雨霖鈴 第5

5. 耳懸鈴鼻懸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장명산 검선의 입에서 제령이 언급되었으니 다들 신이 나서 한마디씩 거들었다. 전란으로 나라가 혼란한 시기가 지나 명맥이 끊어진 문파는 어쩔 수 없어도 그나마 남아 있던 문파는 남은 제자들을 추슬러 문파를 그럭저럭 꾸려갔다. 혼란한 시기인 만큼 사파도 정파도 모두 조용히 그저 먹고 살 걱정만 하면 되는 평화로운 시기였다. 그동안 다들 자기 앞가림 하느라 바빴던 까닭이다. 예나 지금이나 강호가 관가와 엮이는 것은 그 저의가 무엇이던 바닥에는 탐욕이 깔려 있다.

태보는 시끄럽게 무관까지 대동하여 등장한 것 치고는 조용히 앉아 이 난장판을 구경하고 있었다. 태산파의 장문 오래자(傲崍子)와 개방의 분타주 황학(黃鶴)이 과거의 연원을 끄집어내어 논지를 흐렸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 중에 사소한 원한이 없는 사람은 없다. 옛말에 큰 원망은 화해해도 남는 미움이 있다했다.(15) 그나마 개방과 태산파는 통일을 이룩한 나라의 국민이었으니 이렇게 목소리 높여 싸울 수라도 있다. 망한 나라의 전란에 스러져간 문파들은 이미 가고 없는데 저렇게 떠들어대는 모습이 어떻게 비추어 질까?

오래자와 황학이 떠드는 소리에 주지 여운이 그 둘을 중재한다고 소란스럽다. 정작 제령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 검선은 그들의 기세에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주구전은 검선이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것이 꼭 지금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닌 것은 눈치 챘다. 오래자와 황학의 찻잔에 들은 찻물 같은 기세가 어찌 흐르는 강의 기세를 꺾겠는가? 검선은 그 둘이 싸우는 것을 보다가 한숨을 크게 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회장을 떠나버렸다. 주구전이 검선을 잡으려고 일어났다가 괜히 다른 사람들의 시선만 샀다. 어디 가신다는 말씀도 없이 일어나셨으니 사람들은 괜히 주구전을 쳐다봤다.

검선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자 하나 둘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논의라고 할 만한 것을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니 주구전은 그냥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회장을 나가는 사람들을 봤다. 남궁세가의 소가주 남궁하와 화산파의 장문 우달(于達)은 어떻게 아는 사이이길래 저렇게 붙어서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인지. 곤륜파(崑崙派)와 공동파(崆峒派)는 아무도 보내지 않았다는 점도 이상했다. 이는 지금 이 소란이 정말 온전히 강호의 일이 아니라는 소리다.

소림사의 회주는 태보 강상과 단양파의 장문 육해방(陸奚方)과 함께 단상위에 남아 있었고, 주구전이 않아 있는 동쪽자리에는 개방장로 여장(呂孜)과 해백(海伯)이 남아 있었다. 그들은 개방의 본거지인 기주(冀州)가 아니라 낙양이 있는 사례(司隷)지역 출신이라 지금 개방 장주와는 관계가 소원한 자들이다. 방주가 보낸 것인지 아니면 그들 자의로 왔는지 아니면 주지 여운이 초대한 것인지 주구전은 괜히 궁금했다. 눈치를 보며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처소로 돌아가려고 산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는 데 여운이 그를 불러 세웠다. “주대인 잠시 기다리시지요.” 주구전은 주지 옆에 서서 회장을 떠나는 사람들의 볼멘 소리를 들어야 했다.

주지 여운은 태보 강상과 태보가 데려온 무관, 단양파 장문 육해방, 그리고 주구전을 데리고 방장실로 향했다. 회주들이 단상에 남아 자리를 정리하는 것을 도왔다. 개방 장로들도 회주들과 할 이야기가 있는지 아직도 자리에 앉아 있다. 방장실로 가는 길은 매우 조용했는데, 서로 눈치만 보고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주구전이 마지막으로 방장실 안으로 들어오자 주지는 방장실의 문을 닫고 모두에게 자리를 권하며 앉았다. 무관은 끝내 자리를 사양하고 들어오는 문 입구에 가서 섰다.

자리에 앉은 여운이 운을 뗐다. “아무래도 무림맹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육해방이 주구전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저희야 일개 작은 문파일뿐인데 어디 감히 무림맹의 일원이겠습니까?” 주구전은 자기가 왜 이 자리에 앉게 됐는지 어리둥절했다. 그러자 태보가 입을 열었다. “부군은 안의 일에 대해 말하지 않고 처는 바깥일에 대해 말하지 말라 하였는데 어찌하여 이렇게 되었는지…”(16) 주지의 얼굴색이 평온 한 것을 보아 소림사 중놈들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일인가보다. 뜻을 몰라 헤매는 것은 육해방 혼자다. 모르는 척 자리에 앉아 있자 육해방이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태보 강상이 그를 흘끔 보더니 주지에게 물었다. “이자는 알고 있습니까?” 주지가 답했다. “지금부터 물으시지요.” 육해방은 당황하여 무릎 꿇으며 말했다. “이 육모는 무슨 말씀인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태보는 차근차근 단양파 내부의 관계에 대해 물었다. 그 과정에서 남궁세가의 이야기도 나왔고 사계산장의 이야기도 나왔다. 사계산장은 예전부터 구주의 일이 알려져 끝나는 곳으로 유명했으니 그들이 황실에서의 일에 대해 알고 있는지 은근하게 떠보기 위함이다. 다행인 것은 요 몇 년 사계산장은 정말 먹고 살기 바빠서 관과의 연을 소홀히 해왔다. 하지만 단양파는 그렇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들은 관가의 일을 하거나 관리의 호송 호위 등을 하며 그나마 나은 살림을 꾸려왔는데, 자주 관에 들락날락 했으니 의심을 사기에 딱 좋았다.

태보는 단양파가 자주 호위하였던 관리들과 낙양성에 머물 때 지냈던 곳 같은 것들을 물었다. 그러다 태보가 서선공의 이야기를 물었다. “사계산장은 예전에 서선공이 유학하던 곳이 아닙니까?” 주구전은 ‘흠흠’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벌써 10년도 더 지난 일입니다. 왕래한지 오래 되었는데 왜 물으시는지요?” 태보는 주구전을 보더니 말했다. “황후와 강호가 연을 맺게 된 것이 서선공 덕분 아닙니까?” 주구전은 시치미를 떼며 말했다. “그것은 서선공께 물어야지 어찌하여 이 주모에게 물으시는지요?” 태보는 콧방귀를 끼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주지가 태보의 눈치를 보며 서국공의 비보를 전했다. 주구전은 서국공의 비극을 알았지만, 그가 충심을 다해 불의의 사고로 죽은 것은 몰랐다. 그의 부인인 장공주 역시 곧 그를 따라가는 바람에 함께 국장을 치러 줬다고 하는데 어째 주구전이 진회장에게 들은 이야기와는 사뭇 다르다.


주자서는 결국 장경각에서 서간을 한 책도 읽지 못하고 온객행의 등에 업혀서 지객당으로 돌아왔다. 지객당 안에는 검선이 앉아서 좌선하고 있었는데 온객행을 보고 의아 하다는 듯이 말했다. “네가 누구 시중도 드는구나.” 온객행은 주자서를 침상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고 검선에게 말했다. “노야 아서가 아픈 것 같으니 맥이라도 짚어봐.” 온객행을 쳐다보던 검선은 온객행이 주자서를 부르는 호칭에 ‘하’ 하고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자서가 누운 침상으로 갔다. 주자서의 흐트러진 옷 매무새를 본 검선이 온객행에게 말했다. “어디 무산(巫山)이라도 다녀온 거냐?” 주자서의 손목을 가져와 맥을 짚었다. 온객행은 검선의 말을 듣고 웃으며 말했다. “무산은 앞으로 가야지 구름도 되었다 비도 되었다.”

검선은 주자서의 손목을 내려놓고 주자서의 앞섶을 풀어 해쳤다. 온객행이 놀라 검선의 손을 치우며 말했다. “아니 무산은 내가 아서랑 가야지 노야가 왜 이래? 노야도 소매를 자르려구?” 검선은 온객행의 팔뚝을 때리며 말했다. “열이 오르니 식혀 주어야지! 뭐 눈엔 뭐 밖에 안 보인다고…” 온객행은 검선의 손을 피하며 말했다. “아서 시중은 내가 들 테니 노야는 가서 그 밥통이나 채우고 오시오.” 온객행이 주자서의 장포를 벗기며 말했다. 검선은 한껏 찡그린 얼굴로 온객행을 빤히 보았다.

주자서의 중의를 마저 벗기던 온객행은 기분이 나쁘다는 듯한 표정으로 검선을 보며 말했다. “내 아무리 염치없는 사람이라도 어찌 아픈 사람을 상대로…!” 검선은 온객행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혀를 ‘쯧’ 하고 차며 방을 나가버렸다. 온객행은 벗긴 주자서의 옷을 한쪽으로 치워 놓고 내의만 입은 그에게 이불을 끌어 덮어주었다. “아서… 아서라… 그래 아서라고 불러야지. 우리 아서.” 그리고는 얼굴을 쓰다듬었다. 한참 얼굴을 보고 있다가 주자서의 찡그려진 표정을 본 온객행이 부산을 떨며 주자서를 간호하기 시작했다. 작은 물동이에 물을 받아 품속에 있던 영견에 물을 적셔 빨갛게 열로 익은 주자서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열이 올라 정신이 하나도 없는 주자서는 지금 자기가 어디 있는지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아슴아슴한 꿈속에서 누군가 아는 사람을 만났던 것도 같은데 얼굴이 흐릿하여 보이지 않았다. 뭐라고 부르려고 하다가 지금 있는 곳이 사계산장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입이 그를 멈추었다. 밭은 숨을 몰아쉬는 주자서는 누군가 차가운 물수건으로 그의 얼굴과 몸을 닦아주는 것이 느껴졌다. “모친… 모친…” 사계산장에 온 이후로 주자서는 크게 앓아본 적이 없었다. 양주의 날씨는 온화했고, 주자서는 매일 수련하고 일하며 자랐다.

그가 마지막으로 앓았던 것은 경무장공주와 헤어지고 나서 처음으로 사계산장에 왔을 때이다. 이유도 없이 달포를 앓았다.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무도 나무라지 않았다. ‘그 전에 또 언제 아팠더라…?’ 생각하니 괜히 낙양성에서 살 때가 떠올라 서러워졌다. 곧 몸을 닦고 있던 차가운 물수건이 주자서의 눈가를 쓸어 주었다. 이미 울고 있었나 보다. 마음에 울컥 슬픔이 차오른다. 주자서는 괜히 응석이 부리고 싶어 얼굴을 닦는 물수건에 얼굴을 비볐다. ‘내 얼굴을 닦아주는 이 손길이 모친이었으면 좋겠다.’ 다 잊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태보는 평원군의 이야기까지 꺼내 가며 육해방을 들들 볶았다.(17) 섬뜩해진 주구전은 주지의 눈치를 보았다. 주지가 그의 기색을 눈치 챘는지 육장문을 감싸며 말했다. “탐욕과 성냄은 세상의 병이요, 어리석음과 무지는 화의 문이라 하였소. 탐욕의 독은 몸을 망치고, 친족을 망하게 하는데, 어찌 그것이 거기에 그치겠습니까?”(18) 육해방은 덜덜 떨면서 시시콜콜 단양파의 내부 사정에 대해 털어 놓았다. 단양파가 관의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남궁세가의 입김 덕분이었다. 주구전은 아까 회장을 나가며 대화하던 남궁세가 소각주 남궁하와 화산파 장문 우달이 떠올랐다. 형주(荊州)와 예주(豫州)도 아닌 옹주(雍州)의 화산파 우달이라니 ‘아주 의심을 사러 왔구나’라고 생각하며 주구전은 ‘쯧’ 하고 혀를 찼다.

태보는 주구전에게 남궁세가에 대해 물었다. 남궁세가는 양주에서 제일 크고 유명한, 혈족으로 이루어진 문파이다. 양주와 예주, 서주가 만나는 곳에 위치한 황산을 기반으로 하고 있어 황산부터 포양호까지는 관에서도 남궁세가의 허락을 받아야 할 정도로 세가 큰 명문이다. 몇 차례 군신을 배출하여 관과의 관계도 나쁘지 않다고 들었다. 양주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참견하는 일이 많아서 종종 작은 문파들과 소란이 있었지만 세가 많이 줄어든 사계산장은 꼭 필요한 일은 돕고 의심스러운 일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그들을 상관하지 않았다. 그러니 단양파나 태호파 같은 양주에 있는 작은 문파들이 남궁세가의 기세를 얻어 낙양성을 오가며 다른 문파들과 교류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태보 강상은 무림맹의 존재를 떠보기 위해 부러 숭산 논의라는 이름을 붙인 이 곳에 온 것이다. 그는 태보가 되기 전 오랫동안 강호에서 사인(士人)으로 머물렀고 그를 따르는 자들도 많을 테니, 황제는 태보를 보내 무림맹을 조사하게 했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주구전은 오히려 홀가분해졌다. 무림맹과 사계산장은 정말 아무런 상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과거에 존재하던 무당파, 곤륜파, 아미파(峨嵋派) 그리고 소림사가 주도하여 만들었던 무림맹에 소속되어 있던 크고 작은 문파들 중 과연 오늘까지 남은 문파는 몇이나 될까?

사계산장은 애초에 그렇게 대놓고 일을 벌이는 일에는 항상 조심스러운 문파였다. 지금 이 자리에서 다들 말하지 못하는 이 무림맹은 흔히 강호에서 중요시하는 의나 협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닐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뒤에서 덮어 몰래 만들게 아니라 모두에게 떠벌려 명성을 쫓았을 테니. 다들 앉아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방장실의 문이 열리고 개방의 장로 여장과 해백이 들어왔다. 주지는 그들에게 인사하며 자리를 권했다.

