偸梁換柱 | 10. 대들보를 훔치고 기둥을 빼낸다.
매미 날개 같이 얇은 옷을 입은 여인들이 낮은 탁상과 포단을 가지고 나왔다. 현리가 앉아 있는 평상 옆에 자리를 만들더니 주자서와 온객행에게 권했다. 곧 탁상 위로 여러 가지 과일과 음식이 나왔다. 온객행이 미간을 찌푸리며 현리를 보고 말했다.
“이런 취미가 있었던가?”
현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온객행 쪽으로 걸어가 탁상 위에 올려진 음식을 집어 입에 넣고는 말했다.
“나도 정말 의미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사람들은 정말 맛있는 걸 먹더라구.”
온객행이 방금 현리가 집어먹은 음식을 젓가락으로 집어 입에 넣었다. 계화 향이 나는 작은 떡은 꿀과 설탕에 절였는지 매우 달았다. 온객행이 음식을 씹어 삼킨 후에 말했다.
“유서는 단 것을 안 좋아하는데….”
현리가 온객행을 보고 눈썹을 찌푸리더니 어깨너머로 온객행을 마주 보고 앉아 있는 주자서를 보았다. 옆에서 시중을 들어주는 여인들에게 손을 내밀어 한사코 거절을 하고 겨우 차를 마시고 있었다. 현리가 ‘흥’하고 코웃음 친 후에 다시 평상으로 가서 앉았다.
온객행과 주자서 옆에서 시중을 드는 여인들을 손짓으로 물러가게 하고 탁상에 올려져 있는 포도를 먹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흑망 그대는 어디 봉인되어 있지 않았나? 오랜만이네.”
온객행이 차로 입을 축이고 말했다.
“그러게. 별고 없었는가?”
현리가 포도를 한 알 더 먹고 말했다.
“비단을 입을 수 있는 신분을 정했더라고. 그걸 없애려고 내가 얼마를 썼는 줄 알아?”
온객행이 소매를 들어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을 보았다. 조금 오래되기는 했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옷은 대부분 비단이었다.
“신분?”
현리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뭍에 나가지 못하는 것은 조금 아쉽지만 그래도 편연주는 충분히 넓으니까.”
온객행이 주변을 둘러보고 말했다.
“그러게. 이렇게 큰 배는 나라에 허가가 필요하다 하던데….”
온객행이 주자서를 힐끔 보았다. 주자서는 얼굴이 빨개져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온객행이 다시 현리를 보았다. 속살이 훤히 비치는 얇은 옷에 다리가 전부 드러나 있는 모습은 확실히 사람의 잣대로 보기에는 조금 야살스러워 보였다.
온객행이 부스스 웃고 말했다.
“현리. 작은 배로 고생하느라 좀 피곤한데.”
현리가 포도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온객행에게 다가와 말했다.
“피곤하다구? 대체 그 작은 배에서 물길이 바뀌는 것도 모르고 뭘 했길래?”
그리고 어깨너머로 주자서를 힐끔 보더니 말했다.
“혹시 내가 너의 여흥을 방해한 것인가?”
온객행이 표정을 구겼다. 온객행은 사담을 좋아하는 현리가 예전부터 껄끄러웠다. 남의 사정에 대해 이것저것 캐는 것을 좋아하는 현리는 온객행과 비슷한 시기에 동정호에서 태어난 파사이다. 서왕모의 눈에 띄어 자예라는 이름을 얻고 홍호(洪湖)에서 영력을 쌓기 시작한 그녀의 원래 모습은 거대하고 오색 빛을 띄는 검은 뱀이다.
온객행이 고개를 흔들며 작게 웃자 현리가 시선을 돌려 온객행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애지중지 아끼다가 만져보지도 못하고 보내지 말고 손에 쥐었을 때 취하라는 말이야.”
온객행이 고개를 돌려 못마땅하게 코웃음 치자 현리가 돌아서 주자서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유서라고 했던가?”
