艶鬼 | 염귀
주자서는 오늘도 원하지도 않는 옷을 입고 촬영에 임했다. 무명 배우, 모델에게 일이란 언제 끊겨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누구에게나 스쳐가는 젊음은 팔 수 있을 때 최대한 많이 팔아 두는 것이 남는 장사다. 특히 전혀 유명하지 않고, 빠듯한 생활비에 다음 학기 등록금을 걱정해야 하는 주자서 같은 사람에게 말이다. 주자서는 치렁치렁한 옷을 입고 이제 어깨까지 내려오는 머리를 반으로 묶은 뒤 사람이 별로 없는 한적한 고궁의 난간에 기대어 앉았다. 살아 생전 처음으로 머리를 6개월 넘게 길렀건만, 헤어 모델을 부탁한 곳에서는 3개월째 연락이 없다.
누군가의 별궁이었다든가 애첩의 화원이었다든가 그런 얘기를 말해주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지만 사실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지금 입고 있는 이 옷이 여자의 옷인지 남자의 옷인지 주자서는 모른다. 어느 시대의 옷인지도 사실 잘 모르겠다. 공부를 그렇게 잘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못하는 편도 아니었던 주자서는 역사책에서 이런 옷을 본 것도 같다. 오늘 촬영이 끝나면 제때 보수를 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다. 그 돈으로 밀린 집세를 내느라 며칠째 꽃빵으로 끼니를 때우는 생활을 청산하고 싶었다. 금액이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일단 받으면 그 돈으로 제일 먹고 싶었던 마라탕을 먹으러 가겠다고 결심하고 눈을 떴다. 촬영기사가 주자서에게 이런 저런 자세를 요구했다. 이제 막 더워지기 시작한 햇살에 소매를 털고 작게 한숨 쉬며 고개를 내리깔았다. 촬영이 끝나기 전까지 어떻게 물로 달래 놓은 배에서 민망한 소리가 나오지 않기를 바라며.
촬영기사는 그를 난간에 기대게 하고 몇 번 더 사진을 찍었다. 다른 관계자와 찍은 사진을 확인하겠다며 잠시 자리를 비우는 동안 주자서는 기대고 있던 난간에 걸터앉았다. 고개를 돌려 난간 아래에 있는 연못 아니, 이정도 크기면 호수다. 호수를 보았다. 인공으로 만든 것 같은데 깊은 것인지 물색이 짙다. 주자서는 고개를 좀 더 꺾어서 혹시 물고기가 사나 하고 유심히 보았다. 좀 더 가까이 보면 바닥이 보일 것 같아 조금 더 몸을 기울이던 주자서는 순간 중심을 잃고 물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풍덩’ 사람이 물에 빠진 것 치고는 주변은 조용하다. 방금 전까지 난간에 누군가가 앉아 있었던 것 같은데 화원을 구경하던 사람들은 물에 뭔가 빠지는 소리를 듣고 연못을 보았다. 연꽃이 가득한 연못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고요하기만 하다.