해백은 자리에 앉자 마자 말했다. “거지들이야 잘 빌어먹고 얼어 죽지나 않으면 그만인데, 언제부터 부귀와 영화를 탐하게 되었는지….” 그 말을 듣고 있던 여장이 혀를 차며 말했다. “이러다 푸른 하늘이 이미 죽었으니 어떤 하늘이 일어나야 된다는 소리 나올까 무섭습니다.”(19) 태보가 들고 있던 찻잔을 놓쳤다. 주지가 여장에게 말했다. “여기 태보께서 계시는데 말 좀 가려서 하게.” 그러자 벌벌 떨고 있던 육해방이 또 입을 열었다. “개방! 개방도 종종 저희와 함께 일을 했습니다. 단양파는 사람도 적고 작으니 큰 일을 단독으로 할 수 없으면 남궁세가나 개방에서 사람을 빌려 일했습니다.” 그 말에 태보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이 말할 수 없는 무림맹은 과거의 무림맹보다 더 크고 가담한 세력이 많은 것 같다.

밤이 다 늦어서야 지객당으로 돌아온 주구전은 매우 피곤했다. 정말 쓸데없는 일에 휘말려 든 것 같다. 태보 강상만 오지 않았다면 여운에게 말했던 것처럼 당장 양주로 돌아가고 싶었다. 주구전이 지객당 안으로 들어오자 침상에 누워있는 주자서가 보였다. 주구전이 놀라 그에게 다가가자 옆에 앉아 있던 온객행이 포권하여 인사하며 말했다. “주대인, 아서가 요 며칠 밤이슬에 잠을 이루지 못해 병이 난 듯합니다.” 주구전은 온객행이 주자서를 부르는 호칭에 온객행을 흘끔 봤다. 옥같이 잘생긴 얼굴이 해사하게 웃는다.

어처구니없어진 주구전은 침상에 걸터앉아 주자서 손목의 맥을 짚었다. 손으로 얼굴을 만져보니 미열이 있었다. 주구전이 방을 나가려고 하자 온객행이 그를 말리며 말했다. “아이참! 주대인 이미 약도 먹이고 열도 많이 떨어 졌으니 걱정 마세요.” 그리고는 자기가 앉아 있던 침상 앞 의자에 주구전을 앉혔다. 온객행은 “요기는 하셨습니까?”라고 살갑게 물으며 그에게 만두가 담긴 접시를 내밀었다. 주구전은 갑자기 허기가 일어 만두를 하나 집어먹었다. “절간의 밥이라 맛이 덜하지만 급한 허기는 가시겠지요. 나중에 낙양성에 가서 그 모란연채라는 것을 먹으러 갑시다.”

주구전은 갑자기 친근하게 구는 온객행이 어색했지만 자리를 비운동안 주자서를 돌 봐준 것 같아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온객행이 하는 데로 그냥 두었다. 만두를 하나 더 집어먹고 주구전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상선께서는 어디 가셨는가?” 온객행은 주자서가 누운 침상에 걸터앉아 그의 이불을 정리해주며 말했다. “노인네 망령은 고기로 고친다고 하니 어디서 밥통을 채우고 계시겠죠.” 불경한 온객행 소리에 주구전은 헛웃음만 나왔다. 간단히 관수(盥漱; 세수하고 양치질함)하고 침상에 올랐다. 오늘은 어제와 달리 침상을 봐주는 이가 없어 쓸쓸했다. 태보가 아직 소림사에 머물고 있으니 주구전은 떠날 수가 없다. 언제까지 숭산에 묶여 있을지, 이 숭산 논의라는 촌극에 장단을 맞추어야 할지 한숨만 나온다.


다음날 어느때보다 일찍 일어난 주구전은 가져온 짐꾸러미에서 영견 하나와 지필묵을 꺼냈다. 지금 상황에 대해 사계산장에 알려 두는 것이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대비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사계산장에서만 사용하는 짧은 암호문과 여정이 길어질 것 같다는 내용을 섞어 썼다. 진회장이 설마 사람을 보내지는 않겠지만 걱정할 것 같아 작은 영견에 깨알 같은 글씨를 모아 적었다. 점심을 가지러 가는 길에 산문에 보초를 서고 있는 승려에게 부탁하여 서신을 전하고 점심 찬합을 들고 다시 지객당으로 돌아왔다.

주자서는 온객행과 주구전이 먼저 일어나 부산을 떨어도 깨지 않고 사시까지 눈을 뜨지 못했다. 찬합을 탁상위에 올려놓은 주구전이 주자서가 누운 침상 쪽으로 가서 그의 이마를 만져보았다. 그리고는 뺨을 툭툭 치며 말했다. “자서야 일어나 보거라.” 주구전의 부름에 눈을 파르르 떨더니 곧 눈을 뜬 주자서가 벌떡 일어나 주구전에게 공수했다. “태부!” 주자서의 목소리에 주구전이 괜히 탁상위에 찬합에서 점심을 꺼내고 있던 온객행의 눈치를 보았다. “그래, 그래, 자서야 이제 괜찮으냐?” 주자서는 횡설수설하다가 주구전이 이끄는 데로 탁상 앞에 앉아서 첫 끼니를 먹었다.

온객행이 그 옆에 앉아 주자서의 밥그릇 위에 반찬을 놓아주며 부산을 떨었다. 주구전이 온객행을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자 한참 눈치를 보던 온객행이 주구전의 밥그릇에도 찬을 올려놓았다. 점심을 마친 후 주구전은 온객행에게 찬합을 주방에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둘만 남은 지객당에서 주구전은 먹은 음식을 정리하고 관수(盥漱)를 마친 주자서를 앞에 두고 말했다. “아무래도 얼마나 여기서 더 머물게 될지 모르겠구나. 우리야 강 건너 불구경 하는 일이지만, 또 남이 보기엔 다를 수 있으니…” 주구전의 말에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주구전은 방장실에서 나누었던 이야기 중에 한참 말을 고르다가 말했다. “바람은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는구나.”(20) 주구전은 무언가를 말하려다 입맛만 다시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탁상 앞에 앉아 고개를 들지 못하고 그렇게 둘이 앉아 있었다.

심아스님과 온객행이 같이 들어왔다. 온객행은 들어오자 마자 침울한 주자서의 표정을 눈치채고 쪼르르 옆으로 가서 흰소리를 늘어놓았다. “어찌하여 우리 아서 나를 좋아하지 않을까요? 어찌해야 아서의 마음잡을까요? 아서는 내게 말도 하지 않으니...” (21) 온객행의 호칭에 주자서는 한동안 눈만 깜빡이며 온객행을 쳐다봤다. 온객행은 신이 나서 주자서 옆에 찰싹 붙어서 또 흰소리를 하려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곧 지객당 안으로 장명산 검선이 들어오며 말했다. “어린애 망령은 몽둥이로 고친다 하니, 저 놈 헛소리는 때리는 것 말고 방법이 없네.” 하며 온객행을 주자서에게 떼어 놓더니 머리를 때렸다.

온객행은 검선의 손을 피하며 심아를 방패삼아 말했다. “이 노야가 굶어서 노망이 났나!” 심아는 한동안 검선과 온객행 사이에서 어쩔 줄 몰라 하더니 이내 무시하듯 주구전에게 공손히 말했다. “주대인, 주지스님께서 찾으십니다.” 주구전이 자리에서 일어나 주자서에게 말했다. “아직 몸이 좋지 못하니 몸을 보양하고 있거라.” 주자서도 자리에서 일어나 주구전과 심아가 나가는 것을 배웅했다. 주구전이 검선 쪽을 보고 인사하며 말했다. “엽선배께서도 가시지요.” 검선은 온객행을 나무라는 일을 멈추고 목을 ‘큼큼’하고 가다듬더니 밖으로 손을 펼치며 말했다. “그래, 가지.” 그렇게 심아와 함께 주구전과 검선이 나가자 지객당에는 주자서와 온객행만 남아 있다. 주자서는 문간에 서서 한참 주구전이 양심당으로 향하는 것을 보고 서 있었다. 온객행이 언제 다가왔는지 주자서의 등뒤에 바짝 붙어 서서 주자서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아서. 주대인은 종조부야? 태부야?”

주자서의 머리속은 복잡했다. 묻지 않았는데 부러 말씀하셨다는 것은 준비를 하라고 하는 것과 같았다. 양친과 관련된 이야기는 주자서가 사계산장에 입문한 이후로 그 누구 와도 하지 않았다. 하지 않았다고 하기 보다 하지 못했다. 낙양을 떠나는 그날 주자서가 기억하는 것은 주영의 손을 모질게 뿌리치는 경무장공주의 모습 뿐이다. 지금 주자서는 알고 있지만, 그날 낙양을 떠나오던 날 밤, 아직 어렸던 주자서는 그저 원망스러웠다. 본인을 떠나보내는 모친도, 자신을 안고 멀리 떠나가고 있는 사부님도.

그 원망은 머리가 커갈수록 죄책감이 됐고, 그 죄책감은 사라지지 않고 그리움만 더했다. 낙양성 근처로 자신을 보낸 것에는 전부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벌써 10년이 넘은 일이었고, 이제 주자서는 주영이라는 천자가 주신 고귀한 이름보다 주자서라는 이름으로 산 세월이 더 길었다. 숭산으로 오는 길에 귀동냥으로 들었던 그 제령이라는 것은 강호가 천자의 일을 간섭해서는 안된다는 내용이었다. 숭산 회의에는 어쩌면 강호의 일을 의논하기 위해 모인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한참 생각하고 있는데 귓가에 누군가가 속삭여 왔다. “아서. 주대인은 종조부야 태부야?”

주자서가 고개를 휙 돌려서 온객행을 봤다. 온객행은 여전히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화사하게 웃기만 할 뿐이다. “아서. 아까 주대인을 태부라고 부르던데, 아서도 무공을 배웠어?”라고 말하며 온객행이 주자서의 몸을 더듬었다. 팔뚝을 지나 등이며 허리를 쓸어 내리자 마치 두사람은 서로를 안고 있는 것 같은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주자서는 온객행을 밀치며 말했다. “말로 물으시오. 좀 떨어지는 것이 좋겠소.” 그전만큼 세게 밀치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아침을 먹으면서 종조부께서 어제의 일을 이야기해주었기 때문이다.

장경각에서 지객당까지 꽤 거리가 있었는데 그 길을 주자서를 업고 왔다면 꽤 힘들었을 것이다. “그것은 어찌 물으시오?” 주자서가 탁상으로 가 앉으며 말했다. 온객행도 쪼르르 주자서를 따라 탁상 앞에 마주보고 앉았다. “이 온모 또한 무공에 힘썼으니 그대와 겨루어 보고 싶어서 그러오.” 주자서는 생각했다. 만약 그가 종조부의 제자라면 사계산장의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다. 아직 주자서는 이 온객행이라는 자가 어떤 자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운을 띄웠다. “종조부께서는 사인(士人)으로써 내 스승이오.” 온객행은 주자서를 위 아래로 훑어보며 ‘흐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그럼 저 짐꾸러미에 있는 호복은 누구 옷이오?” 주자서가 놀란 듯 온객행과 짐꾸러미를 번갈아 보았다. 온객행이 웃으며 말했다. “어제 그대의 옷을 벗기고 입힌 것이 누구인지 잊었소? 그대가 탕약을 넘기지 못해 내가 입으로…!” 온객행의 말에 주자서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주자서가 버럭 소리쳤다. “그게 무슨 소리요!” 온객행이 말을 멈추고 ‘하하하’ 크게 웃었다. “별일 없었으니 마음 놓으시게! 내가 아무리 염치가 없어도 정신이 없는 사람을 희롱할 만큼 나쁜 사람은 아니오.”


주자서는 내심 과거의 일에 대해 다시 들추시려는 것인가도 생각했다. 사부님이 들추시는 것이 아니라면 아마 어쩔 수 없는 다른 누군가가 그 일에 대해 캐고자 하려는 것이다.

(15) 도덕경 79장
和大怨 必有餘怨 安可以爲善
큰 원망을 풀어주더라도 반드시 남은 원망이 있으니, 어찌 가히 선하다 하겠는가?

(16) 예기 내칙 禮記‧內則
男不言內 女不言外
남자는 안의 일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여자는 바깥의 일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17) 사기 평원군열전: 평원군은 진나라의 장군 백기를 말한다.
진나라와 한나라가 전쟁으로 한나라가 수세에 몰리자 조나라에 가서 자신들의 나라를 주고 보호를 부탁하였다. 조나라왕은 한나라의 땅이 탐나 한나라를 도왔는데, 이후 진나라가 군사를 데리고 조나라에 들어가 조나라르 멸망시켰다는 이야기. 여기서 조나라의 대신 평양군 조표가 말했다. “아무런 연고도 없이 이득을 보면 재앙을 부를 수 있다.” 그리고 이익에 어두워 형세를 읽지 못하고 조나라는 진나라에 의해 망한다.

(18) 법구경 애욕품 18
貪爲敗處故 害人亦自害, 愛欲意爲田 婬怨癡爲種.
탐욕이란 망하는 법이기 때문에 남을 해치고 또 자신을 해치니, 사랑하는 탐욕의 마음은 밭이 되고 음욕, 성냄, 어리석음은 종자가 된다.

(19) 나관중 삼국연의 황건적의 슬로건
蒼天已死 黃天當立 歲在甲子 天下大吉
푸른 하늘은 이미 죽었으니 누런 하늘이 이제 일어나리. 갑자년에 천하가 크게 길하리라.

(20) 한서열전 孔子出行 공자출행
樹欲靜而風不止 子欲養而親不待
나무는 고요하고자 하여도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이 봉양하고 싶어도 어버이는 기다려주지 않는다.
풍수지탄의 어원. 여기서 풍수는 이미 돌아가신 부모님을 뜻한다.

