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예진의 세 문장 : '고작 이런 일로 기죽지는 않는다.', '잘못했어요.', '생각해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예진은 오늘 이상하게 들떠서 금릉 시내 이곳 저곳을 돌아다녔다. 기왕야와 만나 음방에가서 음률을 듣기도 하고, 요즘 작곡하고 계시다는 곡도 들어 보았다. 날이 어두워지자 기왕야는 예진이 걱정된다며 친히 마차까지 내주셨다. 예진은 사양하지 않고 감사하다며 그 마차를 타고 집에 돌아 왔다.
하루종일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게 가버렸다. 혹시나 기별이 와있을까 싶어 도관에 얼굴을 비추고 참배를 드린 후 내실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른 날과 크게 다르지 않게 하루를 보냈으나 다른 날과 달랐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어제 경예가 인사도 없이 천천산장으로 가버렸기 때문이다.
분명 어제, 오늘은 함께 말을 타고 강가에 나가서 초식을 겨뤄보거나 오랜만에 근처에 있는 산사까지 말달리기 시합을 하자고 해서 아침 댓바람부터 들떠서 녕국후부에 갔지만, 조찬을 들던 사필이 아침 일찍 경예가 금릉을 떠났다고 말했다.
예진은 허탈하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하여 언제와도 같이 그냥 웃어 버렸다.‘고작 이런 일로 기죽지 않는다.’ 헤어지고 기다리는 것만큼 예진이 잘하는 것도 없었다. 무슨 일이 있었겠지 나중에 돌아오면 알아서 ‘잘못했어요’하며 미안해 할 것이다. 그리고는 경예가 있는 동안 발걸음이 뜸했던 기왕야 소택을 찾아 가게 된 것이다.
도관에서 내실로 연결되는 안뜰을 천천히 걷던 예진은 순간 이상한 것을 발견한다. ‘고작 이런 일로 기죽지 않는다’라 예진은 경예가 금릉을 떠나는 일이 스스로가 기죽을 일인가에 대해 생각했다.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따로 알리지 않고 갔다고 하여 섭섭하거나 아쉬운 것일까? 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생각했던 것일까? 곰곰히 생각하던 예진은 다시 도관으로 발걸음 했다. 참선을 해볼 참이었다. 비웠다고 생각했던 마음에는 항상 소경예가 남아있다.
경예진의 세 문장 : '그 미소는 나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아직은 아니야.', '견딜 수 있겠어?'
예진은 한없이 가벼웠다. 즐거운 일도 행복한 일도 언짢은 일도 어려운 일도 마음에 두지 않았다. 마치 언젠가 모든 끊을 끊어내고 훨훨 날아갈 듯 가벼웠다. 그렇기에 그는 한없이 헤프기도 했다.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서슴없이 내어 달라고 말하기도 하고, 또 누군가 스스로를 마음에 들어하면 똑같이 서슴없이 내어 주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예진은 마음에 담으려고 하지 않았고, 그 작고 소소한 다름은 소경예만이 볼 수 있었다. 그는 예진과 달리 모든 것을 마음에 담아 두었기 때문이다. 한없이 가벼운 예진이 부러워 그를 곁에 두었고 어느 순간 경예는 예진의 마음에 들어가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경예는 생각했다. 지금 제 앞에서 화사하게 웃으며 차를 마시는 언예진의 저 미소는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니다. 텅 빈 의미 없는 저 미소, ‘그 미소는 나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예진은 무엇이든 열심히 하지 않았다. 그저 하고 싶을 때 까지만 혹은 할 수 있을 때 까지만 했다. 눈치도 빨라서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잘 헤아리고 읽었다. 근데 그런 그가 유독 소경예의 마음은 읽지 않는 것인지 모르는 것인지 항상 헤집어 놓곤 했다. 언젠가는 강가에서 뱃놀이를 하다가 물에 빠지려는 것을 구해 놓았더니 속 없게 웃으며 말하는 것이다.
“강물에 비치는 색이 어찌나 고운지 혹시 들어가면 더 잘 보일까 해서 저도 모르게 몸이 기울었나 봅니다.” 그리고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지 않았다. 경예는 그 이후로 가끔 언예진의 가벼운 행동이 두려워졌다. 혹여 그를 남겨두고 훨훨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아서.
