雨霖鈴 第4

4. 采薇之歌
고사리 캐는 노래.

청명(淸明)의 날이 밝았다. 논의준비로 분주한 소림사는 의외로 조용했다. 숭산 초입에 소란을 떨고 있던 사람들을 내쫓고 논의할 곳을 정리하느라 많은 스님들이 자리를 비웠기 때문이다. 장명산 검선과 종조부께서 하시는 말씀을 혹시라도 엿들을까 주자서는 괜히 눈치가 보여 자주 방 밖으로 나와 있었다. 자신을 온객행이라고 소개한 소년도 주자서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그에게 말을 붙였지만 주자서는 그를 무시하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쓰는 중이었다.

청명이 지나면, 논의가 끝나면 소매가 넓고 길어서 불편한 심의를 벗고 사계산장으로 돌아갈 생각이 들어 주자서는 괜히 마음이 들떴다. 강호의 의리니 황실의 대의니 하는 것은 주자서가 이름을 버리면서 놓은 것들이다. 오히려 일년 내내 먹을 걱정을 하며 밭일에 농사일을 하며 몸을 쓰는 일은 복잡한 머리속을 비워내는데 탁월한 효과가 있는 것들이다. 돌아가면 금방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한가할 때 수련하거나 마을 사람들을 돕다 보면 또 그렇게 한 해가 갈 것이다. 멀리 낙양 근처까지 왔지만 결국 낙양성 근처에 가보지 못한 것은 조금 아쉽지만, 그것이야 돌아갈 때 종조부께 말씀드려 보면 될 일이다.

주자서는 괜히 어른들이 말씀하시는 논의에 가지 않고 소림사의 장경각에 불경을 읽고 싶다고 주구전에게 부탁해 놓은 참이다. 사계산장에서 그나마 글을 읽을 줄 아는 이는 주구전과 진회장, 사숙, 사모를 제외하면 제자중에는 주자서 정도였다. 사계산장에서도 대체적으로 모두 글을 알았으나 모두 사계산장에서 가르친 것이다. 입문할 때부터 글을 알고 있는 이는 드물었을 뿐더러 낙양에서 진회장 품에 들려온 아직 충년도 되지 않은 주자서가 저의 사숙보다 아는 글자가 더 많았다. 그러니 보법이니 무법이니 사계산장에 내려오는 서간들을 모두 금방 다 읽어 버렸다. 다 읽은 것도 모자라 쉽게 풀어 또래 아이들에게 설명해주니 주자서 또래 항렬의 제자들은 다른 제자들보다 수련이 빨랐다. 주자서는 글을 읽는 것을 좋아했다. 주자서는 어릴 때 경무장공주가 친히 글자를 가르쳐 주었는데 글자들을 읽으면 모친이 떠올라 그리우면서도 반가웠기 때문이다. 그가 읽는 글자 하나하나에 모친과의 추억이 있었다.

불편한 자리를 피하려는 주자서를 본 주구전이 주자서를 시켜 차를 우리게 했다. “선배께서는 양주의 녹모단을 좋아하시니 꺼내 오너라.” 주자서는 주방에 가서 다구를 빌려왔다. 평소에 생차를 즐기시지 않는 태사숙인데 어쩐지 챙겨온 찻잎 함에는 생차인 녹모단만 들어있었다. 방에 마시는 물을 길어 놓은 항아리를 보니 물이 얼마 남지 않아 주자서는 물동이를 들고 물을 뜨러 나갔다. 두레박을 내려 물동이에 물을 퍼 담고 두레박을 다시 걸어 놓는 새에 온객행이 와서 물동이를 들고 갔다. 주자서는 또 무슨 일이 벌어질까 두려워 발걸음을 재촉해 온객행을 따라갔다. 온객행은 별 말없이 물동이의 물을 물항아리에 옮겨 담았다. 주자서는 또 흰소리를 할까 싶어 의아한 눈초리로 온객행을 봤지만 온객행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창가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방안에 있는 화로에 물을 끓일 주전자를 찾아 올리고 다구를 주구전과 검선이 앉아 있는 탁상위에 조심스럽게 올려 놓았다. 찻주전자에 녹모단을 넣고 숙우를 옆에 놓았다. 물이 끓는 소리에 화로 앞으로 갔다. 끓인 물을 탁상으로 가져와 조심스럽게 숙우에 부어 놓고 무릎 꿇고 앉아서 기다리는 주자서를 보던 검선이 입을 열었다. “네 동생놈은 관가와 사돈이라도 맺은 거냐?” 주구전은 검선의 말에 ‘허허허’ 웃기만 했다. 주자서는 숙우에 손을 대보더니 녹모단이 들어있는 찻주전자에 물을 천천히 부었다. 주자서는 찻잔을 들어 검선 앞에 하나 주구전 앞에 하나 두었다. 그리고 찻주전자 손잡이를 주구전 쪽으로 돌려 놓은 뒤 숙우에 물을 조금 더 붓고 일어나며 말했다. “종조부,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말씀하세요.” 그리고는 물주전자를 다시 화로 위에 올려 놓았다.

