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ough the cold

저녁 해가 다 지도록, 밖에서 놀던 위즐리가 아이들은 몰리가 저녁준비를 끝내자 마자 내는 커다란 소리에 이끌려 하나 둘 집안으로 들어 왔다. 끝까지 빗자루를 타지 못했다고 분해 하며 투정하는 론이 의자에 앉자, 아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앞쪽에 있는 스콘을 하나 접시 앞으로 가져와 저녁식사를 시작했다. 곧, 다른 가족들도 동참했다. 몰리의 갓 끓은 스튜접시가 하나 둘 식탁위로 날아왔고, 몰리도 곧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몰리를 본 아서가 고개를 돌려 몰리의 뺨에 키스하며 말했다.

“밖이 점점 쌀쌀해 지는데, 날도 짧아지고.”

“곧 겨울이 올 테니까요.”

몰리는 부드럽게 웃으며 아서의 뺨을 쓰다듬었다. 두 사람의 대화에 퍼시 옆에 앉아 있던 론이 말을 꺼냈다. “엄마. 저녁 먹고 잠깐만 빗자루 타면 안돼요?” 론의 질문에 창 밖을 보던 몰리는 해가 뉘엿뉘엿 지며 온통 주홍 빛으로 물든 하늘을 바라보았다. 식사가 끝날 때 즈음이면, 분명히 어두워져 있을 것이다. 다시 시선을 론에게 옮겨 미안함이 담긴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을 하려는 순간 아서가 힘차게 말했다.

“그래, 아빠랑 함께 날자꾸나.”

아서의 목소리에 얼굴에 있던 미안함이 씻긴 몰리는 론을 향해 크게 미소 지으며 프레드와 조지 옆에 앉으면서 론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어 주었다. 조지가 갑자기 일어서더니 몰리의 옆 자리로 옮겨 앉았다. 쌍둥이는 몰리의 양팔에 매달려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는 론을 향해 만족한다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론이 먹다 남은 스콘 조각을 조금 떼어 쌍둥이에게 던졌다. 몰리는 론에게 입술을 살짝 물으며, 표정을 굳혔다. 론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면서 쌍둥이들을 노려봤다. 하지만 쌍둥이들은 자신들이 밖에서 뭘 하고 놀았는지 몰리에게 설명해주기 바빴다.

저녁식사가 끝나고, 몰리의 설거지와 쌍둥이의 모험을 듣던 아서와 론은 곧 밖으로 나왔다. 보라색 빛으로 물든 하늘 아래 빗자루를 들고 서 있었다. 아서는 빗자루를 타는 것이 오랜만이었다. 항상 플루네트워크를 사용 하는 것이 버릇이 되어서인지, 약간 흥분 되었다. 몸을 낮춰 론에게 눈을 맞추고 아서가 말했다.

“저녁에 비행하는건 위험해. 아빠가 지금 같이 있기 때문에 이 시간에 나오는 거야. 절대로 혼자서 이 시간에 밖에 나오면 안돼! 알지?”

아서의 꾸민듯한 근엄한 목소리에 입 꼬리가 올라간 론이 웃음을 숨기는데 실패하고 아빠의 품에 안기며 웃었다. 아서는 론을 한번 꼭 안아 준 다음에, 머리를 헤치고는 일어섰다. 빗자루에 올라타며 힘차게 땅을 내 딛었다. 론 역시 뒤따라 빗자루 위에 올라탔다.

겨울이 다가 와서 인지, 해가 지자 공기가 습하고 찬 공기가 아서의 뺨을 갈랐다. 자기도 모르게 비행을 즐긴 아서는 론이 생각나서 뒤를 보았다. 아직 서툴지만 아서 뒤를 잘 따라 오고 있었다. 보라색이던 하늘이 완전히 어두워지고, 별들이 그 모습을 선명히 할 때, 두 사람은 다시 집안으로 들어 왔다.

론의 두 뺨이 찬 공기에 스쳐 빨갛게 달아 올라 있었다. 아서는 차가워진 론의 두 뺨을 감싸 쥐며 론을 집안으로 이끌었다. 지니와 퍼시는 이미 잠자리에 들었다. 몰리는 거실에 앉아 마루에 엎드려 무언가 열심히 적고 있는 쌍둥이를 보고 있었다. 빌과 찰리는 방에서 뭘 하는지 보이지 않았다. 론이 거실로 들어오는 걸 본 몰리가 론에게 손짓하며 어깨를 감싸며 옆에 앉혔다. 밤공기에 차가워진 론의 팔뚝을 두 손으로 문지르며 론의 정수리에 살짝 키스했다. 아서는 론이 몰리 옆에 앉는 것을 확인하고, 문 옆에 세워 두었던 빗자루를 다시 창고 안으로 가져가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곧 겨울이 올 것이다. 곧 추워질 것이다.

집안으로 다시 들어온 아서는 바닥에 몸을 뒹굴며 늘어져 있는 쌍둥이를 쳐다보고는 시계를 봤다. 9시 40분. 아서는 쌍둥이가 누워있는 바닥 바로 앞에 주저 앉으며 쌍둥이를 쳐다봤다. 아서의 도착에 늘어져 있던 조지가 그 동안 쓰고 있던 종이를 아서에게 보여주며 자신들이 개발한 주문에 대해 열심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누워있던 프레드 역시 조지의 설명에 만족하지 못했는지, 곧 들고있던 양피지를 뺏어 들어 옆에 있던 깃펜으로 무언가 다시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쌍둥이의 몰입한 모습에 웃던 아서의 시선이 소파에서 꼭 붙어 잠든 몰리와 론에게 갔다. 아서는 몰리의 무릎을 살짝 흔들어 깨웠다. 부스스 눈을 뜬 몰리는 조심스럽게 론을 두고 아서에게 손짓했다.

“자, 프레드,조지 너희도 어서 너희 방으로 올라가서 잘 준비 하렴.”

몰리의 목소리에 집중하던 양피지에서 고개를 돌린 쌍둥이가 투정하며 계단으로 올라갔다. 몰리는 올라가는 쌍둥이를 향해 일찍 자라고 소리치며 아서에게 론쪽을 가리키며 손짓했다. 아서는 조용히 자리를 털고 일어나 론을 안아 들었다. 노곤했는지 축 늘어져서 자는 론의 몸이 따뜻해져 있었다. 론의 방 문을 팔꿈치로 밀어 열고, 주황색 시트 위에 론을 올려 놓았다. 다 헤진 물려받은 신발을 벗기고, 한때 빌의 점퍼였던 점퍼를 조심스럽게 벗겼다. 잠옷으로 갈아 입히기엔 너무 깊게 잠이 든 것 같아, 그대로 시트를 젖혀 론을 밀어 넣었다. 곧 아이들의 이불을 더 두꺼운 것으로 바꿔야 한다고 몰리에게 말해야 한다는 걸 되 뇌이며, 론의 잠자리를 봐준 아서는 론의 이마에 살짝 키스 한 뒤 방문을 살짝 열어 둔 채로 몰리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

“빌, 찰리, 퍼시, 프레드, 조지, 론, 지니!!!!”

아침 식사 준비가 끝난 몰리는 큰소리로 계단 옆에 서서 아이들의 이름을 불렀다. 곧 쿵쾅거리는 소리와 함께 하나 둘 식탁으로 모였다. 구워진 토스트를 식탁 위로 옮기며, 몰리는 마음 속으로 아이들의 이름을 되 뇌이며 부스스한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빌, 찰리, 퍼시, 프레드, 조지, 론…, 론?’ 거실쪽을 한번 쳐다보고는 다시 한번 식탁에 둘러 앉은 아이들을 둘러 봤다. 출근 준비를 마친 아서가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몰리는 아서의 뺨에 키스하며 거실을 지나 계단쪽을 올려 다 보았다. 다시 한번 큰 소리로 론을 불렀다. 몰리는 계단을 올라가며 계속해서 론을 불렀지만, 론의 방 문 앞에 도착할 때 까지 식당에서 나는 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살짝 열린 방문을 낡은 경첩에서 나는 소리에 천천히 방문이 열리고, 주황색 침대 시트 위에 머리 끝까지 이불을 뒤집어 쓴 채로 옆으로 누워 자는 론이 보였다. 몰리는 어제 저녁에 빗자루를 타고 논 것에 지쳐서 늦잠을 자는 거라고 생각하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반쯤 열린 창문으로 아침 바람이 쌀쌀했다. 밤새 문을 열어 놓고 잤는지, 방안이 조금 찼다. 얼른 창문을 닫으며, 론의 침대에 앉은 몰리는 조용히 론의 이름을 불렀다.

“론?”

몰리의 목소리에 이불의 부스럭 소리와 함께 두 뺨이 빨갛게 상기된 론이 얼굴을 내밀었다. 몰리는 론의 머리에 손을 가져가며 다시 한번 론의 이름을 부드럽게 불렀지만,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리지 못한 론은 투정하듯 몰리에게 매달렸다. 몰리의 손바닥에 닿은 론의 이마는 뜨거웠다. 몰리는 매달리는 론을 천천히 끌어 당겨 안았다. 축 늘어진 론의 몸에 열이 있었다. 몰리의 옷을 움켜쥔 론의 손이 조금 헐거워 졌을 때, 몰리는 다시 론을 침대 위에 뉘였다. 이불을 꼼꼼하게 덮어주고, 찬장에 감기 포션이 있었는지 생각했다. 이제 날이 더 쌀쌀 해질 테니, 슬슬 만들어 놓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론의 뺨을 한번 쓰다듬고서는 방을 나가기 위해 침대 위에서 일어났다. 론의 눈꺼풀이 부르르 떨리며 떠지더니, 몰리를 바라 보았다. 몰리는 고개를 숙여 론의 이마에 키스하며 말했다.

“좀 더 자렴. 푹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 거야.”

론의 이불을 한번 더 고쳐 덮어주며 천천히 몸을 식당쪽으로 향했다. 문을 닫기 바로 직전, 다시 한번 고개를 돌려 론이 누워 있는 곳을 보았다. 론은 몰리가 나가는 것을 계속 보고 있었다. 몰리는 미소 지어 보이며 살짝 열린 문을 그대로 두고 아래층으로 향했다.

점심시간이 거의 다 되었을 때쯤, 몰리는 마당에 빨래를 널고 있었다. 방에서 창문 밖을 지켜보고 있던 쌍둥이는 몰리가 마당에 빨래 바구니를 들고 나오는 것을 보고 마당으로 나가기 위해 쿵쾅거리며 계단을 내려왔다. 거실을 지나 부엌쪽에 있는 뒷문으로 마당에 나가려고 하는데, 거실 소파 위에 론이 쓰러져 있었다. 조지는 바쁘게 걸음을 옮기는 프레드의 팔을 잡아 당기며 론에게 손짓했다. 론을 발견한 프레드는 조지를 바라보며 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조지는 프레드를 향해 크게 웃어 보이며 내려왔던 길을 거슬러 내려왔을 때보다는 조금 조용히 다시 방쪽으로 뛰어갔다. 프레드는 론을 일으켜 앉으며 주변에 있는 쿠션으로 론의 몸이 앉아 있을 수 있게 해 두었다. 론의 뺨은 붉게 물들어 있었고, 전체적으로 얼굴이 조금 부어 있었다. 론이 눈을 살짝 뜨며 프레드를 봤다. 프레드는 한번 크게 웃고는 론의 머리를 헝클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프레드가 막 소파에서 일어 났을 때, 조지가 손에 담요를 들고 내려오며 부엌을 향하는 프레드를 보았다. 조지는 론 옆에 풀썩 앉으며 이미 헝클어진 머리를 다시 한번 헝클었다. 론은 조지에게 매달리기 위해 두 손을 뼜었지만, 조지는 담요로 론의 몸을 감싸며 안아 주었다. 조지의 어깨에 머리를 뉘인 론이 몇 번 기침하더니 조지를 밀어 냈다. 담요 안쪽으로 얼굴을 숨기며 방금 전보다 좀 더 심하게 기침을 해 댔다.

“기침도 해?”

프레드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조지의 눈에 프레드 손에 들린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컵에 눈이 갔다. 테이블 위에 컵을 가지런히 올려 놓고 다시 소파에 앉은 프레드는 조지 품에 안겨있는 기침하는 론을 한번 보고는 조지와 프레드를 향해 팔을 내둘렀다. 조지의 어깨에 안착한 프레드의 숨이 간지러웠다. 기침이 멎은 론은 답답하다는 듯이 다시 담요 밖으로 고개를 살짝 내놓고는 뒤쪽에 앉은 프레드를 팔꿈치로 밀어 냈다. 프레드는 꾸며낸 슬픈 표정으로 더욱 세게 조지와 론을 안았다.

“베이비로니, 조지만 좋아하기야? 조지, 너의 첫번째는 나 아니야?”

프레드의 투정에 조지 역시 앞에 있는 두 사람을 더 세게 안았다. 마치 그 질문에 대답이라도 하듯, 두 사람과 지금 보다 더 가까워 지고 싶다는 듯, 그때 몰리가 밖에서 빈 바구니를 들고 거실로 들어 왔다. 부둥켜 안고있는 세 사람을 본 몰리 얼굴에 웃음이 났다.




루시우스의 일이 예전보다 더 바빠졌다. 집에 있는 시간보다 밖에 나가 있는 시간이 더 많아 졌다. 자연스럽게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줄었다. 오늘은 오후에 드레이코와 같이 퀴디치를 하기로 약속한 날이었지만, 늦게까지 이어진 마법부 회의 덕분에 저녁만찬이 시작 될 때 즈음에야 집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가족과 함께하는 저녁이었다.

연회실의 피아노에서 잔잔한 녹턴이 연주되고 있었다. 루시우스는 부정하고 싶었지만, 머글의 작곡 공식은 마법사들의 것보다 훨씬 정교하고 아름다웠다. 루시우스의 남쪽관 비밀서재에 가장 큰 부분을 차지 하는 것이 머글음악 수집이었다. 마법사들 중에 과연 악기를 마법 없이 연주 하는 사람이 있을까? 차갑고 날이 선 아버지의 눈동자가 부드러워 질 때, 슬픈 단조의 소나타가 울리는 무도장, 너무 어려서 이해할 수 없었던 수많은 감정이 흐르는, 아버지가 피아노를 연주하시던 무도장. 루시우스는 눈을 감고 그때 그 기억을 되새기고 있었다.

서툰 바이올린 소리에 몸을 돌려 연회장 쪽으로 향한 루시우스의 눈에 미소가 가득한 나시샤와 작은 바이올린을 턱에 괴고, 악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진지하게 연주하는 드레이코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완벽하지도, 그렇다고 잘하지도 않았다. 삐걱거리는 소리와 맞지 않는 음이었지만, 마음이 편안해 졌다. 열중한 드레이코의 뺨이 분홍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루시우스가 연회장에 들어온 것을 발견한 나시샤의 손이 멈췄다. 멈춘 피아노 소리에 드레이코는 악보에서 머리를 들어 루시우스를 바라 보았다. 방금 전까지 심각했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나시샤의 뺨에 키스하고 드레이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하는 구나.”

드레이코는 루시우스의 말에 어깨를 들썩이고 얼굴에 활짝 핀 웃음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숙이며 바이올린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나시샤는 자리에서 일어나 피아노 덮개를 내려 놓으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루시우스 옆에 섰다. 드레이코가 보고 있던 보면대를 한쪽으로 치우며 살짝 손뼉을 치며 집요정을 불렀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집요정이 나타났다. 나시샤는 막 정리가 끝난 드레이코의 바이올린과 보면대를 향해 손짓했다. 집 요정은 드레이코에게 다가서며 바이올린 케이스를 받아 들었다.

저녁은 언제나 그랬듯이, 조용하게 시작해서 조용하게 끝이 났다. 식사 중에 끝마치지 못했던 이야기를 계속하기 위해 나시샤와 로비로 향했다. 조용히 두 사람 뒤를 따르는 드레이코를 발견한 나시샤는 갑자기 무언가가 생각난 듯, 루시우스의 뺨에 살짝 키스한 뒤 서쪽관으로 발걸음을 급하게 옮겼다. 남겨진 두 말포이는 나시샤가 코너를 돌아 그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렇게 서있다가, 루시우스의 손이 드레이코의 어깨에 내려 앉으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회랑안이 저녁 노을에 붉게 물들었다. 조금 지나면 날이 저물 것 같았다. 날씨가 점점 추워지고 있었다. 루시우스는 창밖에 시선을 고정한 드레이코를 내려다 보았다. 그리고 오늘 했던 약속이 생각 났다. 루시우스는 얻어놓았던 손을 치우며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물었다.

“퀴디치를 하기는 늦었지만, 잠깐 비행이라면 할 수 있을 것 같구나.”

루시우스의 목소리에 드레이코는 루시우스의 허리춤을 꽉 안으며 기쁨을 숨기지 않았다. 드레이코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루시우스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얼굴을 루시우스의 쪽에 한번 비벼대더니 곧 손을 놓고 정원이 있는 쪽으로 뛰어 가기 시작했다. 루시우스의 헛기침에 발걸음을 멈춘 드레이코가 살짝 뒤를 돌아 루시우스의 미소를 확인한 뒤에 다시 평소보다 바쁜 걸음으로 정원쪽을 향하기 시작했다. 루시우스도 평소보다는 조금 바쁜 걸음으로 아들 뒤를 따랐다.

차가운 바람이 몸을 가른다. 붉었던 하늘이 자색으로 어두워 진다. 별들이 희미하게 그 모습을 보인다.

빗자루에서 막 몸을 내린 루시우스가 뒤쪽에 자연스럽게 착지하는 드레이코를 보았다. 정원에서 기다리고 있던 집 요정에게 끼고 있던 장갑과 빗자루를 던져주며, 드레이코의 빗자루를 받아 들었다. 힘이 들었는지 헐떡이는 숨을 잠시 몰아 쉬고 싱긋 웃어보였다. 차가운 바람에 붉게 물든 뺨이…. 고개를 숙이고 힘들게 숨을 고르는 아들의 몸쪽으로 다가가던 손이 공중에서 멈추고 금발의 소년이 머리를 다시 들기 전에 재빨리 손을 옮겨 눈 앞으로 내려온 머리를 쓸어냈다.

언제 왔는지 나시샤가 루시우스의 행동을 보고 가볍게 한숨을 쉬더니, 드레이코에게 다가갔다. 몸을 숙여 나시샤는 차가워진 아이의 볼을 두 손으로 감쌌다. 나시샤의 손바닥에 드레이코의 미소가 느껴졌다.

자기 방으로 향하는 드레이코의 어깨가 조금 무거워 보였다. 방문을 조심스럽게 닫고, 입고있던 망토와 옷을 가지런히 벗어두고는 잠옷으로 갈아 입었다. 커다랗고 깔끔하게 정리 되어 있는 방, 커다란 창문은 이미 두꺼운 벨벳 커튼으로 가려져 방안은 어두웠다. 맨발로 천천히 커다란 침대쪽으로 몸을 향하는 소년의 숨소리가 거칠었다. 차가운 흰색 시트에 몸을 던져 눕고는 몸 주변을 이불로 꽁꽁 둘러 쌌다. 커다란 침대에 묻힌 소년의 작은 몸이 힘겹게 뱉어지는 숨소리와 함께 소년의 빨갛게 닳아 오른 뺨이 차가운 베갯잇에 뉘어지고 무거운 눈꺼풀이 회색 눈동자를 덮었다. 머리 끝까지 신음소리를 숨기려는 냥 끌어당긴 이불로 베개 끝에 살짝 보이는 금빛 머리카락 만이 누군가가 그 침대 위에 있다는 걸 알려주는 듯 했다.

집 요정이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드레이코의 방 문 앞에 섰다. 천천히 문을 열고 들어가 무거운 벨벳 커튼을 제치자 햇빛이 방안으로 쏟아졌다. 커다란 침대 위에 이불더미 속에 드레이코의 얼굴에도 빛이 닿았다. 조금 거친 숨을 몰아 쉬면서 자리에서 일어 났다. 평소 때와는 다르게 비틀거리는 모습에 집 요정이 그를 도우러 옆에 섰다. 도움의 손길을 신경질 적으로 뿌리치며, 이미 잘 정돈되어 준비된 옷을 손에 들고 욕실로 향했다. 세면대에 차가운 물을 받아두고 얼굴을 담갔다. 그렇게 숨이 목에 차 오를 때까지 물 속에서 숨을 참아내던 드레이코가 숨을 몰아 쉬며 물 밖으로 얼굴을 들어 올렸다. 무거운 머리를 들어 올렸다.

벽을 집고 천천히 내려오는 계단 앞에서 숨을 고르고,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소년은 무거운 몸에 힘을 주어 가볍게 뛰었다. 연회장에 들어서자 긴 테이블 끝에 앉은 루시우스의 모습이 보였다. 나시샤는 고개를 돌려 급하게 뛰어 온 듯한 드레이코에게 의자로 손짓하며 말했다.

“늦었구나, 드레이코.”

지어낸 한숨을 내쉬며 드레이코는 무거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앞으로 흘러내린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며, 나시샤에게 미소 지어보였다. 미소 짓는 소년의 뺨이 붉었다.

“늦잠을 잤어요.”

자세를 곧게 하고 천천히 의자로 몸을 옮긴 드레이코는 털썩 의자에 앉았다. 코를 훌쩍이는 소리에 접시에 머물렀던 루시우스의 시선이 그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옮겨졌다.

“드레이코?”

루시우스의 목소리에 쳐져 있던 어깨가 다시 긴장했다. 살짝 고개를 돌려 루시우스의 눈동자를 만난 드레이코는 최선을 다해 미소 지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다시 자기 방으로 돌아오기까지 아득해지는 정신에 드레이코는 휘청거렸다. 방문을 살짝 열고 그 안에 들어서자 마자 쓰러지는 드레이코를 기다리고 있던 집 요정이 무겁게 받쳐들어 침대위로 옮겼다. 준비해온 포션을 조심스럽게 입술사이로 떨어뜨리며, 이불을 고쳐 덮어 주었다. 힘들게 몰아 쉬는 숨, 이제 붉다고 하기보다 오히려 하얗게 질렸다고 하는 것이 맞을까.

커다란 방, 깔끔하게 정리되어 마치 전시해 놓은 것 같은, 커다란 방. 어린 아이의 방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리기 힘든 커다랗고, 차가운 드레이코의 방. 나시샤는 천천히 그 방 안으로 몸을 옮겼다. 온 몸이 땀에 젖어 차가워진 드레이코를 천천히 시트에서 안아 들었다. 집 요정이 시트를 가는 동안 그렇게 드레이코를 안고 나시샤는 정신을 잃은 아이의 뺨을 쓰다듬었다. 힘껏 안아 주었지만, 항상 사랑하지만. 이렇게, 이렇게, 아무도 모르게, 이게 말포이 방식. 아이를 쓰다듬는 어머니의 손길이 그 어느 때보다, 누구보다 애절하다.

늦은 밤이 다 되서야, 드레이코의 숨소리가 편해져서야 나시샤는 드레이코의 방을 떠났다. 문이 닫히는 소리에 눈이 살짝 떠진 드레이코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깨끗하게 바뀐 시트, 그리고 커다란 침대 앞에 의자. 손을 옮겨 의자위로 가져갔다. 아직 따뜻했다. 누군가가, 누군가가 그가 아픈 것을 보고 있었다. 얼른 손을 치우며 방금 닫힌 문쪽을 보았다. 그리고 금방이라도 비를 쏟아낼 것 같은 먹구름이 아이의 눈동자를 채운다.

Slap

크리스마스 파티가 한창인 말포이 저택의 연회장에 잔잔한 왈츠를 넘어 여자아이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람들의 시선이 방금 막 땅바닥으로 내쳐져 눈물방울을 하염없이 쏟아내는 곱실거리는 갈색머리를 가진, 찢어질 듯한 울음소리를 만들어내는 여자아이에게 쏠렸다. 그리고 그 앞에 주먹 쥐어진 양손을 몸에 바싹 붙인 채로, 방금 넘어진 그 여자아이를 화가 잔뜩 난 표정으로 열심히 노려보고 있는 금발의 소년이 있었다.

여자아이의 엄마처럼 보이는 갈색머리의 부인이 나타나 그 아이를 안아 들었다. 금발의 소년 옆으로 당황한 듯한 표정이 역력한 나시샤가 어렵게 그 부인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듣던 데로, 정말 훌륭한 아드님을 두셨군요.”

조용하고 침착하면서 상황을 정확히 비꼬는 그녀의 말이 루시우스의 귓가를 울렸다. 그녀의 목소리에 연회장은 단숨에 침묵으로 휩싸였다. 두 걸음에 거리를 좁혀 그 부인 앞에 선 루시우스는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로지부인, 제 아들의 무례함을 넓은 아량으로 용서해 주십시오...”

갈색 머리의 부인의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가며, 고개를 들어 루시우스를 아래로 내려 보았다. 그리고 사과를 받아줄 마음이 없는 듯, 돌아서려는 찰나, 루시우스가 숙였던 고개를 들며 미처 끝내지 못한 말을 끝냈다.

“하지만, 이 넓은 홀을 가득 채울만한 우렁찬 목소리를 가진 따님께서는 확실히 듣던 데로, 숙녀답군요.”

루시우스의 말에 돌아섰던 로지부인의 시선이 다시 그녀 앞에 선 금발의 남자에게 갔다. 얼어 붙을 것만 같은 날카로운 회색 눈동자가 그녀의 초콜릿 갈색 눈동자를 단숨에 얼렸다. 로지부인의 뺨이 붉어졌다.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루시우스는 나시샤의 드레스를 붙잡고 겁에 질려 서있는 아들을 어깨에 조심스럽게 손을 올려 놓으며 아들의 바라 보았다. 아들을 바라보는 그는 평소와 달라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눈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천천히 드레이코의 손을 잡고 서재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나시샤가 멈추었던 음악을 다시 연주하게 하고, 천천히 로지부인에게 다가서며 용서를 구했다. 다시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연회장을 메우기 시작했고, 나시샤는 방금 두 사람이 나간 문 쪽으로 시선을 한번 주고는 다시 로지부인의 불평에 집중했다.

서재를 향하는 내내 루시우스의 손에 쥐어진 작은 손이 쉬지않고 움직였다. 살짝 눈 끝으로 축 쳐진 금발소년의 어깨에 눈이 간 루시우스는 한숨을 삼켰다. 화가 나기도 하지만, 실망이 더 컸다. 삼켜진 그 한숨에는 드레이코에 대한 애틋한 루시우스의 마음 역시 녹아 있었다. 화내며 잔소리하고, 억울해 하며 울며 어리광을 피우는, 보통 평범한 아버지와 아들이 그 어느 때보다 부러운 루시우스였다. 서재 문 앞에 도착한 루시우스는 잡고 있던 작은 손을 놓고 문고리를 돌려 문을 열었다. 그리고 아이의 등에 손을 얻으며 방안으로 이끌었다. 천천히 망설이는 걸음으로 서재 안으로 들어선 부자는 그렇게 한동안 문 앞에 서있다가. 루시우스는 문득 방안에 한기를 느끼고, 벽난로 앞으로 다가가 불을 붙였다. 그리고 그 옆 안락의자에 앉으며 아직 문 앞에 서있는 드레이코를 보았다. 양손을 앞으로 가져와 바쁘게 움직이며 고개를 푹 숙이고 긴장한 모습을 숨기지 않았다. 그 모습에 올라가는 입 꼬리를 이성으로 내리 누르고 헛기침으로 드레이코의 시선을 샀다.

“어깨 펴고, 똑바로 서라.”

루시우스의 말에 드레이코의 표정이 굳어지며, 어깨가 긴장했다. 몸을 곧게 펴며 루시우스의 시선을 피하지 않는 드레이코의 비를 잔뜩 머금은 먹구름 눈동자가 루시우스의 마음을 찢었다. 아무 말 없이 그렇게 둘은 서로를 쳐다보고 있었다. 루시우스는 시선을 벽난로의 불꽃으로 옮기며 손짓했다. 그 손짓에 드레이코는 몸을 움직여 벽난로 앞에 있는 의자에 몸을 낮췄다. 꼿꼿이 허리를 세우고 양손을 무릎에 가지런히 모은 채로 루시우스의 행동을 살폈다. 루시우스는 기다렸다. 평소라면 그가 의자에 와서 앉기 전에 그는 그가 원하는 대답을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그렇지 않았다. 그렇게 또 고요하게 시간이 흘렀다.

“드레이코?”

금발 소년의 시선이 벽난로의 타오르는 화염에서 얼음같이 찬 눈동자로 옮겨졌다. 그는 꿰뚫는 듯한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말포이를 모욕하는 걸 참을 수 없었어요. 그 아이가 저에 대해 모욕했다면 참았을 거에요. 하지만, 말포이를 모욕하면, 전 참지 않아요.”

그의 목소리는 확신에 가득 차 있었고, 그의 신념이 묻어 나왔다. 자랑스러움, 명예로움, 자신감. 그는 말포이였다. 루시우스는 그의 대답에 만족 했지만, 더 이상 그를 야단칠 마음이 없었지만, 그는 말포이로써 그의 아들을 완벽한 말포이로 만들어야 했다. 그리고 그의 행동은 비록 상대방이 잘못 했어도, 남자답지 못한 행동 이었다.

“그녀는 너보다 훨씬 어리고, 약한 여자 아이였어.”

루시우스의 말에 드레이코의 표정이 찡그려 졌다. 사실 이 싸움은 그 여자아이가 먼저 시작한 것이었다. 드레이코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드레이코에게 포도 알을 던지는 예의를 모르는 아이였다. 계속되는 무시에 화가 난 그 아이가 뱉어낸 모욕은 드레이코라는 이름대신 말포이라는 이름으로 뱉어져 나왔고, 그 점을 참을 수 없는 말포이는 끝내 자신의 감정을 누르지 못했다. 그런데, 그 여자아이의 편을 들어주는 루시우스에게 점점 서운하면서 화가 났다.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여진 작은 손이 꽉 쥐어지는 것을 본 루시우스는 다시 시선을 벽난로로 옮겼다. 그렇게 다시 둘만의 시간이 묻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시샤가 천천히 서재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손님들을 주인 없이 내버려 두는 것은 루시우스 답지 않았고, 또 그 뜻은 드레이코가 자신의 잘못을 아직 인정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바쁜 걸음에 거칠어진 숨결을 문 앞에서 몰아 쉬고 천천히 문을 열었다. 벽난로 앞, 안락의자에 몸을 뉘인 지쳐보이는 듯한 루시우스와, 양손을 무릎에 올려놓고 곧은 자세로 소파에 앉아 있는 드레이코를 보고 눈썹을 치켜 올렸다.

나시샤의 도착을 눈치챈 루시우스는 고개를 들어 그의 아내를 바라보았다. 평소와 다른 상황에 질문 가득한 표정으로 천천히 걸음을 루시우스에게 옮기는 나시샤를 보다가, 루시우스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시샤는 그의 급작스러운 움직임에 잠깐 멈춰 섰다가, 그에게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드레이코는 루시우스의 움직임에 고개를 들어 어머니가 들어 오는 것을 보았다. 나시샤가 루시우스에게 거의 닿았을 때, 루시우스의 손이 나시샤의 뺨에 닿았다.

