食屍鬼 | 식시귀
주자서의 일과는 별다를 것 없이 흘러갔다. 귀왕은 주자서가 지내는 곳에 와서 정말 잠만 자고 갔다. 항상 피곤한 기색이 가득한 그는 주자서의 가슴을 베고 잠들었다가 주자서가 깨기도 전에 나가곤 했다. 주자서의 경계가 무색하게 귀왕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마치 정말로 그의 마음을 비싸게 사줄 것처럼.
주자서가 받은 장부는 총 세권이었는데, 주자서는 나무조각과 붓을 빌려 가장 최근 장부에 적힌 숫자부터 다시 셈해보았다. 주자서가 고작 세 장 정도 확인을 한 것뿐인데 전부 틀린 것 투성이다. 주자서가 귀왕의 옷을 정리하는 유이를 보며 물었다.
“유이, 나 전에 염귀는 글을 읽을 줄 알았어?”
유이가 손을 멈추고 골똘히 생각하더니 말했다.
“잘 모르겠어요. 염귀는 박정부보다 급색귀가 머무는 사음부(邪淫府)에 계시는 날이 더 많았어요.”
주자서가 유이의 말에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사음부? 엄청 죄가 많아 보이는 이름이네.”
유이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희는 그 곳 근처에만 가도 벌을 받아요. 급색귀의 수하들 중에는 성벽(性癖)이 고약한 귀신들이 많아서…”
주자서가 손을 내젓고 말했다.
“그만, 그만. 별로 알고 싶지 않아.”
주자서는 붓을 놓고 머리를 감싸며 크게 한숨을 쉬었다. 유이가 일을 멈추고 주자서가 앉아 있는 서안으로 다가와 물었다.
“왜 그러시는데요?”
주자서가 목간에 적은 숫자들을 보여주며 말했다.
“한 장에 열 줄 남짓한 계산에 틀린 게 이렇게 많아.”
유이는 주자서가 쓴 글자를 보고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숫자요? 이게 숫자입니까?”
주자서는 삐뚤삐뚤하게 쓰인 글자가 부끄러워 다시 거두며 말했다.
“아! 나는 붓을 쓰는 사람은 아니었나 봐. 엄청 못쓴다.”
주자서가 멋쩍게 웃자 유이가 마주 웃으며 말했다.
“그런 숫자는 처음 봅니다.”
주자서가 자신이 쓴 목간을 자세히 보고 말했다.
“아니, 그 정도야? 이 정도면 알아 볼만 하지 않나…?”
언제 나타났는지 고상이 주자서의 뒤쪽에서 주자서가 쓴 목간을 보며 말했다.
“이건 어디 글자야? 중원의 글이 아닌 거 같은데?”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지, 이건 아라비아 숫자니까.”
고상이 주자서 옆에 앉아 목간을 빼앗아 들고 물었다.
“아라비아? 그게 뭐야?”
주자서가 다시 장부를 보며 말했다.
“중동의 나라들을 아랍이라고 부르잖아.”
고상이 목간을 서안 위에 던지며 말했다.
“중동? 중동은 또 어디야?”
유이가 고상에게 말했다.
“자살(紫殺), 장부의 계산이 맞지 않는데요.”
고상은 주자서가 보고 있는 장부에 눈을 가져가며 물었다.
“그래? 뭐 얼마나 안 맞는데?”
주자서가 물었다.
“근데 이 승(升)이라는 단위는 부피야 무게야?”
고상이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부피? 그게 뭔데?”
주자서는 고개를 흔들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는 장부를 다시 덮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유이, 목란누님은 어디 가셨어?”
고상이 주자서의 호칭에 ‘허’하고 웃었다. 유이가 답했다.
“목란언니는 대전에 시중을 들러 갔어요.”
고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 그게 오늘 이구나.”
주자서가 눈을 가늘게 뜨고 고상을 보았지만 무슨 일인지는 묻지 않았다. 애초에 주자서는 박정부 밖을 나가지 않기로 다짐했기 때문이다. 주자서가 유이에게 다시 물었다.