‘어’하는 사이 물 속에 빠진 주자서는 당황하여 허우적댔다. ‘어떻게 물에 빠졌었더라?’ 생각하는 사이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다. 시야가 어둡고 치마같이 긴 장포는 흠뻑 젖어 주자서의 다리를 옭아맸다. 생각처럼 몸을 움직일 수 없어 당황한 주자서는 있는 힘껏 팔을 휘저어 수면 위로 올라갔다. 방금 전까지 분명 대낮이었는데 수면을 박차고 올라온 주자서의 하늘에는 달이 휘영청 밝게 떠있다. 주자서는 막혔던 숨을 몰아쉬며 이 곳이 어디인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멀지 않은 곳에 물가가 있기에 주자서는 팔을 저어 뭍에 닿았다. 몸에 힘이 쭉 빠진 주자서는 물가에 벌렁 드러누웠다. 거칠었던 숨이 점점 편안해지자 누워있는 자갈에 등이 배겨 아팠다. 몸은 놀랐는지 쉽게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
자갈밭에 누워있는 것은 생각보다 등이 너무 아파서 주자서는 일어나 앉았다. 한참 앉아서 그는 생각했다. ‘여기는 어디지? 나는 누구지?’ 분명 고풍스러운 전각 사이를 거닐며 무언가를 걱정했던 것 같은데 무언가 생각하려고 하면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다. 얼굴을 찡그리고 손을 들어 관자놀이 있는 부근을 꾹 누르자 좀 두통이 가시는 것 같다. 주변은 불빛 하나 없이 어두웠고, 추웠다. 하늘에 뜬 달은 뭔가 그가 알고 있던 달보다 더 밝은 것 같았다. 주자서가 앉아서 스스로의 자아에 대한 철학적인 고뇌를 하고 있을 때, 물소리가 나더니 물 속에서 또 다른 인영이 나타났다. 그는 물소리와 인기척에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경계했다. 그러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도망갈 준비를 했다. 물에 푹 젖은 옷자락이 몸에 차닥차닥 감겨온다. 누구인지 알아서 별로 좋을 일 없을 것 같다는 본능적인 직감으로 주자서는 도망칠 만한 곳이 있는지 주변을 둘러봤다. 불행하게도 주자서가 뭍이라고 생각했던 물가는 뭍이라고 하기 보다는 섬에 더 가까운 것이라 갈 곳이 없었다. 물 속의 인영이 점점 주자서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주자서는 겁이 나서 예전에 누군가에게 배웠던 것 같은 자세를 취했다. 머리를 감싸고 쪼그려 앉은 그에게 누군가가 다가와서 물었다.
“너는 뭐지?”
쪼그려 앉은 주자서에게 낯선 목소리가 물었다. 반응이 없는 주자서에게 다가온 사람은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다시 물었다.
“너 누구야?”
주자서는 낯선 사람의 손을 물리치며 더 작게 몸을 웅크렸다. 몇 번 더 주자서의 어깨를 툭툭 치던 사람은 곧 답답했는지 주자서의 등을 발로 찼다. 갑작스러운 힘에 밀려 주자서는 자갈밭에 풀썩 넘어지고 말았다. 욱하는 마음에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야!”
훤칠하게 키가 큰 남자는 어디인가 친숙하면서도 낯설었다. 긴 머리가 물에 젖어 여기저기 들러붙어 서로 꼴이 말이 아니었다.
남자가 다시 물었다.
“야, 너 뭐야? 왜 여기 있어?”
주자서는 눈을 굴리며 생각했다. ‘그러게 난 뭘까?’ 자신을 발로 찬 남자가 괘씸해서 알았어도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주자서는 남자에게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그러는 너는 뭐야? 뭔데 사람을 막 발로 차냐?”
남자는 얼굴을 찌푸리더니 ‘하’하고 웃었다.
“뭐? 너 나 몰라? 누구 아래 있는 잡귀인데 이렇게 정신이 없어?”
주자서의 한 쪽 눈썹이 올라가며 말했다.
“잡귀? 너 지금 나 잡귀라고 불렀냐?”
남자는 한 순간에 웃는 낯을 지우고 조금 더 가깝게 붙어 서며 주자서를 보았다.
“같은 말 여러 번 하게 하지 말고 대답해. 너 뭐야?”
주자서는 자신을 차갑게 노려보는 남자를 보고 황망스러우면서 기가 막혔다. 주자서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같이 노려보며 말했다.
“그러는 너는 뭔데?”
남자는 주자서의 물음에 기분 나쁘게 웃으며 말했다.
“나? 귀왕.”
주자서의 표정이 일그러지며 둘 사이를 벌려 남자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
“귀왕? 나 죽은 거야…?”
남자 역시 주자서를 위아래로 노골적으로 훑어보고는 말했다.
“대체 누구한테 미움을 사서 한담수옥(寒潭水獄)에 갇힌 거야?”
주자서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한담수옥? 여기 감옥이야?”
온객행은 재미있다는 듯이 큰소리로 ‘하하하’하고 웃었다.
주자서는 이곳이 지옥이라서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기억하지 못하는 속세의 인생이 너무 잔혹하고 끔찍해서 죽자마자 기억을 모두 잃어버린 것이라고. 주자서가 생각하는 지옥은 죄를 지은 사람들로 넘쳐 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아무도 없어서 그것이 더 무서웠다. 대체 어떤 죄를 지었길래 이런 곳에 갇히게 된 걸까? 주자서가 남자를 보며 물었다.
