雨霖鈴 第1

1. 人去楼空
사람이 가고 남은 빈 집.

진회장(秦懷章)은 앉아서 손에 들린 제령을 읽었다. 이 제령은 올해 정월이 지나 각 고을에 내려진 황제의 명령을 적어 옮긴 것인데 그 내용은 이러했다.

“천자를 정하는 일에 사리분별 못하고 폐추(1)가 되어 천자의 뜻에 무불간섭(2) 하는 자는 엄벌 할 것이다. 우물물은 강물을 침범하지 않는다.”(3)

몇 글자 안되는 글에 진회장은 괜히 소름이 돋았다. 아무래도 낙양에 무슨 일이 벌어진 모양이다. 사계산장은 양주에 있어서 수도인 낙양과는 거리가 멀다. 태산파니, 화산파니 하는 으스대기 좋아하고 낙양 근처의 문파가 관의 일에 관여하여 천자의 심기를 거스른 모양이었다. 그걸 보고 있는 소림사가 또 가만히 있을 리 없으니 그 이야기가 남쪽 양주까지 흘러내려온 것은 이 것이 터무니없는 뜬 소문이 아니라는 소리다.

자고로 황실과 무림은 서로의 일에 참범하지 않는 것이 어떤 관습이었다. 보통 이렇게 무림과 관가가 충돌하는 일이 생기면 이 혼란을 틈타 관의 이름을 빌어 악을 처단한다는 소리가 나오고, 그렇게 되면 또 그동안의 쌓인 파문간의 시비를 가리려고 들며 싸움이 커지는 것이다. 강호를 떠도는 허무맹랑한 소문이야 하나 둘이던가? 그런 것이야 사사로운 개인간의 원한이니, 없는 것 치면 또 못할 것도 없지만 천자의 제령은 다른 일이다.

정파니 사파니 이단이니 하는 싸움이야, 가서 몸을 맞대고 서로 싸우면 될 일이다. 관의 이름으로 누명을 쓰면 그건 구족이 멸할 일이다. 파문의 존망이 걸린 일이다. 이 소식은 예전 진회장이 낙양에서 학문을 유학할 때 알게 된 하급 관리인 진영(陳迎)이 보내준 서신이다. 진회장이 유학 당시 진영은 보사(步士)였는데, 지금은 태산태수의 직할 부대인 동군을 지휘하는 부대장이다. 그는 진회장이 알고 있는 사람 중에 제일 권세욕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그래서 살아 남았다. 그는 진회장에게 남은 몇 안되는 낙양의 연락책이기도 하다.

황제에게는 황후 왕씨(王氏)에게서 두 아들을 귀비 유씨(劉氏)에게서 아들 하나를 두어 황자가 모두 셋이다. 이것도 한참 오래전의 이야기를 귀동냥으로 주워들은 내용이다. 황제는 아들을 두고서도 아무도 태자 삼지 않았는데, 이게 그 유명한 황제의 의심병이다. 그러니 대비를 해야 했다. 진회장은 사형, 사매를 모아 사숙이 폐관수련을 하고 계시는 사계산장 뒷산에 올랐다.

벌써 10년째 폐관 수련중인 진회장의 사숙 주구전(朱求田)은 양주일대의 강호에서는 가장 큰 어르신이었다. 이런 저런 환난을 겪고 혼자 오래 살아남은 죄라며 수양을 위해 산으로 들어 가신 것이다. 하지만 말이 좋아 폐관 수련이지, 종종 사계산장에 들러 사제와 사손들의 보법을 고쳐주고 가시거나, 산에서 말썽을 피우는 들짐승을 잡아 놓고 가시는 일을 하시며, 사계산장 밖으로 나가시지 않아 대외적으로 그렇게 된 것이다.