그러다 어느 날은 경예가 취하여 저도 모르게 ‘아직은 아니야’ 아직은 아니네 라며 예진을 붙잡고 한탄을 하는 날이면 예진은 또 아무것도 모른 다는 듯이 화사하게 웃었다. 그리고 경예가 정신을 놓는 것을 확인한 예진은 경예의 얼굴가로 손을 가져가며 “견딜 수 있겠어?” 라고 물었다. 예진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다. 닿을 듯 말듯 했던 손은 결국 닿지 않았고 예진은 마차를 불러 경예를 녕국후에 데려다 주었다. 그리고 다음날 다시 밝게 웃으며 소공자를 놀리겠지, 마치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앞으로 다가올 비바람에 그가 잘 견뎌주길 바라며.
오로지 너만이 알고 있는것 같아
도관에 앉아 차를 마시며 참선을 시도하는 것은 예진의 버릇이다. 머리와 마음을 가끔 비워주어야 다시 채울 것이고, 모든 것이 새로울 것이기 때문이다. 예전과 달리 요즘은 경예가 금릉에 머무르기에 이런 시간을 자주 갖지 못했지만 늦은 시각, 시비들도 모두 잠들어 어두운 그때 눈을 감고서도 찾을 수 있는 도관을 향한다.
어린시절 예진은 항상 도관에 계시는 아버지를 뵙기 위해 어두운 밤눈을 불구하고 내실에서 멀리 떨어져 일각을 걸어야 보이는 언후부 도관에 찾아가는 일이 많았다. 할아버지인 선대 언후께서 그 때문에 걱정이 많으셨는데, 예진과 항상 그 밤길을 걸어 주시곤 하셨다. 그리고 도관에 앉아 참선하는 법을 알려 주셨는데, 항상 선대언후의 품에 안겨 침소로 돌아오는 일이 많았다.
원망하는 마음은 본인만 힘들고 아프게 한다는 것을 잘 알았던 선대언후는 예진에게 항상 마음을 비우라 하셨다. 마음이라는 것은 차고 넘칠 수록 흐르고 비어 있을 수록 움직임이 없다고 말씀하셨었는데, 예진도 이제 조금은 그 뜻을 알것 같았다.
요즘들어 부쩍 소경예의 장난이 심해졌다. 마치 어릴 적 임수형님을 보는 듯, 먼저 농을 걸어오거나 시비를 걸어 오는 것이 티를 내려 하지 않았으나 예진의 마음이 비추는 것 같아 식겁했다.
"오로지 너만이 나를 알고 있는 것 같아"
조금만 더 가까이 다가오면 모든 것이 꿰뚫어져 삼켜질것 같았다. 소경예의 눈은 어느 때보다 날카로운데 손길 만큼은 다정했다. 어깨위에 둘러지는 팔이라던가, 손이라던가. 가끔 발을 헛디뎌 넘어지려 할 때마다 잡아주는 손이나, 걸을 때 등 허리에 가있는 손 같은 것들이 참 다정했다. 예진은 그의 그 다정한 손길이 좋았다. 예진이 다정하게 살갑게 굴었으면 굴었지, 누구든 먼저 다가와 다정히 굴어주는 건 경예뿐이었다. 그만큼 예진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때문에 두려운 이 마음, 그것이 오늘 언예진이 도관에 발걸음해 비우려는 마음이었다.
경예진의 세 문장 : '과연 가능할까?', '그리움에 흠뻑 젖은 몸이 무거웠다.', '그리고 의식을 잃었다.'
예진은 한번도 소공자를 욕정의 대상으로 생각한 적이 없었다. 사실 필이를 질투하면서 꼭 저런 형님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더 많이 생각했다.
그러다 경예가 양인으로 형질 발현하고 곧 옥구슬 굴러가듯 간드러지던 목소리가 낮게 변했다. 키가 점점 커지고 몸도 불어나더니 금방이라도 관을 올릴 것만 같이 변했다. 그런 경예가 낯설어 예진은 경예와 거리를 두었는데 그때 즈음에 경예가 천천산장으로 떠났다.
다시 경예가 돌아왔을 때는 마지막에 보았던 경예보다 훌쩍 자라 있어서 필이조차 어색해 했다. 그래도 그 다정다감한 성격은 그대로 인지라 필이도 예진이도 곧 다시 예전처럼 지내게 되었다. 그렇게 계절이 바뀌고 경예가 관을 올렸다.
