喜喪鬼 | 희상귀
식시귀 고오(古奧)는 주변에 수하를 많이 두지 못했다. 언제 그의 광증이 일어 수하를 알아보지 못하고 잡아 먹힐지 모르기 때문이다. 광증만 일지 않으면 사람 자체는 그렇게 나쁘지 않다. 이름이 무색하게 그는 먹는 것에 관심이 없어서 막대기같이 마른 남자였다. 주변에 사람이 없다는 것은 세력을 형성하기 어렵다는 뜻이고, 세력을 형성하기 어렵다는 뜻은 혼자서 십대 악귀의 이름을 달고 활동할 만큼 무공이 출중하다는 뜻이다. 온객행은 식시귀가 세력을 가졌으면 했다. 지금 귀곡에서 십대 악귀의 수장 자리를 꿰차고 있는 무상귀 설단(契丹)은 회갑을 넘긴 다 늙은 노인네다. 그는 다른 악귀와는 다르게 규칙을 두고 그 규칙에 맞게 상과 벌을 알맞게 이용하여 수하를 부렸는데, 온객행이 노곡주를 먼저 치지 않았으면 무상귀가 곡주의 자리를 가졌을 것이다. 새파랗게 젊은 온객행을 안중정(眼中釘)으로 생각하는 그 노인네에게 새로운 장난감을 쥐어 주기 위해서라도 식시귀는 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식시귀가 꼭 고오일 필요는 없다.
온객행은 개심귀 백명(百鳴)이 부리는 수하들 중에 시체를 먹는 자를 추렸다. 일단 이름의 구색을 갖추자는 생각이다. 개심귀는 사람의 심장만 먹기 때문에 심장 이외의 부분은 개심귀의 수하들이 나누어 먹고는 했다. 개심귀 아래에서 제일 많이 먹고 제일 힘이 좋은 잡귀의 이름은 보아(甫兒)였다. 성도 없고 개심귀의 수하들이 남긴 시체를 남김없이 먹어 치워 몸집이 거대했다. 사람을 죽여서도 먹지만 이미 죽어 있는 시체도 먹는 놈이고 나갈 정신을 따로 챙겨야 할 만큼 똑똑하지도 않았다. 다루기 쉬운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는 온객행이 관심을 주기 전까지는 그냥 힘 좀 쓰는 개심귀의 수하였다. 온객행은 일부러 콕 집어 그를 자주 불러 일을 시켰다. 특별한 일은 아니고 박정부에 들어와 여귀를 겁탈한 놈들을 잡아 죽이거나 노곡주의 취향대로 불상이 가득한 귀곡 대전을 치우는 일 정도이다. 노곡주는 말년에 자신이 한 일이 두려웠는지 나찰의 불상을 모아 대전에 세워 두었다. 온객행은 대전에 첫번째 나찰이 들어왔을 때, 드디어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무상귀는 하나 둘 치워지는 대전의 나찰을 보고 몇 번이나 온객행에게 그러지 마시라고 말했지만, 온객행은 심드렁하게 무상귀가 원하면 가져가도 좋다고 허락까지 했다. 나찰 불상이 모두 빠져나간 대전은 촛대마저 귀왕좌 주변에 몇 개 있을 뿐이라 어둡고 쓸쓸했다. 온객행은 그것이 귀곡이랑 아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무상귀는 매일 밤 새로운 자객을 온객행에게 보내는 것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에 온객행은 매일 잠자리를 고민해야 했다. 온객행은 한담에서 발견한 염귀를 떠올렸다.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어렵게 내려 누르고 대전에서 나찰을 들고 이리저리 움직이는 보아를 보았다. 고오를 없애기는 해야 하는데 아는 것이 없다. 저 미련한 보아 혼자서 식시귀를 죽일 수도 없다. 온객행은 귀왕좌에 휘우듬하게 걸터앉아 관자놀이를 지긋이 눌렀다. 온객행은 ‘염귀가 주물러 줬으면 좋겠다.’ 따위의 생각을 했다.