진회장은 뒷산을 사형제자매와 함께 걸으며 말했다. “혹 낙양에 연이 닿는 분 없소” 다들 고개를 저으며 묵묵히 길을 올랐다. 그들 중 관과 제일 인연이 많은 것은 양주자사의 가좌 중 하나인 율령사를 하고 있는 양가인(陽茄仁)의 부군 정회(貞會) 정도였다. 진회장이 괜히 그녀를 흘끔 쳐다보자 양가인이 입을 열었다. “거리 상으로도 그렇고, 사계산장이 딱히 조정에 연을 둔 것도 아닌데 무슨 걱정을 하십니까?” 그 말에 길을 오르던 사형, 사매의 고개가 일제히 진회장을 향했다. 진회장은 고개를 숙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진회장의 아버지는 사실 강호와도 관과도 연이 없는 사람이었다. 어쩌다 혼란한 시기에 전란에서 높으신 분을 만나 목숨을 건지고 우정을 나누면서 이 이야기는 시작한다. 그 높으신 분에게는 아들이 있었는데 하필 그 아들이 진회장과 연배가 비슷하여 피난길에 서로를 의지하게 된 것이다. 그러다 양주 임해로 피난을 하게 되었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높으신 분의 아들인 주희(朱熹)는 임해(臨海) 사계산장(四季山莊)에서 무학을 유학하였고, 진회장은 사례(司隸) 낙양에서 학문을 유학하였다. 실질적으로 사계산장에서 낙양 땅을 밟아본 이는 손에 꼽혔고. 진회장은 그 중 한 사람이었다. 주희는 나중에 높으신 아버님의 영향으로 훌륭한 장군이 되었고 요동을 침략한 북방이민족을 막아낸 공으로 당시 황제가 아끼는 서경(曙景)공주와 결혼하여 서국공(署國公)으로 봉해졌다.

금위군의 통령 자리도 선황제가 공주의 부마가 공주 곁을 비우고 사방을 떠도는 것을 막기위해 내려준 직책이기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 황제는 승하했고, 서경공주는 경무(景武)장공주로 봉해졌다. 현황제의 책봉은 밖에서 보면 매우 당연하고 조용한 일이었으나 당시 상황을 살펴보면 모를 일이었다. 새 황제는 서국공을 정치적으로 견제했고 그 때문에 종종 서국공을 강호로 보내 떠도는 소문이나 무림의 일을 수집하게 했다. 금위군의 통령이면서 강호를 떠돌게 된 것이다. 그러다 황제는 옛 망국의 무고(武庫)에 대한 소문을 알게 되었다. 현 황제는 그 일을 서국공에게 일임했고 강호의 일을 잘 아는 진회장이 그를 도와 함께 강호를 유람한 것이다. 강호를 유람하는 동안 진회장은 아미파의 제자인 아내, 추수(秋水)를 만났다.

추수가 유람 중 아이를 가지게 되어 서국공과 진회장은 아쉬운 이별을 하게 되었고 그 이후로 둘은 가끔 서신을 주고받는 것 이외에 그렇다 할 왕래가 없었다. 몇 년 후 진회장은 서국공에게서 서신을 받게 된다. 서국공의 서신은 상황이 급박했는지 몇 글자 적혀 있지 않았고, 그 마저도 사계산장에서만 쓰이는 간단한 암호문으로 되어 있었다. 진회장이 바삐 말을 몰아 보름만에 낙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무슨 일이 벌어지고 난 이후였다. 금위군이 서국공의 저택을 포위하고 있었고 주희 본인은 이미 옥에 갇혀 만날 수 없었다. 그날 밤 진회장은 몰래 담을 넘어 서국공의 저택에 숨어 들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경무장공주를 알현했다.

외실에는 하인 한 명 없이 경무장공주와 그의 어린 아들만 있었는데 진회장이 무릎을 꿇고 인사하자 장공주가 그 인사를 받으며 아들에게 말했다. "사부께 인사 올리거라." 그 아들은 장공주 옆에서 숨죽여 울고 있었는데 장공주의 말에 고분고분 따르며 땅에 머리를 붙이고 진회장에게 절했다. 장공주가 말했다. “이 아이는 이제 이름이 없소. 주씨도 사마씨도 아니오.” 그 말에 땅에 머리를 붙이고 울고 있던 아이가 고개를 들어 장공주의 치맛자락 붙들었다. “흐…흐흑… 모친!” 장공주는 한참 눈을 감고 서있다. 그리고 눈을 떠 자기 치맛자락을 붙들고 울고 있는 아이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숨을 고른 그녀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나며 아이의 손에서 모질게 치맛자락을 빼냈다. “가시오. 내 아들 주영은 오늘 우물에 빠져 죽었소.” 무릎걸음으로 장공주를 쫓는 아이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아이는 훌쩍이며 장공주를 불렀다. “모...모친… 모친!!” 큰 소리도 내지 못하고 숨 죽여 어미를 찾는 것이 안쓰러웠으나 상황이 녹록치 못해 지금 가야 했다. 장공주께 예를 다해 작별을 고한 진회장은 아이를 안아 들었다. 조금 버둥거리더니 곧 멈추었다. 아이는 장공주가 있는 외실 쪽에 눈을 떼지 못한 체 손으로 입을 막고 울었다. 진회장은 바쁘게 발을 놀려 사계산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같은 날 밤 경무장공주는 서국공 주희의 무죄를 보인다며 주택(朱宅) 대문에 목숨을 걸었다. 하지만 황제는 믿지 않았다.


