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직


1.

혜문왕이 죽고 혜후가된 미주는 미월이 바란대로 초나라로 보내주는대신 연나라로 보냈다. 일찍이 잦은 영역다툼으로 사이가 좋지않은 연나라에 미월은 이제 막 10살이 갓 넘은 영직과 머리가 하얗게 샌 규고를 데리고 먼길을 떠나야했다.준비해준 마차는 다 낡고 망가진것이라 10리를 가지못해 망가져 걸어야했고, 진나라를 벗어나자 그들을 호위하던 군졸마저 모두 진나라로 돌아가버렸다. 출발할때는 연꽃이 더위에 이슬을 뱉던 여름이었으나 도착했을때는 눈발이 날리는 겨울이었다.

미월이 연나라로 오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영토분쟁은 일어났고, 연궁에 도착했을때 미월이 당한 고초와 수모는 몇년이 지난 영직에 마음에 아직도 응어리로 남아있다. 연왕가에서 하사한 집은 근처 농가보다 못한수준이었고 먹을것도 입을것도 아무것도 없었다. 게다가 날씨는 어찌나 매서운지 규고와 영직은 겨울 내내 기침을 달고 살아야했다. 다행히 미월의 동생 위염과 백기가 근근히 사람을 보내 보살피지 않았다면 영직은 매서운 북연의 겨울바람에 죽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미월은 그런 영직을 위해 손수 죽간을만들고 알고있는 지식을 써서 글을 팔았다. 하지만 연나라는 나라가 기울었는지 글공부를 하는 사람은 없고 매일 춤과 연회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영직은 매일 사서, 삼경 등의 글을 매일매일 죽간에 옮겨적으며 글공부를했고, 미월은 데려온 시종과함께 하루종일 수를 놓아 먹을것과 장작을 구했다. 배를 곯거나 장작이 없어 미월과 꼭 붙어자야하는 날도 많았다.

영직은 찬바람에 튼손을 호호 불며 시장에 앉아 죽간을 팔았다. 하루종일 장에 앉아서 글을 팔아도 하루에 죽간한책도 팔지 못하는 날이 더 많았다. 다행인것은 미월이 놓은 수는 금방 입소문을 타서 일정한 수입이되었다. 영직의 하루일과는 해가뜨면 죽간을 들고 장에 나가고, 해가질때쯤 돌아와 수를놓는 미월 옆에서 죽간을 만들거나 베껴쓰다 잠드는것이 고작이었다.

어느날은 죽간을 팔고있는데 어떤 소년이 다가와 물었다. "무슨책을 파시오?" 영직은 가지고있는 죽간을 하나하나 짚으며 설명했다 "이것은 시경이고, 이것은 사서, 이것은 삼경이오 혹시 다른 서책이 필요하다면 말해보시오." 소년은 죽간을 펼쳐 이리저리 살펴보다 말했다 "이것은 이미 알고있는 내용이오.. 혹시 병법은 없소? 노자도 좋소이다" 영직은 과거 지금은 진왕이된 영통의 글공부를 도울때 영통의 고집으로 읽었던 여러 병법서가 떠올랐다. 영직은 신이나서 그때 보았던것들을 그 소년과 한참 이야기했다.

소년의 옷차림은 허름했지만, 그는 왕실에서 공부한 영통과 말이 통할정도로 똑똑했다. 영직은 소년에게 자신이 알고있는것들을 정리하여 내일까지 죽간으로 묶어오겠다고 소년과 약속했다. "나는 영직이라하오, 당신은 이름이 무엇이오?" 소년은 수줍은듯 대답했다. "나는 남문 문지기의 아들 문덕이라하오, 무관이되기위해 공부중이오." 영직은 활짝웃으며 문덕에게 악수를 청했다. " 꼭 죽간을 사지않아도 좋으니 종종 내 말벗이 되어주시오"

집으로 돌아온 영직은 오늘만났던 소년에대해 미월에게 말했다. 그녀는 수를 놓으면서 영직이 기억했던 병법서를 읊어주었다. 미월은 영작이 또래 소년과 어울릴수 있게된것아 기뻤다. "혹 그 아이가 사정이 여의치않아 죽간을 살수 없으면 그냥 주어도 좋다" 라고말한 미월의 말에 영직이 활짝 웃었다. 미월은 공부한내용을 잘 기억한 영직이 기특하기도 했고, 하지 않아도 될 고생을 하면서도 잃지않은 어진마음이 고마웠다.


2.

날씨가 점점 따뜻해지고 영직과 문덕은 종종 어울려 놀았다. 미월의 바느질 솜씨는 입소문을타고 연왕궁에서까지 찾게되었다. 그때문에 예전보다 더 바빠졌지만 형편은 점점 나아져, 영직은 오전에만 죽간을 팔고, 오후에는 땔감을 주우러 다녔다. 문덕은 서툴은 영직을 살갑게 챙겼는데 그의집은 영직이 살 고있 는 집에서 멀지않아 둘은 금방 친해졌다.

문덕의 아버지는 문지기가 되기전 고향에서 현령의 위였는데 원정을 나온 비장군의 눈에들어 도성으러 와서 진사를 할정도로 출신에비해 무예가 출중한 사람이었다. 어머니는 현령의 첩실의 딸로 의학을 공부하여 약방을 하였다. 하지만 그 규모가 작고 날때부터 어진사람이라 살림에 큰 보탬이 되지 않았다.

어느날은 영직과 함께온 시종중에 하나가 노환으로 고생할때 문덕의 어머니가 기를 보양하는 약재를 주기도하였고, 가끔 미월을 보러오는 위염이나 백기가 문덕의 부모님께 몰래 사례하기도 했다. 문덕과 영직은 허물없이 좋은 친구가 되었다.

날이 풀리자 가지끝에 초록색 멍울이 앉았다. 문덕과 뗄감을 주우러나온 영직이 메고온 망태기안에 바닥에 떨어진 나뭇가지를 주우며 말했다. "봄이 온것같은데 아직도 이렇게 춥다니, 연나라는 봄이라는것이 안오는가봐." 문덕은 허허 웃으며 말했다 "녹는 눈을 보면 모르겠어? 연에서는 눈이 녹는다는게 봄이 왔다는 증거야." 한참 뗄감을 주우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영직이 물었다. "어째서 무관이 되려는거야? 문관이 되어도 너는 충분히 잘할수 있을것 같은데.. 차라리 어느 고관대작을 찾아가 책사가 되게 해달라고 하는것은 어때?" 문덕은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고작 진사의 아들이 무슨 명분으로 그러겠어 내말을 들어보기도 전에 문전박대 당할거야."

돌아오는 내내 기분이 안좋아보이는 문덕을보고 영직은 괜히 미안해졌다. 그리고 자신의 미래역시 불안해졌다. 문덕은 자신의 꿈이있고 목표도 있는데 영직은 자신의 미래에 대해 크게 생각해본적이 없었다. 그저 미월이 이끄는데로 끌려갈뿐이었다.

겨울이 두번 지나가고 미월도 영직도 생활에 익숙해질 무렵 갑자기 도성이 시끄러웠다. 제나라와의 협상이 좋지않게 끝났고, 그때문에 여러사람이 징집되었다. 문덕의 아버지도 징집대상이 되었고 문덕도 만약 길어진다면 내년에는 징집대상이 될터였다. 문덕의 아버지는 떠나기전에 미월을 찾아와 예를 갖추며 아내를 부탁했고 미월은 문덕의 어머니와 문덕을 받아주었다.

제나라 뿐만아니라 위나라까지 합세하여 연나라를 공격하자 도성을 떠나 피난을 가는 사람이 생겼다. 문덕과 문덕의 어머니는 문덕의 아버지를 기다리기 위해 떠나지 않았고, 미월과 영직은 진나라의 볼모이기때문에 그곳을 떠날수 없었다. 피난을 떠난 사람이 많아 도성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미월의 바느질도 문덕의 어머니의 약초도 찾는사람이 없다보니 점점더 형편이 팍팍해졌다.

문덕의 식구까지 함께 살다보니 문덕과 영직은 곧잘 형제처럼 붙어다녔다. 아비에게 배운 무예나 검술을 영직에게 가르치기도했고 죽간을 만들거나 배껴쓰는것을 도우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느날은 두 사람이 살림에 보탬이 될까하여 강에서 낚시를 하고 있었는데, 그곳까지 병졸들이 닥쳤다. 도성내에는 연황제가 다른나라에 몸을 의탁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났다.

어느날밤에 미월은 문덕의 어머니를 불러 말했다. 아무래도 상황이좋지않아 자기 동생들에게 서신을 넣었고, 곧 자신을 데리러 올거라고, 혹여 동행하겠다하면 문덕과 함께 거두겠다고. 하지만 문덕의 어머니는 남편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본인은 남겠다고, 대신 문덕을 거두어달라고 부탁했다. 미월은 동생인 백기와 위염이 자신들을 데리러 올때까지 설득했으나 결국 고집을 꺾지 못했다. 결국 미월은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고 문덕을 거두기로 했다.


3.

먹을것을 찾기위해 밭쪽을 헤메던 미월의 시종은 예전 초나라 재상의 아들이었던 황헐을 만난다. 연나라에 인질로 와 있는 것이라 피난을 가지 못하는 미월의 딱한 처지를 듣고 그 이야기를 연나라 재상에게 해주기로 약속했다. 얼마 지나지않아 그들은 황헐을 따라 초나라를 향했다.

초나라로 향하는 인원은 많지않았다. 마차안에는 미월과 초나라 공주시절부터 미월을 모셔온 하녀, 그리고 문덕과 영직이 있었고, 말을탄 황헐과 황헐의 호위 3명 그리고 마부 한명이 전부였다. 그들은 남동쪽으로 큰산을 돌아가는 길을 선택했다. 미월은 마차안에서 문덕과 영직에게 예전 문혜왕과 나누었던 정치적인 이야기들을 해주었다.

