흔들었다. 온객행이 찻잔을 들어 입을 축이고 말했다.
“그 곳은 흐린 날이 많아서 제대로 구경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주자서가 표정을 구기며 말했다.
“구경? 우리가 지금 유람하는 중입니까?”
온객행이 찻잔을 쥔 주자서의 손을 잡고 말했다.
“뭐… 겸사겸사.”

주자서가 온객행의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촉룡께서는 발의 힘을 거두어 줄 수 있습니까?”
온객행이 주사서가 뿌리친 손을 아프다는 듯 쓰다듬으며 말했다.
“탁음대선께서는 지켜보는 것 말고는 관심이 없으셔서…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이고 또 한숨을 쉬었다. 온객행이 주자서에게 어깨를 붙이고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다 괜찮을 것입니다.”
주자서가 온객행을 흘겨보더니 부스스 웃어버렸다. 온객행이 주자서의 어깨에 팔을 둘러 안고 마주 보며 말했다.
“웃으니까 더 잘 생겼습니다.”
주자서가 온객행에게 몸을 기대며 말했다.
“이런 분인지 미처 몰랐습니다.”

온객행이 주자서를 빤히 보고 물었다.
“이런 분이라니…?”
주자서가 찻주전자를 들어 자신의 찻잔과 온객행의 찻잔을 새로 채우고 말했다.
“태평호에 계실 때는 좀 더 조용하지 않으셨습니까?”
온객행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내가 시끄럽습니까?”
주자서가 차를 마시고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
“그건… 아닌가?”
온객행이 주자서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고 말했다.
“한 갑자는 짧은 시간이니까 그 동안 잘해봅시다.”
주자서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희첩에서 부인으로 지위가 올랐으니 제가 뭘 드려야 합니까?”
온객행은 한동안 주자서를 빤히 보더니 말했다.
“마주 안아 주시오.”
주자서가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네?”
온객행이 주자서의 몸을 돌려 그를 끌어안고 말했다.
“밀어내지 말고, 마주 안아주시오.”
주자서는 가만히 안겨 있다가 팔을 들어서 온객행의 등을 감쌌다. 온객행은 주자서에게 더 안기고 싶어서 몸을 밀다가 의자 뒤로 넘어지는 주자서를 잡아주었다.

주자서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대의 무게는 내가 감당할 수 없으니 너무 기대지 마세요.”
온객행이 주자서를 다시 품에 끌어안으며 말했다.
“싫어요. 나는 울보라 기대고 싶어요.”
온객행의 어깨로 주자서가 끄덕이는 몸짓이 느껴졌다. 온객행은 그 작은 몸짓이 사랑스러워서 주자서를 더 가깝게 끌어안았다.
“유서.”
주자서가 낮게 웃으며 말했다.
“온공자께서는 정말 울보입니다. 그동안 어찌 참으셨습니까?”
온객행이 주자서의 어깨에 뺨을 비비고 말했다.
“안 참았소.”
주자서가 온객행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아상께서 달래 주었습니까?”
이번엔 주자서의 어깨로 온객행이 끄덕이는 몸짓이 느껴졌다. 주자서가 낮게 웃으며 말했다.
“여기에 모친이 안 계시니 이제 제가 부군을 달래야 하겠네요.”
온객행이 주자서의 호칭에 ‘하하하’하고 웃었다. 온객행이 웃는 소리가 좋아서 주자서도 같이 웃었다.


객실 밖에서 누군가 기별했다. 망상이 현리가 골라준 옷감을 지은 옷을 가지고 들어왔다. 주자서는 탁자 위에 놓인 푸른색의 옷감을 쓸어 보았다. 그동안 고상과 온객행이 주자서에게 입혀 주었던 옷은 대부분 비단이었다. 주자서는 비단을 입을 수 없는 신분은 아니었으나 신분을 숨기고 있는 신세인지라 형편이 여의치 못해 무명옷을 주로 입었다. 사분군에 들어오고 나서도 가슴 부분에 화살을 막기 위해 덧대는 비단이 아니면 구경하기 힘든 물건인데 평생 봐야 할 비단을 모두 모아 보는 것처럼 많았다. 주자서가 덮고 잔 이불도 아마 비단이었을 것이다. 주자서는 덮고 자던 이불을 만져보려고 침상으로 갔다. 침상 앞에 언제 가져다 놓았는지 병풍이 보인다. 온객행은 망상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옷 갈아입는 것을 도와주겠다는 그들을 얼른 객실 밖으로 내쫓았다. 온객행이 병풍 뒤에 침상에 가서 앉은 주자서를 부르며 말했다.
“유서. 이리로 와서 보게.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입어보시오.”

온객행은 제일 위에 놓인 푸른 장포를 들어 주자서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입어 보겠소?”
주자서가 웃으며 말했다.
“제 옷입니까? 온공자의 옷이 아닌가요?”
주자서가 온객행에게 다가가 그의 소매를 들고 물었다.
“이 옷은 이제 덥지 않으십니까?”
온객행이 파란 장포를 내려놓고 겉옷을 벗으며 말했다.
“그럼 이 옷으로 바꿔서 입을까요?”
주자서가 파란 장포를 들어 온객행이 옷 입는 것을 도왔다. 온객행이 장포를 입고 돌아서자 푸른색이었던 장포가 감색으로 짙어 졌다. 주자서가 온객행의 앞섶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강물 같습니다.”
온객행이 소매를 들어 보며 물었다.
“싫은가?”
주자서가 온객행을 보며 말했다.
“제가 입을 것도 아닌데 온공자 마음에 들어야지요.”
온객행이 웃으며 말했다.
“그대 마음에 들면 내 마음에도 드네.”
주자서는 온객행이 하는 말의 어디까지가 장난인지 점점 더 알 수가 없어 답답했다. 온객행의 말에 가슴이 울렁이는 것이 짜증 나면서도 싫지 않아서 궁색한 변명거리를 찾아야 했다. 주자서가 온객행의 시선을 피하며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다.

蛇苺 第12

金蟬脫殼 | 12. 매미가 허물을 벗다.

주자서는 객실로 돌아가 의자에 앉아 상황을 정리해 보았다. 형님께서도 모친께서도 기산에서 살았던 때의 이야기를 많이 하는 편은 아니었다. 주자서의 기억에도 남은 것이 별로 없다. 다만 기산에 살 때는 형편이 좋아 밥 굶는 일은 없었던 것 같다. 주자서는 고초를 겪고 계실 것이 뻔한 모친을 생각하자 한숨이 나왔다. 그러다 자신을 유서라고 부르는 또 다른 모친이 생각나 품속에서 고상이 주었던 꽃 비녀를 꺼내 보았다. 작은 붉은 구슬을 모아 만든 이 비녀는 꽃이라고 하기 보다는 열매 같았지만 고상처럼 작고 귀여웠다. ‘보통 모친을 표현하는 말로 작고 귀엽다는 말을 하지는 않겠지만….’ 그러다 주자서는 낙읍에 계신 모친을 기억할 만한 물건이 없다는 것이 슬퍼졌다.

“비록 시들어 버린다 해도 어찌 속을 상하겠는가? 거칠어진 꽃향기와 더러워진 꽃잎이 서러워서지.” (3)

모친께서 좋아하던 구절이다. 음을 붙여 노래하시기도 하고 가끔 금(琴)을 타시기도 했다. 금을 타는 것을 좋아하셨는데 그것도 형편이 여의치 못해 금을 팔아버려서 이제는 희미한 기억 속에만 남아있다. ‘모친께서 그 노래를 부르실 때마다 시들지 않았다고 거칠어지지도 더럽지도 않다고 말씀드려야 하는데….’ 이제 주자서가 없으니 누가 모친을 위로해 드릴까? 주자서는 울컥 치미는 그리움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온객행이 객실 안으로 들어와 주자서가 앉아 있는 의자 옆에 앉고 말했다.
“주공자. 시간이 늦었는데 어서 잠자리에 드시오.”
주자서는 온객행이 자신을 챙기는 것이 꼭 고상 같아서 기꺼우면서도 조금은 위로가 되었다. 주자서가 온객행을 보고 부스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온객행은 자연스럽게 일어난 주자서의 동다회를 풀고 장포를 받아 옷걸이에 걸었다. 내의 차림의 주자서가 신발을 벗고 침상 위로 올라갔다. 온객행이 이불을 펴서 주자서에게 덮어주었다. 주자서가 이불을 거절하며 말했다.
“날이 덥습니다.”
온객행이 다시 이불을 끌어 덮어주며 말했다.
“잊었는가? 따뜻하게 재워야 한다 했네.”
주자서가 온객행을 빤히 보고 물었다.
“온공자께서는 안 주무십니까?”
온객행이 얼굴을 붉히고 주자서의 시선을 피하며 물었다.
“그… 그건 무슨 뜻인가?”

주자서가 미간을 찌푸리고 온객행을 보다가 벌떡 일어나 온객행을 밀어내며 말했다.
“아니! 아니오. 그런 뜻이 아니라….”
온객행이 침상에 걸터앉아 주자서의 몸에 기대며 말했다.
“희첩의 일을 하겠다는….”
주자서가 침상 안쪽으로 몸을 옮기며 온객행의 말을 끊었다.
“아니오! 태평호에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주무시는 것을 보지 못해서 물은 것입니다.”
온객행이 주자서와 시선을 맞추고 말했다.
“나는 아주 덥거나 춥지 않으면 잠이 잘 오지 않아서….”
주자서가 온객행을 빤히 보며 말했다.
“그… 그날은 나를 안고 주무시지 않았소?”
그리고는 얼굴이 붉어져 고개를 숙였다. 온객행은 그 모습이 귀여워서 몸을 더 붙여 어깨를 감싸 안고 말했다.
“사람의 온기가 좋아서 그랬소.”
주자서가 자신의 어깨를 감싸 팔에 닿은 손을 만지며 말했다.
“정말 피부가 서늘합니다.”
고생은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매끈하고 고운 손이다. 주자서는 이런 기생오라비처럼 생긴 놈에게 어째서 힘으로 이길 수 없는지 한참 고민하며 손을 쓸었다. 검을 잡는 손도 아니고, 활을 잡는 손도 아니고 그렇다고 글을 쓰는 손도 아니다.

온객행은 주자서에게 잡힌 손으로 주자서의 손을 잡고 부스스 웃었다. ‘정말 귀엽다. 아서는 어땠더라…?’ 두사람은 침상에 앉아 서로에게 기대서 손을 만지작댔다. 온객행은 주자서가 하는 행동이 귀여워서 주자서는 온객행의 손을 관찰한다고 그렇게 했다. 서늘한 온객행의 체온에 주자서는 졸음이 쏟아졌다. 태평호에서의 호사스러운 생활 덕에 며칠 걸었다고 벌써 피곤했다. 곧 주자서의 체중이 온객행에게 기대오더니 주자서의 고개가 온객행의 어깨에 툭 닿았다.

온객행은 웃음이 나와서 낮게 웃고 주자서를 침상에 잘 눕혔다. 온객행은 편연주에 있는 동안은 꼭 하루에 세번 밥을 먹이고, 적어도 두 시진은 따뜻한 곳에 재우겠다고 생각했다. 그것 말고 또 고상이 뭐라고 말했던 것 같은데 잘 기억나지 않았다. ‘아! 사나흘에 한번은 씻겨줘야 한다고….’ 온객행이 주자서의 목덜미 있는 쪽에 고개를 묻고 숨을 들이켰다. 사람의 살내가 난다. 요괴에게 있어 맛있는 냄새라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온객행은 알 수 없었다.


온객행은 자리에서 일어나 객실을 나왔다. 객실 밖에서 속닥이고 있는 망상 몇을 쫓아내고 현리의 객실을 찾았다. 객실 앞에 서서 온객행이 말했다.
“현리. 흑망이 부탁이 있어서 왔네.”
한동안 조용하다가 장지문이 벌컥 열리고 현리가 나왔다. 현리는 온객행을 보더니 뒤로 물러나 그에게 들어오라고 고갯짓했다. 온객행이 장지문을 닫고 객실 안으로 들어오며 물었다.
“사람은 어떻게 씻기지?”
현리가 ‘허’하고 헛웃음 짓고 온객행에게 자리를 권했다. 온객행은 자리에 앉아 객실 안을 보았다. 늘어져 있던 옷들을 모두 정리했는지 내부가 깔끔했다. 온객행이 병풍 대신 화려하게 수놓은 장포가 걸린 옷걸이를 보고 말했다.
“우리 유서도 저런 것을 입히면 좋아할까?”
현리가 온객행의 어깨를 손으로 두드리며 말했다.
“희첩으로 들였으니 여인의 옷을 입히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온객행이 자리에서 일어나 옷걸이에 걸려 있는 옷을 만지며 물었다.
“이것은 여인의 옷이야?”
온객행은 팔을 들어 자기가 입고 있는 소매를 들어 현리에게 보여주며 물었다.
“혹 내가 입은 옷도 여인이 입은 옷 같은가?”
현리가 온객행을 보고 웃으며 물었다.
“갑자기 그것은 왜 묻는 것인가? 여태 잘 입어 놓고.”
온객행이 다시 자리에 앉아 현리를 보고 말했다.
“요즘 사내들은 뭘 입나? 사내 옷은 가진 것이 없나?”
현리는 자신의 모습을 치장하려고 하는 온객행이 재미있어서 장단을 맞춰 주었다.
“많지는 않지만 없지도 않지.”
현리는 장지문을 열어 객실 밖으로 손짓했다. 온객행이 객실을 나와 현리에게 말했다.
“요즘은 여인과 사내가 입는 옷이 다른가?”
현리가 소매로 입을 가리고 ‘호호호’ 웃으며 말했다.
“다르지. 많이 다르지.”
그리고 옷감을 보관하는 화물칸으로 향했다. 온객행은 계단을 내려가기 전에 주자서가 있는 객실 쪽을 힐끔 보았다.


주자서는 더워서 잠이 깼다. 객실 안에는 평상 뒤쪽에 있는 작은 창호 문이 전부였기 때문에 주자서는 이불을 걷고 일어나 평상으로 가서 누웠다. 갑판 위로 올라가서 강바람을 좀 맞으면 좋을 것 같은데 온객행에게 들었던 망상의 이야기가 생각나서 객실 밖으로 나가는 것이 조금 두려웠다. 온객행은 어디에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객실 밖에서 소리가 나면 흠칫 놀라서 깨기를 반복하자 잠이 오지 않았다. 온객행이라도 있으면 갑판에 나가 보자고 할 텐데.

주자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손바닥으로 얼굴을 부쳤다. 그러다 일어나서 창호 문이 있는 쪽에 걸터앉아 밖을 보았다. 비가 오면 조금 시원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끈적한 바람이 들어와 몸에 들러붙었다. 주자서는 차라리 강물 속에 있는 편이 시원하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바닥이 보이지 않는 시커먼 강물이 두려워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래도 조금 시원한 강바람에 주자서는 창호 문에 기대어 눈을 붙였다. 객실의 장지문을 벌컥 여는 소리에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주자서의 몸이 창호 문밖으로 기운 것은 주자서가 설핏 잠이 들었던 탓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어 ?’ 하는 사이에 몸이 뒤로 휙 넘어가 창호 문밖으로 떨어졌다. 뭘 잡을 새도 없이 주자서의 몸이 강물 속으로 ‘풍덩’ 빠졌다.

온객행은 주자서가 창호 문밖으로 몸을 던지는 것을 보고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다. 재빨리 창호 문으로 다가가서 강물로 훌쩍 뛰어 들어갔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온기를 금방 찾아 허우적대는 주자서의 허리를 잡아챘다. 주자서는 놀랐는지 온객행을 밀어내다가 물 밖으로 머리가 나오자 숨을 크게 헐떡이며 온객행을 보았다. 자신을 잡은 것이 온객행이라는 것을 알아본 주자서가 온객행의 목에 손을 둘러 걸고 온객행의 목덜미에 밭은 숨을 몰아쉬었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몸을 안아서 갑판 위로 올라왔다. 온객행이 주자서를 껴안고 말했다.
“유서. 왜 그랬어? 내가 같이 있어 주겠다고 했잖아.”
주자서가 숨을 고르고 뭔가 말하려다 작게 기침을 했다. 온객행이 주자서의 목덜미에 얼굴을 비비며 말했다.
“유서. 안돼. 가지 마.”
주자서가 기침을 다하고 온객행의 어깨에 손을 올려 그를 밀어내며 말했다.
“놀라서… 놀라서 빠진 것이오. 내가 어디를 간다는 말이오?”

온객행이 몸을 떼고 주자서의 몸을 여기저기 살펴보며 말했다.
“어디 다친 곳은 없는가? 고상이 유서는 수영을 못한다고 했는데….”
주자서가 온객행의 손길을 물리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옷이며 머리가 물에 젖어 꼴이 엉망이었다. 젖은 옷을 입고 있어서 조금 덜 더운 것 같기도 했다. 온객행은 무심결에 주자서의 옷에 묻은 물기를 흩어주려고 하다가 물에 젖어 그의 속살이 다 비치는 내의를 보고 정욕이 일었다. 가느다란 몸을 비추는 젖은 옷이 야살스러워 온객행이 주자서를 빤히 보며 얼굴을 붉혔다. 주자서는 아는지 모르는지 소맷자락과 옷자락을 들어 물기를 짰다. 옷자락이 들리는 곳의 주자서의 맨 살이 하얗다. 온객행은 자기도 모르게 ‘꿀꺽’하고 침을 삼켰다. 주자서가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너무 더워서 강물에 들어가면 좀 시원할까 하였는데 그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차라리 옷을 벗고 있던지 해야지….”
그리고는 앞섶의 옷고름을 풀려는 것을 온객행이 주자서의 손을 덥석 잡아서 막았다.
“유서! 이… 이곳에서는 좀….”

주자서가 고개를 들어 빨갛게 달아오른 온객행의 얼굴을 보았다. 그제야 온객행의 흥분한 기색을 눈치챈 주자서가 불에 덴 듯 온객행의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무슨!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이오?”
온객행이 조금은 아쉬운 듯한 눈치로 주자서의 물기를 흩고 자신이 입고 있던 장포를 주자서에게 둘러주며 말했다.
“일단 객실로 돌아가서….”
주자서는 자신에게 장포를 둘러주는 온객행의 눈에 흰자위가 없는 것을 보았다. 주자서가 손을 들어 온객행의 뺨에 붙이고 얼굴을 가까이 보며 말했다.
“온공자?”
온객행은 자신의 뺨에 올려진 손의 온기가 좋아서 눈을 감았다 뜨고 주자서를 보았다. 온객행의 눈을 올곧게 바라보는 그 시선이 좋아서 온객행은 주자서를 당겨 안고 입을 맞췄다. 주자서가 고개를 돌리려고 하기에 손을 들어 그의 턱을 쥐었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양손을 한손으로 쥐어 잡고 입술을 핥고 입안에서 뜨거운 살덩이를 찾아 핥고 빨았다. ‘맛있어. 이 치를 씹어 먹으면 맛있을까?’ 같은 생각하며 그의 입안을 희롱했다.

주자서는 온객행에게 잡힌 손을 빼려고 손목을 비틀었다. 자신에게 붙어오는 온객행의 다리를 발로 차며 온객행이 밀어붙이는 힘에 밀리다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온객행은 멈추지 않고 기다란 혀로 주자서의 입안을 구석구석 핥았다. 주자서는 점점 숨이 차서 몸에 힘이 빠졌다. 주자서가 밀어내는 것을 멈추고 몸이 축 늘어지자 온객행은 아쉽다는 듯 주자서를 놓아주었다. 온객행은 팔을 둘러 그를 껴안았다. 주자서는 온객행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주자서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오… 온객행!”
온객행은 주자서가 부르는 이름이 좋아서 부스스 웃고 대답했다.
“응.”
주자서는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왔다. 눈물이 많고 겁이 많아서 싫다더니 어쩌면 요괴들은 이런 음란한 행동을 아무나하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주자서가 고개를 숙이고 숨을 고르자 온객행이 주자서의 목덜미에 입술을 붙였다. 주자서가 몸을 떼고 팔을 들어 온객행의 얼굴을 밀며 말했다.
“그… 그만!”
온객행이 낮게 웃으며 주자서의 손목을 잡고 말했다.
“지금 내 것이라고 표식을 하는 중이니 조금 참아 주시오.”
주자서는 정말 무언가를 참아내듯이 몸을 굳히고 눈을 꼭 감았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목덜미를 핥고 빨다가 이를 세워서 ‘앙’ 물었다. 주자서가 펄쩍 어깨를 튀며 ‘아!’ 신음했다. 온객행은 또 웃음이 나와서 주자서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웃었다. 주자서가 작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사람은 먹지 않는다더니 어찌….”
온객행이 주자서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고 조금 더 웃은 뒤에 답했다.
“그대는 맛있을 것 같아서.”
주자서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온객행이 고개를 들고 주자서를 마주 보며 말했다.
“그래도 너무 말랐군. 살을 찌워서 먹어야 하겠어.”
그리고는 주자서의 팔이며 몸을 이리저리 만져보았다.

