穿越 第4

長舌鬼 | 장설귀

온객행은 그날 밤 열에 들떠 조금 앓았다. 다행히 주자서는 겁을 먹었는지 처소로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고상은 염귀의 욕을 하며 귀왕의 시중을 들었다. 희상귀에게 상황을 알리자 내실 근처에 호위가 더 삼엄 해졌다. 어렴풋하게 사위가 밝아오는 새벽에 주자서는 처소로 돌아왔다. 주변에 하인이 많아 진 것을 보고 의아해하며 문 밖에 서 있는 목란에게 말했다.
“누님, 왜 밖에 계세요?”
목란이 주변의 눈치를 보며 주자서의 팔을 붙잡고 말했다.
“곡주가 안에 계시네.”
주자서가 얼굴을 찌푸리며 입을 달싹이자 목란은 그의 팔을 잡아 내실 안으로 밀어 넣으며 말했다.
“가서 곡주 곁을 지키시게. 우리 말고 다른 사람의 기척이 느껴지면 큰소리로 나를 부르세요.”
주자서가 목란의 소매를 잡으며 말했다.
“기척은 무슨 기척이요. 나는 그런 거 몰라요.”

방안으로 들어오는 소리에 침상 옆에 기대서 자고 있던 고상이 주자서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망서! 너 어디 있었어!”
고상이 작은 목소리로 주자서의 소매를 끌어당겨 침상 쪽으로 밀었다.
“주인이 아프단 말이야! 얼른 네가 가서 위로해드려.”
주자서가 고상의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위로? 위로라니 무슨 소리야?”
주자서의 얼굴이 빨개진 것을 본 고상이 ‘허’ 하고 헛웃음을 치며 말했다.
“주인이 예뻐라 하니까 자꾸 기어오르는데 나한테는 어림도 없어.”
주자서가 얌전히 온객행이 누워있는 침대에 걸터앉아 그를 보았다. 정말 밤새 앓았는지 얼굴 색이 좋지 않았다. 주자서가 고상에게 물었다.
“왜? 왜 이렇게 된 거야? 그새 열이 다시 올랐어?”
주자서가 온객행의 이마에 손등을 올리며 말했다. 고상은 대야에서 젖은 영견을 주자서의 손에 쥐어 주고 대야를 들고 나가며 말했다.
“내가 올때까지 여기 있어. 어디 나가지 말고, 누가 기별 없이 들어오면 목란언니를 불러.”
주자서가 온객행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았어.”

주자서는 온객행의 얼굴을 수건으로 닦으며 말했다.
“정말 잘 생겼다.”
주자서의 목소리에 온객행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눈을 떴다. 주자서는 온객행과 눈을 맞추며 말했다.
“귀왕? 정신이 들어?”
온객행은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더니 곧 잘게 기침을 했다. 주자서는 온객행을 일으켜 앉히며 그의 등을 쓸었다. 온객행이 인상을 쓰고 몇 차례 기침을 하더니 울컥 피를 토했다. 주자서는 손에 들고 있던 영견을 그의 입 앞으로 가져갔다. 주자서는 살면서 사람의 입에서 이렇게 울컥 피가 토해지는 것을 본적이 없는 것 같았다. 너무 놀라고 당황하여 손이 벌벌 떨렸다. 주자서가 안절부절 못하며 손을 떨자 온객행이 덥석 주자서의 손을 잡았다. 주자서는 그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모…목란누님…”
주자서가 일어나려고 하자 온객행이 주자서의 손을 끌어당겨 침상에 앉히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주자서가 온객행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앉으며 말했다.
“대체 뭐야… 지병이라도 있어? 병원에 가야 하는 거 아니야?”
온객행이 인상을 쓰자 주자서가 주변을 보더니 얼른 일어나 다 식은 찻물을 담은 찻잔을 가져와 온객행의 입에 대주었다. 온객행은 주자서가 가져온 찻물을 삼키지 못하고 다시 뱉었다. 찻잔이 시뻘건 핏물로 채워지자 주자서는 놀라서 찻잔을 놓치고 말았다. 온객행이 입고 있던 하얀 내의가 붉게 물들었다. 주자서가 당황하며 얼른 쏟은 찻잔을 치우고 온객행의 내의 앞섶을 잡아 벌렸다. 주자서의 행동에 온객행이 작게 웃었다. 주자서는 잠시 멈칫하더니 다시 귀왕의 내의를 벗기며 말했다.
“웃음이 나오냐? 이 바보야!”
주자서의 얼굴이 빨개졌다. 온객행은 순순히 내의를 벗고 다시 침상에 누웠다.

주자서가 이불을 덮어주고 핏물이 베인 내의를 빨래감을 모아두는 통에 던져 놓았다. 주자서가 귀왕의 장포가 걸려있는 옷걸이 근처에서 귀왕의 옷을 찾았다. 어떤 함에는 색색의 장포가 들어 있었고, 또 어떤 함에는 하얀 내의만 있었다. 주자서는 내의를 하나 들고서 침상으로 갔다. 주자서가 이불을 들추고 온객행에게 내의를 입혔다. 온객행이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차피 벗을 건데 뭘 입혀?”
주자서가 거칠게 귀왕의 앞섶을 여미면서 말했다.
“벗긴 뭘 벗어!”
온객행이 작게 웃다가 다시 기침을 했다. 주자서는 혹시나 또 피를 토할까 봐 이미 피가 잔뜩 묻은 영견을 찾아 그의 입 앞에 대주었다. 다행히 이번에는 기침만 나왔다. 주자서가 온객행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말했다.
“앉아 있는 게 좋겠어. 또 피를 토하다 질식하면 안되니까.”
주자서가 몸을 붙여 침상위에 있는 베개를 정리해 온객행을 앉히고 이불을 덮었다.

주자서가 온객행을 보고 물었다.
“혹시 살날이 얼마 안 남은 거야?”
온객행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왜? 살날이 얼마 안 남았으면 빨리 마음 주려고?”
주자서가 온객행의 팔을 밀며 말했다.
“너는 정말, 기운도 좋다.”
온객행이 이불 속에서 팔을 들어 주자서의 허리를 끌어당기며 말했다.
“살날이 얼마 안 남았으면 마음 줄 거야? 지금?”
주자서가 언짢은 표정을 하며 고민하자 온객행이 주자서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며 웃었다. 주자서는 웃는 귀왕의 등을 쓸면서 말했다.
“곧 죽는다고 하면…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너는 아직 살아 있으니까…”
온객행의 어깨가 떨리며 조금 더 웃었다. 주자서는 한참 망설이다가 말했다.
“너랑 입맞춘 거… 기분 좋았어.”
온객행은 주자서를 자기 품으로 끌어당기며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주자서가 불편한 기색을 지우지 못하고 바르작대자 온객행이 말했다.
“죽을 병 아니야. 맹파탕의 부작용이야.”
주자서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맹파탕?”
온객행이 주자서와 눈을 맞추고 말했다.
“귀곡에 들어오면 누구나 마시는 탕이야. 가장 집착하는 것을 잊게 해주지.”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나도 맹파탕을 마셔서 기억이 안나는 걸까?”
온객행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가장 집착하는 것을 잊게 하지 전부를 잊게 하지는 못해.”
주자서가 침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내가 정말 싫었나 보다. 전부 잃어버린 거 보면.”
주자서의 말에 온객행이 얼굴을 붙이며 말했다.
“나는 좋아해.”
온객행의 입술이 주자서의 입술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주자서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죽을 병이 아니라며…”
온객행이 주자서의 뺨에 입맞추고 말했다.
“기분 좋았다며…”
주자서가 양팔로 온객행을 와락 안으며 말했다.
“그니까… 왜 좋았을까? 나는 남자를 좋아했나?”
온객행이 주자서를 침상위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남자라서가 아니라 나라서 좋았던 건 아니고?”
주자서가 몸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너 목소리도 진짜 좋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어깨에 고개를 묻고 또 부스스 웃어버렸다.


온객행이 앓아 누운 날 밤, 장설귀 황작(黃雀)이 자기가 거둔 수하 구빈(邱賓)에게 당해 죽었다. 곡주가 박정부에 새로 온 염귀를 귀여워한다는 것은 모두 알고 있었지만, 정작 귀여움 받은 염귀를 본 사람은 없다. 곡주가 일찍 박정부로 돌아간 것을 본 무상귀는 개심귀와 총신 흑무상, 백무상을 데려다 식시귀의 일에 대해 논의를 하고 있었다. 박정부는 귀곡 내에서도 그 입지가 조금 남달랐는데, 다른 귀신들과는 달리,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서 거래하여 일정한 수입이 있었고, 일원이 모두 여인이라는 점은 어떻게 보면 약점 같지만 오히려 강점이었다. 귀곡에 흘러 들어오는 인간상은 무수했으나 귀곡에 닿은 이들 중에 기구한 사연 하나 없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뜻을 맞추어 단결하는 것은 귀곡에서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는데, 어쩐지 여인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유대 하여 서로를 한덩어리로 묶었다. 그들은 귀곡의 대부분의 음식을 만들고 준비하며 잡귀들이 입는 옷과 귀면을 만드는 일도 했다. 박정부주의 허락없이 박정부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귀곡주 정도이다.

무상귀가 고심하고 있을 때, 밖에서 잡귀 하나가 헐레벌떡 들어와 말했다.
“무상야(無常爺)! 무상야! 장설귀 황작이 죽었습니다!”
무상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뭐라고? 황작이?”
잡귀가 숨을 고르며 말을 이었다. 황작이 데려온 구빈이라는 사내는 멀쩡한 사람을 인형처럼 만들어 부리는 자이다. 피리나 고금 같은 소리를 가지고 인형들을 조종하는데 그 인형을 보러 갔다가 화를 당했다고 한다. 무상귀가 다시 자리에 털썩 앉으며 말했다.
“쯧, 하필 이럴 때 황작 마저 가다니… 대체 온가놈이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 것인지…”
무상귀의 말에 개심귀가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황작은 이름만큼이나 소인배였으니 자기보다 그릇이 큰 관리에게 당한 것이겠지요.”
백무상이 말했다.
“노야(老爺), 구빈은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괜히 들쑤시지 않으면 상관하지 않을 겁니다.”
흑무상이 거들었다.
“노야, 그는 정말 귀신입니다. 사람의 살을 열고 젖히며 독의 병리를 연구하는데 미친 놈입니다.”

무상귀가 짜증을 내며 말했다.
“그러니 화가 나는 것이지! 손에 쥐고 흔들 말이 점점 줄어 들지 않느냐!”
개심귀가 불편한 기색을 지우지 않으며 말했다.
“설형, 설형. 그것이 비단 설형만 그렇겠습니까? 곡주라고 다를까요?”
개심귀의 말에 무상귀가 탁상에 놓여있던 차를 마시며 말했다.
“새로 식시귀가 된 그 보아라는 자는 만나 보았소?”
개심귀가 다시 ‘하하하’ 웃으며 말했다.
“그 놈은 천치나 다름없으니 오히려 같이 일했다가 손해를 볼까 두려울 정도요.”
흑무상이 무상귀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노야, 저희가 데리고 일하던 아이들 중에 식탐이 많은 아이들이 모두 식시귀의 수하로 떠났습니다.”
무상귀가 작게 코웃음 치며 말했다.
“어차피 밥이나 축내는 버러지들이었으니 이 참에 잘 어울리는 우두머리를 만난게지.”
백무상과 흑무상이 무상귀의 눈치를 보며 시선을 교환했다. 개심귀가 그것을 눈치채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설형은 그럼 고민해 보시오. 나는 적사귀를 만나러 가야겠소.”
무상귀가 인상을 쓰며 개심귀가 나가는 것을 보았다.

개심귀는 적사귀 길도(姞徒)의 거처인 진광전(秦廣殿)앞에 도착해서 들어갈지 말지 고민하고 있었다. 적사귀는 평소에 처소에 틀어박혀 얇은 금속을 가공하여 전혼사를 만드는 것에 몰두해 있다. 그는 식시귀처럼 주변에 귀신을 많이 두지 않는 악귀였으나 전혼사를 다루는 솜씨는 귀곡의 모두가 인정하는 고수였다. 개심귀는 지금의 적사귀가 전대의 적사귀를 죽일 때 같은 자리에 있던 사람이다. 길도 이전의 적사귀는 단순히 사람을 창에 줄줄이 꿰어 죽이는 사람이었는데, 길도가 적사귀가 된 이후로 진광전은 사람의 포를 뜨는 곳으로 바뀌었다. 잡귀 하나가 진광전에서 나와 개심귀에게 인사했다. 개심귀가 물었다.
“적사귀는 어디 있는가?”
잡귀는 대답없이 개심귀에게 대전 안쪽으로 손짓했다. 개심귀가 대문 안쪽을 잘 살피며 진광전 안으로 들어갔다.

적사귀는 풀무질을 하며 유리를 달구고 있었다. 저 온도에 도달하기 위해 길도는 사람의 뼛조각까지 모아서 태웠다. 음지에 있어 풀과 나무가 적은 귀곡에서 땔감을 찾는 것은 사람을 죽여 그 시체를 태우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다. 적사귀가 풀무질을 멈추고 개심귀에게 물었다.
“백형, 무슨 일이오?”
개심귀가 근처에 있는 작은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자네는 벌써 온가놈에게 붙었는가?”
길도가 몸을 일으켜 기지개를 펴며 말했다.
“노곡주에 비하면 온가놈은 나의 일에 관여하거나 무기를 내어 놓으라고 법석을 떨며 볶아 대지 않으니 적사귀로서 그가 기껍지요.”
개심귀가 적사귀가 만들어 놓은 가는 실을 보며 말했다.
“고오가 죽었네. 황작도.”
적사귀가 근처에 있던 물단지에서 물을 퍼 마시며 말했다.
“황작은 몰라도 고오가 죽었다 구요?”
개심귀가 고개를 끄덕였다.
“설단이 또 난리를 쳤겠군요.”
개심귀가 ‘흥’하고 코웃음 치며 말했다.
“설단은 별로 걱정이 안되는데, 그 놈 아들은 좀 걸려.”
적사귀가 개심귀를 응접실로 안내하며 말했다.
“그래서 백형께서는 어쩌시려고 여길 오셨습니까?”
개심귀가 ‘히히히’ 웃으며 말했다.
“일단 살아 있으니 뭐든 해야지 않겠나?”
적사귀가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웃었다.


고상이 요기거리를 가지고 온객행의 처소에 다시 갔을 때, 온객행은 주자서를 껴안고 자고 있었다. 고상은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두 사람이 옷을 입고 있는지 확인한 다음에 ‘휴’ 하고 작게 한숨을 쉬고 탁자위에 찬합을 놓았다. 인기척을 느낀 주자서가 화들짝 놀라 깨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고상이 작게 웃으며 주자서에게 손가락질하며 속삭였다.
“왜 그렇게 놀라?”
얼굴이 빨개진 주자서가 허리에 감긴 온객행의 팔을 풀며 일어나 앉았다. 눈을 비비며 잠긴 목소리로 고상에게 물었다.
“지금 몇 시야?”
고상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몇 시? 지금 때를 묻는 거야? 사시(巳時)랑 오시(午時) 사이인데?”
주자서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그게 몇 신데?”
고상이 침상 쪽으로 슬금슬금 다가오며 말했다.
“몇 시 냐니? 무슨 소리야? 사시랑 오시 사이라고!”
주자서가 침상에서 내려와 신발을 신으며 말했다.
“사시는 언제고, 오시는 언제인데? 나 참. 밝은 거 보니 벌써 12시가 지난 거 아니야?”
고상이 주자서의 팔을 잡아당겨 찬합이 놓인 탁자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열 두 시라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중천이 넘었다고!”
고상이 찬합에서 음식을 꺼내자 주자서는 웃으면서 꺼내 놓은 음식을 보았다.

