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영도

哀郢 屈原
애영(영도: 郢都; 초나라의 도읍) 굴원

皇天之不純命兮 何百姓之震愆
명이 무상하여 한결같지 않은 하늘이여! 어찌하여 백성들을 공포와 범죄에 떨게 하는가?
民離散而相失兮 方仲春而東遷
흩어지고 서로 헤어지는 백성들이여! 바야흐로 중춘의 계절에 쫓겨나 동쪽으로 가노라!
去故鄉而就遠兮 遵江夏以流亡
고향을 버리고 멀리 떠남이여! 강수와 하수(夏水)를 따라 유랑하도다!
出國門而軫懷兮 甲之晁吾以行
성문을 나서니 아파오는 가슴이여! 갑일의 아침에 나는 길을 떠나도다!
發郢都而去閭兮 荒忽其焉極
영도를 출발해서 마을 문을 나섬이여! 황망한 마음에 가는 길은 끝이 없도다!
楫齊颺以容與兮 哀見君而不再得
느긋한 마음이 되어 노를 나란히 들었음이여! 애타게 임금님을 만나려 해도 다시 만날 수 없도다!
望長楸而太息兮 涕淫淫其若霰
큰 가래나무를 쳐다보며 탄식함이여! 흐르는 눈물이 싸라기눈처럼 하염없이 흘러내리도다!
過夏首而西浮兮 顧龍門而不見
하수(夏水)의 어구를 지나서 서쪽으로 떠내려감이여! 고개를 돌려 용문을 보려고 했으니 보이지 않도다!
心嬋媛而傷懷兮 眇不知其所蹠
마음이 끌리어도 상처만 받았음이여! 아득히 멀어서 닿을 곳을 모르겠도다!
順風波以從流兮 焉洋洋而爲客
풍파를 쫓아 흐르는 물을 따라 감이여! 이제는 의지할 데 없는 나그네가 되었도다!
淩陽侯之泛濫兮 忽翱翔之焉薄
출렁이는 양후신(陽侯神)의 큰 파도를 탔음이여! 갑자기 하늘 높이 날아올라 머물 데가 어디메뇨?
心絓結而不解兮 思蹇產而不釋
답답하게 맺혀 풀리지 않은 마음이여! 생각이 휘어지고 막혀 트이지 않도다!
將運舟而下浮兮 上洞庭而下江
배를 띄어 하류로 떠내려감이여! 동정호로 들어갔다가 다시 강수로 들어섰도다!
去終古之所居兮 今逍遙而來東
옛날 거처하던 고향을 떠났음이여! 이제 덧없이 길을 가서 동쪽으로 왔도다!
羌靈魂之欲歸兮 何須臾而忘反
아아, 돌아가고픈 내 영혼이여! 어찌 잠시라도 잊을 수 있나!
背夏浦而西思兮 哀故都之日遠
하포를 등지고 서쪽을 생각함이여! 나날이 영도는 멀어져 슬퍼지누나!
登大墳以遠望兮 聊以舒吾憂心
강가 큰 언덕에 올라 멀리 바라봄이여! 잠시 내 시름 부드럽게 풀어보노라!
哀州土之平樂兮 悲江介之遺風
땅 넓고 즐거운 생활 보아도 슬프고 강변의 오랜 풍습 보아도 서럽도다.
當陵陽之焉至兮 淼南渡之焉如
능양 쪽으로 가서는 어디로 가나? 아득히 넓은 강남으로 어디로 가나?
曾不知夏之爲丘兮 孰兩東門之可蕪
하수가 언덕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음이여! 누군들 두 동문을 황폐시킬 수 있으리오?
心不怡之長久兮 憂與愁其相接
마음이 즐겁지 못한 지 오래되었음이여, 근심과 슬픔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도다.
惟郢路之遙遠兮 江與夏之不可涉
영도로 가는 요원한 길이여! 강수와 하수는 건딜 수 없도다!
忽若去不信兮 至今九年而不複
떠나 있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음이여, 지금까지 9년이 되도록 돌아가지 못하도다.
慘鬱鬱而不通兮 蹇侘傺而含戚
마음 아프고 답답해도 트이지 않아, 아! 실의에 차서 슬픔을 머금고 있도다!
外承歡之汋約兮 諶荏弱而難持
겉만 화려하게 곱게 보이면, 진정 나약한 마음 지탱하기 어렵도다.
忠湛湛而原進兮 妒被離而鄣之
충직한 진심 지니고 나아가 헌신하고 싶은 현인들이여! 질투하는 사람들 몰려와 방해하도다!
堯舜之抗行兮 瞭杳杳而薄天
고결한 품행의 요순 임금이여! 너무나도 높고 맑아서 하늘에 닿았도다!
眾讒人之嫉妒兮 被以不慈之偽名
참언하고 질투하는 사람들이여! 자애롭지 못하다는 이름을 얻게 했도다!
憎慍惀之修美兮 好夫人之忼慨
온화한 내 품성을 싫어하는 사람들이여! 저 사람들의 분개하는 사람들만 좋아하도다!
眾踥蹀而日進兮 美超遠而逾邁
거침없이 날로 나아가는 사람들이여! 착한 사람들은 저 멀리 떠나가는도다!
亂曰
그래서 사람들이 노래하기를
曼餘自以流觀兮 冀壹反之何時
내 눈을 멀리 돌려 둘러봄이여! 한번 돌아갈 수 있는 때가 언제일까나?
鳥飛反故鄉兮 狐死必首丘
새들은 날아서 고향으로 돌아가고, 여우는 죽을 때 머리를 옛 살던 언덕으로 돌린다는데
信非吾罪而棄逐兮 何日夜而忘之
진실로 내가 쫓겨난 것은 죄를 지어서가 아니어서 낮이나 밤이나 어찌 고향 땅을 잊을까?