온객행이 자리에서 얼른 일어나 현리의 팔을 잡고 말했다.
“자예. 그만하게.”
현리가 온객행의 팔을 뿌리치고 주자서 앞에 앉아 그를 보고 말했다.
“영력이 있네? 왜 숨겨 놓았지?”
온객행이 현리의 팔을 잡아 일으키며 말했다.
“자예.”
현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온객행.”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리는 자신이 부리는 망상(罔象)을 시켜 주자서를 객실로 안내하게 했다.
주자서는 눈을 둘 곳이 없는 옷을 입은 여인의 안내로 객실 안으로 들어왔다. 여인은 화로에 불을 붙이고 찻주전자를 올려놓고 시중을 들려고 하기에 주자서가 등을 돌린 채로 손을 내젓고 사양했다. 여인은 주자서에게 공손히 인사하고 장지문을 닫고 나갔다. 주자서는 힘이 쭉 빠져서 탁자 곁에 가서 앉았다. 끓어오른 물을 찻주전자에 담고 기다렸다.
“희첩?”
주자서는 고개를 갸웃하고 생각했다. ‘희첩에 내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뜻이 있는 것인가? 나는 사내인데 어찌 다른 사내의 희첩이 된다는 말인가?’
그러다 예전에 읽었던 미자하(彌子瑕)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소년이 나이가 들어 총애가 시들자 군주(君主)는 과거의 죄를 끄집어내 극형에 처했다. (餘桃之罪; 여도지죄) 군주의 마음이란 하루에도 수백 수천 번씩 바뀐다는 내용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참소를 당해 돌아가셨다던 부친께서 알고 계셨을까?’ 주자서는 자신의 처지가 어찌 미자하와 같을까 생각했다. 그는 소년도 아니었고 온객행에게 총애를 받지도 바라지도 않았다. 당장 온객행이 그를 버리고 훌쩍 떠난다면 주자서는 군법을 어긴 도망병일 뿐이니 어쩌면 그 처지가 더 참혹하다. 주자서는 찻잔을 들어 향을 맡았다. 생차(生茶)의 향이 난다. 하지만 맛이 조금 부드럽고 달다.
주자서는 객실을 이리저리 둘러보다 평상 뒤쪽에 작은 창호 문을 발견했다. 그 문을 여니 밖으로 장강의 수면이 보였다. 이제 막 날이 밝아 오기 시작하는지 물안개가 자욱하다. 오던 비는 그쳤는데 하늘에는 아직도 구름이 많다. 온객행이 빌린다던 구름 마차가 저 위에 있을까 싶어서 주자서는 피식 웃었다. 창에 걸터앉아 물안개가 걷히면서 보이는 것들을 찾았다. 저 멀리 악양성(岳陽城)의 포구가 희미하게 보였다. 근처에 줄지어 대어진 배가 잔잔한 물결에 출렁인다. 얼마나 차를 마셨을까 곧 방 안으로 누군가가 들어왔다.
태평호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하는 내내 현리는 주요의 이야기보다 온객행이 데려온 주자서에 대해 더 알고 싶은 모양이었다. 무엇이 재미있는지 실실 웃으면서 그에게 둘의 잠자리의 사정을 물어왔다. 대체 그런 것이 왜 궁금한지 알고 싶지 않았다. 온객행은 얼굴에 열이 올라 방안에 들어오자마자 물을 찾았다. 마침 탁상 위에 찻주전자가 있기에 거기 든 찻물을 얼른 따라 마셨다. 살짝 식은 차는 아주 맛이 좋았다. 그것이 또 마음에 들지 않아 온객행은 찻잔을 탁상 위에 ‘탁’ 소리가 나게 올려 두고 ‘쯧’ 하고 혀를 찼다. 주자서가 창호문 쪽에 있는 병풍 뒤에서 찻잔을 들고나와 온객행 앞에 앉으며 물었다.