그 다다음해에 경예가 천천산장에 가 있을때 필이도 양인으로 형질 발현했다.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았다는 소식에 예진은 필을 만나기 위해 녕국후부에 들렀다.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계절이 지나 예진도 관을 올렸다. 오랜만네 뵙는 아버지는 좀 더 여윈것 같다. 예식이 끝나고 이것저것 필요한 것은 없느냐고 물으신 뒤에 곧 뒷채에 있는 서재로 발걸음을 옮기셨다. 바로 도관으로 훌쩍 떠나실 줄 알았던 예진은 비록 혼자 안뜰에 남겨졌지만 좋았다.
경예는 필이가 관을 올릴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올린 머리를 보여주고 싶었으나 보여줄 사람이 오지 않아 예진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기다리는 동안 예진은 글공부도 더 했고 금 타는 것도, 수련을 하는 것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해가 지나 경예가 돌아왔는데 이제 소년태를 벗고 남자다웠다. 강호를 돌아다니며 보고 들었던 이야기를 예진과 필에게 들려주곤 했는데, 필이는 그것이 질투나 금방 토라져 가버리곤 했다.
결국 남은 예진과 경예는 도란도란 이야기 꽃을 피우다 강구경도 갔다가, 시장에도 갔다가 날이 좋으면 한동안 그렇게 붙어 다녔다. 그리고 예진은 경예에게 그동안은 느끼지 못했던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항상 형님같이 자상하고 다정한 경예가 친우로써의 감정이 아니라 애인에게서나 느낄법한 애틋함과 간절함을 느끼게 되었다.
멀리 있으면 보고 싶고 만나면 닿고 싶고 괜히 더 만지고 싶은 그런 느낌이 예진을 괴롭혔다. 그리고 그 마음은 단순한 연정에 그치지 않고 욕정으로 그 크기를 부풀린 것이다.
경예가 강호로 떠나기로 정해진 날 예진은 경예의 손이며 어깨며 일부러 몸을 붙여왔다. 경예는 예진이 떠나는 것이 아쉬워 그러려니 하여 마주 잡아주거나 마주 안아주었는데 그때마다 예진은 경예의 품에 얼굴을 비비며 경예의 냄새를 맡았다.
예진은 경예를 대상으로 욕정하는것이 과연 가능할까 생각했었지만, 그것은 의외로 너무나 쉬웠다. 그날 예진은 처음으로 수음을 했다. 예진의 입가에 소공자의 이름이 걸려있었으나 그것이 떨어지진 않았다.
경예가 천천산장으로 가는 날 예진은 경예를 배웅하거나 이별의 말을 전하지 않았다.그럴 수 없었다는 게 더 맞을 것이다. 예진은 소공자를 볼 낯이 없었다.
무더운 한여름 날도 화창하고 습하지 않아 바깥 나들이 하기 딱 좋은 날씨였다. 예진은 추웠다. 몸에 따뜻한 이불을 휘감아도 떨쳐지지 않는 서늘한 기운은 예진의 형질 발현을 위한 전초증상이었다. 그리움에 흠뻑 젖은 몸이 무거웠다. 국구부는 조용했다. 그렇게 예진은 음인이 되었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언국후가 집으로 돌아와 예진을 살폈다. 이후 금릉에 예진의 소식이 퍼지고 곧 양나라 곳곳에서 예진에게 혼담을 넣어왔다. 하지만 언국후는 곧 도관으로 돌아가 버렸고 왕래하던 혼담도 그렇게 흩어져 버렸다.
예진은 음인으로 발현된 후 유모와 의원에게 음인으로써 가져야 하는 행실과 몸가짐을 배우느라 바빴다. 무엇보다 체향을 조절하는 법이나 스스로를 다스리는 법을 배워야 했는데 예진에게 그것이 쉽지 않았다.
의원은 어려워하는 예진을 보며 걱정했으나 크게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예진이 스스로를 다스리는 법에 익숙해질 즈음 의원은 언국구가 계신 도관에 다녀왔다.
예진이 모든 걸 훌훌 털고 일어나기까지 꼬박 한 달이 걸렸다. 다시 경예가 금릉으로 돌아왔을 때는 예진에 대한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었다. 이런 소문들은 와전되고 와전되어 죽었다 거나 혹은 다른 나라의 높으신 분의 첩이 되었다더라하는 종류였다.