(21) 시경 패풍 日月 해와 달
日居月諸 照臨下土 乃如之人兮, 逝不古處 胡能有定 寧不我顧.
저 하늘 해와 달은 오늘도 이 세상을 비추건만 어찌하여 우리 님은 옛날과는 다르게 차가울까요? 어찌해야 님의 마음잡을까요? 나를 돌아보지 않으니.
日居月諸 下土是冒 乃如之人兮 逝不相好 胡能有定 寧不我報.
저 하늘 해와 달은 오늘도 이 세상을 비추건만 어찌하여 우리 님은 나를 좋아하지 않을까요? 어찌해야 님의 마음잡을까요? 내게 말도 하지 않으니.
日居月諸 出自東方 乃如之人兮 德音無良 胡能有定 俾也可忘.
저 하늘 해와 달은 오늘도 동녘에 떠오르건만 어찌하여 우리 님은 따뜻한 말 한마디 하지 않을까요? 어찌해야 님의 마음잡을까요? 당신을 잊을 수 없으니.
居月諸 東方自出 父兮母兮 畜我不卒 胡能有定 報我不述.
저 하늘 해와 달은 오늘도 동녘에 떠오르건만 아버님 어머님 그이는 나와 살지 않겠다 하네요. 어찌해야 님의 마음잡을까요? 내게는 차갑게만 하니.

雨霖鈴 第4

4. 采薇之歌
고사리 캐는 노래.

청명(淸明)의 날이 밝았다. 논의준비로 분주한 소림사는 의외로 조용했다. 숭산 초입에 소란을 떨고 있던 사람들을 내쫓고 논의할 곳을 정리하느라 많은 스님들이 자리를 비웠기 때문이다. 장명산 검선과 종조부께서 하시는 말씀을 혹시라도 엿들을까 주자서는 괜히 눈치가 보여 자주 방 밖으로 나와 있었다. 자신을 온객행이라고 소개한 소년도 주자서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그에게 말을 붙였지만 주자서는 그를 무시하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쓰는 중이었다.

청명이 지나면, 논의가 끝나면 소매가 넓고 길어서 불편한 심의를 벗고 사계산장으로 돌아갈 생각이 들어 주자서는 괜히 마음이 들떴다. 강호의 의리니 황실의 대의니 하는 것은 주자서가 이름을 버리면서 놓은 것들이다. 오히려 일년 내내 먹을 걱정을 하며 밭일에 농사일을 하며 몸을 쓰는 일은 복잡한 머리속을 비워내는데 탁월한 효과가 있는 것들이다. 돌아가면 금방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한가할 때 수련하거나 마을 사람들을 돕다 보면 또 그렇게 한 해가 갈 것이다. 멀리 낙양 근처까지 왔지만 결국 낙양성 근처에 가보지 못한 것은 조금 아쉽지만, 그것이야 돌아갈 때 종조부께 말씀드려 보면 될 일이다.

주자서는 괜히 어른들이 말씀하시는 논의에 가지 않고 소림사의 장경각에 불경을 읽고 싶다고 주구전에게 부탁해 놓은 참이다. 사계산장에서 그나마 글을 읽을 줄 아는 이는 주구전과 진회장, 사숙, 사모를 제외하면 제자중에는 주자서 정도였다. 사계산장에서도 대체적으로 모두 글을 알았으나 모두 사계산장에서 가르친 것이다. 입문할 때부터 글을 알고 있는 이는 드물었을 뿐더러 낙양에서 진회장 품에 들려온 아직 충년도 되지 않은 주자서가 저의 사숙보다 아는 글자가 더 많았다. 그러니 보법이니 무법이니 사계산장에 내려오는 서간들을 모두 금방 다 읽어 버렸다. 다 읽은 것도 모자라 쉽게 풀어 또래 아이들에게 설명해주니 주자서 또래 항렬의 제자들은 다른 제자들보다 수련이 빨랐다. 주자서는 글을 읽는 것을 좋아했다. 주자서는 어릴 때 경무장공주가 친히 글자를 가르쳐 주었는데 글자들을 읽으면 모친이 떠올라 그리우면서도 반가웠기 때문이다. 그가 읽는 글자 하나하나에 모친과의 추억이 있었다.

불편한 자리를 피하려는 주자서를 본 주구전이 주자서를 시켜 차를 우리게 했다. “선배께서는 양주의 녹모단을 좋아하시니 꺼내 오너라.” 주자서는 주방에 가서 다구를 빌려왔다. 평소에 생차를 즐기시지 않는 태사숙인데 어쩐지 챙겨온 찻잎 함에는 생차인 녹모단만 들어있었다. 방에 마시는 물을 길어 놓은 항아리를 보니 물이 얼마 남지 않아 주자서는 물동이를 들고 물을 뜨러 나갔다. 두레박을 내려 물동이에 물을 퍼 담고 두레박을 다시 걸어 놓는 새에 온객행이 와서 물동이를 들고 갔다. 주자서는 또 무슨 일이 벌어질까 두려워 발걸음을 재촉해 온객행을 따라갔다. 온객행은 별 말없이 물동이의 물을 물항아리에 옮겨 담았다. 주자서는 또 흰소리를 할까 싶어 의아한 눈초리로 온객행을 봤지만 온객행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창가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방안에 있는 화로에 물을 끓일 주전자를 찾아 올리고 다구를 주구전과 검선이 앉아 있는 탁상위에 조심스럽게 올려 놓았다. 찻주전자에 녹모단을 넣고 숙우를 옆에 놓았다. 물이 끓는 소리에 화로 앞으로 갔다. 끓인 물을 탁상으로 가져와 조심스럽게 숙우에 부어 놓고 무릎 꿇고 앉아서 기다리는 주자서를 보던 검선이 입을 열었다. “네 동생놈은 관가와 사돈이라도 맺은 거냐?” 주구전은 검선의 말에 ‘허허허’ 웃기만 했다. 주자서는 숙우에 손을 대보더니 녹모단이 들어있는 찻주전자에 물을 천천히 부었다. 주자서는 찻잔을 들어 검선 앞에 하나 주구전 앞에 하나 두었다. 그리고 찻주전자 손잡이를 주구전 쪽으로 돌려 놓은 뒤 숙우에 물을 조금 더 붓고 일어나며 말했다. “종조부,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말씀하세요.” 그리고는 물주전자를 다시 화로 위에 올려 놓았다.

주구전은 찻주전자를 들어 검선의 찻잔에 붓고 그리고 자기 찻잔에도 부었다. 검선은 찻잔을 들어 향을 맡더니 말했다. “과연 선하화룡!” 그리고 찻물을 마셨다. 주구전은 창가에 앉은 온객행을 보며 말했다. “온공자, 온공자도 양주의 선하화룡을 맛보시지요.” 그러자 검선이 주구전을 말리며 말했다. “이 귀한 것을 어찌 저놈에게!” 그러자 온공자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더니 옆에서 옷 매무새를 정리하던 주자서의 손목을 채서 방 밖으로 나가버렸다.


옷 매무새를 정리하던 중이라 요대가 제대로 매여 있지 않아 앞섶이 다 흐트러진 주자서는 거칠게 온객행의 손을 뿌리치며 멈춰 섰다. 재빨리 옷을 추스르려는데 온객행의 손이 불쑥 앞섶으로 왔다. 놀란 주자서는 자기도 모르게 사계산장의 보법으로 한걸음 물러섰다. 허공에 손이 멈춘 온객행이 좋은 구경을 했다는 듯 주자서를 보고 씨익 웃었다. 주자서는 잠시 멈칫했으나 한걸음으로 다른 사람의 무공을 눈치채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해 심의를 잘 둘러 입고 요대를 맸다.

앞섶을 쓸어내리며 온객행을 바라보자 온객행이 말했다. “키도 크고 날씬한데 엷은 홑옷 입었네,(9) 푸르고 푸른 그대 옷깃 아득하고 아득한 내마음이여.”(10) 그리고는 주자서에게 다가와 요대 아래로 어그러진 그의 옷을 정리해 주었다. 불쑥 다가온 온객행과 주자서의 거리가 가깝다. 온객행은 옷에서 손을 떼고 주자서의 어깨위에 손을 올려 어깨를 쓰다듬었다. 주자서는 또 미간을 찌푸리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주자서는 온객행을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몰랐다. 주자서에게 이런 식으로 접근하는 사람은 온객행이 처음이었다. 사계산장이나 근처 마을에 있는 소녀들 중 주자서를 흠모하고 있는 이들은 있었다. 그들은 모두 쑥스러워 그에게 말을 붙이거나 다가오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사계산장 주변에서 소매가 잘린 자를 보기가 힘들었다. 주자서에게 있어 남색이란 나이 지긋한 관리들이 앳된 미소년을 희롱하는 것이다. 그것도 책에서 언급된 몇 줄의 고사를 읽고 그렇게 생각한 것이다. 그러니 주자서에게 하는 말마다 희롱의 기색이 만연한 온객행은 주자서에게 있어 너무나 이상하고 신기한 사람이었다.

그가 주자서에게 뱉는 희롱은 글 좀 읽었다면 누구나 아는 고대의 악부(樂府) 시가들이었고, 그것이 희롱하는 의미를 가진 것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대체 어떻게 반응하는 것이 맞는 것인지 아니면 애초에 반응을 해야 하는 것인지조차 분명하지 않았다. 그래서 주자서는 모르는 척하기로 한 것이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어깨를 팔로 끌어안아 그를 근처에 있는 전각 앞 계단에 앉혔다. 그리고는 주자서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주공자 우리 함께 먹고 자고 한 것이 벌써 사흘인데 내가 그대를 자서라 불러도 되겟소?” 주자서는 온객행이 이끄는 대로 얌전히 어깨와 등을 내어준 채로 돌계단에 앉아 생각했다.

대체 이 치가 저에게 하는 이 행동, 이 언사(言事)는 다 무엇이란 말인가!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주자서는 바쁜 머리속을 정리하지 못하고 몽롱해서 온객행의 말을 듣지 못한 듯했다. 온객행은 등을 쓰다듬는 손을 아래로 내려 주자서의 허리춤을 잡았다. 허리춤을 잡아오는 온객행의 손속에 몸을 뒤로 빼며 주자서가 온객행을 보자 온객행이 주자서의 몸을 따라가며 말했다. “자서.” 온몸에 소름이 돋는 듯한 기분에 주자서는 몸을 떨었다.

그때 머리 위쪽에서 사람의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큼큼’ 주자서는 고개를 돌려 자운당에서 나와 주자서와 온객행이 앉아있는 계단 꼭대기에 그 둘을 민망한 기색으로 보고 있는 심아스님을 보았다. 주자서는 당황해 온객행의 손을 떨치고 일어나 심아스님께 공수하며 인사했다. 심아는 아직 계단에 앉아 주자서를 보고 있는 온객행을 한번, 달아오른 얼굴을 소매단으로 가려 인사를 하고 있는 주자서를 한번 보고, 다시 목을 ‘큼큼’하고 가다듬은 뒤에 “아미타불”하고 인사했다. 온객행도 일어나 심아스님을 보고 인사했다. “장명산에서 온 온객행이라 하오.” 심아스님도 그에게 반장하며 대답했다. “아미타불 심아라 합니다. 주공자께서는 장경각으로 가시지요.” 주자서는 그 말에 계단을 올라갔다.

주자서의 행동에 온객행이 주자서를 따르며 말했다. “저 갈라진 물줄기처럼 내 님 가시네, 나를 마다하고! 나를 마다하고… ”(11) 그 말에 심아의 눈치를 보던 주자서가 냉큼 온객행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주자서는 자신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행동한 후에 후회했다. 하려던 말을 다 하지 못해 주자서의 손에 대고 웅얼대던 온객행이 말을 멈추고 입술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마치 주자서의 손바닥에 입을 맞추는 것처럼. 주자서는 불에 데인 것처럼 손을 뗐다. 그리고 손바닥을 한번 온객행의 실실 웃는 얼굴을 한번 보고, 온객행의 앞섶에 손바닥을 쓱쓱 문질러 닦으며 심아스님께 길을 재촉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심아도 고개를 휙 돌리고 길을 나섰다.

주자서는 심아와 함께 장경각으로 가는 내내 생각했다. 시경에서도 정나라의 풍은 음탕하고 말재주가 있는 사람은 위태롭다 하였는데(12) 일부러 고른 듯 시경의 음란한 풍을 읊는다. 저 음란한 시들의 희롱 대상이 자신이라는 것이 의아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말재주가 좋은 사람은 구태여 남에게 미움만 받을 뿐이니 쓸데가 없다 했다.(13) 이 치는 나에게 미움을 사고자 하는 것일까? 몽롱한 머리속이 더 복잡해짐을 느끼자 갑자기 하늘이 핑 돌았다. 주자서를 따라 걷고 있던 온객행이 비틀거리는 주자서의 어깨를 잡았다. 두통이 밀려오자 잠깐 온객행의 몸에 기대어 있던 주자서는 짜증이 치밀어 온객행을 밀쳐버렸다.


주구전은 숭산회의 참석을 위해 검선과 함께 숭산 초입으로 갔다. 검선이 말했다. “원로 회의라면서 대체 왜 밖에서 야단인지. 노인네들 풍한이라도 들면 줄줄이 초상 치르겠네.” 주구전이 괜히 주변의 눈치를 봤다. 마당같이 넓은 공터에 의자와 탁자가 놓여있고 가운데 단상이 놓여있었다. 주구전이 괜히 근처를 배회하자 자리를 정리하던 스님이 와서 그들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자리에 앉으니 곧 따뜻한 차를 내왔다. 둘은 차를 마시며 자리가 점점 차는 것을 구경했다. 따로 늙은이들만 불러서 앞으로의 상황에 대해 논의하자 했던 것 치고 참석자의 나이들이 다들 젊었다. 양주의 권문세가 남궁세가의 소가주 남궁하도 올해 이모(二毛: 32세)였고 단양파와 태호파에서 왔다는 장문후계도 주구전이 알기로는 아직 이립이 안되었다. 태산파와 화산파의 장문도 원로라고 부르기에는 아직 젊다. 부득불 초대도 받지 못한 치들이 세력을 앞세워 소림사를 압박한 것이리라 생각한 주구전은 ‘흥’하고 코웃음 쳤다.