“나는 온공자의 희첩입니까?”
온객행은 주자서를 보고 현리가 했던 입에 담을 수 없는 음란한 말들이 떠올라서 얼굴이 빨개졌다. 온객행은 무언가 말하려고 입을 달싹이다가 찻물을 더 따라 마셨다.
온객행이 한참 뜸을 들이다 말했다.
“현리가 부탁한 물건이 있어서 악양의 북쪽인 성릉기(城陵矶)에 잠시 들를 것이오.”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이고 병풍 너머로 보이는 장강을 보았다. 온객행이 주자서를 따라 시선을 돌려 창호문 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보았다.
“오늘은 오후에 다시 비가 올 테니, 배에서 내릴 것이라면 말씀하시오. 동행하겠소.”
주자서가 시선을 온객행에게 옮겨 말했다.
“그럴 것 없습니다.”
온객행이 고개를 흔들고 말했다.
“현리에게 붙잡히는 것보다 포구를 구경하는 것이 낫습니다.”
주자서가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붙잡히는…?”
온객행이 몸서리를 치며 말했다.
“현리는 남의 정사(情事)에 아주 관심이 많소.”
주자서가 얼굴을 조금 더 구기고 말했다.
“저…정사?”
주자서가 온객행에게 물었다.
“누구의…?”
온객행이 본인과 주자서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자서가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말했다.
“희첩이 그 희첩이란 뜻이오?”
온객행이 차로 입을 축이고 말했다.
“그럼 희첩에 또 무슨 다른 뜻이 있소?”
주자서가 온객행에게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어찌… 어찌! 어찌!”
온객행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시오. 내가 말하지 않았소. 나는 겁이 많은 사람은….”
주자서가 팔을 뻗어 온객행의 말을 끊고 말했다.
“그만. 제발 그만하시오.”
온객행이 뻗어진 주자서의 팔을 잡아 자리에 앉히고 말했다.
“일단 희첩인 것으로 합시다. 그래야 영력이 있는 것도 이상하지 않고 탁음대선을 뵈러 가는 것도 이상하지 않을 테니.”
주자서가 온객행의 팔을 뿌리치고 말했다.
“나는 사내에게 관심이 없소.”
온객행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것은 아직 사내를 못 만나봐서 그런 것 아니오?”
주자서가 팔로 몸을 감싸며 말했다.
“그게 무슨 뜻이오?”
온객행이 주자서에게 얼굴을 붙이고 귓가에 속삭였다.
“아무 뜻도 없소. 무슨 뜻이 있었으면 하시오?”
주자서가 온객행에게 조금 멀어지며 눈치를 보자 온객행이 부스스 웃었다.
정오가 되기 전에 편연주는 성릉기 부두에 도착해 닻을 내려 접안(接岸)했다. 주자서와 온객행이 있던 갑판 바로 아래의 객실이 있는 층에서 포구로 다리를 내려 연결해 두었다. 객실이 있는 층 아래에도 사람이 있었는지 하인들이 하나둘 나와서 짐을 꺼내 들고 선창(船艙)으로 내려갔다. 온객행은 밖으로 나가기 전에 소매에서 봇짐을 꺼내 주자서의 옷을 바꿔 입혔다.
전에는 벗기면 벗기는 대로 입히면 입히는 대로 가만히 있던 주자서가 옷을 받아 병풍 뒤로 가서 손을 내젓고 말했다.
“알아서 입을 수 있으니 괘념치 마시오.”
온객행이 주자서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이제 와서 무슨 내외를 하시오? 이미 다 보았는데.”
주자서가 고개를 휙 돌려 온객행을 쏘아보며 말했다.
“무엇을 다 보았다는 것이오!”
온객행이 양손을 들고 흔들며 말했다.
“성내지 마시오. 농이었소. 천천히 갈아입고 나오시오. 나는 먼저 선창으로 내려갈 테니.”