“그럼 박정부주께서도 대전에 계셔?”
유이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주인님께서는 오늘 비단 염색하는 것을 보러 가셨어요.”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어디인데? 박정부 안이지? 가자.”
유이가 다가와 장부를 받아 들려고 하자 주자서가 괜찮다며 길을 안내하라고 재촉했다.
비단을 염색하는 곳에서는 매캐한 냄새가 났다. 커다란 솥이 있고 그 주변에서 천을 풀고 펴고 말리는 사람들의 손길이 분주하다. 홍화라고 해서 붉은 색만 있는 줄 알았는데 아주 밝은 노란빛의 천도 있다. 주자서가 하나 둘 걸리는 젖은 비단을 보고 ‘우와’ 하고 감탄하자 고상이 우쭐해서 말했다.
“비단뿐만 아니라 무명도 염색하는데 박정부 여귀들이 입는 저 빨간 옷은 다 여기서 염색한 거야.”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고상이 주자서의 소매를 잡아 끌며 희상귀가 있는 곳으로 갔다. 희상귀는 고상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고상에게 다가가 말했다.
“아상, 연기를 마시면 좋지 않아.”
그리고 주변에 하인이 주는 얇은 천을 고상의 얼굴에 씌워 주었다. 그리고 주자서를 발견한 그녀는 하인이 건넨 천을 그에게 주었다. 주자서는 들고 있던 장부를 옆구리에 끼고 얼른 천으로 코와 입을 막았다. 하지만 내심 ‘이걸로 뭐가 막아지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희상귀가 주자서에게 물었다.
“염귀. 장부는 벌써 정리했는가?”
주자서가 장부를 가져와 펼치며 말했다.
“주인, 장부에 틀린 점이 너무 많아요. 혹시 벌써 값을 치르셨습니까?”
주자서가 희상귀를 주인이라고 부르는 것을 힐끔 본 고상이 끼어들었다.
“전에 염귀는 글을 읽을 줄 모르니, 아마 급색귀가 가로 챈 거 에요!”
희상귀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을 응접실로 안내했다. 희상귀가 상석에 앉자 주자서가 쪼르르 그녀의 곁으로 가서 장부를 펼치며 말했다.
“주인, 아직 승(升)이라는 단위가 뭔지 잘 모르겠지만, 정말 이 장부대로 값을 치르셨다면 손해가 아주 심해요. 여기 이게 받은 가격 같은데, 원래 대로 라면 세배는 더 받았어야 해요.”
희상귀가 주자서가 가져온 목간과 장부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그대는 천축국(天竺國)의 숫자를 쓰는가?”
주자서가 당황하며 말했다.
“아 제가 어… 그러니까 서북출신이라서… 아마?”
희상귀가 주자서를 보고 코웃음 쳤다. 희상귀는 하인을 시켜 주판을 가져온 뒤 스스로 셈을 해보고 작게 코웃음 치며 주판을 내 던졌다.
온객행은 대전에 있는 식시귀와 급색귀를 보았다. 식시귀의 광증은 어떤 계기가 있어야 이는 것 같은데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온객행은 보아를 가까이 불러 귓가에 말했다.
“너는 지금부터 급색귀 곁에 가서 서라. 급색귀가 식시귀를 공격하면, 네가 상황을 봐서 식시귀를 죽여라.”
보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온객행을 보자 온객행이 작게 짜증을 내며 말했다.
“너는 그냥 급색귀 옆에 서 있다가 식시귀를 죽이라고.”
보아는 이해되지 않았는지 멀뚱히 온객행을 보았다. 온객행이 턱짓으로 급색귀와 식시귀가 있는 곳으로 보아를 내려 보냈다. 보아가 내려가자 온객행이 박정부의 여귀들을 불렀다. 이 여귀들은 한 때 강호에서 이름을 좀 날렸던 무공이 높은 아이들로 일부러 급색귀의 취향에 맞춰 데려온 하인들이다. 옷도 염귀와 비슷하게 입혔다. 염귀가 생각 날 수 있게. 그 중에는 주자서의 시중을 드는 아이도 있다. 온객행이 얼굴이 익은 그 하인을 보고 심드렁하게 손짓하자 그들은 온객행의 곁으로 와서 차시중을 들며 그의 팔이며 다리를 주물렀다. 박정부의 여귀가 들어오자 유자업은 화색이 되어 하인들을 보았다.