그 소문을 들은 경예는 부모님께 안부 인사를 올리자마자 바로 국구부로 향했다. 가는 길 내내 경예는 소문이 사실이 아닐 거라는 것은 알았지만 이내 걱정하고 있는 자신의 속내를 어쩌진 못했다.
예진은 집안에만 있는 것이 답답하기도 했고 아버지의 엄명으로 손님을 받는 것도 극히 제한되어 심심해 하고 있었다. 여름의 끝자락에 날씨는 점점 선선해지고 국구부로 들어오는 과일도 늘었다. 이런저런 짐짝이 들어오는 것을 바깥 뜰에서 구경하고 있던 예진이 문 앞에서 실랑이 하는 경예와 시비를 발견했다.
“송구하오나 언국구어르신께서 어르신이 돌아오시기 전까지는 손님을 들이지 말라 하셨습니다.”
그것을 묵묵히 보고만 있으려니 예진은 잔뜩 심통이 났다. 언국후의 처사가 틀린 것은 아니었으나 금족령이나 다를 바 없으니 손님도 들이지 말라는 말씀에 예진의 속이 상하는 것은 당연하다.
“오랜만에 금릉으로 돌아왔으니 잠시 얼굴만이라도 볼 수 있게 해주시게.”
경예의 목소리가 들린다 . 예진은 그 자리에 한참 동안 앉아서 실랑이 하는 소리를 듣고 있다가 곧 대문 쪽으로 나갔다. 아직도 집안으로 짐이 들어오고 있는 중이라 문이 활짝 열려있었다.
“얼굴만 보는 거라면 굳이 꼭 들어와서 봐야 하는가? 아버님의 말씀 때문에 밖으로 나가지는 못해도 이렇게 문간에 서있는 것 까지 뭐라 하시겠나?”
시비는 곤란한 듯 예진에게 어서 들어가시라고 재촉했으나 예진은 방실방실 웃으며 경예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언제 돌아왔냐며 반갑게 인사했다. 무슨 잘못을 했는지 금족령 때문에 밖에 나가지 못해 좀이 쑤셔 죽겠다는둥 우는소리를 좀 하자 곧 유모가 나왔다. “중추절에는 돌아오실 테니 그때 보세” 라고 말하는 예진을 끌고 들어가 버렸다.
그 일이 일어나는 동안 경예는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저를 보고 웃는 예진을 보느라 넋을 잃었다.
경예는 코끝을 간질이는 귤향이 이르다고 생각했다. 벌써 귤이 나는 철이던가 생각하던 경예는 예진이 예전과 달라짐 없이 밝고 활기찬 것을 확인하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중추절이 되기 몇 주전에 언국구께서 귀한 약재와 귀중한 과일들을 챙겨 돌아오셨다. 예진은 예를 갖추어 인사하며 제발 밖에 나가게 해 달라고 간곡히 청했다. 거의 3개월 넘게 밖에 나가지 못한 것을 가엽게 여긴 국구는 미시를 넘기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외출을 허락했다.
다음날 예진은 신이 나서 아침 일찍 일어나 문안 인사를 드린 후 아침도 거르고 녕국후부로 갔다. 그 소식을 들은 경예는 예진을 몹시 반가워하며 맞이했다.
“금릉에 돌아온 지 벌써 한 달도 넘게 지날 동안 못뵈었더니 얼굴을 잊을뻔 했습니다. 언공자!”
예진은 저를 반겨주는 경예의 표정이 밝아 기분이 좋았다.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으며 간단한 요기를 한 두 사람은 날이 더 추워지기 전에 강가에나 들르자며 말을 부탁했다. 오랜만에 승마를 한 예진이 신이 나서 빠르게 달렸고 빠른 예진의 속도를 맞추느라 경예도 속도를 냈다.
평소보다 더 빨리 도착한 강가 근처를 말을 타고 걸으며 흐르는 강물과 알록달록 예쁘게 물든 풍경을 구경했다. 침묵이 길어지자 경예는 그 침묵을 깨기 위해 일부러 말을 강가 쪽으로 몰았는데 예진이 그것을 보고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경예 뭐하는 겐가? 그러다 물에 빠지겠어 어서 나오게.”