주자서가 온객행의 손을 피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대체 뭘 하는 건지….”
주자서가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희첩의 일은 할 마음이 없습니다. 애초에 나는 여인이….”
온객행이 주자서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나도 알고 있네. 그대가 여인이었으면 희첩으로 들이지도 않았어.”
주자서가 고개를 휙 돌려 온객행을 보았다. 주자서가 방금 온객행이 목덜미에 깨문 자국을 손으로 문지르며 물었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요?”
온객행이 주자서의 등허리에 손을 얹고 그를 객실로 안내하며 말했다.
“흠.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나는 사내를 좋아한다고?”
주자서가 자리에서 멈춰 온객행을 보고 물었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요?”
온객행이 귓속말을 하듯 주자서에게 얼굴을 붙이고 귓가에 ‘후’하고 바람을 불어넣었다.

주자서가 질색을 하며 온객행에게서 한발짝 떨어져서 말했다.
“무슨 뜻이오? 나를 희롱하겠다는 뜻이오?”
온객행이 다시 주자서에게 몸을 붙여 그를 객실로 이끌며 말했다.
“그대가 말하지 않았소? 희롱은 가서 나를 좋아하는 사람과 하라고.”
주자서가 표정을 구기며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내가 온공자를 좋아합니까?”
온객행이 눈썹을 늘어뜨리고 되물었다.
“그럼 싫은가?”
마침 갑판 위로 올라가는 망상이 온객행을 향해 인사했다. 주자서는 얼른 온객행 옆으로 가서 그의 소매를 잡고 몸을 붙였다. 온객행이 웃으며 주자서의 귓가에 속삭였다.
“싫은가?”
주자서는 뺨을 빨갛게 물들이더니 입을 달싹였다. 강물 위로 비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온객행이 주자서를 객실로 데려가며 말했다.
“아직 세 시진 동안 잠자지 않았으니 어서 가서 더 자게.”
주자서가 객실 앞에 있는 망상을 보고 온객행의 팔을 잡고 말했다.
“나는 희첩의 일은 하지 않을 것이오.”
온객행이 작게 코웃음 치고 객실 앞에 있는 망상에게 물러가라고 명령했다.

객실로 들어와 주자서는 온객행과 거리를 벌려 평상으로 갔다. 온객행은 평상 뒤에 열려 있는 주자서가 빠졌던 창호 문을 닫고 주자서의 팔을 잡아 그를 다시 침상 위에 올려놓고 말했다.
“유서. 아! 아니, 주공자.”
주자서가 자리에 누워 온객행을 올려보며 말했다.
“그냥 편한 데로 부르시오.”
온객행이 주자서를 마주 보고 웃으며 말했다.
“그럼 온부인이라고 부를까?”
주자서는 온객행이 덮어준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쓰고 등을 돌렸다. 온객행이 작게 웃고 말했다.
“다시 비가 오기 시작했으니 좀 더 자게. 아마 이 비는 오강(烏江)까지 우릴 따라올 모양이야.”
주자서에게 대답이 없다.

온객행이 침상에 걸터앉고 말했다.
“혹시 무서운 것이면….”
주자서가 이불을 내려서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지금 그대가 제일 무섭소.”
온객행이 주자서의 몸 위에 기대며 말했다.
“내가 무엇을 할 줄 알고 무섭다는 것이오?”
주자서가 침상 안쪽으로 몸을 옮기며 이불을 다시 뒤집어썼다. 온객행이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편히 주무시오. 아무도 이 방으로 오지 못할 테니.”
주자서가 이불을 내려 어깨너머로 온객행을 보고 물었다.
“그 ‘아무도’는 그대도 포함이오?”
온객행은 낮게 웃으며 고개를 흔들고 몸을 돌려 탁자 위에 올려놓은 함을 보았다. 현리가 온객행과 그의 희첩을 위해 화물칸에서 한참 찾은 옷들이다.


현리는 온객행의 덩치를 보고 불평했다. 몸이 크면 옷감이 많이 들어간다고 한참 생색을 내더니 무명과 아마포로 만든 천을 꺼내 보여주었다. 여름에 입는 옷이라며 한참 자랑하던 현리가 엷은 쪽빛의 장포를 온객행에게 대보더니 말했다.
“이제 그 시커먼 옷 좀 그만 입고 좀 산뜻하게 입어보게.”
온객행이 자신의 소매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검은 옷은 고급품이 아닌가?”
현리가 코웃음 치고 말했다.
“그렇네. 너도 의외로 사치를 좋아했었지?”
온객행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사치?”
현리가 온객행의 머리 위에 올려진 은으로 만든 관을 보고 말했다.
“정말 너무 구식이다.”
온객행이 표정을 구기며 현리의 손을 뿌리쳤다. 현리는 망상을 불러 꺼낸 옷감으로 옷을 짓게 했다. 이리저리 대보고 맞을 것 같은 비단옷 몇 개와 머리 장식이 들은 함도 건네주었다.

망상 하나가 다가와 온객행의 몸에 줄자를 대고 이리저리 재 보았다. 현리가 온객행에게 말했다.
“너의 애첩은 어떡할까?”
온객행이 손에 들린 함을 옆에 있는 탁자 위에 올려놓고 팔을 앞으로 내밀어 앞에 있는 사람을 안는 것처럼 하고 말했다.
“이 정도였던 것 같은데?”
현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냥 네 옷 입혀.”
온객행이 팔을 내리고 현리에게 받은 함을 들고 말했다.
“그는 조금 작아.”
현리가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그는 사람 치고 크네.”
온객행이 현리를 보고 놀란 듯이 말했다.
“그가 크다고?”
현리가 온객행을 화물칸 밖으로 안내하며 말했다.
“그래. 나보다 다섯 치(寸)는 큰 것 같던데.”
온객행이 갸우뚱하며 함을 이리저리 들고 말했다.
“그런가? 그는 이렇게 한 품에….”
현리가 온객행을 올려보며 좀 질렸다는 기색으로 말했다.
“온객행. 정말로 그 사람을 좋아하려고?”
온객행이 현리를 보고 말했다.
“왜? 먼저 다가가는 것도 방법이라며.”
현리가 온객행 얼굴을 빤히 보다가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겨우 한 갑자인데 괜찮겠어?”
온객행이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리고 말했다.
“그러네. 한 갑자. 한 갑자는 정말 짧다.”

온객행은 현리에게서 받아온 옷을 객실 안에 있는 함에 정리하고 옷걸이에 옷을 몇 개 걸어 놓았다. 현리가 그의 몸에 대어 보았던 엷은 쪽빛 장포도 걸었다. 온객행은 밝은 색의 옷을 입어 본 적도 없고, 더워서 아마포로 만든 천으로 만든 옷을 입어 본 적도 없다. 까슬까슬하고 뻣뻣하다. 금세 구겨지는 것이 평소에 입던 옷감과는 확실히 다르다. 온객행은 낯설어서 조금 망설이다가 옷을 갈아입는 것을 그만두었다.


요괴가 입는 옷은 보통 요괴의 본래 모습과 비슷한 모습으로 변하기 때문에 검은색이 섞인 색은 어차피 어둡고 칙칙하다는 소리밖에 들을 수 없다. 온객행도 현리처럼 한때 모습을 치장하는 것을 즐겼었는데 그때 어떤 이유로 치장하는 것을 멈추었는지 잊었다. 너무 까마득해서 그랬었나 싶을 정도다. 온객행은 현리에게 받은 머리 장식이 들은 함을 열어 구경하다가 밖에서 나는 기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온객행이 다가가 장지문을 열자 망상이 소반에 음식을 가지고 서 있었다. 온객행이 망상에게서 소반을 받아 들고 말했다.
“고맙습니다. 시중은 필요 없으니 가서 일 보십시오.”
망상은 힐끔 객실 안을 보다가 곧 소매를 들어 인사했다. 온객행은 선반을 탁상 위에 올려놓고 얼른 가서 장지문을 닫았다.

침상에 누워 있는 주자서가 훤히 보이는 것이 싫어서 온객행은 평상 뒤에 있던 병풍을 침상 앞에 세워 놓았다. 온객행이 병풍을 옮기는 소리에 주자서가 몸을 뒤척였다. 온객행이 주자서를 불렀다.
“유서. 아니 주공자. 일어나서 요기하세요.”
온객행이 마음에 드는 위치에 병풍을 세워놓고 침상에 걸터앉아 주자서의 어깨를 잡고 가볍게 흔들었다.
“주공자. 어서 일어나세요. 세 번 밥을 먹어야지요.”
주자서가 어깨에 올려진 손을 치우기 위해 손을 들었다. 주자서의 손목이 빨갛게 쓸려 있었다. 온객행이 놀라서 주자서의 손목을 잡고 작게 탄식했다.
“아! 어찌?”
그러다 갑판 위에서 주자서가 온객행을 뿌리치려고 몸부림치던 것이 생각났다. 주자서는 잡힌 손목이 불편한지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더니 돌아 누워 온객행을 보았다.

온객행이 주자서의 손목을 붙들고 울상이 되어있다. 주자서가 놀라서 물었다.
“온공자?”
주자서가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온객행은 반대쪽 손목도 손에 잡고 말했다.
“아… 미안… 미안하네.”
주자서는 그제야 자기 손목이 쓸린 것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걱정 마시오.”
온객행이 주자서의 손을 놓아주고 말했다.
“나… 나 때문에….”
주자서가 온객행이 놓는 손을 다시 잡고 말했다.
“온공자.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오. 그대는 내가 화살에 맞아 사경을 헤매는 것도 보지 않았소?”
온객행이 눈꼬리에 눈물을 달고 주자서를 보고 말했다.
“사람은 정말… 사람은 너무 쉽게 죽어.”
주자서가 표정을 구기며 말했다.
“아직 죽지 않았으니 그만하시오.”
그리고 손을 들어 흐르지 않은 온객행의 눈가를 쓸었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위로가 기꺼워 또 그를 와락 안아버렸다. 주자서와 함께 있으면 온객행은 종종 아니 꽤 자주 그를 품에 안고 싶어진다. 아무도 볼 수 없게. 온객행 혼자서만 보고 만질 수 있게.

주자서는 온객행의 등에 손을 올려 토닥이며 말했다.
“나에게 눈물이 많다더니….”
그리고 피식 웃었다. 온객행이 주자서를 놓아주고 주자서의 손을 다시 잡고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의 눈은 칠흑같이 새카맣다. 온객행이 ‘후’하고 숨을 불어넣자 주자서의 손에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붉은 자국이 사라졌다. 주자서가 온객행을 보고 작게 웃으며 말했다.
“고작 이런 일에 영력을 쓰셔도 괜찮겠습니까?”
온객행이 주자서를 마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아상 보다야 내 영력이 더 많으니 걱정 마시오.”

주자서가 온객행의 손에서 손을 빼고 말했다.
“그러니 다음부터… 아니, 다시는 그러지 마시오.”
온객행이 주자서가 있던 손이 아쉬워서 손바닥을 접었다 펴며 말했다.
“무엇을 말이오?”
그러다 왜 주자서의 손목에 그런 자국이 남았는지 떠올랐다. 온객행이 고개를 들어 주자서를 보자 주자서의 얼굴과 목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온객행은 무의식에 주자서의 목덜미로 손을 뻗어 어제 자기가 물었던 자국을 문질렀다. 빨갛게 물든 잇자국도 지워버릴까 하다가 그냥 두었다. 주자서는 서늘한 온객행의 손이 목덜미에 닿자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려 온객행을 마주 보았다. 온객행의 눈은 칠흑같이 새카맣다.


(3) 굴원 이소(離騷) 어려움을 만나다
雖萎絶其亦何傷兮 哀衆芳之蕪穢
비록 시들어 버린다 해도 어찌 속을 상하겠는가?
거칠어진 꽃향기와 더러워진 꽃잎이 서러워서지.

蛇苺 第11

借尸還魂 | 11. 죽은 영혼이 몸을 빌어 부활하다.

주자서는 다음 날 아침까지 눈을 뜨지 못했다. 현리가 맥을 짚을 줄 아는 망상(罔象)을 시켜 맥을 짚어 보았지만 딱히 아픈 것도 아니었다. 온객행은 안절부절못하며 현리를 닦달했다. 현리는 표정을 구기고 온객행을 보며 말했다.
“대체 왜 이렇게 법석을 떠는 거야? 누가 보면 정말 애첩이라도 되는 줄 알겠네.”
온객행이 주자서를 보던 시선을 돌려 현리를 쏘아보며 말했다.
“무슨 뜻인가?”
현리가 부루퉁한 얼굴로 주자서의 가슴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이 아이는 너의 그 하얀 연꽃보다는 강한 것 같으니 걱정 마시게.”
온객행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객실을 나가 버렸다.

주자서는 아침나절이 거의 다 지난 오시 즈음에 눈을 떴다. 목이 말라 자리에서 일어나 물을 찾았다. 객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주자서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찻주전자를 찾았다. 작게 한숨을 쉬고 객실의 장지문을 향하는데 곧 온객행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주자서가 온객행에게 뭔가 말하려고 입을 열었다. 온객행은 주자서에게 성큼 다가가 다짜고짜 와락 껴안았다. 당황한 주자서가 온객행의 어깨를 밀며 말했다.
“이게… 이게 무슨 짓이오?”
온객행이 주자서의 어깨에 고개를 묻고 말했다.
“유서. 정말 죽은 줄 알았어.”
주자서는 눈을 굴리며 말했다.
“그리 쉽게 죽지 않소.”
온객행이 고개를 흔들고 말했다.
“아니야. 사람은 너무 쉽게 죽어.”
주자서가 한숨을 쉬고 팔을 들어 온객행의 등을 쓸며 말했다.
“한 갑자는 살아 보려고 노력해보겠습니다.”
온객행이 주자서를 놓아주고 얼굴을 마주 보며 말했다.
“한 갑자는 너무 짧다.”
온객행의 얼굴이 너무 울상이라 주자서는 말을 잇지 못했다.

온객행이 주자서를 의자에 앉히고 화로에 물 주전자를 올리고 말했다.
“앉아 있게. 밖에 비가 와서 날이 추우니 옷을 입는 것이 좋겠네.”
주자서가 자신이 입은 내의를 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옷을 찾았다. 온객행이 침상 옆에 있는 옷걸이에서 장포를 꺼내 들었다. 주자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온객행이 해주는 시중을 받았다. 소매에 팔을 끼우고 앞섶을 교차시켜 요대를 둘렀다. 온객행이 동다회를 가지고 와 묶어주며 말했다.
“유서. 정말 내 희첩이 될 생각은 없어?”
주자서가 한참 온객행이 끈을 묶는 것을 보다가 한발짝 뒤로 물러 서며 말했다. 주자서는 고개를 숙이고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리듯 말했다.
“무슨 뜻이오? 나는 겁이 많아서 싫다고 하지 않았소.”
온객행이 빨개진 주자서의 얼굴을 보고 말했다.
“겁이 많으면 달래주면 될 일이고. 나는 괜찮소. 조금 귀여울지도.”
온객행의 말에 주자서가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그리고 온객행이 주자서를 보고 웃었다.

주자서는 얼굴을 구기며 고개를 흔들었다. 온객행이 부루퉁한 표정을 짖고 물었다.
“그럼… 현리의 희첩이 되겠소?”
온객행은 주자서의 옷 앞섶을 쓸어 정리해주고 그를 의자에 앉혔다. 막 끓은 물을 찻주전자에 옮겨 담고 온객행이 말했다.
“일단 누군가의 희첩이 되면….”
주자서가 고개를 흔들고 온객행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그냥 호칭이 희첩이 되는 것이오? 아니면… 아니면….”
온객행이 주자서의 손에 찻잔을 들려주고 찻주전자를 들고 말했다.
“아니면?”
주자서는 다시 얼굴이 새빨개져서 말을 더듬었다.
“그… 그… 희첩의 일도 해야 하는 것이오?”
온객행이 주자서의 찻잔에 차를 따르며 말했다.
“희첩의 일? 희첩의 일이 뭐지?”
주자서가 찻잔으로 입을 축이고 입을 달싹일 뿐 말이 없었다. 객실 안으로 현리가 들어오며 말했다.
“희첩의 일이 무엇이겠어 잠자리 일이지.”
온객행이 고개를 돌려 현리를 보았다. 현리의 말에 주자서는 찻잔을 내려놓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의 귀 끝이 빨갛다.

현리 뒤에 망상이 소반에 음식을 들고 들어왔다. 현리가 손짓하자 망상은 탁자 위에 음식을 두고 객실을 나갔다. 온객행이 주자서에게 말했다.
“희첩이 되면 희첩의 일도 하려구?”
주자서는 눈을 슬며시 들어서 온객행을 보더니 다시 손에 들린 찻잔을 보고 대답하지 않았다. 현리가 자리에 앉아 내려놓은 음식을 젓가락으로 집어 주자서 앞에 있는 앞접시에 올려놓고 말했다.
“유서. 밤일이라면 흑망보다는….”
온객행이 현리에게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자예! 제발. 그런 얘기는….”
현리가 주자서를 보고 활짝 웃으며 말했다.
“저렇게 부끄러워하니까 더 놀리고 싶잖아.”
온객행이 현리를 쏘아보며 말했다.
“괜한 얘기할 거면 나가서 일 보시게.”
온객행은 주자서의 안색을 살폈다. 현리가 음식을 집어먹고 한참 씹어 삼키더니 말했다.
“너는 천궁에 갈 수 있잖아. 가기 싫어서 안 가는 것뿐이지.”
온객행이 현리를 무시하고 주자서에게 말했다.
“꼭 희첩의 일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네. 그래도 일단 탁음대선께 여쭤보고 괜찮다고 하시면….”

현리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희첩이 아니라 정실로 들이게?”
온객행이 현리를 노려보며 말했다.
“자예.”
현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발의 후손이면 희첩은 좀 그렇지.”
온객행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현리의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자예. 오늘은 할 일이 없는가? 오늘 입은 옷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으니 가서 갈아입는 게 좋겠네.”
현리가 온객행의 손을 뿌리치고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말했다.
“뭐? 안 어울린다고?”
온객행이 현리의 머리 장식을 가리키며 말했다.
“머리 장식과 잘 안 어울리는 것 같아.”
현리가 소매를 들어 입은 옷을 살펴보더니 말했다.
“확실히… 날이 더워지니까 이제 붉은색은 그만 입어야 하겠어.”
온객행이 객실의 장지문을 열어 현리를 밀어 내보내며 말했다.
“꼭 입지 말란 법은 없네! 자색이나 분홍색은 어떠한가?”
현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객실을 나갔다.
“맞아. 자색도 나쁘지 않을 것 같군.”
온객행은 현리가 나가자마자 장지문을 닫고 다시 탁상으로 가서 ‘휴’ 하고 한숨을 쉬고 앉았다.

주자서는 닫힌 객실 문과 온객행을 보고 눈을 굴리더니 젓가락을 들어 음식을 집었다. 주자서는 음식을 몇 개 집어먹어 보더니 곧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온객행이 찬을 집어 그의 앞접시에 놓아주며 말했다.
“그대의 정체가 밝혀지기 전까지는 누군가의 비호(庇護)를 받는 것이 안전하여 그러하네.”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온객행은 음식을 더 집어 주자서의 앞접시에 올려놓고 말했다.
“더 드시오.”
주자서가 작게 고개를 흔들고 말했다.
“괜찮습니다. 배고프지 않습니다.”
온객행이 주자서의 앞접시에 올려 놓으려고 했던 음식을 자기 입으로 가져가 먹어보며 말했다.
“음… 확실히… 유서는 어떤 음식을 좋아하나?”
주자서가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
“음식을 가려서 먹을 만큼의 형편인 적이 없어서….”
온객행이 눈썹을 늘어뜨리고 주자서를 보며 말했다.
“유서….”