온객행이 식시귀와 급색귀를 보고 말했다.
“고형, 고형. 아무리 광증이 일었어도 염귀를 먹으면 안되지.”
온객행의 말에 급색귀가 식시귀를 날카롭게 보았다. 식시귀는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급색귀가 무기로 사용하는 부채를 꺼내어 식시귀를 겨누며 말했다.
“식시귀! 너 염귀를 먹었어?”
식시귀는 대답 없이 급색귀를 물끄러미 보았다. 그의 눈에는 광채가 없어 꼭 죽은 사람의 눈 같았다. 식시귀는 순순히 인정했다.
“그런 가 보오.”
급색귀가 몸을 던져 식시귀를 공격했다. 귀곡의 대전안은 덩그렇게 놓인 귀왕좌를 빼면 황막하여 숨을 곳도 마땅하지 않았다. 보아는 급색귀의 곁에 서 있다가 식시귀와 급색귀 모두를 공격했다.
온객행이 작게 혀를 차며 보아를 불렀다.
“보아.”
보아가 싸움을 멈추고 온객행에게 다가왔다. 온객행이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무래도 너는 진짜…”
보아가 빠지든 말든 식시귀와 급색귀는 마치 서로를 죽일 것처럼 수십합을 겨뤘다. 하지만 식시귀의 무공은 십대 악귀 중에 가장 높았기 때문에 곧 식시귀의 손에 급색귀의 목이 잡혔다. 급색귀는 ‘컥컥’ 대며 말했다.
“고형! 고형, 염귀를 먹을 수도 있죠. 그냥 내가 아끼던 아이라서 아쉬워서 그랬소! 내가 잘못 했어!”
온객행은 다시 보아를 불러 귓가에 대고 말했다.
“식시귀를 죽이라고.”
보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귀왕좌가 있는 단상을 내려가 식시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급색귀는 보아를 한번 보고 보아와 합심하여 식시귀를 다시 공격했다.
온객행은 세사람이 싸우는 것을 보다가 차를 건네는 하인에게 말했다.
“너의 용독술을 한번 보자.”
하인은 온객행의 시중을 드는 척 그의 뒤로 가서 식시귀에게 암기를 날렸다. 암기를 눈치챈 식시귀가 온객행이 앉아 있는 귀왕좌를 보았다. 온객행은 여상하게 차를 마시며 차를 가져온 하인에게 내온 차가 맛이 좋다며 칭찬을 했다. 식시귀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점점 광증이 이는 것 같았다. 식시귀의 광증에는 여인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여귀가 입은 붉은 옷이 그의 눈동자에 번들거렸다. 그의 사연이 어떠한 지는 모르지만 그가 광증이 일면 오히려 일은 더 편하다. 온객행의 시중을 들던 아이들이 식시귀를 막아서며 대치했다. 온객행은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광채로 번득이는 식시귀의 눈빛을 보았다. 증오? 애증? 아니면 회한? 온객행에게 식시귀의 사정은 별로 관심 없다. 그저 귀곡을 없애 버리기 위해 필요한 쓰기 편한 장기 말이 필요 할 뿐이다.
온객행이 화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고형, 고형이 염귀를 없애는 바람에 내가 염귀를 대신할 귀신을 찾았어요. 얼마나 귀여운지 내 옆에 둬야지.”