주자서가 젓가락을 들어 음식에 손을 데려고 하자 고상이 주자서의 손을 때리며 말했다.
“주인님을 깨워야지!”
주자서가 고상이 때린 손을 잡고 말했다.
“아야! 너 정말 손 매운 거 알아?”
온객행이 침상에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
“아상.”
고상이 얼른 침상 쪽으로 가며 주자서를 흘겨보았다.
“네, 주인!”
고상은 온객행에게 신발을 신기고 부축하여 탁자로 데려왔다. 고상이 옆에 앉아 시중을 들려고 하자 온객행이 고상을 빤히 보았다. 고상은 다 식은 차주전자를 들더니 어서 가서 차를 내오겠다며 방을 나갔다. 주자서는 고개를 흔들며 찬을 집어먹었다. 온객행이 음식을 먹지 않고 빤히 쳐다보는 것을 느낀 주자서가 음식을 씹으면서 똑같이 온객행을 마주 보았다. 주자서가 눈을 굴리다 온객행에게 물었다.
“뭐?”
온객행은 말없이 자기 옆에 놓인 의자를 손으로 툭툭 쳤다. 주자서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젓가락을 놀려 찬을 집어먹었다. 온객행은 고개를 젖히고 한숨을 크게 쉬더니 탁자를 집고 일어나려다 휘청였다. 주자서가 놀라서 젓가락을 놓고 그를 부축했다.
“야!”
온객행을 다시 자리에 앉힌 주자서가 온객행이 손으로 툭툭 쳤던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진짜 너 몇 살이야? 사실은 세 살 아니야? 온삼세.”
주자서가 앞접시와 젓가락을 찾아 온객행의 손에 들려주고 다시 찬을 먹기 시작했다.

온객행은 주자서가 쥐어 준 접시와 젓가락을 다시 탁자에 놓고 말했다.
“입 맞췄으니까, 알려 줄게.”
주자서가 또 어깨를 흠칫 떨며 말했다.
“야! 밥은 좀 편하게 먹자! 진짜.”
온객행이 부스스 웃으며 얼굴을 가까이하자 주자서가 온객행의 얼굴을 밀며 말했다.
“귀왕이라며. 천 살은 드셨겠지. 온천세씨. 안 궁금해. 밥이나 먹어.”
온객행이 주자서가 밀어내는 손을 잡고 굳이 주자서에게 얼굴을 가까이 붙여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난 스물.”
주자서가 고개를 획 돌리고 온객행을 밀면서 말했다.
“야! 내가 형이잖아?”
온객행은 팔을 둘러 주자서를 다시 품 안에 안았다. 주자서가 온객행의 어깨를 밀면서 말했다.
“아니 어른들은 뭐하고 너 같은 어린애가 귀왕을 하고 있어?”
온객행이 주자서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고 말했다.
“애고 어른이고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겠어. 이 지옥에서.”
주자서가 밀어내는 것을 멈추고 말했다.
“귀왕이 엄청 젊네. 나보다 젊네?”
온객행이 주자서의 어깨에 고개를 비비자 주자서가 팔을 둘러 온객행의 등허리를 쓸며 말했다.
“그래, 그래. 애기 귀왕아… 우리 밥 먹으면 안될까?”
온객행이 고개를 들어 주자서를 보며 짐짓 근엄하게 말했다.
“그건 싫어. 귀왕 말고 다른 걸로 불러 봐.”
주자서가 몸을 돌려 젓가락을 다시 들고 말했다.
“그래. 애기야. 밥 먹자.”
주자서는 온객행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또 찬을 집어서 먹기 시작했다.

주자서와 온객행이 식사를 마치자 목란과 유이가 차를 들고 들어와서 시중을 들었다. 주자서와 온객행은 관수(盥漱)하고 옷을 갈아 입었다. 주자서는 예의 자기 옷이 맞는지 몇차례나 물었던 붉은 옷이 아니라 연한 회색의 장포를 입었고, 온객행은 고상과 비슷한 색의 보라색 옷을 입었다. 주자서가 온객행의 옷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입으니까 마치 남매 같네.”
고상이 웃으며 말했다.
“주인, 그럼 오라버니라고 불러드릴까요?”
온객행이 심드렁하게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그러던지.”
고상이 온객행에게 붙어 앉으며 말했다.
“오라버니.”
온객행이 고상을 보고 살포시 웃었다. 주자서가 유이가 건내 준 차를 마시면서 말했다.
“웃으니까 더 잘 생겼다.”
온객행을 보고 있던 고상이 ‘허’ 하고 웃으며 말했다.
“지금 나가라고 눈치 주는 거야?”
주자서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눈치는 무슨! 봐, 잘 생겼잖아. 그럼 못 생겼어?”
고상이 다시 시선을 온객행에게 옮기며 말했다.
“아이, 당연히 주인은 잘 생겼죠… 그런 뜻이 아니라…”
온객행이 고상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맞아. 나가라고 눈치 주는 거야.”
주자서가 마시던 차에 사레가 걸려 기침을 해댔다. 옆에 있던 목란이 주자서의 등을 두들겼다.

고상이 자리에 바로 앉으며 말했다.
“주인, 무상귀가 곧 찾아올 것 같은데 어떡할까요?”
온객행이 대답없이 차를 마셨다. 등을 두들기던 목란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황작이 죽었습니다.”
온객행은 ‘하’ 하고 코웃음 치고 답이 없다. 고상이 안달이 나서 말했다.
“개심귀가 적사귀를 찾아갔단 말이에요!”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걱정마라. 오늘은 별일 없을 것이다.”
고상이 발을 동동 구르며 말했다.
“주인!!”
온객행이 찻잔을 내려놓고 고상의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걱정할 것 없다. 그들이 미치지 않고 서야 함부로 박정부에 들어오지 못 할 거야.”
고상이 주자서를 흘끔 보고 말했다.
“무상귀가 잡귀들에게 염귀가 누구인지 알아보라고 시켰어요.”

주자서는 온객행과 고상이 하는 이야기의 대부분을 알아듣지 못해, 오늘은 무슨 일을 하나 하는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염귀의 이름이 나오자 고개를 돌려 온객행을 보았다. 온객행은 주자서를 보고 미소 지으며 말했다.
“어때? 잘 생겼어?”
주자서는 염귀에 대해 물어보려고 하다가, 목란과 유이의 눈치를 한번 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잘 생겼어.”
고상은 ‘어휴’ 하고 한숨을 쉬었고, 목란과 유이는 입을 소매로 가리고 ‘호호호’ 하고 웃었다. 주자서는 내심 불안이 일었지만, 오늘은 아무 일도 없을 것이라고 하니 괜히 걱정을 사서 하지 않기로 했다. 온객행의 예상은 조금 빗나갔는데, 그날 저녁 박정부로 무상귀의 아들 설비(契飛)가 찾아왔다.


주자서는 처소에 앉아서 희상귀에게 새로 받은 장부에 오늘 분의 일 처리에 대해 적고 있었다. 기별없이 벌컥 문이 열리고 온객행이 들어왔다. 주자서는 붓을 들고 목간에 숫자를 적으며 누가 들어왔는지 보지도 않았다. 온객행은 주변에서 일하고 있던 목란과 유이를 내보내고 주자서의 곁으로 와서 앉았다. 주자서가 눈을 힐끔 들어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나는 붓을 쓰는 사람은 아니었나 봐, 글씨가 잘 안 써져.”
온객행이 몸을 붙여 앉으며 주자서의 허리를 쓰다듬었다. 주자서가 몸을 비틀며 말했다.
“어허! 나 지금 일 하잖아. 옷에 먹이 묻으면 지워지지도 않는다고.”
온객행이 주자서의 손에서 붓을 빼앗아 내려놓고 말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대로 해. 누가 들어오든 절대 얼굴을 보여선 안돼.”
주자서가 순순히 붓을 내려 놓고 온객행을 보며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누가 와?”
온객행이 주자서의 몸을 자신에게 밀착시키며 말했다.
“너 염귀에 염(艶)이 무슨 뜻인지는 알지?”
주자서의 얼굴이 온객행의 가슴에 부딪혔다.
“어…? 어어.”

온객행이 주자서의 몸을 들어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 놓으며 말했다.
“말하지 마.”
그리고 주자서의 입술에 꾹 입을 맞췄다. 놀란 주자서가 온객행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뭔가 말하려는 데 밖에서 사람이 들어왔다. 온객행이 돌아가는 주자서의 얼굴을 턱으로 잡고 주자서의 눈을 보며 고개를 작게 흔들었다. 주자서는 요상한 자세가 되어 온객행 품에 있는 게 부끄러웠다. 게다가 그걸 남에게 보인다고 하니 열이 올라 얼굴이 터질 것 같았다. 주자서가 온객행의 어깨에 고개를 묻고 그를 끌어 앉자 온객행이 주자서의 등허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무슨 일이지?”
들어온 남자는 온객행을 보고 작게 얼굴을 찡그리고는 답했다.
“제가 설단과 같은 성씨를 쓰는 것은 그의 자식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온객행이 주자서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고 답했다.
“흐음.”
주자서는 몸을 흠칫 떨고는 온객행의 어깨를 잡았다.

온객행은 어깨에 있는 주자서의 손을 자신의 허벅지로 내리며 말했다.
“무상귀 자리를 원하는가?”
설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지금 무상귀에게 세력이라고 불리울 만한 것은 흑무상과 백무상 뿐입니다. 고오와 황작의 죽음으로 귀곡의 판세가 바뀌었으니, 무상귀도 바뀔 때가 되었지요.”
주자서는 온객행의 허벅지에 올려진 손이 부끄러워서 자꾸만 바르작대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주자서의 몸이 들썩이자 온객행이 주자서의 허리를 안으며 말했다.
“설단이 많이 늙기는 했지.”
설비가 당황하며 말했다.
“곡주께서 염귀와 즐기고 계신데 제가 감히 방해를…”
온객행이 고개를 비스듬히 꺾으며 말했다.
“방해? 지금 자네가 나의 즐거움을 방해한 것을 걱정하는가? 이 곳은 박정부인데?”
설단이 뒷걸음질 치며 말했다.
“곡주께서는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박정부주께는 제가 잘 말씀드리겠습니다.”
온객행이 작게 웃으며 답했다.
“그 말, 희상귀가 들어 주길 바라겠네. 무상귀라도 되지 않으면 어찌 여귀들이 그대를 살려 두겠는가?”
설비가 작게 웃으며 답했다.
“허락으로 알고 처신하겠나이다.”
온객행이 주자서의 뺨에 손을 가져가며 말했다.
“그래. 설단을 죽이면, 내가 그대를 무상귀라 불러주지.”
설비는 온객행의 말에 깊게 절하고 방을 나갔다.

장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마자 주자서는 마치 그동안 숨을 참았던 사람처럼 숨을 크게 들이켜고는 온객행을 밀어냈다.
“허!”
온객행이 다시 주자서의 몸을 끌어안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아직 밖에 있을 수도 있잖아.”
주자서가 온객행의 귀를 잡고 속삭였다.
“이거 진짜 미친놈 아니야? 나…나는! 남들 앞에서…”
온객행이 주자서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알았어. 알았어.”
주자서가 다시 온객행의 귀를 잡고 말했다.
“나는 남들 앞에서 이러는 거 취미에 없어! 이 미친놈아!”
온객행이 낮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래. 설비 저놈은 입이 가벼우니 곧 염귀가 얼마나 나에게 귀여움을 받는지 귀곡 전체가 알게 될 거야.”
주자서는 고개를 뒤로 꺾고 거친 숨을 몰아 쉬었다. 온객행이 주자서의 드러난 목에 입을 맞추자 주자서는 인상을 쓰면서 온객행의 머리를 꼭 안았다.
“온삼세!”
온객행은 분명히 숨이 막힐 텐데도 주자서의 품에 얼굴을 묻고 웃었다.

穿越 第3

食屍鬼 | 식시귀

주자서의 일과는 별다를 것 없이 흘러갔다. 귀왕은 주자서가 지내는 곳에 와서 정말 잠만 자고 갔다. 항상 피곤한 기색이 가득한 그는 주자서의 가슴을 베고 잠들었다가 주자서가 깨기도 전에 나가곤 했다. 주자서의 경계가 무색하게 귀왕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마치 정말로 그의 마음을 비싸게 사줄 것처럼.

주자서가 받은 장부는 총 세권이었는데, 주자서는 나무조각과 붓을 빌려 가장 최근 장부에 적힌 숫자부터 다시 셈해보았다. 주자서가 고작 세 장 정도 확인을 한 것뿐인데 전부 틀린 것 투성이다. 주자서가 귀왕의 옷을 정리하는 유이를 보며 물었다.
“유이, 나 전에 염귀는 글을 읽을 줄 알았어?”
유이가 손을 멈추고 골똘히 생각하더니 말했다.
“잘 모르겠어요. 염귀는 박정부보다 급색귀가 머무는 사음부(邪淫府)에 계시는 날이 더 많았어요.”
주자서가 유이의 말에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사음부? 엄청 죄가 많아 보이는 이름이네.”
유이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희는 그 곳 근처에만 가도 벌을 받아요. 급색귀의 수하들 중에는 성벽(性癖)이 고약한 귀신들이 많아서…”
주자서가 손을 내젓고 말했다.
“그만, 그만. 별로 알고 싶지 않아.”

주자서는 붓을 놓고 머리를 감싸며 크게 한숨을 쉬었다. 유이가 일을 멈추고 주자서가 앉아 있는 서안으로 다가와 물었다.
“왜 그러시는데요?”
주자서가 목간에 적은 숫자들을 보여주며 말했다.
“한 장에 열 줄 남짓한 계산에 틀린 게 이렇게 많아.”
유이는 주자서가 쓴 글자를 보고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숫자요? 이게 숫자입니까?”
주자서는 삐뚤삐뚤하게 쓰인 글자가 부끄러워 다시 거두며 말했다.
“아! 나는 붓을 쓰는 사람은 아니었나 봐. 엄청 못쓴다.”
주자서가 멋쩍게 웃자 유이가 마주 웃으며 말했다.
“그런 숫자는 처음 봅니다.”
주자서가 자신이 쓴 목간을 자세히 보고 말했다.
“아니, 그 정도야? 이 정도면 알아 볼만 하지 않나…?”