둘은 말없이 차를 조금 마시다가 음식을 담았던 식기를 소반에 정리했다. 온객행은 물 주전자에 물을 채워 화로에 올려 두고 소반을 들고 객실을 나왔다. 현리가 말한 대로 확실히 온객행은 원하면 삼원(三垣; 천궁)으로 갈 수 있는 영력을 가졌다. 지금 상황으로 미루어 봤을 때 섣불리 봉인을 풀었다가 힘을 봉인하고 있는 유서의 몸이 어떻게 될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황룡이 아니라 발을 찾아야 한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탁음대선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계곤산을 찾아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온객행은 음식이 거의 다 남아있는 소반을 내려놓고 부엌에 있는 망상에게 물었다.
“이 음식은 누가 만든 것이오?”
망상이 손을 모아 공수하고 대답했다.
“모두 저희가 만들었습니다. 입에 맞지 않으셨습니까?”
온객행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아니오. 아주 맛이 좋았소. 단지 단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있으니 그의 몫을 조금 만들어서 내가 머무는 객실로 가져다줄 수 있겠소?”
망상이 소매로 입을 가리고 웃으며 말했다.
“사람이요? 주인께서 데려온 아이입니까?”
온객행이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니오. 내가 데려온 아이요.”
망상이 다시 소매를 들어 인사하고 말했다.
“무례를 범했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흑망공자.

온객행은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돌려 부엌을 나오려다 다시 망상에게 물었다.
“현리가 사람을 종종 데리고 옵니까?”
망상이 소매를 들어 붉어진 얼굴을 가리고 말했다.
“주인께서는 정인을 두는 것을 좋아하시니까요.”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소?”
망상이 소매를 내리고 말했다.
“주인께서 데려온 아이들은 주인께서 볼일이 끝나면 저희가 먹습니다.”
온객행이 멈칫하고 주변을 보았다. 망상은 물에 사는 귀신으로 사람을 유혹해서 먹는다. 그들을 하인으로 쓰려면 계속해서 그들을 먹일 사람이 필요했을 것이다. 온객행이 다급하게 덧붙였다.
“나의 객실에 있는 사람은 나의 희첩이니 먹으면 아니 되오.”
망상이 고개를 들어 온객행을 빤히 보고 물었다.
“사람을 희첩으로 들이셨습니까?”
옆에 있던 망상도 온객행을 이상한 눈으로 보았다. 온객행이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아… 그렇소. 그렇게 되었소. 그는 현리가 데려온 사내가 아니니 조심해주시오. 부탁드립니다.”
망상은 서로를 보고 한참 웅성거리더니 온객행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온객행은 객실에서 나와 현리를 찾았다.

현리는 갑판의 선미 바로 아래에 있는 가장 큰 객실을 사용한다. 온객행이 기별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현리가 거의 헐벗은 모습으로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흑망! 여인의 방에 기별도 없이 이게 무슨 무례인가?”
온객행이 얼른 장지문을 닫고 현리에게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유서를 희첩 삼겠다는 것이 망상의 밥을 준다는 뜻이었소?”
방안은 현리가 이리저리 널어놓은 옷들로 가득했다. 현리가 온객행의 주변에 있는 푸른빛이 도는 장포를 걸치고 말했다.
“망상은 오래 못 살잖소. 나는 우리 아이들과 백년해로 하고 싶은데.”
온객행이 현리를 보고 말했다.
“정인이라니! 사람들을 데려다 무슨 짓을 하는 것이오?”
현리가 면경이 있는 서안으로 가서 패물이 들어있는 함에서 머리 장식을 고르며 말했다.
“그들은 모두 갚을 수 없을 만큼 큰 빚을 진 자들이오. 목숨으로 갚았으니 오히려 내가 손해 아닌가?”

온객행이 탁상 옆에 있는 의자에 옷을 치우고 털썩 앉으며 말했다.
“유서는 나의 희첩이니 건드리지 마시오.”
현리가 피식 웃으며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퍽이나 그 사람이 마음에 들었나 봐? 그가 하얀 연꽃 대신이야?”
온객행이 얼굴을 구기며 말했다.
“자예. 그만하게. 그는 이미 죽었어. 그 누구도 누군가를 대신할 수는 없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장지문을 열었다. 현리가 온객행을 따라 나와 말했다.
“온객행. 아주 잘 알고 있네. 방금 그대가 한 말을 잊지 말게. 그는 이미 죽었어.”
현리는 온객행의 품속에서 검영에게 받은 작은 함을 꺼냈다. 함을 온객행의 눈앞에서 흔들더니 말했다.
“사람이 난 자리는 사람으로 채우는 것이라고,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더군.”
온객행은 고개를 돌려 작게 한숨을 내쉬고 객실을 나갔다.

현리는 방금 온객행에게서 빼앗은 함을 열어보았다. 아주 작은 진주 두 개. 천시원(天市垣)에서 산 별이다. 이 것을 나누어 가지고 있으면 죽어서 같은 별이 된다고 한다. 정말 그런 것인지 아닌지는 모른다. 현리는 함에 담긴 진주를 쓸어 보았다. 조금 차갑고 텅 비어 아무런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는 이것은 아마도 죽은 별일 것이다. 온객행은 주고 싶은 이가 없어서 쓸 수 없고, 현리는 주고 싶은 이가 너무 많아서 쓸 수 없다. 현리는 함을 닫아 방금까지 온객행이 앉아 있던 자리에 놓았다. 온객행의 하얀 연꽃이 그를 위해 몸을 던진 곳은 은하수(銀河水)였다. ‘바보같이….’ 현리는 작게 코웃음 쳤다. 하지만 어쩌면 조금은 부러웠을지도 모르겠다.


객실 앞 장지문에 서서 한참 생각을 정리하다 문을 열었다. 들어가서 보이는 곳에 주자서가 없어서 온객행이 작은 목소리로 그를 찾았다.
“유서?”
살짝 열린 창호 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습하고 차다. 비가 오는 장강에서 부는 바람은 차가웠다. 온객행이 다가가 창호 문을 닫고 객실을 나가 주자서를 찾았다. 주자서는 갑판에 있는 누각의 난간에 기대어 장강을 보고 있었다. 온객행이 입고 있던 장포를 벗어 주자서에게 둘러주며 말했다.
“유서. 바람이 차네.”
주자서가 온객행의 장포를 거절하며 말했다.
“더워서 나왔소. 이제 곧 유월인데 화로라니….”
온객행이 장포를 다시 둘러 입고 말했다.
“그럼 차를 어디에 끓인다는 말이오?”
주자서가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난간에 기대서 한참 장강을 보았다.

온객행이 말했다.
“현리가 부리는 수하들은 모두 사람을 먹으니 조심하는 것이 좋겠소.”
주자서가 고개를 휙 돌려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뭐요?”
온객행이 주자서를 마주 보며 말했다.
“망상은 사람을 먹는 물귀신이니 조심하시오.”
주자서가 온객행에게 몸을 붙이며 물었다.
“먹는다는 것이 대체 무슨 뜻이오?”
온객행이 붙어오는 주자서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정말 말 그대로 먹는다는 것이오. 그들은 사람을 먹지 않으면 말라 죽는다 하니.”
주자서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겁을 먹은 모습이 귀여워 온객행은 주자서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부스스 웃었다. 주자서가 온객행의 얼굴을 손으로 밀며 말했다.
“무슨 짓이오.”
온객행이 주자서의 손목을 잡고 그의 손을 치우며 말했다.
“나의 희첩이라고 말해 두었으니 괜찮을 거요.”
주자서가 온객행에게서 몸을 물리며 말했다.
“그것은 나에게 희첩의 일을 하라는 것이오?”
온객행이 주자서의 허리를 안고 말했다.
“희첩의 일이라….”
주자서는 벗어나기 위해 조금 더 몸부림을 쳤다.

온객행이 놔주지 않자 주자서는 오히려 힘을 축 늘어뜨리고 온객행에게 기댔다. 온객행은 그 몸짓이 기꺼워 웃음이 나왔다. 주자서가 말했다.
“나는 잘 모르겠소. 지금 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온객행이 주자서를 더 가깝게 끌어안으며 말했다.
“여기 같이 있으니 아마 죽지는 않았을 것이오.”
온객행은 눈앞에 보이는 주자서의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별 생각 없이 한 행동이지만 묘하게 충족감이 차올라 조금 더 핥고 빨았다. 따뜻한 주자서의 체온에 입술이 홧홧했다. 주자서가 몸을 굳히자 온객행이 말했다.
“지금 내 것이라고 표식을 하는 중이니 조금 참아 주시오.”
주자서는 소름이 돋아 몸을 부르르 떨었다. 온객행이 하는 행위 때문인지 낮은 그의 목소리 때문인지 주자서는 알 수 없었다.

난간에 붙어서 남들이 보기에 명확하게 희롱하는 꼴인 두사람을 발견한 현리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너무 오래 봉인되어 있어서 발정기라도 온 거야?”
현리의 목소리에 고개만 돌려서 현리를 본 온객행이 주자서를 자기 몸으로 가리며 말했다.
“내 희첩으로 삼기로 했으니 상관 말게.”
주자서가 온객행의 어깨를 밀며 말했다.
“노… 놓아주시오.”
온객행은 조금 아쉬워서 빨갛게 달아오른 주자서의 귓가에도 입을 맞추고 놓아주었다. 주자서는 온객행이 놓아주자 소매를 높게 들어 붉은 얼굴을 가리고 현리에게 인사했다.
“현리낭자.”
현리가 주자서에게 다가와서 ‘킁킁’하고 냄새를 맡더니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정말 발정기가 온 거야?”
온객행이 얼굴을 구기며 말했다.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쓸데없는 소리 하려면….”
현리가 손을 들어 온객행의 말을 막고 주자서를 보았다. 주자서는 고개를 푹 숙이고 발끝을 보고 있었다.

현리가 고개를 숙여 주자서와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발의 후손이라구?”
주자서가 놀라서 펄쩍 뛰며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서 공수했다. 현리가 물었다.
“어디 출신인가?”
온객행이 주자서의 소매를 잡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자예. 먼저 사과부터 하시게. 다짜고짜 영력을 쓰는 법이 어디 있나? 게다가 이 치는 영력도 없는데.”
주자서가 온객행 옆에 바짝 다가가 서며 말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하문하소서.”
현리가 고개를 기울여 주자서를 보며 말했다.
“좀 마음에 드는데?”
온객행이 주자서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말했다.
“그러지 말게. 우리 유서는 겁이 많고 다정해서 잘 속는다고 내가 말하지 않았나.”
현리가 온객행을 쏘아보며 말했다.
“겁이 많은 것 치고는 담담하네. 여기가 망상 소굴인 것을 알고도 태연하게 뱃놀이를 하는 것을 보면.”
그 말에 주자서가 온객행의 소매를 잡았다. 온객행은 내색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겠지만 현리는 그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흥’하고 코웃음 친 현리가 누각에 있는 평상에 가서 앉았다.

현리가 평상 양옆에 있는 의자를 권했지만 온객행은 주자서만 의자에 앉히고 옆에 찰싹 붙어서 현리를 노려보았다. 현리가 주자서에게 물었다.
“어디 출신인가?”
주자서가 양손을 모아 공수하려고 하자 현리가 손을 들어 그를 멈추고 말했다.
“예를 거두게.”
주자서는 고개를 끄덕이고 답했다.
“사례(司隸) 낙읍 출신입니다.”
현리가 고개를 흔들었다. 온객행이 말했다.
“그는 기산(岐山) 주가(周家)요.”
현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기산… 계곤산을 그렇게도 부르지.”
현리는 주자서를 잠시 보다가 말했다.
“어째서 모친의 성을 쓰시오?”
주자서가 고개를 숙이고 대답을 못하자 온객행이 주자서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다 그런 사정이 있어서 그러하오. 그의 모친은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 하였소. 그대가 말해준 것이 사실이라면 발의 후손은 모두 사람일 것이 아니오.”
현리가 말했다.
“그대의 모친은….”
온객행이 현리의 말을 자르고 말했다.
“아무래도 나는 탁음대선께 가서 여쭐 테니 그대는 금모원군께 가보는 것은 어떠 하오?”
현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원군께는 벌써 서신을 보냈으니 곧 기별이 올 것입니다.”
온객행이 고개를 흔들고 말했다.
“수원대선께서 이 일이 산천대제께 알려지면 곤란한 일이 생길 것이라고….”
현리가 온객행을 빤히 보며 말했다.
“이제 그대의 희첩이 아니오. 별로 상관없지 않나?”

주자서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말했다.
“나는 원군이니 대선이니 요괴니 하는 것을 잘 모르오. 하지만 지금 나에게 벌어지는 일에 대해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온객행과 현리를 보았다. 주자서가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나는 황제의 딸인 발의 후손인데, 발의 후손은 원래 모두 여인인 것이오?”
온객행이 주자서에게서 손을 떼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주자서가 고개를 돌려 현리를 보고 물었다.
“현리낭자께서는 저를 왜 도우십니까?”
주자서의 질문에 현리가 허탈하게 웃으며 답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대체 무슨 상관이라고.”
온객행이 주자서의 소매를 잡고 말했다.
“유서, 그대의 몸에 발의 영력이 봉인되어 있네. 그래서 고상의 피를 그렇게 많이 먹었는데도 잘 낫지 않았던 걸세. 발의 영력이 다른 영력을 밀어내고 있어서.”
주자서가 표정을 구기며 말했다.
“나는 유서가 아니오. 기산의 주가 자서요.”
온객행이 입을 달싹이다 말했다.
“그래 자서. 알겠네. 그렇게 부르겠네. 모두 말해주겠네. 성내지 말게.”

현리가 온객행이 하는 모습을 보고 ‘하’하고 코웃음 치며 말했다.
“사람이 성내는 것이 뭐 무서운 일이라고.”
온객행이 현리를 노려보며 말했다.
“이건 우리 두 내외의 일이니 삼자는 상관 말게.”
온객행의 말에 주자서와 현리가 동시에 온객행을 향해 고개를 돌려 얼굴을 구겼다. 주자서가 온객행이 잡은 소매를 뿌리치고 말했다.
“황룡을 찾는 것은 어찌 된 것입니까?”
현리가 대답했다.
“황룡을 찾으면 온객행보다 더 괴팍하고 못된 요괴의 희첩이 될지도 모를 일이오.”
주자서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온공자보다 더?”
주자서의 말에 현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대는 흑망의 과거를 모르오? 그대를 애지중지하는 이 모습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호호호”
주자서가 온객행을 보고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애지중지?”
온객행이 눈썹을 축 늘어뜨리고 주자서를 보며 말했다.
“비록 내가 세 번 밥을 먹이진 않았으나 따듯하게 잘 재워주지 않았소?”
주자서는 맥이 풀려서 다시 자리에 털썩 앉았다. 온객행은 다시 앉은 주자서의 곁에 서서 그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앞으로는 내가 밥도 잘 먹여 줄 테니 너무 성내지 말게.”
주자서는 고개를 들어 온객행을 보고 ‘허’하고 헛웃음 쳤다.

현리가 말했다.
“모친은 낙읍에 계시는가?”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낙읍 남쪽에 태곡관으로 들어가는 성문 밖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살았다. 사람의 이동이 항상 많은 곳이라 여러 가지의 일자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주자서의 부친께서는 환란에 참소를 당하여 역모의 죄를 뒤집어쓰게 되어 모친의 성을 쓰게 되었지만 솔직히 주자서의 기억에 부친은 없다. 너무 오래된 일이기도 하고 그가 모친과 재종형제를 따라 낙읍으로 왔을 때 주자서는 겨우 예닐곱살 먹은 어린 아이였다. 모친은 고된 일을 하시면서 형님과 주자서의 학업을 도울 정도로 박식하고 슬기로운 여인이었다. 형님께서 처와 당질을 데리고 낙읍에서 도망치려고 하지만 않았다면 아마 주자서도 사분군으로 끌려 나와 전장에 있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지금은 언제라도 징병을 피할 수는 없었겠다고 생각한다.

현리가 조금 생각하더니 말했다.
“이미 주자서의 몸에 발의 영력이 깃들었다면 발은 이미 죽었으니 찾아도 소용없겠군.”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주요가 유서의 몸에서, 아니 주공자의 봉인을 건드렸을 때 피를 토했다고 했네. 아마 힘을 봉인한 서왕모를 찾아뵙는 것이 맞는 것 같네.”
현리가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어차피 종화산이나 태연이나 지척에 있으니 먼저 촉룡을 뵙고 갔으면 좋겠는데….”
온객행이 주자서에게 물었다.
“자서는 어떻게 하고 싶나?”
주자서는 대답 없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온객행이 주자서 앞에 쪼그리고 앉아 주자서의 손을 붙잡고 그를 올려보며 말했다.
“자서. 왜 그러나? 어디 아픈가?”
주자서가 손을 빼려고 하자 온객행이 손을 더 꽉 잡고 말했다.
“어디 불편한 곳이라도 있는가?”
주자서는 미간을 찡그리더니 말했다.
“그대가 제일 불편하오.”
온객행은 주자서의 말에 입을 달싹이다가 울상을 만들고 말했다.
“나는 사람을 먹지 않는데….”
그리고 어깨너머로 현리를 보았다. 현리가 온객행과 시선을 맞추면서 말했다.
“침상에서 뒹구는 것도 먹는 것으로 치면야….”
온객행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현리에게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자예. 제발 그런 얘기는 보통 남들과 하지 않네.”
현리가 주자서를 보고 물었다.
“정말 사내들끼리 정을 통하는 법에 대해 궁금하지 않은가?”
주자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말없이 갑판 아래로 내려갔다. 온객행이 현리를 쏘아보며 주자서의 뒤를 쫓았다.
“주공자! 주공자!”

蛇苺 第10

偸梁換柱 | 10. 대들보를 훔치고 기둥을 빼낸다.

매미 날개 같이 얇은 옷을 입은 여인들이 낮은 탁상과 포단을 가지고 나왔다. 현리가 앉아 있는 평상 옆에 자리를 만들더니 주자서와 온객행에게 권했다. 곧 탁상 위로 여러 가지 과일과 음식이 나왔다. 온객행이 미간을 찌푸리며 현리를 보고 말했다.
“이런 취미가 있었던가?”
현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온객행 쪽으로 걸어가 탁상 위에 올려진 음식을 집어 입에 넣고는 말했다.
“나도 정말 의미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사람들은 정말 맛있는 걸 먹더라구.”
온객행이 방금 현리가 집어먹은 음식을 젓가락으로 집어 입에 넣었다. 계화 향이 나는 작은 떡은 꿀과 설탕에 절였는지 매우 달았다. 온객행이 음식을 씹어 삼킨 후에 말했다.
“유서는 단 것을 안 좋아하는데….”
현리가 온객행을 보고 눈썹을 찌푸리더니 어깨너머로 온객행을 마주 보고 앉아 있는 주자서를 보았다. 옆에서 시중을 들어주는 여인들에게 손을 내밀어 한사코 거절을 하고 겨우 차를 마시고 있었다. 현리가 ‘흥’하고 코웃음 친 후에 다시 평상으로 가서 앉았다.

온객행과 주자서 옆에서 시중을 드는 여인들을 손짓으로 물러가게 하고 탁상에 올려져 있는 포도를 먹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흑망 그대는 어디 봉인되어 있지 않았나? 오랜만이네.”
온객행이 차로 입을 축이고 말했다.
“그러게. 별고 없었는가?”
현리가 포도를 한 알 더 먹고 말했다.
“비단을 입을 수 있는 신분을 정했더라고. 그걸 없애려고 내가 얼마를 썼는 줄 알아?”
온객행이 소매를 들어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을 보았다. 조금 오래되기는 했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옷은 대부분 비단이었다.
“신분?”
현리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뭍에 나가지 못하는 것은 조금 아쉽지만 그래도 편연주는 충분히 넓으니까.”
온객행이 주변을 둘러보고 말했다.
“그러게. 이렇게 큰 배는 나라에 허가가 필요하다 하던데….”
온객행이 주자서를 힐끔 보았다. 주자서는 얼굴이 빨개져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온객행이 다시 현리를 보았다. 속살이 훤히 비치는 얇은 옷에 다리가 전부 드러나 있는 모습은 확실히 사람의 잣대로 보기에는 조금 야살스러워 보였다.