날이 저물었지만 역참에 도착하지 못해 결국 야영을 하게된 일행은 산의 입구부분에 자리를 잡았다. 문덕과 영직은 불을피울 땔감을 함께 주우러 근처를 돌아다녔고, 황헐의 호위들은 산에들어가 산닭을 사냥했다. 사냥은 다행히 성공적이어서 산닭 두마리를 구워 나눠먹었고, 불가 근처에 앉아 잠을 잤다. 끝봄, 꽃도 다 지고 여름의 녹음이 짙어지는 날씨가 다행이었다.

도통 불편해 잠을 이루지 못하는 영직을 문덕이 뒤에서 끌어안았다. 문덕에게 기댄영직은 문덕응 한번 돌아보고는 차가운 문덕의 손을 제품에 안았다. 황헐과 앞으로의 계획을 이야기하고 잠사 눈을 붙이기위해 마차로 돌아왔을때 두소년은 서로를 꼭 끌어안고 곤히 잠들어 있었다. 미월은 영직을 뺨을한번 문덕의 어깨를 한번 쓰다듬고 근처에 앉아 눈을 붙였다.

연나라와 제나라의 경계에 다다랐을때, 연나라의 군대가 미월의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어쩔수없이 근처 역관으로 돌아가 상황을 살펴보기로 했다. 편치않은 생활에 몸이 약해진 영직은 역참에 도착해서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미월과 시녀는 부재중이었고 문덕은 영직의 땀을 닦아주며 자리를 지켰다.

"문덕, 어머니는 어디계셔?" 영직의 물음에 문덕은 밖응 살펴보고는 대답했다. "황대인과 앞으로의 일을 의논중이신것 같아" 참침대 곁에있는 의자에 앉아 영직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영직은 체온보다 낮은 문덕의 손에 얼굴을 붙이며 슬픈표정을 했다. "내가 얼른 일어나야 어머니께 방해가 안될텐데..." 문덕은 반대쪽 손으로 바꿔 영직의 뺨을 만지며 말했다. "연의 군대가 버티고 있는 동안은 아무것도 할수 없으니 방해될것도 없다. 그럴생각할 기운이나거든 밥을 좀더 먹고 건강해지면 되잖아." 말은 뾰족하게 나갔지만 영직을 쳐다보는 표정과 그를 돌보는 손짓은 다정했다.

한동안 발이 묶였다 그동안 연나라 왕실에 진나라 볼모에 대한 보고에 오해가 있었던 모양이다, 연나라의 제후가 찾아와 그동안의 고초를 사과하고 다시 연나라로 돌아갈것을 요청했다. 영직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을때는 또 다시 날씨가 추워지고 있었다. 연나라로부터의 미월에대한 처분이 몇주째 늦어지고 있었다.

역참은 잠시 머물러 가는곳이지 지내는곳이 아니었기때문에 황대인은 근처이 작은 집에 세를 내었다. 그 집도 연나라 도성에서 지내던 집과 크게 다를것이 없었지만, 몸을 잘쓰는 호위도 있고 이것저것 도움을 주는 식솔이 늘어서 그럭저럭 지낼만했다. 언제부터인가 호위들이 문덕과 영직에게 기초적인 체술을 가르쳐주었는데 문덕은 곧잘 따라했다. 가끔 황헐이 두 어린공자를 데려다 이런저런 병술을 가르쳤는데 책사의 소질이 있어보이는 문덕을 매우 마음에 들어했다.


4.

연나라의 연통보다 진나라의 대신이 먼저 도착했다. 혜문왕의 동생인 저리질이 보낸 용예라는 자였는데, 그가 영직의 형 무왕 영탕이 죽었다고 전했다. 그 때문에 혜후가 미월과 영직을 찾아 죽이려고 한다는 내용이었다. 용예는 자신이 호위할테니 연나라 군대를 뚫고 당장 진나라로 가야한다고 말했다. 미월은 황헐과 초나라로 가는것과 영직을 왕으로 만들기위해 진나라로 가야하는것중 하나를 선택해야했다.

그날밤, 미월은 영직을 데려다 얼굴이며 손발을 씻겨주며 물었다. "직아 너는 무엇이 되고싶으냐?" 영직은 유순하게 앉아 미월의 손길을 받아내며 대답했다. " 어머니 곁이라면 무엇이든 되겠습니다." 미월은 영직을 품에 안으며 말했다 " 내가 혹여 잘못된 선택을 한다해도 내 곁에 있겠느냐?" 영직은 미월을 마주안으며 말했다. "잘못된 선택이라도 어머니께서 내리신 결정이라면 곁에서 따르겠습니다." 미월의 머리속이 복잡해졌다.

다음날 아침 미월은 황헐에게 작별을 고하고 영직 문덕과 함께 진나라로 향했다. 제나라에서 진나라에 다다르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을때 저리질로부터 연통이 왔다. 혜주가 진나라로 들어오는 자들을 검문하고 확인한다는 소식이었다. 이제 이틀만 더 가면 진나라 도성 함양인데, 더 이상 다가가는건 너무 위험한 일이었다. 용예는 미월의 동생인 위염과 의거에 있는 백기에게 도움을 청했다.

국경으로 접어들기전 미월은 위염과 백기를 만났다. 하지만 역참에 머물고 있던중 괴한들에게 납치당하고 말았다. 미월의 납치소식을 알게된 위염은 재빨리 영직을 조나라로 빼돌렸다. 영직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서는 여러사람의 도움이 필요할것 같았다. 옆에있는 문덕이라는 소년이 꽤 살갑게 영직을 챙겼다. 위염은 문덕과 영직을 조나라 중대부가에게 둘을 맡기고 진나라로 돌아갔다.

조나라에서 지내는동안, 두 공자는 그 동안의 고생과는 정반대의 시간을 보냈다. 춥지도 않았고 배고플일도 없었다. 하루는 시장에 나가 제나라의 글자와 도량형을 구경하고 있었는데 문덕의 아버지를 만났다. 문덕의 아버지는 다행히 연나라로 돌아가 어머니를 데리고 무사히 제나라로 도망친 모양이었다. 영직은 마치 친아버지를 만난것러럼 크게 기뻐했다. 위염이 혹시 몰라 보내준 패물들을 문덕의 가족에게 주며 말했다. "가장 힘들때 벗이 되어 저와 저희 어머니를 지탱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것들로 그 감사를 모두 전할 수 없는게 부끄럽습니다." 문덕은 중대부가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고 거처를 부모님이 계신곳으로 옮겼다.

날이 따뜻해지고, 두 사람은 조나라에서 유명하다는 꽃놀이를 하러 근처 절에 놀러갔다. "매번 봄은 이렇게 오고 갔겠지?" 문덕이 말하자 영직이 눈으로 문덕을 쫓으며 말했다. "그간 인생이 고달파 이렇게 예쁜것들을 눈에 담지 못했네. " 문덕은 영직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전란이 들끓어 제때 씨를 뿌리지 못한나라의 백성은 전투에 휘말려죽거나, 약탈당하거나, 굶어죽겠지." 두사람의 마음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백성들은 조나라에 세금을내나 연나라에 세금을내나 어차피 이름만 다를뿐 일상에 아무런 변화도 없을텐데..."영직의 말에 놀란 문덕이 물었다. "만약 네가 왕이된다면 좋은 왕이 될수 있을것 같아" 영직은 문덕의말에 흐드러지게핀 봄꽃보다 더 활짝 웃었다.

중대부가의 도움으로 영직은 조나라에서 제일 명망이높은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는동안 문덕은 조나라 금위장군의 보병이되었다. 전쟁에 나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영직은 문덕을 잃을까 덜컥 겁이났다. 언제 떠날지도 모르는 자신과 달리 문덕은 전점 조나라에 정착하는듯 보여 내심 서운했던 영직이었다.

머릿속이 복잡해 날이 늦은줄 모르고 죽간을 붙들고 있던 영직은 어두워진 서고에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드는듯하여 서둘러 중대부가로 향했다. 그렇기 늦은 시간은 아니었지만, 달이 어 두워 서인지 길거리가 한적했다. 곧 이상한 기척을 느낀 영직이 발걸음을 재촉했다. "거기, 거기 파란옷을 입은 공자 어딜그리 급히가시오" 어둠속에서 괴한이 나타났다.

깜짝 놀란 직은 뒷걸음질 치다가 이내 다른사람에게 부딪혔다. "길도 어두운데 어디 고관대작집 공자님께서 이밤에 어딜가십니까?" 영직이 우물쭈물하자 앞에있던 괴한이 영직의 얼굴을 불빛쪽으로 돌렸다. 두눈을 꼭감은 영직의 얼굴을 본 괴한은 갸우뚱하며 물었다. "이 주변에서 본적이 없는 공자인데 뉘집 공자님이시오?" 영직이 덜덜 떨면서 입을 열려는 순간 뒤쪽에서 관복을 입은 자들이 다가왔다.

"이 밤에 뭐하시오?" 맨 앞에 있는 중후한 관병이 패거리에게 물었다 괴한은 영직의 얼굴을 놓고 어깨를 감싸며 관별에게 말했다. "공자님께서 밤의 즐거움을 모르신다기에 좀 알려드리려고 함께 기방에 가던차였습니다." 돌아서자 관병들중에 문덕이 보였다. 영직은 마음이 급해 괴한의 손을 뿌리치고 문덕이 있는곳으로 달려갔다. 관병은 패거리에게 "공자가 아직 어린데, 기방은 좀 이른듯하니 우리가 공자님댁에 모셔다 드리겠네 그대들은 갈길 가시게." 그렇게 말하고는 그들을 지나쳤다.

영직은 자신도 모르는새 문덕의 손을 잡고있었다. 미세한 떨림이 느껴지는 영직의 어깨를 감싸고 다정하게 괜찮냐고 물어오는 문덕을 보자 영직은 그동안과는 조금 다른 감정을 느꼈다.


5.