언제 나타났는지 고상이 주자서의 뒤쪽에서 주자서가 쓴 목간을 보며 말했다.
“이건 어디 글자야? 중원의 글이 아닌 거 같은데?”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지, 이건 아라비아 숫자니까.”
고상이 주자서 옆에 앉아 목간을 빼앗아 들고 물었다.
“아라비아? 그게 뭐야?”
주자서가 다시 장부를 보며 말했다.
“중동의 나라들을 아랍이라고 부르잖아.”
고상이 목간을 서안 위에 던지며 말했다.
“중동? 중동은 또 어디야?”
유이가 고상에게 말했다.
“자살(紫殺), 장부의 계산이 맞지 않는데요.”
고상은 주자서가 보고 있는 장부에 눈을 가져가며 물었다.
“그래? 뭐 얼마나 안 맞는데?”
주자서가 물었다.
“근데 이 승(升)이라는 단위는 부피야 무게야?”
고상이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부피? 그게 뭔데?”
주자서는 고개를 흔들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는 장부를 다시 덮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유이, 목란누님은 어디 가셨어?”
고상이 주자서의 호칭에 ‘허’하고 웃었다. 유이가 답했다.
“목란언니는 대전에 시중을 들러 갔어요.”
고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 그게 오늘 이구나.”
주자서가 눈을 가늘게 뜨고 고상을 보았지만 무슨 일인지는 묻지 않았다. 애초에 주자서는 박정부 밖을 나가지 않기로 다짐했기 때문이다. 주자서가 유이에게 다시 물었다.
“그럼 박정부주께서도 대전에 계셔?”
유이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주인님께서는 오늘 비단 염색하는 것을 보러 가셨어요.”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어디인데? 박정부 안이지? 가자.”
유이가 다가와 장부를 받아 들려고 하자 주자서가 괜찮다며 길을 안내하라고 재촉했다.

비단을 염색하는 곳에서는 매캐한 냄새가 났다. 커다란 솥이 있고 그 주변에서 천을 풀고 펴고 말리는 사람들의 손길이 분주하다. 홍화라고 해서 붉은 색만 있는 줄 알았는데 아주 밝은 노란빛의 천도 있다. 주자서가 하나 둘 걸리는 젖은 비단을 보고 ‘우와’ 하고 감탄하자 고상이 우쭐해서 말했다.
“비단뿐만 아니라 무명도 염색하는데 박정부 여귀들이 입는 저 빨간 옷은 다 여기서 염색한 거야.”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고상이 주자서의 소매를 잡아 끌며 희상귀가 있는 곳으로 갔다. 희상귀는 고상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고상에게 다가가 말했다.
“아상, 연기를 마시면 좋지 않아.”
그리고 주변에 하인이 주는 얇은 천을 고상의 얼굴에 씌워 주었다. 그리고 주자서를 발견한 그녀는 하인이 건넨 천을 그에게 주었다. 주자서는 들고 있던 장부를 옆구리에 끼고 얼른 천으로 코와 입을 막았다. 하지만 내심 ‘이걸로 뭐가 막아지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희상귀가 주자서에게 물었다.
“염귀. 장부는 벌써 정리했는가?”
주자서가 장부를 가져와 펼치며 말했다.
“주인, 장부에 틀린 점이 너무 많아요. 혹시 벌써 값을 치르셨습니까?”
주자서가 희상귀를 주인이라고 부르는 것을 힐끔 본 고상이 끼어들었다.
“전에 염귀는 글을 읽을 줄 모르니, 아마 급색귀가 가로 챈 거 에요!”
희상귀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을 응접실로 안내했다. 희상귀가 상석에 앉자 주자서가 쪼르르 그녀의 곁으로 가서 장부를 펼치며 말했다.
“주인, 아직 승(升)이라는 단위가 뭔지 잘 모르겠지만, 정말 이 장부대로 값을 치르셨다면 손해가 아주 심해요. 여기 이게 받은 가격 같은데, 원래 대로 라면 세배는 더 받았어야 해요.”
희상귀가 주자서가 가져온 목간과 장부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그대는 천축국(天竺國)의 숫자를 쓰는가?”
주자서가 당황하며 말했다.
“아 제가 어… 그러니까 서북출신이라서… 아마?”
희상귀가 주자서를 보고 코웃음 쳤다. 희상귀는 하인을 시켜 주판을 가져온 뒤 스스로 셈을 해보고 작게 코웃음 치며 주판을 내 던졌다.


온객행은 대전에 있는 식시귀와 급색귀를 보았다. 식시귀의 광증은 어떤 계기가 있어야 이는 것 같은데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온객행은 보아를 가까이 불러 귓가에 말했다.
“너는 지금부터 급색귀 곁에 가서 서라. 급색귀가 식시귀를 공격하면, 네가 상황을 봐서 식시귀를 죽여라.”
보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온객행을 보자 온객행이 작게 짜증을 내며 말했다.
“너는 그냥 급색귀 옆에 서 있다가 식시귀를 죽이라고.”
보아는 이해되지 않았는지 멀뚱히 온객행을 보았다. 온객행이 턱짓으로 급색귀와 식시귀가 있는 곳으로 보아를 내려 보냈다. 보아가 내려가자 온객행이 박정부의 여귀들을 불렀다. 이 여귀들은 한 때 강호에서 이름을 좀 날렸던 무공이 높은 아이들로 일부러 급색귀의 취향에 맞춰 데려온 하인들이다. 옷도 염귀와 비슷하게 입혔다. 염귀가 생각 날 수 있게. 그 중에는 주자서의 시중을 드는 아이도 있다. 온객행이 얼굴이 익은 그 하인을 보고 심드렁하게 손짓하자 그들은 온객행의 곁으로 와서 차시중을 들며 그의 팔이며 다리를 주물렀다. 박정부의 여귀가 들어오자 유자업은 화색이 되어 하인들을 보았다.

온객행이 식시귀와 급색귀를 보고 말했다.
“고형, 고형. 아무리 광증이 일었어도 염귀를 먹으면 안되지.”
온객행의 말에 급색귀가 식시귀를 날카롭게 보았다. 식시귀는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급색귀가 무기로 사용하는 부채를 꺼내어 식시귀를 겨누며 말했다.
“식시귀! 너 염귀를 먹었어?”
식시귀는 대답 없이 급색귀를 물끄러미 보았다. 그의 눈에는 광채가 없어 꼭 죽은 사람의 눈 같았다. 식시귀는 순순히 인정했다.
“그런 가 보오.”
급색귀가 몸을 던져 식시귀를 공격했다. 귀곡의 대전안은 덩그렇게 놓인 귀왕좌를 빼면 황막하여 숨을 곳도 마땅하지 않았다. 보아는 급색귀의 곁에 서 있다가 식시귀와 급색귀 모두를 공격했다.

온객행이 작게 혀를 차며 보아를 불렀다.
“보아.”
보아가 싸움을 멈추고 온객행에게 다가왔다. 온객행이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무래도 너는 진짜…”
보아가 빠지든 말든 식시귀와 급색귀는 마치 서로를 죽일 것처럼 수십합을 겨뤘다. 하지만 식시귀의 무공은 십대 악귀 중에 가장 높았기 때문에 곧 식시귀의 손에 급색귀의 목이 잡혔다. 급색귀는 ‘컥컥’ 대며 말했다.
“고형! 고형, 염귀를 먹을 수도 있죠. 그냥 내가 아끼던 아이라서 아쉬워서 그랬소! 내가 잘못 했어!”
온객행은 다시 보아를 불러 귓가에 대고 말했다.
“식시귀를 죽이라고.”
보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귀왕좌가 있는 단상을 내려가 식시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급색귀는 보아를 한번 보고 보아와 합심하여 식시귀를 다시 공격했다.

온객행은 세사람이 싸우는 것을 보다가 차를 건네는 하인에게 말했다.
“너의 용독술을 한번 보자.”
하인은 온객행의 시중을 드는 척 그의 뒤로 가서 식시귀에게 암기를 날렸다. 암기를 눈치챈 식시귀가 온객행이 앉아 있는 귀왕좌를 보았다. 온객행은 여상하게 차를 마시며 차를 가져온 하인에게 내온 차가 맛이 좋다며 칭찬을 했다. 식시귀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점점 광증이 이는 것 같았다. 식시귀의 광증에는 여인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여귀가 입은 붉은 옷이 그의 눈동자에 번들거렸다. 그의 사연이 어떠한 지는 모르지만 그가 광증이 일면 오히려 일은 더 편하다. 온객행의 시중을 들던 아이들이 식시귀를 막아서며 대치했다. 온객행은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광채로 번득이는 식시귀의 눈빛을 보았다. 증오? 애증? 아니면 회한? 온객행에게 식시귀의 사정은 별로 관심 없다. 그저 귀곡을 없애 버리기 위해 필요한 쓰기 편한 장기 말이 필요 할 뿐이다.

온객행이 화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고형, 고형이 염귀를 없애는 바람에 내가 염귀를 대신할 귀신을 찾았어요. 얼마나 귀여운지 내 옆에 둬야지.”
온객행의 말에 식시귀가 비명을 지르며 온객행에게 달려 들었다. 온객행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귀왕좌에 앉아 그를 대신해서 싸우고 있는 박정부의 여귀들을 보았다. 무공 실력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얼마 버티지 못할 것 같다. 다행히 보고 있던 급색귀와 보아도 같이 달려 들기 시작했다. 식시귀도 급색귀도 보아도 박정부의 여귀들도 지친 것 같다. 온객행은 자리에서 일어나 손에서 굴리고 있던 호두를 던져 급색귀의 머리에 맞췄다. 급색귀가 맞은 머리를 감싸는 순간 온객행이 소매에 있던 작은 칼을 식시귀를 향해 던졌다. 그 칼은 식시귀의 목덜미를 뚫었다. 온객행의 암기를 본 박정부 여귀들은 곧 곡주가 서있는 단상위로 올라왔다. 온객행은 보아를 보고 식시귀 쪽으로 턱짓했다. 보아는 온객행의 눈치를 보더니 식시귀에게 다가가 머리와 몸을 분리했다. 온객행이 보아의 손에 들린 고오의 머리를 보고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그리고 보아에게 말했다.
“오늘부터 네가 식시귀로구나.”

새로 식시귀가 된 보아는 아주 바보는 아니었는지 며칠이 지나자 자신과 비슷한 몸집의 수하를 몇 두기 시작했다. 그는 광증도 없고, 시신만이 아니라 단순히 먹는 것을 좋아하는 자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적사귀의 수하들 심지어 무상귀의 수하들 중에서도 그의 밑으로 들어온 수하도 있었다. 보아가 식시귀가 된 다음날 개심귀와 무상귀가 온객행을 찾아와 어떻게 된 일인지 물었다. 온객행은 어깨를 으쓱 하고 급색귀에게 물어 보라고 말했다. 급색귀가 뭐라고 떠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일로 급색귀는 무상귀에게 의심을 샀다. 급색귀와 세력이 비슷하거나 조금 작은 적사귀는 당장 걱정할 필요는 없다. 게다가 장설귀는 요즘 아주 흥미로운 수하를 곁에 두는 듯했다. 사람을 인형으로 만드는 자는 과거 황궁에서 의술을 연구하는 관리였다고 한다. 그가 만드는 인형은 의지를 잃고 사람을 먹는다고 한다. 장설귀는 스스로 자신을 잡아먹을 호랑이 새끼를 키우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다.


저녁 늦게까지 무상귀의 쓸데없는 소리를 들은 온객행은 대전에 있는 처소로 보내진 자객 몇을 죽이고 박정부로 돌아왔다. 오늘은 하루 종일 머리가 무겁고 기분이 좋지 않았다. 온객행은 생각이 많아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처소에서 그를 반긴 것은 그가 보고 싶었던 염귀가 아니라 고상이었다. 고상이 들어오는 온객행에게 말했다.
“주인!”
고상이 온객행이 벗는 장포를 벗어 걸며 말했다.
“주인, 오늘도 여기서 주무시는 거에요?”
온객행이 방안을 둘러보는 것을 본 고상이 손 씻을 대야에 물을 채우며 말했다.
“망서는 나이모랑 있어요.”
온객행이 대야에 손을 씻으며 인상을 썼다. 고상이 다가와 그의 이마에 손을 대며 말했다.
“주인! 몸이 안 좋아요?”
온객행이 고상의 손을 물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고상은 영견에 물을 묻혀 온객행의 얼굴을 닦으며 말했다.
“주인, 망서는 대체 어디서 데려온 거예요?”
온객행은 대답 없이 중의도 벗어 버리고 침상으로 갔다. 고상이 침상 위에 이불을 펴고 온객행을 눕혔다. 이불을 잘 덮어주며 말했다.
“희상귀도 염귀가 마음에 들었나 봐요. 망서를 좋아하는 여귀들이 얼마나 많은 지 몰라요.”
온객행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어떤 여귀들이?”
고상이 온객행이 벗어 놓은 중의를 개면서 말했다.
“아니 좋아한다는 게 주인이 좋아하는 것처럼 그런 게 아니라…”

주자서가 광주리에 밀떡을 들고 목란과 유이와 함께 방안으로 들어왔다. 고상을 발견하고 활짝 웃으며 주자서가 말했다.
“아상! 이리 와서 같이 먹자.”
고상이 자리에서 일어나 주자서가 들고 들어온 광주리 안을 보았다. 달래와 홍화 꽃잎을 섞어 부친 밀떡이었다. 주자서가 고상의 입에 하나 넣어 주며 말했다.
“먹어봐. 맵다. 맛있지?”
고상이 입에 들어온 밀떡을 먹으며 말했다.
“그러게 맵네? 근데 이렇게 먹어도 돼?”
주자서가 탁자에 광주리를 내려 놓고 말했다.
“잿물에 재기 전에 남은 데다 밀가루를 풀어서 달래랑 넣고 부친 건데 진짜 맛있어 그치?”
고상이 고개를 끄덕이며 광주리 안에 있는 떡을 몇 개 더 집어먹었다. 유이가 말했다.
“원래 홍화는 먹으려고 심기도 했데요.”
주자서가 맞장구 치며 말했다.
“거기서 일하는 어멈이 어릴 때 많이 드셨데. 나는 매운 거를 좋아하는 것 같아.”
목란과 유이가 소매를 입으로 가리고 ‘호호호’하고 웃었다. 고상이 뭔가 생각났는지 밀떡 하나를 더 들고 침상에 가서 말했다.
“주인, 주인도 먹어봐. 정말 맛있어.”
주자서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뭐야? 벌써 왔어?”
온객행이 고상이 내민 밀떡을 보고 고개를 흔들며 돌아 누웠다. 고상은 그 밀떡도 입으로 가져가며 목란과 유이에게 눈치를 주었다. 주자서도 고상의 눈치를 읽고 말했다.
“아상! 밥 먹고 가. 내가 가서 가지고 올 게.”
하며 다시 방을 나가려는 데 고상이 주자서의 소매를 잡아당겨 방안으로 밀어 넣고 말했다.
“밥은 언니들이랑 부엌에서 먹을 테니까 너는 주인이랑 있어.”
주자서가 고상을 따라 나가며 말했다.
“그럼 가서 저녁을 가져와야 하잖아.”
고상이 주자서의 가슴팍을 밀며 말했다.
“여기 있으라고!”
장지문을 ‘탁’ 소리가 나게 닫고 나간 고상에게 서운해서 주자서가 입을 삐죽이고 다시 광주리를 놓은 탁자에 가서 앉았다.