이 시는 굴원이 장강 남쪽으로 추방되었을때 쓰여진 부(賦)인데 추방당한게 처음이 아니었다. 굴원은 왕족이어서 다른 사람들보다 벼슬하기 쉬웠을텐데 그의 시나 일화를 보면 여러모로 대쪽같은 사람이었나보다. 부러질 지언정 휘어지지 않는 그래서 굴원을 시기하고 미워하는 왕족 귀족이 많았다고 한다. 9년이 되도록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구절을 보면 꽤 오랫동안 축객령으로 강남 일대를 전전했던것 같은데 이 시가 쓰여진 시기 즈음에 초경양왕 (楚頃襄王)이 백기에게 공격당해 영도(郢都)를 빼앗겼다는 소식을 듣고 영도가 그리워서 지었다는 설이 제일 유력하다고 한다. 그런것에 비해 영도의 참상에 대한 설명이 없는거 보면 어서 듣고 그런거겠거니 추측하는 것이다.

역사적 사실을 빗대어 봤을때 초나라의 쇠락은 어쩌면 굴원 이전부터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백기라는 인물이 정말 사람 몇백명에 맞먹는 아주 걸출한 장수였던 것도 사실이고 재미있게도 진나라를 부흥시켰던 사람들의 대부분이 초나라 출신이다. 초나라는 귀족주의가 아주 강했는데 너무 많은 황족과 귀족 게다가 자질없는 왕이라는 악재가 겹치고 겹쳐서 결국 망한다. 백기도 초나라의 왕족이었고 굴원 역시 초나라의 왕족이었는데 초나라에서 대접받지 못하고 하나는 다른 나라에 가서 활약하고 하나는 충절을 버리지 못하고 여기저기 떠돌게 된다.

축객령을 받아 떠나는 추방길을 유랑이라고 부르고 원망은 하지만 미워하지는 않는 그의 표현은 너무나도 섬세하고 여성적이라 혹시 굴원은 여자가 아니었을까 하는 그런 의심을 하곤 한다. 쫓겨나서 서러운 마음은 보통 여인들의 흔한 감정이었기 때문일까? 얼마나 많은 재능있는 여성들이 시도조차 해보지 못하고 스러졌을까 생각하면 또 답답한 부분이기도 하다. 동아시아 전반적인 문화중에 가장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분명 다른 고대 사회보다 인구가 넘쳐났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재능있는 인재를 어째서 한 성별에만 몰아 줄 수 있지? 심지어 유전적으로 부족한 그 성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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