소림사의 주지 여운이 회주와 법주를 이끌고 단상이 놓인 동쪽에 앉았다. 단상 위에 있는 의자가 비어 있다. 주구전은 도착하자마자 여운과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라 또 누군가 올 사람이 있구나 싶었다. 관과 관련된 사람임에 틀림없다. 여운이 들어오자 논의 회장이 소란스러워졌다. 주구전은 조용히 혀를 차면서 무림세가니 정파라는 놈들이 퍽이나 위아래가 없다고 생각했다. 여운이 일어나 초대된 각 문파를 소개하고 있을 때, 숭산 초입에 말 네 마리가 끄는 마차가 나타났다.

소개를 하다 말고 여운이 자리에서 일어나 마차에서 내리는 사람에게 갔다. 마차에서 내리는 사람을 보고 주구전은 벌떡 일어나 몸을 숙였다. 주구전이 하는 것을 본 검선도 천천히 일어나 다가오는 사람을 보았다. 그는 태보(太保) 강상(姜尙)이었다. 미수(米壽: 88세)를 바라보고 있는 흰머리 성성한 노인은 은은한 비단옷을 입고 단상 위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소림사의 주지 여운이 강상을 소개하고 아까 하던 문파의 소개를 다시 시작했다. 그러자 검선은 주변을 한번 둘러보더니 자리에 털썩 앉았다. 주구전은 자신을 소개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여운이 주구전을 소개하자 태보에게 공수하여 인사하고 자리에 앉았다.

여운이 검선을 소개하자 태보가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다. “이자 강상 장명산 상선께 인사 올립니다.” 그러자 태보와 함께 온 무관이 그에게 말했다. “네놈은 누구인데 감히 태보의 인사를 앉아서 받느냐!” 그러자 강상이 그를 나무라며 말했다. “나이가 배나 더 많은 사람은 아버지를 섬기는 듯하라 했는데, 어찌 상선께 무례를 범하는가?” 그러더니 여운을 향해 말했다. “사람이 모여 있을 때에는 연장자의 자리를 반드시 따로 하여야 하는데 어찌 상선께서 다른 이들과 함께 계십니까?” 여운은 곧 사과를 하고 단상에 자리를 하나 더 만들자 검선이 웃으며 말했다. “정도에 지나친 마음은 유익할 것이 없는데 이 엽모는 강선생께 드릴 것이 없소이다.” 그러고는 계속 앉아 있자 태보가 말했다. “과연 용과 같구나.” 그리고 다시 자리에 앉아 나머지 세가와 문파의 인사를 받았다.(14)

태보가 나타났으니 논의의 논점은 말도 꺼낼 수 없게 됐다. 주구전은 황실에서 일어난 일을 태산태수의 부대장 진영에게 서신으로 받아 알고 있었지만, 아마 그 일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사람이 아니라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 논의가 대체 무엇 때문인지 모를 것이다. 주지 여운이 제령에 대해 운을 떼자 사방에 앉아있던 문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큰소리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주구전이 힐끔 옆을 보니 검선이 인상을 찌푸리고 정파라는 놈들이 하는 짓을 보고 있었다. 주구전은 괜히 검선이 나설까 두려워 조용히 말했다. “엽선배께서는 이 촌극이 무슨 일 때문인지 아십니까?” 검선이 찻잔을 집어 올리며 말했다. “네놈 아는 만큼은 나도 알고 있다.” 찻물로 목을 축인 검선이 ‘큼큼’하고 목을 가다듬자 논의 회장이 조용해졌다. 그리고 검선이 제령에 대해 운을 뗐다.


주자서는 몸 가짐을 바르게 하고 심아스님 뒤를 따라 장경각에 들어섰다. 온객행이 그 뒤를 따랐다. 심아스님이 뒤돌아 온객행을 한 번 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주자서는 괜히 송구스러워 온객행을 쏘아봤으나 온객행은 그저 해사하게 웃기만 했다. 장경각은 도감의 허락이 없으면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는데 심아는 자운당 앞에 있는 돌계단에 앉아있던 정다운 두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 다른 곳도 아니고 절간에서 희롱이라니 심아는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주구전이 부탁하여 장명각 방문을 허락한 것은 주자서 하나였지만, 온객행이라는 치가 불경을 읽으러 주자서를 따라오는 것 같지는 않아서 심아는 별말 하지 않았다. “이 곳에 있는 서간과 서책은 주공자께서 원하시는 만큼 읽으시면 됩니다.” 하고 반장하며 주자서에게 말했다. 온객행을 한 번 흘끔 보고는 서가로 가려져 있는 안쪽으로 들어갔다. 주자서가 심아가 사라진 쪽을 보니 왜 인지 커다란 돌이 서가가운데 있었다. 심아는 붓을 가져다 물을 찍어 돌에 불경을 쓰기 시작했다. 주자서의 시선을 눈치챈 심아가 글 쓰는 것을 잠시 멈추고 조용히 말했다. “벌을 받는 중이니 개의치 마소서.”

한동안 조용하더니 언제 그쪽으로 갔는지 온객행이 심아가 쓰고 있는 불경을 따라 읽으며 말했다. “무슨 죄를 지으셔서 벌을 받습니까?” 심아는 고개를 들어 온객행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근처에서 서간 하나를 꺼내어 읽고 있던 주자서가 벌떡 일어나 온객행의 소매를 잡고 자신이 앉아 있던 책상으로 그를 잡아 끌며 말했다. “스님께서도 개의치 마소서.” 온객행은 주자서가 하는 대로 끌려가면서도 뭐가 좋은 것인지 실실 웃었다. 온객행을 책상 앞에 앉힌 주자서도 자리에 앉았다. 보던 서간을 들어 다시 보려고 하는데, 별안간 온객행의 얼굴이 불쑥 앞으로 내밀어졌다. 한참 주자서가 아무 말도 없이 눈을 감고 있자 온객행의 손이 주자서의 이마를 짚었다.

주자서가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뜨자 온객행이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자서, 자네 열이 있는 것 같네.” 주자서는 온객행의 손을 떼어내며 읽고 있던 서간으로 눈을 돌렸다. 주자서는 속으로 네놈을 보고 있으면 속에서 천불이 치밀어 열이 나는 거라고 생각했다. 장경각 실내는 조금 서늘했는데 주자서가 앉은 쪽은 창호로 막은 창문이 있어 햇빛을 받아 따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자서의 고개가 꾸벅이기 시작했다. 책상에 턱을 괴고 주자서를 구경하던 온객행이 주자서보다도 먼저 눈치챘다. 주자서는 눈을 몇 번 끔뻑끔뻑 뜨더니 곧 책상에 엎어졌다.

온객행은 그런 주자서가 귀엽다고 생각하면서 주자서 옆으로 가서 앉았다. 몸을 일으켜 이마에 손을 데어보니 역시나 열이 있다. 요 며칠 밤날씨가 쌀쌀했는데 이불도 없이 쪽 잠을 잤으니 아플 수밖에. ‘이럴 줄 알았으면 한 침상에서 같이 자자고 말이라도 꺼내볼걸’ 후회하는 온객행이었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몸을 옆으로 눕혀 자신의 허벅지를 베게 했다. 또 흐트러진 주자서의 장포자락은 온객행의 마음을 간질였다. 맞지 않는 옷을 입은 주자서는 보는 사람을 음란하게 만들었다. 본인은 아는지 모르는지 내의가 다비치는 장포를 만질 수도 없어서 온객행은 고개를 돌려버렸다.

창문으로 새어 들어오는 햇빛이 주자서의 얼굴에도 닿았는지 주자서의 얼굴이 온객행의 몸을 향해 돌려졌다. 온객행은 소매를 들어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 주자서의 얼굴에 드리워진 머리카락을 조금 치웠다. 혹여 그 손짓에 주자서가 깰까 아주 조심스러웠다. 온객행은 스스로도 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 치는 대체 누구기에 이런 허술한 몸짓으로 온객행의 마음을 흔드는가? 그리고 그 몸짓에 온객행의 마음이 속절없이 흔들린다.

(9) 시경 소남 碩人 아름다운 사람
碩人其頎 衣錦褧衣
저 미인 키도 크고 날씨한데 비단에 엷은 홑옷 입었네.

(10) 시경 정풍 子衿 님의 옷자락
靑靑子衿 悠悠我心
푸르고 푸른 그대 옷깃 아득하고 아득한 내마음이여.

(11) 시경 소남 江有汜 갈라진 강물
之子歸 不我以 不我以 其後也悔
저 강에 갈라진 물줄기처럼 아가씨 시집가시네, 나를 마다하고, 나를 마다하고 나중에는 후회하리

(12) 논어집주 衛靈公 위영공 第十五 10
放鄭聲 遠佞人, 鄭聲淫 佞人殆.
정(鄭)나라의 음란한 음악을 추방하며 말재주 있는 사람을 멀리 해야 하니, 정(鄭)나라 음악은 음탕하고 말재주 있는 사람은 위태롭다.

(13) 논어집주 公冶長 공야장 第五 4
子曰 焉用佞. 禦人以給 屢憎於人 不知其仁 焉用佞.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말재주를 어디에다 쓰겠는가? 말재주 있는 사람은 구변(口辯)으로 남의 말을 막아서 자주 남에게 미움만 받을 뿐이니, 그가 인(仁)한지는 모르겠으나, 말재주를 어디에다 쓰겠는가?

(14) 사기 한비자집해 노자와 공자 서로에 대한 평가에 대한 구절
去子之驕氣與多欲 態色與淫志 是皆無益於子之身 吾所以告子 若是而已 孔子去 謂弟子曰 鳥는 吾知其能飛 魚 吾知其能游 獸 吾知其能走 走者可以爲罔 游者可以爲綸 飛者可以爲矰 至於龍 吾不能知其乘風雲而上天 吾今日見老子 其猶龍邪
노자가 공자에게 “그대의 교만과 탐욕 위선적인 표정과 과도한 야심을 버리시오. 모두 그대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소. 내가 그대에게 할 말은 단지 이것뿐이오.” 공자가 노자를 만나고 돌아와 이렇게 말했다, “새는 잘 날아다니고, 물고기는 잘 헤엄치며, 짐승은 잘 달린다는 것은 나도 잘 안다. 달리는 짐승은 그물로 잡으면 되고, 헤엄쳐 다니는 물고기는 낚싯줄로 잡으면 되고, 날아다니는 새는 활로 잡으면 된다. 하지만 龍에 대해서는 어떻게 바람과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오르는지 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는데, 내가 오늘 노자를 만나보니 그가 바로 용과 같구나!”

雨霖鈴 第3

3. 葉公好龍
엽공이 용을 좋아한다.

지객당은 소림사내에 손님이 머무는 거처였기 때문에 소림사 내부와는 거리가 있었다. 방에 앉아 있던 주자서는 불씨를 찾아 방에 불을 켜고 괜히 부산을 떨었다. 방장실에서 돌아온 주구전의 얼굴은 꽤나 복잡해 보였는데 주자서는 눈치껏 괜히 묻지 않았다. 지객당은 며칠 내 손님으로 가득했다. 주구전은 탁상에 앉아 장경각에서 빌린 오래된 불경을 읽으며 손님을 맞이했다.

손님들은 보통 양주의 어르신께 인사를 한다며 우르르 몰려와서 또 한번에 우르르 몰려 나갔다. 그 유명한 화산파(華山派), 태산파(泰山派)의 장문인으로 시작하여 악양파(岳陽派), 고산파(孤山派)의 장문과 사계산장에서 멀지 않은 단양파(丹陽派) 태호파(太湖派)의 장문도 인사했다. “양주에 있으면서 한번도 뵙지 못했던 귀한 분들을 숭산에서 뵙습니다.” 주구전은 별 뜻없이 한 말이었지만 조용히 듣고 있던 단양파와 태호파의 장문이 헛기침을 했다. 손님이 올때마다 자리를 정리하는 것은 주자서의 몫이었는데 주구전을 방문한 손님들은 힐끔힐끔 그를 보기만 할 뿐 누구인지 묻지 않았다.

주구전은 사람들의 방문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주자서에게 평소에 입는 호복 대신 심의를 입게 했는데, 평소에 자주 입지 않는 소매가 넓고 품이 넓은 옷이라, 그 옷을 입고 이리저리 주구전의 수발을 들고 있노라면 흐트러지기 일수였다. 주자서는 손님들이 인사를 하고 있는 동안 눈치껏 추스른다고 생각했겠지만, 주구전을 방문했던 사람들은 모두 그가 주구전의 연동이 아닐까 의심하고 있다는 것은 주구전도 주자서도 몰랐다. 또 한바탕 손님이 왔다 나가자 주구전은 주자서를 불러 말했다. “아무래도 옷이 큰 것 같구나.” 그리고는 주자서의 옷 매무새를 정리해주었다.

주자서가 입은 장포는 주구전의 중의였다. 사실 심의가 아니고 그냥 장포였지만 아직 작은 주자서는 그것을 몸에 둘러 심의처럼 입었다. 평소와 다르게 머리를 아래로 내려 묶고 연한 쪽빛 장포를 둘러 입은 주자서는 이제 막 과년이지난 앳된 소년으로 보였다. 주구전은 주자서가 사계산장에 온 날이 기억났다. 아직 충년도 지나지 않은 어린 아이가 소리도 내지 못하고 달포를 울었다. 혹시 몸이 상할까 사계산장 사람들의 애를 끓게 했던 아이는 사계산장 문턱을 넘고 1년 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다가 사문에 들어 제자가 되고 난 후 진회장을 ‘사부’라고 불렀다.