온객행의 말에 식시귀가 비명을 지르며 온객행에게 달려 들었다. 온객행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귀왕좌에 앉아 그를 대신해서 싸우고 있는 박정부의 여귀들을 보았다. 무공 실력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얼마 버티지 못할 것 같다. 다행히 보고 있던 급색귀와 보아도 같이 달려 들기 시작했다. 식시귀도 급색귀도 보아도 박정부의 여귀들도 지친 것 같다. 온객행은 자리에서 일어나 손에서 굴리고 있던 호두를 던져 급색귀의 머리에 맞췄다. 급색귀가 맞은 머리를 감싸는 순간 온객행이 소매에 있던 작은 칼을 식시귀를 향해 던졌다. 그 칼은 식시귀의 목덜미를 뚫었다. 온객행의 암기를 본 박정부 여귀들은 곧 곡주가 서있는 단상위로 올라왔다. 온객행은 보아를 보고 식시귀 쪽으로 턱짓했다. 보아는 온객행의 눈치를 보더니 식시귀에게 다가가 머리와 몸을 분리했다. 온객행이 보아의 손에 들린 고오의 머리를 보고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그리고 보아에게 말했다.
“오늘부터 네가 식시귀로구나.”
새로 식시귀가 된 보아는 아주 바보는 아니었는지 며칠이 지나자 자신과 비슷한 몸집의 수하를 몇 두기 시작했다. 그는 광증도 없고, 시신만이 아니라 단순히 먹는 것을 좋아하는 자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적사귀의 수하들 심지어 무상귀의 수하들 중에서도 그의 밑으로 들어온 수하도 있었다. 보아가 식시귀가 된 다음날 개심귀와 무상귀가 온객행을 찾아와 어떻게 된 일인지 물었다. 온객행은 어깨를 으쓱 하고 급색귀에게 물어 보라고 말했다. 급색귀가 뭐라고 떠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일로 급색귀는 무상귀에게 의심을 샀다. 급색귀와 세력이 비슷하거나 조금 작은 적사귀는 당장 걱정할 필요는 없다. 게다가 장설귀는 요즘 아주 흥미로운 수하를 곁에 두는 듯했다. 사람을 인형으로 만드는 자는 과거 황궁에서 의술을 연구하는 관리였다고 한다. 그가 만드는 인형은 의지를 잃고 사람을 먹는다고 한다. 장설귀는 스스로 자신을 잡아먹을 호랑이 새끼를 키우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다.
저녁 늦게까지 무상귀의 쓸데없는 소리를 들은 온객행은 대전에 있는 처소로 보내진 자객 몇을 죽이고 박정부로 돌아왔다. 오늘은 하루 종일 머리가 무겁고 기분이 좋지 않았다. 온객행은 생각이 많아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처소에서 그를 반긴 것은 그가 보고 싶었던 염귀가 아니라 고상이었다. 고상이 들어오는 온객행에게 말했다.
“주인!”
고상이 온객행이 벗는 장포를 벗어 걸며 말했다.
“주인, 오늘도 여기서 주무시는 거에요?”
온객행이 방안을 둘러보는 것을 본 고상이 손 씻을 대야에 물을 채우며 말했다.
“망서는 나이모랑 있어요.”
온객행이 대야에 손을 씻으며 인상을 썼다. 고상이 다가와 그의 이마에 손을 대며 말했다.
“주인! 몸이 안 좋아요?”
온객행이 고상의 손을 물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고상은 영견에 물을 묻혀 온객행의 얼굴을 닦으며 말했다.
“주인, 망서는 대체 어디서 데려온 거예요?”
온객행은 대답 없이 중의도 벗어 버리고 침상으로 갔다. 고상이 침상 위에 이불을 펴고 온객행을 눕혔다. 이불을 잘 덮어주며 말했다.
“희상귀도 염귀가 마음에 들었나 봐요. 망서를 좋아하는 여귀들이 얼마나 많은 지 몰라요.”
온객행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어떤 여귀들이?”
고상이 온객행이 벗어 놓은 중의를 개면서 말했다.
“아니 좋아한다는 게 주인이 좋아하는 것처럼 그런 게 아니라…”
주자서가 광주리에 밀떡을 들고 목란과 유이와 함께 방안으로 들어왔다. 고상을 발견하고 활짝 웃으며 주자서가 말했다.
“아상! 이리 와서 같이 먹자.”