아침부터 남의 손에 깨어나 세수하고 몸을 씻고는 어제 입고 있던 옷보다 더 화려하고 하늘하늘한 옷을 입고 꽃신처럼 보이는 붉은 신발을 신었다. 주자서는 자신의 몸을 서슴없이 더듬어 대는 사람들의 손길은 무덤덤하게 받아들였지만 계속해서 ‘저기… 이게 정말 내 옷이에요?’ 라고 묻는 것은 멈추지 못했다. 여인들은 ‘까르르’ 웃으면서 뭐하나 대답해주지 않고 ‘박정부주께서 설명하실 겁니다.’ 라는 말만 반복했다. 옷이 다 갈아 입혀지자 사람들은 그를 거울 앞으로 데려가 앉히고는 머리를 빗으며 머릿기름을 발랐다. 거울은 반질반질 닦여서 희미하게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하인들이 연지를 가져다 주자서의 얼굴에 바르는데도 주자서는 속으로 ‘이 거울은 잘 안보이네.’ 같은 생각을 했다. 그의 짧은 머리를 보고 하인 하나가 그에게 물었다.
“공자께서는 왜 머리가 짧으셔요?”
주자서가 어깨까지 오는 머리를 만지며 말했다.
“짧다고요? 이정도면 길지 않나요? 남잔데.”
하인들이 다시 ‘까르르’ 웃었다. 주자서가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정말 다들 머리가 길다. 마치 태어나서 한번도 머리를 자르지 않은 것처럼.
주자서는 하인들과 소소한 잡담을 하며 박정부의 응접실로 갔다. 박정부에는 의외로 아이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부모가 없는 고아이거나, 귀곡에서 태어난 아이들이라고 했다. 누구를 보살필 만한 멀쩡한 귀신이 없는 지옥에서 사는 것이 가여워 박정부주가 거둬드린 아이들이라고 했다. 그런 아이들은 매일 몇 명씩 늘어나고 줄어드니 걱정할 필요 없다고 했다. 주자서는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늘어나는 건 몰라도 줄어들면 찾아야 되는 거 아닌가? 아직 애들인데.”
주자서의 말에 같이 걷던 하인들이 마치 살면서 그런 소리는 처음 들었다는 듯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주자서는 솔직히 아직도 여기가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사람이 사는 곳 같으면서도 서로를 귀신이라 부르며 사람으로써 마땅히 해야 되는 것을 하지 않고 도리(道理)도 없어 보였다. 이곳은 정말 지옥일까? 하인들과 함께 걷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염귀를 불렀다.
“염귀? 왜 여기 있어?”
보라색 옷을 입은 소녀가 다짜고짜 주자서를 멈춰 세웠다.
소녀는 돌아선 주자서의 모습을 보더니 덥석 주자서의 가슴에 손을 올려놓고 되려 자기가 놀라며 말했다
“아악! 사내잖아?”
주자서는 소녀의 손길을 뿌리치고 양팔로 몸을 감싸며 소녀를 노려봤다. 소녀는 주자서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흥’ 하고 코웃음 치며 주자서에게 손가락질했다.
“만지면 닳는 것도 아닌데, 뭐 어때?”
주자서는 몸에 두른 팔을 풀고 똑같이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아가씨가 못하는 말이 없어! 닳는 것도 아니면 만져도 되는 거야? 남에 몸에 막 그렇게 함부로 손을 대면 안되지!”
소녀는 놀란 듯 요상한 표정을 짓고 되물었다.
“아…아가씨?”
주자서가 주변의 눈치를 한번 보고 말했다.
“그럼 아가씨지, 뭐 벌써 애라도 있어? 어멈이야?”
소녀의 얼굴이 다시 노기를 띄며 말했다.
“뭐? 어멈?!”
소녀가 달려들려고 하자 옆에 서있던 하인들이 ‘까르르’웃으며 말했다.
“아상, 그만해. 곡주께서 데려오셨어.”
소녀가 주자서의 팔뚝을 때리는 행동을 멈추며 말했다.
“뭐? 주인이?”
주자서는 소녀의 호칭을 듣고 조금 기분이 이상해졌다. ‘이 소녀는 대체 곡주라고 불리는 귀왕의 뭔데 주인이라고 부르는 걸까? 막 이상한 건 아니겠지…?’ 아상이라고 불린 소녀는 다시 한번 주자서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주인의 취향이 그새 바뀌었나?”