“찰싹”

루시우스의 손에 닿은 뺨이 붉게 물들었고, 나시샤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루시우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걸어 왔던 길을 돌아 거칠게 서재 문을 닫으며 나갔다. 루시우스의 시선이 큰소리를 내며 닫힌 문에서 드레이코에게 향했다.

드레이코는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그제야 깨달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루시우스 앞으로 걸어 왔다. 루시우스 앞에서 눈을 꼭 감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끝내, 루시우스가 원하는 대답을 했다.

“잘못했어요. 아버지.”

“말포이는 여자에게 손들지 않아. 누가 먼저 건, 누가 잘못 했건. 서쪽 도서관. 네가 용서 받을 만큼 충분한 시간이 지났다고 생각 할 때까지.”

루시우스의 말에 드레이코는 천천히 발걸음을 목적지로 옮겼다. 그리고 어둡게 가라 앉은 먹구름이 비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드레이코의 작은 어깨가 가라 앉는 것을 뒤에서 지켜보던 루시우스는 힘들게 한숨을 삼켰다. 한동안 그렇게 서서 아들이 나간 문을 쳐다보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나시샤의 하얗고 가는 손이 루시우스의 어깨에 닿았다. 루시우스는 스스로가 언제 숙였는지 알 수 없는 고개를 들어 깊은 바다색 눈동자를 만났다. 그녀는 루시우스를 이해하고 있을까. 그녀의 입술이 루시우스의 뺨에 닿고, 그는 몸을 돌려 그녀와 마주 선다. 그녀는 방금 자신의 입술이 닿았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은 말포이와 어울리지 않아요.”

그녀의 말에 잠깐이나마 현실의 무게가 덜어진 것 같았다. 하지만 곧 그를 짓누르는 그의 이름은 그를 더 힘들게만 할 뿐이었다. 한숨 섞인 미소를 지어 보이며 루시우스는 자기 손이 닿았던 그녀의 뺨을 쓰다듬으며 그녀의 허리에 손을 둘렀다. 나시샤는 그의 손바닥에 키스하며 엷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가끔은, 너무 힘들어요. 원하는 만큼, 필요한 만큼 다 주고 싶은데, 그럴 수 없어요.”

“나 역시…. 아버지를 용서 할 수 있을 것 같아….”




햇빛이 따사롭게 비치는 오후, 아서와 빌, 찰리, 론이 밖에 나와 울타리를 고치고 있었다. 고사리 같은 작은 손으로 형을 돕는 론이 마냥 기특하기만 아서는 집중해서 못을 고르는 론의 머리를 흐트렸다. 아서의 손길에 고개를 든 론의 얼굴에 행복한 웃음이 가득했다. 멀리서 프레드와 조지가 간식을 들고 뛰어 왔다. 아서는 쌍둥이에게 손짓하며, 빌과 찰리에게 자신이 있는 곳으로 오라고 손짓했다. 둘은 들고 있던 연장들을 손에서 천천히 내려놓으며 손을 털고 둘은 무슨 이야기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웃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아서는 울타리 밖에 있는 론이 다시 울타리 안으로 들어 올 수 있게 비스듬하게 걸쳐져 있는 나무를 들어 올려 론이 그 곳을 지날 수 있게 해주었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울타리에서 멀지 않은 언덕 위에 커다란 나무가 있었다. 햇살이 좋아, 굳이 그늘을 찾을 이유는 없었지만, 꽤 오랜 시간 밖에 일을 하느라 꽤 더웠던 아서는 쌍둥이들 쪽을 향해 손을 휘휘 저으며, 언덕 위를 가리켰다. 쌍둥이는 오던 길을 살짝 틀어 언덕 쪽으로 향했다. 론은 곧 쌍둥이가 있는 쪽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아서는 뒤쪽에 걸어오고 있는 찰리와 빌을 기다리기로 결심하고 연장 통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미 론이 가지런히 정리해둔 연장 통은 아서가 더 이상 손댈 곳이 없었다. 자기 방을 이렇게 깨끗하게만 정리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론의 머리를 스치고, 아서는 점점 가까워지는 빌과 찰리의 목소리에 다시 고개를 들어 언덕에 서있는 나무를 바라 보았다.

아서가 나무 아래 도착했을 때, 쌍둥이들은 근처에 있는 그루터기에 머리를 마주하고 무엇인가를 열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론은 쌍둥이가 들고 온 바구니에서 아직 자기에겐 좀 큰 듯한 담요를 바닥에 깔고 있었다. 어찌나 열심히 했는지, 아서가 그 곳에 도착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뒤쪽에서 느긋하게 따라오던 빌이 담요와 사투하는 론을 보고는 머리를 휘휘 내저으며 론을 도왔다. 빌의 도움에 그제야 머리를 들어 아서와 찰리의 도착을 눈치챈 론은 그들을 향해 크게 웃어 보였다. 아서는 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쌍둥이가 가져온 바구니를 담요 위로 옮겼다.

빌이 쌍둥이를 담요로 끌고 오는 동안 아서는 바구니 안에 내용물을 확인했다. 샌드위치와 우유, 오렌지 주스가 단정하게 담겨 있었다. 안쪽에 있는 컵을 꺼내 들며, 샌드위치를 꺼내 들었다. 간식으로 먹기에는 조금 부담스러워 보였지만, 꽤 지쳐있던 아서는 그냥 하나 꺼내 들어 베어 물었다.

옆에 있던 빌 역시, 샌드위치를 하나 꺼내 들어 먹으려는 순간, 찰리가 뺏어 들었다. 빌은 찰리의 팔을 툭 치며 짜증을 내고는 다시 바구니 안에 있는 샌드위치를 꺼내 들었다. 언제 왔는지 쌍둥이도 바구니에서 하나씩 꺼내 들고 먹기 시작했다. 담요를 펼치는데 너무 힘을 쓴 론은 담요위에 축 늘어져 있다가 이내 다들 하나씩 샌드위치를 들고 먹는 것을 보고는 바구니쪽으로 기어왔다.

“어? 없네?”

샌드위치를 먹으며 고쳐 나간 울타리 쪽을 바라보고 있던 아서는 바구니에 약간 묻힌 론의 목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쌍둥이가 바구니 안쪽으로 론의 머리를 집어 넣으며 웃기 시작했다. 론은 쌍둥이의 손을 뿌리치려고 발버둥 치다가 바구니 안쪽으로 머리를 박았다. 안쪽에 들어있던 그릇이 달그락 거리는 소리와 함께 론이 쌍둥이를 향해 소리쳤다.

“하지마!”

아서의 얼굴에 미소가 번지면서 아서는 쌍둥이에게 손을 휘휘 내저었다. 쌍둥이는 계속 킬킬 거리며 론의 몸을 누르고 있었다.

“엄마가 네건 일부러 빼고 안 넣은 거야.”

“넌 아까 지니랑 같이 간식 먹었자나! 넌 안 먹어도 돼”

“네가 어디 있는지도 모를걸?”

쌍둥이의 말에 론은 더 화가 났는지 아까 보다 더 크게 소리치며 짜증냈다. 보다 못한 찰리가 프레드? 조지? 쌍둥이들 중 한명을 밀쳐냈다. 보다 못한 빌이 론의 몸을 일으키며 쌍둥이들을 완전히 밀쳐냈다. 똑바로 앉은 론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 올라 있었다. 잔뜩 찡그린 얼굴로 쌍둥이쪽을 쳐다보다가 자리를 박차고 집쪽으로 뛰어갔다. 아서는 달려가는 론을 보다가 다시 쌍둥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정말 그래?”

조지는 어깨를 들썩이며, 프레드를 바라봤다. 프레드의 얼굴에 뭔가를 아는 듯한 미소가 떠오르자, 조지는 참고 있던 웃음을 뱉어 내며 담요 위를 굴렀다. 프레드도 조지를 따라 구르며 웃었다. 상황이 파악되지 않은 아서는 헛기침을 하며 쌍둥이의 어깨를 잡았다. 프레드는 누워서 아까 열심히 바라보고 있던 그루터기 쪽을 향해 손가락질 했다. 그리고 다시 아서의 얼굴을 보았다. 아서는 눈살을 찌푸리며 쌍둥이를 바라보다가, 론이 뛰어간 쪽을 봤다. 이제 막 집에 도착한 론은 문 앞에서 숨을 고르더니 머리를 쓸어 내리며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거실로 들어서자, 갓 구운 쿠키의 달콤한 냄새가 온 집안을 채우고 있었다. 거실쪽으로 걸어가, 테이블에 놓여있는 바구니 안에 머핀을 하나 집어 들고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귓불과 뺨이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고개를 들어 안락의자에서 몸을 앞 뒤로 천천히 흔들며 책을 보고 있는 퍼시쪽으로 시선을 한번 힐끔 주고는, 털썩 소리를 내며 소파에 주저 앉았다. 그리고 다시 손에 들린 머핀에 집중했다. 부엌에서 들리는 몰리의 목소리에 퍼시가 고개를 들어 론에서 지니로 시선을 옮긴 다음 책을 소파쪽으로 던지며 부엌쪽으로 걸어갔다.

금방 머핀을 다 먹어 치운 론은 테이블 위에 다시 손을 가져가며 지니가 앉아있는 바닥으로 내려 앉았다. 지니는 바쁘게 조각난 것들을 실에 꿰고 있었다. 익숙한 조각들에 론이 지니가 꿰어놓은 줄을 하나 들어 올렸다. 체스의 말 머리가 색깔별로 엇갈려 꿰여 있었다. 말이 놓여야 할 체스보드는 깨어진 다른 조각들로 인해 잔뜩 긁혀 있었다. 이미 많이 낡고 닳은 데다, 작아서 잘 사용하지 않았지만, 론에게 있어 소중한 것이었다. 론에게 처음이라는 경험은, 부모님께 특별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미 형들이 다 했을 테니까. 체스는, 그런 론을 다른 형제와 다르게 만들어 주는 특별한 것이었고, 그리고 그 특별한 것을 함께한 그 체스세트는 론에게 중요했다. 그리고 그게 깨어졌다. 망가졌다. 흩어졌다.

멍하게 꿰어진 줄을 바라보다가, 지니가 고개를 들어 나머지 다 꿰어진 조각들을 들어 올리며 론을 향해 미소 지었다. 지니는 특별했다. 7남매 중 유일한 여자아이, 게다가 막내. 원하는 것, 뭐든지 쉽게 가질 수 있었다. 론은 평범했다. 7남매 중 마지막 아들, 첫째로 태어나거나, 재능 있거나, 똑똑하거나, 재미있거나…, 어느것 하나 그에게 해당되지 않았다. 그는 원하는 것을 가지기 위해 항상 최선을 다해야 했다. 론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들고있던 줄을 바닥에 내려 놓고 천천히 지니의 얼굴과 마주했다. 그렇게 웃는 지니의 얼굴을 얼마나 바라봤을까, 론의 바닷물이 흘렀다.

“찰싹”

한 순간에 사라진 지니의 미소, 론의 행동에 놀란 듯, 빨갛게 물드는 뺨에 손을 가져가 올리며 론을 보았다. 론의 뺨을 타고 흐른 굵은 눈물이 턱을 타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론의 표정은 알기 힘들었다. 참지 못할 만큼 화가 나보였지만,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 벌써 후회한다는 눈물이 지니를 더 혼란스럽게 했다. 어린 지니가 이해하기엔 너무 많은 감정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아니, 특별한 지니가 이해하기엔 평범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하는 론을 지니는 이해 할 수 없다.

작지만, 살이 맞닿는 소리에 허겁지겁 거실로 발걸음을 돌린 몰리와 퍼시의 눈에 바닥에 앉아 있는 두 명의 빨간 머리 아이가 보였다. 소녀는 뺨에 손을 댄 채로 얼어 버린 듯 앞에 있는 소년을 바라보았고, 소년은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 할 수 없는지 훌쩍이고 있었다. 거실로 막 들어선 두 사람은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몰리가 바닥에 주저 앉은 아이들에게 다가가기 전에 론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 계단을 서둘러 올라갔다. 계단 위를 울리던 발소리가 방문이 열렸다 닫히는 ‘달칵’ 소리와 함께 온 집안에 정적이 흘렀다.

몰리는 그제야 지니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붉게 물든 뺨. 몰리는 놀라서 지니를 안아 올리며 말했다.

“무슨 일이니? 지니? 론이…?”

몰리의 목소리에 참았던 숨을 돌리며 지니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무언가 대답을 하려고 했지만 곧 울음소리에 묻혔다. 몰리는 지니가 꿰어놓은 조각들과 잔뜩 긁혀 더 이상 쓸 수 없게 되어버린 낡고 작은 어린이용 체스세트를 바라보았다.

밖에서 있던 이야기를 아서로부터 전해들은 몰리는, 쌍둥이들을 야단쳤다. 아이들을 야단칠 때 아서는 항상 아이들의 편이 되어주려고 했지만, 이번 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쌍둥이가 잘못 했다. 몰리와 아서는 놀랐다. 론은 단 한번도 먼저 누군가를 때리거나 괴롭히는 아이가 아니 였는데, 갑자기 밀려드는 아들과의 거리감에 두 사람은 두려워 졌다. 혹시 그들이 론에 대해 잘 모르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론의 행동에 놀란 건 아서와 몰리 뿐이 아니었다. 빌과 찰리, 프레드 조지 역시 놀랐다. 론은 평범한 아이였다. 사실 가족 중에 가장 있는 듯 없는 듯 한 아이였다. 먼저 다가와 돕고, 양보할 줄 아는 착한 아이였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었나 보다.

그렇게 방 안에 론을 가둔지 딱 하루 만에 지니가 론의 방문 앞에 섰다. 아서와 몰리는 지니를 바라보며 쓴 미소를 지어 줬다. 지니 역시 웃어 보이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몰리는 지팡이를 들어 걸어 잠긴 문을 열었다. 침대 옆 바닥에 굽힌 다리를 가슴쪽으로 바짝 끌어 당겨 쪼그리고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론의 머리가 열린 문소리에 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미 얼굴에 울음이 가득한 지니가 긴장한 모습으로 문 앞에 서 있었고, 그 뒤에 몰리와 아서가 서있었다.

지니는 천천히 발걸음을 론에게로 향했다. 론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론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참고 있던 눈물을 터트렸다. 있는 힘껏 큰소리로 울던 지니가 헐떡이며 숨을 고르더니, 힘들게 입을 열었다. “오빠, 내가 미안해.” 그리고는 다시 얼굴을 론의 어깨에 묻으며 울기 시작했다. 지니의 팔이 론의 어깨에 둘러 졌을 때, 이미 론의 눈에는 눈물이 잔뜩 고여 있었다. 지니의 알아듣기 힘든 하지만 론에게 가장 필요했던 그 말이 론의 감정을 다시 휘저었다. “아니, 내가 미안.” 무릎을 감싸고 있던 손을 들어 작은 동생의 몸에 휘두르고 같이 엉엉 울기 시작했다.

몰리와 아서가 부둥켜 앉아 우는 아이들에게 닿았을 때, 눈물에, 감정에 잠긴 론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그들은 후회했다.

“잘못했어요.”

론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그 방에 있던 사람은 모두 들을 수 있었다. 그의 작은 목소리에 가장 먼저 귀 기울였던 적이 있었던가, 몰리와 아서는 후회했다. 그리고 다짐했다. 그 다짐이 얼마나 갈지는 자신 없었지만, 그들은 다짐했다.

Presence

손이 젖는다. 손이 핏물에 젖는다. 그가 차가운 바닥으로 쓰러진다. 새하얗게 질려버린 창백한 얼굴, 희미한 불빛아래 더 밝은 머리카락. 말포이.

드레이코 말포이.

의식 없이 축 늘어진 몸을 끌어 당겨 안았다. 몸을 낮추고 주변을 살핀다. 바람소리, 수풀이 스치는 소리, 화염이 타는 소리, 사람들의 비명소리.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 사람이 있다. 살갗을 파고드는 명백한 인기척, 자신감에 가득찬 그 인기척에 몸을 더 움츠렸다. 들고있던 지팡이를 굳게 쥐고, 눈을 감으며 온전히 청각에만 집중했다. 누군가의 발이 차가운 진흙바닥에 닿아 만들어내는 철벅거리는 소리가 충분히 가까워 졌을 때, 론은 쥐고있던 지팡이를 더욱 세게 움켜쥔 뒤, 그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소리쳤다.

“스투페파이!”

주문이 그 사람에 닿기 전에, 론은 쓰러진 말포이를 어깨에 들어 메고 달리기 시작했다. 뒤쪽에서 들리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아니 알고 있지만, 알고 싶지 않은 저주들이 계속해서 외쳐졌고, 그 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론은 쉬지 않고 달렸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을 때까지 달렸다.

주변은 어느새 어두워졌다. 희미하게 보이던 화염의 꼬리도, 갈대도 없었다. 높게 솟은 나무들 사이로 가끔 비추는 달빛뿐이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려놓은 정신을 잃은 그 사람을 보았다. 죽은 사람처럼 아무런 표정이 없는, 고요하고 적막한 이 숲과 기분 나쁘게 잘 어울리는 말포이. 거칠게 몰아 쉬어지는 내 숨소리 이외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가슴을 뚫고 나올듯한 빠른 심장박동이 천천히 원래의 속도를 찾고, 숨을 고르고 나자, 천천히 뛰는 나의 심장소리사이로 말포이의 빠른 심장소리가 들렸다.

말포이를 들쳐 맸던 어깨가 젖었다. 손끝에 묻어나는 붉은 갈색 핏물. 적갈색 피.

나 말고, 다른 사람이 내는 오직 단 하나의 소리. 일정한 간격으로 빠르게 뛰는 심장소리. 몸을 옮겨 말포이쪽으로 다가갔다. 망토를 벗겨냈다. 피에 젖은 망토가 찰박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가 입고있는 검은색 로브 역시, 검은색이 아니었으면 온통 적갈색이겠지. 겉옷을 조심스럽게 벗겨냈다. 손에 꽉 쥐어진 지팡이를 빼내어 뒷주머니에 넣었다. 벗겨내진 로브 안에 상처를 입은 왼쪽 어깨부터 퍼진 핏물이 가슴쪽까지 번져 흰색 셔츠를 물들이고 있었다. 셔츠를 상처부위에서 떼어내고, 있는 힘껏 상처부위를 압박했다. 무거운 숨이 말포이의 입을 빠져 나오고, 말포이의 온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누워있는 말포이 위로 몸을 옮기며, 그가 움직이지 않게 고정하고 상처부위를 압박했다. 지팡이를 들어 간단한 응급처치 주문과 혈액생성을 촉진하는 주문을 외웠다.

계속해서 떨리는 그의 몸을 고정하기 위해 한동안 그렇게 말포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손을 떼며 상처를 보았다. 상처가 치료되기 시작했고, 그의 떨림도 덜해졌다. 셔츠 사이로 들어 난 그는 야위었다. 말랐다. 상처를 떠난 론의 손이 천천히 말포이의 가슴쪽으로 움직였다. 천천히 위아래로 움직이는 살아있는, 숨쉬고 있는 그의 가슴아래로 튀어나온 갈비뼈가 느껴졌다. 얇은 셔츠 위로 느껴지는 그의 메마른 몸. 차가운 몸.

그가 숨을 쉬고 있다는 것, 살아 있다는 것. 너무나도 분명하고 확실한데, 나는 왜 자꾸 확인하고 싶은 걸까? 천천히 고개를 숙여 그의 가슴에 귀를 가져갔다. 일정한 간격으로 빠르게 뛰는 심장소리. 고요한 이 숲에, 들리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만들어 내는 너의 심장소리. 몸을 더 가까이 가져간다. 심장소리, 다른 사람이 내는 심장소리, 살아있는 사람의 심장소리, 아무리 당겨 안아도 희미한 너의 심장소리. 더 강하게, 더 힘차게 뛰어봐.

바닥에 쓰러진 말포이의 몸을 붙잡고 얼마나 있었을까, 따뜻해진 말포이의 온기에 모든 상황이 갑자기 현실을 채웠다. 몸을 돌려 말포이 옆에 누웠다. 차갑게 불어오는 바람에 숲이 진동한다. 나뭇잎이 스쳐서 만들어내는 날이 선 거친 소리가 우리의 심장소리를 덮는다. 말포이와 나의 심장소리를 덮는다.

언제쯤 끝이 날까. 거울 속에 알 수 없는 푸른 눈동자의 무표정한 빨간 머리 남자가 나를 마주한다. 거울 속에 이 남자는 누구일까?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 너무나도 간단한 이 규칙, 쉽고 간단한데 나는 이해하고 싶지 않다. 망설인다. 어쩌면 이해 했는지도 모른다. 혼란스럽다. 모든 상황은 너무나도 확실해서 혼란스러울 수 없는데, 감정은 그 혼란을 넘지 못한다.

무뎌진다. 감정에 무뎌진다. 누군가의 죽음이 더 이상 예전만큼 슬프지 않다. 사람들은 모두 그를 잊는다. 쉽게 잊는다. 그 누군가가 왜 죽었는지, 어떻게 죽었는지 잊혀진다. 그 사실을 아는 모든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 한다. 살아 있지 않으면 의미가 없으니까. 죽어간 이름없는 수많은 사람들 중 한 사람이 될 테니까. 살아 남기 위해 감정에 무뎌진다.

거울 속의 남자의 손이 주근깨 가득한 가슴위로 옮겨지고, 심장이 있는 부근에서 손바닥을 댄다. 손바닥 사이로 느껴지는 심장소리. 눈을 감고 그 소리에 집중한다. 살아 있다. 살아 남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거울 앞에 서있는 감정 없는 푸른 눈동자를 만난다. 낮선 눈동자를 만난다.

Jealousy

기숙사 문을 차고 들어오며 얼굴부터 침대에 묻어버린 론의 주먹이 침대 위를 두드렸다. 화를 참지 못하겠다는 듯, 으르렁 거리는 소리를 내며 침대시트에 그 소리가 덜어진 신음을 뱉어냈다. 무엇에 대한 분노일까? 그는 특별하지 않았다. 오히려 평범했다.

가족 중에 첫째로 태어나거나, 재능 있거나, 똑똑하거나, 재미있거나, 혹은 제일 막내이거나. 그 어느것 하나 그에게 해당되는 것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는 그냥 또 한명의 빨간머리, 위즐리.

특별히 선택 받거나, 남들과 다르게 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살아남은 소년, 죽음의 저주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소년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된 다는 것은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흥미로웠다. 가끔은 위험하고, 가끔은 두렵기도 했지만 론이 그 소년과 함께 하는 일은 가족 중 누구 하나 경험해 본적 없는 일이었으며, 그래서 론을 특별하게 만들어 주는 단 한가지의 이유였다. 사람들의 관심은 그 소년과 함께 론에게도 나누어졌다. 남들이 모르는 비밀을 그 소년과 공유한다는 것은 그가 다른 사람과 다르다고 느끼게 해주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불의 잔에서 해리포터의 이름이 호명되었을 때, 해리포터의 초록색 눈동자는 덤블도어를 향해있었다. 헤르미온느의 손에 밀쳐져 불의 잔쪽으로 걸어가는 그의 발걸음은 주저하며 망설였다. 선택된 사람. 특별한 사람. 살아남은 소년. 연회장 안이 웅성거림으로 가득 찼다. 그리고 누군가가 소년을 향해 속임수를 썼다고 소리쳤다. 누군가는 그에게 자격이 없다며 욕설을 퍼부었다. 하지만 대다수는 그라서, 그이기 때문에 수긍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더 화가 나는 것 같았다. 쏟아지는 관심의 중심에 항상 서있는 그는 특별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런 특별한 사람의 가장 친구라고 생각했던 론은 그 순간부터 평범해졌다. 그저 또한 명의 빨간머리, 위즐리.

침대 옆에 난 작은 창가 옆에 잠옷으로 갈아입은 론이 어두워진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머리를 채우는 흐릿한 생각을 선명하게 하고 싶었지만,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캄캄해진 밤하늘에 조각구름 몇 개, 그리고 달. 달 옆에 뜨는 별은 아무리 밝아도 달을 이길 수 없다. 특별한 소년의 옆에 있는 그 역시, 특별한 소년을 이길 수 없다. 아무리 밝아도 아무도 몰라줄 테지, 아무리 밝아도 그 별만 바라봐 주는 사람은 없겠지.

해리가 기숙사 방안으로 바쁘게 들어왔다. 빠르게 잠옷으로 갈아 입고는 침대위로 뛰어 들었다. 신경질 적으로 머리를 쓸어 내렸다. 그의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번개모양의 상처가 오늘따라 더 붉고 깊어보였다.

론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침대로 향했다. 머리를 맴돌던 생각들이 희미해지다 못해 산산이 흩어지는 듯 했다. 두 눈을 한번 꽉 감았다가 다시 뜨며, 해리를 쳐다보았다.

“어떻게 한 거야?” 생각이 말이 되어 뱉어졌다. 론은 아직도 그가 그 소년에게 특별하다고 믿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그에게 만큼은 뭔가 말해 줄 것이라고 믿었는지도 모르겠다. 해리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침대에 천천히 앉았다. 해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론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얼굴 위로 이불을 뒤집어 쓰며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는 다시 이불을 아래로 내리며 론을 쳐다봤다.

“출전자 대기실부터 그리핀도르 기숙사까지 올라오면서 사람들이 내내 그 질문만 해댔어. 너도 정말 내가 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내가 한 게 아니야! 대체 내가 왜 그런 짓을 하겠어?”

흩어졌던 생각이 다시 하나로 모여 점점 선명해 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의도했던 선명함이 아니었다. 점점 얼룩지고 더러운 생각이 머리 안쪽에 차고 흘러 넘쳐 론의 입 밖으로 흘러 나왔다. “그래, 그렇겠지. 네가 한 게 아니겠지.”

론의 대답에 해리는 이불을 걷어차고는 론의 앞에 섰다.

“론! 내가 왜 이런 짓을 하겠어?” 화가 난 해리의 목소리에 론은 방금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해리를 믿어야 된다는 것, 그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지만, 얼룩진 선명함이 그의 감정을 찌르고 있었다. “내가 알았으면 물었겠어?” 해리의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보며, 이미 말해진 진실을 거짓으로 치부하고 자신이 듣고 싶어 하는,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원했다.

“내가 한 게 아니야! 애초에 원하지도 않았어!”

“그럼, 그만 둬!” 론은 스스로의 목소리에 움찔했다.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큰 소리가 되어 입 밖을 떠난 그 말들이 기숙사에 있던 다른 사람들의 시선까지 샀다. 론의 말에 대답을 망설이는 해리의 모습에 그의 감정이 얼룩졌다. “위대한 해리 포터. 살아남은 소년…”

“닥쳐.”

론의 말은 해리의 목소리에 끝마쳐지지 못하고 입안에 머물렀다. 몸을 거칠게 돌아선 해리는 ‘털썩’ 소리와 함께 침대 위로 떨어졌다. 그리고는 침대 주변에 커튼을 쳤다. 론은 방금 전에 그의 입 밖을 떠난 그 말들을 벌써 후회하고 있었다. 더 이야기 하고 싶었지만, 살아남은 소년은 그렇지 않은 듯 했다. 그의 행동에 후회가 분노로 바뀌었다. 양 옆에 힘없이 축 늘어져 있던 손에 힘을 주어 주먹을 쥐고 침대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고 휴게실로 향했다.

휴게실 안에는 아직 몇몇의 사람들이 서로 모여 곧 벌어질 트리위자드 경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프레드와 조지가 벽난로 바로 앞에 앉아 사람들에게 내기를 권하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봤지만, 제일 따뜻한 벽난로 앞은 제일 붐볐다. 멀지 않은 곳에 안락의자에 몸을 던지며 쌍둥이가 있는 쪽을 보았다. 프레드의 시선이 론으로 향했다.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 론이 앉은 안락의자의 팔걸이에 몸을 기대며 론에게 물었다.

“베이비로니, 여기서 뭐 하는 겐가?”

“제발 그렇게 부르지 좀 마!”

론의 시큰둥한 반응에 프레드는 론의 얼굴을 한번 살피더니 몸을 숙여 론의 귓가에 속삭였다. “어떻게 한 거래?” 그의 질문에 눈살을 찌푸리며 시선을 조지 쪽으로 옮겼다. 분명히 프레드가 뭘 물어봤을지 아는듯한 표정으로 론에게 대답을 재촉하는 손짓을 보냈다. 무슨 뜻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해리포터의 가장 친한 친구이기 때문에 쌍둥이는 그가 분명히 알고 있을 거라는 생각했을 테고, 그 사실이 론을 더 화나게 만들었다.

“내가 어떻게 알아!” 론의 짜증 섞인 대답에 프레드의 시선이 조지를 향했다.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이 사라지고 놀라는 듯한 표정 이었다. “뭐야? 해리가 너한테 말 안 해줬어?” 프레드의 말이 론의 마음을 베어냈다. 얼굴을 손에 묻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가슴속에 있던 무언가가 아래로 뚝 떨어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 무언가가 있던 자리가 얼룩진 감정으로 채워졌다.


자신에게 화가 났다.

왜 특별하게 태어나지 않았을까?

첫째이거나, 가장 똑똑하거나, 가장 능력 있거나, 가장 재미있거나, 아니면 막내이거나.

그냥 또 한명의 위즐리. 그리고 지금은 살아남은 소년의 그림자.

천천히 성밖을 걸어 나오며, 론은 생각했다. 처음 해리를 만났을 때, 그는 그와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다른 친구들과 같이 평범한 친구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언제부터 론의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한 걸까. 언제부터 해리와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을까. 다른 친구들이 모르는 비밀을 함께 공유하고 모험하는 동안 어쩌면 론은 처음에 먹었던 마음과 다르게 해리에게 특별해지고 싶었던 것은 아닐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했다. 아니면 특별했다고 생각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얼마나 걸었을까, 검은 호수 근처에 다다라서야 성과 꽤 멀어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론은 급히 성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마치 성안이 텅 비어버린 것 같은 고요함. 모두들 트리위저드 경기를 보기위해 성안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얼마쯤 걸었을까, 연회장쪽 복도 끝에 다 닿았을 때, 지하로 가는 길목쪽에서 사람이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Mais, Père!
“하지만, 아버지!”

Faire taire. Ce que vous dites est absurde. Il n'a pas été….
“다물어. 말도 안 되는 소리 마라. 그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들은 분명히 프랑스어로 대화하고 있었다. 조금 낯익은 목소리였지만, 프랑스어의 부드러운 발음에 어울리지 않는 성난 목소리가 구분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다. 좀더 가까이 다가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듣고 싶어서 몸을 앞쪽으로 기울이다 중심을 잃고 넘어졌다. 그렇게 큰 소리는 아니었지만, 주변이 워낙 조용해서 인지 평소보다 훨씬 크게 느껴지는 론의 발자국 소리에 경기가 벌어지고 있는 곳에서 나는 희미한 소리와 무거운 침묵이 주변을 감쌌다.