고상이 자리에서 일어나 주자서가 들고 들어온 광주리 안을 보았다. 달래와 홍화 꽃잎을 섞어 부친 밀떡이었다. 주자서가 고상의 입에 하나 넣어 주며 말했다.
“먹어봐. 맵다. 맛있지?”
고상이 입에 들어온 밀떡을 먹으며 말했다.
“그러게 맵네? 근데 이렇게 먹어도 돼?”
주자서가 탁자에 광주리를 내려 놓고 말했다.
“잿물에 재기 전에 남은 데다 밀가루를 풀어서 달래랑 넣고 부친 건데 진짜 맛있어 그치?”
고상이 고개를 끄덕이며 광주리 안에 있는 떡을 몇 개 더 집어먹었다. 유이가 말했다.
“원래 홍화는 먹으려고 심기도 했데요.”
주자서가 맞장구 치며 말했다.
“거기서 일하는 어멈이 어릴 때 많이 드셨데. 나는 매운 거를 좋아하는 것 같아.”
목란과 유이가 소매를 입으로 가리고 ‘호호호’하고 웃었다. 고상이 뭔가 생각났는지 밀떡 하나를 더 들고 침상에 가서 말했다.
“주인, 주인도 먹어봐. 정말 맛있어.”
주자서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뭐야? 벌써 왔어?”
온객행이 고상이 내민 밀떡을 보고 고개를 흔들며 돌아 누웠다. 고상은 그 밀떡도 입으로 가져가며 목란과 유이에게 눈치를 주었다. 주자서도 고상의 눈치를 읽고 말했다.
“아상! 밥 먹고 가. 내가 가서 가지고 올 게.”
하며 다시 방을 나가려는 데 고상이 주자서의 소매를 잡아당겨 방안으로 밀어 넣고 말했다.
“밥은 언니들이랑 부엌에서 먹을 테니까 너는 주인이랑 있어.”
주자서가 고상을 따라 나가며 말했다.
“그럼 가서 저녁을 가져와야 하잖아.”
고상이 주자서의 가슴팍을 밀며 말했다.
“여기 있으라고!”
장지문을 ‘탁’ 소리가 나게 닫고 나간 고상에게 서운해서 주자서가 입을 삐죽이고 다시 광주리를 놓은 탁자에 가서 앉았다.
주자서가 몸을 기울여 침상 쪽을 보자 귀왕이 옆으로 누워있다. 주자서는 대야에 있는 물에 손을 대충 씻고 귀왕에게 다가갔다.
“귀왕… 귀왕 벌써 자?”
귀왕은 보통 밤 늦게 와서 주자서에게 붙어 자다가 주자서가 눈을 뜨기 전에 사라지고 없었다. 주자서는 침상에 걸터앉아 귀왕의 이마에 손등을 대보았다. ‘귀왕도 아플 때가 있나?’ 미열이 느껴져 주자서가 손을 떼고 일어나려고 하자 귀왕이 주자서의 손을 잡았다. 귀왕이 눈을 슬며시 떠서 손을 보자 주자서의 손이 노랗게 물들어 있었다. 귀왕이 손을 끌어당기며 말했다.
“손이 왜 이래?”
엉거주춤하게 귀왕의 몸 위에 기댄 주자서가 손을 빼며 말했다.
“오늘 꽃 떡 만드는 걸 했거든. 냄새나?”
주자서가 손바닥을 킁킁대며 말했다. 귀왕이 몸을 일으켜 앉았다.
주자서가 일어난 귀왕을 다시 밀어 눕히려고 하며 말했다.
“미열이 있는 것 같으니까 좀 자. 밥은 먹었어?”
귀왕은 밀리지 않고 말없이 붉게 물든 주자서의 손끝을 보았다. 주자서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온객행이 주자서의 손을 다시 덥석 잡았다. 귀왕이 물었다.
“아파?”
주자서가 잡힌 손을 빼며 말했다.
“뭐가?”
온객행이 주자서의 손가락 끝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홍화를 맨손으로 따면 아리잖아.”
주자서가 몸을 굳히며 어색하게 ‘하하하’ 하고 웃었다.