경예는 그 모습이 재미있어 일부러 더 깊게 들어갔고 곧 신발에 물이 닿았다. 그것을 본 예진은 덜컥 겁이나 경예 쪽으로 손을 뻗었는데, 중심을 잡지 못하고 그대로 강물 쪽으로 철퍽 떨어져 버렸다.
“예진! 예진! 괜찮은가?”
경예는 얼른 말에서 내려 예진을 살폈다. 주인 잃은 말은 곧 겁을 집어먹고 마을 쪽으로 달려가 버렸다. 강물이 찰박찰박 떨어진 예진의 몸을 흔들었다. 그리고 의식을 잃었다.
경예진의 세 문장 : '뒤돌아선 그의 귀가 붉어져 있었다.', '그는 얄미울 정도로 여유로웠다.', '이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머리부터 떨어진 예진은 특별히 다른 곳에는 이상이 없었다. 하지만 그 일로 3일이나 정신을 잃은 채로 지냈고 게다가 찬물에 빠져서 인지 나중엔 열까지 올라서 위험했었다. 옆에서 지켜보는 경예만 괜히 미안해 자리를 뜨지 못했다. 그렇게 꼬박 한 달을 요양하고 첫눈이 내릴 즈음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예진이 앓는 동안 경예는 한시도 옆을 떠나지 않고 간호해 주었는데 문득 예진이 어릴 적 자주 병치레 하던 것이 생각났다. 본디 건강하게 태어나지도 못했을 뿐더러 어미의 손을 타지 못하고 유모손에서 자라 많이 약했던 예진이었다. 괜히 자신 때문에 다친 것 같아 경예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경예진의 세 문장 : '이제는 그만 쉬고 싶었다.', '너만 아니었어도.', '바보 같기는.'
급하게 말을 달리는 소경예는 사실 ‘이제는 그만 쉬고 싶었다.’ 천천산장에서 금릉으로 돌아가는 길은 언제나 급했다. 예의바르고 착한 소공자는 금릉으로 돌아갈때 제일 차갑고 단호했더랬다. 사실 소경예는 자신이 금릉으로 돌아가는 길을 재촉하고 서두른다는 것을 잘 몰랐다. 언젠가 강호인에게 길안내를 위해 함께 금릉으로 돌아올때 그자가 경예에게 왜이리 서두르냐며 타박아닌 타박을 해대서 알게 되었다.
금릉에 기별을 넣고 말을 달려 꼬박 일주일이 넘게 걸리는 길을 경예는 혼자서 여행하기 된 다음부터 항상 5일안에 그 거리를 주파했다. 처음 그렇게 했다가 말에 병이나 시종이 애를 먹은 이후로는 돌아오는 길 중간중간에 있는 역참을 이용해 말을 바꿔 달렸다. 금릉 성곽이 보이고 길이 사람들로 북적이기 시작하면 그때 고삐를 느슨히 쥐고 쉬었다. 금릉에 도착할때 즈음엔 이미 바삐온 기색따윈 모두 갈무리하고 느긋한 소공자가 말을 걸려 들어오는 것이다.
오늘은 가는 길에 있는 마을에 들려 말을 갈아타고 밤새 달리면 내일 저녁즈음엔 금릉에 도착할것 같았다. 마을이 가까워 오자 길에 오가는 사람들이 많아져 어쩔수 없이 속도를 줄일수밖에 없었다. 소경예는 근처 역참에 들러 말을 바꾸고 간단히 요기하기 위해 근처 노점에 앉았다. 소경예는 자신이 왜이리 서두르는지 알고 있다. 머리속에 떠오르는 해맑은 웃음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푸스스 웃어버렸다. ‘너만 아니었어도…’라고 생각하며 만두 몇개를 집어 먹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마을 입구까지 바꾼말을 달래며 근처 노점상을 구경했다. 혹여 예진이 좋아할만한것이 없나 살펴보던 경예는 내심 생각했다. ‘바보같기는..마음에 언예진만 있어서 모든것이 언예진 위주로구나’ 한숨 쉰 경예는 마을 입구쪽으로 걸어 나갔다. 길끝에 해가 걸려있다. 말 머리를 쓰다듬던 경예는 한번에 올라타 다시 내달리기 시작했다. 금릉을 향해서, 그의 마음을 향해서.