Nous n'aurons pas de conversation avec ce sujet à nouveau. À plus tard.
“더 이상 이 이야기는 너와 논의할 일이 아니다. 그럼.”

굵은 남자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속삭이더니 발자국 소리와 함께 점점 멀어졌다.

벽에 기대서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이 회랑을 떠나기를 기다렸다. 갑자기 터져 나온 환호성에 경기가 열리는 쪽을 한번 힐끔 보고는 론은 발길을 돌렸다. 딱히 갈만한 곳도 없었다. 혼자 있을 만한 곳을 찾고 싶을 뿐이었다.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다. 지금 론이 화가 난 대상이 해리인지, 아니면 자기 스스로 인지를 알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누군가가 대신 대답해주기를 바랬다. 바닥을 보며 머리를 힘차게 한번 흔들었다. 그렇게 하면 생각이 정리 될 것 같았다. 코너를 돌아 아까 목소리가 들려왔던 회랑을 바라보았다. 금발에 검은 옷을 입고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간 누군가가 등을 지고 서 있었다.

그가 지금 보고 있는 쪽이, 대화를 했던 다른 사람이 나가는 쪽이었을까. 이미 그 사람은 복도를 떠나 텅 비어있는, 그가 지났을 길을 향해 그렇게 서 있었다. 마치 계속 그렇게 쳐다보고 있으면 다시 그 사람이 돌아 왔으면 좋겠다는 듯이, 한껏 긴장되어 있던 어깨가 아래쪽으로 축 쳐지면서 그의 고개가 떨구어졌다. 다가가면 깨 질 것 같은 그의 형체, 나지막한 목소리, 충분히 누군지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내가 서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내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Merde, merde. Merde!! Toujours que, Potter!
“젠장, 젠장. 젠장!! 항상 포터만!”

말포이.

드레이코 말포이.

그의 손이 그의 머리를 감쌌고 살짝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평소 같았으면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았을 론이지만, 오늘은, 오늘 론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해리와 함께 했던 지는 4년, 가족보다 더 신뢰하고, 형제보다 더 사랑했는데,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론에게만은 모든 일을 털어 놓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렇지 않았다. 선택 받은 특별한 사람의 특별한 친구이고 싶었다. 그것 말고는 론이 특별해 질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었으니까. 그래서 더욱 진심을 다 했다. 해리에게 만큼은 특별해 지고 싶어서. 그런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론이 느끼는 이런 배신감, 그리고 서운함. 말포이는 이해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천천히 회랑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말포이가 뒤로 돌았다. 그의 눈이 붉게 변해 있었지만, 론은 무시하기로 결정했다. 묽은 회색, 오늘 날씨처럼 금방이라도 비를 쏟아 낼 것 같은 회색. 언제나 무감각하던 네 눈동자. 네게도 감정이 있긴 하구나. 항상 화난 눈이었는데. 오늘은 슬퍼보여.

“위즐리.”

그의 목소리에 론은 가던 길을 멈추고 말포이를 돌아봤다.

“말포이.”

무엇인가 말을 꺼내려다 다시 혀끝에서 삼키고 그는 내가 걸어가고 있던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회랑 끝에 그의 그림자가 머물다 사라질 때까지 말포이가 간 길을 멍하니 보고 서 있었다. 론은 슬퍼했던 걸까? 해리가 나에게 말해주지 않아서? 아니, 단지 질투 했던 것 뿐이다. 내가 선택 받거나 특별하지 않다는 사실에 내 스스로에게 화가 나서 해리를 질투 했던 것 뿐이었다. 그리고 그 화풀이를 해리에게 했다. 모두 론의 잘못 이었다. 론은 첫번째 경기가 끝나면 해리에게 사과를 하겠다고 마음을 먹고 그리핀도르 탑으로 향했다.

그리고 말포이가 복도에서 했던 대화를 생각했다. 그가 대화를 나누고 있던 상대방에게 ‘아버지’라고 했다. 루시우스. 루시우스가 이번 일에 개입 된 것이라면 해리가 트리위저드 경기에 나가게 된 것은 어쩌면, 정말 해리가 말 한대로, 해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질투에 눈이 멀어 진실을 외면한 자신의 현재상황에 코웃음이 쳐졌다. 어서 빨리 경기가 끝나서 불편한 이 상황을 끝내고 싶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그냥 친구가 되자고. 특별한 친구가 아닌 그냥 친구. 언제든지 옆에 서 있어 줄 수 있는 그냥 친구.

언젠가 론 스스로가 온전히 혼자만의 힘으로 누군가에게 특별해지는 날이 올 거라고 희망하면서.

Masquerade

칠 흙같이 어두운 벌판. 바람에 흩어지는 갈대들. 스치는 갈대 소리에 묻혀 진흙에 묻혀 둔탁해지는 발소리들. 이내 누군가의 악마의 화염으로 벌판은 이곳 저곳이 붉게 물들며 환해졌다. 여기저기서 용서 받지 못할 저주들이 쏟아졌고, 누가 적인지 누가 아군인지 분간하지 못한 채 그 안에 갇힌 사람들은 하나 둘씩 그 화염의 열기에 미쳐가는 듯 했다.

그레이 백의 거친 포효가 벌판을 울리고, 고통의 비명과 신음소리가 들려 왔다. 하지만 여전이 바람이 만들어 내는 갈대들의 스치는 소리에, 화염이 수풀을 먹어치우는 소리에, 그 누구의 위치도 정확히 할 수 없었다. 어느 순간 자기의 무리와 떨어진 드레이코는 정신없이 화염의 반대방향으로 달리고 있었다. 그 곳이 어느 쪽인지 볼 여유 조차 없었다. 뒤 쪽에서 들리는 언젠가 한번쯤 들었을 법한 익숙한 목소리의 날카로운 비명소리도 바람소리와 갈대가 만들어내는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는다고 스스로에게 계속해서 되뇌며 어서 빨리 그 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갈대 숲을 헤치고 있었다.


“드레이코! 네가 하지 않으면, 네가 당하게 될 거야.”

날카로운 목소리에 드레이코의 지팡이를 쥐고 있는 손이 주체할 수 없이 떨렸다. 떨리는 지팡이를 양손으로 부여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죽음의 저주를 외쳤다. 그의 앞에서 삶을 구걸하던 방금 전까지 살아있던 이름 모를 그 누군가가 드레이코의 손에 차가운 바닥에 너부러졌다.

뒤쪽에서 망설이는 드레이코에게 야유 하던 죽음을 먹는 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일어났고, 그녀의 차가운 눈초리에 주변이 조용해졌다. 벨라트릭스는 천천히 드레이코에게 다가와 어린아이에게 칭찬 하듯이 드레이코의 뺨을 살짝 두드리며 미소를 지었다. 미소를 짖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던 드레이코는 이내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 달리기 시작했다. 뒤쪽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다른 죽음을 먹는 자들의 비웃음 소리가 귓가에 들리지 않을 때까지, 숨이 목구멍까지 차올라 더 이상 숨쉬기가 힘들어 질 때까지 온 힘을 다해 달렸다.

오늘 그의 손에 죽은 그 사람은 누구 였을까. 그가 죽었다는 사실을 그 가족은 알까. 그가 누구의 편이 였을까.

힘 풀려버린 다리에 아무렇게나 주저 않은 채로, 살기 위해 숨을 쉬기 위해 헛기침을 하며 숨을 고르는 드레이코의 머리 속에 방금 자기가 죽인 사람의 절망적인 표정을 생각했다.

‘이대로 숨쉬지 않으면 죽을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하면서 본능적으로 숨을 고르기 위해 헛기침을 하는 자신의 모습에 역겹다는 듯이 비웃기 시작했다. 한참동안 그 자리에 앉아 헐떡대며 자신을 비웃었던 그의 웃음소리가 울부짖음이 되었다. 꽉 쥐어진 주먹으로 땅을 치며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때까지 소리를 질러대며 그렇게 울었다.

누구에 대한 분노일까. 누구의 잘못일까.

전투는 런던을 비롯한 영국 각지에서 벌어졌다. 주문을 막아준다는 말도 안 되는 물건들이 암시장에서 거래 되었고, 한때 그 누구도 그 아름다움과 웅장함에 대해 의심 같지 않았을 말포이 저택은 죽음을 먹는 자들의 의해 점점 빛을 바래갔고, 지하 던전에서 들려오는 비명에 잠을 잘 수 없었다. 그렇게 드레이코가 집이라고 여겼던, 평생을 살았던 말포이 저택은 더 이상 있고싶지 않은 끔찍한 곳으로 변해갔다.

저택 서쪽의 가족 도서관 안에 자신을 가둔 채로 삶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죽음을 먹는 자 그 누구도 드레이코를 찾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에게 이미 말포이라는 이름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저 다크로드. 다크로드가 그들에게 줄 명예와 영원한 삶, 오직 그것만이 그들의 관심사였다. 어째서 의심하지 않을까. 다크로드가 승리를 거머쥐고 세상의 꼭대기에 섰을 때, 그가 약속했던 것들을 줄 것이라는 믿음에 왜 의심하지 않을까. 창 문턱에 자신의 몸을 기대며 바깥쪽 하늘을 쳐다봤다. 먹구름에 어두워진 하늘 사이로 중간중간 밝은 하늘이 보였다. 하지만 햇살이 뚫기에는 너무 두꺼웠을까, 다시 두터운 구름들 사이로 사라진다.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떨구며 손을 보았다. 살짝 드러난 손목 끝으로 뱀의 머리 끝이 보였다. 소매를 걷어 죽음을 먹는 자들의 표식을 보았다. 살갗 위에 새겨진 해골과 뱀의 눈이 자신을 감시하는 것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두려웠다. 잃을 까봐 두려웠다. 드레이코는 자신의 선택에 부모님이나 그 어떤 것도 개입하지 못할 것이라고 자신했었다. 그런 그가 부모님께 사랑한다는 말에 단 한번도 마음을 담지 않았던 그가, 그들의 자신에 대한 사랑에 대한 의심과 증오로 절대 개의치 않으리라고 자신했던 그가, 그들을 잃을까 봐 두려웠다. 그에게 남은 건 그들 뿐이었다. 그가 자랑스러워 했던 집안의 명예, 다크로드의 존재와 함께 산산이 흩어졌다. 그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이제 더 이상 의미 없어진 죽음을 먹는 자들의 표식과 매일 밤 소리 없는 눈물로 밤을 지새우는 드레이코 말고는 아무도 들어주지 않을 앞으로 오지 않을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현실을 더욱 참을 수 없게 만드는 그의 어머니.

“루시우스가 돌아오면 글래드래그스에 가서 멋진 옷을 맞출 거란다, 너희 아버지는 나에게 항상 금색이 잘 어울린다고 하셨어. 내가 좋아하는 색은 연보라 색이긴 하지만 그래도 난 그가 나에게 어울린다고 했던 색을 입는 게 더 좋단다. 그리고 파티를 하는 거야. 너도 알다시피 외가의 친척 중 대다수는 영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 살고 있으니, 초청을 하면 모두들 즐겁게 올 거야. 아니, 우리가 그곳으로 가도 좋을 거야. 한동안 너무 영국 안에만 있었던 것 같구나. 네가 어릴 적에 프랑스에 있는 바닷가 근처 별장에서 여름을 보내는걸 정말 좋아했는데, 혹시 기억하고 있니?….”

“드레이코! 다크로드께서 집안에 필요 없는 물건들이 너무 많다고 하시니, 창고 안으로 좀 치웠으면 좋겠구나.”

아버지가 일하시던 서재, 아버지가 좋아하시던 안락의자. 어머니가 시간을 보내시던 남쪽 선룸의 테이블, 어머니가 좋아하시던 연회실의 피아노. 현관 홀의 샹들리에는 빛을 잃었고, 짜증날 만큼 적막했던 회랑에 울려 퍼지는 비웃음과 찢어질 듯한 쾌락의 웃음소리, 그리고 삶을 구걸하는 자들의 우는 소리. 삶을 위해 인간이기를 포기한 자들의 신음소리.

“너도 네 아버지처럼 망설이고 질질 끌다간 똑 같은 꼴을 면치 못할걸? 킬킬.”

접대실 맨 끝 중앙에 앉은 다크로드. 그리고 그 오른쪽 4번째 의자에 앉아있는 나.

그리고, 시작된 죽음을 먹는 자들을 위한 가면무도회.

하나 둘 들고있던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다. 자신을 숨기지 않고서는 온전히 미칠 수 없으니까. 이렇게 우리들의 축제가 시작된다.


한참쯤 뒤 돌아 보지 않고 달렸을까, 사람이 만들어 내는 소리가 희미해졌다. 잠깐 무거운 숨을 몰아 쉬며 숨을 고르고 주변을 살펴 봤다. 그리고 이내 뒤쪽에서 자신이 아닌, 혹은 바람이나 화염이 아닌 그 무언가가 움직여 갈대를 스치는 소리에 자신의 몸을 낮췄다. 몰아 쉬던 숨을 잡아두고, 지팡이를 꽉 쥐었다. 지팡이를 겨누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막 주문을 외우려던 순간.

저 멀리 서 바랜 불빛에 드레이코가 알고 있었던 색과 조금 다른 붉은색 머리카락의 남자가, 갑작스러운 드레이코의 존재에 놀란 듯 바쁜 발걸음을 급하게 멈춰 섰다. 만약 드레이코의 앞에 서있던 남자가 망설이지 않았다면, 혹은 붉은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드레이코는 용서 받지 못할 주문을 사용하는데, 주저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윽고 누군가의 지팡이 끝에서 붉은 색 불꽃 만들어 졌고, 곧 드레이코의 어깨에 맞았다. 어깨를 파고 드는 고통, 목을 벗어나려는 신음을 볼 안쪽의 살을 씹으며 삼키고, 붉은 머리의 어깨를 잡아당겨 몸을 낮췄다. 뒤쪽에서 가면을 쓴 사람 하나가 지팡이를 앞으로 드리우며 계속 가까워 졌다. 드레이코는 지팡이를 잡고 있던 손을 바꿔 다가오는 그 사람에게 죽음의 저주를 쏘았고, 가면 속에 숨겨진 그의 눈빛은 저주가 그의 심장을 관통할 때 조차 알 수 없는 광기가 빛을 바랐다.

차가운 진흙바닥에 철벅거리는 소리와 함께 영혼을 잃은 살덩이가 내 동그라졌다.

붉은 머리는 둔탁하게 바닥에 닿는 소리와 함께 나의 움켜쥠을 뿌리쳤다, 그리고 자신의 지팡이를 더욱 세게 붙들었다. 그리고 나의 눈을 바라보았다.

론.

론 위즐리.

제발 다시는 만나지 않게 해달라고 빌었는데, 내 선택에 후회하지 않도록, 제발.. 제발 다시는 만나지 않게 해 달라고 빌었는데…. 널 다시 보면, 지금까지 붙잡고 있던 이 모든 것을 그냥 놓아 버릴 것만 같아서, 주저하지 않을 같아서. 명예, 권력, 가족 이런 것들이 아무것도 아닌 게 될 것 같아서. 여기까지 끌고 온 나 자신을 놓아 버릴 것만 같아서….

그가 나사이의 간격이 조금씩 벌렸다. 적막함. 텅 빔. 공허함. 반경 몇 미터 안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은 오롯이 바람과 화염이 만들어 내는 소리가 허전함을 메우려는 듯 했다. 얼마나 그렇게 서로를 보고 있었을까, 이내 그의 손이 내 가면에 닿는다. 그제야 어깨의 통증이 파고든다. 항상 현실은 이렇게 아프지.

그의 손 끝에서 벗겨진 나의 가면이 바닥에 닿고, 그의 어둠에도 빛을 바라는 너의 푸른 눈동자가 혼란스러움이 요동 친다. 참아보려고 했지만, 참지 못한 내 고통은 곧 목소리가 되어 내 입술을 떠나고, 짧은 신음소리와 무거운 숨소리에 너의 시선은 내 어깨로 향한다. 검은색 망토에 가려진 보이지 않는 저주의 상처가 내 의식을 먹어 치우려고 한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 아일랜드 외곽으로 이동이 가능한 포트키를 손에 쥔다.

깊게 숨을 들이 마시고 너에게 마주선다. 주머니에서 포트키를 꺼내어 너에게 보인다.

Il s'agit de la Portoloin.
“포트키야.”

그는 그 자리에서 순간 얼었다. 무슨 뜻인지 의미를 찾으려는 듯. 너는 알아.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얼마나 더 버텨낼 수 있을까. 죽음을 먹는 자들의 본거지 까지 순간이동하기 위해선 마지막 남은 내 힘을 모두 모아야 하지만, 너를 여기에 남겨두고 갈 수는 없어.

Il vous mènera d'ici.
“여기서 벗어나게 해줄 거야.”

목적지에 대해 설명하려고 했지만, 포트키를 들고 있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얼어 있는 그의 손을 잡아당겨 손바닥 위에 올려 놓았다. 그리고 지팡이를 든 손을 옮기려는 순간 그의 손이 내 손목을 잡았다.

Vous avez été blessé.
“너 다쳤어.”

또렷한 너의 목소리, 그날, 드레이코가 너에게서 사라진 날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너는 분명히 나에게 실망하고 화내야 하는데, 한다는 말이 고작 이거라니. 위즐리답네. 어차피 너의 기억 속에 나는 그냥 말포이일 뿐이니까.

Nous n'avons pas le temps pour cette.
“이럴 시간 없어”

너의 손을 뿌리치며 다시 지팡이를 포트키로 가져간다.

나는 살 거야. 나는 살고 싶어. 내가 선택한 것들을 바로잡기 위해 살 거야. 후회를 하더라도 나는 살아 남을 거야. 살아 남아서 네 옆에 설 수는 없겠지만, 멀리 서라도 널 지켜볼 수 있게 난 살아 남을 거야. 살고 싶어. 네가 나를 용서하는 날이 오길 바라며 살 거야. 너를 보면서 살 거야.

급하게 드레이코가 지팡이를 든 손목을 잡으며 론의 다른 쪽 손이 드레이코의 저주가 맞은 어깨를 강하게 잡았다. 갑자기 시야가 어두워지며 온몸이 휘청거리는 것을 느낀 드레이코는 입술을 힘껏 물며 목소리가 입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무거운 숨소리를 뱉어냈다. 점점 흐려져가는 의식을 부여잡으며 있는 힘껏 목소리를 내려고 했지만, 속삭임으로 밖에 나오지 않는 목소리가 바람소리에 묻혔다.

Idiot! quoi pensez-vous!
“멍청이! 무슨 짓이야!”

그렇게 드레이코의 몸이 천천히 힘을 잃어갔다. 저주가 맞은쪽 어깨에서 흘러내린 피가 팔을 따라 손끝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마지막 까지 몸을 세우기 위해 붙잡고 있던 힘이 빠지면서 앞으로 쓰러졌다.

faux, Vous êtes un idiot.
“틀렸어, 네가 멍청이야.”

친숙하고 부드러운 론의 목소리가 드레이코의 귓가를 스치며, 드레이코는 의식을 잃었다.

Wonderland

사람들이 그에게 질문 했다.

"피고인 651980번, 당신은 ..날 ..시 ..분 경 ..에서 용서 받지 못하는 저주를 사용 했습니까?"

그는 우리와 똑같이 살고 싶었을 뿐인데, 어깨가 부서질것 같은 무거운 짐을 혼자 짊어지고, 어둠 속으로 잠길 수 밖에 없었을 뿐인데, 그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알고 싶어 하는 사람도 없다.

그가 했던 일이, 해야만 했던 일이 도마 위에 오르고 그 행동이 아닌 그가 도마 위에서 난도질 당한다. 그가 원했건 원치 않았건 그 죄는 나누어 지지 않고 온전히 그 혼자에게만 지워져 그를 짓누른다. 그의 어깨가 가라 앉는다.

나의 진술은 위선과 불신에 의해 침몰한다. 자기들의 더러운 얼룩을 감추기 위해 씻기지도 않을 것들 위에 또 다른 것을 덧입힌다. 전쟁 중에는 가장 쓸모 없었던, 가슴 제일 아래로 미어뒀던 기만과 가식이 신의와 정의라는 오류로 그들을 덮는다. 왜 그래야 했는지, 왜 그렇게 했는지, 아무도 그에게 묻지 않는다. 그는 전쟁 종범. 가면을 쓴 위선자들이 전가한 책임을 바보처럼 짊어지는 그를 나는 안다.

대체 뭐가 다른가? 지금 그들이 하는 일과, 죽음을 먹는 자들이 했던 일.

가족을 위해, 혹은 스스로를 위해 잘못된 선택을 했던 수많은 평범하고 보통의 사람들이 영웅 같은 굳은 의지와 용기를 발휘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처형된다. 그들은 영웅으로 태어 난 적이 없는데, 그냥 보통의 사람일 뿐인데. 어쩌면 그 영웅이라는 것도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던가?

알고 시작했던가, 전쟁이라는 것 어느 쪽이 옳고 그른지 알고 시작했던가. 몰랐을 뿐이다. 어떻게 파국을 맞이할지 몰랐을 뿐이다. 어느 쪽이 결국 나머지 한쪽을 밟고 일어 설지 몰랐을 뿐이다. 모두 함께 다 몰랐을 뿐이다.

심판 받는 자와 하는 자의 정의는 달라진 지 오래.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바로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을 의심하고 믿지 않는다.

의심하지 않고 믿으면, 그러지 않은 사람들의 화살이 나를 향해 쏟아진다. 두렵다. 내가 지금 신뢰하는 것들이 훗날 저들이 저지르는 일과 다르지 않다면, 나는 나를 어떻게 용서해야 할까?

이상한 나라. 모두들 행복한 가면을 쓰고 썩어 문드러져가는 추악한 죄와 감정을 숨긴다. 전쟁이 끝났다는 단순한 이유로, 그들을 가리고 있는 행복한 가면처럼 행복해질 수 있는 걸까?

몰라보게 수척해진 그, 깔끔하게 차려 입은 옷이 커보였다. 내가 지금 해줄 수 있는 것은 그를 향해 미소 지어 주는 것뿐. 근데 너무 힘이 든다. 얼굴을 찡그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힘이 든다. 그의 흐릿한 눈동자가 나와 만난다. 지쳐서 핏기가 선 그의 눈. 지금 나의 것도 그와 같겠지.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듯, 모든걸 뒤로하고 함께 달아나자는 듯, 흘러 넘치는 감정에 머리 끝까지 잠겨 죽을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본다. 그리고 지금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그를 향해 미소 지어 주는 것뿐.

그 마저 도 힘이 든다. 어렵다.

나와 그와의 거리, 짐짓 세 걸음 이내. 나와 그와의 감정, 이미 하나.

사람들의 시선에 나와 그, 보이지 않는다.

"피고인 651980번에게 디멘터와의 입맞춤을 선고하는 바입니다."

판사의 목소리가 법정 안을 채우고, 그의 잘못된 선택에 대한 대가는 그의 영혼이 되었다. 정숙하던 사람들이 하나 둘 자리를 일어나 이 곳을 떠난다. 죄인을 이송하는 사람들이 법정 안으로 들어온다. 그의 손에 고랑이 채워지고, 나는 앉아있던 자리를 박차고 너에게로 뛰어 든다.

있는 힘껏 너를 안는다. 네 얼굴이 내 가슴에 묻힌다. 이 온기, 이 감정, 너. 너. 온전히 너. 찰나 같은 이 시간을 영원히 얼리고 싶어.

사람들의 손이 나를 너에게서 떼어내고, 나는 그들을 뿌리치며 너에게 가려고 온 힘을 쏟는다. 너의 묶인 손이 내 손에 닿고, 내 손이 너의 손에 닿는다. 다른 사람에 의해 뿌리쳐진 그 손을 다시 잡기 위해 나는 최대한 내 손을 뻗어 보지만, 너는 이미 너무 멀다. 이게 내가 볼 수 있는 마지막, 영혼이 깃든 온전한 너. 눈 앞을 가리는 묽어 지는 시야, 눈물에 잠긴 너. 사람들의 손을 뿌리치며 계속해서 내 눈에 물기를 닦아 내려 하지만, 너는 이미 내 눈물에 잠겨있다. 흐릿한 너의 얼굴에 피는 작은 미소. 네가 주는 마지막 선물. 너무나도 선명해서 지워 낼 수 없을 것 같은 그가 점점 흐릿해진다.

앞으로 나는 살겠지. 영혼이 없는 네가 있는, 눈물에 잠긴 흐릿한 미소만이 너에 대한 마지막 추억이 된, 살고있지만 그렇지 않은...

네가 없는 이상한나라.

Quidditch

슬리데린 추격꾼이 던진 퀘이플이 파수꾼의 발에 맞고 튕겨져 나갔다. 관중석에 앉아있던 그리핀도르의 환호성이 커졌다. 론은 팔을 높이 들어 올리며, 자신의 선방을 과시했다. 그때, 슬리데린의 몰이꾼이 쳐낸 블러저가 아슬아슬하게 그리핀도르의 추격꾼을 스쳤다. 슬리데린팀의 거친 휘두름에 그리핀도르 선수가 퀘이플을 놓치자 아래쪽에 있던 슬리데린 수색꾼이 퀘이플을 잡아 같은 편에게 넘겨주었다. 그리핀도르의 파수꾼이 날아오는 퀘이플을 막으려고 빗자루를 움직이려고 할 때, 갑자기 하늘에서 무언가가 론을 향해 떨어졌다. 사람이었다. 추락하는 사람이 론의 빗자루를 스쳐 지나가려는 순간 론이 손을 뻗어 팔뚝을 잡았다.

“60 : 30, 슬리데린이 30점 앞서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리핀도르 파수꾼위로 슬리데린 수색꾼이 떨어졌는데요!”

중계를 하고 있던 사람의 커다란 목소리에 론은 정신을 차리고 떨어진 수색꾼을 빗자루 위로 끌어 당겼다. 정신을 잃은 듯 했다. 축 늘어진 몸을 가슴쪽으로 끌어당기며, 고개를 들어 경기상황을 봤다. 퀘이플은 그리핀도르 추격꾼의 손에 있었고, 다른 선수들은 모두 슬리데린 골문 앞으로 날아갔다. 자리를 바로잡고 추락한 사람의 상태를 살폈다. 그의 빗자루는 이미 운동장 아래로 떨어져 있었다. 론은 이대로 경기를 중단해야 할지, 아니면 계속 해야 될지 생각했다. 론의 가슴을 베고 늘어져 있는 사람을 앞으로 밀어내며 등을 두들겼다. 의식 없는 몸이 앞으로 기울어 다시 떨어지기 직전에 론이 망토를 붙잡아 다시 가슴쪽으로 끌어 당겼다. 그리고 이번엔 어깨를 잡고 세게 흔들었다.

“말포이!! 말포이!!”

어깨가 잠깐 들썩이더니, 말포이가 고개를 흔들었다. 마치 금방 잠에서 깨어 난 사람처럼 멍하게 주변을 살펴보고는 기댔던 몸을 곧게 세웠다. 그리고 빗자루를 움켜 쥐며 날아가려는 순간 뒤쪽에 묵직한 것이 느껴진 말포이는 뒤 쪽을 힐끔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고개를 완전히 돌려 어깨너머로 뒤에 있는 사람을 보았다. 빨간 머리가 잔뜩 짜증난 얼굴을 하고는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포이가 론에게 소리쳤다.

“내 빗자루에서 뭐 하는 거야?”

론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포이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30초쯤 그렇게 서로 쳐다보고 있다가, 론의 표정에 혼란스러운 말포이는 론을 떨어트리기 위해 팔꿈치로 론을 밀어냈다. 론이 말포이의 팔꿈치를 잡으며, 손가락을 들어 아래 운동장쪽에 떨어진 그의 빗자루를 가리켰다. 말포이의 시선이 론이 잡은 팔꿈치에서 반대편 손가락 그리고 운동장 바닥 모래에 떨어져 있는 빗자루로 움직였다. 아무리 좋은 빗자루도 하늘에서 주인 없이 떨어지면, 부서지기 마련, 거의 반 토막이 난 빗자루가 바닥에 너부러져 있었다. 론은 손을 흔들어 말포이의 시선을 산 다음 되 물었다.

“너야말로, 빗자루에서 뭐 하는 거야?”

론의 질문에 잠깐 만났던 말포이의 시선은 대답할 가치 없는 질문인냥 코웃음을 치고는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봤다. 대다수의 추격꾼과 몰이꾼은 퀘이플을 잡은 크리핀도르 골대 쪽에 모여있었고, 그리핀도르의 수색꾼인 해리가 론을 향해 날아오고있었다. 빠른 속도로 날아오는 해리를 발견한 말포이는 론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말포이의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몸을 약간 뒤로 젖힌 론이 말포이를 쳐다봤다. 말포이의 시선이 론을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도 전에, 말포이가 몸을 움직였다.

론의 머리 뒤에 작고 반짝이는 금빛 스니치가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말포이는 빗자루 위로 올라타며, 몸을 완전히 돌렸다. 론과 마주 앉은 말포이는 순식간에 둘 사이의 간격을 좁혔고, 말포이의 머리카락이 론의 뺨을 스치면서, 두 사람의 가슴이 맞닿았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깜짝 놀란 론은 그 상태로 얼었고, 말포이는 있는 힘껏 손을 뻗어 스니치를 손에 잡았다.

스니치를 손에 잡는 순간 중심을 잃은 말포이가 론의 목에 팔을 둘렀다. 그리고 흔들림을 감지한 론의 팔이 말포이의 허리를 감쌌다.

“슬리데린의 수색꾼이, 그리핀도르의 파수꾼 품에서 스니치를 잡았습니다! 210:30으로 슬리데린 팀의 승리입니다!”

중계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람들의 시선이 두 람을 향해 쏟아졌다. 그리고 그렇게 서로를 부둥켜 안고 얼어버린 두 사람의 얼굴이 붉어졌다.

As a Father

마법부와 호그와츠 관련 건에 대해 골치 아픈 일이 늘어난 루시우스는 서재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간단하게 서재에서 점심을 한 그가 일에 열중하는 사이, 누군가가 서재 문을 살짝 열고 서재 안으로 들어왔다.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루시우스는 앞에 놓여있는 서류들을 유심히 살펴보며 어떻게 처리 해야 할까 하는 생각에 집중하려고 했다. 다음주까지 넉넉한 시간이 있음에도 어서 끝내버리고 나시샤나 드레이코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은 마음이 루시우스의 생각을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

루시우스가 깃펜을 잉크로 가져갔을 때, 책상 끝에 자신과 같은 색의 눈동자와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금빛 머리를 한 드레이코가 얼굴을 손에 괴고 깊은 생각을 하는 것 마냥 루시우스를 쳐다봤다. 루시우스의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것을 본 드레이코가 갑자기 질문을 했다.

"순수혈통이 뭐에요?"