주구전은 찻주전자를 들어 검선의 찻잔에 붓고 그리고 자기 찻잔에도 부었다. 검선은 찻잔을 들어 향을 맡더니 말했다. “과연 선하화룡!” 그리고 찻물을 마셨다. 주구전은 창가에 앉은 온객행을 보며 말했다. “온공자, 온공자도 양주의 선하화룡을 맛보시지요.” 그러자 검선이 주구전을 말리며 말했다. “이 귀한 것을 어찌 저놈에게!” 그러자 온공자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더니 옆에서 옷 매무새를 정리하던 주자서의 손목을 채서 방 밖으로 나가버렸다.


옷 매무새를 정리하던 중이라 요대가 제대로 매여 있지 않아 앞섶이 다 흐트러진 주자서는 거칠게 온객행의 손을 뿌리치며 멈춰 섰다. 재빨리 옷을 추스르려는데 온객행의 손이 불쑥 앞섶으로 왔다. 놀란 주자서는 자기도 모르게 사계산장의 보법으로 한걸음 물러섰다. 허공에 손이 멈춘 온객행이 좋은 구경을 했다는 듯 주자서를 보고 씨익 웃었다. 주자서는 잠시 멈칫했으나 한걸음으로 다른 사람의 무공을 눈치채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해 심의를 잘 둘러 입고 요대를 맸다.

앞섶을 쓸어내리며 온객행을 바라보자 온객행이 말했다. “키도 크고 날씬한데 엷은 홑옷 입었네,(9) 푸르고 푸른 그대 옷깃 아득하고 아득한 내마음이여.”(10) 그리고는 주자서에게 다가와 요대 아래로 어그러진 그의 옷을 정리해 주었다. 불쑥 다가온 온객행과 주자서의 거리가 가깝다. 온객행은 옷에서 손을 떼고 주자서의 어깨위에 손을 올려 어깨를 쓰다듬었다. 주자서는 또 미간을 찌푸리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주자서는 온객행을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몰랐다. 주자서에게 이런 식으로 접근하는 사람은 온객행이 처음이었다. 사계산장이나 근처 마을에 있는 소녀들 중 주자서를 흠모하고 있는 이들은 있었다. 그들은 모두 쑥스러워 그에게 말을 붙이거나 다가오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사계산장 주변에서 소매가 잘린 자를 보기가 힘들었다. 주자서에게 있어 남색이란 나이 지긋한 관리들이 앳된 미소년을 희롱하는 것이다. 그것도 책에서 언급된 몇 줄의 고사를 읽고 그렇게 생각한 것이다. 그러니 주자서에게 하는 말마다 희롱의 기색이 만연한 온객행은 주자서에게 있어 너무나 이상하고 신기한 사람이었다.