온객행이 부스스 웃고 말했다.
“현리. 작은 배로 고생하느라 좀 피곤한데.”
현리가 포도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온객행에게 다가와 말했다.
“피곤하다구? 대체 그 작은 배에서 물길이 바뀌는 것도 모르고 뭘 했길래?”
그리고 어깨너머로 주자서를 힐끔 보더니 말했다.
“혹시 내가 너의 여흥을 방해한 것인가?”
온객행이 표정을 구겼다. 온객행은 사담을 좋아하는 현리가 예전부터 껄끄러웠다. 남의 사정에 대해 이것저것 캐는 것을 좋아하는 현리는 온객행과 비슷한 시기에 동정호에서 태어난 파사이다. 서왕모의 눈에 띄어 자예라는 이름을 얻고 홍호(洪湖)에서 영력을 쌓기 시작한 그녀의 원래 모습은 거대하고 오색 빛을 띄는 검은 뱀이다.

온객행이 고개를 흔들며 작게 웃자 현리가 시선을 돌려 온객행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애지중지 아끼다가 만져보지도 못하고 보내지 말고 손에 쥐었을 때 취하라는 말이야.”
온객행이 고개를 돌려 못마땅하게 코웃음 치자 현리가 돌아서 주자서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유서라고 했던가?”
온객행이 자리에서 얼른 일어나 현리의 팔을 잡고 말했다.
“자예. 그만하게.”
현리가 온객행의 팔을 뿌리치고 주자서 앞에 앉아 그를 보고 말했다.
“영력이 있네? 왜 숨겨 놓았지?”
온객행이 현리의 팔을 잡아 일으키며 말했다.
“자예.”
현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온객행.”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리는 자신이 부리는 망상(罔象)을 시켜 주자서를 객실로 안내하게 했다.


주자서는 눈을 둘 곳이 없는 옷을 입은 여인의 안내로 객실 안으로 들어왔다. 여인은 화로에 불을 붙이고 찻주전자를 올려놓고 시중을 들려고 하기에 주자서가 등을 돌린 채로 손을 내젓고 사양했다. 여인은 주자서에게 공손히 인사하고 장지문을 닫고 나갔다. 주자서는 힘이 쭉 빠져서 탁자 곁에 가서 앉았다. 끓어오른 물을 찻주전자에 담고 기다렸다.
“희첩?”
주자서는 고개를 갸웃하고 생각했다. ‘희첩에 내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뜻이 있는 것인가? 나는 사내인데 어찌 다른 사내의 희첩이 된다는 말인가?’

그러다 예전에 읽었던 미자하(彌子瑕)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소년이 나이가 들어 총애가 시들자 군주(君主)는 과거의 죄를 끄집어내 극형에 처했다. (餘桃之罪; 여도지죄) 군주의 마음이란 하루에도 수백 수천 번씩 바뀐다는 내용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참소를 당해 돌아가셨다던 부친께서 알고 계셨을까?’ 주자서는 자신의 처지가 어찌 미자하와 같을까 생각했다. 그는 소년도 아니었고 온객행에게 총애를 받지도 바라지도 않았다. 당장 온객행이 그를 버리고 훌쩍 떠난다면 주자서는 군법을 어긴 도망병일 뿐이니 어쩌면 그 처지가 더 참혹하다. 주자서는 찻잔을 들어 향을 맡았다. 생차(生茶)의 향이 난다. 하지만 맛이 조금 부드럽고 달다.

주자서는 객실을 이리저리 둘러보다 평상 뒤쪽에 작은 창호 문을 발견했다. 그 문을 여니 밖으로 장강의 수면이 보였다. 이제 막 날이 밝아 오기 시작하는지 물안개가 자욱하다. 오던 비는 그쳤는데 하늘에는 아직도 구름이 많다. 온객행이 빌린다던 구름 마차가 저 위에 있을까 싶어서 주자서는 피식 웃었다. 창에 걸터앉아 물안개가 걷히면서 보이는 것들을 찾았다. 저 멀리 악양성(岳陽城)의 포구가 희미하게 보였다. 근처에 줄지어 대어진 배가 잔잔한 물결에 출렁인다. 얼마나 차를 마셨을까 곧 방 안으로 누군가가 들어왔다.


태평호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하는 내내 현리는 주요의 이야기보다 온객행이 데려온 주자서에 대해 더 알고 싶은 모양이었다. 무엇이 재미있는지 실실 웃으면서 그에게 둘의 잠자리의 사정을 물어왔다. 대체 그런 것이 왜 궁금한지 알고 싶지 않았다. 온객행은 얼굴에 열이 올라 방안에 들어오자마자 물을 찾았다. 마침 탁상 위에 찻주전자가 있기에 거기 든 찻물을 얼른 따라 마셨다. 살짝 식은 차는 아주 맛이 좋았다. 그것이 또 마음에 들지 않아 온객행은 찻잔을 탁상 위에 ‘탁’ 소리가 나게 올려 두고 ‘쯧’ 하고 혀를 찼다. 주자서가 창호문 쪽에 있는 병풍 뒤에서 찻잔을 들고나와 온객행 앞에 앉으며 물었다.
“나는 온공자의 희첩입니까?”
온객행은 주자서를 보고 현리가 했던 입에 담을 수 없는 음란한 말들이 떠올라서 얼굴이 빨개졌다. 온객행은 무언가 말하려고 입을 달싹이다가 찻물을 더 따라 마셨다.

온객행이 한참 뜸을 들이다 말했다.
“현리가 부탁한 물건이 있어서 악양의 북쪽인 성릉기(城陵矶)에 잠시 들를 것이오.”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이고 병풍 너머로 보이는 장강을 보았다. 온객행이 주자서를 따라 시선을 돌려 창호문 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보았다.
“오늘은 오후에 다시 비가 올 테니, 배에서 내릴 것이라면 말씀하시오. 동행하겠소.”
주자서가 시선을 온객행에게 옮겨 말했다.
“그럴 것 없습니다.”
온객행이 고개를 흔들고 말했다.
“현리에게 붙잡히는 것보다 포구를 구경하는 것이 낫습니다.”
주자서가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붙잡히는…?”
온객행이 몸서리를 치며 말했다.
“현리는 남의 정사(情事)에 아주 관심이 많소.”
주자서가 얼굴을 조금 더 구기고 말했다.
“저…정사?”
주자서가 온객행에게 물었다.
“누구의…?”
온객행이 본인과 주자서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자서가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말했다.
“희첩이 그 희첩이란 뜻이오?”
온객행이 차로 입을 축이고 말했다.
“그럼 희첩에 또 무슨 다른 뜻이 있소?”
주자서가 온객행에게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어찌… 어찌! 어찌!”
온객행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시오. 내가 말하지 않았소. 나는 겁이 많은 사람은….”
주자서가 팔을 뻗어 온객행의 말을 끊고 말했다.
“그만. 제발 그만하시오.”

온객행이 뻗어진 주자서의 팔을 잡아 자리에 앉히고 말했다.
“일단 희첩인 것으로 합시다. 그래야 영력이 있는 것도 이상하지 않고 탁음대선을 뵈러 가는 것도 이상하지 않을 테니.”
주자서가 온객행의 팔을 뿌리치고 말했다.
“나는 사내에게 관심이 없소.”
온객행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것은 아직 사내를 못 만나봐서 그런 것 아니오?”
주자서가 팔로 몸을 감싸며 말했다.
“그게 무슨 뜻이오?”
온객행이 주자서에게 얼굴을 붙이고 귓가에 속삭였다.
“아무 뜻도 없소. 무슨 뜻이 있었으면 하시오?”
주자서가 온객행에게 조금 멀어지며 눈치를 보자 온객행이 부스스 웃었다.


정오가 되기 전에 편연주는 성릉기 부두에 도착해 닻을 내려 접안(接岸)했다. 주자서와 온객행이 있던 갑판 바로 아래의 객실이 있는 층에서 포구로 다리를 내려 연결해 두었다. 객실이 있는 층 아래에도 사람이 있었는지 하인들이 하나둘 나와서 짐을 꺼내 들고 선창(船艙)으로 내려갔다. 온객행은 밖으로 나가기 전에 소매에서 봇짐을 꺼내 주자서의 옷을 바꿔 입혔다.

전에는 벗기면 벗기는 대로 입히면 입히는 대로 가만히 있던 주자서가 옷을 받아 병풍 뒤로 가서 손을 내젓고 말했다.
“알아서 입을 수 있으니 괘념치 마시오.”
온객행이 주자서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이제 와서 무슨 내외를 하시오? 이미 다 보았는데.”
주자서가 고개를 휙 돌려 온객행을 쏘아보며 말했다.
“무엇을 다 보았다는 것이오!”
온객행이 양손을 들고 흔들며 말했다.
“성내지 마시오. 농이었소. 천천히 갈아입고 나오시오. 나는 먼저 선창으로 내려갈 테니.”
주자서가 작게 혀를 차고 말했다.
“희롱은 가서 온공자 좋다는 사람과 하시오.”
온객행은 주자서의 말에 낮게 웃으며 객실을 나갔다.

온객행은 선창에 서서 편연주에서 내리는 물건을 보고 갑판의 난간에 기대어 온객행에게 손을 흔들고 있는 현리를 보았다. 하인들이 내리는 짐들 안에는 이런 것을 사람과 거래해도 괜찮을 것일까 싶은 걱정스러운 물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음식이나 의복에 관련된 물품이었다. 온객행이 마지못해 현리를 향해 소매를 흔들자 현리가 소리쳤다.
“칠석에 좋아하는 사람이랑 능각(菱殼; 마름열매)을 먹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 하네! 내가 너를 위해 특별히 주문해 두었어!”
온객행이 헛웃음을 치고 시선을 돌리다 마침 배에서 나오는 주자서와 눈이 마주쳤다.

온객행은 혹시 현리가 하는 말을 들었을까 주자서의 안색을 살폈다. 주자서는 온객행이 입던 얇은 무명으로 만든 푸른색의 장포를 입고 검은색 요대를 쪽빛 동다회(童多繪)로 고정했다. 요패가 없는 것이 아쉬워 온객행은 장포 안에 손을 집어넣어 고상이 챙겨준 요패 하나를 꺼내 주자서의 요대에 달아 주었다. 백동(白銅)으로 만든 작은 그릇 안에 연잎을 넣어 놓았는지 연잎 향이 났다. 검은 술이 달린 요패는 주자서랑 퍽 어울려서 온객행은 주자서를 보고 웃었다. 주자서는 요대에 달린 백동으로 만든 작은 함을 만져보더니 손을 들어 향을 맡고는 미소 지었다.

두사람은 선창에서 나와 상점이 있는 부둣가로 나왔다. 짐을 옮기고 싣는 사람이 많아 주자서는 자연스럽게 온객행의 팔을 잡았다. 사람들을 빠져나와 시장에 다다르자 주자서는 온객행을 잡아 세우고 품에서 은정과 금주가 든 염낭을 건네주며 말했다.
“딱히 집을 살 것이 아니면 염낭은 꺼내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온객행은 주자서가 주는 염낭을 받아 소매에 넣고 말했다.
“나는 딱히 필요한 물건이 없으니 걱정 마시오.”
온객행은 주자서의 소매를 잡아 그를 시장으로 이끌며 말했다.
“나는 구경하는 것을 아주 좋아하니 나는 상관치 말고 일 보시오.”
주자서는 미곡상(米穀商)이 있는 거리를 여기저기 둘러보더니 노점에서 찐쌀을 한 되(升)를 샀다. 주자서는 무게를 가늠해 보고 나서야 상인에게 동전을 세어 건넸다. 평소라면 10문 정도인 찐쌀의 가격이 20문도 넘는다. 온객행은 주자서에게 건넨 찐쌀을 받아 소매에 넣었다. 주자서가 온객행을 힐끔 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말린 연실(蓮實; 연밥)과 우두(芋頭; 토란)도 샀다.

온객행이 주자서가 산 자루를 소매에 넣으며 말했다.
“유서. 현리가 설마 우리를 굶기기라도 할 것 같은가?”
주자서가 작게 고개를 흔들고 말했다.
“고상은 매일 밥을 먹지 않아도 된다고 한 것 같은데 그것은 온공자나 현리낭자도 마찬가지 아니오?”
온객행은 주자서가 현리를 부르는 호칭에 ‘하하하’ 하고 웃고 말았다. 현리를 아는 신선이나 요괴 중에 현리를 ‘낭자(娘子)’라고 부를 만한 이는 없다. 부인(婦人)이면 몰라도. 주자서는 온객행을 한참 쏘아보더니 다시 포구로 향했다. 온객행은 얼른 주자서의 소매를 붙들어 그를 멈춰 세우고 말했다.
“하하하. 유서. 여기까지 왔으니 요기라도 하고 가세.”
온객행은 주자서의 등허리에 손을 얹고 그를 주루가 있는 거리로 안내했다. 주자서는 부루퉁한 표정을 지었지만 온객행의 손길을 거절하지는 않았다.


다시 편연주로 돌아왔을 때 하인들은 편연주 안으로 많은 짐을 싣고 있었다. 꿩과 오리 같은 가금류(家禽類)도 있었는데 온객행이 새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현리가 우리를 굶기지는 않을 걸세.”
주자서가 고개를 들어 갑판을 보았다. 온객행도 따라서 위를 보았지만 난간에는 아무도 없었다. 둘은 선창에 연결된 다리를 건너 승선했다. 주자서는 전에 안내받았던 객실 쪽으로 몸을 틀었는데 온객행이 주자서의 소매를 잡아 갑판으로 이끌었다. 주자서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현리낭자께서는 항상 그런 차림이신가?”
온객행이 주자서를 힐끔 보고 물었다.
“그런 차림이라니?”
주자서가 작게 혀를 차고 고개를 흔들었다. 온객행은 주자서를 빤히 보다가 말했다.
“내가 소개할 때도 말해 주었지만 그녀도 나와 같이 검은 뱀… 아니, 교룡이네.”
주자서가 몸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그대처럼 집채만 한가?”
온객행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가 집채만 한가?”
주자서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온객행이 주자서의 소매를 놓아주고 고개를 돌려 갑판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며 말했다.
“내가 집채만 하면, 그녀는 산만 하네.”
주자서가 온객행의 뒤통수를 쏘아보며 말했다.
“참으로 괴팍하오. 어찌 여인에게 그런….”

현리가 불쑥 갑판으로 올라오는 계단 난간에 기대며 말했다.
“맞아. 흑망. 정말 괴팍하다. 산만 하다고?”
온객행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자예. 들었는가?”
온객행이 갑판에 올라서자 현리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보았다. 온객행이 양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틀린 말인가? 내가 겨우 집채만 한데….”
현리가 고개를 돌려 온객행 뒤에 올라오는 주자서의 소매를 잡고 말했다.
“유서라고 했던가? 너는 정말 다정하구나. 어디 정말 잘 속는지 볼까?”
그리고 주자서를 보는 현리의 눈은 온통 검은색이었다. 주자서가 ‘하’하고 작게 숨을 들이켜고 현리의 품으로 쓰러졌다. 온객행이 현리의 품에 안긴 주자서의 팔을 잡고 말했다.
“유서!”
현리가 온객행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편연주 안에서 내가 모르는 일이 있으면 안되지.”
온객행이 주자서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자예! 이게 무슨 짓인가!”
현리가 순순히 주자서를 내어주며 말했다.
“정인이라고? 흑망. 그새 내가 누구인지 잊었어?”
온객행이 바닥에 앉아 주자서의 얼굴을 쓸었다.

주자서는 편연주의 갑판 위에서 갑자기 안개가 자욱한 숲길에 서 있다. 어떻게 그리로 왔는지 그곳이 어디인지 왜 왔는지 기억나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주자서는 주위를 둘러보다 사람이 다니는 작은 길을 발견하여 정처 없이 길을 따라 걸었다. 그러다 길 끝에 하얀 옷을 입은 남자를 만났다. 남자는 주자서를 슬픈 얼굴로 보더니 손짓했다. 주자서는 다가가고 싶었지만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얀 옷을 입은 남자는 한참 주자서에게 입을 벙긋거렸다. 무언가 말하고 있는 듯하였으나 들리지 않았다. 남자가 고개를 숙이고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 그가 뒤로 돌아서 떠나려고 하자 그제야 발이 떨어졌다. 주자서는 그 남자를 부르며 안개 속을 달렸지만 주자서는 아무도 찾을 수 없었다. 점점 머리 위가 밝아지며 점멸하더니 온 세상이 새하얗게 바랬다.

온객행은 주자서를 객실의 침상에 옮겨 눕히고 뒤따라 들어온 현리를 보았다.
“이게 정말 무슨 짓인가?”
현리가 누워 있는 주자서를 보고 말했다.
“이… 이 아이는?”
온객행이 한숨 쉬며 말했다.
“때가 되면 말하려고 했네. 이렇게까지 해야 했는가?”
현리가 침상에 걸터앉아 주자서의 가슴에 손을 올렸다.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자 곧 주자서 주변을 검은 연기가 몰려왔다. 주자서의 몸에서 영력이 조금씩 새어 나오더니 현리의 영력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현리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정말… 오랜만이네.”
온객행이 현리에게 물었다.
“발을 만난 적이 있어?”
현리가 주자서의 몸에서 손을 떼고 온객행을 보며 말했다.
“이자는 사내가 아닌가?”
현리의 검은 눈이 점점 사람의 눈으로 변하는 것을 본 온객행이 주자서의 발치에 앉아 말했다.
“주요도 같은 말을 했어.”
현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수원대선이라면 보이셨겠지. 너는 봉인이 풀린 지 얼마 안 돼서 그렇고.”
온객행이 현리에게 물었다.
“혹 후토대선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가?”

현리가 잠시 고개를 갸웃하더니 물었다.
“후토대선은 왜?”
온객행이 주자서를 보고 말했다.
“주요는 이 치를 후토대선께 데려다줘야 한다고 하셨어.”
현리가 ‘흥’하고 코웃음 치고 말했다.
“황룡께 가봐야 관심도 없을 텐데. 차라리 발을 찾는 것이 낫지.”
온객행이 현리를 마주 보자 현리가 일어나며 말했다.
“자신의 죄를 짊어지고 가뭄 귀신이 된 딸을 찾아서 뭣하겠어. 게다가 황룡은 천궁에서 쫓겨났잖아. 자기 몸 하나 간수하는 것도 버거울 텐데 이런 혹을 데려다주면 어디 시집보낸다는 소리나 나오겠지.”

온객행이 주자서를 보고 말했다.
“사내는 싫다던데….”
현리가 온객행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너도 퍽 다정해졌네.”
온객행이 현리를 보고 물었다.
“무슨 짓을 한 거야?”
현리가 객실의 장지문을 열고 말했다.
“흑망. 그대는 내가 환영의 도술을 쓰는 것을 잊었나?”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는 뭘 보게 되는 건가?”
현리가 주자서를 보고 말했다.
“뭐라도 볼 수 있을까 모르겠네. 발의 영력이 이렇게 틀어 막고 있는데. 어쩌다 사내가 된 거지?”
온객행이 표정을 구기자 현리가 답했다.
“발을 계속 계곤산에 가둬 둘 수는 없잖아. 그녀가 치러야 할 죗값이 아닌데.”
현리는 주자서를 보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발은 정말 오랜 시간 동안 계곤산에서 나오지 않았다. 외로움을 견디다 더 참지 못하고 산을 내려왔을 때, 사람들은 그녀를 가뭄 귀신이라 부르며 물러나길 바라는 제사를 지냈다. 그녀는 가신 하나 없이 그렇게 계곤산에 갇혀 있었다. 천녀였던 그녀는 하늘로 올라가기 위해 계속해서 수련했지만 외로움으로 마음에 병을 얻은 그녀는 종국에는 자신이 누구인지도 기억하지 못하는 요괴가 되고 말았다. 그런 그녀를 금모원군인 서왕모가 발견하고 그녀의 영력을 거둬 사람으로 살게 해주었다.

금모원군은 그녀가 계곤산에 갇혀 있었던 동안만큼의 시간을 발에게 약속하고 그 시간이 지나면 발을 데리러 오겠다고 말하고 떠났다. 금모원군이 다시 발을 찾아갔을 때, 발은 이미 죽고 그녀의 딸이 금모원군에게 자비를 청했다. 발이 사람이 되어 낳은 딸에게 영력을 되돌려줄 수 없었던 금모원군은 발의 후손의 몸에 그녀의 영력을 봉인해 두었다. 어머니에게서 딸로, 딸에게서 또 딸로 발의 능력은 멈추지 않는 양기였기 때문에 발처럼 그녀의 힘을 통제할 수 있는 후손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던 것이다. 현리는 금모원군이 태양의 힘을 봉인하는 것을 보았다.