"그 어떤 것보다 투명하고 깨끗하며, 순수하기 때문에 그렇지 못한 것보다 더 큰 힘을 갖는 가문을 말한단다. 우리처럼. 그렇기 때문에 그렇지 못한 것 혹은 그러하면서 그렇지 못한 것을 탐하는 순수혈통은 옳지 못한 일이지."

"왜요?"

루시우스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호기심이 가득한 회색 빛 눈동자를 쳐다봤다. 그리고 천천히 들고있는 깃펜을 옮겨 옆에 있던 물이든 유리잔에 깃펜 끝을 담갔다. 유리잔 끝에서 천천히 잉크가 흘러나와 투명했던 물속에 아지랑이를 피우다 이내 흩어졌다.

드레이코는 천천히 잉크가 물속에서 퍼져 투명했던 물이 자신의 눈동자와 비슷한 회색이 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깨끗하고 모든 것을 투영하던 물이 자신의 눈동자 색과 비슷한 색깔을 띄게 되었다. 모든 것을 투영하기만 하는 순수한 투명함보다는 색깔을 갖는 게 더 멋진 일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루시우스는 깃펜을 천천히 들어올리며, 드레이코를 쳐다봤다. 천천히 입가에 미소가 떠오르는 아들을 쳐다보며 그는 아들이 어떤 생각을 할지 궁금했다.

"아름다워요."

드레이코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루시우스는 귀를 의심했다. 투명한 물이 탁한 회색이 되었는데, 드레이코는 그것이 아름답다고 했다. 루시우스는 작은 헛기침으로 아들의 시선을 샀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드레이코, 투명하고 맑은 물이 탁한 회색이 되었는데 어째서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투명한건 싫어요. 모든걸 꿰뚫는 것 같아서 투명한건 싫어요."

루시우스는 드레이코의 말을 곱씹었다. 모든 것을 꿰뚫는 다는 것, 그것이 드레이코가 생각하는 순수함의 정의일까. 들고있던 깃펜을 내려놓고 천천히 어린 아들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한참동안 그렇게 드레이코의 눈을 쳐다보며 루시우스는 고민했다. 이대로 아들의 생각을 열어야 할지, 아니면 말포이의 생각으로 그를 묶어야 할지.

"투명하다는건, 여러가지 색을 가질 수도 있다는 뜻이야."

"하지만 그건 자기 색이 아니잖아요, 남의 색을 빼앗는 거지."

맞는 말이었다. 투명하다는 것, 순수하다는 것. 어쩌면 그것이 오히려 자신만의 색을 발하는 다른 그 무엇보다 더 교활한 것일지도. 루시우스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어리다 고만 생각했던 드레이코가 자신을 깊게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자랑스러웠고, 언제나 그랬듯이 사랑스러웠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벽난로 앞에 있는 의자로 향했다. 드레이코는 다시 한번 묽은 회색 빛이 된 유리컵을 힐끔 쳐다본 뒤 루시우스의 뒤를 종종걸음으로 따랐다. 커다란 안락의자에 앉아 뒤좇아온 드레이코를 무릎 위에 앉혔다. 오랜만에 갖는 아들과의 시간, 드레이코의 얼굴에 천진난만한 미소가 번졌다. 천천히 드레이코의 등을 쓰다듬으며, 천천히 말했다.

"투명한 물은 투명한 물이기 때문에 특별한 거란다. 너도 봤듯이, 쉽게 다른 색으로 물 들 수 있기 때문에 투명하고 순수한 그 자체로 그것을 유지한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야. 그래서 순수한 것 그 자체가 고귀하고 아름다운 것이지."

루시우스의 가슴에 머리를 뉘인 드레이코는 벽난로의 모닥불을 쳐다보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루시우스는 나지막이 어린 아들이 지금 자기가 한 말에 대해 이해하기를 바랐다.

순수혈통이라는 것. 젊은 시절 루시우스 역시 스스로 도 그것이 비약이고 모순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말포이라는 가문에 묶여 그것을 수용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실망했었다. 엄격한 아버지 앞에 반항하지 못하는 자신의 나약함이 싫었었다. 아버지의 엄격한 훈육, 강하고 투명해야 하는 말포이. 루시우스도 그런 무섭고 어려운 아버지가 되어야 했다.

오늘 이 밤이 지나고 나면, 루시우스도 더 이상 드레이코에게 다정한 아버지가 될 수 없을지도 모른 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빨리 훌쩍 자라버린 드레이코의 생각이 앞으로 그가 겪었던 아버지에 대한 경외를 드레이코 또한 겪으리라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얼마나 그렇게 앉아 있었을까, 드레이코의 숨소리가 가지런해졌다. 드레이코의 얼굴위로 떨어진 밝은 금빛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이제 곧 다가올 드레이코의 생일이 지나고 나면, 어린아들은 5살이 된다. 아직 좀 더 뛰어 놀고, 좀 더 어리광을 부려도 되는 나이. 하지만 말포이로써 강해지기 시작해야 하는 나이.

루시우스는 드레이코가 영원히 어린아이로 남기를 몰래 빌었다. 그래서 그가 엄격한 아버지가 되지 않아도 될 수있게, 언제까지나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할 수 있는 아버지로 남을 수 있기를 몰래 빌었다.

The Luncheon

“나시샤, 마법부 오찬모임이 내일이에요.”

“알아요, 루시우스. 드레이코는 어쩌죠?”

마법부에서 연말 오찬모임을 성대하게 열기로 했다. 루시우스는 꼭 참석하리라 약속했고, 그의 부인과 동석할 것이라고 이미 연락을 해놓은 터였다. 하지만, 다른 가족들 역시 오찬모임에 참석하게 되는 바람에, 드레이코를 부탁할 사람이 없어졌다. 물론, 그 모임에 갈 수 없는 친척들이 있었지만, 드레이코를 맡길 만큼 그들을 신뢰하지 않았던 루시우스는 이런저런 가능성을 생각하며 책상 위에 서류들을 훑어 봤다. 루시우스의 손이 닿을 때마다 책상 위는 점점 더 어지러워 지기만 했다. 부산하게 서재에서 서류를 이리저리 챙겨보는 루시우스를 차분하게 바라보고 있던 나시샤가 입을 열었다.

“데려가죠.”

바쁘게 움직이던 루시우스의 손이 공기 중에 멈췄고, 짙은 회색 눈동자가 나시샤의 잔잔한 눈동자를 만났다. 눈살을 찌푸리며 한동안 깊게 생각하던 루시우스는 입가에 작은 미소를 보이며 머리를 흔들었고, 어지러운 책상위로 시선을 돌렸다. 말이 트이고 모든 것이 궁금하기만 하며 뭐든 만져봐야 성이 차는, 여기저기 부산하게 뛰어다니며 이것저것 질문을 던지는 드레이코를 생각할 때마다 평소에 늘 감추었던 미소를 루시우스는 얼굴에서 지워 낼 수 없었다.

“그가 제대로 행동할 수 있을지, 그게 걱정이에요.”

나시샤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는 이제 3살이에요. 제대로 행동하면 그게 더 이상해요.”

나시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루시우스는 더 이상 고민 해봐야 다른 방법이 없을 것 같은 생각에 몸을 의자에 던지며, 일을 시작하기 전보다 훨씬 어지러워진 책상 위와 나시샤를 번갈아보며 크게 미소 지었다. 루시우스는 일에 관련된 서류는 집 요정을 시켜 정리 시키지 않는 것을 잘 아는 나시샤는 그의 시선이 무슨 뜻인지 잘 알고 있었다. 나시샤가 고개를 들며 루시우스를 아래로 내려다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살쪽 코웃음을 치며, 몸을 돌려 문쪽으로 걸어 나가며 말했다.

“집 요정에게 서재 근처에는 얼씬거리지 말라고 할 테니, 알아서 깨끗이 정리해주세요.”

문쪽을 향하는 나시샤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웃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굳게 다물고 목소리의 떨림이 루시우스에게 들키지 않게 조심하며 문고리에 손을 얹었다. 살짝 책상이 있는 쪽을 쳐다봤다. 루시우스가 고개를 뒤로 떨구며 불평 섞인 낮은 소리를 냈다. 천천히 문을 열며 마지막으로 루시우스와 눈이 마주친 나시샤는 살짝 미소 지으며 서재에서 나오며 문을 뒤에서 닫았다. 잠깐 서재 문에 기대서 얼굴을 뒤덮은 웃음을 지운 후에 발걸음을 드레이코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


“아서! 난 못 가요! 지니는 어떻게 하고 거길 간단 말이에요?”

“몰리, 그럼 어떻게 해요? 가족 오찬이에요, 당신도 함께 갈 꺼라고 이미 말했다 구요!”

두 사람의 큰소리에 꿈틀거리며 눈을 깜박이던 진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기 시작했다. 아이의 표정에 놀란 몰리는 지니를 향해 구구소리를 내며 달래기 시작했다. 몰리는 손으로 지니의 등을 쓰다듬으며, 아서를 쏘아봤다. 점심 오찬에 대해 조금 더 일찍 말해 주었다면, 지니를 누군가에게 부탁할 수도 있었겠지만, 아직 젖먹이인 지니를 몰리는 단 한 순간도 떼어 놓고 싶지 않았다. 6명의 아들 끝에 낳은 하나밖에 없는 딸이었다. 딸은 귀하게 대해야 귀해진다는 주변 사람들의 말을 빈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몰리는 내심 그 말을 믿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지니도 데려가면 되잖아요?”

몰리는 믿을수 없다는 듯이 아서를 쳐다봤다. 만약 몰리가 가게 되면, 그건 이 집안 식구들이 모두 그 오찬모임에 참석하게 된다는 뜻이 된다. 바꿔 말하면 빌,찰리,퍼시,프레드,조지 그리고 론, 모두 다 같이 가게 된다는 뜻이다. 몰리는 오찬모임에서 프레드와 조지가 만들어낼 수 있는 사고들을 미리 머리 속으로 세며, 지니의 이마에 키스했다. 그리고 천천히 요람에 누이며 아서의 팔을 붙잡고 방 밖으로 이끌었다. 마당에서 바쁘게 놀고 있는 빌을 큰소리로 힘껏 불러 지니의 요람 옆에 붙여두고는 아서와 함께 거실로 자리를 옮겼다.

“미쳤어요? 위즐리 전부 그 오찬모임에 가자 구요?”

“어차피 비공식적인 자리에요. 그냥 직원끼리 모여서 크리켓하며 점심 먹는 정도일 거라 구요. 그리고 빌과 찰리가 있잖아요. 프레드와 조지는 그 둘이 잘 보살필 거에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몰리는 아서가 말하는 그 ‘비공식적인 자리’가 정말 비공식 적인 자리인지 회의를 가졌다. 막상 갈 생각을 하니 아이들 입힐 옷이며, 자신역시 어떻게 입어야 할지 벌써부터 급하게 생각하는 자신을 보면서, 내일 온 가족의 점심시간 외출을 확신하기 시작했다. 남편의 아이들에 대한 언급으로 몰리는 론이 떠올랐다. 다른 형제들 과는 달리, 조용하고 말썽도 잘 부리지 않았다. 지니와의 터울이 크지 않아서 인지, 몰리는 론에게 거의 신경을 써주지 못했다. 다른 형제들이 론을 잘 돌봤지만, 쌍둥이들에게 항상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인데다, 지니처럼 아직 어려서 걱정이 큰 몰리였다. 퍼시는 워낙 혼자 있거나, 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였다. 아무리 관심을 쏟아도 퉁명스럽기만 한 퍼시에게 가끔 실망 할 때도 있는 몰리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른 형제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것 같아 걱정이 컸다.

“퍼시랑 론은요?”

“몰리, 당신도 잘 알잖아요. 그 둘은 언제나 조용하다는 것, 분명히 그 근처에 놀이터나 아니면 아이들이 놀만한 데가 있을 거에요. 내가 계속 지켜보면 되요. 당신은 지니만 잘 보살피면 되요.”

“당신은 애들을 잘 몰라요.”

“걱정 말아요. 그 둘은 내가 잘 돌볼 수 있어요.”


유난히 바쁘게 움직이며 나시샤는 거울 앞을 떠날 수 없었다. 남편이 말한 대로 성대한 오찬모임인지 아닌지 정확하게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 루시우스는 종종 차 마시는 평범한 소모임도 오찬모임이라고 과장해서 말하기를 좋아해서 - 남편 옆에서 다른 사람들 눈에 빛나보이고 싶은 마음을 숨기고 싶지 않았다. 아침 식사 때 루시우스의 크리켓경기에 대한 이야기로 처음에 생각했던 것보다는 그렇게 공식적인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직감한 나시샤는 쌀쌀한 날씨에 밖에서 오찬모임으로 드레이코가 혹여 아프지는 않을까 하는 너무 이른 걱정과 루시우스와 드레이코 역시 어떤 복장을 갖춰야 할지를 고민하며 오전 내내 시간을 보냈다.

나시샤가 옷차림과 날씨에 대해 걱정하는 동안 말포이가 남자들은 거실 벽난로 앞에 앉아서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초콜릿을 하나씩 풀어봤다. 루시우스의 큰 손이 초콜릿 포장을 벗기기 시작하면 아들의 작고 하얀 손이 초콜릿을 향해 돌진했다. 초콜릿 포장이 채 다 뜯겨지지도 않은 초콜릿을 입 속으로 넣으려는 아들의 모습을 보면서 루시우스는 계속해서 번지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리고 오찬모임이 점점 걱정되기 시작했다. 드레이코의 모습에 자기도 모르게 남들에게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이지는 않을까 걱정되기 시작했다. 나시샤가 천천히 거실로 나오며 루시우스에게 손짓했다. 루시우스의 무릎위로 기어 올라오는 드레이코를 가볍게 들어 올리며 끌어 안으며 일어섰다.

천천히 저택 현관 홀을 지나, 이제 막 시작된 찬 겨울, 아직은 바람이 그다지 매섭지 않았다. 따갑게 내리쬐는 강한 햇살에 루시우스는 눈을 찌푸리며 아내와 아들을 번갈아가며 쳐다봤다.

“나시샤, 아직 그렇게 춥지 않은데….”

“전 드레이코가 감기 걸리지 않길 바래요”

두터운 겨울 망토를 입고 뒤뚱거리며 걸어 나오는 드레이코를 보며 나시샤를 쳐다봤다. 두꺼운 옷 때문에 불편했는지 팔을 루시우스를 향해 들며, 안아 달라는 듯이 올려 다 봤다. 입이 앞으로 잔뜩 나온데다가, 거실에서 루시우스와 노는 바람에 낮잠을 얼마 자지 못해 눈 안에 졸음이 그득한 했다. 나시샤를 한번 쳐다보고는 아들을 가볍게 들어 안고는 나시샤에게 쏘아 붙였다.

“이렇게 두껍게 입히면 아이가 움직이기 힘들어 지잖아요.”

“드레이코는 안 움직일 거에요. 넘어지기라도 하면 어떻게 해요?

나시샤는 루시우스의 품에 안겨 얼굴을 두터운 스카프에 묻으려는 아들의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며 볼에 키스했다. 평소보다 늦은 점심에, 배가 고파 잔뜩 골이 난 데다가, 남편의 말대로 옷을 너무 많이 입혀서 답답한지 쀼루퉁한 표정이었다.

나시샤의 말에 코웃음 치며 루시우스는 발걸음을 플루네트워크가 연결된 현관 별채로 향했다. 나시샤는 가방 안을 한번 더 살피며, 양산을 펼쳐 들었다. 양산을 어깨에 기댄 채로 행여나 드레이코가 추워할까, 여분으로 챙긴 담요와 혹시 몰라 하는 마음에 챙긴 감기약 포션과 드레이코가 좋아하는 장난감을 확인했다. 혹시 더 필요할 만한 게 뭐가 있을까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데, 별채로 향하던 루시우스가 언제 다시 돌아왔는지 가방을 낚아채며 어깨에 둘러매고는 나시샤를 재촉했다.

나시샤는 미소를 지어보이며 루시우스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평소에 외출하면 꼭 착용하던 장갑을 끼지 않은 남편의 손을 발견하고는 이내 망토에서 지팡이를 꺼내 장갑을 소환했다. 하지만 남편에게 건네주는 대신 가방 안에 넣고는 잡은 손을 한번 꾹 움켜 쥐었다. 머리를 루시우스의 어깨에 기대며 플루네트워크로 향했다.


“빌!, 찰리!”

몰리의 목소리가 오두막집 안에 울려 퍼졌다. 거실에서 프레드와 조지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장난감을 가지고 론을 골려 주고 있었다. 퍼시는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두터운 찰리의 겨울 망토를 꺼내 입으려고 하고 있었고, 찰리는 퍼시에게 더울 거라며 코트를 권하고 있었다. 쿵쾅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빌이 위즐리의 트레이드마크 W가 크게 새겨진 점퍼를 입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퍼시와 실랑이 하고 있는 찰리의 팔을 끌어 당기며 몰리가 있는 부엌으로 향했다.

빌이 식당으로 들어오자 마자 몰리는 지니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고는 빌에게 지니를 보라고 눈짓했다. 빌이 한숨을 쉬며 지니 옆에 털썩 주저 안아서 지니의 활짝 웃는 얼굴을 마주했다. 찰리는 빌의 손을 뿌리치며 거실로 나가 쌍둥이들의 장난감을 빼앗았다. 이리저리 쌍둥이를 피해 뛰어 다니던 론이 찰리 뒤쪽으로 숨으며 쌍둥이들에게 혀를 내밀었다. 쌍둥이가 다시 론에게 달려들기 전에, 위즐리 부부가 거실로 나오며 서로의 옷 매무새를 다듬어 주었다.

“빌! 망토 챙겼니?”

몰리의 큰 목소리에 지니의 손을 잡고 부엌에서 지니와 빌이 나왔다. 몰리는 몸을 숙여 거실 소파에 널 부러져 있는 망토들 중에 제일 낡고 오래된 겨울망토를 꺼내 론에게 둘러 주었다. 퍼시가 입은 겨울 망토를 본 몰리는, 겨울이 오기 전에 빌에게 망토를 하나 사주어야 겠다고 생각 했다. 아서가 계단 위에 장난감들과 섞여있는 망토를 툭툭 털어 빌에게 건네 주고는 플루네트워크를 연결하는 주문을 벽난로에 걸었다.

“빌, 찰리. 프레드와 조지는 너희 책임이야. 혹시 무슨 일이 생기거나 말썽 피우면, 너희도 똑같이 혼날 줄 알아. 대신 아무 말썽 없이 집에 돌아오게 되면 올 겨울에 각각 겨울망토를 하나씩 사줄게.”

쌍둥이가 태어나고 난 다음부터 부쩍 자란 아들들 이었다. 싫은 내색도 할 법 한데, 싫은 내색 없이 동생들을 끔찍이 챙기는 모습에 몰리는 아들들이 자랑스러웠다. 게다가 쌍둥이는 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힘들었다. 아직도 그 둘을 분간해 내는 문제도 있고, 어린아이들 치고는 생각해 내는 장난의 수준이 귀여운 정도를 넘어 곤란한 경우가 더 많았다. 그에 비하면 퍼시는 조용하고 모든 일을 신중하게 선택하는 아이였다. 찰리, 빌과는 다르게 욕심도 많고 아이답지 않게 현실적이어서 가끔 거리감을 느끼기도 했다. 몸을 돌려 퍼시의 어깨에 손을 얹고는 작게 속삭였다.

“퍼시, 론을 잘 돌봐주렴, 엄마가 너를 제일 믿기 때문에 론을 부탁하는 거야. 알지?”

아서가 빌에게 플루가루를 쥐어주며 마법부로 이동하는 방법에 대해 아이들에게 설명하는 동안 몰리는 지니의 망토에 묻은 먼지를 한번 쓰다듬으며 지니와 론의 손을 꼭 붙잡았다.

“론, 아빠랑 같이 손잡고 가도록 해. 지니는 엄마랑 가도록 하자.”

빌과 찰리가 먼저 벽난로 안으로 들어갔다. 조지와 프레드가 플루가루로 장난 치려는 것을 낚아챈 몰리가 눈살을 찌푸리며 쌍둥이를 보았다. 그 사이 아서가 론의 손을 붙잡고 쌍둥이의 시선을 피하듯 벽난로 안으로 들어가며 힘차게 ‘마법부’를 외쳤다. 몰리는 쌍둥이의 어깨를 세게 움켜쥐며 번갈아가며 눈동자를 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한번 이동하는 방법에 대해 설명해 주고는 말했다.

“만약 말썽부리면,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장난감, 압수할거야. 그리고 앞으로 일주일동안 간식 없을 줄 알아.”

그렇게 말하고는 쌍둥이의 어깨를 잡아당겨 꼭 안아줬다. 몰리는 아직 스스로 이동하기에 어리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쌍둥이들이 잘 해낼 수 있을 거라고 나름 확신하면서도 걱정되는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쌍둥이들이 숨막힌다는 듯이 몰리의 손을 뿌리치며 벽난로를 향해 걸어갔다. 이동하기 전에 몰리를 쳐다보며 알 수 없는 미소를 서로 교환한 쌍둥이는 플루가루를 내던지며 힘차게 마법부를 외쳤다. 그제야 안심이 된 몰리는 지니를 들어 안고 다시 한번 집안을 살펴봤다. 문이 제대로 다 닫혀있는지 확인하고, 벽난로로 향했다.


마법부 중앙 홀에 도착한 오찬모임에 참석하기 위한 마법사들이, 큰 황금 조각상 근처에서 삼삼오오 모여 서로의 근황을 나누고 있었다. 위즐리 가족은 곧 스캐맨더와 디고리 가족을 만났다. 아서는 곧 뉴트, 아모스와 함께 크리켓과 퀴디치에 대한 대화를 나눴고, 몰리 역시 스캐맨더 부인과 함께 빌과 찰리의 학교생활에 대해 말했다. 아이들은 다 같이 모여서 조각상 근처를 뛰어다니기도 하고, 몇몇 아는 얼굴과 인사를 하기도 했다.

루시우스가 마법부 장관과 인사를 하는 동안, 나시샤는 검색 대를 지나 승강기 근처에 있는 휴게실에서 드레이코를 안고, 오찬장소로 이동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은 국내 날씨가 좋아, 마법 게임 및 스포츠부의 부장인 맥펄란씨의 농장에서 오찬을 갖는다고 했다. 나시샤의 품속에서 곤히 잠든 드레이코의 등을 쓰다듬으며 창 문 밖으로 보이는 인파를 생각 없이 바라봤다.

오후 2시가 되자 중앙 홀은 사람들로 가득 찼다. 마법부 장관인 밀리센트 배그놀드씨의 연설로 사람들이 모두 조각상 근처로 몰렸다. 가족단위의 포트키로 맥펄란농장까지 이동하게 되고, 그곳에서 오찬모임을 할 것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이내 검색대 근처 포트키를 가진 직원에게로 몰렸고, 몰리는 아이들을 데리고 조각상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서 아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빌이 사람들을 헤치고 나오다가, 금발의 아이를 안고 있는 여자와 부딪히게 되었다.

“죄송합니다. 부인.”

빌의 정중한 사과에 부딪혀서 흘러내린 무거워보이는 가방을 다시 어깨 위로 끌어 올리며 금발의 부인이 미소 지었다. 그리고는 안고 있던 아이를 고쳐 안고는 조각상 쪽으로 향했다. 빌은 부인이 인파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다가 곧 몰리의 외침에 발걸음을 재촉했다.


맥펄란씨의 농장은 한적한 런던 외곽의 양을 치는 농장이었다. 커다란 농장 저택 뒤편에 있는 넓은 정원에서 오찬을 시작한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대화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뒤뜰에 걸린 마법의 주문덕분에 야외 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걱정과는 달리 굉장히 따뜻했다. 또, 맬펄란 부부는 어린 아이들을 동반한 가족들이 좀더 편한하게 머물 수 있도록, 온실을 깨끗하게 정리해서 아이들이 뛰어 놀 수 있도록 배려했다. 오찬을 대충 끝낸 사람들은 편을 갈라 크리켓 게임을 하기 시작했다.

몰리는 지니와 론, 쌍둥이, 퍼시를 데리고 맥펄란 부부가 준비해 둔 온실로 향했다. 중앙에 서있는 커다란 나무를 중심으로 아이들의 손이 닿지 않도록 온실의 식물들은 천정 근처를 둥둥 떠다녔으며, 바닥에는 폭신한 안락의자와 소파, 그리고 양털느낌의 카펫이 깔려 있어 아이들이 바닥에서 놀 수 있도록 배려해 둔 듯 했다. 프레드와 조지가 기다렸다는 듯이 망토를 몰리에게 휙 던지고는 다른 아이들이 있는 쪽으로 뛰어 갔다. 몰리는 바닥에 너부러진 망토를 챙기며 퍼시 쪽을 바라보았다. 퍼시는 다른 아이들과 노는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듯이 제일 편해보이는 안락의자를 하나 골라 앉으며 망토에서 책을 하나 꺼내 들었다. 몰리는 근처 소파에 쌍둥이의 망토를 던져 놓으며 몸을 기댔다. 지니는 이내 망토를 몰리에게 주고는 중앙에 있는 커다란 나무 쪽을 향해 걸어갔다. 몰리의 시선이 지니에게 쏠려 있는 동안 론은 몰리가 앉은 소파위로 기어올라가 쌍둥이의 망토사이로 기어들어가 누웠다.

나시샤와 루시우스는 밀리센트 부부와 함께 식사를 했다. 식사 하는 내내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드레이코 때문에 루시우스가 곤란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시샤는 곧 밀리센트 부인에게 양해를 구하고 드레이코와 들고 온 가방을 안고 온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직 제대로 먹지 못한 드레이코가 걱정 됐지만, 낮잠을 재우지 않으면 내내 투정할 것을 잘 아는 나시샤는 온실 안으로 들어오자 마자 아이가 누울 만한 곳을 찾았다. 문 근처에 있는 소파에 망토에 둘러 쌓여 잠들어 있는 빨간 머리 아이를 발견한 가방을 조심스럽게 소파 밑에 두고 드레이코를 내려 놓았다. 나시샤가 조심스럽게 드레이코의 두터운 겨울 망토를 벗기자, 드레이코는 소파위로 기어 올라가 잠들어 있는 아이 옆에 누웠다. 가방에서 담요를 꺼내 아이들에게 덮어준 뒤에, 주변을 한번 살펴본 다음, 루시우스에게 온실에 있을 것이라는 말을 전하기 위해 다시 밖으로 몸을 돌렸다. 온실을 나가기 바로 직전, 빨간 머리의 여자가 똑같이 붉은머리를 한 여자아이를 데리고 소파로 걸어 가는걸 확인한 나시샤는 남편을 향한 발걸음을 재촉했다.

지니가 앞으로 넘어지는 바람에 깜짝 놀라 달려간 몰리의 예상과는 다르게 배시시 웃는 지니의 웃음에 안심한 몰리는 지니를 일으켜 세워 옷에 묻은 흙을 털어주고는 소파로 걸어왔다. 론은 오늘 쌍둥이들과 노느라 낮잠을 자지 않아서 피곤했는지, 시끌시끌한 온실 안에서 평온하게 잘 잤다. 걸어오면서, 론이 덮고 있는 담요와 그 옆에 누워있는 금발머리 아이가 눈에 들어 왔다. 그리고 소파 앞에 커다란 가방이 있었다. 아이용 겨울 망토가 정갈하게 개여 가방을 덮고 있었다. 몰리는 가방을 한쪽으로 치우며 소파 끝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지니가 금발머리 아이의 등을 툭툭 치는 것을 낚아 채 말리며, 손을 옮겨 론의 얼굴이 담요 밖으로 나오게 담요를 살짝 치웠다. 금발머리의 아이가 몰리의 움직임에 론이 있는 쪽으로 몸을 웅크렸다. 아이들 때문에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한 몰리는 배가 고팠다. 정신 없이 자느라고 먹는 둥 마는 둥 했던 지니를 데리고, 퍼시에게 쌍둥이를 잘 보라고 부탁한 뒤에 온실을 빠져 나와 저택 내에 있는 식당으로 향했다. 오찬이 끝난 정원은 이미 퀴디치를 하는 아이들로 가득 차 있었다.

루시우스에게 온실 안에 있겠다고 말을 전한 뒤, 드레이코가 깨어나면 먹이기 위해 약간의 음식과 음료를 챙겨 들고 온 나시샤는 옆에 있던 테이블에 음식을 놓고, 테이블 의자를 소파쪽으로 끌어와 앉았다. 아까는 보이지 않던 빨간 머리 아이의 얼굴이 보였다. 주근깨가 가득한 얼굴에 드레이코가 머리카락이 간지러웠는지 코끝을 찡그리고는 주근깨가 가득한 손으로 코를 긁었다. 나시샤는 빨간 머리와 주근깨로 벌써 그 아이가 어느 집 아이인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곤히 자는 아들을 깨우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하고, 조금만 더 자게 두기로 하고 가방을 끌어당겨 안에서 읽다 남은 책을 꺼내 들고 읽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흔들어 깨우는 느낌에 드레이코는 망설이며 눈을 떴다. 얼굴에 씨가 박힌 듯 딸기처럼 생긴 아이의 얼굴이 드레이코의 눈앞에 있었다.

“뭐야?”

잠에 잠긴 목소리로 퉁명스럽게 말을 밭은 드레이코는 몸을 일으켜 세워 앉았다. 론은 주변을 둘러보더니 말했다.

“배고파.”

론의 말을 듣고 보니 자기도 배가 고픈걸 깨달은 드레이코는 주변을 살펴보고는 테이블 옆 의자에 책을 읽다 잠이든 나시샤를 발견하고는 소파에서 내려왔다. 나시샤가 자는걸 유심히 지켜본 드레이코는 테이블 위에 음식을 발견하고는 론을 쳐다봤다. 그리고 손을 들어 음식에 손을 가져갔지만 아직 키가 너무 작았다.

론은 금발머리에 새하얀 남자아이가 음식에 닿기 위해 애쓰는 것을 보고, 바나나 같다고 생각했다. 노란색 껍질을 벗기면 흰색이 나오는. 뱃속에서 그르렁 소리를 들은 론은 고개를 들어 퍼시가 있는 쪽을 봤다. 퍼시는 나무 근처에 앉아서 책을 보고 있었다. 재빨리 소파에서 내려와 퍼시에게 달려갔다.

“퍼시! 배고파.”

퍼시는 책을 내려 시선을 론에게 돌렸다. 그리고 엄마가 있는 쪽을 봤지만 없었다. 주변을 살펴보니, 쌍둥이들은 다른 아이들과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데 정신이 없었다. 론이 퍼시의 소매 끝을 잡아당겨 소파근처에 있는 테이블을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저기 있어. 내려줘.”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금발의 부인이 책이 거의 떨어질 듯, 하얀 손가락 끝에 걸려있었다. 그리고 그 부인을 닮은 금발머리의 아이가 퍼시와 론을 번갈아가며 쳐다봤다. 퍼시가 테이블에서 샌드위치와 주스를 내려 론과 그 아이에게 주었다. 샌드위치를 두 손으로 받아 든 그 아이가 방글방글 웃었다. 그리고는 바닥에 털썩 주저 앉더니 음식을 내려놓고 론에게 앉으라고 손짓했다. 퍼시는 금발의 부인쪽을 다시 한번 쳐다보고는 원래 있던 자리로 천천히 걸어갔다.