“귀왕이라고? 그럼 나를 심판하러 온 건가?”
남자는 그 말에 배꼽을 잡고 웃으며 바닥에 털썩 주저 앉았다. 영문을 모르는 주자서는 그제야 이 곳이 서늘하다 못해 춥다는 것이 느껴졌다. 몸을 부르르 떨며 ‘지옥불은 뜨거울 줄 알았는데 차갑네.’라고 생각했다. 주자서는 이제 자신을 손가락질하며 웃고 있는 귀왕을 힐끔 보고 젖은 옷을 벗기 시작했다.
소매도 길고 치마 같은 이 옷은 많이 낯설다. 주자서를 보고 웃고 있는 남자도 비슷한 옷을 입긴 했지만 소재가 조금 더 좋아 보였다. 여러 겹의 젖은 옷을 겹쳐 입고 있어서 일까? 갑자기 오한이 들었다. 장포를 하나둘 벗어 꼭 짜고 물기를 털어 자갈 위에 올려 두었다. 좀 판판한 돌 하나를 찾아 그 위에 털썩 앉고 신고 있는 신발을 벗고, 양말을 벗었다. 신발에서 물이 왈칵 쏟아졌다. 주자서는 물기를 털어 뒤집어 놓고 몸에 달라붙은 티셔츠를 벗을까 말까 고민했다. 뭐가 그렇게 재미 있는 것인지, 배를 잡고 웃던 귀왕은 당황한듯 갑자기 벌떡 일어나 옷을 벗는 주자서를 구경했다.
주자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들오들 떨며 입고 있던 옷이 마르도록 바닥에 펼쳐 놓았다. 그러다 너무 추워서 안에 입었던 얇은 장포를 몇 번 털어 내고 둘러 입었다. 그리고 뚫어져라 쳐다보는 귀왕에게 말했다.
“뭘 봐?”
귀왕이 주자서의 곁으로 다가와 앉으며 그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말했다.
“너? 이렇게 발을 다 내놓고 날 유혹하는 거야?”
이번엔 주자서가 ‘푸하’하고 웃으며 말했다.
“유혹? 내가? 너를? 하하하.”
귀왕은 주자서의 팔뚝을 쓰다듬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내가 너를 어떻게 심판해야 할까?”
주자서는 귀왕이 자신을 쓰다듬는 손길에 소름이 돋았다. 그는 귀왕을 밀어내며 말했다.
“죄를 정말 많이 지었나 봐. 너 같은 것에게 심판을 받아야 하다니.”
귀왕은 주자서에게 몸을 더 붙이며 말했다.
“아주 운이 좋네, 나에게 환심을 샀으니.”
주자서가 일어나기 위해 그를 뿌리치자 귀왕이 주자서를 자신의 무릎에 앉히며 말했다.
“낭군님 무릎에 살며시 앉았으니, 사랑스럽지 않은 곳이 어디인가?”(1)
주자서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귀왕을 보았다. 귀왕은 웃으며 얼굴을 붙였다.
“지난날엔 기생집 광대였고, 지금은 떠도는 귀신의 가인(佳人)이라네, 길 떠난 귀신은 돌아오지 않으니, 내 침상을 지켜보는 것은 어떠 한가?”(2)
주자서는 귀왕이 하는 말을 대체로 다 알아듣지 못했지만 침상이라는 말은 알아들었다. 뭔가 묘하게 익숙한 구절이라 주자서는 귀왕을 뿌리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뭐라는 거야! 벌받을 거 받고 나는 환생하러 갈래. 다음생에는 사람으로 태어나지 말아야 이런 더러운 꼴을 안 볼 텐데.”
주자서의 말에 귀왕이 자리에서 일어나 ‘하하하’하고 웃었다. 그리고 주자서의 허리에 팔을 감더니 달빛이 들어오는 곳으로 몸을 훌쩍 날렸다. 갑자기 지면에서 떨어져 높이 날아오르는 느낌에 주자서는 귀왕의 목에 팔을 둘러 꼭 붙으며 말했다.