주자서가 작게 혀를 차고 말했다.
“희롱은 가서 온공자 좋다는 사람과 하시오.”
온객행은 주자서의 말에 낮게 웃으며 객실을 나갔다.
온객행은 선창에 서서 편연주에서 내리는 물건을 보고 갑판의 난간에 기대어 온객행에게 손을 흔들고 있는 현리를 보았다. 하인들이 내리는 짐들 안에는 이런 것을 사람과 거래해도 괜찮을 것일까 싶은 걱정스러운 물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음식이나 의복에 관련된 물품이었다. 온객행이 마지못해 현리를 향해 소매를 흔들자 현리가 소리쳤다.
“칠석에 좋아하는 사람이랑 능각(菱殼; 마름열매)을 먹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 하네! 내가 너를 위해 특별히 주문해 두었어!”
온객행이 헛웃음을 치고 시선을 돌리다 마침 배에서 나오는 주자서와 눈이 마주쳤다.
온객행은 혹시 현리가 하는 말을 들었을까 주자서의 안색을 살폈다. 주자서는 온객행이 입던 얇은 무명으로 만든 푸른색의 장포를 입고 검은색 요대를 쪽빛 동다회(童多繪)로 고정했다. 요패가 없는 것이 아쉬워 온객행은 장포 안에 손을 집어넣어 고상이 챙겨준 요패 하나를 꺼내 주자서의 요대에 달아 주었다. 백동(白銅)으로 만든 작은 그릇 안에 연잎을 넣어 놓았는지 연잎 향이 났다. 검은 술이 달린 요패는 주자서랑 퍽 어울려서 온객행은 주자서를 보고 웃었다. 주자서는 요대에 달린 백동으로 만든 작은 함을 만져보더니 손을 들어 향을 맡고는 미소 지었다.
두사람은 선창에서 나와 상점이 있는 부둣가로 나왔다. 짐을 옮기고 싣는 사람이 많아 주자서는 자연스럽게 온객행의 팔을 잡았다. 사람들을 빠져나와 시장에 다다르자 주자서는 온객행을 잡아 세우고 품에서 은정과 금주가 든 염낭을 건네주며 말했다.
“딱히 집을 살 것이 아니면 염낭은 꺼내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온객행은 주자서가 주는 염낭을 받아 소매에 넣고 말했다.
“나는 딱히 필요한 물건이 없으니 걱정 마시오.”
온객행은 주자서의 소매를 잡아 그를 시장으로 이끌며 말했다.
“나는 구경하는 것을 아주 좋아하니 나는 상관치 말고 일 보시오.”
주자서는 미곡상(米穀商)이 있는 거리를 여기저기 둘러보더니 노점에서 찐쌀을 한 되(升)를 샀다. 주자서는 무게를 가늠해 보고 나서야 상인에게 동전을 세어 건넸다. 평소라면 10문 정도인 찐쌀의 가격이 20문도 넘는다. 온객행은 주자서에게 건넨 찐쌀을 받아 소매에 넣었다. 주자서가 온객행을 힐끔 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말린 연실(蓮實; 연밥)과 우두(芋頭; 토란)도 샀다.
온객행이 주자서가 산 자루를 소매에 넣으며 말했다.
“유서. 현리가 설마 우리를 굶기기라도 할 것 같은가?”
주자서가 작게 고개를 흔들고 말했다.
“고상은 매일 밥을 먹지 않아도 된다고 한 것 같은데 그것은 온공자나 현리낭자도 마찬가지 아니오?”
온객행은 주자서가 현리를 부르는 호칭에 ‘하하하’ 하고 웃고 말았다. 현리를 아는 신선이나 요괴 중에 현리를 ‘낭자(娘子)’라고 부를 만한 이는 없다. 부인(婦人)이면 몰라도. 주자서는 온객행을 한참 쏘아보더니 다시 포구로 향했다. 온객행은 얼른 주자서의 소매를 붙들어 그를 멈춰 세우고 말했다.