주자서가 소녀를 보고 되물었다.
“취향이라니?”
아상은 주자서의 말에 더 놀라며 물었다.
“주인이 데려왔으면 같이 잔 거 아니야?”
주자서가 얼굴이 빨개져서 버럭 소리 질렀다.
“그게 무슨 소리야!”
아상은 귀를 막으며 말했다.
“귀청 떨어지겠네! 조용히 말해! 이건 또 어디서 굴러먹던 잡귀야?”
주자서의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달아올라 소녀에게 말했다.
“다 큰 아가씨가 못하는 말이 없어!”
소녀가 귀로 가져갔던 손을 아래로 내리며 말했다.
“아가씨라니, 허 참. 간지러워서. 난 고상이야. 주인이 데려온 거면…”
주자서가 ‘큼큼’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손을 내밀며 말했다.
“나는 주자서야. 고상? 고상이라고 부르면 돼?”
고상은 빤히 내밀어진 손을 보더니 주자서를 보았다. 민망해진 주자서는 손을 거두고 옆에 서 있던 하인들에게도 이름을 물었다. 주자서의 옷을 입혀준 아이는 강리(江離; 향초의 한 종류; 천궁(川芎))와 목란(木蘭; 목련)이고, 그에게 머리가 왜 짧은 지 물었던 아이는 두형(杜衡; 향초의 한 종류), 방금 고상을 막아준 아이는 유이(留夷; 작약)라고 했다. 주자서가 웃으며 말했다.
“내가 꽃밭에 있는 줄 몰랐네.”
그 말을 들은 하인들의 뺨이 붉어 졌다. 고상이 그들에게 눈치를 주며 말했다.
“주인이 데려온 거면 얼굴을 붉혀도 소용없는 거 알지?”
하인들인 다시 ‘까르르’ 웃었다.
응접실에 도착했을 때 내부에는 하인 몇 명만 있고 박정부주는 보이지 않았다. 주자서가 눈치를 보며 멀뚱히 서있자 고상은 어제 밤에 주자서가 앉았던 상석 근처의 의자에 가서 앉고는 하인들에게 차를 내오라고 시켰다. 주자서를 데려온 하인들이 그를 두고 하나 둘 자기 일을 찾아 하기 시작했다. 주자서는 물끄러미 외실에서 부지런을 떨며 일하는 하인들을 보며 ‘나도 시중을 들러 왔으니 저런 일을 하게 되는 건가?’ 같은 생각을 했다. 주자서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기척도 없이 여인이 불쑥 뒤쪽에서 걸어와 상석에 앉았다. 여인이 안으로 들어오자 분주하게 일을 하고 있던 하인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주자서는 자신도 그래야 하나 싶어서 어정쩡하게 바닥에 꿇어 앉았다. 여인이 상석에 앉아 소매를 휘두르자 하인들은 하나 둘 일어났다. 여인이 들어오건 말건 차를 마시고 있던 고상이 말했다.
“나이모, 대체 주인은 어디서 저런 것을 주웠데요?”
여인이 살포시 웃으며 고상에게 말했다.
“아상, 똑바로 앉아라. 곧 시집을 가도 될 나이인데 몸 가짐을 바르게 해야지.”
고상이 의자 위에 접어 올려 놓았던 다리를 내려놓고 반듯이 앉으며 여인을 보고 웃었다.
여인이 고상을 향해 웃자 주자서는 여인의 모습이 넋을 빼앗겨 숨을 쉴 수 없었다. 웃지 않아도 아름다운데, 웃으니 정말 숨을 쉬는 것을 잊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여인은 주자서에게 시선을 옮겨 미간을 찌푸리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주자서는 여인의 입에서 나오는 한숨이 안타까워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아…그러니까…”
주자서가 입을 열자 고상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디 희상귀가 입을 열지 않았는데, 입을 여느냐!”