“아니! 미쳤나!”
귀왕은 주자서의 타박에 ‘하하하’웃으며 높은 바위위에 착지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평범하게 초목이 우거진 산이었다. 주자서는 지옥이라고 생각했던 곳이 사실은 그냥 지하 동굴이었다는 사실에 조금 맥이 풀렸다. 그냥 암석사이에 고인 물이었을 뿐이다.
주자서는 귀왕의 목에 둘렀던 팔을 풀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가 움직이려고 하자 귀왕이 그의 허리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너를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
주자서는 허리에 둘러진 귀왕의 손을 잡아떼며 말했다.
“주자서, 나는 주자서. 이름은 기억나.”
귀왕이 돌아간 주자서의 얼굴을 잡아 돌리며 말했다.
“염귀(艶鬼).”
주자서는 얼굴을 구기며 턱을 잡은 귀왕의 손을 벗어나려고 고개를 흔들었다. 귀왕은 주자서의 뺨에 자신의 뺨을 붙이고 말했다.
“너는 오늘부터 염귀야.”
주자서는 귀왕에게 허리가 잡힌 채 어디로 인가 운반되었다. 도착한 곳은 온통 붉은 색으로 칠해진 전각이었는데 현판에는 박정부(薄情府)라고 쓰여 있었다. 주자서가 작은 목소리로 ‘박정부?’ 라고 현판을 읽자 귀왕은 의외라는 듯 주자서에게 말했다.
“아주 바보는 아닌가 보군?”
귀왕은 박정부의 대문을 박차고 들어가 외실에 주자서를 던져 놓았다. 외실 상석에는 붉은 옷을 입은 머리가 새하얀 아름다운 여인이 앉아 있었는데 이제 막 들어온 귀왕을 보고 티가 나게 한숨을 쉬었다. 주자서는 왜 인지 그녀의 마음이 이해가 되어 고개를 돌려 귀왕을 노려보았다.
여인이 물었다.
“곡주, 이건 또 무슨 장난이십니까?”
귀왕은 외실에 있는 의자에 털썩 앉으며 말했다.
“오늘부터 이 자가 염귀네.”
여인의 눈썹이 찡그려지며 귀왕을 보았다. 귀왕은 금방 차를 내오는 시녀에게서 찻잔을 받아 ‘후후’불고 차를 마셨다. 여인이 말없이 그를 노려보자 차를 몇 번 홀짝이던 귀왕이 입을 열었다.
“그 전에 있던 염귀는 치웠으니까.”
주자서는 슬쩍 바닥에서 일어나 얼굴을 찌푸린 채로 여인 근처에 있는 의자에 가서 앉았다. 귀왕보다는 이 아름다운 여인이 좀 더 융통성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여인은 주자서에게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말했다.
“곡주가 되신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귀왕이 웃으며 말했다.
“전에 있던 염귀를 탐탁치 않게 생각하지 않으셨습니까? 박정부주? 그리하여 내가 손수 치워드리고 이렇게 새로 시중을 들 자를 구해 왔는데 불만이십니까?”
여인이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급색귀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귀왕이 찻잔을 내려 놓으며 말했다.
“유자업(劉子業) 그 놈은 실증이 많은 놈이니 박정부가 더 걱정입니다.”
여인이 고개를 돌리다 옆에 앉은 주자서를 발견하고 그를 보았다.
여인은 고개를 돌려 귀왕을 보고 말했다.
“이 자는 사내가 아닙니까? 박정부에 사내를 둘 수는 없습니다.”
온객행이 주자서를 보며 말했다.
“걱정 마시게, 저자는 내공이 없으니 박정부에 있는 다른 여비들에게 되려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지.”
주자서는 귀왕의 말에 소름이 돋아 두 팔로 몸을 감싸고 부르르 떨었다. 여인은 그제야 두사람이 쫄딱 젖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사람을 시켜 영견을 가져오게 시켰다. 여인이 귀왕의 머리를 말리며 시중을 들었다.
“저 자는 어디서 데려오신 겁니까?”
귀왕이 하인과 실랑이하고 있는 주자서를 보며 말했다.