그 일이 있고난후, 중대부가는 문덕을 영직의 호위로 고용했다. 보병보다는 관직에서 멀었지만, 고관대작집의 호위로 일을하다보면 좋은기회가 있을지도 모를일이었기때문에 영직이 부탁했던 일이다. 영직이 스승을 찾아가 수학을 하는동안 문덕역시 귓동냥으로 이런저런 고서를 익혔다. 문덕은 조나라와 연나라의 글은 잘 알았지만 진나라의글은 잘 몰랐기때문에 영직은 저녁마다 문덕을 불러서 가르쳐 주었다.

"말로는 다 통하는데 어찌 이렇게 글이 다른지 신기해" 문덕의 말에 영직이 보고있던 죽간을 내려놓고 말했다. "어머니께서 선왕께서는 모든 중원을 통일해서 모두가 같은 글자를 쓰고 같은 단위를 쓰게 만들것이라고 하셨어." 영직은 돌아가신 혜문왕과 생사를 알수없는 미월이 보고싶어졌다. 그것을 눈치챘는지 문덕이 영직의 가까이로 다가와 어깨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미부인은 그 어떤 사람보다 총명한 사람이니 쉽게 스러지지 않으실거야 네가 걱정하는것을 누구보다 잘 아실테니 무탈하실게다." 영직은 몸을 돌려 문덕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문덕은 영직의 등을 쓸어주며 달래고 작은 흐느낌을 달래고 있었는데 영직의 방문이 벌컥 열리며 시종이 들어왔다.

시종은 꼭 붙어있는 두 공자를 보고 크게 숨을 들이쉬더니 곧 당황하며 뒷걸음질로 방을 나갔다. 갑자기 당황하여 나간 시종이 걱정된 영직은 문덕의 품을 벗어나 문앞에 주저앉아있는 시종을 일으켜 세웠다. "무엇에 그렇게 놀라 달아나느냐?" 시종은 두 공자님의 유흥을 깻다며 벌을 달라고 빌었다. 문덕은 헛기침을 하며 시종에게 말했다. "유흥이라니? 그런일 없소." 그리고는 시종의 손에 들려있는 서신을 가리켰다. "누구에게 온 서신이기에 기별도 없이 들어오려고 하셨소?" 그제야 정싱이 전쩍든 시종은 영직에게 다시 넙죽 인사하며 손에든 서신을 들이밀었다 "미부인께서 보내신 서신입니다."

영직은 크개 기뻐하며 서신을 받아들고는 호롱불이 밝은 곳으로 가서 서신을 펼쳤다. 문덕은 시종에게 축객령을 내리고 영직의 곁으로 왔다. 서신은 초나라의 문자로 쓰여져 있었기 때문에 문덕은 무슨 내용인지 알수 없었다. 하지만 영직의 표정이 슬픈것으로 보아 그다지 좋은소식은 아니겠구나 짐작하고는 점점 떨려오는 영직의 손을 꼭 잡아쥐었다.

영직은 이후로 미부인에 대한 이야기를 전혀 하지않았다. 그리고 이름도 영직이 아니라 후조로 바꾸고 공부하던 서원도 도성에서 좀 떨어진 곳으로 옮겼다. 도성밖에 있는 서원은 도성내에 있는 서원과는 분위기가 조금 달랐다. 경쟁이나 정치보다는 풍류나 음류를 즐기는 공자들이 많았다. 어느날은 같은 서원에서 공부하는 공자한명이 영직을 데리고 기방을 찾았다.

아직 어리고 고생을 많이한 영직은 그런 장소가 있는지도 무엇을 하는 장소인지도 잘 몰라 멀뚱히 앉아 주는대로 술을 받아마셨다. 영직이 취기가 올라 눈을 꿈뻑이자 옆에 앉아있던 기녀가 영직의 몸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깜짝놀란 영직은 손길을 피하려고 잔뜩 움츠렸지만 기녀는 아랑곳 하지않고 영직의 귓가에 속삭였다. "공자님 소녀가 싫으싶니까?" 한참 기녀와 실랑이하던 영직이 술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픽 쓰러졌다. 기녀는 영직의 바지춤에서 무엇인가를 찾는듯했다.

영직이 뭔지도 모르고 기녀가 따라마시는 술을 마실때부터 문덕은 기분이 별로 좋지않았다. 영직의 옆에 붙어서 슬쩍슬쩍 영직의 몸을 쓰다듬는것도 얼굴에 뺨을 가져다 대는것도 싫었다. 결국 쓰러지는것을 보고나서야 문덕은 영직에게 다가갔다. 기녀에게 돈주머니를 보여주며 "이것을 찾으시오?" 라고 묻자 기녀는 문덕에게 야살스럽게 눈웃음쳤다. 문덕은 주머니에서 동전몇개를 꺼내 기녀에게 주고는 영직에게 다가갔다.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에 뭔가 답답한듯해 보이는 표정으로 누워있는 영직을 멏번 흔들어 깨운 문덕은 영직을 앉히고는 말했다. "후조공자 정신차리십시오." 작게 신음소리를 내더니 곧 문덕쪽으로 몸이 기울어졌다. 주변을 둘러보니 같이 왔던 서원의 공자들은 모두 양옆에 기녀를 끼고 몇몇은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고 없었다. 눈치를 보던 문덕은 영직을 업었다.

영직은 곧 문덕의 목을 끌어안고 문덕의 등에 기댔다. 날이 어둑해진것으로 보아 도성의 문은 이미 닫혔으리라 짐작한 문덕은 아까 동전을 쥐어주었던 기녀에게 물었다. "혹시 공자께서 잠시 쉬실만한 공간이 있소?" 문덕을 위아래로 훑어보던 기녀는 뭔가를 알겠다는듯 코웃음을 치고는 자신을 따라오라고 했다.


6.

기녀가 안내한 공간은 침실이었다. 다른 가재도구 없이 덩그러니 화려하게 치장된 침상만 보이기에 문덕은 영직을 침상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놨다. 기녀는 문덕에게 각종향유와 아랫물의 위치를 알려주고는 묘한웃음으로 문을 닫으며 나갔다. 문덕은 영직이 방에서 쉴수있게 방을 나가려고 했으나 기녀가 문을 닫고 나가는 바람에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다시 나가서 기다리는 것도 의미가 없어보여 영직이 누운 침대쪽으로 다가갔다. 이방은 확실히 이상했다 책상도 없고, 앉을 의자도 없이 침상만 덩그러니 있는 방이라 문덕은 어쩔수없이 영직을 침대안쪽으로 밀어넣고 살짝 걸터 앉았다. 그 과정에서 영직은 잠깐 정신이 들었는지 웅얼대면서 문덕에게 칭얼댔다. 문덕은 향유근처에서 보았던 자리끼에서 물을 따라 영직에게 먹였다. “그러게 무엇인지도 모르는것을 그리 넙죽넙죽 받아먹는 바보가 어디있어” 영직은 물잔을 잡은 문덕의 손을 꼭 쥐고는 물을 받아 마셨다.

조금 정신이 드는지 눈가가 벌개져서 홍조가 잔뜩 오른 얼굴로 침상에 모로 누웠다. “함께 공부하는 공자가 권한것인데 빼면 이상할까 싶어서 어쩔수 없었어” 문덕은 영직이 다 마신 물그릇을 다시 제자리에 놓고 다시 침상에 걸터앉았다. “술은 마셔본적도 없으면서 이런곳에 잘도 따라오셨소 후조공자” 누워서 문덕을 흘겨보던 영직은 벌떡일어나 문덕의 허리를 안았다. 문덕의 어깨에 얼굴을 올린뒤 문덕의 귓가에 속삭였다. “자네와 왔는데 내가 걱정할게 무어야.. 알고있었으면 귀뜸이라도 좀 해주지 그랬어” 영직의 한숨이 문덕의 목덜미를 스쳤다.

야릇한 기분이된 문덕은 영직의 손을 풀어 다시 침상에 눕혔다. 취기가 가시지 않는지 영직은 문덕의 품에 한참을 매달리다가 곧 잠이 들었다. 문덕은 잠이든 영직의 달아오른 뺨을 손으로 쓸었다. 그리고 아까 기녀가 했던것처럼 자신의 뺨도 대보았다. 영직의 숨소리가 더 크게 들리고 따뜻한 입김이 볼에 닿자 문덕은 그 얼굴이 너무 사랑스러워 어쩔줄 몰랐다.

그 날이후로 문덕은 영직이 불편했다. 바라만 보고 있는것으로도 즐거웠는데 어느순간부터 만지도싶고 바라봐 줬으면 하는 마음이 치밀어 올랐다. 위염의 서신을 받고 남몰래 흐느끼는 영직을 보거나, 서원에서 다른 공자들과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환하게 웃는것 같은 평소라면 아무런 감정도 없었을 사소한 것들이 문덕의 감정을 마구 휘저었다. 어느 순간부터 문덕은 영직에게 존대를 하고 호위처럼 굴었다. 영직은 친구를 잃는것 같은 느낌에 예전보다 더 문덕에게 치대고 매달렸지만, 문덕은 달라지지 않았다.

"문덕, 서운하게 왜그래? 우리사이에 내외할일이 무엇이야?" 영직에게 허리를 붙잡힌 문덕은 허리에 감긴 손을 떼며 말했다. "공자님 사람들의 눈이 있습니다." 영직은 문덕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것이 무슨 상관이야, 내가 제일 힘들때 나의 벗이되어준 형제나 다름없는 친우인데!" 문덕은 곤란하다는 듯이 웃고는 영직에게 달래듯 말했다. "언제까지 현실을 무시할수 없지 않습니까, 형국을 보아하니 공자님께서도 곧 공자님께서 원래 있어야할 자리로 돌아갈지도 모릅니다." 그 말에 영직은 발끈하여 뭐라 말하려고 했으나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영직역시 혼란스러웠다. 언젠가는 형님처럼 언젠가는 친우처럼 자기 곁에 꼭 붙어있던 문덕이 어느날부터인가 달라졌다. 활동량의 차이인지 문덕의 무예실력은 계속 늘었고 그만큼 몸도 단단해졌다. 영직과 비슷하던 키도 이제 영직보다 커졌으며, 가끔 잡아보는 손도 거칠었다. 그것이 안타까워 어느날은 목욕할때 쓰는 향유를 얻어 문덕의 손에 발라주었는데 문덕은 아무말없이 그저 웃기만했다. 예전보다 자주보지 못해서인지 말수도 줄었다. 영직은 자신의 말에 하나하나 반응해주고 의견을 말해주던 문덕이 그리웠다. 마음이 괴로워 어쩔줄 몰라하는 영직에게 과거 기방에 데리고 가주었던 공자가 좋은것이라며 술선물을 했다.