소녀의 허리춤에서 흰색의 채찍이 나와 주자서가 꿇어 앉아 있는 부근을 내려쳤다. 정말 깜짝 놀란 주자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상을 보았다. 희상귀가 소녀를 말리며 말했다.
“아상, 아무래도 저 자는 귀신이 아닌 것 같아.”
고상이 고개를 돌려 희상귀를 보고 말했다.
“그럼 주인이 어디 나가서 납치라도 했다는 거에요?”
희상귀가 눈을 굴리며 말했다.
“곡주께서는 한담에서 주우셨다는 구나.”
고상이 펼쳐진 채찍을 감으며 말했다.
“한담수옥에서요?”
채찍을 다 감은 고상이 주자서 앞으로 와서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너! 무슨 죄를 지어서 한담수옥에 있었어?”
주자서는 귀왕에게서 들은 똑같은 질문을 또 받으니 약간 피곤했다. 게다가 그는 정말 아는 게 없다. 주자서는 고상의 허리춤에 다시 매달린 하얀 채찍을 보고 주눅이 들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그러니까 나도 잘 모르겠어…요?”
희상귀가 고상을 다시 자리로 부르며 말했다.
“아상, 그만해라. 그자는 내공이 없어.”
고상이 주자서의 얼굴을 빤히 보며 말했다.
“내공이 없다고요? 정말 주인이 어디서 납치해온 건가?”
주자서도 답답해져서 뭔가 말하려는 데 희상귀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곡주께서 이 자를 염귀로 삼으셨으니, 이 자가 이제부터 염귀야.”
고상이 코웃음 치며 말했다.
“내공도 없는데 염귀는 얼어 죽을.”
희상귀가 주자서를 위아래로 훑어보고 말했다.
“얼굴이 희고 마른 걸로 봐서 어디서 책이나 읽던 서생이 아닐까?”
고상이 주자서 주변을 뱅글뱅글 돌다가 그의 짧은 머리를 손으로 들었다 놓으며 말했다.
“머리가 짧은 걸 보면 파계승일지도 몰라요.”
희상귀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주자서는 마치 자신을 품평하는 것 같은 이 자리가 불편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익숙했다. 주자서는 속으로 자신은 정말 창부였나 싶어서 서러워졌다.
희상귀가 다시 상석으로 돌아가 앉으며 주자서에게 말했다.
“나는 박정부주 희상귀, 앞으로 그대가 모셔야 할 상전이네.”
주자서가 대답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 이전에 염귀는 나를 도와 박정부를 관리하고 운용했네. 그대는 글을 읽을 줄 아는가?”
주자서가 또 다시 대답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상이 주자서의 팔을 툭툭 치며 말했다.
“대답을 해!”
주자서는 자리에 주저 앉으며 고상이 때린 팔을 잡고 말했다.
“네! 네! 읽을 줄 압니다! 쓸 수 있어요.”
희상귀는 곁에 있던 하인 하나에게 작은 목소리로 무언가 시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인이 죽간 몇 책을 소반에 담아 가지고 왔다. 그 소반은 곧 주자서의 앞에 놓여 졌고 희상귀가 주자서에게 고갯짓했다. 주자서는 다시 무릎을 세워 일어나 앉아 죽간을 들었다. 첫번째로 들었던 죽간은 전서(篆書)로 쓰여 있었다. 주자서가 버벅대며 잘 읽지 못하자 고상이 ‘쯧’하고 혀를 찼다.
주자서는 고상의 혀차는 소리에 흠칫 어깨를 떨고 앞에 있는 다른 죽간을 펼쳐 예서(隸書)로 쓰인 죽간을 들어 읽었다. 읽다 보니 도덕경이었다. 주자서가 막힘없이 1장에서부터 10장까지 읽자 희상귀가 손을 들어 그를 멈추었다. 그가 죽간을 읽는 동안 누군가가 모래가 들은 작은 함을 주자서 앞에 놓았다. 그리고 작은 막대를 놓았다. 희상귀가 말했다.
“그대 이름을 써 보시게.”