“하하하. 유서. 여기까지 왔으니 요기라도 하고 가세.”
온객행은 주자서의 등허리에 손을 얹고 그를 주루가 있는 거리로 안내했다. 주자서는 부루퉁한 표정을 지었지만 온객행의 손길을 거절하지는 않았다.
다시 편연주로 돌아왔을 때 하인들은 편연주 안으로 많은 짐을 싣고 있었다. 꿩과 오리 같은 가금류(家禽類)도 있었는데 온객행이 새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현리가 우리를 굶기지는 않을 걸세.”
주자서가 고개를 들어 갑판을 보았다. 온객행도 따라서 위를 보았지만 난간에는 아무도 없었다. 둘은 선창에 연결된 다리를 건너 승선했다. 주자서는 전에 안내받았던 객실 쪽으로 몸을 틀었는데 온객행이 주자서의 소매를 잡아 갑판으로 이끌었다. 주자서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현리낭자께서는 항상 그런 차림이신가?”
온객행이 주자서를 힐끔 보고 물었다.
“그런 차림이라니?”
주자서가 작게 혀를 차고 고개를 흔들었다. 온객행은 주자서를 빤히 보다가 말했다.
“내가 소개할 때도 말해 주었지만 그녀도 나와 같이 검은 뱀… 아니, 교룡이네.”
주자서가 몸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그대처럼 집채만 한가?”
온객행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가 집채만 한가?”
주자서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온객행이 주자서의 소매를 놓아주고 고개를 돌려 갑판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며 말했다.
“내가 집채만 하면, 그녀는 산만 하네.”
주자서가 온객행의 뒤통수를 쏘아보며 말했다.
“참으로 괴팍하오. 어찌 여인에게 그런….”
현리가 불쑥 갑판으로 올라오는 계단 난간에 기대며 말했다.
“맞아. 흑망. 정말 괴팍하다. 산만 하다고?”
온객행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자예. 들었는가?”
온객행이 갑판에 올라서자 현리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보았다. 온객행이 양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틀린 말인가? 내가 겨우 집채만 한데….”
현리가 고개를 돌려 온객행 뒤에 올라오는 주자서의 소매를 잡고 말했다.
“유서라고 했던가? 너는 정말 다정하구나. 어디 정말 잘 속는지 볼까?”
그리고 주자서를 보는 현리의 눈은 온통 검은색이었다. 주자서가 ‘하’하고 작게 숨을 들이켜고 현리의 품으로 쓰러졌다. 온객행이 현리의 품에 안긴 주자서의 팔을 잡고 말했다.
“유서!”
현리가 온객행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편연주 안에서 내가 모르는 일이 있으면 안되지.”
온객행이 주자서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자예! 이게 무슨 짓인가!”
현리가 순순히 주자서를 내어주며 말했다.
“정인이라고? 흑망. 그새 내가 누구인지 잊었어?”
온객행이 바닥에 앉아 주자서의 얼굴을 쓸었다.
주자서는 편연주의 갑판 위에서 갑자기 안개가 자욱한 숲길에 서 있다. 어떻게 그리로 왔는지 그곳이 어디인지 왜 왔는지 기억나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주자서는 주위를 둘러보다 사람이 다니는 작은 길을 발견하여 정처 없이 길을 따라 걸었다. 그러다 길 끝에 하얀 옷을 입은 남자를 만났다. 남자는 주자서를 슬픈 얼굴로 보더니 손짓했다. 주자서는 다가가고 싶었지만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얀 옷을 입은 남자는 한참 주자서에게 입을 벙긋거렸다. 무언가 말하고 있는 듯하였으나 들리지 않았다. 남자가 고개를 숙이고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 그가 뒤로 돌아서 떠나려고 하자 그제야 발이 떨어졌다. 주자서는 그 남자를 부르며 안개 속을 달렸지만 주자서는 아무도 찾을 수 없었다. 점점 머리 위가 밝아지며 점멸하더니 온 세상이 새하얗게 바랬다.