주자서가 몸을 기울여 침상 쪽을 보자 귀왕이 옆으로 누워있다. 주자서는 대야에 있는 물에 손을 대충 씻고 귀왕에게 다가갔다.
“귀왕… 귀왕 벌써 자?”
귀왕은 보통 밤 늦게 와서 주자서에게 붙어 자다가 주자서가 눈을 뜨기 전에 사라지고 없었다. 주자서는 침상에 걸터앉아 귀왕의 이마에 손등을 대보았다. ‘귀왕도 아플 때가 있나?’ 미열이 느껴져 주자서가 손을 떼고 일어나려고 하자 귀왕이 주자서의 손을 잡았다. 귀왕이 눈을 슬며시 떠서 손을 보자 주자서의 손이 노랗게 물들어 있었다. 귀왕이 손을 끌어당기며 말했다.
“손이 왜 이래?”
엉거주춤하게 귀왕의 몸 위에 기댄 주자서가 손을 빼며 말했다.
“오늘 꽃 떡 만드는 걸 했거든. 냄새나?”
주자서가 손바닥을 킁킁대며 말했다. 귀왕이 몸을 일으켜 앉았다.

주자서가 일어난 귀왕을 다시 밀어 눕히려고 하며 말했다.
“미열이 있는 것 같으니까 좀 자. 밥은 먹었어?”
귀왕은 밀리지 않고 말없이 붉게 물든 주자서의 손끝을 보았다. 주자서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온객행이 주자서의 손을 다시 덥석 잡았다. 귀왕이 물었다.
“아파?”
주자서가 잡힌 손을 빼며 말했다.
“뭐가?”
온객행이 주자서의 손가락 끝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홍화를 맨손으로 따면 아리잖아.”
주자서가 몸을 굳히며 어색하게 ‘하하하’ 하고 웃었다.
“이정도는… 나보다 더 어리고 연약한 소녀들도 하는 일인데.”
귀왕이 주자서의 허리를 끌어당겨 안으며 말했다.
“너는 하지 마.”
주자서가 귀왕을 밀어내며 말했다.
“노는 것 보다 낫잖아. 매일 먹고 재워주는데. 이 정도는 괜찮아.”
귀왕이 주자서의 어깨에 고개를 묻고 말했다.
“그냥… 너는 하지 마. 아픈 건 하지 마.”

주자서가 어색하게 팔을 빼서 귀왕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왜 그래? 정말 아파?”
주자서가 팔을 풀고 온객행의 얼굴을 양손으로 잡았다. 눈 끝이 빨간 것이 꼭 울 것만 같았다. 주자서가 부스스 웃으며 말했다.
“무슨 귀왕이 이래.”
귀왕이 눈을 감으며 말했다.
“겨… 온, 온객행.”
주자서가 일어나 귀왕의 머리를 가슴에 안으며 말했다.
“네 이름은 온객행이구나.”
귀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자서가 말했다.
“나는 주자서야. 편견은 없는데, 지금 고민 중이니까. 좀 기다려.”
온객행이 팔을 들어 주자서의 허리에 감았다. 주자서가 또 작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다른 사람보다 많이 모자란 편이라 오래 기다려야 할 수도 있는데, 괜찮겠어?”

온객행이 고개를 들어 주자서를 보며 말했다.
“얼마나?”
온객행의 물음에 주자서가 고민하며 말했다.
“글쎄… 일주일…은 너무 짧고 보름도 그렇고… 한달?”
온객행이 주자서를 더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
“안돼. 그렇게 오래는 못 기다려.”
주자서가 온객행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비싸게 사준다며… 몸… 몸도 같이 줄 걸…? 아마?”
이번엔 온객행이 작게 웃었다. 주자서가 한탄하듯 말했다.
“어쩌면 이렇게 뺀 게 무색할 만큼 별볼일 없을 수도 있어.”
온객행이 주자서를 침상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그럼 일단 오늘 몸부터 주면 안돼?”
온객행이 주자서의 앞섶을 잡아 벌리자 주자서가 당황해서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야! 너 열 있다니까!”
온객행이 주자서를 눕히고 그 위에 올라타며 말했다.
“또 너라고 하지. 정말 혼나야겠어.”
그리고 벌어진 앞섶에 고개를 숙여 입을 맞췄다.

주자서가 온객행의 머리를 붙잡고 말했다.
“야! 너 몇 살인데 자꾸 그러는 거야?”
온객행이 부스스 웃으며 말했다.
“그러는 너는 몇 살인데?”
주자서가 몸부림 치며 말했다.
“난 스물 둘이야! 빨리 놔 봐. 내가 병수발을 들어주지.”
온객행이 고개를 들어 주자서를 빤히 보았다. 주자서가 고개를 뒤로 빼며 물었다.
“왜?”
온객행이 주자서를 놓아주며 말했다.
“너… 스물 둘이라고?”
주자서가 대야가 있는 쪽으로 가며 말했다.
“어! 내년에 졸업해. 등록금이 부족해서 휴학하면 그것도 못하겠지만…”
온객행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졸업? 휴학? 그게 무슨 소리야?”
주자서가 물을 묻힌 수건을 가져와 침상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뭐라구?”
온객행은 주자서를 보고 몇 번 눈을 깜빡이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주자서는 온객행을 침상에 밀어 눕혔다. 온객행의 이마를 수건으로 닦아주며 주자서가 물었다.
“그냥 열만 있는 거야? 아니면 다른 증상은 없어? 속이 메스껍다 거나 춥지는 않아?”
온객행이 순순히 주자서의 손에 침상에 누우며 고개를 흔들었다. 주자서가 다시 온객행의 이마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밥은 먹었어?”
온객행이 다시 고개를 흔들었다.

주자서가 일어나 조금 식은 찻물을 가져와 온객행에게 마시게 했다. 고분고분해진 것이 이상해서 주자서가 눈을 가늘게 뜨고 온객행에게 물었다.
“너… 몇 살이야?”
온객행이 눈을 감으며 말했다.
“나 아픈 것 같아.”
주자서가 온객행의 앞섶을 잡고 물었다.
“온객행. 너 몇 살이야?”
온객행이 웃으며 고개를 젓자 주자서는 약이 올라서 온객행의 앞섶을 쥐고 흔들었다. 온객행이 주자서의 손을 잡으며 불쑥 얼굴을 가깝게 붙이고 말했다.
“입맞춰주면 말해 줄게.”
주자서가 앞섶을 놓고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아니, 잠깐. 나는 말해줬잖아. 너무 엄청난 조건이 붙는 거 아닌가?”
이번엔 온객행이 주자서의 앞섶을 잡으며 몸을 붙여왔다.

주자서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잠깐! 나는 기억이 없으니까 이게 첫 키스잖아, 이런 건 싫어.”
온객행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첫키스? 그게 뭐야?”
주자서가 다급하게 말했다.
“다른 사람하고 처음으로 입맞추는 거. 내가 기억하는 범위에서 이게 처음이잖아.”
온객행이 주자서를 빤히 보며 말했다.
“나도 처음이야.”
주자서가 온객행을 흘겨보며 말했다.
“처음 좋아하네.”
온객행이 얼굴을 붙이며 말했다.
“정말이야. 망서, 네가 처음이야. 입맞추고 싶은 것도. 같이 있고 싶은 것도.”
주자서는 담백한 고백에 얼굴이 붉어졌다. 주자서가 작게 말했다.
“망서 아니라니까. 자서라고 부르라고.”
온객행이 작게 불렀다.
“자서.”
그리고 입술을 붙였다 뗐다.
“아서.”
주자서가 부스스 웃었다. 온객행이 다시 얼굴을 붙여 입술을 맞췄다. 입술을 핥다가 입 안으로 물컹 혀가 들어왔다. 치열을 훑고 입안을 휘젓는데 주자서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한참 둘이 입술을 맞대고 있는데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장지문이 열리는 소리에 주자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온객행을 밀어냈다.

밀린 온객행도 놀랐는지 번들거리는 입술로 일어난 주자서를 보았다. 주자서는 소매로 입술을 비벼 닦았다. 오히려 그래서 더 입술이 붉어졌다. 온객행은 침을 꿀꺽 삼키고 자리에서 일어나 주자서의 소매를 잡으려고 했는데 고상의 목소리가 들렸다.
“주인! 왜 일어나 있어? 얼른 누워요.”
주자서는 얼굴이 빨개져서 소매로 입술을 가렸다. 그 모습이 꼭 입을 가리고 웃는 여인 같아서 고상이 한 소리 했다.
“뭐야? 왜 그러고 있어?”
주자서는 고상의 목소리에 어깨가 튀더니 곧 방 밖으로 뛰쳐나갔다. 고상은 나간 주자서에게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뭐야! 대체 왜 그러는데?”
온객행이 다시 침상에 털썩 누우며 말했다.
“고상.”
고상이 온객행의 몸 위로 이불을 덮으며 말했다.
“주인 왜요? 내가 방해했어요?”
온객행이 고상을 보고 ‘허’하고 허탈하게 웃었다. 고상이 침대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주인, 망서에게 왜 잘해줘요? 그동안 데려온 애들은 더 야살스럽고 애교가 많은 애들이었잖아요. 쟤는 딱딱하고 딱히 단수(斷袖)도 아닌 것 같던데…”
온객행은 살포시 웃으며 대답이 없다. 고상이 물었다.
“설마 쟤는 안 죽일 거예요?”
온객행이 눈을 감으며 말했다.
“아상, 아서를 그렇게 부르면 안되지.”
고상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아…아서?”

주자서는 방에서 나와 얼굴을 양손에 묻었다. ‘엄청 기분 좋았어’ 이런 생각을 하며 크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나는 남자를 좋아했나?”

穿越 第2

喜喪鬼 | 희상귀

식시귀 고오(古奧)는 주변에 수하를 많이 두지 못했다. 언제 그의 광증이 일어 수하를 알아보지 못하고 잡아 먹힐지 모르기 때문이다. 광증만 일지 않으면 사람 자체는 그렇게 나쁘지 않다. 이름이 무색하게 그는 먹는 것에 관심이 없어서 막대기같이 마른 남자였다. 주변에 사람이 없다는 것은 세력을 형성하기 어렵다는 뜻이고, 세력을 형성하기 어렵다는 뜻은 혼자서 십대 악귀의 이름을 달고 활동할 만큼 무공이 출중하다는 뜻이다. 온객행은 식시귀가 세력을 가졌으면 했다. 지금 귀곡에서 십대 악귀의 수장 자리를 꿰차고 있는 무상귀 설단(契丹)은 회갑을 넘긴 다 늙은 노인네다. 그는 다른 악귀와는 다르게 규칙을 두고 그 규칙에 맞게 상과 벌을 알맞게 이용하여 수하를 부렸는데, 온객행이 노곡주를 먼저 치지 않았으면 무상귀가 곡주의 자리를 가졌을 것이다. 새파랗게 젊은 온객행을 안중정(眼中釘)으로 생각하는 그 노인네에게 새로운 장난감을 쥐어 주기 위해서라도 식시귀는 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식시귀가 꼭 고오일 필요는 없다.

온객행은 개심귀 백명(百鳴)이 부리는 수하들 중에 시체를 먹는 자를 추렸다. 일단 이름의 구색을 갖추자는 생각이다. 개심귀는 사람의 심장만 먹기 때문에 심장 이외의 부분은 개심귀의 수하들이 나누어 먹고는 했다. 개심귀 아래에서 제일 많이 먹고 제일 힘이 좋은 잡귀의 이름은 보아(甫兒)였다. 성도 없고 개심귀의 수하들이 남긴 시체를 남김없이 먹어 치워 몸집이 거대했다. 사람을 죽여서도 먹지만 이미 죽어 있는 시체도 먹는 놈이고 나갈 정신을 따로 챙겨야 할 만큼 똑똑하지도 않았다. 다루기 쉬운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는 온객행이 관심을 주기 전까지는 그냥 힘 좀 쓰는 개심귀의 수하였다. 온객행은 일부러 콕 집어 그를 자주 불러 일을 시켰다. 특별한 일은 아니고 박정부에 들어와 여귀를 겁탈한 놈들을 잡아 죽이거나 노곡주의 취향대로 불상이 가득한 귀곡 대전을 치우는 일 정도이다. 노곡주는 말년에 자신이 한 일이 두려웠는지 나찰의 불상을 모아 대전에 세워 두었다. 온객행은 대전에 첫번째 나찰이 들어왔을 때, 드디어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무상귀는 하나 둘 치워지는 대전의 나찰을 보고 몇 번이나 온객행에게 그러지 마시라고 말했지만, 온객행은 심드렁하게 무상귀가 원하면 가져가도 좋다고 허락까지 했다. 나찰 불상이 모두 빠져나간 대전은 촛대마저 귀왕좌 주변에 몇 개 있을 뿐이라 어둡고 쓸쓸했다. 온객행은 그것이 귀곡이랑 아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무상귀는 매일 밤 새로운 자객을 온객행에게 보내는 것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에 온객행은 매일 잠자리를 고민해야 했다. 온객행은 한담에서 발견한 염귀를 떠올렸다.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어렵게 내려 누르고 대전에서 나찰을 들고 이리저리 움직이는 보아를 보았다. 고오를 없애기는 해야 하는데 아는 것이 없다. 저 미련한 보아 혼자서 식시귀를 죽일 수도 없다. 온객행은 귀왕좌에 휘우듬하게 걸터앉아 관자놀이를 지긋이 눌렀다. 온객행은 ‘염귀가 주물러 줬으면 좋겠다.’ 따위의 생각을 했다.

아침부터 남의 손에 깨어나 세수하고 몸을 씻고는 어제 입고 있던 옷보다 더 화려하고 하늘하늘한 옷을 입고 꽃신처럼 보이는 붉은 신발을 신었다. 주자서는 자신의 몸을 서슴없이 더듬어 대는 사람들의 손길은 무덤덤하게 받아들였지만 계속해서 ‘저기… 이게 정말 내 옷이에요?’ 라고 묻는 것은 멈추지 못했다. 여인들은 ‘까르르’ 웃으면서 뭐하나 대답해주지 않고 ‘박정부주께서 설명하실 겁니다.’ 라는 말만 반복했다. 옷이 다 갈아 입혀지자 사람들은 그를 거울 앞으로 데려가 앉히고는 머리를 빗으며 머릿기름을 발랐다. 거울은 반질반질 닦여서 희미하게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하인들이 연지를 가져다 주자서의 얼굴에 바르는데도 주자서는 속으로 ‘이 거울은 잘 안보이네.’ 같은 생각을 했다. 그의 짧은 머리를 보고 하인 하나가 그에게 물었다.
“공자께서는 왜 머리가 짧으셔요?”
주자서가 어깨까지 오는 머리를 만지며 말했다.
“짧다고요? 이정도면 길지 않나요? 남잔데.”
하인들이 다시 ‘까르르’ 웃었다. 주자서가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정말 다들 머리가 길다. 마치 태어나서 한번도 머리를 자르지 않은 것처럼.