현리가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사람들이 그녀를 가뭄 귀신이라 불렀네.”
온객행이 고개를 숙였다. 현리가 말했다.
“전쟁의 신 치우(蚩尤)를 죽인 것은 천궁의 모두가 공헌이라 칭하는 일인데도 그녀는 사람들에게 가뭄 귀신이라 불렸네. 하늘로 올라가지도 못하는 그녀를 내버려 둔 것은 그녀의 아비 황제(黃帝) 황룡이네.”
황룡은 사신과 오룡의 수장이 되려고 설치다 당시 현무였던 현천상제(玄天上帝)를 죽이고 사람들의 세상으로 쫓겨났다. 후에 사람들의 왕이 되어 그들의 후손이 사람의 세상을 채웠다. 현리가 웃으며 말했다.
“자기 죗값은 결국 어떻게든 치르게 되어있어.”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그럼 이 치를 어쩌지?”

현리가 온객행을 물끄러미 보더니 말했다.
“정말 희첩으로 삼지 그러나? 이 치를 희첩 삼으면 사방신 자리 정도는 하나 꿰차지 않겠나?”
온객행이 코웃음 치고 말했다.
“자예. 그대야 말로 잊은 것인가? 내가 탁음대선의 제자인 것을?”
현리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주자서를 보고 말했다.
“사내는 싫어한다고…?”
온객행이 눈썹을 찌푸리고 현리를 보자 현리가 말했다.
“아깝지 않은가? 물론 나는 승천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온객행이 주자서의 얼굴에 흘러내린 머리를 정리하며 말했다.
“사실 황룡에게 데려다주어도 소용없을 것 같기는 했네. 이 치는 어쩌면 천궁으로 가야 할지도 모르겠어.”
현리가 온객행을 보고 씨익 웃으며 말했다.
“내가 희첩으로 삼으면 어떤가?”
온객행이 고개를 획 돌려 현리를 보고 말했다.
“그… 그건… 좀….”

현리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온객행. 애지중지 아끼다가 만져보지도 못하고 보내지 말고 손에 쥐었을 때 취하라는 말이야. 사람은 한 갑자를 겨우 살아내지 그중에 겨우 절반 정도만 침상에서 데리고 뒹굴 수 있다고. 어찌나 연약하고….”
온객행이 현리에게 다가가 입을 막으며 말했다.
“자예. 제발. 그런 얘기는 보통 남들과 하지 않네.”
현리가 온객행의 손을 치우며 말했다.
“그러니까! 사내끼리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온객행이 현리의 입을 막고 그녀를 장지문 밖으로 밀며 말했다.
“그런 얘기라면 그대의 하인인 망상들과 하게.”
현리가 장지문을 닫으려는 온객행의 손을 잡고 말했다.
“온객행. 이번에는 너무 늦지 않게 먼저 다가가는 것도 방법이네.”
온객행이 현리의 손을 뿌리치고 장지문을 닫았다. 온객행은 영견을 찾아 물을 묻혀 침상으로 가서 주자서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현리의 환영은 보통 두 시진을 넘기지 않는다. 온객행은 내심 주자서가 환영 속에서 무엇을 찾을지 기대 되었다.

蛇苺 第9

美人計 | 9. 아름다운 여자를 이용하라.

작은 나룻배에는 온객행과 주자서 그리고 상인 몇 명이 타고 있었다. 선미(船尾) 부근에 있는 의자에 앉아 온객행은 장강(長江)을 보았고 주자서는 배에 탄 사람들을 경계했다. 그러다 주자서는 뱃삯으로 줄 돈이 없다는 것이 생각났다. 배에 타기 전에 확인했어야 하는데 그들의 옷차림을 보고 뱃사공이 확인도 하지 않은 것이다. 주자서가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을 눈치챈 온객행이 주자서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왜 그러시오?”
주자서가 고개를 돌려 온객행의 귓가에 속삭였다.
“혹 돈을 가지고 계시오?”
온객행이 몸을 세워 주자서를 보고 눈을 굴리더니 소매 춤에 손을 넣었다. 한참 휘적거리더니 작은 염낭을 꺼내 주자서에게 건넸다.

주자서는 염낭을 받아 열어 보았다. 안에는 작은 은정(銀錠)과 금주(金珠)가 들어있다. 주자서는 깜짝 놀라 염낭을 다시 닫아 온객행의 품속에 넣으며 말했다.
“이런 것 말고 동전은 없소? 두 사람이 탔으니 이문(二文; 20푼) 정도면 될 텐데….”
온객행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자 주자서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온객행이 뱃사공을 보고 말했다.
“많이 주면 좋은 것이 아니오?”
주자서가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혼란스러운 시기에 갑자기 돈이 많이 생기면 간자(間者)라는 의심만 사지요.”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동전(銅錢)이라면 동으로 만든 것을 말하는 것이오?”
주자서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온객행이 다시 소매에 손을 넣고 한참 휘적거리더니 백동(白銅)으로 만든 작은 면경을 꺼냈다. 주자서가 미간을 찌푸리며 온객행과 온객행의 소매를 번갈아 보자 온객행이 웃으며 말했다.
“부유각에 있는 물건은 대부분 가져올 수 있소.”
주자서가 온객행 손에 있는 백동 면경을 손에 들어보고 그 무게를 가늠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배가 하구에 닿아 선창에 배를 댔다. 사람들은 하나둘 내리면서 뱃사공에게 뱃삯을 치렀다. 주자서와 온객행은 제일 마지막에 내렸다. 온객행이 먼저 내리고 주자서가 뱃사공에게 면경을 내밀며 말했다.
“지금 수중에 돈이 없어 이것으로 뱃삯을 대신할까 하는데 괜찮겠소?”
뱃사공은 주자서가 내민 반질반질한 면경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좋아했다. 주자서가 소매를 들어 인사하자 뱃사공이 머리를 숙여 인사했다. 온객행이 배를 내리는 주자서의 손을 잡아 주었다.

온객행이 주자서에게 말했다.
“슬슬 밥을 먹여야 하는데….”
주자서가 온객행을 힐끔 보고 말했다.
“어디 전당(典當)이라도 찾아 일단 돈을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온객행이 주자서를 물끄러미 보고 말했다.
“그럴 것 없소. 무엇이던 돈에 맞추면 되는 것이오.”
주자서가 온객행의 소매를 잡고 말했다.
“아까 말하지 않았소. 지금은 혼란스러운 시기이니 조심하는 것이 좋습니다.”
주자서가 자신의 허리춤에 달린 패옥을 풀고는 말했다.
“내가 전당에 다녀올 테니….”
온객행이 자신의 소매를 놓는 주자서의 손을 잡고 말했다.
“가 봅시다. 나는 전당에는 가본 적이 없으니 아주 좋은 구경을 하겠군요.”
주자서는 부스스 웃고는 온객행에게 손바닥을 펴서 길을 안내했다.


전당안은 매우 한산했고 전당 안쪽에 맡겨지고 팔려는 물건들이 아주 많았다. 흉년이 길어지는 바람에 귀족이고 평민이고 할 것 없이 사람들이 집에 있는 물건을 팔아서 겨우 끼니를 때우는 것 같다. 주자서는 점원이 있는 곳에 다가가서 손에 들고 있는 옥으로 만든 요패를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말했다.
“요패를 잠시 맡기고 싶은데….”
점원은 주자서와 온객행을 위아래로 보더니 작게 한숨을 쉬고 요패를 들어 올렸다. 티끌 하나 없는 하얀 옥은 보통 때였으면 상등품이다. 하지만 먹을 것이 귀한 요즘은 그렇게 큰돈이 되지 못했다.

점원이 요패를 내려놓고 말했다.
“요즘 이런 물건이 많아서 은 반냥 정도 밖에 쳐 드리지 못합니다.”
주자서가 놀라며 말했다.
“귀한 옥입니다. 제 가격을 주고 산다면 은 열 냥으로도 살 수 없는 물건인데 어찌….”
점원은 작게 혀를 차고 탁자 아래에서 산호와 금으로 만든 요패를 꺼내며 말했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지금은 이런 물건이 많아서 비싸게 쳐 드릴 수 없습니다.”
주자서가 크게 한숨을 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점원은 안쪽으로 들어가 작은 염낭에 돈을 가지고 나왔다. 은 반 냥은 백 문이었기 때문에 염낭이 아주 무거웠다. 주자서는 점원이 있는 자리에서 동전을 모두 세어보고 나서야 전당을 나왔다.

두 사람은 그 돈으로 간단히 요기를 하고 사람들에게 물어 파양호의 곶에 있는 배를 고치는 선소(船所)를 찾았다. 선소에는 부서지거나 막 만들어진 배가 여기저기 보였다. 생각한 것만큼 사람이 많지는 않아 주자서는 두리번거리며 사람을 찾았다. 곧 근처에서 사람이 나와 온객행과 주자서를 반겼다. 주자서가 선소의 장인(匠人)에게 물었다.
“놀잇배를 사고 싶은데 당장 탈 수 있는 배가 있습니까?”
장인은 온객행과 주자서를 위아래로 보더니 말했다.
“관가의 허가가 있으십니까?”
주자서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그냥 날이 좋아 배를 띄워 풍류를 즐길 것이니 그대가 염려하는 일은 없을 것이오.”
장인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두 사람을 데리고 배를 만드는 곳으로 갔다.

장인이 주자서에게 이런저런 것을 물었고 주자서는 대강 어림잡아 대답했다.
“장인이 물었다. 값은 어떻게 치르시겠습니까?”
주자서가 온객행을 힐끔 보고 말했다.
“금주로 하겠네.”
장인이 놀란 듯 주자서를 돌아보고 말했다.
“관에서 나오신 분이십니까?”
주자서가 머뭇거리자 온객행이 말했다.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주자서가 온객행의 소매를 붙잡고 고개를 흔들었다. 장인이 둘의 모습을 보고 한참 생각하더니 그들을 데리고 선소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갔다. 그곳에는 집채만 한 배가 몇 척 있었는데 장인이 그것들을 보여주며 말했다.
“모두 선금을 받고 만든 배들인데, 주인들이 찾아가지 않는 배입니다. 어차피 찾아가지 못할 테니 골라 보십시오.”
주자서가 장인에게 말했다.
“이렇게 큰 배는 너무 눈에 띄어서….”
주자서가 다시 말했다.
“내실이 있는 돛단배가 좋겠네.”
장인이 손바닥을 펴서 다시 곶으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돛대를 중심으로 작은 내실이 있는 배는 고기를 잡는 배보다는 작았고, 나룻배 보다는 조금 컸다. 온객행과 주자서가 배에 올라타는 것을 본 장인이 물었다.
“선원이 필요하시면 알아봐 드릴까요?”
온객행이 손을 내젓고 말했다.
“아니오. 괜찮소. 유서. 나는 이 배가 좋은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나?”
주자서가 장인을 보고 말했다.
“값을 치르겠소.”
장인이 주자서가 내리는 것을 도와 그를 선소의 외실로 안내했다. 주자서가 온객행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온객행이 주자서의 손을 잡자, 주자서가 온객행의 손을 뿌리치고 말했다.
“염낭을 주시오.”
온객행이 작게 ‘하’하고 웃은 뒤에 품속에서 염낭을 꺼내 주자서의 손에 올려 주었다. 주자서는 염낭을 받고 장인과 함께 값을 치르러 갔다.

주자서가 다시 나왔을 때 온객행은 선수(船首)에 앉아 파양호를 보고 있었다. 주자서가 온객행에게 말했다.
“나는 뱃일은 아는 것이 없으니 알아서 하시오.”
온객행이 다시 배에 타려는 주자서의 손을 잡아주며 말했다.
“걱정 마시오. 내가 몇 갑자 동안 물 위에 있었던 줄 아시오?”
주자서가 내실로 들어가자 어디서 났는지 포단 두 개와 화로가 있었다. 주자서가 어깨너머로 온객행을 힐끔 보고 말했다.
“소매에서 부유각은 꺼내지 못하는가 보오.”
온객행이 내실을 지나 선미(船尾)로 가며 말했다.
“부유각은 태평호에 매어 두고 싶어서 꺼내지 않는 것이오.”

주자서가 온객행을 보고 물었다.
“서신을 전할 수 있습니까?”
온객행이 키(舵)를 잡고 돛을 향에 ‘후’ 숨을 불며 말했다.
“벌써 아상이 보고 싶소?”
배가 천천히 움직였다. 주자서는 온객행의 말을 무시하고 포단에 앉았다. 온객행이 키를 놓고 일어나 장포를 벗어 주자서에게 주고 말했다.
“아직 한 시진 밖에 자지 못했으니 눈이라도 붙이시오.”
주자서가 온객행의 장포를 받아 들고 온객행을 보며 말했다.
“되도록 사람을 피해 가시오. 다른 배가 있을 때는 도술도 부리지 마시오.”
온객행이 주자서를 쏘아보며 말했다.
“정말 혹이 아니라 상전이네.”
주자서는 온객행을 보고 ‘쯧’하고 혀를 차고는 포단 위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고개를 기댔다.


해가 거의 다 졌을 때 강주(江州)에 닿았다. 온객행은 배를 잠시 멈추고 내실로 들어갔다. 주자서는 내실 벽에 기대어 온객행의 장포에 얼굴을 묻고 잠이 들어 있었다. 온객행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벌써 세 시진이 지났는데….”
온객행이 쪼그리고 앉아 주자서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유서.”
주자서는 온객행의 손길에 어깨를 튀며 놀란 얼굴로 일어났다. 온객행이 말했다.
“강주에 닿았는데 뭘 먹지 않아도 괜찮겠소?”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온객행의 옷에 얼굴을 묻었다. 온객행이 부스스 웃으며 말했다.
“불편하게 이렇게 앉아서 자지 말고 편히 누워 주무시오. 내가 이불을 꺼내주겠소”
주자서가 고개를 들어 장포를 온객행에게 건넸다. 온객행이 장포를 다시 입고 소매에서 얇은 이불을 꺼내 주자서에게 주었다. 그리고 작은 제등을 꺼내 불을 붙여 실내를 밝혔다. 주자서는 이불을 받더니 포단 위에 몸을 웅크리고 다시 잠이 들었다.

온객행은 주변에 배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물 안으로 들어갔다. 장강에는 많은 요괴들이 살고 있는데 검영(黔嬴)은 강주 근처에 살며 장강의 물안개를 피우는 파사(巴蛇)이다. 동정호의 서쪽에 있는 작은 서호의 온객행이 촉룡의 제자가 될 수 있었던 것도 검영 덕분이다. 온객행은 오래전부터 검영이 사는 동굴로 들어갔다. 동굴은 누군가 살았던 흔적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온객행은 소매에서 연잎차함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어(蠃魚) 한 마리가 온객행을 발견하고 소매를 들어 인사했다.
“흑망공자.”

온객행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어에게 말했다.
“검영은 어디 가셨소?”
나어가 고개를 조아리고 말했다.
“주인께서는 중원절(中元節)의 일로 청룡이신 구망대선(句芒大仙)께 가셨습니다.”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이며 탁자 위에 놓아둔 차함을 나어에게 건넸다. 나어는 두손으로 공손히 받았다. 온객행이 말했다.
“내가 스승님을 뵈러 가는 길에 잠깐 보러 왔습니다. 혹시라도 찾으시거든 태평호에 있겠다고 전해주겠소?”
나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온객행은 잠깐 검영이 지내는 곳을 둘러보고 나왔다. 청룡은 왜 검영을 굳이 따로 불러서 중원절의 일을 상의하는 것일까? 아니면 검영도 지켜보는 것이 지루해져 천궁으로 승천하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온객행이 물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을 때 배 근처에 고기잡이배가 보였다. 고기잡이배는 주자서의 배 옆을 조용히 지나 선착장으로 향했다. 온객행은 배가 저 멀리 보이지 않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배에 올랐다. 물을 흩어내고 내실 안으로 들어가니 포단을 바닥에 깔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웅크리고 누워 자는 주자서가 보였다. 온객행은 고상이 했던 말이 생각나서 봇짐 안에 들어 있는 연잎 떡을 꺼내 들고 주자서를 깨웠다.
“유서.”
주자서는 흠칫 놀라며 금방 일어났는데 온객행의 얼굴을 보고 작게 한숨을 쉬고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온객행이 연잎 떡을 주자서에게 내밀었다. 주자서는 떡을 받아 들고 앉아서 눈을 감고 있다가 연잎을 벗겨 떡을 먹었다. 온객행은 대나무 수통을 꺼내 물을 채워 주자서에게 건넸다. 주자서가 수통을 받지 않자 온객행은 수통을 화로에 기대고 소매에서 다구함을 꺼냈다. 찻주전자를 꺼내 물을 올리고 찻잔을 꺼내 화로 옆에 두었다.

주자서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떡을 먹었다. 온객행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유서. 혹시 어디 아픈가?”
주자서가 고개를 흔들고 아직 찻잎도 넣지 않은 찻주전자의 덥힌 물을 찻잔에 따라 마셨다. 온객행이 주자서에게 다가가 앞섶을 벌리고 주자서가 화살을 맞았던 곳을 보았다. 이제 모두 아물어서 붉은 새살이 올라와 있다. 온객행이 주자서의 장포를 들춰 허벅지를 보려고 하자 주자서가 온객행의 손을 붙잡고 말했다.
“아픈 것이 아니오. 조금 피로한 것이니 괘념치 마소서.”
온객행이 주자서의 앞섶을 다시 잘 여며주며 말했다.
“아무래도 배를 빌리기를 잘한 것 같소.”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온객행이 찻주전자에 찻잎을 넣고 차가 우려지기를 기다렸다. 주자서가 온객행에게 기대 앉으며 말했다.
“조금 추운 것 같소.”
온객행이 안개가 깔린 장강을 보며 말했다.
“비가 올 것 같소.”
주자서가 고개를 쭉 빼고 바깥을 보며 말했다.
“이곳은 강주입니까?”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자서는 이불을 펼쳐 온객행과 나눠 덥고는 물었다.
“촉룡께서 계신 곳은 얼마나 멉니까?”
온객행이 주자서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말했다.
“종화산…. 북쪽에 있는 천산(天山)에 계시오.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 금사강(金沙江) 발원지인 천산이오”
주자서가 물었다.
“그럼 계속 장강을 따라 가면 되는 것이오?”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자서가 다시 물었다.
“얼마나 걸립니까?”
온객행이 고개를 돌려 장강의 수면을 보고 말했다.
“이레… 정도 걸리지 않을까요? 금사강의 상류는 절벽이 많아 배로 갈 수 없습니다.”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온객행은 안개를 해치고 밤새 배를 움직여 동이 터올 무렵 기춘현(蘄春縣)에 닿았다. 주자서는 배에 타고 난 이후로 계속 잤으면서 밤새 또 몇 시진 잠을 잤다. 온객행은 혹시 죽었나 싶어서 중간중간 그가 숨을 쉬는지 확인했다. 주자서가 선미로 나와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어디쯤 왔소?”
온객행이 키를 놓고 일어나며 말했다.
“형주 기춘이오.”
주자서가 주변을 둘러보더니 내실 벽에 걸린 제등에 불을 후 불어 껐다. 온객행이 배의 난간에 앉아 손을 물에 넣고 휘젓더니 커다란 물고기를 꺼냈다. 주자서가 물고기를 보고 말했다.
“물고기는 원 없이 먹겠습니다.”
온객행이 소매에 팔을 넣고 휘젓더니 작은 나무함을 꺼내 들고 말했다.
“현무께서 보낸 소금도 있으니 많이 드시게.”
온객행이 쪼그리고 앉아 생선의 내장을 손질했다.

손질한 내장을 강물에 버렸는데 사람의 얼굴을 한 물고기 몇 마리가 배 근처로 와서 온객행이 버린 내장을 먹었다. 주자서가 온객행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저…저것은 무엇이오?”
온객행이 소매에서 구리로 만든 냄비를 꺼내 손질한 물고기를 담고 말했다.
“소어(鳋魚)요. 그대는 참으로 요괴에 대해 아는 것이 없소.”
주자서가 선미에 앉아 키를 잡고 앉아 말했다.
“저런 것이 있는 줄도 몰랐소.”
온객행이 소금을 조금 넣고 어디에서 났는지 파 뿌리를 냄비 안에 넣으며 말했다.
“보통 사람 눈에는 잘 보이지 않소.”