접시 위에 샌드위치를 하나씩 들고 먹기 시작했다. 드레이코가 먹다가 목이 메이는지 옆에 있던 컵을 집어 주스를 마셨다. 론이 그걸 보고 있다가 내려놓는 컵을 낚아채 주스를 마셨다. 드레이코의 눈썹이 위로 살짝 올라가며 빨간머리와 주스가 든 컵을 번갈아보며 쳐다봤다. 론은 마저 먹던 샌드위치를 다시 입으로 가져가 크게 한입 베어 물며 드레이코를 쳐다봤다.

“이건, 내건데….”

말끝을 흐리며 드레이코 역시 먹다 남은 샌드위치를 입으로 가져갔다. 반쯤 먹다 배가 불렀는지 드레이코는 먹다 남은 샌드위치를 접시 위에 올려 놓으며 주스가 든 컵을 들었다. 막 샌드위치 하나를 다 먹은 론이 샌드위치를 접시 위에 올려놓는 드레이코를 쳐다보고는 물었다.

“먹어도 돼?”

“내가 먹던 건데, 어떻게 먹어?”

“먹으면 돼”

방긋 웃어보이며 반쯤 먹다 남은 샌드위치를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드레이코는 주스를 조금씩 마시며 빨간머리를 쳐다봤다. 배가 불렀지만, 다른 아이가 먹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드레이코도 조금 더 먹고 싶어졌다. 주변을 둘러보니 아까 음식을 내려줬던 사람 옆에 쿠키그릇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주스를 접시 위에 올려놓고 일어 섰다. 거의 다 먹은 샌드위치를 한입에 넣고 우적우적 씹으며 론 역시 드레이코를 따라 일어났다. 드레이코는 론이 일어나는 것을 확인하고는 퍼시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론은 목이 메였는지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접시 위에 놓은 컵을 들어 남은 주스를 모두 마셨다. 그리고 퍼시를 향해 걸어가고 있는 드레이코의 뒤를 좇았다.

“쿠키.”

드레이코의 목소리에 퍼시는 잠깐 고개를 들어 금발의 부인이 있는 쪽을 봤다. 론이 자신쪽을 향해 종종걸음으로 뛰어 오고 있는 것을 본 퍼시의 시선이 금발머리 아이에게서 멈췄다.

“뭐?”

퍼시의 반응을 예상 못했는지 당황한 눈치였다. 손가락을 들어 테이블 위에 쿠키가 든 상자를 가리키며 퍼시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아이를 퍼시는 론이 도착한 다음에야 그 시선을 쿠키가 든 상자로 옮겼다. 론은 도착하자마자 드레이코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고는 퍼시의 무릎위로 기어 올라오려고 하며 말했다.

“형, 쿠키”

퍼시는 불편 한 듯 움직이며, 책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쿠키 상자를 무릎 위에 올려 놓았다. 그 중에 제일 좋아하는 초콜릿 퍼지 쿠키를 들어올려 한입 베어 물고 앞에 있는 아이들에게 상자를 내밀었다. 론이 상자를 받아 들며 퍼시 바로 발 밑에 털썩 주저 앉았다. 지켜보고 있던 드레이코 역시 그 옆에 쪼그리고 앉아 어떤 것을 먹을지 고민한다는 듯이 손가락을 입안에 넣고 쿠키를 열심히 살폈다. 그렇게 둘이 앉아 쿠키를 고르고 있을 때, 쌍둥이들이 강낭콩 젤리를 서로에게 던지며 퍼시쪽으로 다가왔다. 거의 다 왔을 때 그들은 서로에게 던지던 젤리를 론쪽을 향해 던지며 쿠키박스를 뺏어 바닥에 놓고 강낭콩 젤리를 옷 속에 넣으려고 했다. 론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드레이코는 깜짝 놀라 시선을 쿠키에서 쌍둥이쪽으로 옮겼다. 쌍둥이가 드레이코를 쳐다보며 물었다.

“얘는 뭐야?”

“하지마!”

론이 쌍둥이의 손을 뿌리치며 드레이코의 손목을 붙잡으며 일어섰다. 드레이코는 얼떨결에 손목을 붙잡힌 채로 쿠키가 든 박스에서 아무 쿠키를 하나 꺼내 집으며 론이 잡아 끄는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쌍둥이는 론과 드레이코 쪽으로 젤리를 던지며, 박스주변에 털썩 주저 앉아 쿠키를 골랐다. 쌍둥이들의 관심이 쿠키에 쏠려 있는 동안 드레이코는 마지막에 꺼내든 쿠키를 입안에 넣으며 론이 가고 있는 쪽의 장난감 상자를 봤다.

방안에 있는 다른 재미있어 보이는 장난감들은 거의 아이들이 가져가서 장난감 상자 안에는 오래된 체스게임 세트 밖에 없었다. 드레이코는 론의 손을 뿌리치며 박스 안에서 체스상자를 꺼냈다. 위 아래로 흔들며, 뭔지 살펴본 드레이코는 론을 보았다. 론은 드레이코 손 위에 들려있는 체스상자의 뚜껑을 열어 안쪽에 체스 말과 체스 판을 확인했다. 그제야 이게 뭔지 깨달은 드레이코는 그 상자를 아래쪽에 내려놓고, 나시샤가 앉아있는 소파쪽을 향해 달렸다. 론은 상자뚜껑을 잘 덮은 뒤에 쌍둥이의 위치를 한번 확인하고는 드레이코의 뒤를 쫒았다.

소파에 다다른 드레이코는 나시샤의 가방 안에서 장난감 상자 안에서 본 것 보다는 약간 작고 훨씬 새것 같아 보이는 체스상자를 꺼내 론에게 내밀었다. 뚜껑을 열어 안쪽에 있는 판을 바닥에 놓고 상자 겉에 있는 모양을 보고 말을 하나 둘 제 위치에 올려 놓았다. 검은색과 흰색 말이 모두 제 위치를 찾았을 때 론은 드레이코가 뭘 하려고 하는 건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계속 주시했다. 드레이코는 상자 안쪽에 붙어 있는 그림으로 된 설명을 고심하듯 쳐다봤다. 론 역시 궁금했는지 드레이코의 옆으로 자리를 옮겨 드레이코가 보고 있는 그림을 봤다. 설명 같은 것이 글자로 써있긴 했지만, 론은 아직 글을 읽는 것을 완전히 배우지 못해서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드레이코는 조금 이해했다는 듯이 흰색 말이 있는 쪽으로 자신을 옮기며 론에게 검은 말이 있는 쪽에 앉으라고 손짓했다. 체스라는 것을 한번도 해본적 없는 론은 어떻게 해야 되는지 몰라 드레이코가 하는 대로 몇 번을 따라 하고는 체스 판 위에서 말들이 서로 싸우며 판 밖으로 밀어내는 모습과 말들이 가지는 의미에 자기도 모르게 푹 빠졌다. 그렇게 판 위에 말이 몇 개 남지 않았을 때, 나시샤의 책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책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나시샤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그리고 얼굴로 흘러내린 머리를 다시 정갈하게 쓸어 넘기며 몸을 곧게 폈다. 책이 떨어지는 쪽으로 고개를 획 돌린 드레이코는 벌떡 일어나 나시샤에게 달려갔다.

Maman!
“엄마!”

떨어진 책을 주워 들며, 드레이코가 볼을 무릎에 비벼대며 매달렸다. 나시샤는 아들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고는 주변을 둘러봤다. 위즐리 부인은 아직도 돌아 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이들이 놀고 있는 쪽에서는 빨간 머리의 아이들이 몇몇 더 보였다. 나시샤는 고개를 돌려 소파 바로 앞 바닥에 앉아 드레이코와 나시샤를 쳐다보는 아이를 한번 쳐다보고는 다시 시선을 드레이코 에게 옮겼다.

Avez-vous faim? Ma chère?
“배고프니, 내 아가?”

J'ai mangé des sandwiches.
“샌드위치 먹었어요”

Bon.
“그래”

몸을 숙여 드레이코의 이마에 키스했다. 그리고 천천히 일어나 가방 안에 책을 넣고, 담요를 집어 들었다. 바닥에 앉아 있던 아이는 계속해서 물끄러미 나시샤의 행동을 관찰했다. 나시샤가 정갈하게 갠 담요를 다시 가방 안에 집어 넣으며 드레이코의 망토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소파쪽으로 몸을 기대며 빨간 머리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드레이코랑 놀아줘서 고마워.”

나시샤의 손짓에 얼굴이 새빨개진 론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귀 끝까지 새빨개진 론의 모습에 드레이코가 까르르 웃으며 나시샤에게 말했다.

Maman, il ressemble à une fraise.
“엄마, 얘 딸기 같아요!”

드레이코의 말에 나시샤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시계를 한번 힐끔 쳐다보고는 나시샤가 드레이코에게 손짓했다. 너무 오랫동안 루시우스 옆을 떠나 있지 않았나 싶어, 서두르려고 했지만, 드레이코는 위즐리 소년과 노는 재미에 푹 빠진 듯 해 그럴 수 없었다. 웃음을 참지 못했는지 천천히 바닥에서 몸을 일으키다가 앞으로 넘어지려고 했다. 나시샤가 놀라 앞으로 몸을 숙이기 전에 드레이코의 팔이 론의 어깨를 잡았다. 론은 넘어질뻔한 드레이코를 한참동안 멍하게 쳐다보더니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아이들이 웃는걸 지켜본 나시샤는 천천히 드레이코에게 망토를 입히며 다시 한번 시계를 봤다. 이제 오후 4시, 아이가 기분 좋게 깨어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확인한 나시샤는 소파에서 일어나며 가방을 들어 어깨에 둘러메고 드레이코의 손을 잡았다. 고개를 들어 나시샤를 쳐다보는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에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드레이코를 데리고 온실을 빠져 나왔다. 온실 밖을 나서기 전까지 드레이코는 소파 앞에 멍하니 앉아 있는 빨간 머리 소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집 안이었다면 좀 더 놀고 싶다고 떼를 썼겠지만, 밖에 나와서 어리광을 피웠다가 루시우스에게 된통 혼이 난 뒤로는 의젓해진 드레이코였다. 안쓰러운 마음과 미안한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론은 그 자리에 앉아서 금발의 부인과 아이가 나간 문쪽을 쳐다봤다. 얼마동안 그러고 있었을까, 쌍둥이가 론이 있는 쪽을 향해 달려왔다. 소파에 풀썩 앉은 채 주변을 두리 번 거리고 있을 때, 금발의 부인과 아이가 나간 문으로 몰리가 지니를 데리고 들어왔다.

몰리가 소파에 돌아와 앉았을 때까지도 론은 몰리가 들어온 문쪽을 계속해서 쳐다보고 있었다. 론 옆에서 자고 있던 아이와 가방이 없어진 것을 확인한 몰리는, 방금 그 아이가 떠난 것을 깨닫고 문쪽을 다시 한번 보았지만, 금발 머리인 사람들은 들어오거나 나가는 사람이 없었다. 몰리의 시선이 다시 론에게 갔을 때, 론은 바로 앞에 놓여진 체스 판을 바라보며 입꼬리가 귀에 걸릴 듯 환하게 웃고 있었다. 집에 돌아갈 시간이 되자, 론은 자리에서 가지고 놀던 체스 상자를 정리해서 가슴에 안았다. 집에서 빌과 아서가 체스 두는 것을 기억해내고는, 앞으로 뭘 하며 노는걸 제일 좋아할지 정한 듯 했다.

Cry

비명, 침묵의 주문으로 묶여있는 이 공간에, 다른 사람은 들을 수 없는 나에게만 들리는 끊임없이 들려오는.

비명.

차가운 비가 세상과 닿아 만들어내는 둔탁한 소리가 사무실 안에 울린다. 이제 더 이상 추격해야 될 사람도, 우리를 추격할 사람도 남아있지 않다. 책상 위에 너부러진 죽음을 먹는 자들에 관한 파일들, 사진들, 위치를 알아내기 위한 주문서들. 이제 더 이상 필요 없어질 것들.

나는 제일 똑똑한 사람도 아니었고, 영웅으로 태어나지도 않았다. 내가 선택한 쪽이 이길 거라고 확신했고, 그리고 이겼다.


볼드모트의 위치를 추격하는 도중 말포이가 인질로 잡혔다. 불사조 기사단 내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흥분했고, 그에게서 볼드모트의 위치를 알아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자부했다. 하지만 말포이는 입을 열지 않았다.

비명.

고통과 슬픔이 섞인 비명.

잠을 잘 수 없었다. 눈을 떠보니 누군가가 정말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모두가 바삐 지하 던전 으로 향했다. 서둘러 방을 빠져나가려는 헤르미온느를 잠깐 세워 무슨 일인지 물었다. 지하 던전에 걸어놓은 침묵의 주문이 풀린듯 했다. 누굴까? 어차피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들어주지 않을 비명을 이렇게 처절하고 끊임없이 지르고 있을까?

다시 침대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부산하던 바깥도 점차 조용해졌다. 여기 저기 뒤척였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바깥은 아직도 어두웠다. 잠이 들었던 걸까? 몸을 일으켜 앉았다. 어떤 생각이 계속 머리 속을 맴돌았지만 그게 어떤 건지 알 수 없었다. 또 머리 속에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천천히 옷을 입고 방을 빠져 나왔다. 발이 가는대로 이곳 저곳을 걸었다. 그리고 어느새 나는 지하 던전 입구로 발을 옮기고 있었다.

궁금했다. 누가 만들어낸 비명이었을지.

지하 던전은 조용했다. 침묵의 주문은 불편한 침묵을 만들어 낸다.

내가 내는 숨소리, 내가 입은 옷의 바스락거리는 소리, 내 발이 지하 던전 돌 바닥에 닿는 소리. 이런 소리들 사이로 내 머리 속에서 누군가가 비명을 지른다.

그 곳에는 주문이 새로 쓰여 진지 얼마 안된 곳이 있었다. 차가운 철문 사이로 누군지 보기 위해 시선을 옮겼다. 온몸 여기저기 찢기고 멍든 상처, 피로 물든 셔츠를 입은 사람이 천장에 연결된 쇠줄에 손목을 묶인 채 벽에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내가 선택한 쪽이 이길 거라고 확신했다.

내가 선택한 쪽은 내가 선택하지 않은 그 쪽과 다를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용서 받지 못할 주문을 사용하여 죽음을 먹는 자들을 죽였다, 아무렇지도 않게 죽음을 먹는 자들을 고문했다. 그들도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나와 같은 보통의 평범한 사람이었을 그들을. 전쟁은 사람을 변하게 만든다. 처음에 가졌던 원래의 목적은 이미 잊혀 진지 오래. 지금당장 원하는 정보를 위해 잔인한 일들과 잔인하다고 느꼈을 일들이 무감각해진다. 이 전쟁을 끝내야 하니까.

인질들에 대한 고문에 대한 내 생각과 다른 기사단들의 생각은 달랐다. 다른 기사단들과의 마찰로 한동안 나는 모든 임무에서 제외 됐었다. 모두들 내가 약하다고 했다. 전쟁에서 약한 건 죽는다는 걸 의미한다고 했다. 상대쪽에서 사용한 방법이 유리하다면 망설이지 않고 사용한다. 그리고 전쟁을 끝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는 듯이 합리화 해버린다. 전쟁이 끝나야 하니까. 내가 사용하지 않으면 적이 사용한다. 그들이 죽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 죽는다는 게, 지금 사는 것 만큼 고통스러울까?

지팡이를 가져가 철문에 자물쇠를 풀었다. 옆에 있던 촛대를 들고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갔다. 피로 물든 인질에게 다가갔고, 말포이가 있었다. 문 옆 테이블에 촛대를 놓고 그 옆에 의자에 앉았다. 말포이는 움직이지 않았다.

서로의 움직임을 찾고 있었을까, 한동안 그렇게 우리는 그 공간에 같이 있었다.

기사단은 그를 고문했다. 볼드모트의 위치, 죽음을 먹는 자들의 본거지, 그는 모두 알고 있었지만 말하지 않았다. 그가 슬리데린이었기 때문에 기사단은 그의 침묵에 의아해 할 뿐이었다.

매번 말포이를 볼 때마다 그는 점점 약해졌다. 침묵의 주문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는 주문에 묻힌 비명들과 함께 점점 사라졌다. 그렇게 내가 말포이를 발견한 첫날처럼 앉아 있는다. 그냥 앉아 있는다.

Quand sera-ce la fin?
"끝나기는 할까?"

말포이가 고개를 들었다. 여기저기 얼룩진 상처들과 멍으로 엉망이었다. 그의 눈동자가 차갑게 나를 향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내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는 사실을. 그 차가운 시선 뿌리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왜 감정하나 없는 공허함이 가득한 그 회색 눈동자를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었을까? 내 머리 속에서 질러대던 비명이 흐느낌으로 변했고, 내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다시 말포이를 찾아갔을 때 말포이는 더 이상 묶여 있지 않았다. 더러운 바닥에 피에 물든 채 쓰러져 있었다. 그는 힘들게 숨을 몰아 쉬고 있었다. 천천히 다가갔다. 내 손끝이 닿았을 때 그는 흠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잠깐 동안이지만, 숨겨뒀던 감정이 그의 눈동자에 아른거리다 이내 사라졌다. 두려움 이었을까?

Vient dire, si vous n'êtes pas, ils vont te tuer.
"그냥 말해, 그렇지 않으면 기사단은 널 죽일 꺼야."

말포이는 다시 바닥에 머리를 뉘이며 눈을 감았다. 나는 지팡이를 들어 간단한 치료주문을 몇 개 외웠다. 말포이의 숨소리가 한결 편해졌을 때 다시 말했다.

Vous n'avez pas besoin de dire toutes les choses. Vient dire, si vous n'êtes pas, ils vont te tuer.
"다 말하라는 아니야, 꼭 중요한 걸 말하라는 것도 아니야. 그냥 말해, 그렇지 않으면 기사단은 널 죽일 꺼야."

Quelle que soit dire, ils vont me tuer

"뭘 말해도 그들은 날 죽일 꺼야."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서 일까, 아니면 비명을 질러서 일까, 잔뜩 쉰 목소리로 속삭였다.

Étant mort, est-ce pire que maintenant? vivante?
"죽는다는 게, 지금보다 더 나쁘기는 한가?"

말포이는 코웃음을 치려고 했지만, 이내 마른 기침과 함께 피를 토했다. 그리고는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천천히 다가가 그가 몸을 일으키는걸 도왔다. 몸을 일으키고는 벽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Weasley, Enfin vous avez un sentiment de mépris.
"위즐리, 드디어 어떻게 모욕하는 건지 배웠나 보군?"

Malfoy.
"말포이."

이미 말라붙은 피와 방금 토해낸 피가 입술 끝에 맺혀있었다. 내 손끝이 그 입술에 닿았을 때, 죽을 만큼 싫어했던 그의 웃음이 입술 끝에 걸렸다.

Nous savons, où votre siège social est. Votre doesnt côté avoir assez de temps.
"죽음을 먹는 자들의 본거지를 알아냈어. 너희 쪽이 무너지는 건 시간문제야."

"..."

Vérité. Mon côté vous tueront. C'est la façon dont notre. Aucun d'entre eux ont été vivant.
"맞아. 기사단은 널 죽일 꺼야. 그게 기사단 방식이야. 고문했던 죽음을 먹는 자들 중에 산사람은 단 한명도 없어."

"..."

J'ai choisi mon côté, vous avez choisi votre camp. Quelles sont-elles différentes?
"내가 선택한 기사단, 네가 선택한 죽음을 먹는 자, 뭐가 다를까?"

엄지손가락으로 피를 닦아 내고, 나는 내 몸을 기울여 그의 볼에 키스했다. 마치 지니에게 키스하는 것처럼 가벼우면서 마음을 담아, 아니면 작별 인사처럼 조금 망설이듯이. 내가 다시 몸을 일으켰을 때, 말포이는 천천히 눈을 뜨며 말했다.

Nous avons pris de mauvaises décisions.
"우린 선택을 잘못했어."

무슨 뜻일까? 어떤 선택? 전쟁이라는 것이 이런 것인 줄 몰랐기 때문에 여기까지 왔다. 소중한 사람을 잃고, 소중한 사람을 잃게 하고, 잔인해지고, 감정에 무뎌지고,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 어떤 것이 틀린 것인지 모든 시비가 구름 속을 헤매는 것처럼 불명확하게 하는. 왜 다 경험해보고 난 다음에야 시작한 쪽이든, 막으려는 쪽이든 결말은 모두 같을 거라고 미처 미리 생각하지 못했을까. 어차피 결말은 양쪽 모두에게 불행할 꺼라고는 왜 생각하지 않았을까.

말포이가 말한 그 선택이라는 것, 지금 걷고 있는 이 길 말고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선택권이 나한테 있었던가? 애초에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정해진 길을 걷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다른 길이 있기는 했나?

밖에서 들리는 작은 인기척에 나는 문쪽을 향해 걸어갔다. 말포이가 말한 잘못된 선택의 대가를 우리는 곧 치룰 것이고, 그 선택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죽음을 먹는 자들의 본거지를 소탕한 이후로 볼드모트쪽의 세력이 급격하게 약화되어갔다. 헤르미온느와 다른 기사단들과 함께 사무실에 모여 인질들에 대한 처리문제에 대해 이야기 하게 되었다. 내가 선택한 쪽은 선이었다. 그리고 말포이가 선택한 쪽은 악이었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선과 악에 대한 경계는 점점 모호해졌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같아졌다. 헤르미온느는 기사단이 죽음을 먹는 자들을 고문했다는 사실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기를 바랬다. 그래서 인질들을 죽여온 것이고, 말포이도 그렇게 될 것이다. 헤르미온느가 천천히 말을 꺼냈다.

"이제 곧 볼드모트의 위치가 정확해 질 꺼야. 그러기 전에 지하던전에 있는 죽음을 먹는 자들부터 처리해야 해."

"아직 볼드모트의 위치가 정확하지 않아. 볼드모트를 죽인 후에 처리해도 늦지 않아."

그렇게 말포이에게 약간의 더 시간이 주어졌다.

그리고 볼드모트가 해리포터의 손에 죽었다.


천천히 내 책상에서 일어나 지하 던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헤르미온느의 손짓에 잠깐 멈춰 섰다. 그녀의 손이 내 어깨 위에 자리잡았다. 그리고 물었다.

"론, 할 수 있겠어?"

헤르미온느의 눈을 쳐 다 보았다. 예전에 알던 책 읽기를 좋아하고 친구들을 걱정하던 소녀의 눈은 지치고 공허했다. 고개를 끄덕이고 미소를 지으려고 시도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그녀도 미소를 짓는데 실패했다. 나는 다시 내 발걸음을 지하 던전으로 옮겼다.

내가 말포이의 방에 들어 섰을 때 그는 벽에 기댄 체 눈을 감고 있었다. 그는 내가 왜 왔는지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내가 첫날 말포이의 방에 왔을 때처럼 그 의자에 앉았다. 말포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Je ne veux pas mourir
"난 죽고 싶지 않아."
만약, 기사단이 지고, 죽음을 먹는 자가 이겼다면 어떻게 됐을까?

Que faire si..?
"만약..."

Si j'ai gagné, serait-il différent?
"만약 내가 선쪽이 이겼다면, 달라졌을까?"

말포이가 대신해서 내 질문을 끝내주었지만, 우리는 둘 다 대답을 찾지 못했다. 그가 산다고 해도 그에게 남겨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의 부모님도, 그가 항상 자랑했던 말포이의 명예도. 살게 된다면 잘못된 선택에 대해, 그리고 전쟁을 통해 잃어야 했던 것들에 대해 후회만 하며 살게 될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살고 싶어 한다. 론은 조용히 목에 걸려있던 목걸이를 풀었다. 흰색 수정이 내 손바닥 위에 놓여졌다.

Si vous rejoignez notre côté, on vous donne un pendentif avec un cristal.
"기사단에 가입하면, 모두에게 흰색 수정이 달린 목걸이가 배급돼."

조심스럽게 수정을 목줄에서 분리하고 문 옆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그리고 다시 말포이를 쳐다봤다. 말포이가 눈을 뜨는 것을 확인하고 나는 다시 흰색 수정을 쳐다보며 말했다.

L'ingestion du cristal de vous tuer avant que tourmenté.
"이 수정을 삼키면, 고문 당하기 전에 죽을 수 있어."

Je ne veux pas mourir.
"난 죽고 싶지 않아."

말포이는 천천히 자기 몸을 일으켜 내쪽으로 걸어왔다. 내가 앉아 있는 의자 바로 앞에 서서 차가운 손으로 내 얼굴을 자기 쪽으로 고정시켰다. 그리고 속삭였다.

Tu veux mourir.
"넌 죽고 싶지."

나는. 나는. 그럴지도. 머리 속에 울리는 이 비명소리, 죽게 되면 더 이상 들리지 않을지도 모르지. 나는 이긴 쪽에 서있는데, 너는 쓰러진 쪽에 서있다. 나는 내 삶에 의심을 갖는데, 너는 네 삶에 의심 갖지 않아. 매 순간 너는 살아있는데, 나는, 나는.

말포이의 눈 속에 감정들이 휘몰아 치고 있다. 그 동안 단 한번도 볼 수 없었던 삶을 향한 불꽃이 회색눈동자 속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내 눈 속에도 저런 불꽃이 있을까? 아니, 있었던 적이 있던가. 그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고, 상처로 거친 그의 입술이 내 입술에 닿았다. 차가운 손과 달리 따뜻하고, 살아 있는 그 입술로 나에게 키스했다. 천천히 고개를 들면서 그의 손이 내 얼굴을 떠났다. 그는 뒷걸음 치며 말했다.

Je veux mourir comme un magicien.
"마법사처럼 죽고 싶어."

quoi?
"뭐?"

Je suis un pur-sang. Je veux mourir par magie.
"난 순수혈통이야. 마법으로 죽고 싶어."

주머니에서 지팡이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 놓았다. 지팡이의 무게가 이렇게 무거웠던가. 내가 하지 않으면 누군가는 해야 할 일, 아니 꼭 내가 해야 할 일.

Je n'ai jamais utiliser la malédiction avant.
"난 죽음의 마법을 써 본적이 없어."

그는 코웃음 쳤다.

Tout comme les Weasley, tous les mêmes. Sraquer. Dire la malédiction.
"위즐리 답네, 그냥 다른 마법이랑 다를 거 없어. 지팡이를 겨누고 주문을 외우면 돼."

"..."

Weasley.
"위즐리."

"..."

죽이고 싶을 만큼 싫었다. 내 가족을 모욕하고 내 친구를 괴롭히는 그가 죽이고 싶을 만큼 밉고 싫었다. 그리고 지금 그가 나에게 자신의 죽음을 제의해온다.

Weasley, Je ne vais pas vous blâmer, Ne traînez pas.
"위즐리, 원망하지 않을 테니까, 더 이상 끌지마."

지팡이에 손을 가져갔다. 말포이의 회색 눈이 묽어졌다. 내 시야도 묽어진다.

Adana Kedavra.
"아다바 케다브라."

그가 바닥에 쓰러지기 전에 그의 몸을 내쪽으로 끌어당겨 안았다. 방금 전까지 살아 있었던 그의 몸은 차가웠다. 굳게 닫힌 눈꺼풀 사이에 물방울이 맺혀 있었지만 끝내 떨어지지 않았다.

죽을 때 까지 너는 말포이. 말포이는 울지 않는다더니, 정말 그는 울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대신 울고 있다.

얼마나 그를 붙잡고 있었을까, 천천히 테이블 위에 흰색 수정을 더듬어 찾는다.

그리고 삼킨다. 너를 안고 벽에 기댄다.

드디어 내 머리 속에서 내내 지르던 비명이 사라진다.

비명.

침묵의 주문으로 묶여있는, 다른 사람은 들을 수 없는 나의 비명.

Gross Misunderstanding

그날 밤 대체 어떻게 정원에 나가게 되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눈이 내렸다는 사실과, 손끝에 감각이 무뎌질 정도로 추웠다는 것. 그리고….

의미 없고 재미없는 뻔한 문학작품들의 사랑이야기에 코웃음 치며 그럴 일이 영원히 없을 거라고 자신했던 드레이코는 학기가 시작함과 동시에 자신의 아둔함에 후회했다. 자신의 위선에 후회했다. 어느 순간 계속해서 고정되는 시선을 작은 한숨과 함께 내뱉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들려오지 않는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들 사이에 그의 목소리가 함께 들린다. 드레이코가 아닌 다른 사람을 향한 그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감미롭다.

“위즐리.”

“말포이.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드레이코는 항상 해오던 못된 말들과 모욕을 찾았지만, 이미 그의 머릿속은 그에 대한 감정으로 넘쳐흘러 아무것도 선명하게 보이지 않았다. 드레이코의 반응을 기다리던 그레인저의 손이 그의 팔뚝위에 자리 잡고 조용히 내뱉어진 그녀의 말에 드레이코의 마음은 또 한번 가라앉는다.

“론, 무시해.”

몸을 돌려 그리핀도르 쪽으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이 조금만 더 곁에 머물러 주기를 바라는 듯 코너를 돌아 그의 모습이 사라진 한참 뒤에도 드레이코는 멍하니 텅 빈 복도를 바라보며, 스스로가 얼마나 처절하고 멍청한지 되새겼다.

축 늘어진 어깨로 슬리데린 기숙사 안으로 들어오는 드레이코를 발견한 팬시는 곧 그의 팔에 붙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떠들어 댔지만, 드레이코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해야 할 숙제들이 남아있었지만 드레이코는 그대로 침대 위에 몸을 묻었다. 얼마쯤 자고 일어났을까? 기숙사 침실 안쪽은 다른 학생들의 일정한 숨소리에 천정을 올려다보고 있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밖에는 조금씩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이미 바닥에 조금 쌓여있었다.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그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것은 갈수록 더 어려워질 뿐이었다. 건물에 둘러싸인 오래된 정원 벤치에 앉아 쌓이는 눈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떠오르는 태양에 파랗게 물든 새벽의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기숙사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기숙사 안으로 들어올 때에는 눈이 복사뼈를 살짝 넘을 정도로 쌓였다.

그가 바라보는 그. 드레이코에게 절대로 나누어 주지 않을 부드럽고 따뜻한 시선. 한동안 멍하니 그가 쫓는 그를 본다. 그의 곁에 있을 수 있는 그녀를 본다. 잠깐 마주쳐진 그와의 시선을 힘겹게 피하고 다시 테이블위로 시선을 옮겼을 때, 드레이코의 마음은 더 이상 찢겨질 곳이 남지 않아 가슴에 가득찬 감정이 스멀스멀 흐르고 있었다.