주자서가 들고 있던 죽간을 다시 잘 말아 소반 위에 올려 놓고 무릎걸음으로 함으로 다가와 막대기를 들었다. 함은 생각보다 크지 않아서 주자서는 희상귀를 힐끔 보고 뭔가 물을까 하다가 그냥 주(周)자를 썼다. 희상귀가 상석에서 내려와 그가 쓴 글씨를 보고 고개를 끄덕이자 모래 함을 가지고 왔던 하인이 모래를 쓸어 글자를 지웠다. 주자서는 희상귀를 보고 다시 막대를 들어 남은 그의 이름자를 썼다. 희상귀가 주자서의 이름자 중에 서(舒)를 보고 작게 코웃음 쳤다.
희상귀가 다시 상석으로 돌아가 앉으며 말했다.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것을 보니 귀한 집 자제 일지도 모르겠네. 애들을 시켜서 혹시 청성산 일대에 없어진 공자가 있는지 묻도록 해라.”
상석 옆에 서있던 하인 하나가 조용히 대답하고 외실을 나갔다. 희상귀가 아직도 김이 피어 오르는 찻잔을 가져와 ‘후룩’ 마시고는 말했다.
“그대는 내가 왜 박정부주인지 아는가?”
주자서가 고개를 도리질 치다가 고상의 눈치를 보고 말했다.
“모릅니다.”
고상이 앉았던 자리로 다시 가서 앉으며 말했다.
“박정부주 희상귀는 연인을 배신한 자를 죽인다.”
희상귀가 씁쓸히 웃으며 말했다.
“자고로 남자는 박정(薄情)하고 여자는 박복(薄福)하다지.”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은 일 하시네요.”
주자서의 말에 고상이 ‘허’하고 헛웃음 쳤고 희상귀는 미간을 찌푸렸다. 곁에서 일을 하던 하인들이 일을 멈추고 하나둘 어깨를 들썩이며 웃기 시작했다. 주자서는 또 자기가 뭔가 실수를 한 줄 알고 잔뜩 겁을 먹고 말했다.
“꼭 남자만 박정한 건 아니지만, 연인을 배신한 사람들은 죽어야죠.”
주자서의 말에 희상귀가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렇지. 박정한 것이 꼭 남자라는 법은 없지.”
희상귀는 하인들을 시켜 얇은 종이로 만든 장부를 가져오게 시켰다. 희상귀가 말했다.
“우리는 홍화를 심어 염색을 하고 연지를 만들어 파는 일을 하네. 박정부 화원에는 홍화가 가득하지. 이것은 그동안 염귀가 관리하던 장부이니 오늘부터 그대가 맡아서 관리하도록 하게.”
주자서가 장부를 받아 들었다. 희상귀가 말했다.
“종이는 매우 귀하니 장부를 적기 전에 목간(木簡)에 먼저 써서 나에게 가져오도록 해라.”
주자서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고상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네!”
하고 대답했다. 희상귀가 깊게 한숨을 쉬고 주자서를 내려 보며 말했다.
“너는 오늘부터 박정부의 아이이니, 몸 가짐을… 아니지, 목란! 유이!”
근처에서 일을 하던 하인 두 명이 곧 주자서의 곁으로 다가왔다.
“오늘부터 너희들이 염귀를 모시거라.”
두 사람은 다소곳이 희상귀에게 절하며 대답했다. 희상귀가 뒤로 돌아서 다시 상석으로 가서 앉으며 말했다.
“그 아이들은 무공을 할 줄 아는 아이들이니 조심하시게. 염귀.”
주자서가 양 옆에 선 목란과 유이를 보고 말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제가 뭐라고 부를까요?”
소녀들이 소매로 웃음을 가리며 대답이 없자 고상이 다가와 주자서의 팔을 잡아 일으키며 말했다.
“너는 주인의 노리개니까 다른 애들은 건드리면 안되지.”
주자서가 엉거주춤 일어나며 고상을 쏘아보았다.
“뭐? 노리개?”
고상이 주자서를 문간으로 밀며 말했다.
“나이모! 내가 얘 구경시켜주고 올 게!”
고상은 박정부주의 대답도 듣지 않고 주자서를 외실 밖으로 밀었다. 뒤 따라 나오던 목란과 유이에게 주자서 손에 들려 있던 장부를 건네 주고 주자서의 팔을 잡아당겼다. 주자서가 고상의 손속에 이리저리 흔들리며 끌려가자 목란과 유이가 다시 ‘까르르’하고 웃었다.