주자서가 고개를 돌려 방금까지 소어가 있던 곳을 보고 말했다.
“그럼 난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오?”
온객행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유서. 애초에 사람과 요괴는 그 경계가 아주 모호하오.”
주자서가 온객행을 보고 물었다.
“그대도 사람이었소?”
온객행이 낮게 웃으며 말했다.
“벌써 잊었소? 나는 뱀이오.”
주자서가 ‘아’ 하고 작게 탄식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온객행은 화로 위에 냄비를 올려 두고 주자서가 누워있던 자리에서 포단을 가져와 화로 앞에 두고 앉았다. 주자서도 금방 내실로 들어와 온객행 옆에 앉았다.

둘이 물고기 탕을 거의 다 먹었을 때 누군가 뱃머리에 올랐다. 온객행이 고개를 돌려 뱃머리를 보자 검영을 모시는 나어가 서 있었다. 나어가 말했다.
“주인께서 흑망공자께 드릴 것이 있습니다.”
온객행이 자리에서 일어나 뱃머리로 나갔다. 나어는 품속에서 작은 함을 꺼내 온객행에게 내밀었다. 온객행이 그 함을 받자 나어는 공손하게 인사하고 강물 속으로 ‘풍덩’ 몸을 던졌다. 온객행은 나어가 건넨 함을 한참 보고만 있었다. 주자서가 그릇을 내려놓고 온객행에게 다가가 어깨너머로 온객행이 쥐고 있는 작은 함을 보았다. 온객행은 손을 들어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는 진주 두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온객행은 곧 울 것 같은 얼굴을 하더니 함을 닫아 품속에 넣고 다시 내실로 들어갔다. 주자서도 따라 들어가 내려 놓았던 그릇을 들고 남은 음식을 먹었다. 소금과 향채(香菜) 몇 개 더 넣은 것 뿐인데 탕은 아주 맛이 좋았다.


하나둘 떨어지던 빗방울이 거세게 기운을 바꾸었다. 돛을 내리고 온객행은 내실에 앉아 배를 움직였다. 나어가 왔다 간 이후로 말수가 급격하게 줄어든 온객행은 멍하니 비가 내리는 강의 수면을 보았다. 주자서는 내실에 앉아 화로를 쬐기도 하고 졸기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묻고 싶은 것이 많았으나 눈치가 보여 주자서도 입을 닫고 있었다. 온객행은 뭔가 결심한 듯 주자서를 보고 입을 달싹였는데 그때 눈치 없이 주자서의 뱃속에서 커다란 ‘꼬르륵’ 소리가 났다. 온객행이 부스스 웃으며 말했다.
“밥을 세 번 먹여야 하는데… 자꾸 잊네요. 아상에게 이르지 마세요.”
주자서가 얼굴이 빨개져서 온객행을 보며 말했다.
“아… 아닙니다. 제가 계속 폐만 끼치네요. 그러지 말고 근처에 있는 포구에 선착하면 제가 가서 먹을 것을 좀 사 오겠습니다.”
온객행이 밖을 보고 말했다.
“이제 막 한양(漢陽)을 지나서 악양(岳陽)까지는 큰 포구가 없을 텐데….”

주자서가 품에서 동전이 든 염낭을 꺼내며 말했다.
“혹시 근처에 고기잡이배가 있으면 거기서 사는 것도 방법입니다.”
온객행이 시선을 주자서에게 옮기며 말했다.
“비가 와서 배가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 물건을 실어 나르는 배예요.”
주자서가 대나무 수통의 물을 마시고 말했다.
“하루 이틀은 굶어도 괜찮습니다.”
온객행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군영에서 취급이 별로 좋지 못했는가 봅니다.”
주자서가 고개를 숙이고 대답이 없었다. 온객행이 손을 내젓고 말했다.
“아, 이런. 또 실례를 범했습니다. 용서하세요.”
주자서가 고개를 흔들고 옆에 개어 두었던 이불을 폈다.

온객행이 물었다.
“세 시진 넘게 잤는데도 괜찮습니까? 동면(冬眠)하는 것처럼 자길래 조금 걱정했습니다.”
주자서가 부스스 웃으며 말을 따라 했다.
“동면….”
온객행이 시선을 다시 강물의 수면 위로 옮기고 말했다.
“동정호에 도착하면 혹시 도움을 구할 곳이 있는지 찾아보겠습니다. 구름 마차라도 타면 더 금방 탁음대선께 갈 수 있으니까요.”
주자서가 표정을 구기며 물었다.
“구름 마차요?”
온객행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동정호는 제 고향이니까요.”
주자서가 몸을 웅크리며 말했다.
“동정호는 연꽃이 유명하다 하던데 정말입니까?”
온객행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네. 제가 살았던 서호(西湖)는 하얀 연꽃으로 유명했어요.”
주자서는 대답 없이 무릎을 끌어안고 고개를 기댔다. 온객행이 주자서를 보며 말했다.
“악양에 도착하면 침상을 살까요?”
주자서의 작은 웃음소리가 조금 들리더니 금방 숨소리가 일정하다. 온객행이 다시 주자서를 보고 생각했다. ‘내상이 있다더니 정말 아픈 건가?’


동정호에 거의 다 도착해서 온객행은 별로 만나고 싶지 않은 요괴를 만났다. 현리(玄螭)는 장강과 동정호가 만나는 지점에 사는 검은 교룡(蛟龍)이다. 스스로 교룡이라 부르고 있다. 사실은 그녀도 온객행과 같은 동정호 출신 파사이다. 그녀는 화려하게 치장하는 것을 좋아하고 사치를 즐겨서 사람들 가까이에 살았다. 사람에 대해 아는 것이 많았기 때문에 사자형제도 종종 현리에게서 정보를 사고는 했다. 깜빡 조는 사이 커다란 배의 움직임에 휘말린 온객행이 선미로 나가 키를 잡았다. 커다란 배의 갑판에서 현리가 머리를 내밀고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흑망. 흑망. 이렇게 될 때까지 모르다니. 일부러 그런 거야?”
온객행이 작게 혀를 차고 말했다.
“자예(雌霓).”
현리가 ‘호호호’ 웃고는 말했다.
“어머! 그 이름을 기억하는 건 이제 너뿐일걸?”
현리가 선수로 훌쩍 뛰어 올라탔다.

내실을 지나 선미로 오면서 안에 웅크리고 있는 주자서를 보고 온객행을 보며 웃었다.
“그새 새로운 정인을 만든 거야?”
온객행은 작게 혀를 차고 말했다.
“응.”
주자서가 인기척에 부스스 일어나 선미를 보았다. 아름다운 여인이 온객행과 함께 그를 보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주자서가 일어나 소매를 모아 공손히 인사했다. 현리가 피식 웃으며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취향이 변하질 않네.”
온객행이 현리에게 말했다.
“스승님께 가는 길인데 도와줄 텐가?”
주자서를 위아래로 훑어보던 현리가 반색을 하고 온객행을 보며 말했다.
“그래? 나도 탁음대선께 부탁할 일이 있는데….”
온객행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스승님의 붉은 비늘이 가지고 싶은 거라면 그냥 가져가면 된다니까.”
현리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안되지. 안돼. 금모원군께서 나를 그렇게 가르치지 않으셨는걸.”

온객행이 고개를 들어 현리가 타고 있던 배를 보고 말했다.
“그럼 신세를 좀 져볼까?”
현리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 이런 작은 배로 어느 세월에 종화산에 도착하겠어.”
온객행이 주자서 쪽으로 턱짓하며 말했다.
“이건 저쪽 취향이야.”
주자서가 표정을 구기며 온객행을 보았다. 온객행이 손바닥을 펴서 현리를 향하게 하고 말했다.
“이쪽은 현리. 동정호의… 교룡.”
현리가 온객행을 보고 웃었다. 주자서는 얼른 소매를 들어 공수하여 인사했다. 온객행이 주자서 쪽으로 손을 들어 말했다.
“이쪽은 유서. 내 희첩(姬妾).”
공손히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있던 주자서가 고개를 번쩍 들어 온객행을 보았다. 현리가 고개를 꺾어 웃으며 말했다.
“어머. 정말 이름처럼 솜털같이 귀엽네.”
온객행이 주자서에게 다가가 어깨에 팔을 두르고 말했다.
“우리 유서는 겁이 많고 다정하여 잘 속으니 잘 보살펴 주어야 하네.”
주자서는 당황한 얼굴로 온객행을 보다가 점점 얼굴이 빨개졌다.

현리가 웃으며 둘에게 손가락질하고 말했다.
“그래. 내가 잘 보살펴 주지. 둘 다.”
그리고 다시 훌쩍 배 위로 올라갔다. 온객행은 배 안에 있는 물건을 정리하고 선수로 나갔다. 멀뚱히 서 있는 주자서의 팔을 붙잡아 허리를 안고 훌쩍 커다란 배 위로 올라갔다. 갑자기 지면에서 멀어진 주자서가 온객행의 팔을 꼭 붙잡았다. 갑판 위에 누각에 있는 평상에 앉아 현리가 두사람을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나의 편연주(便姸舟)에.”
온객행이 주자서를 놔주고 일부러 크게 소매를 펄럭이며 인사했다.
“현리낭자께서 환대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주자서도 일단 장단을 맞추기 위해 허리를 깊게 숙여 인사했다.

蛇苺 第8

反客爲主 | 8. 손님이 도리어 주인 노릇을 한다.

주요는 부유각에 고상을 남겨두고 혼자 백택으로 돌아갔다. 고상은 주자서 옆에 붙어서 계속 그에게 말했다.
“유서. 꼭 나를 보러 와야 해. 나를 잊으면 안돼.”
주자서는 고상의 말에 몇 번이나 그렇게 하겠다고 답했지만 그것이 주자서의 뜻대로 될 리 없다는 것을 어느 정도 자각하고 있었다.

고상은 주자서의 손을 잡고 태평호를 보고 있던 온객행에게 가서 말했다.
“온객행. 우리 유서는 하루에 세 번 밥을 먹어야 하고, 적어도 두 시진은 따뜻한 곳에서 재워야 해. 세 시진 넘게 자는 것을 제일 좋아해. 사나흘에 한번은 씻겨줘야 하고, 살이 연해서 잘 찢어지니까 조심해야 해. 또… 또….”
주자서가 얼굴이 빨개져서 고상을 보고 말했다.
“아상….”
고상이 주자서를 보고 말했다.
“우리 유서는 단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까…. 아직 내상이 다 낫지 않았으니까 술도 안돼.”

주자서는 고상이 언제 자신의 기호(嗜好)를 눈치챘을까 싶었다. 태평호에서 정신을 놓고 지낸 날을 빼고도 벌써 열흘이 지났다. 열흘 동안 주자서도 고상에게 정이 많이 들어 있던 참이다. 정말로 가능하다면 이 일이 잘 마무리되어 그들이 말하는 주자서가 원래 있던 사람의 세상으로 돌아가 모친과 가족을 데리고 이곳에 와서 고상을 만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기연(奇緣)으로 맺어진 천륜으로 모친이 두 분이 되었다.

온객행이 주자서에 대해 계속해서 말하는 고상을 보고 작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정말 그를 데리고 가는 것이 맞는 걸까? 오히려 더 위험한 일은 아닐까?”
고상은 하던 말을 멈추고 온객행을 보며 말했다.
“내가 약세일 때는 지형을 이용하여 잠복했다가 길목에서 적을 치는 거야. 내가 힘이 없으면 힘 있는 자의 원조를 얻는 것도 방법이라고 했어.”(2)
고상의 말에 온객행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백택에 병서(兵書)가 있었나?”

고상이 주자서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유서가 알려줬어. 유서는 재미있는 얘기를 많이 알아.”
온객행이 주자서를 힐끔 보았다. 주자서는 고상이 저를 부르는 소리에 고상을 마주 보고 웃었다. 고상이 말을 이었다.
“탁음대선께서는 아주 좋은 원군(援軍)이야.”
고상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온객행을 보았다. 온객행은 두 사람을 보고 피식 웃고 다시 시선을 태평호로 던졌다. 동쪽 끝이 어슴푸레하게 밝아 온다. 입이 가벼운 지네가 일어나기 전에 서둘러 떠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온객행은 갑판으로 나와 주자서가 내실에서 나오기를 기다렸다. 내실에서 고상이 분주하게 이것저것 챙겨서 봇짐을 쌌다. 온객행이 입는 옷가지 몇 개와 노잣돈으로 쓸 수 있는 패옥(佩玉) 몇 개, 며칠 전에 함께 연잎에 싸서 쪘던 떡에 대나무로 만든 수통도 챙겼다. 곧 내실 안으로 주요가 작은 상자를 들고 들어왔다. 고상과 주자서가 다가가자 주요가 상자를 열어 보여주며 말했다. 상자 안에는 작은 옥비녀가 들어 있었다.

주요는 주자서를 의자에 앉히고 머리에 꽂았던 고상의 꽃 비녀를 빼내고 옥비녀로 그의 머리를 고정하며 말했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이 비녀를 부러뜨려라. 그렇게 하면 내가 바로 알 수 있다.”
고상은 주요가 건넨 꽃 비녀를 손에 들고 있다가 주자서의 손에 쥐여 주며 말했다.
“이것도 가져가. 나를 잊으면 안돼. 우리 아가.”
그리고 주자서를 와락 끌어안았다. 주자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상을 마주 안아주며 말했다.
“주인, 아상. 걱정 마세요.”

밖으로 나오자 온객행이 해가 뜨는 것을 보고 있다 고개를 돌려 말했다.
“사내는 싫으시다고 하셔 놓고는….”
주요가 주자서의 소매를 잡아 끌어 온객행 옆으로 밀며 말했다.
“너는 사내지만 발(妭)의 후손이니까.”
고상이 주자서의 팔을 잡고 늘어지며 말했다.
“유서. 내 아가. 꼭 다시 와야 해. 나를 보러 와야 해.”
온객행이 고상을 보고 작게 한숨 쉬고 말했다.
“나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사람의 일을 어찌 알 수 있겠어.”
온객행이 봇짐을 끌어안고 갑판에 서 있는 주자서를 보고 말했다.
“노력해볼게.”

고상이 주자서의 팔을 놓고 온객행의 양손을 잡으며 말했다.
“온객행. 우리 유서를 잘 부탁해요. 유서는 다정해서 잘 속으니까 잘 돌보아 줘야 해요.”
온객행이 주자서 옆에 붙어 서서 주자서를 보고 되물었다.
“그래?”
고상이 주자서를 보고 말했다.
“유서. 흑망공자 말 잘 들어. 좀 괴팍해도 아주 못돼진 않았어.”
고상의 말에 주요가 소매를 가리고 웃었다. 온객행이 고상을 쏘아보며 말했다.
“아상. 나에게 부탁하는 중이라는 것을 잊었어?”
고상이 축 늘어진 눈썹을 어쩌지 못하고 입만 당겨 웃으며 말했다.
“에이, 파사! 잘 부탁해요. 파사는 꼭 다시 돌아올 거잖아요. 그렇지?”
온객행이 부스스 웃으며 고상의 어깨를 토닥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주요가 온객행에게 물었다.
“물길로 가는가?”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이며 주자서의 허리를 안았다. 주자서가 당황하여 온객행의 얼굴을 보았다. 온객행이 태평호로 발을 내딛고 말했다.
“이건 뭐 혹이 아니라 상전이네.”
고상도 태평호 물속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기회가 되면 꼭 기별(奇別)해.”
온객행은 한동안 태평호 물 위를 걷다가 물 안으로 들어갔다.


주자서는 몸이 잠기자 눈을 꼭 감고 허리에 두른 온객행의 팔을 꼭 잡았다. 온객행은 낮은 목소리로 웃더니 ‘첨벙’하고 물 안으로 들어갔다. 숨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정도가 됐을 때 주자서는 자신의 몸에서 손을 떼는 온객행의 손을 붙잡았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몸을 일으켜 세우고 말했다.
“이제 눈을 뜨셔도 됩니다.”
숨을 크게 들이 쉰 주자서가 눈을 떴다.

주자서는 조금은 어둑어둑한 동굴에 서 있었다. 온객행이 몸을 부르르 떨며 몸을 붙여오는 주자서에게서 손을 떼고 그의 몸에 있는 물을 영력으로 날려 주었다. 주자서를 요리조리 돌려보고 다친 곳이 없는지 살핀 온객행이 앞서 걷자 주자서가 온객행의 소매를 잡고 따라 걸었다. 한참 걷던 주자서가 물었다.
“여기는 어디 입니까?”
온객행이 잡힌 소매를 힐끔 보고 대답했다.
“물길.”

주자서가 어색하게 웃으며 온객행의 소매를 놓고 말했다.
“물길?”
온객행이 주자서의 어깨에 팔을 둘러 발 맞춰 걸으며 말했다.
“원래는 사람이 다닐 수 없는 길이나 급히 가야 하니 잠시 해화상(海和尙)의 길을 빌리는 것입니다. 그들은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 일단 동정호(洞庭湖)까지 조용히 갑시다.”
주자서는 고개를 끄덕이고 열심히 걸었다.

그러다 문득 궁금이 일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파양호(鄱陽湖)가 아니라 동정호까지 갑니까?”
온객행이 대답 없이 조금 걷다가 말했다.
“동정호까지는 너무 지나칠까요?”
주자서가 말했다.
“파양호 까지도 말을 달려 하루는 가야 하는데 걸어가면….”
온객행이 작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그렇군요. 일단 갈 수 있는데 까지 가봅시다.”
그리고 주자서를 놓아주고 앞서 걸었다.

그들은 말없이 꽤 오래 걸었는데 온객행은 중간중간 뒤를 돌아보며 주자서가 잘 따라오는지 확인했다. 둘은 두세시진 쉬지 않고 걸었다. 온객행은 중간중간 주자서가 가지고 있는 대나무 수통에 물을 채워 주었다. 그들이 선우산(仙禹山) 근처에 도착했을 즈음 온객행이 길을 멈춰 주자서에게 연잎에 싼 떡을 먹게 했다. 바닥이 젖어 있어 어디 앉기가 곤란하여 주자서는 들고 있는 봇짐을 등에 메고 떡을 먹었다.

주자서가 떡을 다 먹은 뒤에 수통의 물을 마시고 말했다.
“오르막이 아니어서 다행입니다.”
온객행은 주자서가 하는 것을 보고 있다가 말했다.
“주자서의 군영이 멀지 않은 곳에 있소.”
주자서가 익숙해진 어둠 속에서 온객행의 얼굴을 찾으며 말했다.
“무슨 뜻입니까?”
온객행이 한참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
“딱히 사람의 세상에 있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을 것 같긴 하오.”

주자서가 봇짐 안에 수통을 넣고 말했다.
“나를 보내주겠다는 뜻입니까?”
온객행이 주자서에게 가깝게 다가서서 그의 얼굴을 보았다. 온객행의 눈은 칠흑같이 캄캄하였으나 어둠 속에서도 보였다. 주자서는 온객행이 변했던 검은 뱀이 생각나 뒤로 물러섰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려는 주자서의 팔을 잡아 일으킨 온객행이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일단 황룡을 찾은 후에 생각해봅시다.”
그리고 주자서의 소매를 잡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주자서는 사실 조금 지쳐 있었으나 그가 길을 서두르는 듯하여 발을 맞추고 있었다. 군영에 있을 때 온종일 행군하는 일은 목적지가 뚜렷했기 때문에 염탐(廉探)이나 잠복(潛伏)을 하는 것보다 쉬웠다. 주자서는 온객행이 군영의 이야기를 해서 마음이 무거워졌다. 저 검은 뱀을 따돌리고 군영으로 돌아갈 방법은 없다. 선우산 아래 군영이 아직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주자서가 태평호에 있는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도 주자서에게 말해주지 않았으니 주자서는 답답한 마음이 울컥 치밀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등허리에 손을 올려 붙어 걸으며 말했다.
“그대는 발(妭)에 대해 얼마나 아시오?”
주자서가 말했다.
“황제(黃帝)의 자손 중에 한명이라는 것 정도 밖에 모르오.”
온객행이 물었다.
“그대의 모친에 대해 알려주시오.”
주자서는 얼굴을 구기고 온객행의 얼굴을 찾았다. 온객행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그대의 모친이 발의 자손이 아니라 발 본인일 수도 있는 것 아니오.”
주자서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그럴 리 없소. 모친께서는 평범한 사람이오.”
온객행이 물었다.
“혹시 비나 구름을 싫어하지는 않으시오?”