주자서는 하인들과 소소한 잡담을 하며 박정부의 응접실로 갔다. 박정부에는 의외로 아이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부모가 없는 고아이거나, 귀곡에서 태어난 아이들이라고 했다. 누구를 보살필 만한 멀쩡한 귀신이 없는 지옥에서 사는 것이 가여워 박정부주가 거둬드린 아이들이라고 했다. 그런 아이들은 매일 몇 명씩 늘어나고 줄어드니 걱정할 필요 없다고 했다. 주자서는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늘어나는 건 몰라도 줄어들면 찾아야 되는 거 아닌가? 아직 애들인데.”
주자서의 말에 같이 걷던 하인들이 마치 살면서 그런 소리는 처음 들었다는 듯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주자서는 솔직히 아직도 여기가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사람이 사는 곳 같으면서도 서로를 귀신이라 부르며 사람으로써 마땅히 해야 되는 것을 하지 않고 도리(道理)도 없어 보였다. 이곳은 정말 지옥일까? 하인들과 함께 걷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염귀를 불렀다.
“염귀? 왜 여기 있어?”
보라색 옷을 입은 소녀가 다짜고짜 주자서를 멈춰 세웠다.

소녀는 돌아선 주자서의 모습을 보더니 덥석 주자서의 가슴에 손을 올려놓고 되려 자기가 놀라며 말했다
“아악! 사내잖아?”
주자서는 소녀의 손길을 뿌리치고 양팔로 몸을 감싸며 소녀를 노려봤다. 소녀는 주자서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흥’ 하고 코웃음 치며 주자서에게 손가락질했다.
“만지면 닳는 것도 아닌데, 뭐 어때?”
주자서는 몸에 두른 팔을 풀고 똑같이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아가씨가 못하는 말이 없어! 닳는 것도 아니면 만져도 되는 거야? 남에 몸에 막 그렇게 함부로 손을 대면 안되지!”
소녀는 놀란 듯 요상한 표정을 짓고 되물었다.
“아…아가씨?”
주자서가 주변의 눈치를 한번 보고 말했다.
“그럼 아가씨지, 뭐 벌써 애라도 있어? 어멈이야?”
소녀의 얼굴이 다시 노기를 띄며 말했다.
“뭐? 어멈?!”

소녀가 달려들려고 하자 옆에 서있던 하인들이 ‘까르르’웃으며 말했다.
“아상, 그만해. 곡주께서 데려오셨어.”
소녀가 주자서의 팔뚝을 때리는 행동을 멈추며 말했다.
“뭐? 주인이?”
주자서는 소녀의 호칭을 듣고 조금 기분이 이상해졌다. ‘이 소녀는 대체 곡주라고 불리는 귀왕의 뭔데 주인이라고 부르는 걸까? 막 이상한 건 아니겠지…?’ 아상이라고 불린 소녀는 다시 한번 주자서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주인의 취향이 그새 바뀌었나?”
주자서가 소녀를 보고 되물었다.
“취향이라니?”
아상은 주자서의 말에 더 놀라며 물었다.
“주인이 데려왔으면 같이 잔 거 아니야?”
주자서가 얼굴이 빨개져서 버럭 소리 질렀다.
“그게 무슨 소리야!”
아상은 귀를 막으며 말했다.
“귀청 떨어지겠네! 조용히 말해! 이건 또 어디서 굴러먹던 잡귀야?”

주자서의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달아올라 소녀에게 말했다.
“다 큰 아가씨가 못하는 말이 없어!”
소녀가 귀로 가져갔던 손을 아래로 내리며 말했다.
“아가씨라니, 허 참. 간지러워서. 난 고상이야. 주인이 데려온 거면…”
주자서가 ‘큼큼’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손을 내밀며 말했다.
“나는 주자서야. 고상? 고상이라고 부르면 돼?”
고상은 빤히 내밀어진 손을 보더니 주자서를 보았다. 민망해진 주자서는 손을 거두고 옆에 서 있던 하인들에게도 이름을 물었다. 주자서의 옷을 입혀준 아이는 강리(江離; 향초의 한 종류; 천궁(川芎))와 목란(木蘭; 목련)이고, 그에게 머리가 왜 짧은 지 물었던 아이는 두형(杜衡; 향초의 한 종류), 방금 고상을 막아준 아이는 유이(留夷; 작약)라고 했다. 주자서가 웃으며 말했다.
“내가 꽃밭에 있는 줄 몰랐네.”
그 말을 들은 하인들의 뺨이 붉어 졌다. 고상이 그들에게 눈치를 주며 말했다.
“주인이 데려온 거면 얼굴을 붉혀도 소용없는 거 알지?”
하인들인 다시 ‘까르르’ 웃었다.

응접실에 도착했을 때 내부에는 하인 몇 명만 있고 박정부주는 보이지 않았다. 주자서가 눈치를 보며 멀뚱히 서있자 고상은 어제 밤에 주자서가 앉았던 상석 근처의 의자에 가서 앉고는 하인들에게 차를 내오라고 시켰다. 주자서를 데려온 하인들이 그를 두고 하나 둘 자기 일을 찾아 하기 시작했다. 주자서는 물끄러미 외실에서 부지런을 떨며 일하는 하인들을 보며 ‘나도 시중을 들러 왔으니 저런 일을 하게 되는 건가?’ 같은 생각을 했다. 주자서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기척도 없이 여인이 불쑥 뒤쪽에서 걸어와 상석에 앉았다. 여인이 안으로 들어오자 분주하게 일을 하고 있던 하인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주자서는 자신도 그래야 하나 싶어서 어정쩡하게 바닥에 꿇어 앉았다. 여인이 상석에 앉아 소매를 휘두르자 하인들은 하나 둘 일어났다. 여인이 들어오건 말건 차를 마시고 있던 고상이 말했다.
“나이모, 대체 주인은 어디서 저런 것을 주웠데요?”
여인이 살포시 웃으며 고상에게 말했다.
“아상, 똑바로 앉아라. 곧 시집을 가도 될 나이인데 몸 가짐을 바르게 해야지.”
고상이 의자 위에 접어 올려 놓았던 다리를 내려놓고 반듯이 앉으며 여인을 보고 웃었다.

여인이 고상을 향해 웃자 주자서는 여인의 모습이 넋을 빼앗겨 숨을 쉴 수 없었다. 웃지 않아도 아름다운데, 웃으니 정말 숨을 쉬는 것을 잊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여인은 주자서에게 시선을 옮겨 미간을 찌푸리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주자서는 여인의 입에서 나오는 한숨이 안타까워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아…그러니까…”
주자서가 입을 열자 고상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디 희상귀가 입을 열지 않았는데, 입을 여느냐!”
소녀의 허리춤에서 흰색의 채찍이 나와 주자서가 꿇어 앉아 있는 부근을 내려쳤다. 정말 깜짝 놀란 주자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상을 보았다. 희상귀가 소녀를 말리며 말했다.
“아상, 아무래도 저 자는 귀신이 아닌 것 같아.”
고상이 고개를 돌려 희상귀를 보고 말했다.
“그럼 주인이 어디 나가서 납치라도 했다는 거에요?”
희상귀가 눈을 굴리며 말했다.
“곡주께서는 한담에서 주우셨다는 구나.”
고상이 펼쳐진 채찍을 감으며 말했다.
“한담수옥에서요?”

채찍을 다 감은 고상이 주자서 앞으로 와서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너! 무슨 죄를 지어서 한담수옥에 있었어?”
주자서는 귀왕에게서 들은 똑같은 질문을 또 받으니 약간 피곤했다. 게다가 그는 정말 아는 게 없다. 주자서는 고상의 허리춤에 다시 매달린 하얀 채찍을 보고 주눅이 들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그러니까 나도 잘 모르겠어…요?”
희상귀가 고상을 다시 자리로 부르며 말했다.
“아상, 그만해라. 그자는 내공이 없어.”
고상이 주자서의 얼굴을 빤히 보며 말했다.
“내공이 없다고요? 정말 주인이 어디서 납치해온 건가?”
주자서도 답답해져서 뭔가 말하려는 데 희상귀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곡주께서 이 자를 염귀로 삼으셨으니, 이 자가 이제부터 염귀야.”
고상이 코웃음 치며 말했다.
“내공도 없는데 염귀는 얼어 죽을.”
희상귀가 주자서를 위아래로 훑어보고 말했다.
“얼굴이 희고 마른 걸로 봐서 어디서 책이나 읽던 서생이 아닐까?”
고상이 주자서 주변을 뱅글뱅글 돌다가 그의 짧은 머리를 손으로 들었다 놓으며 말했다.
“머리가 짧은 걸 보면 파계승일지도 몰라요.”
희상귀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주자서는 마치 자신을 품평하는 것 같은 이 자리가 불편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익숙했다. 주자서는 속으로 자신은 정말 창부였나 싶어서 서러워졌다.

희상귀가 다시 상석으로 돌아가 앉으며 주자서에게 말했다.
“나는 박정부주 희상귀, 앞으로 그대가 모셔야 할 상전이네.”
주자서가 대답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 이전에 염귀는 나를 도와 박정부를 관리하고 운용했네. 그대는 글을 읽을 줄 아는가?”
주자서가 또 다시 대답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상이 주자서의 팔을 툭툭 치며 말했다.
“대답을 해!”
주자서는 자리에 주저 앉으며 고상이 때린 팔을 잡고 말했다.
“네! 네! 읽을 줄 압니다! 쓸 수 있어요.”
희상귀는 곁에 있던 하인 하나에게 작은 목소리로 무언가 시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인이 죽간 몇 책을 소반에 담아 가지고 왔다. 그 소반은 곧 주자서의 앞에 놓여 졌고 희상귀가 주자서에게 고갯짓했다. 주자서는 다시 무릎을 세워 일어나 앉아 죽간을 들었다. 첫번째로 들었던 죽간은 전서(篆書)로 쓰여 있었다. 주자서가 버벅대며 잘 읽지 못하자 고상이 ‘쯧’하고 혀를 찼다.

주자서는 고상의 혀차는 소리에 흠칫 어깨를 떨고 앞에 있는 다른 죽간을 펼쳐 예서(隸書)로 쓰인 죽간을 들어 읽었다. 읽다 보니 도덕경이었다. 주자서가 막힘없이 1장에서부터 10장까지 읽자 희상귀가 손을 들어 그를 멈추었다. 그가 죽간을 읽는 동안 누군가가 모래가 들은 작은 함을 주자서 앞에 놓았다. 그리고 작은 막대를 놓았다. 희상귀가 말했다.
“그대 이름을 써 보시게.”
주자서가 들고 있던 죽간을 다시 잘 말아 소반 위에 올려 놓고 무릎걸음으로 함으로 다가와 막대기를 들었다. 함은 생각보다 크지 않아서 주자서는 희상귀를 힐끔 보고 뭔가 물을까 하다가 그냥 주(周)자를 썼다. 희상귀가 상석에서 내려와 그가 쓴 글씨를 보고 고개를 끄덕이자 모래 함을 가지고 왔던 하인이 모래를 쓸어 글자를 지웠다. 주자서는 희상귀를 보고 다시 막대를 들어 남은 그의 이름자를 썼다. 희상귀가 주자서의 이름자 중에 서(舒)를 보고 작게 코웃음 쳤다.

희상귀가 다시 상석으로 돌아가 앉으며 말했다.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것을 보니 귀한 집 자제 일지도 모르겠네. 애들을 시켜서 혹시 청성산 일대에 없어진 공자가 있는지 묻도록 해라.”
상석 옆에 서있던 하인 하나가 조용히 대답하고 외실을 나갔다. 희상귀가 아직도 김이 피어 오르는 찻잔을 가져와 ‘후룩’ 마시고는 말했다.
“그대는 내가 왜 박정부주인지 아는가?”
주자서가 고개를 도리질 치다가 고상의 눈치를 보고 말했다.
“모릅니다.”
고상이 앉았던 자리로 다시 가서 앉으며 말했다.
“박정부주 희상귀는 연인을 배신한 자를 죽인다.”
희상귀가 씁쓸히 웃으며 말했다.
“자고로 남자는 박정(薄情)하고 여자는 박복(薄福)하다지.”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은 일 하시네요.”
주자서의 말에 고상이 ‘허’하고 헛웃음 쳤고 희상귀는 미간을 찌푸렸다. 곁에서 일을 하던 하인들이 일을 멈추고 하나둘 어깨를 들썩이며 웃기 시작했다. 주자서는 또 자기가 뭔가 실수를 한 줄 알고 잔뜩 겁을 먹고 말했다.
“꼭 남자만 박정한 건 아니지만, 연인을 배신한 사람들은 죽어야죠.”
주자서의 말에 희상귀가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렇지. 박정한 것이 꼭 남자라는 법은 없지.”

희상귀는 하인들을 시켜 얇은 종이로 만든 장부를 가져오게 시켰다. 희상귀가 말했다.
“우리는 홍화를 심어 염색을 하고 연지를 만들어 파는 일을 하네. 박정부 화원에는 홍화가 가득하지. 이것은 그동안 염귀가 관리하던 장부이니 오늘부터 그대가 맡아서 관리하도록 하게.”
주자서가 장부를 받아 들었다. 희상귀가 말했다.
“종이는 매우 귀하니 장부를 적기 전에 목간(木簡)에 먼저 써서 나에게 가져오도록 해라.”
주자서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고상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네!”
하고 대답했다. 희상귀가 깊게 한숨을 쉬고 주자서를 내려 보며 말했다.
“너는 오늘부터 박정부의 아이이니, 몸 가짐을… 아니지, 목란! 유이!”

근처에서 일을 하던 하인 두 명이 곧 주자서의 곁으로 다가왔다.
“오늘부터 너희들이 염귀를 모시거라.”
두 사람은 다소곳이 희상귀에게 절하며 대답했다. 희상귀가 뒤로 돌아서 다시 상석으로 가서 앉으며 말했다.
“그 아이들은 무공을 할 줄 아는 아이들이니 조심하시게. 염귀.”
주자서가 양 옆에 선 목란과 유이를 보고 말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제가 뭐라고 부를까요?”
소녀들이 소매로 웃음을 가리며 대답이 없자 고상이 다가와 주자서의 팔을 잡아 일으키며 말했다.
“너는 주인의 노리개니까 다른 애들은 건드리면 안되지.”
주자서가 엉거주춤 일어나며 고상을 쏘아보았다.
“뭐? 노리개?”
고상이 주자서를 문간으로 밀며 말했다.
“나이모! 내가 얘 구경시켜주고 올 게!”
고상은 박정부주의 대답도 듣지 않고 주자서를 외실 밖으로 밀었다. 뒤 따라 나오던 목란과 유이에게 주자서 손에 들려 있던 장부를 건네 주고 주자서의 팔을 잡아당겼다. 주자서가 고상의 손속에 이리저리 흔들리며 끌려가자 목란과 유이가 다시 ‘까르르’하고 웃었다.