온객행은 주자서를 객실의 침상에 옮겨 눕히고 뒤따라 들어온 현리를 보았다.
“이게 정말 무슨 짓인가?”
현리가 누워 있는 주자서를 보고 말했다.
“이… 이 아이는?”
온객행이 한숨 쉬며 말했다.
“때가 되면 말하려고 했네. 이렇게까지 해야 했는가?”
현리가 침상에 걸터앉아 주자서의 가슴에 손을 올렸다.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자 곧 주자서 주변을 검은 연기가 몰려왔다. 주자서의 몸에서 영력이 조금씩 새어 나오더니 현리의 영력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현리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정말… 오랜만이네.”
온객행이 현리에게 물었다.
“발을 만난 적이 있어?”
현리가 주자서의 몸에서 손을 떼고 온객행을 보며 말했다.
“이자는 사내가 아닌가?”
현리의 검은 눈이 점점 사람의 눈으로 변하는 것을 본 온객행이 주자서의 발치에 앉아 말했다.
“주요도 같은 말을 했어.”
현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수원대선이라면 보이셨겠지. 너는 봉인이 풀린 지 얼마 안 돼서 그렇고.”
온객행이 현리에게 물었다.
“혹 후토대선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가?”
현리가 잠시 고개를 갸웃하더니 물었다.
“후토대선은 왜?”
온객행이 주자서를 보고 말했다.
“주요는 이 치를 후토대선께 데려다줘야 한다고 하셨어.”
현리가 ‘흥’하고 코웃음 치고 말했다.
“황룡께 가봐야 관심도 없을 텐데. 차라리 발을 찾는 것이 낫지.”
온객행이 현리를 마주 보자 현리가 일어나며 말했다.
“자신의 죄를 짊어지고 가뭄 귀신이 된 딸을 찾아서 뭣하겠어. 게다가 황룡은 천궁에서 쫓겨났잖아. 자기 몸 하나 간수하는 것도 버거울 텐데 이런 혹을 데려다주면 어디 시집보낸다는 소리나 나오겠지.”
온객행이 주자서를 보고 말했다.
“사내는 싫다던데….”
현리가 온객행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너도 퍽 다정해졌네.”
온객행이 현리를 보고 물었다.
“무슨 짓을 한 거야?”
현리가 객실의 장지문을 열고 말했다.
“흑망. 그대는 내가 환영의 도술을 쓰는 것을 잊었나?”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는 뭘 보게 되는 건가?”
현리가 주자서를 보고 말했다.
“뭐라도 볼 수 있을까 모르겠네. 발의 영력이 이렇게 틀어 막고 있는데. 어쩌다 사내가 된 거지?”
온객행이 표정을 구기자 현리가 답했다.
“발을 계속 계곤산에 가둬 둘 수는 없잖아. 그녀가 치러야 할 죗값이 아닌데.”
현리는 주자서를 보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발은 정말 오랜 시간 동안 계곤산에서 나오지 않았다. 외로움을 견디다 더 참지 못하고 산을 내려왔을 때, 사람들은 그녀를 가뭄 귀신이라 부르며 물러나길 바라는 제사를 지냈다. 그녀는 가신 하나 없이 그렇게 계곤산에 갇혀 있었다. 천녀였던 그녀는 하늘로 올라가기 위해 계속해서 수련했지만 외로움으로 마음에 병을 얻은 그녀는 종국에는 자신이 누구인지도 기억하지 못하는 요괴가 되고 말았다. 그런 그녀를 금모원군인 서왕모가 발견하고 그녀의 영력을 거둬 사람으로 살게 해주었다.