주자서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그러고 보니….”
온객행이 발을 멈추고 주자서의 몸을 돌려 얼굴을 마주 보고 말했다.
“발은 태양의 신이오. 비가 많이 오는 임우(霖雨; 장마)에는 분명히 본래의 모습을 드러냈을 것이오.”
주자서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본래의 모습이라니…?”
온객행이 얼굴을 좀 더 붙이며 말했다.
“황제의 자손이니 봉황이나 응룡(鷹龍)?”
주자서의 눈동자가 조금 흔들리더니 답했다.
“모친께서는 사람이오! 비가 오는 날이면 몸이 좋지 않아 쉬시거나 밖에 잘 나오지 않으셨지만 사람이오.”
온객행이 주자서의 어깨를 더 꽉 잡으며 물었다.
“그대 부친은 누구요?”

주자서가 몸을 뒤로 빼며 고개를 흔들자 온객행이 주자서를 놓아주며 말했다.
“반역으로 이름을 사용할 수 없어서 모친의 성을 쓰는 것이오?”
주자서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그렇소! 참소(讒訴)를 당하여 멸문당하였소. 모친께서는 겨우 나와 종형제를 데리고 도망하셨지만 얼마 가지 못해 형님께서도 전장(戰場)으로 끌려가 죽었소. 이제 나도 전장에서 죽었으니….”
주자서가 헐떡이고 울먹이더니 곧 바닥에 털퍼덕 주저앉아 흐느끼기 시작했다.

온객행은 주저앉아 우는 사람을 보고 있다가 다가가서 그의 팔을 잡아 일으키며 말했다.
“옷이 젖겠소. 일어나시오.”
주자서가 온객행의 팔을 뿌리치며 말했다.
“내가 전장에 나와 있는 8년 동안은 내 모친도, 당질도 안전했소! 내가 죽었으니 이제 지학이 넘은 내 당질도 전장으로….”
주자서는 말을 잊지 못하고 양손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온객행은 고개를 돌려 작게 혀를 찼다. 성급하게 괜한 것을 물었다. 황룡에게 데려다주고 나면 온객행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인데.

온객행은 쪼그리고 앉아 주자서의 어깨에 팔을 둘러 안고 다독이며 말했다.
“미안하오. 쓸데없는 것을 물었소.”
주자서는 온객행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고 조금 더 울었다. 주자서의 사정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부친의 성은 무엇이었는지 이제 기억도 나지 않는다. 8년 동안 집에 서신 한 자락 보내지 못했다. 사분군(死憤君)은 전사한 장수의 자제나 형제로 원수를 갚고자 하는 이를 모아 만든 군이다. 가장 최전선에서 가장 많은 일을 하는 군이다. 주자서는 형님 때문에 사분군이 되었다. 아마 그의 당질도 주자서 때문에 사분군이 될 것이다. 주자서는 문득 생각했다. 돌아가면 도망한 죄로 가족 모두가 참형(斬刑)을 받을 테니 돌아갈 수도 없다.

주자서는 온객행이 그를 보내준다 하여도 돌아갈 수 없다. 한참 온객행을 부둥켜안고 울던 주자서가 훌쩍이며 온객행을 놓아주었다. 온객행이 주자서의 얼굴에 눈물 자국을 손가락으로 지우며 말했다.
“겁쟁이에 눈물도 많아서 정말 이름같이 솜털 같은 분입니다.”
주자서가 온객행의 말을 무시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온객행도 따라 일어서며 말했다.
“오늘은 파양호까지 갑시다.”
그리고 주자서의 등허리에 손을 올려 그를 이끌었다. 주자서는 소매로 얼굴을 닦고 봇짐에서 수통을 꺼내 물을 마시고 온객행이 이끄는 대로 다시 걷기 시작했다.


파양호에 도착하여 온객행은 주자서의 허리를 안고 물 밖으로 나왔다. 이미 해가 져서 사위(四位)가 어둡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몸에 물을 흩어주고 사람이 사는 마을을 찾아 걷기 시작했다. 파양호 근처에는 크고 작은 마을이 많아서 마을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머무를 곳을 찾는 것은 또 다른 일이었다. 온객행이 성이 보이는 쪽으로 걷기 시작하자 주자서가 온객행을 멈추고 말했다.
“성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소.”
온객행이 주자서를 보고 물었다.
“노숙(露宿)을 하겠다는 뜻이오?”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이고 방금 나왔던 물가로 돌아갔다. 판판한 돌을 찾아 봇짐을 올려놓고 주변에서 땔감을 주워 능숙하게 불을 피웠다.

온객행이 불 근처로 다가가 말했다.
“뭔가 먹어야 하지 않소?”
주자서가 바닥에 털썩 앉고 봇짐에서 수통을 꺼내 온객행에게 건네며 말했다.
“하루 이틀은 굶어도 괜찮습니다.”
온객행이 주자서가 건넨 수통에 물을 채워 돌려주고 다시 물속으로 들어가 물고기 두 마리를 잡아 나왔다. 작은 칼로 내장을 제거하고 손질한 물고기를 주자서가 피워 놓은 불 근처에 꽂아 놓고 주자서 옆에 앉았다. 온객행이 다 구운 물고기 한 마리를 주자서에게 내밀었다. 주자서는 물고기를 받아서 먹었다. 온객행은 남은 물고기 한 마리를 들어 주자서가 하는 것처럼 먹었다. 주자서가 금방 물고기를 다 먹고 일어나 근처에서 조금 큰 나무를 가져와 모닥불에 넣었다. 잘 마르지 않았는지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온객행이 ‘콜록콜록’하고 기침을 하며 연기를 걷어내자 주자서가 그를 멈추고 말했다.
“밤에는 모기가 많아 연기가 있는 편이 낫습니다.”
온객행이 연기를 모두 흩어내고 말했다.
“작은 미물이 내 근처에 오는 일은 없을 테니 걱정 말고 어서 주무시게.”
주자서는 다시 모닥불 앞에 앉아 무릎을 안고 머리를 기댔다. 온객행이 침상에서 발견했을 때처럼 기다란 몸을 동그랗게 말아서 작고 초라하게. 그 모습이 가여워서 온객행이 그의 옆에 다가가 앉았다. 주자서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주자서의 팔을 문질렀다. 그새 잠이 들었는지 온객행의 어깨로 주자서의 머리가 ‘툭’ 닿았다. 온객행은 하늘을 올려보았다. ‘세 시진 자는 것을 제일 좋아한다 했지.’ 같은 생각을 하며 주자서의 팔을 토닥였다. 주자서는 금방 온객행에게 몸을 기대왔다. 그 체온이 기꺼워 온객행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온객행은 저가 웃는 줄도 모르고 하늘의 별을 헤아렸다.

주자서는 한 시진 조금 넘게 자고 부스스 일어났다. 무엇인가에 기대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자마자 몸을 바로 세우고 앉았다. 온객행이 주자서의 몸을 가깝게 붙이며 말했다.
“아직 한 시진 밖에 자지 못했으니 어서 더 주무시오.”
주자서는 온객행의 팔을 뿌리치고 조금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온공자께서는 안 주무십니까?”
온객행이 팔을 치우며 말했다.
“아주 덥거나 아주 춥지 않으면 잠이 잘 오지 않아서요.”
주자서는 태평호에 있을 때 온객행과 한 침상에서 잔 것이 떠올라 온객행을 의아하게 보았다.

온객행이 주자서를 빤히 보며 말했다.
“아상이 세 시진은 재워야 한다고 했는데….”
주자서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정말 아이 취급이라도 할 셈 입니까?”
온객행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나는 아상한테 혼나고 싶지 않아요.”
주자서는 꺼져가는 불씨에 주변에 놓았던 나뭇가지 몇 개를 던져 불을 살리고 말했다.
“그만 놀리십시오.”
온객행이 낮게 웃으며 말했다.
“오늘은 동정호까지 갈 수 있겠습니까?”
주자서가 물가를 보고 말했다.
“오늘도 해화상의 길로 갑니까?”
온객행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이렇게 걸어가기에는 조금 어려울 것 같으니 배를 빌려 갑시다.”

주자서가 고개를 돌려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배를 빌리다니요?”
온객행이 주자서를 마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성안에 들어 가려고 하는데….”
주자서가 하늘을 보고 시간을 가늠하더니 말했다.
“성안으로 들어가는 문은 오경이 지나야 열립니다. 이제 막 오경이 시작된 것 같은데 아닙니까?”
온객행이 하늘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고 모닥불 앞에 앉았다. 주자서를 보더니 말했다.
“뭘 더 드시겠소?”
주자서가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온객행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혹시 성이 난 것은 아니지요? 제가 미안하다 하지 않았습니까?”
주자서가 온객행을 쏘아보며 말했다.
“아닙니다. 감히 제가 어찌 흑망공자께 성을 낸다는 말입니까?”
온객행의 얼굴이 조금 굳어지고 둘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온객행이 작게 기침을 해서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그대도… 그대도 나의 못난 얼굴을 보았으니 비긴 셈 칩시다.”

주자서는 그제야 자기 어깨에 고개를 묻고 서늘한 눈물을 흘리던 온객행이 떠올랐다. 그때는 온객행이 산만한 뱀인 줄 몰랐을 때다. 온객행이 주자서를 보고 말했다.
“나는… 나는….”
주자서가 고개를 흔들고 말했다.
“내가 멋대로 말한 것이니 심려치 마시오. 말하고 싶지 않으면 말하지 않아도 괜찮소. 지금 나의 형편이 남의 사정을 돌보아 줄 여력이 없어서 말이오.”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사람은 동이 터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평진(新平鎭) 성문 쪽으로 걸으며 온객행이 불쑥 물었다.
“주공자는 정말 사내요?”
주자서가 미간을 찌푸리고 온객행을 보며 말했다.
“무슨 뜻이오?”
온객행이 주자서 옆에 붙어 서며 말했다.
“발의 능력은 어머니에게서 딸로 전승되니 그대의 모친께 여식(女息)이 없다 했으니….”
하고 주자서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주자서는 표정을 구기고 말했다.
“사내요! 사내가 아니면 어쩔 셈이오?”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이며 한참 생각하더니 말했다.
“그대가 여인이면 부인으로 맞고자 하는 천신이 아주 많을 것이오.”
주자서가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온객행에게 봇짐을 던졌다.
“사내라고 하지 않았소!”
온객행이 웃으며 봇짐을 받고는 말했다.
“알았소. 알았소. 성내지 마시오. 내가 잘못했소.”
그리고 주자서의 등허리에 손을 얹고 성문 쪽으로 걸어갔다.


한 시진정도 걸어 신평진에 도착했다. 온객행은 성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주자서의 옷을 자신의 옷으로 갈아입혔다. 푸른색 장포에 하얀 요대를 매고 가져온 패옥을 달았다. 키가 크고 훤칠하여 옷태가 나는 것이 어느 귀한 집 공자같이 보인다. 온객행이 주자서가 들고 있던 봇짐을 손에 두고 ‘후’하고 숨을 불었다. 곧 검은 연기와 함께 봇짐이 사라졌다. 주자서가 당황하여 ‘아!’ 하고 탄식하자 온객행이 주자서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걱정 마시오. 필요한 것이 있으면 내게 말씀하시오. 내가 꺼내 줄 테니.”

주자서가 어깨를 털어 온객행의 손을 뿌리치고 말했다.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도술이라도 쓸 참이오?”
온객행이 넓은 소매를 펄럭여 주자서에게 보여주었다. 주자서가 표정을 구기자 온객행이 소매 안에 손을 집어넣어 수통을 꺼냈다. 주자서가 미덥지 않다는 듯 고개를 흔들고 성문 쪽으로 몸을 돌려 섰다. 온객행이 주자서에게 붙어 서서 말했다.
“걱정 마시오. 그대의 군영은 나흘 전에 후퇴하여 지금 강주(江州)에 있으니.”
주자서가 고개를 휙 돌려 온객행을 보았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온객행이 주자서의 팔을 잡고 성문 쪽으로 걸어갔다.

꽤 그럴듯한 옷을 입고 있는 두 사람을 문지기는 잡지 않았다. 성안으로 들어서 포구(浦口)까지 난 시장을 구경했다. 온객행은 물건들을 이것저것 둘러보며 주자서에게 용도를 물었다. 주자서는 주변을 경계하며 온객행의 소매를 잡고 그의 뒤를 따랐다. 포구에 들어서자 사람도 가게도 더 많아졌다. 주자서는 온객행의 소매가 아니라 팔을 잡고 그가 가는 대로 이리저리 휘둘렸다. 포구에 도착하여 온객행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작은 돛이 달린 배를 보고 말했다.
“내실(內室)이 없는 배는 비가 오면 불편하겠지요?”
주자서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온객행에게 바짝 다가섰다.

온객행이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아 배를 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물었다. 주자서가 온객행의 팔을 당겨 말했다.
“이보게. 어찌 사람을 놀리는가?”
온객행의 질문을 받은 사람이 ‘허허허’ 웃으며 말했다.
“공자님들께서 풍류를 즐기실 배를 찾는 것이라면 대련자호(大蓮子湖)로 가보시지요.”
주자서가 소매를 들어 공수하고 인사했다. 그 사람도 마주 인사하고 자리를 떠났다.

주자서가 온객행을 보며 말했다.
“배를 사려면 관청의 허가가 필요합니다. 그렇게 저자의 물건을 사듯이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온객행이 작은 고깃배를 턱짓하며 물었다.
“저렇게 작은 조각배도 허가가 필요하오?”
주자서가 포구를 둘러보며 말했다.
“고기를 잡는 배, 물건을 실어 나르는 배, 사람을 실어 나르는 배는 나라의 허가가 없으면 물 위에 띄울 수 없습니다.”
온객행이 주자서를 보고 말했다.
“부유각을 꺼낼까요?”
주자서는 온객행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자서가 포구에서 물건을 나르는 사람을 붙잡아 물었다.
“혹시 배를 고치는 곳이 어디 있는지 아시오?”
그 사람이 대답했다.
“신평진에는 없고 창강(昌江)을 따라 파양현(鄱陽縣)에 가시면 그곳에 있습니다.”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이고 배를 타는 곳을 물었다. 그 사람은 손짓으로 창강의 하구를 가리켜 그곳에 있다고 대답했다. 주자서가 소매를 들어 공수하여 인사하자 그도 고개를 꾸벅 숙이고 자리를 떠났다. 두사람은 파양현으로 가는 작은 나룻배에 몸을 실었다.


(2) 태공망(太公望) 육도(六韜) 제5편 표도(豹韜) 49장 소중(少衆)
以少擊衆者, 必以日之暮, 伏以深草, 要之隘路. 以弱擊强者, 必得大國之與, 鄰國之助
소수의 병력으로 다수의 적을 칠 경우에는 반드시 해가 질 무렵을 이용하여 초목이 우거진 곳에 깊숙이 잠복하였다가 좁은 길목에서 적을 요격해야 한다. 약한 나라로서 강한 나라를 치려면 반드시 강대한 다른 나라의 찬동과 이웃 나라의 원조를 얻는 것이 필요하다.

蛇苺 第7

李代桃僵 | 7. 자두가 복숭아를 대신해 죽는다.

온객행은 찬합에 구리냄비를 넣고 고상을 데리고 부유각으로 향했다. 부유각으로 향하는 동안 고상에게 황제가 누구이고 발이 누구인지 설명해주었다. 온객행의 말을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던 고상이 말했다.
“정말 귀한 사람을 구했네…?”
온객행이 고상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부유각에 도착해 온객행은 찬합을 들고 누각으로 올라갔다. 내실의 휘장이 모두 내려져 있고, 안에서 은은한 불빛이 새어 나왔다. 고상은 내실 안으로 들어가 탁자에 앉아 있는 주요와 유서를 보았다.

방금 들어온 고상을 보고 주요가 말했다.
“아상. 아무래도 그냥 보내 줄 수 없을 것 같다.”
고상이 화색이 되어 주자서 옆에 앉으며 말했다.
“그래? 그럼 유서는 화사가 되는 거야?”
주요가 자리에 앉은 고상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아상. 사내는 화사가 될 수 없어.”
고상이 고개를 갸웃하고 주요를 보더니 곧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곧 내실 안이 안개로 가득찼다. 곧 눈을 뜬 고상의 눈은 붉게 빛나고 있었다. 고상이 주요에게 물었다.
“어? 영력이 다 어디 갔지?”
고상이 주자서의 몸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말했다.

주요가 작게 한숨을 쉬고 손으로 얼굴을 부치자 곧 안개가 걷혔다.
“서왕모께서 말씀하시기를 그 영력은 그의 것이 아니라 발의 것이야.”
고상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주자서를 놓아주었다. 주자서는 주요와 고상의 대화를 알아들을 수 없어 입을 달싹였다. 주요가 주자서를 보자 주자서가 손을 들어 공수하고 말했다.
“주인. 저는 사람입니까?”
주요가 주자서를 한참 보다가 말했다.
“그것이… 나도 잘 모르겠다는 말이지.”
주자서가 고상을 힐끔 보고 다시 물었다.
“저는 화사가 되는 건가요?”
주요가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고상이 주요의 소매를 잡고 재촉하듯 물었다.
“아이참! 주요. 대체 뭘 그렇게 뜸 들이는 거야? 그냥 여기서 우리랑 같이 살면 되잖아요.”

주요가 자신의 소매에 있는 고상의 손을 잡고 말했다.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야. 그를 황룡 후토대선(后土大仙)에게 데리고 가야 하겠어.”
고상이 주자서를 보고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럼 유서는 후토대선이랑 살아?”
주요가 고상의 손을 토닥이며 말했다.
“그것은… 후토대선이 결정할 일이지.”
고상이 다시 주요를 보고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주요는 후토대선이랑 아는 사이야?”
주요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미간을 찌푸렸다.
“면식이 있긴 한데… 그는 오룡의 수장자리를 탐내다가 천선(天仙)을 죽이는 바람에 천궁에서 쫓겨났어. 지금 어디에 있는지는 잘 모르겠네.”
고상이 입꼬리를 당겨 어설프게 웃으며 물었다.
“그럼 황룡을 찾을 때까지는 태평호에서 살아도 돼?”
주요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즉저가 유서를 보았으니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

고상이 주요의 손을 맞잡고 물었다.
“왜? 아직 유서가 무엇인지 모르잖아.”
주요가 고개를 돌려 입구 쪽에 있는 휘장을 보고 말했다.
“누구처럼 엿듣는 못된 요괴의 희첩(姬妾)이라는 오해를 샀잖아. 파사에게 원한을 가진 영물은 많으니 그를 괴롭히러 올지 어찌 알겠어.”
고상이 고개를 돌려 입구를 보았다. 온객행이 휘장을 걷어 실내로 들어왔다. 주자서는 흠칫 몸을 떨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고상이 일어난 주자서의 허리를 안고 그의 배에 얼굴을 묻고는 말했다.
“싫어. 우리 유서는 내 것이야. 후토대선께 주기 싫단 말이야.”
그리고는 ‘으앙’하고 우는 소리를 냈다. 주자서는 당황하여 고상의 등을 쓸어 주며 소녀를 달래려고 안절부절못했다. 온객행은 손에 들고 있던 찻주전자를 탁상 위에 올려 놓았다.

온객행은 자리에 앉아 찻잔에 차를 따르고 주요에게 건네며 말했다.
“알 만한 자가 없소?”
주요가 온객행의 찻잔을 받으며 말했다.
“온객행. 그대는 천존께서 시키신 일이나 해결하고 오시게.”
온객행이 찻잔을 하나 더 꺼내 자기 앞에 두고 차를 따르며 말했다.
“촉룡께서는 알고 계실지도 모르오.”
주요가 찻잔을 내려놓고 온객행을 보았다. 작게 코웃음 친 주요가 말했다.
“천존의 일을 거절하려고?”
온객행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는 북쪽은 싫습니다. 춥잖아요.”
주요가 표정을 구기며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하! 추위를 타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차라리 너무 한미(寒微)한 자리라 성에 차지 않는다고 하게.”
온객행이 주요를 빤히 보더니 눈썹을 들썩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주요가 혀를 차며 말했다.
“봉인이 풀렸으니 이제 맞먹겠다는 것인가?”
온객행이 고개를 흔들며 차로 입을 축이고 말했다.
“설마요. 제가 종화산의 제자인 것을 잊으셨습니까? 저는 그저 지켜보는 것이 중요하지 이기거나 지거나 하는 일 따위에는 흥미가 없어요.”
주요가 고상을 보며 말했다.
“탁음대선(逴陰大仙)께 빈다고 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겠는가? 그는 흐르는 것 말고는 관심이 없으신데.”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상선, 스승님께 봉인이 풀린 것을 알리고 인사를 드리러 가야 하니 제가 가서 묻고 올까요?”
주요가 훌쩍이는 고상을 달래는 주자서를 고갯짓하며 말했다.
“혹이라도 달고 갈 텐가?”
온객행은 눈을 굴리고 말했다.
“아상은 저의 감시로 함께 왔으니 저와 함께 가는 것이 맞지요.”