박정부주가 화원이라고 했던 곳은 화원이 아니라 뒷산에 가까웠다. 햇볕이 잘드는 작은 언덕은 아직 피지 않은 연한 녹색의 봉우리와 노란색 홍화로 가득했다. 중간중간 목란과 유이가 입은 옷과 같은 붉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꽃 근처에 앉아서 일을 하고 있었다. 작은 아이들도 하인들의 근처에서 무얼 하는지 떠들고 있었다. 주자서가 작게 탄식했다. ‘우와.’ 고상이 주자서의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소매를 잡고 박정부주 여기저기를 다니며 그를 하인들에게 소개했다. 그리고 항상 소개 끝에는 그가 주인이 데려온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주자서가 싫은 내색을 하며 얼굴을 찡그리면 소개를 받던 하인들이 ‘까르르’ 하고 웃었다. 박정부를 모두 구경하고 나니 주자서는 허기가 아주 많이 일었다. 며칠은 굶은 사람처럼 뱃속에서 우렁차게 ‘꼬르륵’ 소리가 나자 고상이 ‘히히히’ 하고 웃으며 그를 부엌으로 데려갔다.
“염귀, 세상에서 제일 사랑스러운 사람은 먹는 걸 주는 사람이야.”
주자서가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만두를 먹었다.
“맞아. 그런 거 같아.”
부엌에서 일하는 어멈들이 주자서가 먹는 것을 보고 ‘호호호’하고 웃었다.
밥을 다 먹고 다시 어젯밤에 머물렀던 처소로 돌아오자 목란과 유이가 주자서를 반겼다.
“언니...! 아!”
유이의 목소리에 목란과 고상이 ‘하하하’ 하고 크게 웃었다. 주자서가 웃으며 말했다.
“그냥 자서라고 해요.”
유이가 고상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공자, 그럴 수는 없습니다.”
고상이 ‘흠’ 하고 고심하더니 말했다.
“이자의 이름이 자서라고 하니 우리 망서(望舒; 달의 마부)라고 부를까? 목란과 유이가 ‘까르르’하고 웃었다. 영문을 모르는 주자서가 인상을 쓰자 고상이 타박하며 말했다.
“너 망서도 몰라? 달의 마차를 끄는 마부잖아.”
주자서가 ‘그래?’ 하고 되물었다. 뭔가 들어 본 것 같기도 하고 낯선 정보다. 고상이 ‘허’하고 웃으며 말했다.
“글을 읽을 줄 안다면서 어떻게 망서를 몰라?”
주자서가 울컥해서 말했다.
“모를 수도 있지! 그러는 너는 뭐 다 알아?”
고상이 당황한 빛을 하고는 말했다.
“여인이 글을 읽어서 어디에 쓰라고?”
주자서는 살면서 그런 얘기는 처음 들어본다는 식으로 고상에게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글을 읽고 쓰는데 여자 남자가 어디 있어? 글을 모르면 불편하잖아.”
고상이 목란과 유이를 보며 말했다.
“불편한가? 딱히 모르겠는데?”
주자서가 목란과 유이에게 말했다.
“혹시 목란 아가씨 랑 유이 아가씨도 글을 몰라요?”
주자서의 살가운 호칭에 유이가 살포시 웃으며 답했다.
“공자님, 말씀을 편히 하세요. 저희는 저희 이름 자 정도 밖에 모릅니다.”
주자서가 황망스럽게 그들을 보았다.
장지문이 벌컥 열리고 귀왕이 들어왔다. 목란과 유이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고상도 귀왕을 보고 고개를 숙였다. 주자서는 뒤돌아서 귀왕에게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야! 너 여자라고 글자도 안 가르친 거야? 미쳤네, 너 진짜 벌받아!”
주자서의 손가락질에 놀란 귀왕이 고상을 보았다. 고상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목란과 유이를 일으켜 세워 방을 나가며 말했다.
“망서! 앞으로 해야 할 일은 주인이 잘 알려 주실 테니 말 잘들어.”