“한담수옥에서 찾았네.”
여인은 잠시 시선을 주자서에게 주었다가 다시 거두며 말했다.
“저 아이를 여기에 두고 앞으로 여기서 지내겠다는 뜻입니까?”
귀왕이 여인을 보고 말했다.
“그러면 안되나?”
여인은 다시 고개를 돌려 주자서를 보았다.
주자서는 몸을 닦아주려는 하인에게서 영견을 받아 몸을 닦고 있었다. 하인들이 다가와 머리를 말려주려고 하자 어색하게 거절하며 머리를 손으로 털었다. 머리카락은 어디에서 잘렸는지 아니면 출가했던 중이었는지 어깨까지 밖에 오지 않았다. 귀왕이 불쑥 말했다.
“귀신에게 버림받고 배신당해 한담수옥에 갇혔는데도 전혀 주눅들지 않았잖은가? 저 정도 배포는 있어야지. 십대 악귀라면.”
여인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아행, 여기에선 푹 자도 괜찮아. 아무도 함부로 들어오지 못할 테니.”
귀왕은 머리를 빗는 여인의 손길을 뿌리치고 여인을 보았다. 여인은 고개를 숙이고 무릎 꿇으며 말했다.
“곡주.”
귀왕은 천천히 일어나 영견으로 머리를 털고 있는 주자서의 손목을 낚아채고는 내실로 향했다.
주자서는 자신을 끌고가는 귀왕의 뒤에 무릎 꿇고 앉아 있는 여인을 발견하고
“아이고!”
하며 손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어찌나 꽉 옭아 맸는지 손목이 빠지지 않았다. 주자서가 곧 포기하고 귀왕에게 끌려가며 말했다.
“너 진짜 벌받아, 여자한테 나쁜 짓 해서 좋은 꼴 못 봤다.”
귀왕은 곧 내실의 장지문을 거칠게 열고 주자서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주자서는 휘청거리며 바닥을 짚고 넘어졌다.
“야! 살살해! 내가 아무리 죄인이지만 사람을 이렇게 막 대해도 되는 거야?”
주자서는 바닥에 덜퍼덕 앉아 귀왕에게 손가락질했다. 귀왕은 바닥에 앉은 주자서를 한참 표정 없이 보고 있다가 손가락질하고 있는 주자의 손을 덥석 잡아 일으켰다. 갑작스러운 힘에 자리에서 일어난 주자서가 휘청하며 귀왕의 품에 안겼다. 귀왕은 자기 품으로 들어온 주자서를 팔로 감싸 안았다.
갑작스러운 포옹에 주자서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지는 것을 느낀 귀왕이 부스스 웃으며 주자서의 목덜미에 입술을 맞췄다. 주자서가 당황하며 말했다.
“잠깐, 잠깐.”
귀왕이 놔주는 기색이 없어서 주자서가 더 몸부림치며 말했다.
“잠깐! 좀 놔 봐!”
귀왕은 주자서의 말에 팔을 조금 풀어 얼굴을 마주보았다. 주자서는 귀왕의 얼굴을 빤히 보더니 갑자기 얼굴이 빨개져서 말했다.
“나는 편견 있는 사람은 아니야. 사람이 사람 좋아하는 게 잘못된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귀왕이 얼굴을 가깝게 붙이자 주자서가 귀왕의 얼굴을 손으로 밀며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편견은 없지만 대상이 나면 내 얘기도 좀 들어봐야 하는 거 아닌가?”
다급한 주자서의 목소리에 귀왕이 작게 웃었다. 주자서는 귀왕의 포옹에서 벗어나기 위해 조금 더 몸부림쳤다.
귀왕이 순순히 주자서를 놓아주며 말했다.
“주인님. 너는 앞으로 나를 주인님이라고 불러야지.”
주자서는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 잔뜩 인상을 쓰고 말했다.
“주인? 네가? 나의? 언제부터?”
온객행이 주자서를 침상으로 잡아 끌며 말했다.
“네가 염귀가 된 순간부터.”
주자서는 얼이 빠져서 귀왕이 하는 대로 침상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나는 염귀 한다고 한적 없는데?”