그가 주자서에게 뱉는 희롱은 글 좀 읽었다면 누구나 아는 고대의 악부(樂府) 시가들이었고, 그것이 희롱하는 의미를 가진 것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대체 어떻게 반응하는 것이 맞는 것인지 아니면 애초에 반응을 해야 하는 것인지조차 분명하지 않았다. 그래서 주자서는 모르는 척하기로 한 것이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어깨를 팔로 끌어안아 그를 근처에 있는 전각 앞 계단에 앉혔다. 그리고는 주자서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주공자 우리 함께 먹고 자고 한 것이 벌써 사흘인데 내가 그대를 자서라 불러도 되겟소?” 주자서는 온객행이 이끄는 대로 얌전히 어깨와 등을 내어준 채로 돌계단에 앉아 생각했다.

대체 이 치가 저에게 하는 이 행동, 이 언사(言事)는 다 무엇이란 말인가!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주자서는 바쁜 머리속을 정리하지 못하고 몽롱해서 온객행의 말을 듣지 못한 듯했다. 온객행은 등을 쓰다듬는 손을 아래로 내려 주자서의 허리춤을 잡았다. 허리춤을 잡아오는 온객행의 손속에 몸을 뒤로 빼며 주자서가 온객행을 보자 온객행이 주자서의 몸을 따라가며 말했다. “자서.” 온몸에 소름이 돋는 듯한 기분에 주자서는 몸을 떨었다.

그때 머리 위쪽에서 사람의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큼큼’ 주자서는 고개를 돌려 자운당에서 나와 주자서와 온객행이 앉아있는 계단 꼭대기에 그 둘을 민망한 기색으로 보고 있는 심아스님을 보았다. 주자서는 당황해 온객행의 손을 떨치고 일어나 심아스님께 공수하며 인사했다. 심아는 아직 계단에 앉아 주자서를 보고 있는 온객행을 한번, 달아오른 얼굴을 소매단으로 가려 인사를 하고 있는 주자서를 한번 보고, 다시 목을 ‘큼큼’하고 가다듬은 뒤에 “아미타불”하고 인사했다. 온객행도 일어나 심아스님을 보고 인사했다. “장명산에서 온 온객행이라 하오.” 심아스님도 그에게 반장하며 대답했다. “아미타불 심아라 합니다. 주공자께서는 장경각으로 가시지요.” 주자서는 그 말에 계단을 올라갔다.

주자서의 행동에 온객행이 주자서를 따르며 말했다. “저 갈라진 물줄기처럼 내 님 가시네, 나를 마다하고! 나를 마다하고… ”(11) 그 말에 심아의 눈치를 보던 주자서가 냉큼 온객행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주자서는 자신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행동한 후에 후회했다. 하려던 말을 다 하지 못해 주자서의 손에 대고 웅얼대던 온객행이 말을 멈추고 입술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마치 주자서의 손바닥에 입을 맞추는 것처럼. 주자서는 불에 데인 것처럼 손을 뗐다. 그리고 손바닥을 한번 온객행의 실실 웃는 얼굴을 한번 보고, 온객행의 앞섶에 손바닥을 쓱쓱 문질러 닦으며 심아스님께 길을 재촉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심아도 고개를 휙 돌리고 길을 나섰다.

주자서는 심아와 함께 장경각으로 가는 내내 생각했다. 시경에서도 정나라의 풍은 음탕하고 말재주가 있는 사람은 위태롭다 하였는데(12) 일부러 고른 듯 시경의 음란한 풍을 읊는다. 저 음란한 시들의 희롱 대상이 자신이라는 것이 의아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말재주가 좋은 사람은 구태여 남에게 미움만 받을 뿐이니 쓸데가 없다 했다.(13) 이 치는 나에게 미움을 사고자 하는 것일까? 몽롱한 머리속이 더 복잡해짐을 느끼자 갑자기 하늘이 핑 돌았다. 주자서를 따라 걷고 있던 온객행이 비틀거리는 주자서의 어깨를 잡았다. 두통이 밀려오자 잠깐 온객행의 몸에 기대어 있던 주자서는 짜증이 치밀어 온객행을 밀쳐버렸다.