주구전은 그날 제자들과 함께 술을 마셨던 기억이 났다. 진회장은 아이의 사정에 대해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좋은 일도 아닌데 많은 사람이 알아서 혹 아이의 상처를 후벼 팔까 싶어서 그랬던 것이다. 사계산장 식구들은 캐묻지 않아도 아이의 사정을 모를 수 없었다. 그저 사계산장에 마음 붙이기 시작한 것이 기꺼웠다. 주구전은 만약 자신의 동생이 정말 살아서 손주를 봤다면 이렇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청명이 얼마 남지 않아 소림사는 논의를 위한 준비로 부산스러웠다. 주방에서 점심 찬합을 들고 처소로 가던 주자서가 자운당 근처가 소란스러운 것을 보았다. 가던 길을 멈추고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자 그 곳에는 흰 옷을 입은 남자가 승려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흰 옷을 입은 남자가 말했다. “나를 이곳으로 부른 것은 너희들인데 어찌 내 앞을 막느냐.” 남자의 목소리는 조용했으나 꽤 멀리 떨어져 있는 주자서에게까지 들렸다. 소란에 도감스님이 천불전 쪽에서 여러 스님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아미타불 도감 혜립(惠粒)이라 합니다. 처사께서는 무슨 연유로 소란을 자처하십니까?”

흰 옷을 입은 남자는 앞섶에서 어떤 패를 꺼내 혜립에게 내밀었다. 혜립은 그것을 손에 들고 확인한 후에 다시 돌려주며 말했다. “아미타불, 장명산 상선을 뵙습니다.” 이제 막 이립을 지난 것 같은 흰옷을 입은 남자가 장명산 검선인 것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놀랐는지 웅성였다. 주자서는 힐끔 장명산 검선을 한번 더 구경한 뒤에 지객당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차를 마시며 불경을 읽고 있던 주구전이 찬합을 들고 들어오는 주자서에게 말했다. “밖이 소란스럽구나.” 주자서는 찬합을 탁상 옆에 놓고 찬을 꺼내 올려 놓으며 말했다. “장명산에서 상선이 찾아오신 듯합니다.” 주구전은 ‘흠’ 하더니 곧 주자서가 내려놓은 점심을 보며 손에 들고 있던 죽간을 내려 놓았다. 주자서가 젓가락을 챙겨주자 주구전과 주자서는 둘이 탁상에 앉아 오붓하게 점심을 먹었다.

먹고 있는 도중에 갑자기 방문이 열렸다. 장명산 검선이 호쾌하게 인사하며 들어왔다. “주구전! 네 놈이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구나!” 종조부를 향한 불경한 소리에 놀란 주자서가 문을 보자 장명산 검선이 주구전과 주자서를 보고 있었다. 젓가락을 내려놓은 주구전이 검선을 보더니 활짝 웃으며 말했다. “엽(葉)선배!” 종조부께서 일어나시려는 것을 눈치챈 주자서가 얼른 일어나 주구전을 부축했다. ‘끙차’ 소리를 내며 일어난 주구전이 공손히 포권하며 검선에게 인사했다. “사계산장 제자 주구전 상선께 인사 올립니다.” 그리고는 몸을 숙이려 하자 검선이 주구전의 팔을 잡아채며 말했다. “예를 거두게, 괜히 절 받다 초상 치르기 싫으니.” 검선의 말에 주구전이 허허 웃으며 앉아서 밥을 먹고 있던 서안으로 손바닥을 펴며 말했다. “앉으시지요.” 그리고는 주자서의 부축을 받아 다시 자리에 앉았다.

검선은 주자서가 앉아 있던 자리에 털썩 앉으며 주자서를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말했다. “남색(男色)에 취미가 있었던가?” 주자서는 한동안 검선이 한 말을 이해 못하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검선을 쳐다 보고만 있었다. 주구전이 또 허허 웃으며 말했다. “선배, 이놈은 제 종손입니다.” 주구전의 말에 정신이 들었는지 주자서가 바닥에 머리를 대고 공손하게 인사했다. “주자서, 상선께 인사드립니다.” 검선은 주자서를 한참 들여다보더니 말했다. “네 놈은 자식이 없으니 네 동생놈의 손주겠구나?” 그 말에 주구전은 또 허허 웃었다.

주자서가 먹던 것을 치우고 새 젓가락을 내왔다. 주구전과 검선이 식사하는 것을 구경하게 된 주자서는 멀뚱히 주구전 곁에 앉아서 검선이 하는 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젊은 얼굴을 한 이 검선이 대체 누구이기에 종조부께서 이렇게 예를 차리는지 알 수 없다. 그러니 주자서는 눈치를 보며 구경하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주구전은 검선이 음식을 먹는 것에 잠시 놀라더니 주자서의 소맷자락을 당기며 말했다. “자서야 가서 음식을 좀 더 가져와야 하겠구나.”

주자서는 주방에서 가지고 왔던 찬합을 정리해 일어나며 종조부께 잠시 다녀오겠다며 공손히 인사하고 방을 나갔다. 그러다 처음으로 지객당 문간에 서있는 소년을 발견했다. 주자서와 비슷한 또래의 소년은 검선과 같은 하얀 옷을 입고 있었는데 찬합을 들고 나오는 주자서와 눈이 마주치자 얼굴을 빤히 보며 활짝 웃었다. 마치 아는 사람처럼 친근하게 웃는 모습에 주자서는 조금 당황했으나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했다. 소년은 주자서를 따라 주방으로 따라왔다. 주방에 도착해 주자서는 최대한 상황을 잘 설명하여 주방장에게 음식을 부탁했다. 아무래도 객으로 머무르는 곳이다 보니 괜히 죄송하여 예를 차리자 주방장은 사람 좋게 웃으며 찬합에 음식을 담아 주었다.

주자서가 스님과 대화하는 것을 아무 말없이 지켜보던 소년은 찬합에 담기는 음식을 보며 말했다. “죄다 풀밭이군.” 그 말을 들은 소림사 주방장은 그를 흘겨보았는데 소년은 신경 쓰지 않고 찬합을 닫아 들었다. 찬합을 빼앗긴 주자서가 소년을 보고 있자 소년이 말했다. “우리 노인네는 밥통이라 많이 먹으니 찬합을 하나 더 받아오시게.” 그 말에 주자서가 주방장을 보자 주방장은 소년이 나갈 때까지 소년을 노려보았다. 주방장은 찬합을 하나 더 꺼내어 주자서에게 내어주며 물었다. “저 시주님은 대체…” 소년이 나간 문을 보고 있는 주자서의 얼빠진 표정을 본 주방장은 더 묻지도 못했다.

주자서는 죄송한 마음으로 “장명산 상선과 함께 오신 객입니다.”라고 대답하고 음식에 대해 여러 차례 감사인사를 한참 한 후에 주방장이 챙겨준 찬합을 들고 나왔다. 소년은 부러 먼저 나갔으면서 문간에 서서 주자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걸었는데 소년은 계속 흘끔거리며 주자서를 몰래 훔쳐봤다. 소년은 주자서와 비슷한 연배로 검선이 입고 있는 것과 같은 흰색 장포를 입고 있다. 머리는 단정하게 반으로 나누어 묶어 올렸으며 요대에는 꽤 값이 나가 보이는 흰색 옥패를 달았다. 주자서는 괜히 주구전의 중의를 대충 입은 자신의 모습이 부끄럽다고 느껴졌다.


사계산장은 전란 전에도 그렇게 부유한 문파는 아니었기 때문에 옥은 커녕 돈으로 쓰는 은자도 보기 힘들었다. 사계산장 주변에 있는 땅을 개간해 밭을 일구거나, 농번기에 일손을 빌려주고 한해 굶지 않으면 다행인 생활은 주자서가 사계산장에 입문하고 나서부터 그랬는지, 아니면 원래 그랬는지 모를 일이다. 진회장과 낙양의 연이 사계산장 살림에 보탬이 된 것은 사실이나 결과적으로 좋은 일이었을까? 관과 엮이는 것을 꺼려 하였으니 벼슬길은 고사하고 세금이나 제때 내면 다행이었다. 잡생각에 눈치채지 못했던 시선이 주자서의 뺨에 스쳤다. 신선같이 하얀 옷을 입은 소년이 옥 같은 얼굴로 해사하게 웃었다. 주자서는 불편한 기색이 울컥 마음에 미치자 가던 길을 멈추고 소년을 보았다.

주자서가 걸음을 멈추고 소년을 빤히 쳐다보자 소년은 찬합을 내려놓고 손을 모아 인사했다. “주공자 혹시 저라산 기슭의 완사계 출신이 아니오?”(6) 소년의 목소리는 낮고 어른스러웠는데 내용이 그렇지 못했다. 주자서는 말 뜻을 잠시 생각하다 당황스러워 미간을 찌푸렸다. 주자서의 표정을 보자 소년은 더 신이 난 듯 말했다. “찡그린 표정도 절색이니…, 길고 가녀린 목덜미에 절로 드러난 흰 살결은…. ”(7) 주자서는 소년의 말에 놀라 찬합을 내려놓고 옷 매무새를 정리했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이 흘러내렸나 싶어 괜히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아무것도 달려있지 않은 요대를 바르게 하고 소년을 쏘아보자 소년은 주자서가 하는 모습을 보고 있었는지 말했다. “생김새가 아름답고 곱고 가냘프니 보는 이가 어찌 즐겁지 아니 한가?”(8) 주자서는 넋이 나가 소년을 멍하게 바라봤다. 방금 그가 말한 것이 본인을 향한 것인지 의심스러워 주변을 둘러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소년의 시선이 괜히 부끄러워 주자서의 귀 끝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주자서는 뭔가 말하려고 입을 열었다 닫기를 몇 번, 하늘을 봤다가 땅을 보기를 또 몇 번 결국 아무 말없이 한숨을 내 쉬었다.

다시 한번 주변을 살핀 주자서는 내려놓은 찬합을 들고 소년을 무시하며 길을 재촉했다. 지객당과 주방사이의 거리는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까운 거리였는데 지금 주자서에게는 만리길처럼 멀기만 했다. 소년을 무시하며 걷는 주자서에 대고 그는 멈추지 않았다. 달이 부끄러워 구름에 가린 듯 아련하다느니, 연꽃이 부끄러워 피지 않는다느니,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을 잊는다느니 시답지 않은 말을 쉬지 않고 했다.


지객당 안에서 주구전과 검선은 남은 찬을 먹으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주자서가 도착해 주구전과 검선에게 다시 한번 인사하고 둘이 앉아 있는 탁상으로 다가가 찬합을 열어 새로 가져온 요리를 상에 올려놓고 다 먹은 그릇을 찬합에 옮겨 담았다. 주자서가 하는 것을 보고 있던 소년이 주자서 옆에 자기가 가져온 찬합을 내려놓았다. 소년을 물끄러미 바라본 주자서가 그 찬합에서도 음식을 꺼내 탁상위에 올려 놓았다. 검선이 주자서가 찬을 내려 놓는 모습을 보더니 말했다. “시중 드는 일이 익숙하지 않은가 보군.” 검선의 말에 주구전이 주자서의 어깨를 쓸어내리며 말했다. “우리집 귀한 종손이 어디서 시중을 들어 봤겠습니까?” 그리고는 사손들의 자랑이 시작되었다. 다 아는 사람에게도 한시진은 족히 말해야 끝나는 태사숙의 손주 자랑은 양주에서는 유명했다. 하지만 듣는 검선은 모르니 주구전은 더욱 신이 났다.

주자서가 내려 놓은 음식을 검선 앞으로 밀어주며 한참 막내제자의 자랑을 하던 주구전이 주자서 옆에 선 소년을 발견하고는 물었다. “엽선배, 이 처사는…?” 검선은 소년을 이제서야 발견했다는 듯 손을 휘휘 저어 소년을 불렀다. 검선의 부름에 소년은 검선 옆으로 가 서더니 부루퉁하게 주구전에게 인사했다. “온객행(溫客行), 주대인을 뵙습니다.” 검선은 온객행의 태도가 마음에 안 든다며 혀를 차고는 말했다. “이놈은 내 질제자일세.” 주구전은 온객행을 뚫어져라 한참 보더니 뭔가 생각난 듯 말했다. “선배님의 질제자요…? ‘흠’ 이 아이 온씨가 맞습니까?”

그 말에 장명산 검선은 혀를 차더니 말했다. “쯧! 그만 봐라! 우리 귀한 제자 얼굴 닳겠네. 주가놈 너는 예나 지금이나 쓸데없이 눈치가 좋구나.” 주구전이 검선을 바라보자 옆에 서있던 온객행이 검선 옆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는 탁상에 올려진 음식을 손으로 집어먹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고 있던 주자서가 젓가락을 찾아 그의 앞에 놓았다. 검선은 온객행이 먹는 것을 보고 있다가 그의 뒤통수를 때리며 말했다. “네놈은 위아래도 없지.” 그러자 온객행이 검선의 손을 피하며 말했다. “빼앗고자 하면 먼저 주어야 한다는데 노야는 장명산에서 숭산까지 오는 길에 내게 뭘 주었소?” 검선이 콧방귀를 끼며 말했다. “장유유서 모르냐 장유유서! 새파랗게 어린 놈이!” 온객행이 주구전을 슬쩍 보며 웃었다. 주구전은 온객행에게 물었다. “자네 혹시 견(甄)씨가 아닌가?” 온객행의 표정이 한순간 굳어졌다.