"문덕, 선물로 술을 받았는데 함께 마셔보지 않겠나?" 문덕은 영직에 손에 들려있는 작은 호리병을 보았다. "저번에 고생하신것을 그새 잊으셨습니까? 일주일 내내 어지럽다며 서원도 나가지 않으셨잖아요." 영직은 문덕을 새침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 이 뜰에 너와 나 둘뿐인데 왜 자꾸 존대하는거야? 나와 둘이 있을때는 존대하지 말라고 했잖아!" 영직은 본인이 버럭 화를 내놓고 왜 그렇게 화가 났는지 잘 모르는 눈치였다. 문덕은 그런 영직을 잘 달래며 말했다. "직, 보는 눈은 어디에나 있는법이야 조심해서 나쁠것은 없잖은가?" 오랜만에 자신의 이름이 불린 영직은 일었던 화가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문덕의 손을 낚아채 잡고서는 자기방으로 향했다.

받은 술은 붉은색 종이로 밀봉되어 있었다. 영직은 그것을 뜯는다고 한참 씨름을하다가 성공했다. 탁자위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찻잔에 술을 두잔 따랐다. 영직은 냄새를 맞더니 크게 웃었다. "계화주인가봐 계화향이 아주 좋아, 문덕 자네도 어서 들어봐." 문덕은 의아해하며 영직의 앞에 앉아 잔을 들었다. "연나라에서 계화주는 합환주로 쓰이는 술입니다." 문덕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찻잔을 비운 영직이 그 뜻을 이해하고는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끝맛이 쓴지 인상을 쓰고 입술을 핥는 영직을 보며 문덕 역시 찻잔을 비웠다. "끝맛이 산뜻한것이 매우 좋은 술입니다." 문덕이 칭찬을하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두사람의 시선이 얽혀, 잠시 시간이 멈춘듯 두사람은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7.

서로 합환주를 나눠마신 이후로 영직은 더이상 문덕에게 매달리거나 하지 않았다. 반가워 마주안거나 손을 잡는일도 없었다. 가끔 마차에서 내리거나 말을탈때 잠시 닿는 손길에도 불에 데인것처럼 화들짝 놀라기 일수였다. 문덕은 그런 모습이 귀여우면서도 아쉬웠다. 문덕과 영직은 서로애게 가지고 있는 감정이 친우간의 정보다는 더 깊은것임을 알았다.

새해가 얼마남지 않은 겨울날, 진나라의 저리질이 영직을 찾아왔다. 그는 영직에게 이제 원래 있어야할 자리인 진나라로 돌아가야한다고 말했다. 영직은 저리질에게 미월의 안위를 물었다. 저리질은 미월은 의거왕인 적려에게 의탁해 곧 진궁으로 들어가 혜문왕의 밀서를 대신들에게 전할것이고, 선왕의 뜻으로 영직이 다음 왕위를 이을것이라고 말했다. 영직은 그말을 듣고, 시선으로 문덕을 쫓았다. 혼란스러운 영직의 표정과는 달리, 문덕의 표정에서는 아무것도 읽을수 없었다.저리

질은 영직에게 사흘내로 진나라에 도착해야하니 채비를 서두르라고 말한뒤 물러갔다. 저리질이 나가고도 한참동안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문덕은 곧 영직의 여행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날씨가 추우니, 예전에 봐 두었던 모피를 두르고 가시는게 좋을것 같습니다." 영직은 한동안 문덕이 채비하는것을 아무말 없이 보다가, 벌떡일어나 문덕에게 다가왔다. "나는 문덕 너도 나와 진나라로 가주었으면해" 문덕은 영직의 말을 듣지 못한것처럼 바쁘게 손을 움직였다. "배문덕" 영직의 목소리에 문덕의 손이 멈췄다. "제 가족이 여기있고 출신도 미천한제가 공자님을 따를순 없습니다." 영직은 답답하다는 듯이 문덕의 멈춘손을 잡고 말했다. "너를 데려가겠다. 이건 명령이야." 문덕은 잡힌손을 바라보며 슬프게 웃었다. "공자님 저는 중대부가 사람입니다. 공자님을 따를수 없습니다."

영직은 갑자기 문덕을 와락 안았다. 이제 자기몸보다 커져서 한품이 들어오지 않는 문덕의 어깨에 기대며 영직이 흐느꼈다. "싫어. 문덕과 함께 갈래, 문덕 없이는 진나라에 가지 않을래" 영직의 투정을 받아내던 문덕이 영직을 마주 안았다. "지금의 나는 너에게 도움이되지 않아. 오히려 방해가 될수도 있어. 언젠가 시간이 허락하고 기회가 닿으면 널 만나러 꼭 진나라로 갈께." 문덕이 어깨에 기댄 영직의 빰을 양손이 담으며 눈을 맞춰왔다. 영직의 눈에서 기어이 눈물이 떨어졌고, 문덕은 눈물을 따라 입을 맞췄다. 눈물이 흘러 입술끝에 앉았을때 영직은 문덕을 힘껏 끌어당겨 입맞췄다.

두사람의 이별은 그렇게 지나갔다.

영직이 진나라로 떠난뒤, 중대부가는 문덕을 데리고 다니면서 이것저것 가르쳤다. 무예도 출중하고, 영직과 함께 공부할정도로 총명하여 곁에 두었지만, 중대부가는 사람을 잘 부릴줄 몰랐다. 어느날은 사신단으로 초대되어 위나라에 가는길에 지리를 잘 알고있던 문덕의 조언을 무시하고 자기 고집을 부리다가 크기 다치기도 하였다. 그런 상황들이 계속되자 중대부가는 문덕에게 화풀이를 하기 시작했다. 위나라에 도착해서도 사신단의 본분을 망각하고 행동하던 중대부가의 뒷수습을 묵묵하게 한것도 문덕이었다. 이런저런 정치적 치세에 관련된 토론회에서도 문덕의 식견이 넓고 총명하여 다른나라 사신들의 눈총까지 받았다.

사신단에는 초나라에서 황헐도 있었는데 곧 문덕을 알아보았다. "이렇게 장성해서 사신단이 되다니 대견하구나? 어째서 미부인을 따라 진나라로 가지 않았느냐?" 황헐의 질문에 문덕은 대답했다. "진나라 무왕이죽고 1년이나 진나라는 여러제후들의 싸움으로 피폐해져 있습니다. 지금 세력이나 명성이 없는 제가 간들, 진왕에게는 큰 도움이 될것같지않아, 차라리 조나라에 의탁하여 진왕이 저를 필요로할때 도움을 드리고자 조나라에 남게되었습니다." 문덕의 말을 들은 황헐은 그 마음이 갸륵하여 문덕을 크게 칭찬했다. "아직 이립의 나이도 안된 너에게 이렇게 깊은 식견이 있는데 어째서 너의 주인은 너를 그렇게 괴롭히느냐." 문덕은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을 회피했다. 황헐은 그 모습이 안타까워 문덕이게 초나라로 올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문덕은 그 제안을 정중이 거절했다.

그렇게 사신단의 일을 마치고 조나라로 돌아오는길에 문덕이 황헐에게 패물과 지위를 약속받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 소식을 접한 중대부가는 화를 참지못하고 그를 조나라에 역모죄로 고발하였다. 문덕의 가족은 반역자라는 오명을 쓰고 형벌을 받았다. 몸이 좋지 않던 어머니는 옥살이를 견디지 못하고 돌아가셨고, 문덕과 문덕의 아버지는 노역으로 진나라 국경에 성을 쌓는 일을 하게 되었다. 문초로 몸이 성치못한 문덕의 아버지는 결국 그해를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문덕은 노역을 하는 동안 초나라의 장군 미융을 만났는데, 문덕의 처지를 알기된 미융은 그가 진나라로 도망칠수 있게 도와주었다. 나중에 그 역시 진나라로 망명하는데, 그는 미월의 동복 남동생이었다. 문덕이 진나라에 도착한것은 영직이 소양왕으로 등극한지 3년만이었다. 문덕은 밟고 서있는 이 땅이 영직이 다스리는 땅이라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벅차올랐다. 다시 만날수는 있을까 아득한 마음에 영직이 그리워졌다. 이제 더이상 그를 영직이라 부를수 없는 것 또한 그를 사무치게 만들었다.


8.

영직은 마차를 달리는 동안 머릿속에 문덕의 생각밖에 없었다. 영직은 왕이 되고싶은 마음이 없었다. 미월이 원하고, 자신이 미월을 위해 할수있는 일이 그것뿐이었다. 미월의 계책으로 위염과 백기가 영직을 데리고 선실전으로 들어섰다. 혜후와 위부인, 무왕비가 밖으로 끌려나가고 있었다. 영직은 오랜만이 본 미월에게 다가갔다. 미월은 영직의 선을 붙잡고 말했다. "오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오늘부터 그대가 진왕입니다." 영직은 어떤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미월옆에 멀뚱히 서있기만했다. 미월은 영직이 아직 어려 본인이 선실전에서 업무보는것을 돕겠다 말했다.