“이정도는… 나보다 더 어리고 연약한 소녀들도 하는 일인데.”
귀왕이 주자서의 허리를 끌어당겨 안으며 말했다.
“너는 하지 마.”
주자서가 귀왕을 밀어내며 말했다.
“노는 것 보다 낫잖아. 매일 먹고 재워주는데. 이 정도는 괜찮아.”
귀왕이 주자서의 어깨에 고개를 묻고 말했다.
“그냥… 너는 하지 마. 아픈 건 하지 마.”
주자서가 어색하게 팔을 빼서 귀왕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왜 그래? 정말 아파?”
주자서가 팔을 풀고 온객행의 얼굴을 양손으로 잡았다. 눈 끝이 빨간 것이 꼭 울 것만 같았다. 주자서가 부스스 웃으며 말했다.
“무슨 귀왕이 이래.”
귀왕이 눈을 감으며 말했다.
“겨… 온, 온객행.”
주자서가 일어나 귀왕의 머리를 가슴에 안으며 말했다.
“네 이름은 온객행이구나.”
귀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자서가 말했다.
“나는 주자서야. 편견은 없는데, 지금 고민 중이니까. 좀 기다려.”
온객행이 팔을 들어 주자서의 허리에 감았다. 주자서가 또 작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다른 사람보다 많이 모자란 편이라 오래 기다려야 할 수도 있는데, 괜찮겠어?”
온객행이 고개를 들어 주자서를 보며 말했다.
“얼마나?”
온객행의 물음에 주자서가 고민하며 말했다.
“글쎄… 일주일…은 너무 짧고 보름도 그렇고… 한달?”
온객행이 주자서를 더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
“안돼. 그렇게 오래는 못 기다려.”
주자서가 온객행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비싸게 사준다며… 몸… 몸도 같이 줄 걸…? 아마?”
이번엔 온객행이 작게 웃었다. 주자서가 한탄하듯 말했다.
“어쩌면 이렇게 뺀 게 무색할 만큼 별볼일 없을 수도 있어.”
온객행이 주자서를 침상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그럼 일단 오늘 몸부터 주면 안돼?”
온객행이 주자서의 앞섶을 잡아 벌리자 주자서가 당황해서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야! 너 열 있다니까!”
온객행이 주자서를 눕히고 그 위에 올라타며 말했다.
“또 너라고 하지. 정말 혼나야겠어.”
그리고 벌어진 앞섶에 고개를 숙여 입을 맞췄다.
주자서가 온객행의 머리를 붙잡고 말했다.
“야! 너 몇 살인데 자꾸 그러는 거야?”
온객행이 부스스 웃으며 말했다.
“그러는 너는 몇 살인데?”
주자서가 몸부림 치며 말했다.
“난 스물 둘이야! 빨리 놔 봐. 내가 병수발을 들어주지.”
온객행이 고개를 들어 주자서를 빤히 보았다. 주자서가 고개를 뒤로 빼며 물었다.
“왜?”
온객행이 주자서를 놓아주며 말했다.
“너… 스물 둘이라고?”
주자서가 대야가 있는 쪽으로 가며 말했다.
“어! 내년에 졸업해. 등록금이 부족해서 휴학하면 그것도 못하겠지만…”
온객행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졸업? 휴학? 그게 무슨 소리야?”
주자서가 물을 묻힌 수건을 가져와 침상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뭐라구?”
온객행은 주자서를 보고 몇 번 눈을 깜빡이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주자서는 온객행을 침상에 밀어 눕혔다. 온객행의 이마를 수건으로 닦아주며 주자서가 물었다.
“그냥 열만 있는 거야? 아니면 다른 증상은 없어? 속이 메스껍다 거나 춥지는 않아?”
온객행이 순순히 주자서의 손에 침상에 누우며 고개를 흔들었다. 주자서가 다시 온객행의 이마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밥은 먹었어?”
온객행이 다시 고개를 흔들었다.