그렇게 불편한 동거가 시작됐다. 다음날 양주에 가장 큰 세가인 남궁세가(南宮勢家)에서 사람을 보내 주구전을 그들의 거처로 불렀다. 주구전이 그들에게 가려고하자 검선이 그를 막으며 말했다. “어디 어른이 인사하러 간단 말인가? 살면서 그런 법도 본적이 없네.” 하며 주구전과 차를 마셨다. 참다 못한 남궁세가에서 사람들이 오자 장명산 검선은 그들을 호되게 꾸짖었는데 그걸 듣고 있는 주자서가 다 민망할 지경이었다. 남궁세가는 군신이 나온 집안이라 사계산장과 달리 형편이 좋았다. 매번 싫은 소리를 들어가며 남궁 집안의 일을 해야 했던 주자서는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주자서의 은은한 미소를 눈치챈 온객행이 신이 나서 검선의 흥을 돋우는 바람에 남궁세가의 소가주 남궁하(南宮夏)는 한시진이나 서서 꾸중을 들었다. 주구전이 나서서 검선을 멈추지 않았으면 하루 종일 들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지객당에 머무르는 객 중에 누구 시중을 들 만한 사람은 주자서뿐이었다. 침상이 2개 있었으나 객이 둘 늘었으니 한 명은 평상에서 자고 다른 한 명은 잘 곳이 마땅치 않았다. 주자서는 종조부와 검선이 주무실 자리를 봐 드리고 평상에도 이불을 깔았다. 주구전, 검선과 온객행은 화로 앞에 앉아 불을 쬐고 있었다. 화로에 탄을 채워 넣은 것도 주자서이다. 해시가 되자 시간을 알려주는 스님이 목탁을 치며 시간을 알려왔다. 이는 소림사의 소등시간을 알려주는 것이기도 하다. 주자서는 주구전이 침상에 오르는 것을 도운 뒤 불을 끄기 위에 촛대 앞으로 갔다. 검선과 온객행이 눕는 것을 본 주자서가 촛대의 불을 껐다. 주자서는 멀뚱히 서서 짙게 어둠이 깔린 사위를 두리번거리다 창가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양주의 봄은 금방 오는 듯했는데 숭산의 봄은 또 다른 듯했다.

(6) 이백 西施 서시
西施越溪女 出自苧蘿山
서시는 월나라의 빨래하던 아가씨로 저라산 기슭의 완사계(浣紗溪) 출신인데...

(7) 조식 洛神賦 낙신부
延頸秀項 皓質呈露 芳澤無加 鉛華弗御
길고 가녀린 목덜미에 절로 드러난 흰 살결은 향기로운 연지도 호사한 분도 바르지 아니하였구나.

(8) 진문제 (陳文帝) 진천이 한자고에게 바친 시
容貌艶麗 纖姸潔白 如美婦人 臻首膏髮 自然蛾眉 見者靡不嘖嘖
생김새가 아름답고 곱고, 가냘프고 깨끗하니 예쁜 부인과 같구나!
네모지고 넓은 이마와 윤기나는 머릿결 자연스러운 눈썹 보는 이가 즐겁지 아니한가!

雨霖鈴 第2

2. 覆水難收
엎지른 물은 다시 담기 어렵다.

숭산으로 가는 객은 주구전과 주자서 둘로 조촐하게 꾸려졌다. 태사숙은 만약 주자서가 없었다면 홀로 훌쩍 다녀오시고도 남을 사람이었으나 복잡한 상황과 아는 것이 별로 없는 처지를 알고 말없이 사라졌다 괜히 사계산장에 해를 끼칠까 고심하여 결정한 일이다. 사철 꽃이 피고, 구주의 일이 알려져 끝나는 곳으로 유명한 사계 산장은 그동안 조심스럽게 관과의 일을 피했지만 제령을 받은 일은 그 동안의 상황과는 조금 다른 일이었다. 보통 사계산장이 알고 있는 일은 강호에서 일어나는 일들이었기 때문에 알지 못해도 알아지는 것들이 있었다.

관의 일 또한 알고자 하면 시간이 흐르면서 알아지는 일들이었기 때문에 괜히 내색해서 일을 하거나 부러 일을 만들지 않았다. 아무리 강호에서 날고 기어도 천자의 땅에 사는 백성들이었기 때문에 그 말을 거역할 수는 없다. 그러니 부러 알려고 여는 숭산논의가 관에 어떻게 비추어 질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괜히 이동하는 객의 수를 늘려 길을 지체하지 않기 위함이고, 주자서를 낙양성 근처로 보내 그의 신상을 아는 이가 있는지 떠보기 위함이다.

낡은 마차 한 대에 젊지도 그렇다고 또 많이 늙지도 않은 그럭저럭한 말 한 마리가 매여 있다. 가는 동안 먹을 것과 갈아 입을 옷, 서책 몇개와 태사숙이 아끼시는 찻잎을 넣은 함이 전부였다. 진회장이 태사숙과 주자서를 배웅하며 말했다. “사숙. 오래 머물 일이 아니시거든 그냥 돌아오세요.” 주구전은 진회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대문 앞에 나와있는 제자들에게 말했다. “죽으러 가는 것 아니다. 이만 하고 다들 들어 가거라.” 그리고는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주자서도 나와 계신 사문 어르신과 동문 제자들에게 공손히 인사했다. 진회장이 고삐를 주자서에게 건네며 말했다. “태사숙께서 하시는 일을 괜히 도우려 하지 마라. 네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주자서는 고개를 끄덕이고 마차에 올라 말을 몰았다.

오전에 출발한 마차는 하루 종일 달려 해질녘이 되어서 남창(南倉)에 도착했다. 남창은 형주(荊州)와 양주(揚州)의 경계로 낙양성으로 뻗어 있는 성으로 장강 하류가 시작되는 곳이다. 양주에서 낙양까지 가장 빠른 길은 합비를 지내 개봉을 거치는 것이었지만 그 곳은 전란으로 황폐해져 길이 험하고 위험했다. 그러니 그들은 장강을 따라 조금 돌아서 가기로 한 것이다. 태사숙을 걱정하여 노숙하지 않게 하기 위해 진회장과 다른 사제들이 주구전을 들들 볶아 그렇게 만들었다. 태사숙은 평소보다 더 많은 노자돈을 한번 그 돈을 쥐여준 진회장을 한번 보고는 흡족하게 웃으며 염낭을 품 안에 넣었다. 진회장은 올해, 다른 때보다 더 많이 마을 일을 도울 예정이다.

태사숙은 낙양으로 가는 길이 썩 즐거운 일은 아니었기에 가는 내내 주자서에게 이런 저런 투정을 했다. ‘말이 좋아 부탁이지 오지 않으면 의심하겠단 소리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라던가 ‘관의 일에 관여하지 말라 하는데 이렇게 모이면 모의를 작당하는 걸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던가 하는 말을 했다. 주자서는 그 말을 듣고 대충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있었다. 그래도 주자서는 괜히 자기 때문에 연로하신 태사숙이 먼 낙양까지 발걸음 하시는 것인가 싶어 태사숙을 더 살뜰히 보살폈다. 피하고자 하면 분명 방법은 있었을 것이다. 주구전이 폐관수련을 번복하면서까지 낙양으로 가는 것에는 주자서의 일도 포함된 것이다.


이레를 부지런히 말을 몰아 형주, 악양(岳陽)에 도착했다. 태사숙은 마차에서 내려 아는 객잔이 있으니 그리로 가자 하시며 악양성에 들자 마자 말 고삐를 쥐셨다. 주자서는 자기도 모르게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태사숙의 뒤를 따랐다. 악양성으로 들어온 문에서 멀지 않은 곳에 허름하고 낡은 객잔이었다. 태사숙은 고갯짓으로 마구간을 일러주고는 주자서에게 고삐를 다시 넘겼다. 그리고 문을 박차고 객잔 안으로 들어갔다. 주자서는 마차를 마구간 옆에 두고 짐에서 귀중한 것들을 빼 봇짐을 챙겼다. 그리고 마차에서 말을 떼어 내고 마구간에 넣어 주었다. 주변에 보이는 풀더미를 말구유에 넣고 마실 물이 있는지 확인한 후에 봇짐을 들고 객잔 안으로 들어갔다.

객잔은 허름한 모양새와는 달리 사람이 꽤 많았다. 여기저기 다른 곳에서 온 사람들인지 행색이 제각각이었다. 주자서는 사계산장에 입문한 이후로 이렇게 멀리 와 본 적이 없다. 옷 차림새나 생김새가 다른 사람들이 여기저기 보이니 괜히 위축이 되면서도 신기하여 두리번거리는 것을 멈추지 못했다. 안쪽에서 탁상을 하나 차지하신 태사숙이 점소이에게 무언가를 주문하는 것을 본 주자서가 그리로 가 봇짐을 놓고 앉았다. 점소이는 시원스레 태사숙의 주문을 외치더니 자리를 떠났다. 태사숙은 앞에 있는 미지근한 찻물을 주자서에게 따라 주며 말했다. “그렇게 두리번거리지 마라” 그 말에 주자서는 놀란 듯이 몸 가짐을 바르게 했다. 그리고 태사숙이 건넨 차를 두손으로 들고 마셨다.

점소이가 금방 태사숙의 주문을 받으러 왔다. 태사숙이 값을 치르자 점소이는 인사를 하고 주문을 확인한 뒤, 자리를 떠났다. 태사숙이 주자서에게 음식이 든 접시를 밀어주며 말했다. “이제부터 가는 길은 도성으로 향하는 관도이니 길을 가기 전에 일러줄 것이 있다.” 주자서는 음식을 먹으며 태사숙이 하시는 말씀을 들었다. 주자서의 사정을 알고 있는 주구전은 주자서와 사계산장의 인연이 알려지는 것은 사계산장에 위험한 일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이야기하며 지금부터 주자서는 주구전의 재종손이며 사계산장과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하여야 한다고 했다.

주자서의 서운한 기색을 읽은 주구전은 웃으며 말했다. “이 주 모의 종손으로는 성에 차지 않느냐?” 그 말에 괜히 마음이 죄송해진 주자서는 아니라고 연거푸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사계산장의 어른임은 맞으나 장문인적도 없고, 할 마음도 없었으니 숭산으로 가는 이 길은 사계산장과 무관하다.” 주구전은 만일 무슨 일이 생기면 본인이 다 떠안을 작정인 것이다. “그러니 너도 사계산장의 무공을 함부로 보여서는 안된다.” 태사숙의 말에 주자서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러니 앞으로는 태사숙이 아니라 종조부라 부르 거라.”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방을 잡아 하룻밤을 지냈다. 그 날 아침 일찍 일어나 아침을 마친 두 사람은 마차에 말을 묶으며 길을 재촉했다. 청명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도에 가까워지자 관도는 다른 곳보다 훨씬 북적북적했다. 마차의 행렬이 길게 늘어서 있어 원래 예정대로라면 등봉성(登封城) 안으로 들어가야 했지만 마차들의 행렬에 끼어 들어가지 못했다. 주구전과 주자서는 어쩔 수 없이 노숙을 하게 되었다. 성 밖에도 객잔이 많았으나 사람도 그만큼 많았다. 성문 근처에 마차를 대고 말뚝에 말을 매어 놓았다. 주구전이 앉아 있는 마차안의 휘장을 걷어 놓고 불씨가 작은 제등을 걸었다. 주자서는 지나온 마을에서 사두었던 밀전병을 주구전과 나누어 먹고 물을 뜨러 우물가를 찾으러 나갔다. 성문이 닫힌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근처가 부산스러웠다.

하늘의 별을 보며 점을 치던 주구전 앞에 갑자기 마차 안으로 사람이 한 명 들어왔다. 주구전은 깜짝 놀라 방금 들어온 사람을 보았는데, 그는 얼굴에 복면을 하고 있었다. 주구전이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복면을 쓴 남자가 주구전에게 불쑥 서신을 내밀었다. 그리고 밖의 상황을 흘끔 보더니 훌쩍 뛰어나가 금방 눈앞에서 사라졌다. 주구전은 남자가 사라진 쪽을 한참 보다가 받은 서신을 보았다. 서신은 얇은 천으로 되어있고 어떤 직인이나 날인이 없었다. 주구전은 서신을 펼쳐 보았다. 서신은 동군의 부대장 진영에게 온 것이었다. 서신은 낙양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현황제에게는 아들이 셋 있다. 둘은 황후에게 하나는 귀비에게 낳은 황자이다. 황제는 아무도 태자 삼지 않았지만 귀비의 아들인 삼황자, 기왕(紀王)을 아끼는 듯하다. 기왕은 전황제의 기대를 받고 자란 아이이기도 했다. 전황제와 현황제의 사이는가 그다지 좋지 못했던 것과 상관없이 두 황제는 총명한 기왕을 매우 아꼈던 모양이다. 현황제가 기왕을 가까이 두면서 문제는 시작되었다. 황후의 위치가 곤란해진 것이다. 게다가 황후의 가문은 강호의 무림맹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가문이기도 했다. 그 무림맹에 어떤 문파가 속해 있고 어떤 일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왕국구를 위해 여러차례 강호의 힘이 움직인 것을 낙양성 근처에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아는 이야기였다.

강호의 연을 이용하여 황후 왕씨는 기왕을 데려다 기이한 술을 먹여 황제에게 물러나라는 뜻의 상소를 쓰게 했다. 다행히 황제에게 올려지지는 않았으나 그 사실을 알게 된 황제가 금위군을 소집하여 황후와 기왕의 일을 조사하게 명령했다. 나중에 그 상소가 발견되어 황제가 그것을 읽어보았는데, 황제의 퇴임을 요구하는 글이었다. 황제는 진노했고 그동안의 총애가 무색하게 기왕을 멀리하게 되었다.