서국공과 장공주의 아들은 단지 태사숙과 성씨가 비슷하다는 이유로 태사숙의 질손자가 되었다. 자서(子舒)라는 이름은 예전에 주희가 강호에서 썼던 가명 중 하나이다. 이제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도 진회장을 포함해 얼마 없지만. 다른 또래 아이들보다 조금 조용하고 재미없는 녀석으로 자랐다. 강호에 관가와 엮여 부는 바람은 어느때이고 있었지만 이번 바람은 사계산장까지 불지도 모를 일이다. 사계산장의 장문과 장로들은 지금 태사숙의 거처에 앉아 있었다. 태사숙은 출타 중인지 보이지 않았다.

제일 연장자인 서소강(徐少強)이 화로의 불을 피우며 부산을 떨자 필장풍(畢長風), 양가인도 주변에서 주섬주섬 일을 찾아 하기 시작했다. 진회장만 앉아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정월이 지난지 얼마 안되었는데 또 무슨 일로 이렇게 다들 찾아온 것이냐?” 다들 하던 일을 멈추고 태사숙께 인사했다. 문을 등지고 앉아 있던 진회장도 일어나 태사숙을 뵈었다. “주사숙.”

필장풍이 내온 차를 사계산장 어른들이 화롯가에 빙 둘러 앉아 마셨다. 진회장이 건넨 제령을 읽은 주구전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것은 생각의 소홀함을 경계하고자 하는 것이냐? 아니면 살핌이 지나침을 경계하고자 하는 것이냐?” 양가인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무엇을 경계하고자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태사숙은 양가인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진회장을 보았다. 진회장은 산을 오를 때 내 쉬었던 그 깊은 한숨을 또 내 쉴 수밖에 없었다.

주자서의 신분을 아는 이는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람과 본인 뿐이다. 한참 아무 말도 없이 찻물을 들이켜던 진회장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벌써 10년도 지난 일이고, 낙양에 이제 그 아이를 아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 말에 태사숙이 콧방귀를 끼며 말했다. “손바닥으로 하늘이 가려지더냐?” 앉아있던 필장풍도 거들었다. “낙양에 그 아이를 아는 이가 없진 않네. 단지 제일 몰라야 할 사람이 안다는 것이지.” 필장풍의 말에 방에 있던 사람이 모두 동의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섯사람은 또 말없이 다 식은 찻물만 들이켰다.

며칠 태사숙을 방문하던 다섯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한참을 고민하였으나 답을 찾을 수 없어 답답하였다. 답답한 마음에 그들은 제자들을 시켜 술을 들이게 하고 말았다. 정월 대보름이 지나 첫 그믐이 가까워질 동안 그들은 태사숙의 거처를 찾아 방법을 찾는 다는 핑계로 벌써 보름이나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착실히 훈련을 하던 제자들도 사계산장 어르신들의 행태에 마음이 해이해진 것은 순전히 장문과 장로들의 탓이다. 근처에 있는 다른 문파들은 사람을 꾸려 낙양으로 사람을 보냈다는데 사계산장만 마치 제령을 아직 받아 보지 못한 문파처럼 변함이 없었다. 이것은 태사숙이 괜한 행동을 엄하게 단속했기 때문인데 명절 기분을 내는 이 술판이 다른 문파의 방문을 거절할 좋은 구실이 된 것은 사계산장 어른들만 아는 일이었다.