발목까지 쌓인 눈을 밟고 정원에 낡은 벤치에 또다시 앉았을 때, 끝내 표면을 넘어 흘러넘친 눈물을 닦아내는 것을 잊은 채로 감정에 잠겨 오직 그만 생각하고 있을 때, 누군가의 인기척이 들려왔다. 눈물로 흐려진 시야로 들어오는 붉은색 머리카락, 주근깨 가득한 그의 얼굴. 얼마나 밖에 오래 앉아 있었을까?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느껴지는 그의 온기가 따뜻했다.

“난 알아, 네가 누굴 보고 있는지.”

그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에 드레이코는 잠깐 동안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단 한번도 그가 드레이코에게 이런 목소리로 말을 해줬던 적이 있었나? 내가 보는 그가 누구인지 안다는 그는 정작 나를 보지 않는데, 그게 무슨 소용이지?

“그리고, 그는 나를 보지 않지.”

눈물에 잠긴 목소리가 바람에 묻힐 듯 조용하게 드레이코의 입을 빠져나오고 붉은색 머리를 한 소년의 고개가 떨구어진다. 한참동안 그렇게 있다가 그가 일어났다. 그를 붙잡으려는 듯 따라 일어난 드레이코의 손이 그의 어깨에 닿았다. 가던 발걸음을 살짝 돌린 그의 얼굴은 슬퍼보였다.

양손을 들어 그의 뺨에 감싸고 언제 닿았는지 모를 입술에 차가운 몸이 녹아내렸다. 느끼기에는 부족했지만, 닿았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는 만큼, 딱 그만큼만.

거칠게 뿌리쳐진 손으로 발목보다 조금 더 쌓인 눈을 집으며 뒤로 넘어졌다.

“말포이! 무슨 짓이야.”

화가 난 그의 얼굴, 드레이코에게 익숙한 그의 얼굴. 새빨갛게 달아올라서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그의 표정. 하지만 익숙한 그 표정이 그 날 눈 덮인 정원에서 그 표정이 낯설었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드레이코는 새벽의 텅 빈 정원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을 짧은 입맞춤을 생각하며, 그를 향해 쫓아지는 시선을 저주하며 벤치에 앉아 있었다.

“나도 몰라.”

나지막하게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드레이코의 눈동자 한가득 붉은 그가 보였다. 그의 커다란 손, 그의 따뜻한 숨결, 거친 숨소리. 내 입술에 닿은 그의 입술.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향한 그의 입술.

그는 드레이코에게 묻지 않는다. 그는 그냥 드레이코를 만진다. 그가 드레이코에게 닿을 때, 그는 눈을 감는다. 마치 그와 함께 있는 사람이 드레이코가 아니라 그가 항상 보고 원하는 그 사람을 생각하는 것처럼. 굳게 감긴 그의 눈을 애써 피해보지만 그와 함께 있는 사람은 그가 아니라 드레이코라는 것을 말하고 싶지만, 함께 있는 그 순간이 너무나 꿈같아서 한마디라도 더 했다간 모든 것이 깨져 버릴 것만 같아서 하고 싶은 말을 삼킨다. 혹시라도 전해질까 그의 눈을 스치는 드레이코의 손길이 가늘게 떨린다. 드레이코의 손길에 떠진 파란색 눈동자를 애써 고개를 돌려 피하며 조금 더 그와 가까워지기 위해 몸을 옮긴다. 함께 있지만, 만져지지만 너무나도 멀어서 외롭고 아프다.

오페라에서는 항상 주인공들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 말도 안되는 이야기라고 항상 비웃었던 드레이코는 후회했다.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고 자만했던 과거를 후회했다.

살짝 언 호숫가 표면 아래로 끝없는 물이 보인다. 그의 입술이 잠깐 머물렀던 입술이 아직도 따뜻하지만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에 금방 식어버린다. 드레이코의 욕심은 끝이 없어서, 계속해서 원하게 된다. 그의 따뜻한 손, 가슴, 입술, 하지만 차가운 그의 마음.

어두운 이 물 속으로 사라지면 더 이상 후회할일도, 아플 일도 없겠지. 호수위를 바라보는 그의 표정 역시 나와 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어서 일까? 어둡다.

아마 차갑고 어두운 이 물은 나를 삼키겠지. 너를 향한 내 감정도 함께 삼켜서 결국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되겠지. 너의 눈 속에는 내가 없다는 것을 매번 확인하면서 왜 나는 너의 그가 아닌지 후회하지 않아도 되겠지.

옆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는 멍청한 위즐리를 바라본다. 호숫가 표면 위에 고정된 너의 시선은 움직여지지 않는다. 나는 조심스럽게 몸을 너에게로 기대어 귓가에 속삭인다.

“난 여기 있었어. 위즐리.”

그리고 칠흑 같은 어둠으로 몸을 던진다. 이제 곧 너를 향한 내 마음과 너로 인해 했던 후회는 사라질 것이다.


운명의 사랑이라는 것, 론은 믿지 않았다. 익숙하고 친근한 사람들 사이에서 언젠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을 찾게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런 론에게 그는 반짝반짝 빛이 났다. 손에 쥘 수 없어서 더욱 빛나는 별처럼. 론은 보통 이렇게 감성적이지 않았지만 그를 보면 그는 세상에 그 누구보다 더 가슴 아픈 시를 쓰는 시인이 되었다. 친구들의 시답지 않은 농담에 맞장구치며 웃고 있는 론의 마음은 이미 그로 가득 차서 뭘 듣고, 뭘 말하는지 하나도 알 수 없었다.

“위즐리”

만약 그가 내 이름을 불러준다면 나는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그는 알까?

“말포이. 원하는 게 뭐야?”

나를 보는 그의 눈동자에 뭔가가 있지만, 정확히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아마도 질투일까? 그가 쫒는 시선의 중심에 항상 자리하는 내가 싫은 걸까? 그가 보는 그는 내가 감히 넘지 못할 만큼 대단하고 중요한 사람이니까. 그의 시선의 중심에 서게 된다면 어떤 기분일까? 그의 시선이 나를 쫓는다면 어떤 기분일까?

헤르미온느의 손이 어깨에 닿으며 그녀의 목소리가 론을 다시 현실로 끄집어 내었다.

“론, 무시해.”

헤르미온느의 말처럼 무시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녀의 손길에 끌려 기숙사로 향하는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아직도 나를 보고 있을까? 뒤돌아서 확인해보고 싶지만 이미 텅 비었을 복도를 볼 용기가 선뜻 나지 않는다.

기숙사 안쪽은 언제나 그렇듯 시끄럽고 바쁘다. 밀린 숙제를 하느라 늦게까지 잠자리에 들지 못한 론의 시선이 창문에 잠깐 머물렀다.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파자마로 갈아입고 침대에 누우려는데 창문 끝에서 보이는 정원 안쪽의 작은 그림자가 움직였다. 창가 쪽으로 다가서며 커튼을 좀더 재치고 늦은 시간에 과연 누구인지 보기 위해 차가운 유리에 얼굴을 가져갔다. 그였다.

그의 머리 위로 하얀 눈이 쌓였다. 당장 다가가서 털어주고 안아주고 싶지만, 그가 원하는 것이 론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아는 론은 창가에 서서 그가 다시 기숙사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그렇게 보고만 있었다.

연회장에서 수업시간에 해리를 쫓는 그의 시선은 항상 론의 주변을 머물렀다. 그는 어쩌면 론을 원망하는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잠깐이지만 마주친 그와의 시선에 급하게 고개를 돌렸지만, 혹시나 또 마주칠까 싶어 든 시선을 너의 고개 숙인 얼굴이 채울 때면 론은 해리가 미웠다. 왜 나는 해리가 될 수 없는지 내가 미치도록 싫어졌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그는 같은 자리에 있었다. 더 이상 어둠 속에, 추위 속에 그를 혼자 둘 수 없다고 생각한 론은 그에게 다가갔다. 차가운 겨울바람도 얼릴 수 없는 그의 뜨거운 눈물이 그의 창백한 뺨을 가르는데 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멍청하게도 그에게 현실을 말해주는 것뿐.

“난 알아, 네가 누굴 보고 있는지.”

시선을 옮기려는 내색도 않은 채로, 마치 내가 와 있었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그의 눈물에 잠긴 목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그리고, 그는 나를 보지 않지.”

'너 역시 나를 보지 않잖아.' 목구멍을 비집고 나오려는 목소리를 겨우 억누르고 그가 항상 앉아 있는 벤치 끝에 앉았다. 소리 없이 계속해서 흐르는 그의 눈물을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해리에게 그를 봐주라고 할까? 그럼 나는? 그를 향한 내 마음은? 머릿속을 채우는 생각들로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나의 무능력함에 너무 화가 나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가볍게 닿은 그의 손이 어깨에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 그를 봤다. 눈물로 붉어진 눈시울, 내가 닦아줘도 될까? 뭔가 하기 전에 그의 차가운 손이 내 뺨에 닿았다. 살짝 감긴 그의 속눈썹에 걸린 눈물이 점점 가까워졌다. 차갑고 거친 그의 입술이 내 입술에 닿았다. 그대로 시간이 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마음속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그가 원하는 건 네가 아니야 론.’

손을 뿌리치고 그를 밀어냈다. 힘없이 눈밭위로 떨어진 그를 다시 일으켜 안아주고 싶었지만 너무 화가 났다. 그가 보는 사람이 내가 아니라 해리라는 점이, 그런데 해리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점이, 그런데 나는 그런 해리가 고마운 것이 화가 났다.

“말포이. 무슨 짓이야?”

그의 얼굴에 후회가 가득하다. 그는 나를 통해 해리를 보겠지. 그는 나를 통해 해리를 느끼겠지. 재빨리 기숙사 안으로 들어왔다. 기숙사 안은 조용했다. 침대쪽으로 걸어가는 길에 해리의 모습이 보였다. 해리가 미웠다. 해리가 될 수 없는 내가 미웠다.

며칠 동안 계속 그를 시선으로 쫓으며 머릿속을 계속해서 메우는 입맞춤을 생각했다. 그가 보는 게 내가 아니면 어때? 어차피 그와 함께 한다면 의미 있을지도 몰라.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정원에 서있었다.

“나도 몰라.”

나지막이 뱉어진 목소리가 공기 중에서 사라지기 전에 내 손이 그의 뺨에 닿았다. 혹시 이렇게 하면 그가 내 마음을 알아줄까 싶어서 온 마음을 담아 입을 맞췄다. 비록 그가 원하는 사람이 내가 아니지만, 비록 그가 나를 이용하는 것뿐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지만 멈출 수 없었다.

눈을 떠버리면 모든 게 꿈이 될 것만 같아서, 그가 바라보고 있는 게 내가 아니라는 것이 보일까봐 나는 그가 만들어내는 나밖에 들은 적 없을 소리들을 마음에 새긴다. 언젠가 그의 손이 내 눈에 닿았을 때, 어쩌면 그가 나를 원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부풀어 눈을 떴지만, 금방이라도 사라질 연기처럼 묽은 그의 눈동자는 나의 시선을 피한다. 그와 함께 있는 건 난데. 그가 보는 건 내가 아니다. 나를 향해 가까워지는 너의 몸이 어째서 차갑게 느껴지는 걸까.

그날은 밤늦게까지 정원에 사람들이 많았다. 그와 나는 사람들을 피해 호숫가 근처로 자리를 옮겼다. 차가운 바람에 거칠어진 그의 입술은 쉽게 트고 피가 났다. 조심스럽게 핥아 적셔놓으면 차가운 바람에 또다시 트는 네 입술을 계속해서 핥아주고 싶지만, 그건 단지 내 욕심일 뿐.

호수의 표면이 아주 살짝 얼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물결을 따라 표면에 언 얼음 위로 물이 넘친다. 함께 있으면 있을수록 그를 향한 내 마음처럼 금방이라도 얼음을 박차고 쏟아질 것 같은 어두운 호수물이 바람에 넘실거린다.

“난 여기 있었어. 위즐리.”

내 귓가를 스친 그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지만 그의 몸은 이미 물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얇은 얼음이 깨어지는 소리와 함께 첨벙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늦은 시간이라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다. 론은 드레이코가 물속으로 사라진지 얼마 되지 않아 곧 뛰어들었고 힘없는 드레이코의 몸을 이끌고 호숫가 표면으로 나오기 위해 얼음과 싸우고 있었다. 물에 젖은 두 사람을 차가운 겨울바람은 무모한 패기에 벌이라도 주려는 듯 더 세차게 불었다.

가까스로 표면위로 나온 론의 가슴에 안긴 드레이코는 의식이 없었다. 몸을 세차게 흔들고 보건시간에 배웠던 인공호흡을 시도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드레이코의 입안에서 물이 흘러 나왔다. 떨리는 몸을 이끌고 드레이코를 부축한 론은 근처에 헛간으로 몸을 옮겼다.

“미친놈. 넌 미쳤어 말포이. 넌 미친 거야.”

떨리는 목소리로 계속해서 저주하며 헛간으로 몸을 옮긴 론은 근처에서 몸을 따뜻하게 해줄만한 것을 분주하게 찾았다.

“말포이! 이 멍청이. 넌 미쳤어.”

힘없이 바닥에 축 늘어져 있던 드레이코는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얼굴을 양손에 묻으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덮을 것을 찾은 론이 드레이코쪽으로 다가와 그를 일으켰다. 젖은 드레이코의 옷가지를 벗기며 말했다.

“넌 미쳤어.”

론의 손을 뿌리치며 그의 푸른 눈동자를 눈물이 가득한 회색눈동자와 묶였다.

“이게 다 너 때문이야. 그냥 죽게 내버려 두지 대체 왜! 쓸데없는 그리핀도르 동정 따위 이제 필요 없어.”

“집어 치우고 얼른 벗어.”

퉁명스러운 론의 목소리에 드레이코는 소리 질렀다.

“무슨 상관이야! 내가 아파서 죽던 말든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네가 보는 건 내가 아니잖아!”

날카롭게 질러진 드레이코의 목소리에 론은 짜증난다는 듯이 드레이코의 옷가지를 거칠게 벗겨내며 말했다.

“너는? 너는! 네가 보는 것 역시 내가 아니잖아!”

서로 아무 말 없이 보고 있다가 론과 드레이코는 찾아온 작은 담요에 몸을 묻었다. 더 이상 혼란스럽지 않은 두 사람의 눈동자가 서로를 마주했다.

영직


1.

혜문왕이 죽고 혜후가된 미주는 미월이 바란대로 초나라로 보내주는대신 연나라로 보냈다. 일찍이 잦은 영역다툼으로 사이가 좋지않은 연나라에 미월은 이제 막 10살이 갓 넘은 영직과 머리가 하얗게 샌 규고를 데리고 먼길을 떠나야했다.준비해준 마차는 다 낡고 망가진것이라 10리를 가지못해 망가져 걸어야했고, 진나라를 벗어나자 그들을 호위하던 군졸마저 모두 진나라로 돌아가버렸다. 출발할때는 연꽃이 더위에 이슬을 뱉던 여름이었으나 도착했을때는 눈발이 날리는 겨울이었다.

미월이 연나라로 오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영토분쟁은 일어났고, 연궁에 도착했을때 미월이 당한 고초와 수모는 몇년이 지난 영직에 마음에 아직도 응어리로 남아있다. 연왕가에서 하사한 집은 근처 농가보다 못한수준이었고 먹을것도 입을것도 아무것도 없었다. 게다가 날씨는 어찌나 매서운지 규고와 영직은 겨울 내내 기침을 달고 살아야했다. 다행히 미월의 동생 위염과 백기가 근근히 사람을 보내 보살피지 않았다면 영직은 매서운 북연의 겨울바람에 죽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미월은 그런 영직을 위해 손수 죽간을만들고 알고있는 지식을 써서 글을 팔았다. 하지만 연나라는 나라가 기울었는지 글공부를 하는 사람은 없고 매일 춤과 연회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영직은 매일 사서, 삼경 등의 글을 매일매일 죽간에 옮겨적으며 글공부를했고, 미월은 데려온 시종과함께 하루종일 수를 놓아 먹을것과 장작을 구했다. 배를 곯거나 장작이 없어 미월과 꼭 붙어자야하는 날도 많았다.

영직은 찬바람에 튼손을 호호 불며 시장에 앉아 죽간을 팔았다. 하루종일 장에 앉아서 글을 팔아도 하루에 죽간한책도 팔지 못하는 날이 더 많았다. 다행인것은 미월이 놓은 수는 금방 입소문을 타서 일정한 수입이되었다. 영직의 하루일과는 해가뜨면 죽간을 들고 장에 나가고, 해가질때쯤 돌아와 수를놓는 미월 옆에서 죽간을 만들거나 베껴쓰다 잠드는것이 고작이었다.

어느날은 죽간을 팔고있는데 어떤 소년이 다가와 물었다. "무슨책을 파시오?" 영직은 가지고있는 죽간을 하나하나 짚으며 설명했다 "이것은 시경이고, 이것은 사서, 이것은 삼경이오 혹시 다른 서책이 필요하다면 말해보시오." 소년은 죽간을 펼쳐 이리저리 살펴보다 말했다 "이것은 이미 알고있는 내용이오.. 혹시 병법은 없소? 노자도 좋소이다" 영직은 과거 지금은 진왕이된 영통의 글공부를 도울때 영통의 고집으로 읽었던 여러 병법서가 떠올랐다. 영직은 신이나서 그때 보았던것들을 그 소년과 한참 이야기했다.

소년의 옷차림은 허름했지만, 그는 왕실에서 공부한 영통과 말이 통할정도로 똑똑했다. 영직은 소년에게 자신이 알고있는것들을 정리하여 내일까지 죽간으로 묶어오겠다고 소년과 약속했다. "나는 영직이라하오, 당신은 이름이 무엇이오?" 소년은 수줍은듯 대답했다. "나는 남문 문지기의 아들 문덕이라하오, 무관이되기위해 공부중이오." 영직은 활짝웃으며 문덕에게 악수를 청했다. " 꼭 죽간을 사지않아도 좋으니 종종 내 말벗이 되어주시오"

집으로 돌아온 영직은 오늘만났던 소년에대해 미월에게 말했다. 그녀는 수를 놓으면서 영직이 기억했던 병법서를 읊어주었다. 미월은 영작이 또래 소년과 어울릴수 있게된것아 기뻤다. "혹 그 아이가 사정이 여의치않아 죽간을 살수 없으면 그냥 주어도 좋다" 라고말한 미월의 말에 영직이 활짝 웃었다. 미월은 공부한내용을 잘 기억한 영직이 기특하기도 했고, 하지 않아도 될 고생을 하면서도 잃지않은 어진마음이 고마웠다.


2.

날씨가 점점 따뜻해지고 영직과 문덕은 종종 어울려 놀았다. 미월의 바느질 솜씨는 입소문을타고 연왕궁에서까지 찾게되었다. 그때문에 예전보다 더 바빠졌지만 형편은 점점 나아져, 영직은 오전에만 죽간을 팔고, 오후에는 땔감을 주우러 다녔다. 문덕은 서툴은 영직을 살갑게 챙겼는데 그의집은 영직이 살 고있 는 집에서 멀지않아 둘은 금방 친해졌다.

문덕의 아버지는 문지기가 되기전 고향에서 현령의 위였는데 원정을 나온 비장군의 눈에들어 도성으러 와서 진사를 할정도로 출신에비해 무예가 출중한 사람이었다. 어머니는 현령의 첩실의 딸로 의학을 공부하여 약방을 하였다. 하지만 그 규모가 작고 날때부터 어진사람이라 살림에 큰 보탬이 되지 않았다.

어느날은 영직과 함께온 시종중에 하나가 노환으로 고생할때 문덕의 어머니가 기를 보양하는 약재를 주기도하였고, 가끔 미월을 보러오는 위염이나 백기가 문덕의 부모님께 몰래 사례하기도 했다. 문덕과 영직은 허물없이 좋은 친구가 되었다.

날이 풀리자 가지끝에 초록색 멍울이 앉았다. 문덕과 뗄감을 주우러나온 영직이 메고온 망태기안에 바닥에 떨어진 나뭇가지를 주우며 말했다. "봄이 온것같은데 아직도 이렇게 춥다니, 연나라는 봄이라는것이 안오는가봐." 문덕은 허허 웃으며 말했다 "녹는 눈을 보면 모르겠어? 연에서는 눈이 녹는다는게 봄이 왔다는 증거야." 한참 뗄감을 주우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영직이 물었다. "어째서 무관이 되려는거야? 문관이 되어도 너는 충분히 잘할수 있을것 같은데.. 차라리 어느 고관대작을 찾아가 책사가 되게 해달라고 하는것은 어때?" 문덕은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고작 진사의 아들이 무슨 명분으로 그러겠어 내말을 들어보기도 전에 문전박대 당할거야."

돌아오는 내내 기분이 안좋아보이는 문덕을보고 영직은 괜히 미안해졌다. 그리고 자신의 미래역시 불안해졌다. 문덕은 자신의 꿈이있고 목표도 있는데 영직은 자신의 미래에 대해 크게 생각해본적이 없었다. 그저 미월이 이끄는데로 끌려갈뿐이었다.

겨울이 두번 지나가고 미월도 영직도 생활에 익숙해질 무렵 갑자기 도성이 시끄러웠다. 제나라와의 협상이 좋지않게 끝났고, 그때문에 여러사람이 징집되었다. 문덕의 아버지도 징집대상이 되었고 문덕도 만약 길어진다면 내년에는 징집대상이 될터였다. 문덕의 아버지는 떠나기전에 미월을 찾아와 예를 갖추며 아내를 부탁했고 미월은 문덕의 어머니와 문덕을 받아주었다.

제나라 뿐만아니라 위나라까지 합세하여 연나라를 공격하자 도성을 떠나 피난을 가는 사람이 생겼다. 문덕과 문덕의 어머니는 문덕의 아버지를 기다리기 위해 떠나지 않았고, 미월과 영직은 진나라의 볼모이기때문에 그곳을 떠날수 없었다. 피난을 떠난 사람이 많아 도성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미월의 바느질도 문덕의 어머니의 약초도 찾는사람이 없다보니 점점더 형편이 팍팍해졌다.

문덕의 식구까지 함께 살다보니 문덕과 영직은 곧잘 형제처럼 붙어다녔다. 아비에게 배운 무예나 검술을 영직에게 가르치기도했고 죽간을 만들거나 배껴쓰는것을 도우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느날은 두 사람이 살림에 보탬이 될까하여 강에서 낚시를 하고 있었는데, 그곳까지 병졸들이 닥쳤다. 도성내에는 연황제가 다른나라에 몸을 의탁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났다.

어느날밤에 미월은 문덕의 어머니를 불러 말했다. 아무래도 상황이좋지않아 자기 동생들에게 서신을 넣었고, 곧 자신을 데리러 올거라고, 혹여 동행하겠다하면 문덕과 함께 거두겠다고. 하지만 문덕의 어머니는 남편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본인은 남겠다고, 대신 문덕을 거두어달라고 부탁했다. 미월은 동생인 백기와 위염이 자신들을 데리러 올때까지 설득했으나 결국 고집을 꺾지 못했다. 결국 미월은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고 문덕을 거두기로 했다.


3.

먹을것을 찾기위해 밭쪽을 헤메던 미월의 시종은 예전 초나라 재상의 아들이었던 황헐을 만난다. 연나라에 인질로 와 있는 것이라 피난을 가지 못하는 미월의 딱한 처지를 듣고 그 이야기를 연나라 재상에게 해주기로 약속했다. 얼마 지나지않아 그들은 황헐을 따라 초나라를 향했다.

초나라로 향하는 인원은 많지않았다. 마차안에는 미월과 초나라 공주시절부터 미월을 모셔온 하녀, 그리고 문덕과 영직이 있었고, 말을탄 황헐과 황헐의 호위 3명 그리고 마부 한명이 전부였다. 그들은 남동쪽으로 큰산을 돌아가는 길을 선택했다. 미월은 마차안에서 문덕과 영직에게 예전 문혜왕과 나누었던 정치적인 이야기들을 해주었다.

날이 저물었지만 역참에 도착하지 못해 결국 야영을 하게된 일행은 산의 입구부분에 자리를 잡았다. 문덕과 영직은 불을피울 땔감을 함께 주우러 근처를 돌아다녔고, 황헐의 호위들은 산에들어가 산닭을 사냥했다. 사냥은 다행히 성공적이어서 산닭 두마리를 구워 나눠먹었고, 불가 근처에 앉아 잠을 잤다. 끝봄, 꽃도 다 지고 여름의 녹음이 짙어지는 날씨가 다행이었다.

도통 불편해 잠을 이루지 못하는 영직을 문덕이 뒤에서 끌어안았다. 문덕에게 기댄영직은 문덕응 한번 돌아보고는 차가운 문덕의 손을 제품에 안았다. 황헐과 앞으로의 계획을 이야기하고 잠사 눈을 붙이기위해 마차로 돌아왔을때 두소년은 서로를 꼭 끌어안고 곤히 잠들어 있었다. 미월은 영직을 뺨을한번 문덕의 어깨를 한번 쓰다듬고 근처에 앉아 눈을 붙였다.

연나라와 제나라의 경계에 다다랐을때, 연나라의 군대가 미월의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어쩔수없이 근처 역관으로 돌아가 상황을 살펴보기로 했다. 편치않은 생활에 몸이 약해진 영직은 역참에 도착해서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미월과 시녀는 부재중이었고 문덕은 영직의 땀을 닦아주며 자리를 지켰다.

"문덕, 어머니는 어디계셔?" 영직의 물음에 문덕은 밖응 살펴보고는 대답했다. "황대인과 앞으로의 일을 의논중이신것 같아" 참침대 곁에있는 의자에 앉아 영직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영직은 체온보다 낮은 문덕의 손에 얼굴을 붙이며 슬픈표정을 했다. "내가 얼른 일어나야 어머니께 방해가 안될텐데..." 문덕은 반대쪽 손으로 바꿔 영직의 뺨을 만지며 말했다. "연의 군대가 버티고 있는 동안은 아무것도 할수 없으니 방해될것도 없다. 그럴생각할 기운이나거든 밥을 좀더 먹고 건강해지면 되잖아." 말은 뾰족하게 나갔지만 영직을 쳐다보는 표정과 그를 돌보는 손짓은 다정했다.

한동안 발이 묶였다 그동안 연나라 왕실에 진나라 볼모에 대한 보고에 오해가 있었던 모양이다, 연나라의 제후가 찾아와 그동안의 고초를 사과하고 다시 연나라로 돌아갈것을 요청했다. 영직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을때는 또 다시 날씨가 추워지고 있었다. 연나라로부터의 미월에대한 처분이 몇주째 늦어지고 있었다.

역참은 잠시 머물러 가는곳이지 지내는곳이 아니었기때문에 황대인은 근처이 작은 집에 세를 내었다. 그 집도 연나라 도성에서 지내던 집과 크게 다를것이 없었지만, 몸을 잘쓰는 호위도 있고 이것저것 도움을 주는 식솔이 늘어서 그럭저럭 지낼만했다. 언제부터인가 호위들이 문덕과 영직에게 기초적인 체술을 가르쳐주었는데 문덕은 곧잘 따라했다. 가끔 황헐이 두 어린공자를 데려다 이런저런 병술을 가르쳤는데 책사의 소질이 있어보이는 문덕을 매우 마음에 들어했다.


4.

연나라의 연통보다 진나라의 대신이 먼저 도착했다. 혜문왕의 동생인 저리질이 보낸 용예라는 자였는데, 그가 영직의 형 무왕 영탕이 죽었다고 전했다. 그 때문에 혜후가 미월과 영직을 찾아 죽이려고 한다는 내용이었다. 용예는 자신이 호위할테니 연나라 군대를 뚫고 당장 진나라로 가야한다고 말했다. 미월은 황헐과 초나라로 가는것과 영직을 왕으로 만들기위해 진나라로 가야하는것중 하나를 선택해야했다.

그날밤, 미월은 영직을 데려다 얼굴이며 손발을 씻겨주며 물었다. "직아 너는 무엇이 되고싶으냐?" 영직은 유순하게 앉아 미월의 손길을 받아내며 대답했다. " 어머니 곁이라면 무엇이든 되겠습니다." 미월은 영직을 품에 안으며 말했다 " 내가 혹여 잘못된 선택을 한다해도 내 곁에 있겠느냐?" 영직은 미월을 마주안으며 말했다. "잘못된 선택이라도 어머니께서 내리신 결정이라면 곁에서 따르겠습니다." 미월의 머리속이 복잡해졌다.

다음날 아침 미월은 황헐에게 작별을 고하고 영직 문덕과 함께 진나라로 향했다. 제나라에서 진나라에 다다르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을때 저리질로부터 연통이 왔다. 혜주가 진나라로 들어오는 자들을 검문하고 확인한다는 소식이었다. 이제 이틀만 더 가면 진나라 도성 함양인데, 더 이상 다가가는건 너무 위험한 일이었다. 용예는 미월의 동생인 위염과 의거에 있는 백기에게 도움을 청했다.

국경으로 접어들기전 미월은 위염과 백기를 만났다. 하지만 역참에 머물고 있던중 괴한들에게 납치당하고 말았다. 미월의 납치소식을 알게된 위염은 재빨리 영직을 조나라로 빼돌렸다. 영직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서는 여러사람의 도움이 필요할것 같았다. 옆에있는 문덕이라는 소년이 꽤 살갑게 영직을 챙겼다. 위염은 문덕과 영직을 조나라 중대부가에게 둘을 맡기고 진나라로 돌아갔다.

조나라에서 지내는동안, 두 공자는 그 동안의 고생과는 정반대의 시간을 보냈다. 춥지도 않았고 배고플일도 없었다. 하루는 시장에 나가 제나라의 글자와 도량형을 구경하고 있었는데 문덕의 아버지를 만났다. 문덕의 아버지는 다행히 연나라로 돌아가 어머니를 데리고 무사히 제나라로 도망친 모양이었다. 영직은 마치 친아버지를 만난것러럼 크게 기뻐했다. 위염이 혹시 몰라 보내준 패물들을 문덕의 가족에게 주며 말했다. "가장 힘들때 벗이 되어 저와 저희 어머니를 지탱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것들로 그 감사를 모두 전할 수 없는게 부끄럽습니다." 문덕은 중대부가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고 거처를 부모님이 계신곳으로 옮겼다.

날이 따뜻해지고, 두 사람은 조나라에서 유명하다는 꽃놀이를 하러 근처 절에 놀러갔다. "매번 봄은 이렇게 오고 갔겠지?" 문덕이 말하자 영직이 눈으로 문덕을 쫓으며 말했다. "그간 인생이 고달파 이렇게 예쁜것들을 눈에 담지 못했네. " 문덕은 영직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전란이 들끓어 제때 씨를 뿌리지 못한나라의 백성은 전투에 휘말려죽거나, 약탈당하거나, 굶어죽겠지." 두사람의 마음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백성들은 조나라에 세금을내나 연나라에 세금을내나 어차피 이름만 다를뿐 일상에 아무런 변화도 없을텐데..."영직의 말에 놀란 문덕이 물었다. "만약 네가 왕이된다면 좋은 왕이 될수 있을것 같아" 영직은 문덕의말에 흐드러지게핀 봄꽃보다 더 활짝 웃었다.