주구전은 숭산회의 참석을 위해 검선과 함께 숭산 초입으로 갔다. 검선이 말했다. “원로 회의라면서 대체 왜 밖에서 야단인지. 노인네들 풍한이라도 들면 줄줄이 초상 치르겠네.” 주구전이 괜히 주변의 눈치를 봤다. 마당같이 넓은 공터에 의자와 탁자가 놓여있고 가운데 단상이 놓여있었다. 주구전이 괜히 근처를 배회하자 자리를 정리하던 스님이 와서 그들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자리에 앉으니 곧 따뜻한 차를 내왔다. 둘은 차를 마시며 자리가 점점 차는 것을 구경했다. 따로 늙은이들만 불러서 앞으로의 상황에 대해 논의하자 했던 것 치고 참석자의 나이들이 다들 젊었다. 양주의 권문세가 남궁세가의 소가주 남궁하도 올해 이모(二毛: 32세)였고 단양파와 태호파에서 왔다는 장문후계도 주구전이 알기로는 아직 이립이 안되었다. 태산파와 화산파의 장문도 원로라고 부르기에는 아직 젊다. 부득불 초대도 받지 못한 치들이 세력을 앞세워 소림사를 압박한 것이리라 생각한 주구전은 ‘흥’하고 코웃음 쳤다.

소림사의 주지 여운이 회주와 법주를 이끌고 단상이 놓인 동쪽에 앉았다. 단상 위에 있는 의자가 비어 있다. 주구전은 도착하자마자 여운과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라 또 누군가 올 사람이 있구나 싶었다. 관과 관련된 사람임에 틀림없다. 여운이 들어오자 논의 회장이 소란스러워졌다. 주구전은 조용히 혀를 차면서 무림세가니 정파라는 놈들이 퍽이나 위아래가 없다고 생각했다. 여운이 일어나 초대된 각 문파를 소개하고 있을 때, 숭산 초입에 말 네 마리가 끄는 마차가 나타났다.

소개를 하다 말고 여운이 자리에서 일어나 마차에서 내리는 사람에게 갔다. 마차에서 내리는 사람을 보고 주구전은 벌떡 일어나 몸을 숙였다. 주구전이 하는 것을 본 검선도 천천히 일어나 다가오는 사람을 보았다. 그는 태보(太保) 강상(姜尙)이었다. 미수(米壽: 88세)를 바라보고 있는 흰머리 성성한 노인은 은은한 비단옷을 입고 단상 위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소림사의 주지 여운이 강상을 소개하고 아까 하던 문파의 소개를 다시 시작했다. 그러자 검선은 주변을 한번 둘러보더니 자리에 털썩 앉았다. 주구전은 자신을 소개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여운이 주구전을 소개하자 태보에게 공수하여 인사하고 자리에 앉았다.

여운이 검선을 소개하자 태보가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다. “이자 강상 장명산 상선께 인사 올립니다.” 그러자 태보와 함께 온 무관이 그에게 말했다. “네놈은 누구인데 감히 태보의 인사를 앉아서 받느냐!” 그러자 강상이 그를 나무라며 말했다. “나이가 배나 더 많은 사람은 아버지를 섬기는 듯하라 했는데, 어찌 상선께 무례를 범하는가?” 그러더니 여운을 향해 말했다. “사람이 모여 있을 때에는 연장자의 자리를 반드시 따로 하여야 하는데 어찌 상선께서 다른 이들과 함께 계십니까?” 여운은 곧 사과를 하고 단상에 자리를 하나 더 만들자 검선이 웃으며 말했다. “정도에 지나친 마음은 유익할 것이 없는데 이 엽모는 강선생께 드릴 것이 없소이다.” 그러고는 계속 앉아 있자 태보가 말했다. “과연 용과 같구나.” 그리고 다시 자리에 앉아 나머지 세가와 문파의 인사를 받았다.(14)