금모원군은 그녀가 계곤산에 갇혀 있었던 동안만큼의 시간을 발에게 약속하고 그 시간이 지나면 발을 데리러 오겠다고 말하고 떠났다. 금모원군이 다시 발을 찾아갔을 때, 발은 이미 죽고 그녀의 딸이 금모원군에게 자비를 청했다. 발이 사람이 되어 낳은 딸에게 영력을 되돌려줄 수 없었던 금모원군은 발의 후손의 몸에 그녀의 영력을 봉인해 두었다. 어머니에게서 딸로, 딸에게서 또 딸로 발의 능력은 멈추지 않는 양기였기 때문에 발처럼 그녀의 힘을 통제할 수 있는 후손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던 것이다. 현리는 금모원군이 태양의 힘을 봉인하는 것을 보았다.
현리가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사람들이 그녀를 가뭄 귀신이라 불렀네.”
온객행이 고개를 숙였다. 현리가 말했다.
“전쟁의 신 치우(蚩尤)를 죽인 것은 천궁의 모두가 공헌이라 칭하는 일인데도 그녀는 사람들에게 가뭄 귀신이라 불렸네. 하늘로 올라가지도 못하는 그녀를 내버려 둔 것은 그녀의 아비 황제(黃帝) 황룡이네.”
황룡은 사신과 오룡의 수장이 되려고 설치다 당시 현무였던 현천상제(玄天上帝)를 죽이고 사람들의 세상으로 쫓겨났다. 후에 사람들의 왕이 되어 그들의 후손이 사람의 세상을 채웠다. 현리가 웃으며 말했다.
“자기 죗값은 결국 어떻게든 치르게 되어있어.”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그럼 이 치를 어쩌지?”
현리가 온객행을 물끄러미 보더니 말했다.
“정말 희첩으로 삼지 그러나? 이 치를 희첩 삼으면 사방신 자리 정도는 하나 꿰차지 않겠나?”
온객행이 코웃음 치고 말했다.
“자예. 그대야 말로 잊은 것인가? 내가 탁음대선의 제자인 것을?”
현리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주자서를 보고 말했다.
“사내는 싫어한다고…?”
온객행이 눈썹을 찌푸리고 현리를 보자 현리가 말했다.
“아깝지 않은가? 물론 나는 승천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온객행이 주자서의 얼굴에 흘러내린 머리를 정리하며 말했다.
“사실 황룡에게 데려다주어도 소용없을 것 같기는 했네. 이 치는 어쩌면 천궁으로 가야 할지도 모르겠어.”
현리가 온객행을 보고 씨익 웃으며 말했다.
“내가 희첩으로 삼으면 어떤가?”
온객행이 고개를 획 돌려 현리를 보고 말했다.
“그… 그건… 좀….”
현리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온객행. 애지중지 아끼다가 만져보지도 못하고 보내지 말고 손에 쥐었을 때 취하라는 말이야. 사람은 한 갑자를 겨우 살아내지 그중에 겨우 절반 정도만 침상에서 데리고 뒹굴 수 있다고. 어찌나 연약하고….”
온객행이 현리에게 다가가 입을 막으며 말했다.
“자예. 제발. 그런 얘기는 보통 남들과 하지 않네.”
현리가 온객행의 손을 치우며 말했다.
“그러니까! 사내끼리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온객행이 현리의 입을 막고 그녀를 장지문 밖으로 밀며 말했다.
“그런 얘기라면 그대의 하인인 망상들과 하게.”
현리가 장지문을 닫으려는 온객행의 손을 잡고 말했다.
“온객행. 이번에는 너무 늦지 않게 먼저 다가가는 것도 방법이네.”
온객행이 현리의 손을 뿌리치고 장지문을 닫았다. 온객행은 영견을 찾아 물을 묻혀 침상으로 가서 주자서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현리의 환영은 보통 두 시진을 넘기지 않는다. 온객행은 내심 주자서가 환영 속에서 무엇을 찾을지 기대 되었다.

0 comments: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