영직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함양으로 들어오는 길에 보았던 황폐한 도시와, 처량하게 끌려나가는 모후와 무왕비가 머리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미월이 머무르는 초방전에 도착해서야 영직은 미월의 품에 안겼다. "모후께서 그동안 강녕하셨습니까?" "미월은 영직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조나라에서 고생이 많았습니다. 조왕덕분에 지금 함양에 들어와있는 다른왕자들의 분란을 막을수 있었습니다." 영직은 미월의 말에 한발짝 물러서며 말했다. "다른 왕자들이요?" 영직의 말에 미월은 크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위부인과 혜후가 공자화를 왕으로 세우기위해 모반을 꾀했지요. 조나라에서 위염과 백기가 도움을 청하지 않았더라면, 혜후와 무왕비의 처지가 지금과 달랐겠지요." 영직은 미월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어머니 그들을 살려주세요. 제가 이미 왕이 되었고, 그들 역시 제 형제들 아닙니까" 미월은 영직의 뺨에 손을대고 슬픈눈으로 쳐다보았다. 점점 영직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그들이 언제 직이 너의 등에 칼을 꽂을지도 모른다. 선왕이 진나라를 만들때 만들어놓은 법대로 할것이다." 얼마 지나지않아, 혜후와 위부인의 아들 영화는 효수되었고, 무왕비는 위나라로 돌아갔다.

미월은 빠르기 정세를 정리해나갔다. 진나라를 호시탐탐 노리는 위,조, 제나라에게 영토를 떼어주고, 친정인 초나라와 사돈을 맺기로 했다. 미월은 승상 저리질을 옆에 두고 진왕인 영직이 해야할 일들을 척척해냈다. 저리질과 함께 국고를 관리하던 감무는 위나라로 망명했고, 살아남은 왕자들은 군왕의 직위를 내려 각 나라에 볼모로 보냈다. 선실전에 나가도 영직이 할일은 없었다. 각 지역, 각 관리부분에서 여러가지의 보고가 매일매일 올라왔다. 미월은 그 많은 보고와 정보들 중에 꼭 필요한것과 필요하지 않은것을 걸러 영직에게 전했다. 영직은 그 내용만으로도 벅찰 정도였으니 미월이 하루종일 앉아서 처리하는 일은 종류도 양도 많았다.

미월은 영직을 왕을 앉힐때 도와준 의거왕 적려를 부마로 삼아 옆에 데리고 다녔는데, 얼마지나지 않아 미월의 배가 불러오기 시작했다. 미월의 행동거지를 두고 여기저기서 말이 많아지자 영직도 어쩔수 없이 한마디 거들어야했다.초방전에 들어서자 적려와 미월이 서로 마주보고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영직이 들어오자, 미월은 일어나 영직을 맞이했다. "직아, 어찌 초방전까지 발걸음 하였느냐" 영직은 멀뚱히 앉아있는 적려를 보았다. 미월은 적려에게 눈치를 주었으나 개의치 않는듯 했다.

"의거족 적려는 진왕에게 예를 갖추시오." 영직의 떨리는 목소리가 주변을 고요하게 만들었다. 적려는 마지못해 일어나 의거식으로 영직에게 읍했다. 영직은 그것이 못마땅하였으나 어찌 할수있는것도 아니었기에 미월이 이끄는대로 자리에 앉았다. 영직은 대신들이, 시종들이 지나가며 하는 이야기때문에 속상하다며 한참을 푸념했다. 미월은 웃으며 영직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직아, 걱정 말거라, 모두들 모후에 대해 한마디씩 거들것이야, 하지만 그것은 나를 향한 말이지 너를 향하는 말이 아니다. 나쁘고,간사하고, 더러운것은 모두 내가 행한것이다. 너를 향하지 않게 할것이다."

영직은 딱히 의거왕을 싫어할 이유도 없었다. 그는 정치적으로 매우 유용했고, 군대도 가지고 있었다. 외삼촌인 위염과 백기의 군대까지 합하면, 진나라에서 그 보다 더 큰 병권을 쥔자가 없었다. 영직은 단지 모후의 사정을 여기저기서 떠들어지는것이 싫었을 뿐이다. 미월은 단호하게 말했다. "손가락질하는 자가 있으면 그 손가락을 잘라내고, 그래도 말을 멈추지않으면 혀를 뽑고, 그래도 붓을 놓지 않으면 죽이면 됩니다." 영직은 연나라에서 함께 고생했을때의 미월이 그리웠다. 그때는 먹을것과 따뜻한 잠자리만 걱정하면 되었는데, 이제 그런것은 걱정할 필요 없는대신 매일매일이 풍전등화였다. 영직은 자신이 미월의 심기를 어지럽혀 종국에 신의를 저버리면 어떻게 될지 상상하자 두려워졌다.

영직은 따뜻하고 자애로운 어머니를 잃었다. 대신 존경하는 정치적 지주를 얻었다. 매일 아침 영직은 초방전으로 들어 아침조례를 했다. 태상이된 위염은 장군들에게 각 지방의 상황과 국경근처에 있는 나라들의 동태를 살펴 보고했고, 태복과 대사농이 그동안 전쟁때문에 피폐해진 백성들의 상황을 고했다. 미월은 지난 몇개월간 왕위찬탈로 도성내에서 고생한 백성들을 위해 농민에게 세금을 감해주었고, 겨우내 노역도 면제해주었다. 반란을 일으킨 공자 화를 따르던 관리와 귀족은 멸하고, 그들의 곡간을 열어 민심을 샀다.

미월은 가끔 영직을 초방전으로 불러 의거왕과 시간을 보내게 했다. 의거왕은 종종 그에게 검술과 마술을 가르쳐 주었다. 그는 영직에게 전장에 나가 적들과 직접싸워봐야 글로 읽은 병법이 몸으로 이해가 된다했다. 어느날은 자기 부족사람들을 데려와 의거국에서 하는 마장술놀이를 함께하기도하고 미월의 허락이 있으면 함양성밖에 나가 사냥을 하기도 했다.

초나라와 사돈을 맺기로한 미월은 영직에게 초나라 공주들의 초상화를 보여주었다. 영직은 그러려니 했지만 내심 문덕이 떠오르는것을 막지 못했다. 초나라 공주가 궁궐로 들어오던날, 미월의 동생 미융도 진나라로 왔다. 그는 무술이 뛰어난 장군이었는데, 초나라왕의 미움을 사서 국경근처를 전전하는 신세였다. 미월은 그의 경험을 이용하여 초나라를 견제하려했다. 그날 저녁에 미월은 미융을 환영하는 연회를 초방전에서 열었다.

영직은 선실전에서 입는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예복을 벗고 편안한 옷차림으로 환복한 후 미월의 거처 초방전으로 발을 옮겼다. "어머니를 뵈러 초방전에 갈것이니 따를 필요 없다." 날이 따뜻했다. 날이 저물어 길이 어두웠지만 벌써 궁궐이 많이 익숙해진 영직이었다. 한참 길을 가다가 초방전 앞에 정원이 보였다. 예전에 초방전에 머무르던 귀비를 위해 만든 정원이라고 했다. 계수나무가 여러그루 심어져있었다. 새로난 연한 잎새사이로 노란 꽃망울이 보였다. '저 꽃이 다 피면 이곳에서 계화향이 나겠구나' 나지막히 생각한 영직은 잠깐 나무아래 돌위에 앉아 아직 피지도 않은 꽃구경을했다.

사람의 인기척이 느껴지자 혼자 나온것을 후회한 영직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초나라의 공주와 그의 시종들이 초방전을 향해 가고있었다. 공주의 시종중에 한명이 유독 눈에 익었다. 호위로 데려온것 같은 사내였는데 한참을 보고 있다가 바람결에 스치듯나는 계화향에 정신이 번뜩였다. "문덕!" 자신도 모르는새에 그 호위에게 달려가고 있었다. 초방전 문턱을 넘기 바로직전에 호위의 견갑을 붙잡은 영직이 문덕을 불렀다. 키도 좀 더 커지고, 체격도 좋아졌다. 얼굴이 조금 달라졌지만 문덕이었다. 그 동안 세상이 바빠 잊고 있었다고 생각했던 영직은 자신이 크게 틀렸었다는걸 깨달았다.


9.

문덕은 곤란한듯 영직에게 읍했다. 앞에 서있던 초나라 공주는 영직을 한번 보더니 인사를 하고 다른 시종들을 데리고 초방전으로 들어갔다. "문덕! 다시 보게 될거라고는 생각도 안했네, 초나라에는 언제 건너간것이야? 부모님께서도 초나라에 계시나?" 문덕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는 별말 없이 끈기있게 눈을 맞추려드는 영직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왜 아무 말이 없어? 나는 못한 말이 너무 많아서 뭘 먼저 이야기 해야할지 모르겠어." 영직은 수줍은듯 말했다. "내가 보낸 서신은 받았나? 몇번이나 보냈는데 연락이 없어서 걱정했네." 한참 문덕의 손을 잡고 떠들던 영직은 문덕의 행동에 점점 걱정이 되었다.

미월의 태감이 영직을 부르는 소리에 영직은 문덕의 손을 놔주었다. 놓아진 손이 아쉬워서 문덕을 한번 쳐다보았다가 초방전으로 들었다. 영직이 떠나고 한동안 같은자리에 있던 문덕이 양손을 어루만졌다. 몇번이고 상상했던 기대하고 기다리던 만남이었는데, 막상 실제로 만나니 어떻게 해야할지 알수 없었다. 시선을 맞추기위해 안절부절하는 모습에 만약 태감이 부르지 안았다면 와락 안아버렷을지도 모를일이었다. 그날의 입맞춤이 떠올라 얼굴을 볼 수없었다. 영직은 아무렇지도 않은듯 말을 걸어왔지만, 그 입술에 온 정신이 팔려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초방전으로 들어가는 영직의 뒷모습을 눈으로 쫒던 문덕은 영직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맥이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영직은 그날 연회내내 계속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모습을 발견한 미월은 영직에게 다가가 물었다. "누구를 찾길래 그리 수선을 떠십니까?" 미월의 물음에 영직이 화들짝 놀라 답했다. "아닙니다. 혹시 아는이가 있을까 하여 둘러보았습니다." 미월은 이상하다는 듯이 영직을 물끄럼히 바라보다가 초나라공주쪽으로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 "결혼하실 공주에게 초방전 정원이라도 구경시켜 주시는건 어떠세요?" 영직은 초나라 공주를 한번 흘끔 쳐다보고 다시 미월을 보고는 그리하겠다 했다. 영직은 초나라공주를 데리고 계수나무 꽃구경을 하던 그 정원으로 갔다. 초나라공주는 아무말 없이 영직을 따랐다.