중대부가의 도움으로 영직은 조나라에서 제일 명망이높은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는동안 문덕은 조나라 금위장군의 보병이되었다. 전쟁에 나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영직은 문덕을 잃을까 덜컥 겁이났다. 언제 떠날지도 모르는 자신과 달리 문덕은 전점 조나라에 정착하는듯 보여 내심 서운했던 영직이었다.

머릿속이 복잡해 날이 늦은줄 모르고 죽간을 붙들고 있던 영직은 어두워진 서고에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드는듯하여 서둘러 중대부가로 향했다. 그렇기 늦은 시간은 아니었지만, 달이 어 두워 서인지 길거리가 한적했다. 곧 이상한 기척을 느낀 영직이 발걸음을 재촉했다. "거기, 거기 파란옷을 입은 공자 어딜그리 급히가시오" 어둠속에서 괴한이 나타났다.

깜짝 놀란 직은 뒷걸음질 치다가 이내 다른사람에게 부딪혔다. "길도 어두운데 어디 고관대작집 공자님께서 이밤에 어딜가십니까?" 영직이 우물쭈물하자 앞에있던 괴한이 영직의 얼굴을 불빛쪽으로 돌렸다. 두눈을 꼭감은 영직의 얼굴을 본 괴한은 갸우뚱하며 물었다. "이 주변에서 본적이 없는 공자인데 뉘집 공자님이시오?" 영직이 덜덜 떨면서 입을 열려는 순간 뒤쪽에서 관복을 입은 자들이 다가왔다.

"이 밤에 뭐하시오?" 맨 앞에 있는 중후한 관병이 패거리에게 물었다 괴한은 영직의 얼굴을 놓고 어깨를 감싸며 관별에게 말했다. "공자님께서 밤의 즐거움을 모르신다기에 좀 알려드리려고 함께 기방에 가던차였습니다." 돌아서자 관병들중에 문덕이 보였다. 영직은 마음이 급해 괴한의 손을 뿌리치고 문덕이 있는곳으로 달려갔다. 관병은 패거리에게 "공자가 아직 어린데, 기방은 좀 이른듯하니 우리가 공자님댁에 모셔다 드리겠네 그대들은 갈길 가시게." 그렇게 말하고는 그들을 지나쳤다.

영직은 자신도 모르는새 문덕의 손을 잡고있었다. 미세한 떨림이 느껴지는 영직의 어깨를 감싸고 다정하게 괜찮냐고 물어오는 문덕을 보자 영직은 그동안과는 조금 다른 감정을 느꼈다.


5.

그 일이 있고난후, 중대부가는 문덕을 영직의 호위로 고용했다. 보병보다는 관직에서 멀었지만, 고관대작집의 호위로 일을하다보면 좋은기회가 있을지도 모를일이었기때문에 영직이 부탁했던 일이다. 영직이 스승을 찾아가 수학을 하는동안 문덕역시 귓동냥으로 이런저런 고서를 익혔다. 문덕은 조나라와 연나라의 글은 잘 알았지만 진나라의글은 잘 몰랐기때문에 영직은 저녁마다 문덕을 불러서 가르쳐 주었다.

"말로는 다 통하는데 어찌 이렇게 글이 다른지 신기해" 문덕의 말에 영직이 보고있던 죽간을 내려놓고 말했다. "어머니께서 선왕께서는 모든 중원을 통일해서 모두가 같은 글자를 쓰고 같은 단위를 쓰게 만들것이라고 하셨어." 영직은 돌아가신 혜문왕과 생사를 알수없는 미월이 보고싶어졌다. 그것을 눈치챘는지 문덕이 영직의 가까이로 다가와 어깨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미부인은 그 어떤 사람보다 총명한 사람이니 쉽게 스러지지 않으실거야 네가 걱정하는것을 누구보다 잘 아실테니 무탈하실게다." 영직은 몸을 돌려 문덕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문덕은 영직의 등을 쓸어주며 달래고 작은 흐느낌을 달래고 있었는데 영직의 방문이 벌컥 열리며 시종이 들어왔다.

시종은 꼭 붙어있는 두 공자를 보고 크게 숨을 들이쉬더니 곧 당황하며 뒷걸음질로 방을 나갔다. 갑자기 당황하여 나간 시종이 걱정된 영직은 문덕의 품을 벗어나 문앞에 주저앉아있는 시종을 일으켜 세웠다. "무엇에 그렇게 놀라 달아나느냐?" 시종은 두 공자님의 유흥을 깻다며 벌을 달라고 빌었다. 문덕은 헛기침을 하며 시종에게 말했다. "유흥이라니? 그런일 없소." 그리고는 시종의 손에 들려있는 서신을 가리켰다. "누구에게 온 서신이기에 기별도 없이 들어오려고 하셨소?" 그제야 정싱이 전쩍든 시종은 영직에게 다시 넙죽 인사하며 손에든 서신을 들이밀었다 "미부인께서 보내신 서신입니다."

영직은 크개 기뻐하며 서신을 받아들고는 호롱불이 밝은 곳으로 가서 서신을 펼쳤다. 문덕은 시종에게 축객령을 내리고 영직의 곁으로 왔다. 서신은 초나라의 문자로 쓰여져 있었기 때문에 문덕은 무슨 내용인지 알수 없었다. 하지만 영직의 표정이 슬픈것으로 보아 그다지 좋은소식은 아니겠구나 짐작하고는 점점 떨려오는 영직의 손을 꼭 잡아쥐었다.

영직은 이후로 미부인에 대한 이야기를 전혀 하지않았다. 그리고 이름도 영직이 아니라 후조로 바꾸고 공부하던 서원도 도성에서 좀 떨어진 곳으로 옮겼다. 도성밖에 있는 서원은 도성내에 있는 서원과는 분위기가 조금 달랐다. 경쟁이나 정치보다는 풍류나 음류를 즐기는 공자들이 많았다. 어느날은 같은 서원에서 공부하는 공자한명이 영직을 데리고 기방을 찾았다.

아직 어리고 고생을 많이한 영직은 그런 장소가 있는지도 무엇을 하는 장소인지도 잘 몰라 멀뚱히 앉아 주는대로 술을 받아마셨다. 영직이 취기가 올라 눈을 꿈뻑이자 옆에 앉아있던 기녀가 영직의 몸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깜짝놀란 영직은 손길을 피하려고 잔뜩 움츠렸지만 기녀는 아랑곳 하지않고 영직의 귓가에 속삭였다. "공자님 소녀가 싫으싶니까?" 한참 기녀와 실랑이하던 영직이 술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픽 쓰러졌다. 기녀는 영직의 바지춤에서 무엇인가를 찾는듯했다.

영직이 뭔지도 모르고 기녀가 따라마시는 술을 마실때부터 문덕은 기분이 별로 좋지않았다. 영직의 옆에 붙어서 슬쩍슬쩍 영직의 몸을 쓰다듬는것도 얼굴에 뺨을 가져다 대는것도 싫었다. 결국 쓰러지는것을 보고나서야 문덕은 영직에게 다가갔다. 기녀에게 돈주머니를 보여주며 "이것을 찾으시오?" 라고 묻자 기녀는 문덕에게 야살스럽게 눈웃음쳤다. 문덕은 주머니에서 동전몇개를 꺼내 기녀에게 주고는 영직에게 다가갔다.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에 뭔가 답답한듯해 보이는 표정으로 누워있는 영직을 멏번 흔들어 깨운 문덕은 영직을 앉히고는 말했다. "후조공자 정신차리십시오." 작게 신음소리를 내더니 곧 문덕쪽으로 몸이 기울어졌다. 주변을 둘러보니 같이 왔던 서원의 공자들은 모두 양옆에 기녀를 끼고 몇몇은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고 없었다. 눈치를 보던 문덕은 영직을 업었다.

영직은 곧 문덕의 목을 끌어안고 문덕의 등에 기댔다. 날이 어둑해진것으로 보아 도성의 문은 이미 닫혔으리라 짐작한 문덕은 아까 동전을 쥐어주었던 기녀에게 물었다. "혹시 공자께서 잠시 쉬실만한 공간이 있소?" 문덕을 위아래로 훑어보던 기녀는 뭔가를 알겠다는듯 코웃음을 치고는 자신을 따라오라고 했다.


6.

기녀가 안내한 공간은 침실이었다. 다른 가재도구 없이 덩그러니 화려하게 치장된 침상만 보이기에 문덕은 영직을 침상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놨다. 기녀는 문덕에게 각종향유와 아랫물의 위치를 알려주고는 묘한웃음으로 문을 닫으며 나갔다. 문덕은 영직이 방에서 쉴수있게 방을 나가려고 했으나 기녀가 문을 닫고 나가는 바람에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다시 나가서 기다리는 것도 의미가 없어보여 영직이 누운 침대쪽으로 다가갔다. 이방은 확실히 이상했다 책상도 없고, 앉을 의자도 없이 침상만 덩그러니 있는 방이라 문덕은 어쩔수없이 영직을 침대안쪽으로 밀어넣고 살짝 걸터 앉았다. 그 과정에서 영직은 잠깐 정신이 들었는지 웅얼대면서 문덕에게 칭얼댔다. 문덕은 향유근처에서 보았던 자리끼에서 물을 따라 영직에게 먹였다. “그러게 무엇인지도 모르는것을 그리 넙죽넙죽 받아먹는 바보가 어디있어” 영직은 물잔을 잡은 문덕의 손을 꼭 쥐고는 물을 받아 마셨다.

조금 정신이 드는지 눈가가 벌개져서 홍조가 잔뜩 오른 얼굴로 침상에 모로 누웠다. “함께 공부하는 공자가 권한것인데 빼면 이상할까 싶어서 어쩔수 없었어” 문덕은 영직이 다 마신 물그릇을 다시 제자리에 놓고 다시 침상에 걸터앉았다. “술은 마셔본적도 없으면서 이런곳에 잘도 따라오셨소 후조공자” 누워서 문덕을 흘겨보던 영직은 벌떡일어나 문덕의 허리를 안았다. 문덕의 어깨에 얼굴을 올린뒤 문덕의 귓가에 속삭였다. “자네와 왔는데 내가 걱정할게 무어야.. 알고있었으면 귀뜸이라도 좀 해주지 그랬어” 영직의 한숨이 문덕의 목덜미를 스쳤다.

야릇한 기분이된 문덕은 영직의 손을 풀어 다시 침상에 눕혔다. 취기가 가시지 않는지 영직은 문덕의 품에 한참을 매달리다가 곧 잠이 들었다. 문덕은 잠이든 영직의 달아오른 뺨을 손으로 쓸었다. 그리고 아까 기녀가 했던것처럼 자신의 뺨도 대보았다. 영직의 숨소리가 더 크게 들리고 따뜻한 입김이 볼에 닿자 문덕은 그 얼굴이 너무 사랑스러워 어쩔줄 몰랐다.

그 날이후로 문덕은 영직이 불편했다. 바라만 보고 있는것으로도 즐거웠는데 어느순간부터 만지도싶고 바라봐 줬으면 하는 마음이 치밀어 올랐다. 위염의 서신을 받고 남몰래 흐느끼는 영직을 보거나, 서원에서 다른 공자들과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환하게 웃는것 같은 평소라면 아무런 감정도 없었을 사소한 것들이 문덕의 감정을 마구 휘저었다. 어느 순간부터 문덕은 영직에게 존대를 하고 호위처럼 굴었다. 영직은 친구를 잃는것 같은 느낌에 예전보다 더 문덕에게 치대고 매달렸지만, 문덕은 달라지지 않았다.

"문덕, 서운하게 왜그래? 우리사이에 내외할일이 무엇이야?" 영직에게 허리를 붙잡힌 문덕은 허리에 감긴 손을 떼며 말했다. "공자님 사람들의 눈이 있습니다." 영직은 문덕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것이 무슨 상관이야, 내가 제일 힘들때 나의 벗이되어준 형제나 다름없는 친우인데!" 문덕은 곤란하다는 듯이 웃고는 영직에게 달래듯 말했다. "언제까지 현실을 무시할수 없지 않습니까, 형국을 보아하니 공자님께서도 곧 공자님께서 원래 있어야할 자리로 돌아갈지도 모릅니다." 그 말에 영직은 발끈하여 뭐라 말하려고 했으나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영직역시 혼란스러웠다. 언젠가는 형님처럼 언젠가는 친우처럼 자기 곁에 꼭 붙어있던 문덕이 어느날부터인가 달라졌다. 활동량의 차이인지 문덕의 무예실력은 계속 늘었고 그만큼 몸도 단단해졌다. 영직과 비슷하던 키도 이제 영직보다 커졌으며, 가끔 잡아보는 손도 거칠었다. 그것이 안타까워 어느날은 목욕할때 쓰는 향유를 얻어 문덕의 손에 발라주었는데 문덕은 아무말없이 그저 웃기만했다. 예전보다 자주보지 못해서인지 말수도 줄었다. 영직은 자신의 말에 하나하나 반응해주고 의견을 말해주던 문덕이 그리웠다. 마음이 괴로워 어쩔줄 몰라하는 영직에게 과거 기방에 데리고 가주었던 공자가 좋은것이라며 술선물을 했다.

"문덕, 선물로 술을 받았는데 함께 마셔보지 않겠나?" 문덕은 영직에 손에 들려있는 작은 호리병을 보았다. "저번에 고생하신것을 그새 잊으셨습니까? 일주일 내내 어지럽다며 서원도 나가지 않으셨잖아요." 영직은 문덕을 새침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 이 뜰에 너와 나 둘뿐인데 왜 자꾸 존대하는거야? 나와 둘이 있을때는 존대하지 말라고 했잖아!" 영직은 본인이 버럭 화를 내놓고 왜 그렇게 화가 났는지 잘 모르는 눈치였다. 문덕은 그런 영직을 잘 달래며 말했다. "직, 보는 눈은 어디에나 있는법이야 조심해서 나쁠것은 없잖은가?" 오랜만에 자신의 이름이 불린 영직은 일었던 화가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문덕의 손을 낚아채 잡고서는 자기방으로 향했다.

받은 술은 붉은색 종이로 밀봉되어 있었다. 영직은 그것을 뜯는다고 한참 씨름을하다가 성공했다. 탁자위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찻잔에 술을 두잔 따랐다. 영직은 냄새를 맞더니 크게 웃었다. "계화주인가봐 계화향이 아주 좋아, 문덕 자네도 어서 들어봐." 문덕은 의아해하며 영직의 앞에 앉아 잔을 들었다. "연나라에서 계화주는 합환주로 쓰이는 술입니다." 문덕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찻잔을 비운 영직이 그 뜻을 이해하고는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끝맛이 쓴지 인상을 쓰고 입술을 핥는 영직을 보며 문덕 역시 찻잔을 비웠다. "끝맛이 산뜻한것이 매우 좋은 술입니다." 문덕이 칭찬을하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두사람의 시선이 얽혀, 잠시 시간이 멈춘듯 두사람은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7.

서로 합환주를 나눠마신 이후로 영직은 더이상 문덕에게 매달리거나 하지 않았다. 반가워 마주안거나 손을 잡는일도 없었다. 가끔 마차에서 내리거나 말을탈때 잠시 닿는 손길에도 불에 데인것처럼 화들짝 놀라기 일수였다. 문덕은 그런 모습이 귀여우면서도 아쉬웠다. 문덕과 영직은 서로애게 가지고 있는 감정이 친우간의 정보다는 더 깊은것임을 알았다.

새해가 얼마남지 않은 겨울날, 진나라의 저리질이 영직을 찾아왔다. 그는 영직에게 이제 원래 있어야할 자리인 진나라로 돌아가야한다고 말했다. 영직은 저리질에게 미월의 안위를 물었다. 저리질은 미월은 의거왕인 적려에게 의탁해 곧 진궁으로 들어가 혜문왕의 밀서를 대신들에게 전할것이고, 선왕의 뜻으로 영직이 다음 왕위를 이을것이라고 말했다. 영직은 그말을 듣고, 시선으로 문덕을 쫓았다. 혼란스러운 영직의 표정과는 달리, 문덕의 표정에서는 아무것도 읽을수 없었다.저리

질은 영직에게 사흘내로 진나라에 도착해야하니 채비를 서두르라고 말한뒤 물러갔다. 저리질이 나가고도 한참동안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문덕은 곧 영직의 여행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날씨가 추우니, 예전에 봐 두었던 모피를 두르고 가시는게 좋을것 같습니다." 영직은 한동안 문덕이 채비하는것을 아무말 없이 보다가, 벌떡일어나 문덕에게 다가왔다. "나는 문덕 너도 나와 진나라로 가주었으면해" 문덕은 영직의 말을 듣지 못한것처럼 바쁘게 손을 움직였다. "배문덕" 영직의 목소리에 문덕의 손이 멈췄다. "제 가족이 여기있고 출신도 미천한제가 공자님을 따를순 없습니다." 영직은 답답하다는 듯이 문덕의 멈춘손을 잡고 말했다. "너를 데려가겠다. 이건 명령이야." 문덕은 잡힌손을 바라보며 슬프게 웃었다. "공자님 저는 중대부가 사람입니다. 공자님을 따를수 없습니다."

영직은 갑자기 문덕을 와락 안았다. 이제 자기몸보다 커져서 한품이 들어오지 않는 문덕의 어깨에 기대며 영직이 흐느꼈다. "싫어. 문덕과 함께 갈래, 문덕 없이는 진나라에 가지 않을래" 영직의 투정을 받아내던 문덕이 영직을 마주 안았다. "지금의 나는 너에게 도움이되지 않아. 오히려 방해가 될수도 있어. 언젠가 시간이 허락하고 기회가 닿으면 널 만나러 꼭 진나라로 갈께." 문덕이 어깨에 기댄 영직의 빰을 양손이 담으며 눈을 맞춰왔다. 영직의 눈에서 기어이 눈물이 떨어졌고, 문덕은 눈물을 따라 입을 맞췄다. 눈물이 흘러 입술끝에 앉았을때 영직은 문덕을 힘껏 끌어당겨 입맞췄다.

두사람의 이별은 그렇게 지나갔다.

영직이 진나라로 떠난뒤, 중대부가는 문덕을 데리고 다니면서 이것저것 가르쳤다. 무예도 출중하고, 영직과 함께 공부할정도로 총명하여 곁에 두었지만, 중대부가는 사람을 잘 부릴줄 몰랐다. 어느날은 사신단으로 초대되어 위나라에 가는길에 지리를 잘 알고있던 문덕의 조언을 무시하고 자기 고집을 부리다가 크기 다치기도 하였다. 그런 상황들이 계속되자 중대부가는 문덕에게 화풀이를 하기 시작했다. 위나라에 도착해서도 사신단의 본분을 망각하고 행동하던 중대부가의 뒷수습을 묵묵하게 한것도 문덕이었다. 이런저런 정치적 치세에 관련된 토론회에서도 문덕의 식견이 넓고 총명하여 다른나라 사신들의 눈총까지 받았다.

사신단에는 초나라에서 황헐도 있었는데 곧 문덕을 알아보았다. "이렇게 장성해서 사신단이 되다니 대견하구나? 어째서 미부인을 따라 진나라로 가지 않았느냐?" 황헐의 질문에 문덕은 대답했다. "진나라 무왕이죽고 1년이나 진나라는 여러제후들의 싸움으로 피폐해져 있습니다. 지금 세력이나 명성이 없는 제가 간들, 진왕에게는 큰 도움이 될것같지않아, 차라리 조나라에 의탁하여 진왕이 저를 필요로할때 도움을 드리고자 조나라에 남게되었습니다." 문덕의 말을 들은 황헐은 그 마음이 갸륵하여 문덕을 크게 칭찬했다. "아직 이립의 나이도 안된 너에게 이렇게 깊은 식견이 있는데 어째서 너의 주인은 너를 그렇게 괴롭히느냐." 문덕은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을 회피했다. 황헐은 그 모습이 안타까워 문덕이게 초나라로 올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문덕은 그 제안을 정중이 거절했다.

그렇게 사신단의 일을 마치고 조나라로 돌아오는길에 문덕이 황헐에게 패물과 지위를 약속받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 소식을 접한 중대부가는 화를 참지못하고 그를 조나라에 역모죄로 고발하였다. 문덕의 가족은 반역자라는 오명을 쓰고 형벌을 받았다. 몸이 좋지 않던 어머니는 옥살이를 견디지 못하고 돌아가셨고, 문덕과 문덕의 아버지는 노역으로 진나라 국경에 성을 쌓는 일을 하게 되었다. 문초로 몸이 성치못한 문덕의 아버지는 결국 그해를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문덕은 노역을 하는 동안 초나라의 장군 미융을 만났는데, 문덕의 처지를 알기된 미융은 그가 진나라로 도망칠수 있게 도와주었다. 나중에 그 역시 진나라로 망명하는데, 그는 미월의 동복 남동생이었다. 문덕이 진나라에 도착한것은 영직이 소양왕으로 등극한지 3년만이었다. 문덕은 밟고 서있는 이 땅이 영직이 다스리는 땅이라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벅차올랐다. 다시 만날수는 있을까 아득한 마음에 영직이 그리워졌다. 이제 더이상 그를 영직이라 부를수 없는 것 또한 그를 사무치게 만들었다.


8.

영직은 마차를 달리는 동안 머릿속에 문덕의 생각밖에 없었다. 영직은 왕이 되고싶은 마음이 없었다. 미월이 원하고, 자신이 미월을 위해 할수있는 일이 그것뿐이었다. 미월의 계책으로 위염과 백기가 영직을 데리고 선실전으로 들어섰다. 혜후와 위부인, 무왕비가 밖으로 끌려나가고 있었다. 영직은 오랜만이 본 미월에게 다가갔다. 미월은 영직의 선을 붙잡고 말했다. "오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오늘부터 그대가 진왕입니다." 영직은 어떤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미월옆에 멀뚱히 서있기만했다. 미월은 영직이 아직 어려 본인이 선실전에서 업무보는것을 돕겠다 말했다.

영직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함양으로 들어오는 길에 보았던 황폐한 도시와, 처량하게 끌려나가는 모후와 무왕비가 머리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미월이 머무르는 초방전에 도착해서야 영직은 미월의 품에 안겼다. "모후께서 그동안 강녕하셨습니까?" "미월은 영직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조나라에서 고생이 많았습니다. 조왕덕분에 지금 함양에 들어와있는 다른왕자들의 분란을 막을수 있었습니다." 영직은 미월의 말에 한발짝 물러서며 말했다. "다른 왕자들이요?" 영직의 말에 미월은 크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위부인과 혜후가 공자화를 왕으로 세우기위해 모반을 꾀했지요. 조나라에서 위염과 백기가 도움을 청하지 않았더라면, 혜후와 무왕비의 처지가 지금과 달랐겠지요." 영직은 미월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어머니 그들을 살려주세요. 제가 이미 왕이 되었고, 그들 역시 제 형제들 아닙니까" 미월은 영직의 뺨에 손을대고 슬픈눈으로 쳐다보았다. 점점 영직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그들이 언제 직이 너의 등에 칼을 꽂을지도 모른다. 선왕이 진나라를 만들때 만들어놓은 법대로 할것이다." 얼마 지나지않아, 혜후와 위부인의 아들 영화는 효수되었고, 무왕비는 위나라로 돌아갔다.

미월은 빠르기 정세를 정리해나갔다. 진나라를 호시탐탐 노리는 위,조, 제나라에게 영토를 떼어주고, 친정인 초나라와 사돈을 맺기로 했다. 미월은 승상 저리질을 옆에 두고 진왕인 영직이 해야할 일들을 척척해냈다. 저리질과 함께 국고를 관리하던 감무는 위나라로 망명했고, 살아남은 왕자들은 군왕의 직위를 내려 각 나라에 볼모로 보냈다. 선실전에 나가도 영직이 할일은 없었다. 각 지역, 각 관리부분에서 여러가지의 보고가 매일매일 올라왔다. 미월은 그 많은 보고와 정보들 중에 꼭 필요한것과 필요하지 않은것을 걸러 영직에게 전했다. 영직은 그 내용만으로도 벅찰 정도였으니 미월이 하루종일 앉아서 처리하는 일은 종류도 양도 많았다.

미월은 영직을 왕을 앉힐때 도와준 의거왕 적려를 부마로 삼아 옆에 데리고 다녔는데, 얼마지나지 않아 미월의 배가 불러오기 시작했다. 미월의 행동거지를 두고 여기저기서 말이 많아지자 영직도 어쩔수 없이 한마디 거들어야했다.초방전에 들어서자 적려와 미월이 서로 마주보고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영직이 들어오자, 미월은 일어나 영직을 맞이했다. "직아, 어찌 초방전까지 발걸음 하였느냐" 영직은 멀뚱히 앉아있는 적려를 보았다. 미월은 적려에게 눈치를 주었으나 개의치 않는듯 했다.

"의거족 적려는 진왕에게 예를 갖추시오." 영직의 떨리는 목소리가 주변을 고요하게 만들었다. 적려는 마지못해 일어나 의거식으로 영직에게 읍했다. 영직은 그것이 못마땅하였으나 어찌 할수있는것도 아니었기에 미월이 이끄는대로 자리에 앉았다. 영직은 대신들이, 시종들이 지나가며 하는 이야기때문에 속상하다며 한참을 푸념했다. 미월은 웃으며 영직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직아, 걱정 말거라, 모두들 모후에 대해 한마디씩 거들것이야, 하지만 그것은 나를 향한 말이지 너를 향하는 말이 아니다. 나쁘고,간사하고, 더러운것은 모두 내가 행한것이다. 너를 향하지 않게 할것이다."

영직은 딱히 의거왕을 싫어할 이유도 없었다. 그는 정치적으로 매우 유용했고, 군대도 가지고 있었다. 외삼촌인 위염과 백기의 군대까지 합하면, 진나라에서 그 보다 더 큰 병권을 쥔자가 없었다. 영직은 단지 모후의 사정을 여기저기서 떠들어지는것이 싫었을 뿐이다. 미월은 단호하게 말했다. "손가락질하는 자가 있으면 그 손가락을 잘라내고, 그래도 말을 멈추지않으면 혀를 뽑고, 그래도 붓을 놓지 않으면 죽이면 됩니다." 영직은 연나라에서 함께 고생했을때의 미월이 그리웠다. 그때는 먹을것과 따뜻한 잠자리만 걱정하면 되었는데, 이제 그런것은 걱정할 필요 없는대신 매일매일이 풍전등화였다. 영직은 자신이 미월의 심기를 어지럽혀 종국에 신의를 저버리면 어떻게 될지 상상하자 두려워졌다.

영직은 따뜻하고 자애로운 어머니를 잃었다. 대신 존경하는 정치적 지주를 얻었다. 매일 아침 영직은 초방전으로 들어 아침조례를 했다. 태상이된 위염은 장군들에게 각 지방의 상황과 국경근처에 있는 나라들의 동태를 살펴 보고했고, 태복과 대사농이 그동안 전쟁때문에 피폐해진 백성들의 상황을 고했다. 미월은 지난 몇개월간 왕위찬탈로 도성내에서 고생한 백성들을 위해 농민에게 세금을 감해주었고, 겨우내 노역도 면제해주었다. 반란을 일으킨 공자 화를 따르던 관리와 귀족은 멸하고, 그들의 곡간을 열어 민심을 샀다.

미월은 가끔 영직을 초방전으로 불러 의거왕과 시간을 보내게 했다. 의거왕은 종종 그에게 검술과 마술을 가르쳐 주었다. 그는 영직에게 전장에 나가 적들과 직접싸워봐야 글로 읽은 병법이 몸으로 이해가 된다했다. 어느날은 자기 부족사람들을 데려와 의거국에서 하는 마장술놀이를 함께하기도하고 미월의 허락이 있으면 함양성밖에 나가 사냥을 하기도 했다.

초나라와 사돈을 맺기로한 미월은 영직에게 초나라 공주들의 초상화를 보여주었다. 영직은 그러려니 했지만 내심 문덕이 떠오르는것을 막지 못했다. 초나라 공주가 궁궐로 들어오던날, 미월의 동생 미융도 진나라로 왔다. 그는 무술이 뛰어난 장군이었는데, 초나라왕의 미움을 사서 국경근처를 전전하는 신세였다. 미월은 그의 경험을 이용하여 초나라를 견제하려했다. 그날 저녁에 미월은 미융을 환영하는 연회를 초방전에서 열었다.

영직은 선실전에서 입는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예복을 벗고 편안한 옷차림으로 환복한 후 미월의 거처 초방전으로 발을 옮겼다. "어머니를 뵈러 초방전에 갈것이니 따를 필요 없다." 날이 따뜻했다. 날이 저물어 길이 어두웠지만 벌써 궁궐이 많이 익숙해진 영직이었다. 한참 길을 가다가 초방전 앞에 정원이 보였다. 예전에 초방전에 머무르던 귀비를 위해 만든 정원이라고 했다. 계수나무가 여러그루 심어져있었다. 새로난 연한 잎새사이로 노란 꽃망울이 보였다. '저 꽃이 다 피면 이곳에서 계화향이 나겠구나' 나지막히 생각한 영직은 잠깐 나무아래 돌위에 앉아 아직 피지도 않은 꽃구경을했다.

사람의 인기척이 느껴지자 혼자 나온것을 후회한 영직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초나라의 공주와 그의 시종들이 초방전을 향해 가고있었다. 공주의 시종중에 한명이 유독 눈에 익었다. 호위로 데려온것 같은 사내였는데 한참을 보고 있다가 바람결에 스치듯나는 계화향에 정신이 번뜩였다. "문덕!" 자신도 모르는새에 그 호위에게 달려가고 있었다. 초방전 문턱을 넘기 바로직전에 호위의 견갑을 붙잡은 영직이 문덕을 불렀다. 키도 좀 더 커지고, 체격도 좋아졌다. 얼굴이 조금 달라졌지만 문덕이었다. 그 동안 세상이 바빠 잊고 있었다고 생각했던 영직은 자신이 크게 틀렸었다는걸 깨달았다.


9.

문덕은 곤란한듯 영직에게 읍했다. 앞에 서있던 초나라 공주는 영직을 한번 보더니 인사를 하고 다른 시종들을 데리고 초방전으로 들어갔다. "문덕! 다시 보게 될거라고는 생각도 안했네, 초나라에는 언제 건너간것이야? 부모님께서도 초나라에 계시나?" 문덕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는 별말 없이 끈기있게 눈을 맞추려드는 영직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왜 아무 말이 없어? 나는 못한 말이 너무 많아서 뭘 먼저 이야기 해야할지 모르겠어." 영직은 수줍은듯 말했다. "내가 보낸 서신은 받았나? 몇번이나 보냈는데 연락이 없어서 걱정했네." 한참 문덕의 손을 잡고 떠들던 영직은 문덕의 행동에 점점 걱정이 되었다.