태보가 나타났으니 논의의 논점은 말도 꺼낼 수 없게 됐다. 주구전은 황실에서 일어난 일을 태산태수의 부대장 진영에게 서신으로 받아 알고 있었지만, 아마 그 일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사람이 아니라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 논의가 대체 무엇 때문인지 모를 것이다. 주지 여운이 제령에 대해 운을 떼자 사방에 앉아있던 문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큰소리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주구전이 힐끔 옆을 보니 검선이 인상을 찌푸리고 정파라는 놈들이 하는 짓을 보고 있었다. 주구전은 괜히 검선이 나설까 두려워 조용히 말했다. “엽선배께서는 이 촌극이 무슨 일 때문인지 아십니까?” 검선이 찻잔을 집어 올리며 말했다. “네놈 아는 만큼은 나도 알고 있다.” 찻물로 목을 축인 검선이 ‘큼큼’하고 목을 가다듬자 논의 회장이 조용해졌다. 그리고 검선이 제령에 대해 운을 뗐다.


주자서는 몸 가짐을 바르게 하고 심아스님 뒤를 따라 장경각에 들어섰다. 온객행이 그 뒤를 따랐다. 심아스님이 뒤돌아 온객행을 한 번 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주자서는 괜히 송구스러워 온객행을 쏘아봤으나 온객행은 그저 해사하게 웃기만 했다. 장경각은 도감의 허락이 없으면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는데 심아는 자운당 앞에 있는 돌계단에 앉아있던 정다운 두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 다른 곳도 아니고 절간에서 희롱이라니 심아는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주구전이 부탁하여 장명각 방문을 허락한 것은 주자서 하나였지만, 온객행이라는 치가 불경을 읽으러 주자서를 따라오는 것 같지는 않아서 심아는 별말 하지 않았다. “이 곳에 있는 서간과 서책은 주공자께서 원하시는 만큼 읽으시면 됩니다.” 하고 반장하며 주자서에게 말했다. 온객행을 한 번 흘끔 보고는 서가로 가려져 있는 안쪽으로 들어갔다. 주자서가 심아가 사라진 쪽을 보니 왜 인지 커다란 돌이 서가가운데 있었다. 심아는 붓을 가져다 물을 찍어 돌에 불경을 쓰기 시작했다. 주자서의 시선을 눈치챈 심아가 글 쓰는 것을 잠시 멈추고 조용히 말했다. “벌을 받는 중이니 개의치 마소서.”

한동안 조용하더니 언제 그쪽으로 갔는지 온객행이 심아가 쓰고 있는 불경을 따라 읽으며 말했다. “무슨 죄를 지으셔서 벌을 받습니까?” 심아는 고개를 들어 온객행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근처에서 서간 하나를 꺼내어 읽고 있던 주자서가 벌떡 일어나 온객행의 소매를 잡고 자신이 앉아 있던 책상으로 그를 잡아 끌며 말했다. “스님께서도 개의치 마소서.” 온객행은 주자서가 하는 대로 끌려가면서도 뭐가 좋은 것인지 실실 웃었다. 온객행을 책상 앞에 앉힌 주자서도 자리에 앉았다. 보던 서간을 들어 다시 보려고 하는데, 별안간 온객행의 얼굴이 불쑥 앞으로 내밀어졌다. 한참 주자서가 아무 말도 없이 눈을 감고 있자 온객행의 손이 주자서의 이마를 짚었다.

주자서가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뜨자 온객행이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자서, 자네 열이 있는 것 같네.” 주자서는 온객행의 손을 떼어내며 읽고 있던 서간으로 눈을 돌렸다. 주자서는 속으로 네놈을 보고 있으면 속에서 천불이 치밀어 열이 나는 거라고 생각했다. 장경각 실내는 조금 서늘했는데 주자서가 앉은 쪽은 창호로 막은 창문이 있어 햇빛을 받아 따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자서의 고개가 꾸벅이기 시작했다. 책상에 턱을 괴고 주자서를 구경하던 온객행이 주자서보다도 먼저 눈치챘다. 주자서는 눈을 몇 번 끔뻑끔뻑 뜨더니 곧 책상에 엎어졌다.