두사람은 아무말 없이 정원을 걸었다. 영직이 앞서면 초나라공주 미요가 뒤따랐다. 초나라 공주가 연못 근처에 잠깐 멈춰서 달빛에 잘 보이지 않는 색색의 비단잉어를 찾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을때 영직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누군가를 찾는듯 했다. "누구를 찾으시는지요?" 미요의 목소리에 놀한 영직은 어깨를 움찔했다. "아니요, 진궁안에 제가 모르는 것른 없습니다." 미요는 다시 시선을 내려 연못 안을 보았다. 밤이 깊어 잉어들도 잠을 자는지 영 움직임이 없었다. 그저 달빛에 비친 미요공주와, 아련한듯 먼곳을 바라보는 영직의 잔상만 연못에 떠있었다. 두사람을 찾으러온 초나라 호위를 보고 반기는 기색을 하던 영직은 곧 자신이 찾는 사람이 아닌것을 알고는 눈에 띄게 실망했다. 미요는 여로를 핑계삼아 처소로 발걸음을 옮겼고, 영직도 천천히 걸어 침전에 들었다.

미융은 함양성내에 큰 궁궐을 지었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양후인 위염의 거처와 비교하며 누구집의 곡간이 더 큰지 내기를 했다. 문덕은 미융의 도움을 받아 금위군에 배치되었다. 선실전과 내전 사이에 배치되어서 가끔 바쁘게 움직이는 영직을 볼수 있었지만, 영직은 눈치채지 못한 눈치였다. 가끔 선실전 근처 보초를 서게되면 멀리서 미부인과 영직을 볼 수 있었다. 미월이 대신들과 국사를 논하면 영직은 옆애서 상소문을 꼼꼼히 읽으며 경청했다. 문덕은 멀리서나마 지켜볼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영직은 초나라공주를 만난이후로 그녀가 머무는 거처에 시도 때도없이 찾아갔다. 사람들은 영직이 왕비로 맞을 공주를 아낀다 하였지만, 막상 초나라공주의 거처에 도착해서는 초나라 공주보다 주변 호위에게 더 관심을 가졌다. 마치 누군가를 찾는것처럼. 안타깝게도 초나라의 호위들의 복식이 진나라에서 지급되는 복식으로 바뀌어 영직이 찾는 것을 더욱 어렵게 했다. 궁궐은 영직의 혼인으로 떠들석했지만 영직의 마음 한구석은 계속 서늘했다.

진왕 영직과 초나라 공주 미요가 결혼하던날 고르고 고른 날이었는데도 날이 흐렸다. 하루종일 무거운 면류관과 겹겹의 혼인의복을 입고 혼례를 치렀다. 영직은 어떻게 하루가 지났는지 날이 어둑해져서야 정신이 좀 들었다. 중궁전에 들어서 나란히 침상에 앉은 두사람은 당장 무거운 옷을 벗고 잠을 잘 생각 뿐이었다. 시중을 들던 내관과 궁녀가 침방을 나가자마자 영직은 슬쩍 눈치를 보며 면류관을 벗었다. 그리고 미요의 가채를 벗겨주는것을 도왔다. 두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는것만으로도 부끄러웠다. "오늘 하루종일 이 무거운 가채를 머리에 이고 고생이 많았습니다." 미요는 아니라며 영직의 겉옷 벗겼다. "혼인할때 이렇게 많은 옷을 입어야하는지 몰랐습니다. 즉위식때 입은것보다 훨씬 무거웠어요." 투정하듯 말하자 미요가 살풋이 웃었다. 영직도 미요가 무거운 옷을 벗을수 있게 도왔다. 영직은 시종의 의복시중이 벌써 익숙해졌는지 겹겹의 옷을 벗고나니 하루의 피곤이 몰려오는듯했다. 갈증이 인 영직은 탁자위에 합환주를 보았다. 향을 맡아보았으나 계화주는 아닌것 같았다. 영직은 술을 마시는것을 즐기지 않았지만, 이 술은 빨리 잠들수 있게 도와줄것같아 연거푸 몇잔을 마셨다. 머리를 정리하고 침의로 갈아입은 미요가 탁자로 다가와 술을 따르려고 하자 영직은 미요에게 잔을 권했다. 두 사람은 준비된 술을 모두 마시고 침상에 들었다. 두 사람은 눕자마자 잠이 들었다.

그 날은 영직이 적려와 시간을 보내는 날이었다. 적려는 마장술을 연마한다고 의거족을 함양성 근처로 불렀다. 오랜만에 성밖에 나가는 영직은 들뜬 마음으로 가벼운 옷차림을 하고 내전을 나섰다. 금위군 통령과 호위 몇명이 영직의 뒤를 따랐다. "함양성 밖까지는 마차를 타고 이동하시고, 도성을 빠져나간 이후에 말로 갈아타시지요. 가는 길에 사함이 많아 위험할수도 있습니다." 통령의 말이 영직은 가마에 몸을 옮겼다. 영직은 말을 타거나 다루는것에 익숙하지 않아 적려와 보내는 시간이 즐거웠다. 얼마 지나지않아 영직은 마차에 내려 튼실한 갈색말로 갈아탔다. 날씨도 좋고, 날도 춥지않아 말타기에 적당한 날이었다. 적려는 영직과 호위를 이끌고 의거군의 주둔지로 갔다. 잠깐 말에서 내린 영직은 물주머니를 찾았지만, 행낭을 아무리 뒤져봐도 나오지 않았다. 아쉬워하려는 차에 누군가가 영직에게 물주머니를 내밀었다. 고개를 든 영직의 눈에 문덕이 보였다.

진왕이 궁밖에 나가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아직 전장에 나갈만큼 무예나 말을 타는 기술이 부족했기도 했고, 아직 즉위한지 얼마되지않아 언제나 암습의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영직은 눈에 띄게 들떠 있어보였다. 통령이 마차를 권했을때 실망한 표정이 문덕의 마음을 흔들었다. 당장 손에 쥐고 놓고싶지 않을만큼 애틋한 영직이었다. 의거군 주둔지까지 달리는 동안 영직의 표정이 밝았다. 주둔지에 도착하자마자 마른 입술을 적시며 행낭을 뒤지는것을 발견하고 문덕은 물주머니를 들고 영직에게 갔다. 왜 그렇게 했는지 문덕은 알 수 없었다. 몇보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보고 있으니 더 가까이 가고싶고, 가까이가니 만지고 느끼고 싶어지는 문덕이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영직은 밝게 웃으며 문덕의 견갑을 쥐었다.

문덕의 모습을 본 영직의 얼굴이 활짝폈다. 문덕은 다른 군졸들이 그러하듯 무릎을 꿇고 읍했다. 영직은 마른목을 축이고 물주머니를 돌려주며 말했다. "금위군에 있어서 찾지 못했구나! 나는 당연히 왕비나 초나라 태자의 호위일거라고 생각했는데..." 영직은 문덕의 견갑을 꼭쥐며 말했다. 문덕은 아무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영직은 문덕을 일으켜 세우고는 잡은 팔을 끌고 눈에 보이는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막사는 창고로 쓰이는 곳인지 무기와 보물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영직은 문덕의 두 손목을 잡고 얼굴을 마주 보았다. "문덕 왜 나를 피해?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된것이 기쁜것은 나뿐인가?" 고개를 숙이고 있던 문덕이 영직의 눈을 보았다.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모를 끌림에 두사람은 허겁지겁 입을 맞췄다. 영직의 손과 문덕의 손이 맞잡았다.


10.

깊은 입맞춤에 다리가 풀린 두사람은 풀석 주저 앉았다. 영직의 얼굴을 손에 담은 문덕이 다시 입을 맞춰왔다. 영직은 문덕의 목에 팔을 둘러 당겼다. 한참 영직의 입술을 탐하던 문덕이 사람의 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누군가가 막사안으로 들어오려는듯 했다. 문덕은 영직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누르며 피풍의를 벗고 일어났다. 곧 견갑과 다른 옷들도 벗어 영직의 위에 덮어두었다. 병사가 들어와 문덕을 발견하고 말했다. "배교위 여기서 뭐하시오?" 문덕은 작은 천으로 몸을 훔치며 말했다. "땀이 너무 많이나서 내의가 다 젖은것 같아. 그대로 입고 있으면 추울것 같아서 좀 닦아내려고." 병사는 허허 웃으며 말했다. "같은 남자끼리 무슨 내외를 하십니까" 문덕은 웃으며 몇마디 더 맞장구 쳐주고는 다시 옷을 입기 시작했다 그 즈음에 다른 병사는 이미 막사를 떠나고 없었다. 피풍의를 들추자 볼이 빨갛게 달아오른 영직이 보였다. 영직에게 손을 내민 문덕은 그의 송을 잡아당겨 일으켰다. 영직은 일어나자마자 문덕을 품에 안으며 말했다. "문덕 이제 나를 떠나지 마." 문덕은 영직을 고쳐 안았다. 지금 문덕이 영직에게 할수 있는 말은 많지 않았다. 매달리는 영직을 떼어낸뒤 문덕은 영직의 뺨을 쓰다듬으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영직" 다시 살짝 입을 맞춘뒤 문덕은 막사 밖으로 빠져나왔다.