박정부주가 화원이라고 했던 곳은 화원이 아니라 뒷산에 가까웠다. 햇볕이 잘드는 작은 언덕은 아직 피지 않은 연한 녹색의 봉우리와 노란색 홍화로 가득했다. 중간중간 목란과 유이가 입은 옷과 같은 붉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꽃 근처에 앉아서 일을 하고 있었다. 작은 아이들도 하인들의 근처에서 무얼 하는지 떠들고 있었다. 주자서가 작게 탄식했다. ‘우와.’ 고상이 주자서의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소매를 잡고 박정부주 여기저기를 다니며 그를 하인들에게 소개했다. 그리고 항상 소개 끝에는 그가 주인이 데려온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주자서가 싫은 내색을 하며 얼굴을 찡그리면 소개를 받던 하인들이 ‘까르르’ 하고 웃었다. 박정부를 모두 구경하고 나니 주자서는 허기가 아주 많이 일었다. 며칠은 굶은 사람처럼 뱃속에서 우렁차게 ‘꼬르륵’ 소리가 나자 고상이 ‘히히히’ 하고 웃으며 그를 부엌으로 데려갔다.
“염귀, 세상에서 제일 사랑스러운 사람은 먹는 걸 주는 사람이야.”
주자서가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만두를 먹었다.
“맞아. 그런 거 같아.”
부엌에서 일하는 어멈들이 주자서가 먹는 것을 보고 ‘호호호’하고 웃었다.

밥을 다 먹고 다시 어젯밤에 머물렀던 처소로 돌아오자 목란과 유이가 주자서를 반겼다.
“언니...! 아!”
유이의 목소리에 목란과 고상이 ‘하하하’ 하고 크게 웃었다. 주자서가 웃으며 말했다.
“그냥 자서라고 해요.”
유이가 고상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공자, 그럴 수는 없습니다.”
고상이 ‘흠’ 하고 고심하더니 말했다.
“이자의 이름이 자서라고 하니 우리 망서(望舒; 달의 마부)라고 부를까? 목란과 유이가 ‘까르르’하고 웃었다. 영문을 모르는 주자서가 인상을 쓰자 고상이 타박하며 말했다.
“너 망서도 몰라? 달의 마차를 끄는 마부잖아.”
주자서가 ‘그래?’ 하고 되물었다. 뭔가 들어 본 것 같기도 하고 낯선 정보다. 고상이 ‘허’하고 웃으며 말했다.
“글을 읽을 줄 안다면서 어떻게 망서를 몰라?”
주자서가 울컥해서 말했다.
“모를 수도 있지! 그러는 너는 뭐 다 알아?”
고상이 당황한 빛을 하고는 말했다.
“여인이 글을 읽어서 어디에 쓰라고?”
주자서는 살면서 그런 얘기는 처음 들어본다는 식으로 고상에게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글을 읽고 쓰는데 여자 남자가 어디 있어? 글을 모르면 불편하잖아.”
고상이 목란과 유이를 보며 말했다.
“불편한가? 딱히 모르겠는데?”
주자서가 목란과 유이에게 말했다.
“혹시 목란 아가씨 랑 유이 아가씨도 글을 몰라요?”
주자서의 살가운 호칭에 유이가 살포시 웃으며 답했다.
“공자님, 말씀을 편히 하세요. 저희는 저희 이름 자 정도 밖에 모릅니다.”
주자서가 황망스럽게 그들을 보았다.

장지문이 벌컥 열리고 귀왕이 들어왔다. 목란과 유이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고상도 귀왕을 보고 고개를 숙였다. 주자서는 뒤돌아서 귀왕에게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야! 너 여자라고 글자도 안 가르친 거야? 미쳤네, 너 진짜 벌받아!”
주자서의 손가락질에 놀란 귀왕이 고상을 보았다. 고상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목란과 유이를 일으켜 세워 방을 나가며 말했다.
“망서! 앞으로 해야 할 일은 주인이 잘 알려 주실 테니 말 잘들어.”
주자서가 나가려는 고상의 소매를 붙잡고 말했다.
“그냥 자서라고 부르라니까, 어디가? 나 장부 어떻게 보는지 몰라 알려줘야지.”
고상이 주자서의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글을 모르는데 장부를 어떻게 봐! 우린 갈 테니까 주인이랑 둘이 오붓하게 있어.”
주자서가 만족스럽게 웃는 귀왕을 보고 말했다.
“아니야, 잠깐 가지 말아봐. 그러니까…”
고상이 내력을 담아 팔을 뿌리치자 주자서가 힘에 밀려 주자서 뒤에 서 있던 귀왕에게 부딪혔다.
“주인 우린 갈게.”
주자서가 작은 목소리로 고상을 불렀지만 그들은 재빨리 장지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주자서는 귀왕과 거리를 벌리며 말했다.
“아직 대낮이야. 알고 있지?”
귀왕이 주자서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일부러 그러는 거야? 자꾸 밀어내면 더 동하는 거 몰라?”
주자서가 계속 뒷걸음질 치다 버럭 소리 질렀다.
“비싸게 사준다며! 내 마음!”
귀왕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 비싸게 사준다니까. 이리와.”
주자서가 경계하는 기색을 지우지 않고 빙 돌아서 장부가 놓인 서안 앞에 앉았다. 귀왕이 다가오려고 하자 주자서가 팔을 들어 그를 멈춰 세우고 말했다.
“거기 있어! 나는 지금부터 염귀의 일을 할 테니까 너는 거기서 쉬어.”
귀왕이 주자서가 앉은 서안 앞에 털썩 앉으며 말했다.
“너 자꾸 너, 너 거리는 데, 정말 혼 날래? 내가 주인이라고 부르라고 했잖아.”

주자서가 앞에 있는 얇은 종이로 만든 장부를 펼치며 말했다.
“시끄러. 사람한테 주인이 어디 있어? 사람은 모두 스스로의 주인이야.”
주자서의 말에 귀왕이 고개를 꺾어 ‘하하하’ 하고 웃었다. 주자서는 펼친 장부를 보고 놀랐다. 숫자가 모두 한자로 적혀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중량기호도 보였다. 홉이니 승(升)이니 하는 단위는 들어는 봤어도 정확히 무슨 뜻인지 감이 오지 않았다. 주자서가 얼굴을 찌푸리고 장부를 보자 귀왕은 서안에 팔을 괴고 주자서를 보았다. 찡그려진 미간을 손가락으로 문지르자 주자서가 어깨를 튀며 깜짝 놀라 몸을 뒤로 물렸다. 주자서가 짜증을 내며 말했다.
“저리 가.”

귀왕이 얼굴을 더 가깝게 붙이며 말했다.
“너 망서가 무슨 뜻인지 정말 몰라?”
주자서가 장부를 뒤적이며 말했다.
“마차를 끄는 마부래.”
귀왕이 고개를 숙여 낮게 웃고는 말했다.
“망서는 달의 여신이야. 달의 마차를 끌고 사냥을 즐기는 여신. 내가 너를 달빛이 가득한 한담에서 찾았으니 잘 어울리는 이름이네.”
주자서가 얼굴을 구기며 말했다.
“그런 얘기는 가서 좋아하는 사람한테 해. 나에게 해봐야 핀잔이나 먹지.”
귀왕이 주자서를 보며 말했다.
“지금 하고 있잖아. 좋아하는 사람한테.”
주자서가 몸을 떨며 말했다.
“뭐 얼마나 봤다고? 내가 저번에도 말했지. 이런 건 좀 더 서로에 대해 차차 알아간 다음에 마음을 먼저 연 다음에…”
귀왕이 주자서가 장부위에 올려 놓은 손을 부드럽게 쓸면서 물었다.
“마음을 열면 몸도 열거야?”
주자서는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얼굴이 너무 아깝다.”
주자서의 말에 귀왕이 인상을 썼다. 주자서가 말했다.
“내가 그 얼굴이면 진짜! 어?”
귀왕은 또 부스스 웃어버리고 말았다.

穿越 第1

艶鬼 | 염귀

주자서는 오늘도 원하지도 않는 옷을 입고 촬영에 임했다. 무명 배우, 모델에게 일이란 언제 끊겨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누구에게나 스쳐가는 젊음은 팔 수 있을 때 최대한 많이 팔아 두는 것이 남는 장사다. 특히 전혀 유명하지 않고, 빠듯한 생활비에 다음 학기 등록금을 걱정해야 하는 주자서 같은 사람에게 말이다. 주자서는 치렁치렁한 옷을 입고 이제 어깨까지 내려오는 머리를 반으로 묶은 뒤 사람이 별로 없는 한적한 고궁의 난간에 기대어 앉았다. 살아 생전 처음으로 머리를 6개월 넘게 길렀건만, 헤어 모델을 부탁한 곳에서는 3개월째 연락이 없다.

누군가의 별궁이었다든가 애첩의 화원이었다든가 그런 얘기를 말해주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지만 사실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지금 입고 있는 이 옷이 여자의 옷인지 남자의 옷인지 주자서는 모른다. 어느 시대의 옷인지도 사실 잘 모르겠다. 공부를 그렇게 잘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못하는 편도 아니었던 주자서는 역사책에서 이런 옷을 본 것도 같다. 오늘 촬영이 끝나면 제때 보수를 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다. 그 돈으로 밀린 집세를 내느라 며칠째 꽃빵으로 끼니를 때우는 생활을 청산하고 싶었다. 금액이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일단 받으면 그 돈으로 제일 먹고 싶었던 마라탕을 먹으러 가겠다고 결심하고 눈을 떴다. 촬영기사가 주자서에게 이런 저런 자세를 요구했다. 이제 막 더워지기 시작한 햇살에 소매를 털고 작게 한숨 쉬며 고개를 내리깔았다. 촬영이 끝나기 전까지 어떻게 물로 달래 놓은 배에서 민망한 소리가 나오지 않기를 바라며.

촬영기사는 그를 난간에 기대게 하고 몇 번 더 사진을 찍었다. 다른 관계자와 찍은 사진을 확인하겠다며 잠시 자리를 비우는 동안 주자서는 기대고 있던 난간에 걸터앉았다. 고개를 돌려 난간 아래에 있는 연못 아니, 이정도 크기면 호수다. 호수를 보았다. 인공으로 만든 것 같은데 깊은 것인지 물색이 짙다. 주자서는 고개를 좀 더 꺾어서 혹시 물고기가 사나 하고 유심히 보았다. 좀 더 가까이 보면 바닥이 보일 것 같아 조금 더 몸을 기울이던 주자서는 순간 중심을 잃고 물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풍덩’ 사람이 물에 빠진 것 치고는 주변은 조용하다. 방금 전까지 난간에 누군가가 앉아 있었던 것 같은데 화원을 구경하던 사람들은 물에 뭔가 빠지는 소리를 듣고 연못을 보았다. 연꽃이 가득한 연못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고요하기만 하다.

‘어’하는 사이 물 속에 빠진 주자서는 당황하여 허우적댔다. ‘어떻게 물에 빠졌었더라?’ 생각하는 사이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다. 시야가 어둡고 치마같이 긴 장포는 흠뻑 젖어 주자서의 다리를 옭아맸다. 생각처럼 몸을 움직일 수 없어 당황한 주자서는 있는 힘껏 팔을 휘저어 수면 위로 올라갔다. 방금 전까지 분명 대낮이었는데 수면을 박차고 올라온 주자서의 하늘에는 달이 휘영청 밝게 떠있다. 주자서는 막혔던 숨을 몰아쉬며 이 곳이 어디인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멀지 않은 곳에 물가가 있기에 주자서는 팔을 저어 뭍에 닿았다. 몸에 힘이 쭉 빠진 주자서는 물가에 벌렁 드러누웠다. 거칠었던 숨이 점점 편안해지자 누워있는 자갈에 등이 배겨 아팠다. 몸은 놀랐는지 쉽게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


자갈밭에 누워있는 것은 생각보다 등이 너무 아파서 주자서는 일어나 앉았다. 한참 앉아서 그는 생각했다. ‘여기는 어디지? 나는 누구지?’ 분명 고풍스러운 전각 사이를 거닐며 무언가를 걱정했던 것 같은데 무언가 생각하려고 하면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다. 얼굴을 찡그리고 손을 들어 관자놀이 있는 부근을 꾹 누르자 좀 두통이 가시는 것 같다. 주변은 불빛 하나 없이 어두웠고, 추웠다. 하늘에 뜬 달은 뭔가 그가 알고 있던 달보다 더 밝은 것 같았다. 주자서가 앉아서 스스로의 자아에 대한 철학적인 고뇌를 하고 있을 때, 물소리가 나더니 물 속에서 또 다른 인영이 나타났다. 그는 물소리와 인기척에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경계했다. 그러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도망갈 준비를 했다. 물에 푹 젖은 옷자락이 몸에 차닥차닥 감겨온다. 누구인지 알아서 별로 좋을 일 없을 것 같다는 본능적인 직감으로 주자서는 도망칠 만한 곳이 있는지 주변을 둘러봤다. 불행하게도 주자서가 뭍이라고 생각했던 물가는 뭍이라고 하기 보다는 섬에 더 가까운 것이라 갈 곳이 없었다. 물 속의 인영이 점점 주자서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주자서는 겁이 나서 예전에 누군가에게 배웠던 것 같은 자세를 취했다. 머리를 감싸고 쪼그려 앉은 그에게 누군가가 다가와서 물었다.
“너는 뭐지?”
쪼그려 앉은 주자서에게 낯선 목소리가 물었다. 반응이 없는 주자서에게 다가온 사람은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다시 물었다.
“너 누구야?”
주자서는 낯선 사람의 손을 물리치며 더 작게 몸을 웅크렸다. 몇 번 더 주자서의 어깨를 툭툭 치던 사람은 곧 답답했는지 주자서의 등을 발로 찼다. 갑작스러운 힘에 밀려 주자서는 자갈밭에 풀썩 넘어지고 말았다. 욱하는 마음에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야!”
훤칠하게 키가 큰 남자는 어디인가 친숙하면서도 낯설었다. 긴 머리가 물에 젖어 여기저기 들러붙어 서로 꼴이 말이 아니었다.

남자가 다시 물었다.
“야, 너 뭐야? 왜 여기 있어?”
주자서는 눈을 굴리며 생각했다. ‘그러게 난 뭘까?’ 자신을 발로 찬 남자가 괘씸해서 알았어도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주자서는 남자에게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그러는 너는 뭐야? 뭔데 사람을 막 발로 차냐?”
남자는 얼굴을 찌푸리더니 ‘하’하고 웃었다.
“뭐? 너 나 몰라? 누구 아래 있는 잡귀인데 이렇게 정신이 없어?”
주자서의 한 쪽 눈썹이 올라가며 말했다.
“잡귀? 너 지금 나 잡귀라고 불렀냐?”
남자는 한 순간에 웃는 낯을 지우고 조금 더 가깝게 붙어 서며 주자서를 보았다.
“같은 말 여러 번 하게 하지 말고 대답해. 너 뭐야?”
주자서는 자신을 차갑게 노려보는 남자를 보고 황망스러우면서 기가 막혔다. 주자서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같이 노려보며 말했다.
“그러는 너는 뭔데?”
남자는 주자서의 물음에 기분 나쁘게 웃으며 말했다.
“나? 귀왕.”
주자서의 표정이 일그러지며 둘 사이를 벌려 남자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
“귀왕? 나 죽은 거야…?”
남자 역시 주자서를 위아래로 노골적으로 훑어보고는 말했다.
“대체 누구한테 미움을 사서 한담수옥(寒潭水獄)에 갇힌 거야?”
주자서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한담수옥? 여기 감옥이야?”
온객행은 재미있다는 듯이 큰소리로 ‘하하하’하고 웃었다.