당연히 귀비는 가만히 앉아 당하고 있을 수 만은 없어 황후와 국구가 강호의 무림맹과 결탁한 것을 황제에게 알렸고, 그 과정에서 황후의 둘째아들 진왕(晉王)의 출생해 대한 정당성을 의심하는 상소가 황제에게 올려진 것이다. 황후와 무림맹의 사이가 긴밀함을 말하고자 했던 그 상소는 황후의 정당성을 공격하게 되었고 이 상황을 보다 못한 황제가 정월부터 강호를 견제하는 제령을 내린 것이다. 그 제령을 받은 무림맹 소속 문파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져 서로를 헐뜯는 싸움을 했고, 그 과정에서 서선공의 이름이 언급되었다고 쓰여 있었다.

서신을 모두 읽은 주구전은 울화가 치밀었다. 정파라고 하는 대협이니 소협이니 하는 것들은 도나 닦을 것이지 어째서 관의 일에 관여하여 일을 이렇게 크게 만들었단 말인가? 애초에 그들이 관에 관여하여 얻는 것이 무엇인가? 오랜 시간의 전란을 겪고도 그들은 아직도 잃을 것이 많은 모양이다.

주구전은 서선공 주희(朱熹)가 주자서(周子舒)의 아버지인 것을 알고 있다. 진회장과 주희가 강호를 떠돌며 천하 무고를 찾아 헤맬 때, 주구전이 사계산장의 대리 장문인이었다. 진회장이 주희와 유람을 할 수 있게 허락한 것도 주구전이었다. 주구전은 한참을 다 읽은 서신을 손에 들고 있다가 얼른 밖으로 나가 제등안에 불씨를 붙여 서신을 태워버렸다. 이런 일은 사람들이 모르면 모를수록 좋은 일이다.


관도(官道)를 따라 보름을 달려 청명보다 조금 이르게 숭산(嵩山)에 도착한 주구전과 주자서는 숭산 초입에 보이는 기다란 행렬을 보고 놀랐다. 초대받은 자와 초대받지 못한 자가 한 켠에서 시끄럽게 싸우는 것이 시장통이 따로 없었다. 평소 시끄러운 것을 좋아 할리 없는 소림사 주지도 어찌 하지 못해 그냥 둔 것일 테니 이 소란은 숭산논의가 끝나야 멈출 일이다. 주자서가 마차 안으로 들어가 말했다. “종조부, 앞에 사람의 행렬이 길어 마차가 움직이기 어렵습니다.” 주자서의 말에 주구전은 품에서 숭산에서 받은 서신을 꺼내 주자서에게 주며 말했다. “이것을 산문까지 가서 보여주고 오너라. 숭산 초입이 아니라 산문이다.”

주자서는 주구전이 건넨 서신을 앞섶에 넣고 마차밖으로 나갔다. 마차를 근처 한적한 곳에 세워 두고 산문으로 향했다. 사람들은 숭산 초입을 지나 산문 앞까지 많았다. 딱히 줄을 서거나 하지도 않고 서로 뒤엉켜 말을 주고받으니 시끌시끌했다. 주자서는 산문 앞을 지키는 몸집이 좋은 승려 두 사람에게 다가가 공손히 인사한후 입을 열었다. “양주에서 온 주자서라 합니다. 종조부께서 이 서신을 보여드리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앞섶에서 서신을 꺼내 보여주었다. 산문을 지키던 승려 중 하나가 서신을 보고 다시 주자서에게 돌려준 뒤 안으로 들어갔다.

일각 정도 기다리자 스님 여럿이 나와 주자서에게 인사하며 말했다. “아미타불, 소림사 도감 혜립이라 합니다.” 그리고는 뒤에 거느리고 나온 승려 여럿이게 무엇을 말하더니 주자서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어린 처사를 따라가 양주의 주대인을 모셔오너라.” 주자서는 혜립스님께 공손히 인사하고 돌아서 종조부께로 갔다. 날이 저무는 지라 숭산 앞에 있던 사람들도 어느정도 해산하여 한산했다. 마차로 달려가 주자서가 말했다. “종조부, 소림사에서 종조부를 모시러 왔습니다.” 그리고는 마차에 앉아 고삐를 잡았다. 함께 온 승려들이 길을 터주어 주구전과 주자서는 소림사로 들어갔다.

소림사로 들어온 후 주구전은 도감 혜기(惠企)스님을 따라 방장실에서 주지 여운(汝雲)과 회주인 여희(汝熹), 여자(汝慈)를 만났다. 주자서는 자신을 심아(審芽)라고 소개한 스님을 따라 말과 마차를 마구간 근처에 세워 두고 봇짐을 챙겨 스님을 따라 지객당으로 향했다. 아담하게 작은 처소 뒤쪽으로는 작은 개울이 있었다. “시주께서는 이 곳에 머무시면 됩니다. 아직 논의까지 시간이 있으니 편히 쉬십시오.” 그리고는 공손히 합장하고 몸을 돌려 나갔다. 지객당에 들어선 주자서는 봇짐을 내려놓고 의자에 앉았다. 깔끔하게 정리된 실내는 약간 한기가 들었다. 날이 저물어 사위가 어두웠다.

방장실에 주구전은 공손이 포권하여 주지와 회주들에게 인사했다. 그들 역시 주구전을 향해 인사했다. 주구전이 운을 띄웠다. “별래무양 하셨습니까?” 주지인 여운이 허허 웃으며 말했다. “불심을 닦는 중생에게 별고 있겠습니까.” 그리고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가 뜻하는 바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주구전도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주구전은 이 중놈들이 어디까지 알고 있고 어디까지 관여했는지 알 수 없으니 그냥 조용히 입을 닫고 모르는 척했다. “이 주모는 저 멀리 양주에서 고사리를 뜯어먹고 있었는데 대체 무슨 쓸모가 있어 이리 먼 길을 오게 하셨습니까?”

회주 여자가 그 말을 듣고 코웃음 치며 말했다. “폐관수련이 아니라 종손들이 예뻐서 밖으로 안 나온 것이 아니셨습니까?” 듣고 있던 여희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어허 여자, 대체 이게 무슨 무례인가.” 주구전은 허허 웃으며 말했다. “내 종손과 사손은 내 핏줄이니 당연히 어여쁘지요.” 그 말에 여희와 여자의 얼굴이 조금 굳어졌다. 주지스님 여운이 말했다. “양주는 낙양에서 머니, 아직 제령을 못 받아 보았을 수도 있겠습니다.” 주구전은 한참 눈치를 보다 말했다. “제령이라면 오는 길에 들었습니다. 솔직히 오는 도중에 다시 돌아갈까 몇 번이고 고심했습니다.” 그러자 여운이 말했다. “돌아 가시 다니요? 아직 무슨 일인지도 모르는 것 아니셨습니까?” 주구전이 말했다. “하필 이런 시기에 원로의 논의라니 심어 놓은 모를 뽑는 일 아닙니까?”(5)

여운이 말했다. “저희가 원해서 이리 했겠습니까.” 그 말에 주구전은 의구심이 들었다. 감히 소림사에게 배 놔라 감 놔라 할 수 있는 세력이 어디 있겠는가? 분명 천자와 관련된 일인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방장실에 모여 골머리를 앓고 있는 것이다. 사계산장에서 주구전의 처소에 모여 그와 그의 제자들이 한 것과 같이. 게다가 소림사는 낙양과도 지척에 있어서 조정의 일을 거절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 할 이유도 없으니 어쩔 수 있나? 괜히 착잡해진 주구전은 입안이 타서 차를 찾았다.

(5) 발묘조장 拔苗助長 논에 심어 놓은 모를 뽑다. 서둘러 가려다 오히려 이르지 못한다.

雨霖鈴 第1

1. 人去楼空
사람이 가고 남은 빈 집.

진회장(秦懷章)은 앉아서 손에 들린 제령을 읽었다. 이 제령은 올해 정월이 지나 각 고을에 내려진 황제의 명령을 적어 옮긴 것인데 그 내용은 이러했다.

“천자를 정하는 일에 사리분별 못하고 폐추(1)가 되어 천자의 뜻에 무불간섭(2) 하는 자는 엄벌 할 것이다. 우물물은 강물을 침범하지 않는다.”(3)

몇 글자 안되는 글에 진회장은 괜히 소름이 돋았다. 아무래도 낙양에 무슨 일이 벌어진 모양이다. 사계산장은 양주에 있어서 수도인 낙양과는 거리가 멀다. 태산파니, 화산파니 하는 으스대기 좋아하고 낙양 근처의 문파가 관의 일에 관여하여 천자의 심기를 거스른 모양이었다. 그걸 보고 있는 소림사가 또 가만히 있을 리 없으니 그 이야기가 남쪽 양주까지 흘러내려온 것은 이 것이 터무니없는 뜬 소문이 아니라는 소리다.

자고로 황실과 무림은 서로의 일에 참범하지 않는 것이 어떤 관습이었다. 보통 이렇게 무림과 관가가 충돌하는 일이 생기면 이 혼란을 틈타 관의 이름을 빌어 악을 처단한다는 소리가 나오고, 그렇게 되면 또 그동안의 쌓인 파문간의 시비를 가리려고 들며 싸움이 커지는 것이다. 강호를 떠도는 허무맹랑한 소문이야 하나 둘이던가? 그런 것이야 사사로운 개인간의 원한이니, 없는 것 치면 또 못할 것도 없지만 천자의 제령은 다른 일이다.

정파니 사파니 이단이니 하는 싸움이야, 가서 몸을 맞대고 서로 싸우면 될 일이다. 관의 이름으로 누명을 쓰면 그건 구족이 멸할 일이다. 파문의 존망이 걸린 일이다. 이 소식은 예전 진회장이 낙양에서 학문을 유학할 때 알게 된 하급 관리인 진영(陳迎)이 보내준 서신이다. 진회장이 유학 당시 진영은 보사(步士)였는데, 지금은 태산태수의 직할 부대인 동군을 지휘하는 부대장이다. 그는 진회장이 알고 있는 사람 중에 제일 권세욕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그래서 살아 남았다. 그는 진회장에게 남은 몇 안되는 낙양의 연락책이기도 하다.

황제에게는 황후 왕씨(王氏)에게서 두 아들을 귀비 유씨(劉氏)에게서 아들 하나를 두어 황자가 모두 셋이다. 이것도 한참 오래전의 이야기를 귀동냥으로 주워들은 내용이다. 황제는 아들을 두고서도 아무도 태자 삼지 않았는데, 이게 그 유명한 황제의 의심병이다. 그러니 대비를 해야 했다. 진회장은 사형, 사매를 모아 사숙이 폐관수련을 하고 계시는 사계산장 뒷산에 올랐다.

벌써 10년째 폐관 수련중인 진회장의 사숙 주구전(朱求田)은 양주일대의 강호에서는 가장 큰 어르신이었다. 이런 저런 환난을 겪고 혼자 오래 살아남은 죄라며 수양을 위해 산으로 들어 가신 것이다. 하지만 말이 좋아 폐관 수련이지, 종종 사계산장에 들러 사제와 사손들의 보법을 고쳐주고 가시거나, 산에서 말썽을 피우는 들짐승을 잡아 놓고 가시는 일을 하시며, 사계산장 밖으로 나가시지 않아 대외적으로 그렇게 된 것이다.

진회장은 뒷산을 사형제자매와 함께 걸으며 말했다. “혹 낙양에 연이 닿는 분 없소” 다들 고개를 저으며 묵묵히 길을 올랐다. 그들 중 관과 제일 인연이 많은 것은 양주자사의 가좌 중 하나인 율령사를 하고 있는 양가인(陽茄仁)의 부군 정회(貞會) 정도였다. 진회장이 괜히 그녀를 흘끔 쳐다보자 양가인이 입을 열었다. “거리 상으로도 그렇고, 사계산장이 딱히 조정에 연을 둔 것도 아닌데 무슨 걱정을 하십니까?” 그 말에 길을 오르던 사형, 사매의 고개가 일제히 진회장을 향했다. 진회장은 고개를 숙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진회장의 아버지는 사실 강호와도 관과도 연이 없는 사람이었다. 어쩌다 혼란한 시기에 전란에서 높으신 분을 만나 목숨을 건지고 우정을 나누면서 이 이야기는 시작한다. 그 높으신 분에게는 아들이 있었는데 하필 그 아들이 진회장과 연배가 비슷하여 피난길에 서로를 의지하게 된 것이다. 그러다 양주 임해로 피난을 하게 되었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높으신 분의 아들인 주희(朱熹)는 임해(臨海) 사계산장(四季山莊)에서 무학을 유학하였고, 진회장은 사례(司隸) 낙양에서 학문을 유학하였다. 실질적으로 사계산장에서 낙양 땅을 밟아본 이는 손에 꼽혔고. 진회장은 그 중 한 사람이었다. 주희는 나중에 높으신 아버님의 영향으로 훌륭한 장군이 되었고 요동을 침략한 북방이민족을 막아낸 공으로 당시 황제가 아끼는 서경(曙景)공주와 결혼하여 서국공(署國公)으로 봉해졌다.

금위군의 통령 자리도 선황제가 공주의 부마가 공주 곁을 비우고 사방을 떠도는 것을 막기위해 내려준 직책이기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 황제는 승하했고, 서경공주는 경무(景武)장공주로 봉해졌다. 현황제의 책봉은 밖에서 보면 매우 당연하고 조용한 일이었으나 당시 상황을 살펴보면 모를 일이었다. 새 황제는 서국공을 정치적으로 견제했고 그 때문에 종종 서국공을 강호로 보내 떠도는 소문이나 무림의 일을 수집하게 했다. 금위군의 통령이면서 강호를 떠돌게 된 것이다. 그러다 황제는 옛 망국의 무고(武庫)에 대한 소문을 알게 되었다. 현 황제는 그 일을 서국공에게 일임했고 강호의 일을 잘 아는 진회장이 그를 도와 함께 강호를 유람한 것이다. 강호를 유람하는 동안 진회장은 아미파의 제자인 아내, 추수(秋水)를 만났다.