의거군의 주둔지에 다녀온 이후로 영직은 금위군 통령을 괴롭혀 문덕을 내금위로 데려왔다. 후에 미월은 영직을 부탁한다며 중랑장으로 직위를 올려주었다. 영직이 선실전에서 상소문을 읽고 내정과 외정을 논하는동안 문덕은 전보다 더 모질게 자신을 몰아붙이며 무예를 연마했다. 영직은 선실전에서 다 읽지 못한 상소문을 내전에 가져와서 읽었는데, 문덕도 그를 도왔다. "어머니께서 이 상소문을 다 읽은후 나라에 이득이 되는 순으로 10가지를 골라 해결책을 찾아오라 하셨는데, 매일매일 수백책의 상소문이 올라오는데 그걸 어찌 하루만에 다 하라는지 모르겠어." 영직의 투정에 문덕은 영직의 앞에 쌓여있는 죽간더미를 보았다. 그리고는 영직앞에 앉아 죽간를 읽기 시작했다. "의거군 관련 상소가 많네 미부인의 세를 견제하기 위함일겁니다. 백기장군과 양후께서도 따로 군대를 가지고 계시니 의거군은 미부인에게 중요한 병력이지요." 영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진나라 재상들은 하나같이 의거족을 싫어해. 뒤에서 어머니에 대해 안좋게 얘기하며 나까지 괴롭힌다구." 영직의 투정에 문덕이 살풋이 웃었다. 문덕의 웃는 모습이 좋은 영직은 죽간을 들고 있는 문덕의 손을 잡았다. "문덕, 웃는모습이 참 좋다." 활짝 핀 영직의 얼굴을 본 문덕은 몸을 기울여 영직의 입술을 살짝 핥았다.

한참 상소를 함께 읽던 문덕은 꾸벅꾸벅 졸고 있는 영직을 발견했다. 문덕의 눈에 아른거리는 촛불에 비친 영직의 모습이 아득하게 아름다웠다. 읽던 죽간을 내려놓고 잠든 영직을 안아올렸다. 이렇게 가벼웠던가 생각하며 침상에 영직을 뉘였다.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편안한 얼굴로 잠을자고 있는 영직을 보니 괜히 심통이 났다. 불편해보이는 의복을 벗기려는데 영직이 문덕을 와락 앉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문덕을 침대로 끌어들여 품안에 파고 들었다. "문덕, 나는 자네가 어떤짓을해도 자네가 좋아." 빨갛게 달아오른 뺨이 너울거리는 촛불빛에 어두워졌다. 문덕은 영직을 품에 끌어 당기며 말했다. "영직, 사랑해." 문덕의 말에 꼭 감고있던 영직의 눈이 떠졌다. 영직은 문덕의 몸위에 올라타며 말했다. "나도 그러하네."

+헉헉 떡씬고자는 여기서 리타이어.. 얘네 떡침 나 내전침상인데 내가봄. 한두번이 아니야 아주 신나서 매일 붙어먹음

두사람의 관계는 곧 궁궐내 시종들의 안주와 간식이되어 미월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초나라 공주인 미요와 혼인한지도 몇해가 지났지만, 아직도 자식이 없는것을 의뭉스러워한 미월은 미요를 따로 불러 물었다. 미요는 진왕과 합방한 일이 없으며, 길일에 합방을 하러와도 잠만자고 간다고 솔직하게 털어 놓았다. 미월은 문덕을 따로 불러 물었다. "대진왕과 요즘 어떤 소문이 돌고 있는지 아느냐?" 미월의 물음에 문덕은 더 깊게 고개를 숙였다. "부정하지 않는것을 보니 없는 소문이 생긴것은 아닌가보구나." 미월은 문덕을 무르고 내전에서 상소문을 읽고있을 영직에게 갔다. "모후, 어찌 여기까지 발걸음 하셨습니까? 찾으시면 제가 가면 되는데.." 미월은 눈짓으로 주변에 내관과 시종을 모두 물린후 영직에게 다가가 말했다. "요즘 궐내에 아주 재미있는 소문이 돌고 있는것을 아느냐?" 영직의 안색이 변했다. 미월은 이리 쉽게 마음을 들키는 영직이 걱정이었다. "어서 진왕께서 적통 후사를 보셔야 나라가 더 안정될터인데 흉흉한 소문만 돌아 모후는 걱정입니다." 미월의 말에 영직은 사색이 되어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몇일 후 문덕이 사라졌다. 중랑장이 사라졌는데도, 마치 아무일도 없었던것처럼 하루가 흘러갔다. 영직은 미월이 머무는 초방전 앞에 무릎을 꿇고 무엇인가를 빌었지만, 무엇을 비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몇일 후 영직은 중궁전에 들어 첫 합방을 했다. 하지만 문덕은 돌아오지 않았다. 곡기를 끊고 몇일을 초방전앞에 꿇어 있다 사흘째 되던날 결국 영직이 쓰러지고 말았다. 미월은 문덕을 불러 단단히 당부했다. 중궁전 침상에 누워있는 영직의 뺨을 쓸어보려다 뒤에 서있는 미요 왕비를 보고 손을 물렸다. 문덕은 작은 목소리로 영직을 불렀다. 그 소리에 영직의 눈커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눈을 떴다. 나지막히 문덕의 이름을 부른 영직은 흐느꺼 울기 시작했다. 문덕은 영직에게 울지마시라 했지만 그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며칠 문덕의 간호를 받은 영직은 많이 나아졌다. 영직이 기력을 회복하자 문덕은 영직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폐하, 소신은 더이상 궁궐에 머무를수 없습니다. 저는 미융장군의 군사로 임명받아 초나라 국경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문덕의 말에 영직은 벌떡 일어나 문덕의 손을 잡았다. 문덕은 마주 잡은 손을 더욱 세게 쥐며 말했다. "선태후마마께서 허락하시면, 제가 폐하를 뵈러 오겠습니다. 상소문을 읽는것을 게을리 하지 마옵소서." 말을 마친 문덕은 영직의 손을 놓고 중궁전을 나왔다. 영직이 침의를 입은채 문덕을 잡으려하자 옆에 있던 미요가 그를 막았다. 문덕의 이름을 부르는 영직의 울부짓음을 들으며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미융장군을 따라 궁궐을 떠났다.


11.

문덕이 떠난 이후 영직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마자 선태훌 뵈러 초방전에 갔다. 하지만 미월은 그를 만나주지 않았다. 언제나와 똑같이 선실전에 들어 미월이 하는 양을 듣고있거나, 내전에서 상소문을 읽었다. 의거족에 대한 불만이 많았다. 문덕이 떠나고 몇달이 지난후, 영직은 상소문에서 친숙한 이름을 발견했다. 국경 근처에 현령을 보좌하는 교위로 이름이 후조였다. 영직이 조나라 시절 쓰던 바로 그 이름이었다. 양후나 백기는 종종 찾아와 영직을 보았으니 알고 있었지만, 미월은 몰랐다. 영직은 떨리는 손으로 그 죽간을 꼼꼼히 읽기 시작했다.

의거군이 도성내에서 저지르는 일을 규탄하는 내용이었다. 선태후의 권력을 등에 업고 가게에 들어가 음식을 먹고 돈을 내지않는 일부터, 아녀자를 납치하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람들을 죽인다는 내용이었다. 선실전의 재상과 대신들이 하는 그 이야기들이었다. 평소라면 몇줄 읽지 않고 내려놓았을 죽간을 붙들고 있자, 영직은 갑자기 두려워졌다. 죽간을 다시 상소문이 있는곳에 올려두고 다른 죽간을 들어 읽었다. 선실전 조례가 끝나고 그는 언제나왜 같이 상소문을 들고 내전으로 향했다. 내전안에 들어서야 영직은 "후조"라고 쓰인 그 죽간을 품에 안았다. 몇번을 읽었을까 영직은 그날 하루종일 그 죽간을 읽고 또 읽었다.

후조라는 자는 국경 근처상황과 주변국들과의 관계를 상세히 적어 올리거나, 양후와 의거왕 적려의 병권을 분산시켜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문을 선실전으로 올렸다. 후조의 죽간이 어느새 쌓여 7책이 넘어설 즈음 영직은 진나라 글자와 비슷한 모양이지만 뜻이 다른 글자들이 몇개 섞여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게다가 그 글자들은 여러 글자들이 파자되어 있는듯 했다. 첫번째 죽간에서 찾은 파자된 글자는 受(받을수)와 心(마음심)이었다. 이 두자를 합치면 愛(사랑애)자가 된다. 영직은 그 죽간을 가슴에 묻고 숨죽여 흐느꼈다. 이 궁궐안에 미월이 보지못하고 듣지못하는 일은 없었다. 영직은 선태후의 눈과 귀를 피해 내전에서 문덕이 여러번 고민하여 쓴 서신을 읽는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날이 추워졌다. 그리고 미요가 회임을 했다. 미요와 영직의 사이는 나쁘지않았지만, 또 좋지도 않았다. 왕비나 영직이나 궁궐내에 큰 세력이 없었기때문에 미월의 말이라면 듣는수밖이 없었다.미요는 미월이 문덕을 국경으로 내쫒지 않았다면 영직과의 관계를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미요에 대한 영직의 태도는 다정했지만 마음이 없었다. 미월 역시 적려의 둘째아이를 임신중이었다. 영직은 예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했다. 초나라와의 혼약으로 주변국가들이 초나라 정벌을 시작했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진왕도 초나라를 돕기위해 직접 출정했다.

국경에 도착하자마자 영직은 현령인 왕계를 찾았다. 왕계의 교위가 후조라은 이름을 쓰는 자였다. 왕계는 천성이 게으르고 음주가무를 즐겨 사실상 현령의 일은 문덕 혼자 도맡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양후의 사람이었다. 영직은 상황보고를 위해 후교위를 불렀고 그렇게 두사람은 해가 바뀌고 처음으로 대면했다. 진왕에게 읍하고 문덕이 말햇다. "초나라 사신이 막사안에 계십니다." 주변을 둘러본 영직은 문덕에게 다가가 조그많게 속삭였다. "도성내에서 쓰던 마차가 마구간 근처에 있다. 해질녁에 마차안에서 보자." 문덕른 영직의 얼굴을 한번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곧 초나라 사신이 들어와 영직에게 감사하며, 전쟁상황을 보고했다.