그리고 골똘히 생각하더니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아! 너!”
온객행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얼굴을 마주보자 주자서는 입을 열었다 닫았다 하더니 고개를 막 흔들며 말했다.
“보통 사람은 날 수 있었나? 그거 나는 거는 나도 할 수 있는 건가?”
정신없는 주자서를 두고 온객행이 몸을 붙여 그의 허리춤을 잡았다. 주자서는 또 가까워진 거리에 몸을 뒤로 빼다가 침상에 벌렁 눕게 됐다. ‘앗’ 온객행은 주자서의 몸 위에 자신의 몸을 덮으며 말했다.
“얘기 들어줄 테니까 해봐.”
주자서는 무슨 말인가 생각하다가 다시 얼굴을 붉히고 말했다.
“아니, 이건 좀… 우린 오늘 처음 만났는데 너무 빠른 거 아닌가? 너 나한테 고백도 안 했고… 이런 건 좀 더 서로에 대해 차차 알아간 다음에 마음을 먼저 연 다음에…”
주자서가 귀왕의 시선을 피하며 장황하게 말을 늘어 놓자 귀왕이 주자서의 몸을 침상 안쪽으로 밀며 자신의 몸 아래로 가두었다. 주자서는 귀왕이 하는 것을 누워서 쳐다보고 있다가 팔로 몸을 감싸고는 말했다.
“너는 내 몸만 가지고 싶은 거야? 마음은 필요 없어?”
주자서는 스스로 하는 말이 참 우습다고 생각했다. 어디 유치한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유치한 대사. ‘드라마? 대사?’ 귀왕이 주자서의 말에 작게 코웃음쳤다.
“네 마음을 가져서 어디에 쓰라고?”
주자서가 생각해도 맞는 말이다. 여기가 어디인지도 모르겠고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주자서의 마음은 값으로 따지자면 헐값도 안되고 아마 주자서 쪽에서 돈을 내고 폐기처분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주자서는 조금 서러워졌다. 어디에 있든 누구인지 몰라도 주자서의 몸값은 참 싸다.
주자서는 본인이 내심 몸을 팔던 창부였나 싶어서 팔로 몸을 더듬었다. 앞섶을 양쪽으로 젖히고 스스로 몸을 더듬는 주자서를 재미있다는 듯 보고 있던 귀왕이 팔을 괴어 주자서 옆에 누웠다. 앞섶을 다 잡아 벌려도 맨 살이 나오지 않았다.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주자서는 벌떡 일어나 앉아 허리끈을 풀었다. 아래에는 반바지를 입고 있다. 주자서는 앞섶을 다 벌려 놓은 채로 다시 벌렁 뒤로 눕고는 낮게 말했다.
“샤워하고 싶다.”
귀왕이 주자서의 귓가에 속삭였다.
“허리에 두른 허리띠를 풀어 이미 님 에게 허락했네, 나와 함께 내 옷을 풀어헤칠 사람은 누구 인가?”
(3)
주자서가 귀왕의 얼굴을 손으로 밀며 말했다.
“그냥 나랑 자고 싶다고 해.”
주자서의 말에 귀왕이 부스스 웃었다. 주자서가 조금은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쩌면 나는 닳고 닳은 사람일지도 모르겠어. 정말 어디에도 쓸데없는…”
귀왕은 그런 주자서의 몸에 팔을 둘러 안고 말했다.
“알겠어. 내가 비싸게 사주지.”
주자서가 자신의 가슴에 기대오는 귀왕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너는 장사는 하면 안되겠다.”
귀왕이 몸을 일으켜 두사람을 침상위에 제대로 다시 눕힌 다음 주자서의 가슴을 베고 누웠다. 주자서는 물에 젖은 옷이 마르지도 않은 상태에서 씻지도 않고 자는 것이 조금 싫었지만 그냥 귀왕이 하는 데로 두었다. 어쩌면 그냥 긴 꿈일지도 모르겠다. 깨어나면 아무것도 기억에 남지 않을 그런 조금 이상하고 아렴풋한 꿈.