주자서는 이곳이 지옥이라서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기억하지 못하는 속세의 인생이 너무 잔혹하고 끔찍해서 죽자마자 기억을 모두 잃어버린 것이라고. 주자서가 생각하는 지옥은 죄를 지은 사람들로 넘쳐 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아무도 없어서 그것이 더 무서웠다. 대체 어떤 죄를 지었길래 이런 곳에 갇히게 된 걸까? 주자서가 남자를 보며 물었다.
“귀왕이라고? 그럼 나를 심판하러 온 건가?”
남자는 그 말에 배꼽을 잡고 웃으며 바닥에 털썩 주저 앉았다. 영문을 모르는 주자서는 그제야 이 곳이 서늘하다 못해 춥다는 것이 느껴졌다. 몸을 부르르 떨며 ‘지옥불은 뜨거울 줄 알았는데 차갑네.’라고 생각했다. 주자서는 이제 자신을 손가락질하며 웃고 있는 귀왕을 힐끔 보고 젖은 옷을 벗기 시작했다.

소매도 길고 치마 같은 이 옷은 많이 낯설다. 주자서를 보고 웃고 있는 남자도 비슷한 옷을 입긴 했지만 소재가 조금 더 좋아 보였다. 여러 겹의 젖은 옷을 겹쳐 입고 있어서 일까? 갑자기 오한이 들었다. 장포를 하나둘 벗어 꼭 짜고 물기를 털어 자갈 위에 올려 두었다. 좀 판판한 돌 하나를 찾아 그 위에 털썩 앉고 신고 있는 신발을 벗고, 양말을 벗었다. 신발에서 물이 왈칵 쏟아졌다. 주자서는 물기를 털어 뒤집어 놓고 몸에 달라붙은 티셔츠를 벗을까 말까 고민했다. 뭐가 그렇게 재미 있는 것인지, 배를 잡고 웃던 귀왕은 당황한듯 갑자기 벌떡 일어나 옷을 벗는 주자서를 구경했다.

주자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들오들 떨며 입고 있던 옷이 마르도록 바닥에 펼쳐 놓았다. 그러다 너무 추워서 안에 입었던 얇은 장포를 몇 번 털어 내고 둘러 입었다. 그리고 뚫어져라 쳐다보는 귀왕에게 말했다.
“뭘 봐?”
귀왕이 주자서의 곁으로 다가와 앉으며 그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말했다.
“너? 이렇게 발을 다 내놓고 날 유혹하는 거야?”
이번엔 주자서가 ‘푸하’하고 웃으며 말했다.
“유혹? 내가? 너를? 하하하.”
귀왕은 주자서의 팔뚝을 쓰다듬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내가 너를 어떻게 심판해야 할까?”
주자서는 귀왕이 자신을 쓰다듬는 손길에 소름이 돋았다. 그는 귀왕을 밀어내며 말했다.
“죄를 정말 많이 지었나 봐. 너 같은 것에게 심판을 받아야 하다니.”
귀왕은 주자서에게 몸을 더 붙이며 말했다.
“아주 운이 좋네, 나에게 환심을 샀으니.”
주자서가 일어나기 위해 그를 뿌리치자 귀왕이 주자서를 자신의 무릎에 앉히며 말했다.
“낭군님 무릎에 살며시 앉았으니, 사랑스럽지 않은 곳이 어디인가?”(1)
주자서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귀왕을 보았다. 귀왕은 웃으며 얼굴을 붙였다.
“지난날엔 기생집 광대였고, 지금은 떠도는 귀신의 가인(佳人)이라네, 길 떠난 귀신은 돌아오지 않으니, 내 침상을 지켜보는 것은 어떠 한가?”(2)

주자서는 귀왕이 하는 말을 대체로 다 알아듣지 못했지만 침상이라는 말은 알아들었다. 뭔가 묘하게 익숙한 구절이라 주자서는 귀왕을 뿌리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뭐라는 거야! 벌받을 거 받고 나는 환생하러 갈래. 다음생에는 사람으로 태어나지 말아야 이런 더러운 꼴을 안 볼 텐데.”
주자서의 말에 귀왕이 자리에서 일어나 ‘하하하’하고 웃었다. 그리고 주자서의 허리에 팔을 감더니 달빛이 들어오는 곳으로 몸을 훌쩍 날렸다. 갑자기 지면에서 떨어져 높이 날아오르는 느낌에 주자서는 귀왕의 목에 팔을 둘러 꼭 붙으며 말했다.
“아니! 미쳤나!”
귀왕은 주자서의 타박에 ‘하하하’웃으며 높은 바위위에 착지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평범하게 초목이 우거진 산이었다. 주자서는 지옥이라고 생각했던 곳이 사실은 그냥 지하 동굴이었다는 사실에 조금 맥이 풀렸다. 그냥 암석사이에 고인 물이었을 뿐이다.

주자서는 귀왕의 목에 둘렀던 팔을 풀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가 움직이려고 하자 귀왕이 그의 허리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너를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
주자서는 허리에 둘러진 귀왕의 손을 잡아떼며 말했다.
“주자서, 나는 주자서. 이름은 기억나.”
귀왕이 돌아간 주자서의 얼굴을 잡아 돌리며 말했다.
“염귀(艶鬼).”
주자서는 얼굴을 구기며 턱을 잡은 귀왕의 손을 벗어나려고 고개를 흔들었다. 귀왕은 주자서의 뺨에 자신의 뺨을 붙이고 말했다.
“너는 오늘부터 염귀야.”

주자서는 귀왕에게 허리가 잡힌 채 어디로 인가 운반되었다. 도착한 곳은 온통 붉은 색으로 칠해진 전각이었는데 현판에는 박정부(薄情府)라고 쓰여 있었다. 주자서가 작은 목소리로 ‘박정부?’ 라고 현판을 읽자 귀왕은 의외라는 듯 주자서에게 말했다.
“아주 바보는 아닌가 보군?”
귀왕은 박정부의 대문을 박차고 들어가 외실에 주자서를 던져 놓았다. 외실 상석에는 붉은 옷을 입은 머리가 새하얀 아름다운 여인이 앉아 있었는데 이제 막 들어온 귀왕을 보고 티가 나게 한숨을 쉬었다. 주자서는 왜 인지 그녀의 마음이 이해가 되어 고개를 돌려 귀왕을 노려보았다.

여인이 물었다.
“곡주, 이건 또 무슨 장난이십니까?”
귀왕은 외실에 있는 의자에 털썩 앉으며 말했다.
“오늘부터 이 자가 염귀네.”
여인의 눈썹이 찡그려지며 귀왕을 보았다. 귀왕은 금방 차를 내오는 시녀에게서 찻잔을 받아 ‘후후’불고 차를 마셨다. 여인이 말없이 그를 노려보자 차를 몇 번 홀짝이던 귀왕이 입을 열었다.
“그 전에 있던 염귀는 치웠으니까.”
주자서는 슬쩍 바닥에서 일어나 얼굴을 찌푸린 채로 여인 근처에 있는 의자에 가서 앉았다. 귀왕보다는 이 아름다운 여인이 좀 더 융통성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여인은 주자서에게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말했다.
“곡주가 되신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귀왕이 웃으며 말했다.
“전에 있던 염귀를 탐탁치 않게 생각하지 않으셨습니까? 박정부주? 그리하여 내가 손수 치워드리고 이렇게 새로 시중을 들 자를 구해 왔는데 불만이십니까?”
여인이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급색귀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귀왕이 찻잔을 내려 놓으며 말했다.
“유자업(劉子業) 그 놈은 실증이 많은 놈이니 박정부가 더 걱정입니다.”
여인이 고개를 돌리다 옆에 앉은 주자서를 발견하고 그를 보았다.

여인은 고개를 돌려 귀왕을 보고 말했다.
“이 자는 사내가 아닙니까? 박정부에 사내를 둘 수는 없습니다.”
온객행이 주자서를 보며 말했다.
“걱정 마시게, 저자는 내공이 없으니 박정부에 있는 다른 여비들에게 되려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지.”
주자서는 귀왕의 말에 소름이 돋아 두 팔로 몸을 감싸고 부르르 떨었다. 여인은 그제야 두사람이 쫄딱 젖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사람을 시켜 영견을 가져오게 시켰다. 여인이 귀왕의 머리를 말리며 시중을 들었다.
“저 자는 어디서 데려오신 겁니까?”
귀왕이 하인과 실랑이하고 있는 주자서를 보며 말했다.
“한담수옥에서 찾았네.”
여인은 잠시 시선을 주자서에게 주었다가 다시 거두며 말했다.
“저 아이를 여기에 두고 앞으로 여기서 지내겠다는 뜻입니까?”
귀왕이 여인을 보고 말했다.
“그러면 안되나?”
여인은 다시 고개를 돌려 주자서를 보았다.

주자서는 몸을 닦아주려는 하인에게서 영견을 받아 몸을 닦고 있었다. 하인들이 다가와 머리를 말려주려고 하자 어색하게 거절하며 머리를 손으로 털었다. 머리카락은 어디에서 잘렸는지 아니면 출가했던 중이었는지 어깨까지 밖에 오지 않았다. 귀왕이 불쑥 말했다.
“귀신에게 버림받고 배신당해 한담수옥에 갇혔는데도 전혀 주눅들지 않았잖은가? 저 정도 배포는 있어야지. 십대 악귀라면.”
여인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아행, 여기에선 푹 자도 괜찮아. 아무도 함부로 들어오지 못할 테니.”
귀왕은 머리를 빗는 여인의 손길을 뿌리치고 여인을 보았다. 여인은 고개를 숙이고 무릎 꿇으며 말했다.
“곡주.”
귀왕은 천천히 일어나 영견으로 머리를 털고 있는 주자서의 손목을 낚아채고는 내실로 향했다.

주자서는 자신을 끌고가는 귀왕의 뒤에 무릎 꿇고 앉아 있는 여인을 발견하고
“아이고!”
하며 손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어찌나 꽉 옭아 맸는지 손목이 빠지지 않았다. 주자서가 곧 포기하고 귀왕에게 끌려가며 말했다.
“너 진짜 벌받아, 여자한테 나쁜 짓 해서 좋은 꼴 못 봤다.”
귀왕은 곧 내실의 장지문을 거칠게 열고 주자서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주자서는 휘청거리며 바닥을 짚고 넘어졌다.
“야! 살살해! 내가 아무리 죄인이지만 사람을 이렇게 막 대해도 되는 거야?”
주자서는 바닥에 덜퍼덕 앉아 귀왕에게 손가락질했다. 귀왕은 바닥에 앉은 주자서를 한참 표정 없이 보고 있다가 손가락질하고 있는 주자의 손을 덥석 잡아 일으켰다. 갑작스러운 힘에 자리에서 일어난 주자서가 휘청하며 귀왕의 품에 안겼다. 귀왕은 자기 품으로 들어온 주자서를 팔로 감싸 안았다.

갑작스러운 포옹에 주자서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지는 것을 느낀 귀왕이 부스스 웃으며 주자서의 목덜미에 입술을 맞췄다. 주자서가 당황하며 말했다.
“잠깐, 잠깐.”
귀왕이 놔주는 기색이 없어서 주자서가 더 몸부림치며 말했다.
“잠깐! 좀 놔 봐!”
귀왕은 주자서의 말에 팔을 조금 풀어 얼굴을 마주보았다. 주자서는 귀왕의 얼굴을 빤히 보더니 갑자기 얼굴이 빨개져서 말했다.
“나는 편견 있는 사람은 아니야. 사람이 사람 좋아하는 게 잘못된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귀왕이 얼굴을 가깝게 붙이자 주자서가 귀왕의 얼굴을 손으로 밀며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편견은 없지만 대상이 나면 내 얘기도 좀 들어봐야 하는 거 아닌가?”
다급한 주자서의 목소리에 귀왕이 작게 웃었다. 주자서는 귀왕의 포옹에서 벗어나기 위해 조금 더 몸부림쳤다.

귀왕이 순순히 주자서를 놓아주며 말했다.
“주인님. 너는 앞으로 나를 주인님이라고 불러야지.”
주자서는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 잔뜩 인상을 쓰고 말했다.
“주인? 네가? 나의? 언제부터?”
온객행이 주자서를 침상으로 잡아 끌며 말했다.
“네가 염귀가 된 순간부터.”
주자서는 얼이 빠져서 귀왕이 하는 대로 침상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나는 염귀 한다고 한적 없는데?”
그리고 골똘히 생각하더니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아! 너!”
온객행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얼굴을 마주보자 주자서는 입을 열었다 닫았다 하더니 고개를 막 흔들며 말했다.
“보통 사람은 날 수 있었나? 그거 나는 거는 나도 할 수 있는 건가?”

정신없는 주자서를 두고 온객행이 몸을 붙여 그의 허리춤을 잡았다. 주자서는 또 가까워진 거리에 몸을 뒤로 빼다가 침상에 벌렁 눕게 됐다. ‘앗’ 온객행은 주자서의 몸 위에 자신의 몸을 덮으며 말했다.
“얘기 들어줄 테니까 해봐.”
주자서는 무슨 말인가 생각하다가 다시 얼굴을 붉히고 말했다.
“아니, 이건 좀… 우린 오늘 처음 만났는데 너무 빠른 거 아닌가? 너 나한테 고백도 안 했고… 이런 건 좀 더 서로에 대해 차차 알아간 다음에 마음을 먼저 연 다음에…”
주자서가 귀왕의 시선을 피하며 장황하게 말을 늘어 놓자 귀왕이 주자서의 몸을 침상 안쪽으로 밀며 자신의 몸 아래로 가두었다. 주자서는 귀왕이 하는 것을 누워서 쳐다보고 있다가 팔로 몸을 감싸고는 말했다.
“너는 내 몸만 가지고 싶은 거야? 마음은 필요 없어?”
주자서는 스스로 하는 말이 참 우습다고 생각했다. 어디 유치한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유치한 대사. ‘드라마? 대사?’ 귀왕이 주자서의 말에 작게 코웃음쳤다.
“네 마음을 가져서 어디에 쓰라고?”
주자서가 생각해도 맞는 말이다. 여기가 어디인지도 모르겠고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주자서의 마음은 값으로 따지자면 헐값도 안되고 아마 주자서 쪽에서 돈을 내고 폐기처분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주자서는 조금 서러워졌다. 어디에 있든 누구인지 몰라도 주자서의 몸값은 참 싸다.