그들은 술을 마시면서도 서로 의견을 교환했는데 그러는 새 시기는 우수를 지나 경칩이 다가오고 있었다. 논과 밭을 갈 일손을 요청하는 사람들이 마을에서 오자 더 이상은 문을 닫아 놓고 모른척할 수 없는 상황까지 온 것이다. 게다가 날이 풀리자 숭산에서 태사숙을 초청하는 서신이 왔다. 소림사에서 온 것이다. 그들은 청명에 숭산에서 원로들의 논의를 열어 천자의 제령에 대해 토론하는 자리를 갖고자 양주의 어른이신 태사숙의 참가를 부탁하는 내용이었다. 무엇을 토론하겠다는 것인지 그 의도가 심히 의심되었지만 그렇다고 또 참석 안 할 수도 없었다. 사계산장은 비록 그 역사가 짧으나 양주에서는 꽤 큰 세가이고 게다가 혼란한 시기를 겪으며 근처에 많은 문파들이 스러져 갔기 때문이다. 그 것은 양주가 속해 있던 나라가 망한 이유도 있었고, 관과의 일을 이런 저런 이유로 피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또 다시 태사숙의 거처에 모인 사계산장 제자들은 둘러 앉아 차를 마셨다. 필장풍이 입을 열었다. “다른 문파가 다들 저리 바삐 움직이는데 오히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그것 또한 의심을 살 수 있습니다.”그러자 양가인이 거들었다. “관리라는 자들은 유독 의심증이 깊어 호의미결(4) 하는 것을 본 일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태사숙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내가 10년동안이나 폐관수련이라는 명목 하에 강호에 나서지 않았거늘, 어째 사람들은 나를 잊지 않는구나.” 태사숙의 말에 제자들은 괜히 걱정이 되었다. 진회장이 말했다. “사숙, 사숙께서 꼭 가셔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자 서소강이 입을 열었다. “그래도 양주에서 제일 큰 어르신이니 강호에서 사람을 초대하여 여는 대회라면 참석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의심을 살 수 있습니다.” 듣고 보니 또 맞는 말이었다.

요 근래는 전란과 환란이 끊이지 않는 시기였다. 이제 천하가 통일되어 조금 조용한가 싶었는데 또 그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상황이 이러 하니 황제의 의심증이 심해져 괜히 무림의 일까지 간섭하는 것인가 싶기도 했다. 그들은 또 왕래의사를 결정하는 핑계로 태사숙의 거처에서 거나하게 술판을 벌였다. 정말 더 이상 지체하면 청명에 맞춰 숭산에 도착할 수 없는 때가 되어서야 그들은 어떻게 할지 시간에 쫓겨 결정했다.

진회장은 그날 오후 모든 훈련이 끝난 시간에 제자들의 거처로 갔다. 힐끔 안을 들여다보니 이쪽도 차와 다과를 놓고 유행하는 시가를 읊으며 장문과 사계산장의 어른들이 태사숙의 거처에서 행하는 태를 따라 놀고 있었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법이니 진회장은 제자들을 탓할 마음은 없었으나, 분위기를 깨지 않고는 주자서를 불러내기가 곤란하였다. 몇 번 헛기침으로 인기척을 내고 장지문을 열어 발을 들여 놓자 제자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다. “사부님!”

이 처소에 있는 아이들은 대략 지학을 넘긴 아이들로 사계산장에 들어온 지 칠년이 넘은 아이들이 대부분이다. 이 아이들은 그 재주가 제각각 달라서 공통된 사계산장의 무공을 배우는 것이 아니면 각자 다른 사숙 과 사모를 모시며 배우는 아이들이다. 서소강의 아들인 서공(徐貢)은 약학의 재능이 있어 양가인의 제자가 되었고 진회장의 아들 진구소(秦九霄)는 체술에 재능이 있어 필장풍의 제자가 되었다. 주자서는 그 귀한 핏줄이 어디 가지 않는지 머리가 좋아 사람 부리는 일을 잘하여 진회장이 데려다 장문 후계자로 키우고 있다.