온객행은 자신의 손에 묻은 염귀의 피를 짜증난다는 듯이 닦았다. 닦아내도 닦아내도 더 스미기만 하고 지워지지 않아 화가 난 온객행은 싸늘하게 식어버린 염귀의 시신을 그대로 두고 한담으로 향했다. 한담수옥이라고 불리는 이곳은 돌산으로 이루어진 곳에 고인 물이다. 그 물이 깊고 경공이 높은 자가 아니면 빠져나올 수 없어서 죄를 지은 악귀들의 다리를 잘라 버리는 곳이기도 했다. 그 곳은 사계절 내내 한기가 서리는 곳으로 그 지하에 얼마나 많은 시체가 쌓여 있는지 아는 자는 없었다. 온객행은 노곡주(老谷主)의 손에 의해 이곳에 갇힌 적이 있었다. 항상 속내와 실력을 감추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다는 것은 아무도 몰랐다. 그러다 딱 한번 곡주의 명령을 어긴 적이 있다. 노곡주는 그런 온객행의 내공을 폐하고 한담수옥에 가두었다.
노곡주가 몰랐던 것이라면, 그것은 온객행이 이미 꽤 많은 종류의 독에 내성이 있다는 점이었다. 그 독을 먹인 것은 노곡주였는데 그는 기억하지 못했다. 애초에 다리도 자르지 않고 한담수옥에 가둔 것부터 곡주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온객행은 노곡주의 허술한 행동에 조금 마음을 놓았다. 그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사람이라면 죽일 수 있다. 한담수옥에 있는 동안 온객행은 그 어느때보다 자유롭고 편안했다. 살을 에는 추위는 매일매일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을까 벌벌 떠는 것보다 참을 만했다. 온객행이 노곡주의 살가죽을 벗기는 동안 그는 살아 있었다. 비명을 지르고 울부짖는 그의 모습을 보고 온객행은 묘한 만족감을 느꼈다. 노곡주는 귀곡의 모든 악귀는 자신의 자식이라고 말했다. 어느 아비가 자식에게 살인과 방화를 시킨다는 말인가?
온객행은 핏물이 배어 있는 장포를 입은 채로 한담수옥의 입구로 갔다. 까마득하게 먼 수면위로 먼저 장포를 벗어 던지고 온객행도 곧 몸을 던졌다. ‘풍덩’하는 소리와 함께 수면 아래로 잠겼다. 숨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때까지 가라앉다가 피에 절은 중의도 마저 벗어 버리고 수면 위로 올라갔다. 숨을 힘차게 몰아쉬고 하늘을 보았다. 망(望)이다. 온객행은 밝은 달빛 아래 스스로가 죄스러워서 서러워졌다. 그때 사람의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온객행은 당황해서 주변을 둘러봤지만 보이는 것이 별로 없었다. 숨소리는 곧 물을 가르는 소리가 되고 곧 물속에서 나온 인영이 한담의 가운데에 있는 섬에 닿았다. 누군가 한담수옥에 악귀를 가두었다는 소리는 들은 적이 없다. 하지만 약육강식의 귀곡에서 원한만 있으면 이 곳으로 떨어지는 방법은 수천가지다. 온객행은 대체 어떤 사연으로 이곳에 갇히게 되었는지 궁금증이 일었다. 몸에 묻은 피를 닦아 내고 섬으로 다가갔다.
(1) 자야가 세번째
婉伸郎膝上 何處不可憐
낭군님 무릎에 살며시 누웠으니, 사랑스럽지 않은 곳이 어디 있나요!
(2) 고시십구수 두번째
昔為倡家女, 今為蕩子婦. 蕩子行不歸 空床難獨守.
지난날엔 기생집 여인이었고 지금은 떠도는 나그네의 아내라네. 길 떠난 사내는 돌아오지 않으니, 빈 침상 홀로 지키기 어렵다네
(3) 자야가 열일곱번째
綠攬迮題錦 雙裙今復開 已許腰中帶 誰共解羅衣
나는 비단 겹치마에 녹색 허리띠를 두르고 있는데, 겹치마를 다시 벗어 던지고 이미 허리에 두른 허리띠를 풀어 님 에게 허락했지만, 나와 함께 내 비단 옷을 풀어헤친 사람은 누구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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