온객행은 그런 주자서가 귀엽다고 생각하면서 주자서 옆으로 가서 앉았다. 몸을 일으켜 이마에 손을 데어보니 역시나 열이 있다. 요 며칠 밤날씨가 쌀쌀했는데 이불도 없이 쪽 잠을 잤으니 아플 수밖에. ‘이럴 줄 알았으면 한 침상에서 같이 자자고 말이라도 꺼내볼걸’ 후회하는 온객행이었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몸을 옆으로 눕혀 자신의 허벅지를 베게 했다. 또 흐트러진 주자서의 장포자락은 온객행의 마음을 간질였다. 맞지 않는 옷을 입은 주자서는 보는 사람을 음란하게 만들었다. 본인은 아는지 모르는지 내의가 다비치는 장포를 만질 수도 없어서 온객행은 고개를 돌려버렸다.

창문으로 새어 들어오는 햇빛이 주자서의 얼굴에도 닿았는지 주자서의 얼굴이 온객행의 몸을 향해 돌려졌다. 온객행은 소매를 들어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 주자서의 얼굴에 드리워진 머리카락을 조금 치웠다. 혹여 그 손짓에 주자서가 깰까 아주 조심스러웠다. 온객행은 스스로도 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 치는 대체 누구기에 이런 허술한 몸짓으로 온객행의 마음을 흔드는가? 그리고 그 몸짓에 온객행의 마음이 속절없이 흔들린다.

(9) 시경 소남 碩人 아름다운 사람
碩人其頎 衣錦褧衣
저 미인 키도 크고 날씨한데 비단에 엷은 홑옷 입었네.

(10) 시경 정풍 子衿 님의 옷자락
靑靑子衿 悠悠我心
푸르고 푸른 그대 옷깃 아득하고 아득한 내마음이여.

(11) 시경 소남 江有汜 갈라진 강물
之子歸 不我以 不我以 其後也悔
저 강에 갈라진 물줄기처럼 아가씨 시집가시네, 나를 마다하고, 나를 마다하고 나중에는 후회하리

(12) 논어집주 衛靈公 위영공 第十五 10
放鄭聲 遠佞人, 鄭聲淫 佞人殆.
정(鄭)나라의 음란한 음악을 추방하며 말재주 있는 사람을 멀리 해야 하니, 정(鄭)나라 음악은 음탕하고 말재주 있는 사람은 위태롭다.

(13) 논어집주 公冶長 공야장 第五 4
子曰 焉用佞. 禦人以給 屢憎於人 不知其仁 焉用佞.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말재주를 어디에다 쓰겠는가? 말재주 있는 사람은 구변(口辯)으로 남의 말을 막아서 자주 남에게 미움만 받을 뿐이니, 그가 인(仁)한지는 모르겠으나, 말재주를 어디에다 쓰겠는가?

(14) 사기 한비자집해 노자와 공자 서로에 대한 평가에 대한 구절
去子之驕氣與多欲 態色與淫志 是皆無益於子之身 吾所以告子 若是而已 孔子去 謂弟子曰 鳥는 吾知其能飛 魚 吾知其能游 獸 吾知其能走 走者可以爲罔 游者可以爲綸 飛者可以爲矰 至於龍 吾不能知其乘風雲而上天 吾今日見老子 其猶龍邪
노자가 공자에게 “그대의 교만과 탐욕 위선적인 표정과 과도한 야심을 버리시오. 모두 그대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소. 내가 그대에게 할 말은 단지 이것뿐이오.” 공자가 노자를 만나고 돌아와 이렇게 말했다, “새는 잘 날아다니고, 물고기는 잘 헤엄치며, 짐승은 잘 달린다는 것은 나도 잘 안다. 달리는 짐승은 그물로 잡으면 되고, 헤엄쳐 다니는 물고기는 낚싯줄로 잡으면 되고, 날아다니는 새는 활로 잡으면 된다. 하지만 龍에 대해서는 어떻게 바람과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오르는지 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는데, 내가 오늘 노자를 만나보니 그가 바로 용과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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