주요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촉룡을 뵙고 나면 태연(太淵)으로 오게.”
온객행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왜요?”
주요가 다 마신 찻잔을 손안에서 굴리며 말했다.
“공공께서 금모원군과 함께 계시네.”
온객행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설마 공공께서도 고작 북해 용왕 자리를 탐내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주요가 대답 없이 온객행을 빤히 보았다. 온객행은 작게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어찌…?”
주요가 찻잔을 탁상에 내려놓고 일어나며 말했다.
“공공은 천궁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는 것이지 자리 따위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온객행이 깨달은 듯 ‘아’하고 탄식했다. 온객행도 찻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어쩌면 사람들의 전쟁이 꼭 사람들이 만든 것만은 아닐지도 모르겠군요.”
주요가 헛웃음 치고 내실을 나가려고 하자 온객행이 그를 붙잡으며 말했다.
“상선! 하방탕 드시고 가세요. 현무께서 보낸 소금을 넣고 끓여서 아주 맛이 좋습니다.”
내실을 나가려다 붙잡힌 주요는 온객행의 넉살에 맥이 빠져 ‘하하하’하고 허탈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고상은 앉아서 주요와 온객행이 하는 대화를 엿들으며 우는 시늉을 했다. 주자서는 다정해서 조금만 아프거나 우는 척을 하면 달려와서 달래 주었다. 평소에는 몸에 손을 대는 것을 그렇게 싫어했으면서 이럴 때는 만지고 치대도 모두 받아주었다. 고상이 울상으로 고개를 들어 주자서를 보자 주자서가 고상의 얼굴을 쓸어주며 말했다.
“주인… 울지 마세요.”
고상이 다시 얼굴을 주자서의 배에 묻고 말했다.
“아상이라고 부르겠다고 하면 그만 울게.”
주자서가 한참 대답을 망설이자 고상은 다시 ‘으앙’하는 우는 소리를 냈다. 주자서가 다급하게 고상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아상’이라 부르겠습니다. 아상. 울지 마세요.”
고상이 고개를 끄덕이며 주자서를 놓아주었다. 주자서는 탁상에 놓인 찻잔에 차를 따라 고상에게 건네주었다.

고상은 주자서가 내민 찻잔을 받아 마시고 주자서의 팔을 당겨 의자에 앉히고 말했다.
“유서. 너는 내 아이야. 사람이던 요괴던.”
주자서가 부스스 웃으며 고상의 눈물에 붙은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말했다.
“아상. 이렇게 눈물이 많으셔서….”
고상이 주자서를 마주 보고 배시시 웃었다. 그때 온객행이 고상에게 말했다.
“아상. 하방탕을 먹자.”
주요는 입구 쪽의 휘장을 들어 올린 온객행을 지나쳐 밖으로 나갔다. 고상이 자리에서 일어나 주자서의 소매를 잡고 휘장 밖으로 나갔다. 오늘은 보름이라 달이 밝았다. 하늘에 엷은 구름이 몇 점 떠 있었지만 오히려 그래서 운치를 더욱 돋웠다. 주자서는 내실을 나가면서 온객행을 힐끔 보았다.

주요는 누각에 앉아 화로에 올려 둔 하방탕을 그릇에 담아 탁자 위에 올려 두었다. 고상은 주자서의 소매를 놓고 주요 옆으로 가서 앉으며 말했다.
“주요! 이렇게 같이 먹어도 괜찮겠어? 이건 천교랑 보살이 주요 먹으라고 남겨 둔 것인데….”
주요가 다가와 앉은 고상의 머리를 정리해 귀 뒤로 넘겨주며 말했다.
“나는 아상이 먹는 것만 봐도 배가 불러. 아상 좋아하지? 하방탕?”
주요가 특별히 조개를 두 개 담은 그릇을 고상에게 주며 말했다.
“우리 아상은 먹을 때가 제일 예쁘지.”
고상이 ‘히히히’ 웃으며 그릇을 받아들였다. 탁자 곁에 멀뚱히 서 있는 주자서 뒤로 온객행이 기척 없이 다가와 말했다.
“아상은 먹을 때 가장 조용하니까.”
온객행의 말에 주요가 소매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고상이 조개를 ‘후후’ 불다가 고개를 돌려 온객행을 보고 얼굴을 구겼다. 온객행은 그 모습이 귀여워 ‘하하하’ 하고 웃었다.

주자서는 누각 위에 서서 그 곳에 앉아 하방탕을 먹는 주요와 고상을 보았다. 그러다 기척 없이 나는 온객행의 목소리에 몸을 흠칫 떨고 몸을 조금 웅크렸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등허리에 손을 얹고 그를 탁자로 데려가 앉히고 자기도 주요 옆에 앉았다. 이미 덜어 놓은 그릇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온객행이 그릇 안에 있는 조개를 ‘후후’ 불며 말했다.
“오늘은 술이 없으니, 달빛에 취해야 하겠소.”
주요가 고상의 그릇에 조개를 더 얹어 주며 말했다.
“천룡을 대접하느라 남은 술이 얼마 없어. 칠석이 지나면 구기자가 열릴 테니 그때 또 담가야지.”
온객행이 조갯살을 후후 불어 주자서에게 내밀고 말했다.
“아깝게 됐네.”
주자서는 입 앞으로 온 조갯살을 또 안 먹을 수는 없어서 받아먹었다. 온객행이 하는 모습을 보고 있던 주요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정말 희첩으로 삼을 참이야?”
온객행이 주자서의 얼굴을 빤히 보더니 말했다.
“나는 겁이 많은 사람은 별로….”
주자서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고상이 국물을 ‘후룩’ 마시고 말했다.
“유서는 아직 아기라 겁이 많은 거야.”
고상의 말에 주요와 온객행이 ‘하하하’하고 웃었다.

고상과 주자서가 식기와 냄비를 정리했다. 온객행은 찻주전자에 물을 채워 차를 내리며 말했다.
“주요. 제가 종화산에 다녀올 동안 괜찮으시겠어요?”
주요가 태평호를 보며 말했다.
“왜 다시 돌아오려고?”
온객행이 주요에게 찻잔을 내밀며 말했다.
“이제 서호(西湖)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주요가 고개를 돌려 온객행을 보며 한숨을 쉬고 말했다.
“어휴. 흑망.”
온객행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저는 그 이름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주요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늘에서 부르는 이름을 어찌 할 수는 없으니까.”
온객행이 자기 몫의 차를 따르고 손에 찻잔을 쥔 채로 물었다.
“상수(湘水)로 돌아가시지 않습니까?”
주요는 참으로 오랜만에 고향의 이름을 들었다. 이제 고향에서 지낸 날보다 태평호에서 지낸 날이 더 길었다. 주요가 웃으며 온객행이 했던 말을 따라 똑같이 말했다.
“상수에는 아무것도 없네.”

온객행이 작게 한숨 쉬고 말했다.
“우왕(禹王)과 약속은 충분히 지키지 않으셨습니까?”
주요는 그 일이 너무 까마득하여 그 약속이 어떤 약속이었는지 잊었다. 그 약속에 대해 아는 사람은 모두 천궁으로 돌아가 세상의 일에 사람의 일에 관심을 끊어버렸다. 주요가 찻잔을 내려놓고 고개를 숙이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야… 아니야. 그런 것이 아니야….”
온객행은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주요는 울 듯 웃는 표정으로 물었다.
“어째서 신과 사람은 죽어서 같은 곳으로 가지 않을까?”
주요의 표정이 점점 울상이 되더니 조금 울먹이는 듯이 말했다.
“같은 곳으로만 갈 수 있다면 만날 수만 있다면 나락(奈落)에서라도 함께 할 텐데.”
온객행은 그 마음을 잘 알고 있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텅 빈 가슴을 채울 수 있는 것은 여태 주요도 온객행도 찾지 못했다.

말없이 그릇을 씻던 주자서가 불쑥 고상에게 물었다.
“아상. 우사첩께서는 언제 돌아오실까요?”
고상이 주자서가 씻은 그릇을 바구니에 옮겨 담으며 말했다.
“그러게 보통 사람이 사는 마을에 가면 뭐든 잔뜩 사 오니까 이레 걸릴 때도 있고, 열흘 걸릴 때도 있고, 보름 걸릴 때도 있고….”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한참 멀었네요.”
고상이 주자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고상이 고개를 들어 달을 보다 말했다.
“유서. 만약에 파사가 탁음대선을 만나러 종화산에 가면 말이야….”
주자서는 말없이 묵묵히 설거지를 했다. 고상이 한참 뜸을 들이다 말했다.
“나는 안 갈 거야.”
주자서가 설거지를 멈추고 고상을 보았다. 고상도 고개를 돌려 주자서를 보며 말했다.
“주요는 외로움을 많이 탄다구. 내가 같이 있어 줘야 해.”
주자서가 마지막으로 남은 그릇을 씻어서 바구니 안에 넣고 고개를 끄덕였다. 고상은 손에 들린 젖은 식기를 들고 다시 누각 위로 올라갔다. 온객행에게 건네니 온객행이 그릇이 담겨있던 함을 꺼내 와 식기들을 잘 닦아서 넣었다.

고상은 온객행과 주자서가 식기의 물기를 닦는 것을 구경하며 차를 따라 마셨다. 주요의 표정을 보니 또 쓸데없는 생각을 한 모양이다. 고상이 주요 옆에 앉아 머리를 풀고 말했다.
“주요. 머리가 다 엉망이 되었으니까 어서 매만져줘.”
주요가 얼른 웃는 얼굴을 꾸며 고상을 보고 말했다.
“그럴까?”
고상은 품속에서 나무로 만든 빗을 꺼내 주요에게 건네고 말했다.
“주요가 준 이 빗으로 빗으면 머리 결이 찰랑찰랑해.”
주요가 빗을 받아 들고 고상 머리에 있는 머리 장식을 조심스럽게 빼내고 말했다.
“동백나무로 만들어서 동백기름을 먹였거든.”
그리고 고상의 머리를 빗기 시작했다. 잘 빗은 후 가닥으로 나누어 땋고 올려서 금방 고상의 머리를 매만졌다. 고상이 다 정리한 식기 함을 난간 근처에 두는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종화산에는 언제 가?”
온객행이 자리에 앉아 주자서에게 차를 권하며 말했다.
“언제라도.”
주요가 고상에게 동백나무 빗을 돌려주었다. 고상은 빗을 받아 다시 품속에 넣고 온객행에게 물었다.
“얼마나 걸리는데?”
온객행이 잠깐 생각하더니 답했다.
“날아서 가면 사나흘 내로 도착할 거야.”
고상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를 마시려고 찻주전자로 팔을 뻗고 있던 주자서를 일으켜 주요 앞에 앉히고 품에서 빗을 꺼내 주자서의 머리를 빗으며 말했다.
“주요. 내가 해보려고 했는데 잘 안됐어. 어떻게 하는지 보여줘 봐.”
주요가 고상을 보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상. 우리 아상.”
고상이 배시시 웃으며 주자서의 머리를 풀었다. 고상과 주요가 주자서의 머리를 붙들고 한참 법석을 떨자 온객행이 자리에서 일어나 누각 아래로 내려갔다. 온객행의 뒷모습을 힐끔 본 고상이 말했다.
“주요. 유서는 꼭 가야 해?”
주요가 주자서의 머리를 틀어 올려 상투를 틀고 말했다.
“잘 모르겠어. 사내를 지키고 싶은 마음은 없거든.”
고상이 다급하게 말했다.
“아이참! 유서는 다른 사내랑 달라! 내 아이 잖아요.”
주요가 ‘하하하’ 웃고 말했다.
“아상. 그의 정체가 탄로 나면 나도 파사도 지켜줄 수 없어. 어쩌면 계속 이동하는 것이 제일 안전할 지도 몰라.”

고상이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위험하다니? 왜?”
주요가 고상의 머리 위에 꽃 비녀를 하나 꺼내 주자서의 머리를 고정하고 말했다.
“아상. 그러니까 이제부터 내가 읽으라고 하는 것들은 읽어. 글을 깨치는데 한 갑자나 걸렸는데 사용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야?”
고상이 주자서의 앞으로 가서 주자서의 머리를 이리저리 돌려보고 말했다.
“예쁘다. 머리를 다 올리는 것도 나쁘지 않네.”
주요가 고상을 보고 고개를 흔들더니 주자서에게 물었다.
“유서. 너도 글을 읽을 줄 알지? 황제가 누구인지도 알고?”
주자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주요가 고상을 보며 말했다.
“자, 봐. 너의 아이도 아는데 네가 모르면 어떡해?”
고상이 입을 꾹 다물고 주자서를 쏘아보았다.

주요가 자리에서 일어나 고상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
“산천대제(山川大帝)께서 아시기 전에 황룡 후토대선을 찾아야 해.”
고상이 고개를 연신 끄덕이다 주요를 보고 말했다.
“근데 그 얘기를 왜 나에게 해?”
주요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상의 어깨를 토닥이고 말했다.
“너의 아이이니 네가 지켜야지.”
고상이 주자서를 보고 말했다.
“나는 안 갈 건데?”
주요가 고상의 얼굴을 마주 보며 말했다.
“아상?”
고상이 주요가 했던 것처럼 주요의 어깨를 잡고 마주 보며 말했다.
“아이참! 걱정하지 마! 파사도 우리 유서를 아주 좋아하니까.”
주요가 고상을 보고 말했다.
“아상. 다시는 유서를 만날 수 없을 지도 몰라.”
고상의 눈동자가 한동안 흔들렸지만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는 얼굴을 꾸며낸 고상이 말했다.
“아니야! 우리 유서는 나를 좋아해서 나를 만나러 올 거야. 그렇지?”
그리고 고개를 비스듬히 숙여 주자서를 보고 방긋 웃었다.

주자서도 고상을 마주 보고 웃기는 했지만 과연 약속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이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주자서의 능력 밖의 일이었다. 애당초 주자서는 어디 갈 마음이 없었다. 주요가 작게 코웃음 치고 어깨너머로 주자서를 보며 말했다.
“유서. 그대가 발의 후예라면 다시는 사람의 세계로 갈 수 없을 것이오.”
주자서가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뜨고 주요를 보았다. 주요가 고상을 탁자에 앉히고 말했다.
“발의 능력은 강력한 양기(陽氣)이니 삼청(三淸)은 물론, 천선(天仙)들도 그대를 원할 것이오.”
고상이 작게 숨을 들이켜고 물었다.
“허! 삼청께서? 우리 유서가 그렇게 귀한 사람이야?”
그리고는 주자서에게 바짝 붙어 앉아 그의 소매를 잡았다. 주자서는 소매를 붙잡아 오는 고상의 손이 기꺼워 몸을 가까이 붙였다.

주요가 자리에 앉아 다정하게 붙어 있는 둘을 보고 웃고는 말했다.
“그래. 너무 귀해서 탈이지. 마침 때 좋게 파사의 봉인이 풀려서 다행이야.”
고상이 고개를 돌려 주자서의 손을 붙잡고 말했다.
“유서. 나를 잊으면 안돼. 혹시 나중에 천존께서 신선으로 삼아서 천궁에 가면 꼭 나를 데리러 와야 해.”
주자서가 고상의 손을 맞잡고 물었다.
“아상. 저는… 저는 사람입니까?”
고상이 주자서의 물음에 주요를 보았다. 주요는 한참 생각하더니 말했다.
“그것은 황룡을 만나게 되면 알게 될 것이오.”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황룡…. 황룡?”
온객행이 다시 누각 위로 올라와 주요에게 두루마리를 건넸다. 주요는 그 두루마리를 고상에게 주었다. 고상이 두루마리를 들고 글자를 하나하나 차근차근 읽었다. 고상이 뜻을 모르는 글자가 많다며 불평하자 주자서가 옆에서 내용을 읽어 주었다. 고상은 두루마리를 주자서에게 줘버리고 주자서가 읽는 것을 들었다.

주자서는 두루마리를 읽으면서 분명히 그 뜻을 이해하는데도 내용에 기가 막혀 어리둥절했다. ‘벌써 한 갑자 동안이나 공석이었던 북해 용왕의 자리를 흑망에게 사여(賜與)하다니….’ 주자서가 고개를 들어 온객행을 힐끔 보았다. 그의 짙은 색 장포 때문에 자꾸만 낮에 보았던 커다란 뱀이 떠올랐다. 온객행이 찻잔을 보고 있던 시선을 들어 주자서와 마주하자 주자서는 어깨를 펄쩍 뛰며 시선을 피했다. 온객행은 낮게 웃으며 말했다.
“유서. 그렇게 겁먹을 것 없네. 나는 지네처럼 물지 않으니.”
온객행의 말에 주요가 작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그러게 저 지네를 어쩌지?”
고상이 주자서가 방금 다 읽은 두루마리를 들어 다시 온객행에게 주고 말했다.
“그럼 파사는 언제 가?”
온객행이 고상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왜 이렇게 나를 보내고 싶어 하는 거야? 지금 갈까?”
고상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아니! 유서는 못 날잖아. 어떻게 가?”
온객행이 미간을 찌푸리고 주요를 보며 말했다.
“유서가 어디를 가는데?”

주요가 소매로 입을 가리고 웃으며 말했다.
“그대의 스승인 탁음대선께도 좋은 구경을 하게 해드려야지.”
온객행이 고상을 보고 말했다.
“아상. 너는 날 수 있잖아.”
고상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날 수 있지.”
주요가 온객행에게 말했다.
“아상은 안 간데.”
주요의 말에 주자서가 고개를 획 돌려서 고상을 보고 말했다.
“아상?!”
고상이 자리에서 일어나 주자서의 어깨에 팔을 둘러 기대고 말했다.
“아이참! 우리 아가. 걱정하지 마. 온객행이 지켜줄 거야. 온객행은 흑룡이 될 몸이니까 걱정할 것 없어.”
온객행이 주요와 고상을 보고 주자서에게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나랑 사람이랑 둘이 가라고? 종화산에?”
주요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람은 밥도 잘 챙겨 먹여야 하고 잠도 잘 재워야 하고….”

온객행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요에게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주요! 그러지 말고 태평호에 두고 나 혼자 서둘러 다녀오는 것이 낫지 않겠소?”
주요가 ‘쯧’하고 혀를 차고 말했다.
“대신 나는 저 지네를 맡을 테니. 자네도 알지 않는가 저 지네의 세 치 혀가 우리를 태평호로 이끌었다는 것을.”
온객행은 뭐라고 말을 하려고 한참 입을 달싹이다가 크게 한숨을 쉬고 자리에 털썩 앉았다. 주자서는 자신의 어깨에 팔을 둘러 기댄 고상을 애처롭게 바라보았으나 고상은 이리저리 시선을 피했다. 온객행은 찻물로 입을 축이고 말했다.
“사나흘은 고사(姑捨)하고 보름도 더 걸리겠는데?”
주요가 긍정하듯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나도 보름 정도는 저 지네를 묶어 둘 방법이 있지.”
온객행이 주요를 힐끔 보고 코웃음 치며 말했다.
“사자형제를 부르게?”
주요가 온객행을 마주 보고 웃으며 말했다.
“나에게는 천도(天桃)만큼 귀하고 값진 것들이 많으니….”
온객행은 고개를 흔들며 고상을 보았다.

서왕모의 천도정원이 있는 옥산(玉山)에서 갓 태어난 화사(花蛇)는 죽은 사람도 살린다는 영약이다. 고상을 살려준 것은 순전히 변덕이었다. 서왕모에게 부탁을 하려고 갔다가 결국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다. 아마 그때 서왕모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영력이 없는 보통의 사람이 천도를 먹으면 영혼이 타버린다는 것을. ‘그래서 내어주지 않았겠지.’ 온객행은 이유 없이 금모원군을 원망한 것 같아 부끄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