주자서가 일어나 조금 식은 찻물을 가져와 온객행에게 마시게 했다. 고분고분해진 것이 이상해서 주자서가 눈을 가늘게 뜨고 온객행에게 물었다.
“너… 몇 살이야?”
온객행이 눈을 감으며 말했다.
“나 아픈 것 같아.”
주자서가 온객행의 앞섶을 잡고 물었다.
“온객행. 너 몇 살이야?”
온객행이 웃으며 고개를 젓자 주자서는 약이 올라서 온객행의 앞섶을 쥐고 흔들었다. 온객행이 주자서의 손을 잡으며 불쑥 얼굴을 가깝게 붙이고 말했다.
“입맞춰주면 말해 줄게.”
주자서가 앞섶을 놓고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아니, 잠깐. 나는 말해줬잖아. 너무 엄청난 조건이 붙는 거 아닌가?”
이번엔 온객행이 주자서의 앞섶을 잡으며 몸을 붙여왔다.
주자서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잠깐! 나는 기억이 없으니까 이게 첫 키스잖아, 이런 건 싫어.”
온객행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첫키스? 그게 뭐야?”
주자서가 다급하게 말했다.
“다른 사람하고 처음으로 입맞추는 거. 내가 기억하는 범위에서 이게 처음이잖아.”
온객행이 주자서를 빤히 보며 말했다.
“나도 처음이야.”
주자서가 온객행을 흘겨보며 말했다.
“처음 좋아하네.”
온객행이 얼굴을 붙이며 말했다.
“정말이야. 망서, 네가 처음이야. 입맞추고 싶은 것도. 같이 있고 싶은 것도.”
주자서는 담백한 고백에 얼굴이 붉어졌다. 주자서가 작게 말했다.
“망서 아니라니까. 자서라고 부르라고.”
온객행이 작게 불렀다.
“자서.”
그리고 입술을 붙였다 뗐다.
“아서.”
주자서가 부스스 웃었다. 온객행이 다시 얼굴을 붙여 입술을 맞췄다. 입술을 핥다가 입 안으로 물컹 혀가 들어왔다. 치열을 훑고 입안을 휘젓는데 주자서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한참 둘이 입술을 맞대고 있는데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장지문이 열리는 소리에 주자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온객행을 밀어냈다.
밀린 온객행도 놀랐는지 번들거리는 입술로 일어난 주자서를 보았다. 주자서는 소매로 입술을 비벼 닦았다. 오히려 그래서 더 입술이 붉어졌다. 온객행은 침을 꿀꺽 삼키고 자리에서 일어나 주자서의 소매를 잡으려고 했는데 고상의 목소리가 들렸다.
“주인! 왜 일어나 있어? 얼른 누워요.”
주자서는 얼굴이 빨개져서 소매로 입술을 가렸다. 그 모습이 꼭 입을 가리고 웃는 여인 같아서 고상이 한 소리 했다.
“뭐야? 왜 그러고 있어?”
주자서는 고상의 목소리에 어깨가 튀더니 곧 방 밖으로 뛰쳐나갔다. 고상은 나간 주자서에게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뭐야! 대체 왜 그러는데?”
온객행이 다시 침상에 털썩 누우며 말했다.
“고상.”
고상이 온객행의 몸 위로 이불을 덮으며 말했다.
“주인 왜요? 내가 방해했어요?”
온객행이 고상을 보고 ‘허’하고 허탈하게 웃었다. 고상이 침대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주인, 망서에게 왜 잘해줘요? 그동안 데려온 애들은 더 야살스럽고 애교가 많은 애들이었잖아요. 쟤는 딱딱하고 딱히 단수(斷袖)도 아닌 것 같던데…”
온객행은 살포시 웃으며 대답이 없다. 고상이 물었다.
“설마 쟤는 안 죽일 거예요?”
온객행이 눈을 감으며 말했다.
“아상, 아서를 그렇게 부르면 안되지.”
고상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아…아서?”
주자서는 방에서 나와 얼굴을 양손에 묻었다. ‘엄청 기분 좋았어’ 이런 생각을 하며 크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나는 남자를 좋아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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