미월의 태감이 영직을 부르는 소리에 영직은 문덕의 손을 놔주었다. 놓아진 손이 아쉬워서 문덕을 한번 쳐다보았다가 초방전으로 들었다. 영직이 떠나고 한동안 같은자리에 있던 문덕이 양손을 어루만졌다. 몇번이고 상상했던 기대하고 기다리던 만남이었는데, 막상 실제로 만나니 어떻게 해야할지 알수 없었다. 시선을 맞추기위해 안절부절하는 모습에 만약 태감이 부르지 안았다면 와락 안아버렷을지도 모를일이었다. 그날의 입맞춤이 떠올라 얼굴을 볼 수없었다. 영직은 아무렇지도 않은듯 말을 걸어왔지만, 그 입술에 온 정신이 팔려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초방전으로 들어가는 영직의 뒷모습을 눈으로 쫒던 문덕은 영직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맥이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영직은 그날 연회내내 계속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모습을 발견한 미월은 영직에게 다가가 물었다. "누구를 찾길래 그리 수선을 떠십니까?" 미월의 물음에 영직이 화들짝 놀라 답했다. "아닙니다. 혹시 아는이가 있을까 하여 둘러보았습니다." 미월은 이상하다는 듯이 영직을 물끄럼히 바라보다가 초나라공주쪽으로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 "결혼하실 공주에게 초방전 정원이라도 구경시켜 주시는건 어떠세요?" 영직은 초나라 공주를 한번 흘끔 쳐다보고 다시 미월을 보고는 그리하겠다 했다. 영직은 초나라공주를 데리고 계수나무 꽃구경을 하던 그 정원으로 갔다. 초나라공주는 아무말 없이 영직을 따랐다.

두사람은 아무말 없이 정원을 걸었다. 영직이 앞서면 초나라공주 미요가 뒤따랐다. 초나라 공주가 연못 근처에 잠깐 멈춰서 달빛에 잘 보이지 않는 색색의 비단잉어를 찾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을때 영직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누군가를 찾는듯 했다. "누구를 찾으시는지요?" 미요의 목소리에 놀한 영직은 어깨를 움찔했다. "아니요, 진궁안에 제가 모르는 것른 없습니다." 미요는 다시 시선을 내려 연못 안을 보았다. 밤이 깊어 잉어들도 잠을 자는지 영 움직임이 없었다. 그저 달빛에 비친 미요공주와, 아련한듯 먼곳을 바라보는 영직의 잔상만 연못에 떠있었다. 두사람을 찾으러온 초나라 호위를 보고 반기는 기색을 하던 영직은 곧 자신이 찾는 사람이 아닌것을 알고는 눈에 띄게 실망했다. 미요는 여로를 핑계삼아 처소로 발걸음을 옮겼고, 영직도 천천히 걸어 침전에 들었다.

미융은 함양성내에 큰 궁궐을 지었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양후인 위염의 거처와 비교하며 누구집의 곡간이 더 큰지 내기를 했다. 문덕은 미융의 도움을 받아 금위군에 배치되었다. 선실전과 내전 사이에 배치되어서 가끔 바쁘게 움직이는 영직을 볼수 있었지만, 영직은 눈치채지 못한 눈치였다. 가끔 선실전 근처 보초를 서게되면 멀리서 미부인과 영직을 볼 수 있었다. 미월이 대신들과 국사를 논하면 영직은 옆애서 상소문을 꼼꼼히 읽으며 경청했다. 문덕은 멀리서나마 지켜볼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영직은 초나라공주를 만난이후로 그녀가 머무는 거처에 시도 때도없이 찾아갔다. 사람들은 영직이 왕비로 맞을 공주를 아낀다 하였지만, 막상 초나라공주의 거처에 도착해서는 초나라 공주보다 주변 호위에게 더 관심을 가졌다. 마치 누군가를 찾는것처럼. 안타깝게도 초나라의 호위들의 복식이 진나라에서 지급되는 복식으로 바뀌어 영직이 찾는 것을 더욱 어렵게 했다. 궁궐은 영직의 혼인으로 떠들석했지만 영직의 마음 한구석은 계속 서늘했다.

진왕 영직과 초나라 공주 미요가 결혼하던날 고르고 고른 날이었는데도 날이 흐렸다. 하루종일 무거운 면류관과 겹겹의 혼인의복을 입고 혼례를 치렀다. 영직은 어떻게 하루가 지났는지 날이 어둑해져서야 정신이 좀 들었다. 중궁전에 들어서 나란히 침상에 앉은 두사람은 당장 무거운 옷을 벗고 잠을 잘 생각 뿐이었다. 시중을 들던 내관과 궁녀가 침방을 나가자마자 영직은 슬쩍 눈치를 보며 면류관을 벗었다. 그리고 미요의 가채를 벗겨주는것을 도왔다. 두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는것만으로도 부끄러웠다. "오늘 하루종일 이 무거운 가채를 머리에 이고 고생이 많았습니다." 미요는 아니라며 영직의 겉옷 벗겼다. "혼인할때 이렇게 많은 옷을 입어야하는지 몰랐습니다. 즉위식때 입은것보다 훨씬 무거웠어요." 투정하듯 말하자 미요가 살풋이 웃었다. 영직도 미요가 무거운 옷을 벗을수 있게 도왔다. 영직은 시종의 의복시중이 벌써 익숙해졌는지 겹겹의 옷을 벗고나니 하루의 피곤이 몰려오는듯했다. 갈증이 인 영직은 탁자위에 합환주를 보았다. 향을 맡아보았으나 계화주는 아닌것 같았다. 영직은 술을 마시는것을 즐기지 않았지만, 이 술은 빨리 잠들수 있게 도와줄것같아 연거푸 몇잔을 마셨다. 머리를 정리하고 침의로 갈아입은 미요가 탁자로 다가와 술을 따르려고 하자 영직은 미요에게 잔을 권했다. 두 사람은 준비된 술을 모두 마시고 침상에 들었다. 두 사람은 눕자마자 잠이 들었다.

그 날은 영직이 적려와 시간을 보내는 날이었다. 적려는 마장술을 연마한다고 의거족을 함양성 근처로 불렀다. 오랜만에 성밖에 나가는 영직은 들뜬 마음으로 가벼운 옷차림을 하고 내전을 나섰다. 금위군 통령과 호위 몇명이 영직의 뒤를 따랐다. "함양성 밖까지는 마차를 타고 이동하시고, 도성을 빠져나간 이후에 말로 갈아타시지요. 가는 길에 사함이 많아 위험할수도 있습니다." 통령의 말이 영직은 가마에 몸을 옮겼다. 영직은 말을 타거나 다루는것에 익숙하지 않아 적려와 보내는 시간이 즐거웠다. 얼마 지나지않아 영직은 마차에 내려 튼실한 갈색말로 갈아탔다. 날씨도 좋고, 날도 춥지않아 말타기에 적당한 날이었다. 적려는 영직과 호위를 이끌고 의거군의 주둔지로 갔다. 잠깐 말에서 내린 영직은 물주머니를 찾았지만, 행낭을 아무리 뒤져봐도 나오지 않았다. 아쉬워하려는 차에 누군가가 영직에게 물주머니를 내밀었다. 고개를 든 영직의 눈에 문덕이 보였다.

진왕이 궁밖에 나가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아직 전장에 나갈만큼 무예나 말을 타는 기술이 부족했기도 했고, 아직 즉위한지 얼마되지않아 언제나 암습의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영직은 눈에 띄게 들떠 있어보였다. 통령이 마차를 권했을때 실망한 표정이 문덕의 마음을 흔들었다. 당장 손에 쥐고 놓고싶지 않을만큼 애틋한 영직이었다. 의거군 주둔지까지 달리는 동안 영직의 표정이 밝았다. 주둔지에 도착하자마자 마른 입술을 적시며 행낭을 뒤지는것을 발견하고 문덕은 물주머니를 들고 영직에게 갔다. 왜 그렇게 했는지 문덕은 알 수 없었다. 몇보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보고 있으니 더 가까이 가고싶고, 가까이가니 만지고 느끼고 싶어지는 문덕이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영직은 밝게 웃으며 문덕의 견갑을 쥐었다.

문덕의 모습을 본 영직의 얼굴이 활짝폈다. 문덕은 다른 군졸들이 그러하듯 무릎을 꿇고 읍했다. 영직은 마른목을 축이고 물주머니를 돌려주며 말했다. "금위군에 있어서 찾지 못했구나! 나는 당연히 왕비나 초나라 태자의 호위일거라고 생각했는데..." 영직은 문덕의 견갑을 꼭쥐며 말했다. 문덕은 아무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영직은 문덕을 일으켜 세우고는 잡은 팔을 끌고 눈에 보이는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막사는 창고로 쓰이는 곳인지 무기와 보물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영직은 문덕의 두 손목을 잡고 얼굴을 마주 보았다. "문덕 왜 나를 피해?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된것이 기쁜것은 나뿐인가?" 고개를 숙이고 있던 문덕이 영직의 눈을 보았다.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모를 끌림에 두사람은 허겁지겁 입을 맞췄다. 영직의 손과 문덕의 손이 맞잡았다.


10.

깊은 입맞춤에 다리가 풀린 두사람은 풀석 주저 앉았다. 영직의 얼굴을 손에 담은 문덕이 다시 입을 맞춰왔다. 영직은 문덕의 목에 팔을 둘러 당겼다. 한참 영직의 입술을 탐하던 문덕이 사람의 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누군가가 막사안으로 들어오려는듯 했다. 문덕은 영직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누르며 피풍의를 벗고 일어났다. 곧 견갑과 다른 옷들도 벗어 영직의 위에 덮어두었다. 병사가 들어와 문덕을 발견하고 말했다. "배교위 여기서 뭐하시오?" 문덕은 작은 천으로 몸을 훔치며 말했다. "땀이 너무 많이나서 내의가 다 젖은것 같아. 그대로 입고 있으면 추울것 같아서 좀 닦아내려고." 병사는 허허 웃으며 말했다. "같은 남자끼리 무슨 내외를 하십니까" 문덕은 웃으며 몇마디 더 맞장구 쳐주고는 다시 옷을 입기 시작했다 그 즈음에 다른 병사는 이미 막사를 떠나고 없었다. 피풍의를 들추자 볼이 빨갛게 달아오른 영직이 보였다. 영직에게 손을 내민 문덕은 그의 송을 잡아당겨 일으켰다. 영직은 일어나자마자 문덕을 품에 안으며 말했다. "문덕 이제 나를 떠나지 마." 문덕은 영직을 고쳐 안았다. 지금 문덕이 영직에게 할수 있는 말은 많지 않았다. 매달리는 영직을 떼어낸뒤 문덕은 영직의 뺨을 쓰다듬으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영직" 다시 살짝 입을 맞춘뒤 문덕은 막사 밖으로 빠져나왔다.

의거군의 주둔지에 다녀온 이후로 영직은 금위군 통령을 괴롭혀 문덕을 내금위로 데려왔다. 후에 미월은 영직을 부탁한다며 중랑장으로 직위를 올려주었다. 영직이 선실전에서 상소문을 읽고 내정과 외정을 논하는동안 문덕은 전보다 더 모질게 자신을 몰아붙이며 무예를 연마했다. 영직은 선실전에서 다 읽지 못한 상소문을 내전에 가져와서 읽었는데, 문덕도 그를 도왔다. "어머니께서 이 상소문을 다 읽은후 나라에 이득이 되는 순으로 10가지를 골라 해결책을 찾아오라 하셨는데, 매일매일 수백책의 상소문이 올라오는데 그걸 어찌 하루만에 다 하라는지 모르겠어." 영직의 투정에 문덕은 영직의 앞에 쌓여있는 죽간더미를 보았다. 그리고는 영직앞에 앉아 죽간를 읽기 시작했다. "의거군 관련 상소가 많네 미부인의 세를 견제하기 위함일겁니다. 백기장군과 양후께서도 따로 군대를 가지고 계시니 의거군은 미부인에게 중요한 병력이지요." 영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진나라 재상들은 하나같이 의거족을 싫어해. 뒤에서 어머니에 대해 안좋게 얘기하며 나까지 괴롭힌다구." 영직의 투정에 문덕이 살풋이 웃었다. 문덕의 웃는 모습이 좋은 영직은 죽간을 들고 있는 문덕의 손을 잡았다. "문덕, 웃는모습이 참 좋다." 활짝 핀 영직의 얼굴을 본 문덕은 몸을 기울여 영직의 입술을 살짝 핥았다.

한참 상소를 함께 읽던 문덕은 꾸벅꾸벅 졸고 있는 영직을 발견했다. 문덕의 눈에 아른거리는 촛불에 비친 영직의 모습이 아득하게 아름다웠다. 읽던 죽간을 내려놓고 잠든 영직을 안아올렸다. 이렇게 가벼웠던가 생각하며 침상에 영직을 뉘였다.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편안한 얼굴로 잠을자고 있는 영직을 보니 괜히 심통이 났다. 불편해보이는 의복을 벗기려는데 영직이 문덕을 와락 앉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문덕을 침대로 끌어들여 품안에 파고 들었다. "문덕, 나는 자네가 어떤짓을해도 자네가 좋아." 빨갛게 달아오른 뺨이 너울거리는 촛불빛에 어두워졌다. 문덕은 영직을 품에 끌어 당기며 말했다. "영직, 사랑해." 문덕의 말에 꼭 감고있던 영직의 눈이 떠졌다. 영직은 문덕의 몸위에 올라타며 말했다. "나도 그러하네."

+헉헉 떡씬고자는 여기서 리타이어.. 얘네 떡침 나 내전침상인데 내가봄. 한두번이 아니야 아주 신나서 매일 붙어먹음

두사람의 관계는 곧 궁궐내 시종들의 안주와 간식이되어 미월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초나라 공주인 미요와 혼인한지도 몇해가 지났지만, 아직도 자식이 없는것을 의뭉스러워한 미월은 미요를 따로 불러 물었다. 미요는 진왕과 합방한 일이 없으며, 길일에 합방을 하러와도 잠만자고 간다고 솔직하게 털어 놓았다. 미월은 문덕을 따로 불러 물었다. "대진왕과 요즘 어떤 소문이 돌고 있는지 아느냐?" 미월의 물음에 문덕은 더 깊게 고개를 숙였다. "부정하지 않는것을 보니 없는 소문이 생긴것은 아닌가보구나." 미월은 문덕을 무르고 내전에서 상소문을 읽고있을 영직에게 갔다. "모후, 어찌 여기까지 발걸음 하셨습니까? 찾으시면 제가 가면 되는데.." 미월은 눈짓으로 주변에 내관과 시종을 모두 물린후 영직에게 다가가 말했다. "요즘 궐내에 아주 재미있는 소문이 돌고 있는것을 아느냐?" 영직의 안색이 변했다. 미월은 이리 쉽게 마음을 들키는 영직이 걱정이었다. "어서 진왕께서 적통 후사를 보셔야 나라가 더 안정될터인데 흉흉한 소문만 돌아 모후는 걱정입니다." 미월의 말에 영직은 사색이 되어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몇일 후 문덕이 사라졌다. 중랑장이 사라졌는데도, 마치 아무일도 없었던것처럼 하루가 흘러갔다. 영직은 미월이 머무는 초방전 앞에 무릎을 꿇고 무엇인가를 빌었지만, 무엇을 비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몇일 후 영직은 중궁전에 들어 첫 합방을 했다. 하지만 문덕은 돌아오지 않았다. 곡기를 끊고 몇일을 초방전앞에 꿇어 있다 사흘째 되던날 결국 영직이 쓰러지고 말았다. 미월은 문덕을 불러 단단히 당부했다. 중궁전 침상에 누워있는 영직의 뺨을 쓸어보려다 뒤에 서있는 미요 왕비를 보고 손을 물렸다. 문덕은 작은 목소리로 영직을 불렀다. 그 소리에 영직의 눈커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눈을 떴다. 나지막히 문덕의 이름을 부른 영직은 흐느꺼 울기 시작했다. 문덕은 영직에게 울지마시라 했지만 그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며칠 문덕의 간호를 받은 영직은 많이 나아졌다. 영직이 기력을 회복하자 문덕은 영직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폐하, 소신은 더이상 궁궐에 머무를수 없습니다. 저는 미융장군의 군사로 임명받아 초나라 국경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문덕의 말에 영직은 벌떡 일어나 문덕의 손을 잡았다. 문덕은 마주 잡은 손을 더욱 세게 쥐며 말했다. "선태후마마께서 허락하시면, 제가 폐하를 뵈러 오겠습니다. 상소문을 읽는것을 게을리 하지 마옵소서." 말을 마친 문덕은 영직의 손을 놓고 중궁전을 나왔다. 영직이 침의를 입은채 문덕을 잡으려하자 옆에 있던 미요가 그를 막았다. 문덕의 이름을 부르는 영직의 울부짓음을 들으며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미융장군을 따라 궁궐을 떠났다.


11.

문덕이 떠난 이후 영직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마자 선태훌 뵈러 초방전에 갔다. 하지만 미월은 그를 만나주지 않았다. 언제나와 똑같이 선실전에 들어 미월이 하는 양을 듣고있거나, 내전에서 상소문을 읽었다. 의거족에 대한 불만이 많았다. 문덕이 떠나고 몇달이 지난후, 영직은 상소문에서 친숙한 이름을 발견했다. 국경 근처에 현령을 보좌하는 교위로 이름이 후조였다. 영직이 조나라 시절 쓰던 바로 그 이름이었다. 양후나 백기는 종종 찾아와 영직을 보았으니 알고 있었지만, 미월은 몰랐다. 영직은 떨리는 손으로 그 죽간을 꼼꼼히 읽기 시작했다.

의거군이 도성내에서 저지르는 일을 규탄하는 내용이었다. 선태후의 권력을 등에 업고 가게에 들어가 음식을 먹고 돈을 내지않는 일부터, 아녀자를 납치하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람들을 죽인다는 내용이었다. 선실전의 재상과 대신들이 하는 그 이야기들이었다. 평소라면 몇줄 읽지 않고 내려놓았을 죽간을 붙들고 있자, 영직은 갑자기 두려워졌다. 죽간을 다시 상소문이 있는곳에 올려두고 다른 죽간을 들어 읽었다. 선실전 조례가 끝나고 그는 언제나왜 같이 상소문을 들고 내전으로 향했다. 내전안에 들어서야 영직은 "후조"라고 쓰인 그 죽간을 품에 안았다. 몇번을 읽었을까 영직은 그날 하루종일 그 죽간을 읽고 또 읽었다.

후조라는 자는 국경 근처상황과 주변국들과의 관계를 상세히 적어 올리거나, 양후와 의거왕 적려의 병권을 분산시켜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문을 선실전으로 올렸다. 후조의 죽간이 어느새 쌓여 7책이 넘어설 즈음 영직은 진나라 글자와 비슷한 모양이지만 뜻이 다른 글자들이 몇개 섞여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게다가 그 글자들은 여러 글자들이 파자되어 있는듯 했다. 첫번째 죽간에서 찾은 파자된 글자는 受(받을수)와 心(마음심)이었다. 이 두자를 합치면 愛(사랑애)자가 된다. 영직은 그 죽간을 가슴에 묻고 숨죽여 흐느꼈다. 이 궁궐안에 미월이 보지못하고 듣지못하는 일은 없었다. 영직은 선태후의 눈과 귀를 피해 내전에서 문덕이 여러번 고민하여 쓴 서신을 읽는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날이 추워졌다. 그리고 미요가 회임을 했다. 미요와 영직의 사이는 나쁘지않았지만, 또 좋지도 않았다. 왕비나 영직이나 궁궐내에 큰 세력이 없었기때문에 미월의 말이라면 듣는수밖이 없었다.미요는 미월이 문덕을 국경으로 내쫒지 않았다면 영직과의 관계를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미요에 대한 영직의 태도는 다정했지만 마음이 없었다. 미월 역시 적려의 둘째아이를 임신중이었다. 영직은 예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했다. 초나라와의 혼약으로 주변국가들이 초나라 정벌을 시작했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진왕도 초나라를 돕기위해 직접 출정했다.

국경에 도착하자마자 영직은 현령인 왕계를 찾았다. 왕계의 교위가 후조라은 이름을 쓰는 자였다. 왕계는 천성이 게으르고 음주가무를 즐겨 사실상 현령의 일은 문덕 혼자 도맡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양후의 사람이었다. 영직은 상황보고를 위해 후교위를 불렀고 그렇게 두사람은 해가 바뀌고 처음으로 대면했다. 진왕에게 읍하고 문덕이 말햇다. "초나라 사신이 막사안에 계십니다." 주변을 둘러본 영직은 문덕에게 다가가 조그많게 속삭였다. "도성내에서 쓰던 마차가 마구간 근처에 있다. 해질녁에 마차안에서 보자." 문덕른 영직의 얼굴을 한번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곧 초나라 사신이 들어와 영직에게 감사하며, 전쟁상황을 보고했다.

해가 평원끝에 걸쳤을때 즈음 문덕은 마구간에 있는 병졸들에게 간단한 요깃거리와 술을 건네며 교대 전까지 말을 돌보겠노라 했다. 평소 문덕이 자신의 말을 아끼는것을 아는 병졸은 기분좋게 제의를 받아들이고 근처 막사로 들어갔다. 곧 해가 지자 평원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마구간 근처에 불빛이라고는 작은 모닥불이 다였다. 인기척이 들려 문덕은 계화주가 든물주머니를 들고 마차로 향했다. 마차 안에는 얇은 침의위에 피풍이만 걸친 영직이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주변을 둘러본 문덕이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좁은 마차안에 영직과 문덕이 마주보고 앉았다. 불빛하나 없는 어둠속에서 서로를 말없이 보던 두사람은 손을 잡았고, 팔을 둘러 마주안았다. "문덕 그대가 보낸 상소문은 모두 읽어보았어. 내마음도 그러하네 문덕! 은애하네."문덕응 말없이 영직에게 입맞췄다.

캄캄한 시야가 익숙해진 두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서로를 기억했다. "어떻게 해야 너를 곁에 둘수 있을까?" 영직이 슬프게 말했다. 문덕은 자신의 뺨을 쓰다듬는 손을 잡아 손바닥에 입을 맞추고 속삭였다. "선태후께서 권력을 가지고 계신 동안은 어쩔수 없습니다." 영직은 문덕의 품에 파고들며 말했다. "그 권력은 영원하니 못할거야. 내가 가만히 있지는 않겠어. " 문덕은 영직을 품속으로 끌어안으며 말했다. "선태후의 배후는 의거군만이 아닙니다, 양후와 화양군 백기도 그녀의 권력이지요." 영직은 문덕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폐하, 상소문을 읽는것을 게을리 하지 마시옵소서." 어깨에 묻은 고개가 끄덕여졌다. 전쟁으로 진나라는 초나라와의 관계가 더욱 두터워졌지만, 조,제,한,연 네나라의 동맹이 진나라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로인해 진나라의 출정이 잦아졌고, 그때마다 영직은 문덕이 후조라는교위로 있는 국경의 그 작은 초소에 머물렀다.

시간이 지나 영직의 아들이 태어났고, 미월은 영직의 아들이름을 탁이라 지었다. 미월과 적려사이에 태어난 장자 영불을 고릉군으로 봉해 조나라 볼모로 보냈다. 조산했던 미요는 산후 후유증을 앓다 곧 사망했다. 양후가 등용한 백기는 출정하는 전쟁마다 승리를 거둬 무안군에 봉했다. 태후의 동생 양후와 화양군, 그리고 의거왕 적려까지 나라의 그 기세가 등등할수록 선태후의 세도 늘어만 갔다. 영직은 조용히 앉아 때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그들이 하는 양을 보고 있었다.

가끔 몸이 좋지않다는 핑계로 호경에 있는 온천을 찾았는데 그곳은 초나라 국경과 굉장히 까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다. 영직이 얇은 홑내의를 입고 온천에 앉아 있으면 곧 인기척이 났다. 돌아보면 그곳에 문덕이 있었다. 문덕은 입고있던 옷을 훌렁 벗고 온천안으로 들어갔다. 물에 젖은 하얀 내의가 영직의 몸을 그대로 비추었다. "태후의 조짐이 이상해, 곧 초나라를 칠것 같다." 영직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정신을 환기시킨 문덕이 말했다. "지금 초나라의 세자와 왕은 매우 무능한 자들입니다. 게다가 초왕은 귀비에게 국정을 맡겨놓고 음주가무한다 들었습니다." 영직은 미월이 초나라 출신이기에 초나라를 침략하는것에 회의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상황을 보니 지금이야말로 초나라를 칠 적기인것 같았다. "문덕, 화양군을 설득하여 신시를 공격할테니, 그때 그곳에 가서 화양군을 돕게." 영직의 말에 문덕은 그리 하겠다 말했다. 두사람은 조용히 온천물에 몸을 담그고 그 시간을 즐겼다. 맞닿아오는 서로의 체온과 온천의 온도가 비슷하여 어디까지가 체온이고, 온천인지 알수 없었다. 영직은 문덕을 애틋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언제까지, 언제까지.." 문덕이 영직에게 할 수 있는 대답이 없었다.


12.

영직의 말대로 신시를 공격하는 화양군을 도운 문덕은 다시 자신의 이름을 되찾아 호경의 현령이 되었다. 이후 영직은 그 전보다 더 자주 아파 호경의 온천을 더 자주 찾았다. 진의 초나라 공격으로 초나라는 다른 나라의 침공을 받았는데 당시 가장 오래된 나라였기때문에 초를 돕는 나라도 많았다. 초왕이 진나라에 조회를 왔다가 선태후에게 붙잡혀 억류당하자 주변국들은 반발하여 진나라에 하나 둘 선전포고를 해왔다. 이때 문덕이 안읍에서 조, 위, 한나라의 사신들을 설득하여 돌아가게 만들었고, 그것을 안 화양군과 양후는 그를 다시 함양으로 불러들였다. 문덕은 화양군과의 오랜 인연을 뒷바침으로 의거군에 대해 적대적이기 까지한 감정을 일부러 내보였는데, 평소 의거군을 견제하던 양후에 눈에 들게되었다.

함양으로 돌아온 양후는 진왕을 따로만나 문덕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동안 의거군을 중요한 병력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영직은 양후가 문덕의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그동안 문덕이 했던 말들에 대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과인 역시 의거군을 견제할 방법을 찾고 있었소." 영직의 말에 양후는 의거군의 부적절한 행동들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과인에게는 현재 큰 힘이 없기에, 경험이 많은자를 옆에두어 양후를 돕고 싶습니다만.." 말을 줄이는 영직의 의중을 알아챈 양후는 말했다. "선태후마마를 걱정하시는 거라면, 심려놓으시지요, 제가 잘 달래보겠습니다."

미월은 불편한 기색을 지우지 못하며 위염에게 투정했다. "그를 왜 다시 도성에 들이신다는 겁니까? 그는 진왕에게 도운이 되지 않아요." 위염은 미월을 달래며 말했다. "그는 어릴때부터 세자였던 진왕을 옆에서 모신자입니다. 그가 세운 공은 이번이 처음이 아닐테지요 분명 저희들에게 언젠가 필요한 장기말이 될것이니 노여워 마세요 태후." 문덕은 중상시가 되어 진왕을 보필하게 되었다. 그는 주로 영직이 과중한 업무로 챙기지 못하는 것들을 옆에서 도우며 호위의 역할도 수행했다. 그의 신분은 귀족도 장군도 아니었으나 왕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었다. 예전처럼 여러사람이 그에 대해 수근거렸지만, 점차 성장하는 영직의 세와 반비례하여 사라졌다.

진나라를 제외한 중소국들의 연합은 진나라로써는 당황스러운 일이 아닐수 없었다. 물론 과거 계속해서 나라간에 문제가 있었던것은 사실이지만 그동안 우호한 관계를 유지한 나라도 많았기 때문이다. 천하를 재패하려는 아직 스스로를 왕이라 칭하지 랂는 제후국까지 진나라의 세를 넘보고 있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외정에 미월과 영직은 하루하루가 바빴다. 문덕 역시 더이항 장군으로 전쟁에 출정하지는 않았지만, 그동앙의 경험과 하급관리직을 맡아 일하며 얻은 지방관리들과의 연줄을 이용해 영직을 보좌했다. "폐하, 전쟁은 사람으로 하는것입니다. 사람을 쓰기 위해서는 많은것들이 필요하지요, 물자와 군기 그리고 이동하며 필요한것들도 중요합니다." 영직은 멧돼지 가죽에 그려진 칠웅성을 보며 문덕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 지도에는 그 어떤 경계선도 없었다, 단지 칠웅이라 불리는 성의 이름과 위치만 있을뿐, 각각 나라의 영토는 계속해서 변화했다.

문덕은 자신이 지냈던 지역의 정보를 연줄이 닿는 현령과 연락하여 공략할 성들을 찾았다. 무안군이 된 백기는 영직과 양후의 도움으로 한나라와 초나라의 여러 성을 쟁취하며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무안군의 위세는 곧 화양군을 뛰어넘었고 거의 양후와 같은 수준의 세를 갖추게 되었다. 문덕은 양후에게 계속해서 백기를 견제해야한다는 내용의 서신을 전달했는데 양후는 개의치 않았다.

사람들의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 영직과 문덕은 서로의 마음에 대해 이야기했다. 어떨때는 내전의 침상이었고 또 언제는 화친을 하러 떠나는 마차안이기도 했다. 영직은 문덕이 곁에 있으므로 인해 인격적으로 정치적으로 급격하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미월과 양후는 눈치채지 못한듯 했으나 전쟁으로 가끔 도성에와 진왕을 알현하는 백기의 눈에는 그것이 보이는듯 했다. 진왕은 의거군 역시 적극적으로 이용했는데, 의거군이 공을 세울때마다 그들에게 진나라 여자와 도성 밖에 있는 땅을 상으로 내려 함양에 가정을 만들게 했다. 본디 유목민인 그들에게 가족이라는 중심축을 만들어 방랑하며 살아가는 그들을 와해하기 위함이었다. 영직이 펼치는 치세는 아주 조심스럽고 천천히 미월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있었다.

영직은 미요와의 사이에 탁 이외의 자식은 없었다.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의거군의 행패에 미월은 적려를 초방전으로 불러 살해했다. 그라고 와해된 의거군은 자연스럽게 진나라에 흡수되었다. 의거군이 제거되자, 미월은 예정만큼 활발하게 정치에 참여하지 못했다. 양후와 화양군의 욕심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는데, 영지확장을 제나라를 이유없이 침략하려 드는일이 문제가 되어 양후직을 내려 놓아야했다. 자연스럽게 양후의 군사는 영직의 병력이 되었다. 영직은 문덕을 상방으로 임명하고, 원교근공책을 적극 반영하여, 가까운 먼나라와 친하게 지내며, 가까운 나라를 공격했다. 영직은 75세까지 총 56년간 왕으로 재임하였고, 그가 죽은지 3년후 그의 증손자인 영정이 시황제로 등극하여 7웅을 하나의 진으로 통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