주자서가 나가려는 고상의 소매를 붙잡고 말했다.
“그냥 자서라고 부르라니까, 어디가? 나 장부 어떻게 보는지 몰라 알려줘야지.”
고상이 주자서의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글을 모르는데 장부를 어떻게 봐! 우린 갈 테니까 주인이랑 둘이 오붓하게 있어.”
주자서가 만족스럽게 웃는 귀왕을 보고 말했다.
“아니야, 잠깐 가지 말아봐. 그러니까…”
고상이 내력을 담아 팔을 뿌리치자 주자서가 힘에 밀려 주자서 뒤에 서 있던 귀왕에게 부딪혔다.
“주인 우린 갈게.”
주자서가 작은 목소리로 고상을 불렀지만 그들은 재빨리 장지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주자서는 귀왕과 거리를 벌리며 말했다.
“아직 대낮이야. 알고 있지?”
귀왕이 주자서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일부러 그러는 거야? 자꾸 밀어내면 더 동하는 거 몰라?”
주자서가 계속 뒷걸음질 치다 버럭 소리 질렀다.
“비싸게 사준다며! 내 마음!”
귀왕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 비싸게 사준다니까. 이리와.”
주자서가 경계하는 기색을 지우지 않고 빙 돌아서 장부가 놓인 서안 앞에 앉았다. 귀왕이 다가오려고 하자 주자서가 팔을 들어 그를 멈춰 세우고 말했다.
“거기 있어! 나는 지금부터 염귀의 일을 할 테니까 너는 거기서 쉬어.”
귀왕이 주자서가 앉은 서안 앞에 털썩 앉으며 말했다.
“너 자꾸 너, 너 거리는 데, 정말 혼 날래? 내가 주인이라고 부르라고 했잖아.”
주자서가 앞에 있는 얇은 종이로 만든 장부를 펼치며 말했다.
“시끄러. 사람한테 주인이 어디 있어? 사람은 모두 스스로의 주인이야.”
주자서의 말에 귀왕이 고개를 꺾어 ‘하하하’ 하고 웃었다. 주자서는 펼친 장부를 보고 놀랐다. 숫자가 모두 한자로 적혀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중량기호도 보였다. 홉이니 승(升)이니 하는 단위는 들어는 봤어도 정확히 무슨 뜻인지 감이 오지 않았다. 주자서가 얼굴을 찌푸리고 장부를 보자 귀왕은 서안에 팔을 괴고 주자서를 보았다. 찡그려진 미간을 손가락으로 문지르자 주자서가 어깨를 튀며 깜짝 놀라 몸을 뒤로 물렸다. 주자서가 짜증을 내며 말했다.
“저리 가.”
귀왕이 얼굴을 더 가깝게 붙이며 말했다.
“너 망서가 무슨 뜻인지 정말 몰라?”
주자서가 장부를 뒤적이며 말했다.
“마차를 끄는 마부래.”
귀왕이 고개를 숙여 낮게 웃고는 말했다.
“망서는 달의 여신이야. 달의 마차를 끌고 사냥을 즐기는 여신. 내가 너를 달빛이 가득한 한담에서 찾았으니 잘 어울리는 이름이네.”
주자서가 얼굴을 구기며 말했다.
“그런 얘기는 가서 좋아하는 사람한테 해. 나에게 해봐야 핀잔이나 먹지.”
귀왕이 주자서를 보며 말했다.
“지금 하고 있잖아. 좋아하는 사람한테.”
주자서가 몸을 떨며 말했다.
“뭐 얼마나 봤다고? 내가 저번에도 말했지. 이런 건 좀 더 서로에 대해 차차 알아간 다음에 마음을 먼저 연 다음에…”
귀왕이 주자서가 장부위에 올려 놓은 손을 부드럽게 쓸면서 물었다.
“마음을 열면 몸도 열거야?”
주자서는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얼굴이 너무 아깝다.”
주자서의 말에 귀왕이 인상을 썼다. 주자서가 말했다.
“내가 그 얼굴이면 진짜! 어?”
귀왕은 또 부스스 웃어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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