진회장은 방안을 둘러보았다. 인사를 하는 제자들 중에 주자서가 없다. 다른 아이들이 찻잔을 기울이며 풍류를 떠들 때 자기 침상 위에 등롱 하나를 온전히 홀로 차지하고 죽간을 읽고 있었다. 다른 제자들이 사부에게 인사하는 것도 모른 채 뭐가 그렇게 재미 있는지 죽간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진회장은 주자서를 조용히 불렀다. “자서야 내 주숙께 가는데, 가는 길 제등을 밝혀다오.”자기를 부르는 소리에 퍼뜩 놀라더니 사부에게 공손히 인사했다. 주자서는 조용히 대답하고는 보고 있던 서간을 정리하고 밖으로 나갔다. 각고에서 제등 하나를 가져와 안에 초롱을 넣었다.

뒷산으로 향하는 샛문에 진회장이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제등을 들고 온 주자서를 발견한 진회장은 주자서에게 먼저 가라며 손짓하고 그 뒤를 따라 뒷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일각 정도 걸어서 사계산장에서 조금 떨어졌을 때 진회장이 주자서에게 물었다. “자서야, 너 낙양에 있을 때 일은 얼마나 기억하느냐?” 진회장의 물음에 발걸음이 멈춰버린 주자서는 제등에서 눈을 떼고 진회장을 바라봤다. 당황과 슬픔이 섞인 표정이다. 주자서는 다시 고개를 숙여 들고 있는 제등을 한참 보았다. 진회장은 그런 주자서를 기다려 주지 않고 앞서서 태사숙의 거처로 향했다. 주자서도 이내 곧 그를 따라 걸었다. 거처에 다 도착했을 즈음에 주자서는 잠시 멈춰 조용히 말했다.

“저에게는 이름이 없습니다.”

진회장은 그 말 뜻을 한참 생각하고 서있다가 태사숙의 거처에 있는 싸리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섰다. 사숙의 거처에는 불이 꺼져 있었는데 진회장은 큰 소리로 인사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주숙! 부족한 제자가 가르침을 청합니다.” 거처 안으로 들어가자 주구전은 방안에 눈을 감고 앉아 진회장이 들어오는 쪽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뒤에 제등을 내려 놓은 주자서도 바닥에 머리를 대고 절하며 인사했다. “주자서. 태사숙을 뵈옵니다.” 주자서를 발견한 태사숙은 그제야 눈을 떠 그들을 보았다. 그리고 목을 ‘흠’하고 가다듬고는 말했다. “둘 다 이리와 앉게.” 진회장이 주구전 앞에 놓인 화로위에 찻주전자에 물과 찻잎을 넣으며 앉았다. 주자서도 그 옆에 무릎 꿇고 앉았다.

어린 제자들에게 미주알고주알 상황을 말한 적 없으니 아마 주자서도 지금의 형세를 알리 없었다. 그래도 항상 눈치 있게 굴던 녀석이라 입을 꾹 다물고 진회장과 태사숙이 하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주구전이 입을 열었다. “태사숙은 청명에 열리는 숭산에 가야겠구나.”진회장은 새로 우린 차의 첫잔으로 찻주전자를 씻고 두번째 잔을 주구전에게 올렸다. 세번째 잔은 자기 앞에 네번째 잔으로 찻잔을 씻어 그 다음 찻물을 주자서에게 주었다. 주자서는 조용히 태사숙과 사부가 차를 마시는 것을 지켜보다 사부가 주신 차를 두 번에 나누어 마셨다. 세 사람은 찻주전자가 끓는 화로 앞에 앉아 주자서가 문간에 내려놓은 희미한 제등 불빛에 차를 마셨다.


(1) 폐추 敝帚 닳아 빠진 비라는 뜻으로, 분수에 넘게 자만심이 강한 사람을 이르는 말

(2) 무불간섭 無不干涉 덮어놓고 나서서 간섭하지 않는 것이 없음.

(3) 불범하수 井水不犯河水 관은 무림의 일에 상관하지 않고, 무림은 관의 일에 상관하지 않는다.

(4) 호미의결 狐媚疑結: 여우가 의심이 많아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는 뜻으로, 어떤 일에 대하여 의심이 많아 결행(決行)하지 못함을 비유(比喩)하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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