주자서는 본인이 내심 몸을 팔던 창부였나 싶어서 팔로 몸을 더듬었다. 앞섶을 양쪽으로 젖히고 스스로 몸을 더듬는 주자서를 재미있다는 듯 보고 있던 귀왕이 팔을 괴어 주자서 옆에 누웠다. 앞섶을 다 잡아 벌려도 맨 살이 나오지 않았다.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주자서는 벌떡 일어나 앉아 허리끈을 풀었다. 아래에는 반바지를 입고 있다. 주자서는 앞섶을 다 벌려 놓은 채로 다시 벌렁 뒤로 눕고는 낮게 말했다.
“샤워하고 싶다.”
귀왕이 주자서의 귓가에 속삭였다.
“허리에 두른 허리띠를 풀어 이미 님 에게 허락했네, 나와 함께 내 옷을 풀어헤칠 사람은 누구 인가?”
(3)

주자서가 귀왕의 얼굴을 손으로 밀며 말했다.
“그냥 나랑 자고 싶다고 해.”
주자서의 말에 귀왕이 부스스 웃었다. 주자서가 조금은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쩌면 나는 닳고 닳은 사람일지도 모르겠어. 정말 어디에도 쓸데없는…”
귀왕은 그런 주자서의 몸에 팔을 둘러 안고 말했다.
“알겠어. 내가 비싸게 사주지.”
주자서가 자신의 가슴에 기대오는 귀왕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너는 장사는 하면 안되겠다.”
귀왕이 몸을 일으켜 두사람을 침상위에 제대로 다시 눕힌 다음 주자서의 가슴을 베고 누웠다. 주자서는 물에 젖은 옷이 마르지도 않은 상태에서 씻지도 않고 자는 것이 조금 싫었지만 그냥 귀왕이 하는 데로 두었다. 어쩌면 그냥 긴 꿈일지도 모르겠다. 깨어나면 아무것도 기억에 남지 않을 그런 조금 이상하고 아렴풋한 꿈.


온객행은 자신의 손에 묻은 염귀의 피를 짜증난다는 듯이 닦았다. 닦아내도 닦아내도 더 스미기만 하고 지워지지 않아 화가 난 온객행은 싸늘하게 식어버린 염귀의 시신을 그대로 두고 한담으로 향했다. 한담수옥이라고 불리는 이곳은 돌산으로 이루어진 곳에 고인 물이다. 그 물이 깊고 경공이 높은 자가 아니면 빠져나올 수 없어서 죄를 지은 악귀들의 다리를 잘라 버리는 곳이기도 했다. 그 곳은 사계절 내내 한기가 서리는 곳으로 그 지하에 얼마나 많은 시체가 쌓여 있는지 아는 자는 없었다. 온객행은 노곡주(老谷主)의 손에 의해 이곳에 갇힌 적이 있었다. 항상 속내와 실력을 감추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다는 것은 아무도 몰랐다. 그러다 딱 한번 곡주의 명령을 어긴 적이 있다. 노곡주는 그런 온객행의 내공을 폐하고 한담수옥에 가두었다.

노곡주가 몰랐던 것이라면, 그것은 온객행이 이미 꽤 많은 종류의 독에 내성이 있다는 점이었다. 그 독을 먹인 것은 노곡주였는데 그는 기억하지 못했다. 애초에 다리도 자르지 않고 한담수옥에 가둔 것부터 곡주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온객행은 노곡주의 허술한 행동에 조금 마음을 놓았다. 그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사람이라면 죽일 수 있다. 한담수옥에 있는 동안 온객행은 그 어느때보다 자유롭고 편안했다. 살을 에는 추위는 매일매일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을까 벌벌 떠는 것보다 참을 만했다. 온객행이 노곡주의 살가죽을 벗기는 동안 그는 살아 있었다. 비명을 지르고 울부짖는 그의 모습을 보고 온객행은 묘한 만족감을 느꼈다. 노곡주는 귀곡의 모든 악귀는 자신의 자식이라고 말했다. 어느 아비가 자식에게 살인과 방화를 시킨다는 말인가?

온객행은 핏물이 배어 있는 장포를 입은 채로 한담수옥의 입구로 갔다. 까마득하게 먼 수면위로 먼저 장포를 벗어 던지고 온객행도 곧 몸을 던졌다. ‘풍덩’하는 소리와 함께 수면 아래로 잠겼다. 숨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때까지 가라앉다가 피에 절은 중의도 마저 벗어 버리고 수면 위로 올라갔다. 숨을 힘차게 몰아쉬고 하늘을 보았다. 망(望)이다. 온객행은 밝은 달빛 아래 스스로가 죄스러워서 서러워졌다. 그때 사람의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온객행은 당황해서 주변을 둘러봤지만 보이는 것이 별로 없었다. 숨소리는 곧 물을 가르는 소리가 되고 곧 물속에서 나온 인영이 한담의 가운데에 있는 섬에 닿았다. 누군가 한담수옥에 악귀를 가두었다는 소리는 들은 적이 없다. 하지만 약육강식의 귀곡에서 원한만 있으면 이 곳으로 떨어지는 방법은 수천가지다. 온객행은 대체 어떤 사연으로 이곳에 갇히게 되었는지 궁금증이 일었다. 몸에 묻은 피를 닦아 내고 섬으로 다가갔다.

(1) 자야가 세번째
婉伸郎膝上 何處不可憐
낭군님 무릎에 살며시 누웠으니, 사랑스럽지 않은 곳이 어디 있나요!

(2) 고시십구수 두번째
昔為倡家女, 今為蕩子婦. 蕩子行不歸 空床難獨守.
지난날엔 기생집 여인이었고 지금은 떠도는 나그네의 아내라네. 길 떠난 사내는 돌아오지 않으니, 빈 침상 홀로 지키기 어렵다네

(3) 자야가 열일곱번째
綠攬迮題錦 雙裙今復開 已許腰中帶 誰共解羅衣
나는 비단 겹치마에 녹색 허리띠를 두르고 있는데, 겹치마를 다시 벗어 던지고 이미 허리에 두른 허리띠를 풀어 님 에게 허락했지만, 나와 함께 내 비단 옷을 풀어헤친 사람은 누구였지요?

소리를 길게 끌어 하는 노래

長歌行
장가행 작자미상

靑靑園中葵 朝露待日晞
푸르고 푸른 채마밭의 아욱 아침 해에 이슬 스러진다.
陽春布德澤 萬物生光暉
따뜻한 봄의 은택을 입어 만물은 생기가 넘치고
常恐秋節至 焜黃華葉衰
늘상 걱정하는 가을이 되면 빛나는 국화잎도 시든다.
百川東到海 何時復西歸
백천도 동쪽으로 흘러 바다에 이르는데 나는 언제나 다시 서쪽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少壯不勞力 老大徒傷悲
젊고 혈기 왕성할 때 힘써 일하지 않으면 늙어서는 헛된 삶을 슬퍼하리라!

仙人騎白鹿 髮短耳何長
흰 사슴을 타고 가는 신선 머리는 짧지만 귀는 어찌 그렇게 긴가?
導我上太華 攬芝獲赤幢
우리를 인도하여 태화산으로 올라 영지버섯을 꺾고 적동을 얻었다.
來到主人門 奉藥一玉箱
주인집 대문에 당도해서 선약이 든 옥상자를 바쳤다.
主人服此藥 身體日康彊
주인께서 이 선약을 복용하면 신체는 날로 강건해지며
髮白復更黑 延年壽命長
흰머리는 다시 검게 변하여 만수무강 하시리
岧岧山上亭 皎皎雲間星
높디 높은 산꼭대기의 정자에 구름 사이로 빛나는 별들
遠望使心思 遊子戀所生
멀리서 바라보니 마음이 슬퍼진다. 나그네가 되어 부모님 생각에
驅車出北門 遙觀洛陽城
수레를 몰고 북문을 나가 멀리서 낙양성을 바라본다.
凱風吹長棘 夭夭枝葉傾
남풍은 가시나무를 흔들고 어린 나뭇가지의 이파리가 흩날린다.
黃鳥飛相追 咬咬弄音聲
꾀꼬리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날다가 꾀꼴 꾀꼴 희롱하면서 울어대고
佇立望西河 泣下沾羅纓
서쪽으로 흐르는 강물을 망연히 바라보며 흐르는 눈물 갓끝을 적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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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 만물이 소생하고 아름다운 꽃이 피듯이 사람도 모름지기 한창 때에 즐기고 살아야 하고, 자칫 주저하다가 좋은 때가 다 가버리면 후회하게 된다고 하였다. 명성이나 부귀는 물론 장생불사를 추구하는 것까지도 부정하며 극도의 급시행락(及時行樂)을 주장하지만 그 이면에는 자신의 불우한 인생에 대한 비애를 담았다.

이 시는 곽무천(郭茂倩)의《악부시집》의 《상화가사(相和歌辭)·상화곡(相和曲)》에 실려있는 악부고제(樂府古題)다. 「《고시(古詩)》에서는 ‘장가 진정으로 격렬하네[長歌正激烈(장가정격렬)]이라 했고, 위문제(魏文帝)는 그의 《연가행(燕歌行)》에서 ’단가의 은미한 읊조림 길게 할 수 없구나![短歌微吟不可長(단가미음불가장)]라고 노래 불렀다. 또 서진(西晉)의 부현(傅玄)은 《염가행(艶歌行)에서 ‘문득 장가에다 단가를 잇는다[咄來長歌續短歌(돌래장가속단가)]라고 했다.」따라서 장가행이나 단가행은 노래의 길고 짧음을 의미하지 사람 수명의 장단을 뜻하지 않는다. 출처

상화(相和)란 앞 사람의 선창에 노래 혹은 악기 연주로 화답하는 노래 방식을 일컫는다. 이때는 현악기나 관악기가 사용된다. 상화가사(相和歌辭)는 상화라는 형식으로 가창되는 한대의 민간 가곡인데, 악부 기관에 채집되어 전해지게 되었다.
따라서 상화가사에는 한대 사회의 생활상과 의식 형태가 반영되어 있다. 위(魏)에 와서 조씨 삼부자[조조(曹操), 조비(曹丕), 조식(曺植)]가 애창해 직접 가사를 짓거나 개작해서 궁정 연악으로 사용하면서 점차 경전화(經典化)ㆍ귀족화되었다. 후대의 많은 문인이 상화가사에 대한 모의작을 많이 남겼다. ≪악부시집≫에는 18권이 전해진다. 출처

  1. 곤황(昆熿) : 꽃잎이나 이파리가 시들어 누렇게 됨.
  2. 태화(太華):섬서성 동단의 화산(華山)으로 오악 중 서악이다. 지금의 섬서성 화음현(華陰縣) 남쪽에 있는데 그 서쪽에 있는 소화산(少華山)과 구분하기 위해 태화(太華)라고 부른다.
  3. 람지(攬芝)는 ‘영지(靈芝)를 채취하다’는 뜻이고 적동(적동(赤幢)은배와 수레 위에 걸린 붉은 휘장으로 무지개를 비유했다.
  4. 초초(岧岧):(산과 같은 것이) 높은 모양.
  5. 개풍(凱風):부드럽고 따뜻한 바람으로 남풍이다. 《시경·패풍(邶風)·개풍(凱風》에「凱風自南(개풍자남)/산들바람 남쪽으로부터 불어와, 吹彼棘心(취피극심)/가시나무 새싹을 어루만지네」 라고 했다.
  6. 요요(夭夭):《시경·주남(周南)·도요(桃夭)》에 「桃之夭夭(도지요요)/싱싱하고 파릇한 복숭아나무, 灼灼其華(작작기화)/그 꽃이 활짝 피었네」라고 노래했는데 요요는 나무가 어리고 싱싱함을 뜻한다. 즉 혼기가 차서 복숭아꽃처럼 활짝 핀 처녀의 아름다운 모습이다.
  7. 황조(黃鳥):속명으로 황리류(黃離留) 혹은 박서(搏黍)라고도 하는데 황앵(黃鶯) 즉 꾀꼬리다.
  8. 교교(咬咬):교교(交交)로 새가 우는 소리다. 《시경·진풍(秦風)·황조(黃鳥)》「交交黃鳥 止于棘(교교황조 지우극)/꾀꼴꾀꼴 꾀꼬리, 가시나무에 앉았네」라고 했다.

長歌行 曹植
장가행 조식

墨出青松之煙 筆出狡兔之翰
먹물은 푸른 소나무 연기에서 나오고, 붓은 교모한 토끼의 털로 만들어지네.
古人感鳥跡 文字有改判
옛사람들은 새 발자국에 느낀 바 있어, 문자 모양이 바뀌게 되었네.
尺蠖知屈伸 體道識窮達
잔구(殘句) 한자 되는 진사도 움츠렸다 펼줄 아는데 도를 체득하려면 곤궁과 열달을 알아야하네.


長歌行 李白
장가행 이백

桃李待日開 榮華照當年
복사꽃 오얏꽃, 햇빛 따라 피어나 화려한 자태 제철 만나 빛난다.
東風動百物 草木盡欲言
봄바람이 만물을 흔들어 풀과 나무 모두가 무슨 말을 하려는 듯
枯枝無醜葉 涸水吐淸泉
마른 가지엔 시든 잎 없고 마른 샘도 맑은 물 뿜어낸다.
大力運天地 羲和無停鞭
큰 힘이 온 천지를 움직이는 건 희화(羲和)가 채찍질을 멈추지 않아서지.
功名不早著 竹帛將何宣
공명(功名)을 일찌감치 드러내지 못했으니 죽백(竹帛)일랑 장차 무엇에 쓰겠나.
桃李務靑春 誰能貰白日
도리(桃李)는 푸른 봄에 부지런히 꽃피우니 그 누가 해의 걸음 멈출 수 있으리.
富貴與神仙 蹉跎成兩失
부귀와 신선 우물쭈물하다가는 둘 다 놓치리.
金石猶銷鑠 風霜無久質
쇠와 돌도 닳고 녹아져 흐르는 세월에 견디는 것 없네.
畏落日月後 強歡歌與酒
해와 달의 걸음에 뒤처질세라 애써 노래하고 술을 즐기네.
秋霜不惜人 倏忽侵蒲柳
가을 서리는 인정도 없이 어느 틈에 포류(蒲柳) 같이 여린 몸에 엄습하노니.


동명의 드라마 때문에 검색 난이도가 너무 올라갔다. 모아둔 시가에 설명같은 것을 여기저기 찾아보니 조식과 이백 말고도 여러시대의 시인들이 같은 제목으로 많은 시를 남겼다. 그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단연 이백의 장가행으로 달과 술의 시인이라는 이미지에 걸맞게 달얘기와 술얘기가 나온다. 원작과는 조금 방향성이 다른것 같은 것이 인생의 무상함과 흘러가는 세월을 멈출 수 없음을 노래한것 같다. 뭐 아닐수도 있다 나는 알못이니깤ㅋ

조식의 장가행은 별로 유명하지는 않지만 시가의 첫줄에 나오는 송연묵의 생성 시기를 유추할수 있는 사료 정도의 위치이다. 조식은 장가행의 가장 유명한 구절인 '少壯不勞力 老大徒傷悲' 젊어서 노력하지 않으며 늙어서 고생한다는 내용이 주제이다. 뭔가 시가에서 느껴지는 희망과 포부가 보이는 것으로 보아 조비와의 패권 싸움으로 도성에서 쫒겨나기 전에 쓴것 같다. 정확하지는 않다.

찾아보기 전에는 장가행이라고 하기에 인생의 기나김을 노래하나 했는데, 딱히 그런 뜻은 아니고 당시에 민간에서 유행하던 노래의 한 형태라고 한다. 뉴에이지나 클래식처럼 하나의 음악 장르의 이름인 것이다. 선창하는 노래에 답가를 하는 방식이라고 하니 아마 누군가 첫부분을 부르면 그 다음에 뒷부분을 부르는 형식인것 같다. 첫부분이 젊어서 노력을 하지 않으면 어떡하느냐 라고 물으면 다음 부분에서 고달픈 인생의 슬픔을 노래한다. 사람 사는 세상은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