해가 평원끝에 걸쳤을때 즈음 문덕은 마구간에 있는 병졸들에게 간단한 요깃거리와 술을 건네며 교대 전까지 말을 돌보겠노라 했다. 평소 문덕이 자신의 말을 아끼는것을 아는 병졸은 기분좋게 제의를 받아들이고 근처 막사로 들어갔다. 곧 해가 지자 평원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마구간 근처에 불빛이라고는 작은 모닥불이 다였다. 인기척이 들려 문덕은 계화주가 든물주머니를 들고 마차로 향했다. 마차 안에는 얇은 침의위에 피풍이만 걸친 영직이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주변을 둘러본 문덕이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좁은 마차안에 영직과 문덕이 마주보고 앉았다. 불빛하나 없는 어둠속에서 서로를 말없이 보던 두사람은 손을 잡았고, 팔을 둘러 마주안았다. "문덕 그대가 보낸 상소문은 모두 읽어보았어. 내마음도 그러하네 문덕! 은애하네."문덕응 말없이 영직에게 입맞췄다.

캄캄한 시야가 익숙해진 두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서로를 기억했다. "어떻게 해야 너를 곁에 둘수 있을까?" 영직이 슬프게 말했다. 문덕은 자신의 뺨을 쓰다듬는 손을 잡아 손바닥에 입을 맞추고 속삭였다. "선태후께서 권력을 가지고 계신 동안은 어쩔수 없습니다." 영직은 문덕의 품에 파고들며 말했다. "그 권력은 영원하니 못할거야. 내가 가만히 있지는 않겠어. " 문덕은 영직을 품속으로 끌어안으며 말했다. "선태후의 배후는 의거군만이 아닙니다, 양후와 화양군 백기도 그녀의 권력이지요." 영직은 문덕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폐하, 상소문을 읽는것을 게을리 하지 마시옵소서." 어깨에 묻은 고개가 끄덕여졌다. 전쟁으로 진나라는 초나라와의 관계가 더욱 두터워졌지만, 조,제,한,연 네나라의 동맹이 진나라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로인해 진나라의 출정이 잦아졌고, 그때마다 영직은 문덕이 후조라는교위로 있는 국경의 그 작은 초소에 머물렀다.

시간이 지나 영직의 아들이 태어났고, 미월은 영직의 아들이름을 탁이라 지었다. 미월과 적려사이에 태어난 장자 영불을 고릉군으로 봉해 조나라 볼모로 보냈다. 조산했던 미요는 산후 후유증을 앓다 곧 사망했다. 양후가 등용한 백기는 출정하는 전쟁마다 승리를 거둬 무안군에 봉했다. 태후의 동생 양후와 화양군, 그리고 의거왕 적려까지 나라의 그 기세가 등등할수록 선태후의 세도 늘어만 갔다. 영직은 조용히 앉아 때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그들이 하는 양을 보고 있었다.

가끔 몸이 좋지않다는 핑계로 호경에 있는 온천을 찾았는데 그곳은 초나라 국경과 굉장히 까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다. 영직이 얇은 홑내의를 입고 온천에 앉아 있으면 곧 인기척이 났다. 돌아보면 그곳에 문덕이 있었다. 문덕은 입고있던 옷을 훌렁 벗고 온천안으로 들어갔다. 물에 젖은 하얀 내의가 영직의 몸을 그대로 비추었다. "태후의 조짐이 이상해, 곧 초나라를 칠것 같다." 영직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정신을 환기시킨 문덕이 말했다. "지금 초나라의 세자와 왕은 매우 무능한 자들입니다. 게다가 초왕은 귀비에게 국정을 맡겨놓고 음주가무한다 들었습니다." 영직은 미월이 초나라 출신이기에 초나라를 침략하는것에 회의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상황을 보니 지금이야말로 초나라를 칠 적기인것 같았다. "문덕, 화양군을 설득하여 신시를 공격할테니, 그때 그곳에 가서 화양군을 돕게." 영직의 말에 문덕은 그리 하겠다 말했다. 두사람은 조용히 온천물에 몸을 담그고 그 시간을 즐겼다. 맞닿아오는 서로의 체온과 온천의 온도가 비슷하여 어디까지가 체온이고, 온천인지 알수 없었다. 영직은 문덕을 애틋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언제까지, 언제까지.." 문덕이 영직에게 할 수 있는 대답이 없었다.


12.

영직의 말대로 신시를 공격하는 화양군을 도운 문덕은 다시 자신의 이름을 되찾아 호경의 현령이 되었다. 이후 영직은 그 전보다 더 자주 아파 호경의 온천을 더 자주 찾았다. 진의 초나라 공격으로 초나라는 다른 나라의 침공을 받았는데 당시 가장 오래된 나라였기때문에 초를 돕는 나라도 많았다. 초왕이 진나라에 조회를 왔다가 선태후에게 붙잡혀 억류당하자 주변국들은 반발하여 진나라에 하나 둘 선전포고를 해왔다. 이때 문덕이 안읍에서 조, 위, 한나라의 사신들을 설득하여 돌아가게 만들었고, 그것을 안 화양군과 양후는 그를 다시 함양으로 불러들였다. 문덕은 화양군과의 오랜 인연을 뒷바침으로 의거군에 대해 적대적이기 까지한 감정을 일부러 내보였는데, 평소 의거군을 견제하던 양후에 눈에 들게되었다.

함양으로 돌아온 양후는 진왕을 따로만나 문덕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동안 의거군을 중요한 병력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영직은 양후가 문덕의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그동안 문덕이 했던 말들에 대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과인 역시 의거군을 견제할 방법을 찾고 있었소." 영직의 말에 양후는 의거군의 부적절한 행동들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과인에게는 현재 큰 힘이 없기에, 경험이 많은자를 옆에두어 양후를 돕고 싶습니다만.." 말을 줄이는 영직의 의중을 알아챈 양후는 말했다. "선태후마마를 걱정하시는 거라면, 심려놓으시지요, 제가 잘 달래보겠습니다."

미월은 불편한 기색을 지우지 못하며 위염에게 투정했다. "그를 왜 다시 도성에 들이신다는 겁니까? 그는 진왕에게 도운이 되지 않아요." 위염은 미월을 달래며 말했다. "그는 어릴때부터 세자였던 진왕을 옆에서 모신자입니다. 그가 세운 공은 이번이 처음이 아닐테지요 분명 저희들에게 언젠가 필요한 장기말이 될것이니 노여워 마세요 태후." 문덕은 중상시가 되어 진왕을 보필하게 되었다. 그는 주로 영직이 과중한 업무로 챙기지 못하는 것들을 옆에서 도우며 호위의 역할도 수행했다. 그의 신분은 귀족도 장군도 아니었으나 왕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었다. 예전처럼 여러사람이 그에 대해 수근거렸지만, 점차 성장하는 영직의 세와 반비례하여 사라졌다.

진나라를 제외한 중소국들의 연합은 진나라로써는 당황스러운 일이 아닐수 없었다. 물론 과거 계속해서 나라간에 문제가 있었던것은 사실이지만 그동안 우호한 관계를 유지한 나라도 많았기 때문이다. 천하를 재패하려는 아직 스스로를 왕이라 칭하지 랂는 제후국까지 진나라의 세를 넘보고 있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외정에 미월과 영직은 하루하루가 바빴다. 문덕 역시 더이항 장군으로 전쟁에 출정하지는 않았지만, 그동앙의 경험과 하급관리직을 맡아 일하며 얻은 지방관리들과의 연줄을 이용해 영직을 보좌했다. "폐하, 전쟁은 사람으로 하는것입니다. 사람을 쓰기 위해서는 많은것들이 필요하지요, 물자와 군기 그리고 이동하며 필요한것들도 중요합니다." 영직은 멧돼지 가죽에 그려진 칠웅성을 보며 문덕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 지도에는 그 어떤 경계선도 없었다, 단지 칠웅이라 불리는 성의 이름과 위치만 있을뿐, 각각 나라의 영토는 계속해서 변화했다.

문덕은 자신이 지냈던 지역의 정보를 연줄이 닿는 현령과 연락하여 공략할 성들을 찾았다. 무안군이 된 백기는 영직과 양후의 도움으로 한나라와 초나라의 여러 성을 쟁취하며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무안군의 위세는 곧 화양군을 뛰어넘었고 거의 양후와 같은 수준의 세를 갖추게 되었다. 문덕은 양후에게 계속해서 백기를 견제해야한다는 내용의 서신을 전달했는데 양후는 개의치 않았다.

사람들의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 영직과 문덕은 서로의 마음에 대해 이야기했다. 어떨때는 내전의 침상이었고 또 언제는 화친을 하러 떠나는 마차안이기도 했다. 영직은 문덕이 곁에 있으므로 인해 인격적으로 정치적으로 급격하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미월과 양후는 눈치채지 못한듯 했으나 전쟁으로 가끔 도성에와 진왕을 알현하는 백기의 눈에는 그것이 보이는듯 했다. 진왕은 의거군 역시 적극적으로 이용했는데, 의거군이 공을 세울때마다 그들에게 진나라 여자와 도성 밖에 있는 땅을 상으로 내려 함양에 가정을 만들게 했다. 본디 유목민인 그들에게 가족이라는 중심축을 만들어 방랑하며 살아가는 그들을 와해하기 위함이었다. 영직이 펼치는 치세는 아주 조심스럽고 천천히 미월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있었다.

영직은 미요와의 사이에 탁 이외의 자식은 없었다.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의거군의 행패에 미월은 적려를 초방전으로 불러 살해했다. 그라고 와해된 의거군은 자연스럽게 진나라에 흡수되었다. 의거군이 제거되자, 미월은 예정만큼 활발하게 정치에 참여하지 못했다. 양후와 화양군의 욕심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는데, 영지확장을 제나라를 이유없이 침략하려 드는일이 문제가 되어 양후직을 내려 놓아야했다. 자연스럽게 양후의 군사는 영직의 병력이 되었다. 영직은 문덕을 상방으로 임명하고, 원교근공책을 적극 반영하여, 가까운 먼나라와 친하게 지내며, 가까운 나라를 공격했다. 영직은 75세까지 총 56년간 왕으로 재임하였고, 그가 죽은지 3년후 그의 증손자인 영정이 시황제로 등극하여 7웅을 하나의 진으로 통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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