추수가 유람 중 아이를 가지게 되어 서국공과 진회장은 아쉬운 이별을 하게 되었고 그 이후로 둘은 가끔 서신을 주고받는 것 이외에 그렇다 할 왕래가 없었다. 몇 년 후 진회장은 서국공에게서 서신을 받게 된다. 서국공의 서신은 상황이 급박했는지 몇 글자 적혀 있지 않았고, 그 마저도 사계산장에서만 쓰이는 간단한 암호문으로 되어 있었다. 진회장이 바삐 말을 몰아 보름만에 낙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무슨 일이 벌어지고 난 이후였다. 금위군이 서국공의 저택을 포위하고 있었고 주희 본인은 이미 옥에 갇혀 만날 수 없었다. 그날 밤 진회장은 몰래 담을 넘어 서국공의 저택에 숨어 들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경무장공주를 알현했다.

외실에는 하인 한 명 없이 경무장공주와 그의 어린 아들만 있었는데 진회장이 무릎을 꿇고 인사하자 장공주가 그 인사를 받으며 아들에게 말했다. "사부께 인사 올리거라." 그 아들은 장공주 옆에서 숨죽여 울고 있었는데 장공주의 말에 고분고분 따르며 땅에 머리를 붙이고 진회장에게 절했다. 장공주가 말했다. “이 아이는 이제 이름이 없소. 주씨도 사마씨도 아니오.” 그 말에 땅에 머리를 붙이고 울고 있던 아이가 고개를 들어 장공주의 치맛자락 붙들었다. “흐…흐흑… 모친!” 장공주는 한참 눈을 감고 서있다. 그리고 눈을 떠 자기 치맛자락을 붙들고 울고 있는 아이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숨을 고른 그녀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나며 아이의 손에서 모질게 치맛자락을 빼냈다. “가시오. 내 아들 주영은 오늘 우물에 빠져 죽었소.” 무릎걸음으로 장공주를 쫓는 아이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아이는 훌쩍이며 장공주를 불렀다. “모...모친… 모친!!” 큰 소리도 내지 못하고 숨 죽여 어미를 찾는 것이 안쓰러웠으나 상황이 녹록치 못해 지금 가야 했다. 장공주께 예를 다해 작별을 고한 진회장은 아이를 안아 들었다. 조금 버둥거리더니 곧 멈추었다. 아이는 장공주가 있는 외실 쪽에 눈을 떼지 못한 체 손으로 입을 막고 울었다. 진회장은 바쁘게 발을 놀려 사계산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같은 날 밤 경무장공주는 서국공 주희의 무죄를 보인다며 주택(朱宅) 대문에 목숨을 걸었다. 하지만 황제는 믿지 않았다.


서국공과 장공주의 아들은 단지 태사숙과 성씨가 비슷하다는 이유로 태사숙의 질손자가 되었다. 자서(子舒)라는 이름은 예전에 주희가 강호에서 썼던 가명 중 하나이다. 이제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도 진회장을 포함해 얼마 없지만. 다른 또래 아이들보다 조금 조용하고 재미없는 녀석으로 자랐다. 강호에 관가와 엮여 부는 바람은 어느때이고 있었지만 이번 바람은 사계산장까지 불지도 모를 일이다. 사계산장의 장문과 장로들은 지금 태사숙의 거처에 앉아 있었다. 태사숙은 출타 중인지 보이지 않았다.

제일 연장자인 서소강(徐少強)이 화로의 불을 피우며 부산을 떨자 필장풍(畢長風), 양가인도 주변에서 주섬주섬 일을 찾아 하기 시작했다. 진회장만 앉아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정월이 지난지 얼마 안되었는데 또 무슨 일로 이렇게 다들 찾아온 것이냐?” 다들 하던 일을 멈추고 태사숙께 인사했다. 문을 등지고 앉아 있던 진회장도 일어나 태사숙을 뵈었다. “주사숙.”

필장풍이 내온 차를 사계산장 어른들이 화롯가에 빙 둘러 앉아 마셨다. 진회장이 건넨 제령을 읽은 주구전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것은 생각의 소홀함을 경계하고자 하는 것이냐? 아니면 살핌이 지나침을 경계하고자 하는 것이냐?” 양가인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무엇을 경계하고자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태사숙은 양가인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진회장을 보았다. 진회장은 산을 오를 때 내 쉬었던 그 깊은 한숨을 또 내 쉴 수밖에 없었다.

주자서의 신분을 아는 이는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람과 본인 뿐이다. 한참 아무 말도 없이 찻물을 들이켜던 진회장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벌써 10년도 지난 일이고, 낙양에 이제 그 아이를 아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 말에 태사숙이 콧방귀를 끼며 말했다. “손바닥으로 하늘이 가려지더냐?” 앉아있던 필장풍도 거들었다. “낙양에 그 아이를 아는 이가 없진 않네. 단지 제일 몰라야 할 사람이 안다는 것이지.” 필장풍의 말에 방에 있던 사람이 모두 동의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섯사람은 또 말없이 다 식은 찻물만 들이켰다.

며칠 태사숙을 방문하던 다섯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한참을 고민하였으나 답을 찾을 수 없어 답답하였다. 답답한 마음에 그들은 제자들을 시켜 술을 들이게 하고 말았다. 정월 대보름이 지나 첫 그믐이 가까워질 동안 그들은 태사숙의 거처를 찾아 방법을 찾는 다는 핑계로 벌써 보름이나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착실히 훈련을 하던 제자들도 사계산장 어르신들의 행태에 마음이 해이해진 것은 순전히 장문과 장로들의 탓이다. 근처에 있는 다른 문파들은 사람을 꾸려 낙양으로 사람을 보냈다는데 사계산장만 마치 제령을 아직 받아 보지 못한 문파처럼 변함이 없었다. 이것은 태사숙이 괜한 행동을 엄하게 단속했기 때문인데 명절 기분을 내는 이 술판이 다른 문파의 방문을 거절할 좋은 구실이 된 것은 사계산장 어른들만 아는 일이었다.

그들은 술을 마시면서도 서로 의견을 교환했는데 그러는 새 시기는 우수를 지나 경칩이 다가오고 있었다. 논과 밭을 갈 일손을 요청하는 사람들이 마을에서 오자 더 이상은 문을 닫아 놓고 모른척할 수 없는 상황까지 온 것이다. 게다가 날이 풀리자 숭산에서 태사숙을 초청하는 서신이 왔다. 소림사에서 온 것이다. 그들은 청명에 숭산에서 원로들의 논의를 열어 천자의 제령에 대해 토론하는 자리를 갖고자 양주의 어른이신 태사숙의 참가를 부탁하는 내용이었다. 무엇을 토론하겠다는 것인지 그 의도가 심히 의심되었지만 그렇다고 또 참석 안 할 수도 없었다. 사계산장은 비록 그 역사가 짧으나 양주에서는 꽤 큰 세가이고 게다가 혼란한 시기를 겪으며 근처에 많은 문파들이 스러져 갔기 때문이다. 그 것은 양주가 속해 있던 나라가 망한 이유도 있었고, 관과의 일을 이런 저런 이유로 피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또 다시 태사숙의 거처에 모인 사계산장 제자들은 둘러 앉아 차를 마셨다. 필장풍이 입을 열었다. “다른 문파가 다들 저리 바삐 움직이는데 오히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그것 또한 의심을 살 수 있습니다.”그러자 양가인이 거들었다. “관리라는 자들은 유독 의심증이 깊어 호의미결(4) 하는 것을 본 일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태사숙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내가 10년동안이나 폐관수련이라는 명목 하에 강호에 나서지 않았거늘, 어째 사람들은 나를 잊지 않는구나.” 태사숙의 말에 제자들은 괜히 걱정이 되었다. 진회장이 말했다. “사숙, 사숙께서 꼭 가셔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자 서소강이 입을 열었다. “그래도 양주에서 제일 큰 어르신이니 강호에서 사람을 초대하여 여는 대회라면 참석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의심을 살 수 있습니다.” 듣고 보니 또 맞는 말이었다.

요 근래는 전란과 환란이 끊이지 않는 시기였다. 이제 천하가 통일되어 조금 조용한가 싶었는데 또 그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상황이 이러 하니 황제의 의심증이 심해져 괜히 무림의 일까지 간섭하는 것인가 싶기도 했다. 그들은 또 왕래의사를 결정하는 핑계로 태사숙의 거처에서 거나하게 술판을 벌였다. 정말 더 이상 지체하면 청명에 맞춰 숭산에 도착할 수 없는 때가 되어서야 그들은 어떻게 할지 시간에 쫓겨 결정했다.

진회장은 그날 오후 모든 훈련이 끝난 시간에 제자들의 거처로 갔다. 힐끔 안을 들여다보니 이쪽도 차와 다과를 놓고 유행하는 시가를 읊으며 장문과 사계산장의 어른들이 태사숙의 거처에서 행하는 태를 따라 놀고 있었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법이니 진회장은 제자들을 탓할 마음은 없었으나, 분위기를 깨지 않고는 주자서를 불러내기가 곤란하였다. 몇 번 헛기침으로 인기척을 내고 장지문을 열어 발을 들여 놓자 제자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다. “사부님!”

이 처소에 있는 아이들은 대략 지학을 넘긴 아이들로 사계산장에 들어온 지 칠년이 넘은 아이들이 대부분이다. 이 아이들은 그 재주가 제각각 달라서 공통된 사계산장의 무공을 배우는 것이 아니면 각자 다른 사숙 과 사모를 모시며 배우는 아이들이다. 서소강의 아들인 서공(徐貢)은 약학의 재능이 있어 양가인의 제자가 되었고 진회장의 아들 진구소(秦九霄)는 체술에 재능이 있어 필장풍의 제자가 되었다. 주자서는 그 귀한 핏줄이 어디 가지 않는지 머리가 좋아 사람 부리는 일을 잘하여 진회장이 데려다 장문 후계자로 키우고 있다.

진회장은 방안을 둘러보았다. 인사를 하는 제자들 중에 주자서가 없다. 다른 아이들이 찻잔을 기울이며 풍류를 떠들 때 자기 침상 위에 등롱 하나를 온전히 홀로 차지하고 죽간을 읽고 있었다. 다른 제자들이 사부에게 인사하는 것도 모른 채 뭐가 그렇게 재미 있는지 죽간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진회장은 주자서를 조용히 불렀다. “자서야 내 주숙께 가는데, 가는 길 제등을 밝혀다오.”자기를 부르는 소리에 퍼뜩 놀라더니 사부에게 공손히 인사했다. 주자서는 조용히 대답하고는 보고 있던 서간을 정리하고 밖으로 나갔다. 각고에서 제등 하나를 가져와 안에 초롱을 넣었다.

뒷산으로 향하는 샛문에 진회장이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제등을 들고 온 주자서를 발견한 진회장은 주자서에게 먼저 가라며 손짓하고 그 뒤를 따라 뒷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일각 정도 걸어서 사계산장에서 조금 떨어졌을 때 진회장이 주자서에게 물었다. “자서야, 너 낙양에 있을 때 일은 얼마나 기억하느냐?” 진회장의 물음에 발걸음이 멈춰버린 주자서는 제등에서 눈을 떼고 진회장을 바라봤다. 당황과 슬픔이 섞인 표정이다. 주자서는 다시 고개를 숙여 들고 있는 제등을 한참 보았다. 진회장은 그런 주자서를 기다려 주지 않고 앞서서 태사숙의 거처로 향했다. 주자서도 이내 곧 그를 따라 걸었다. 거처에 다 도착했을 즈음에 주자서는 잠시 멈춰 조용히 말했다.

“저에게는 이름이 없습니다.”

진회장은 그 말 뜻을 한참 생각하고 서있다가 태사숙의 거처에 있는 싸리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섰다. 사숙의 거처에는 불이 꺼져 있었는데 진회장은 큰 소리로 인사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주숙! 부족한 제자가 가르침을 청합니다.” 거처 안으로 들어가자 주구전은 방안에 눈을 감고 앉아 진회장이 들어오는 쪽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뒤에 제등을 내려 놓은 주자서도 바닥에 머리를 대고 절하며 인사했다. “주자서. 태사숙을 뵈옵니다.” 주자서를 발견한 태사숙은 그제야 눈을 떠 그들을 보았다. 그리고 목을 ‘흠’하고 가다듬고는 말했다. “둘 다 이리와 앉게.” 진회장이 주구전 앞에 놓인 화로위에 찻주전자에 물과 찻잎을 넣으며 앉았다. 주자서도 그 옆에 무릎 꿇고 앉았다.

어린 제자들에게 미주알고주알 상황을 말한 적 없으니 아마 주자서도 지금의 형세를 알리 없었다. 그래도 항상 눈치 있게 굴던 녀석이라 입을 꾹 다물고 진회장과 태사숙이 하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주구전이 입을 열었다. “태사숙은 청명에 열리는 숭산에 가야겠구나.”진회장은 새로 우린 차의 첫잔으로 찻주전자를 씻고 두번째 잔을 주구전에게 올렸다. 세번째 잔은 자기 앞에 네번째 잔으로 찻잔을 씻어 그 다음 찻물을 주자서에게 주었다. 주자서는 조용히 태사숙과 사부가 차를 마시는 것을 지켜보다 사부가 주신 차를 두 번에 나누어 마셨다. 세 사람은 찻주전자가 끓는 화로 앞에 앉아 주자서가 문간에 내려놓은 희미한 제등 불빛에 차를 마셨다.


(1) 폐추 敝帚 닳아 빠진 비라는 뜻으로, 분수에 넘게 자만심이 강한 사람을 이르는 말

(2) 무불간섭 無不干涉 덮어놓고 나서서 간섭하지 않는 것이 없음.

(3) 불범하수 井水不犯河水 관은 무림의 일에 상관하지 않고, 무림은 관의 일에 상관하지 않는다.

(4) 호미의결 狐媚疑結: 여우가 의심이 많아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는 뜻으로, 어떤 일에 대하여 의심이 많아 결행(決行)하지 못함을 비유(比喩)하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